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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蚩尤)- 전쟁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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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662회 작성일 13-01-14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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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인물로 구려족(九黎族)의 우두머리로서 황제(黃帝)와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전투에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중국과 한국에서 ‘전신(戰神)’이나 ‘병기의 신(兵主神)’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중국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인물로 <사기(史記)>, <산해경(山海經)>, <상서(尙書)>, <전국책(戰國策)>, <국어(國語)>, <예기(禮記)>, <일주서(逸周書>, <태평어람(太平御覽)> 등의 문헌에 그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문헌에 따라 전승되는 내용에 차이가 있다.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농씨(神農氏)의 세력이 쇠퇴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각지의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하지만 치우(蚩尤)는 세력이 막강해 정벌할 수 없었다. 황제는 세력을 정비하여 우선 판천(阪泉)의 전투에서 염제(炎帝)를 복속시켰다. 그리고 치우가 굴복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자 군사와 제후를 모아 탁록(涿鹿)에서 전투를 벌여 치우를 죽이고 마침내 신농씨를 대신해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산해경(山海經)>에는 황제와 치우가 싸운 곳이 기주(冀州)이며, 치우가 먼저 황제를 정벌해 왔다고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산해경>에 따르면, 치우가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쳐들어오자, 황제는 응룡(應龍)으로 하여금 기주(冀州) 들판에서 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응룡은 물을 가두어 치우를 막으려 하였으나, 치우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청하여 큰 비바람이 몰아치게 하였다. 황제는 천녀(天女)인 발(魃)을 보내 비를 멈추게 하여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이 때 치우를 묶었던 차꼬와 수갑에 묻은 피에서 붉은 단풍나무(楓木)가 자랐다.


그리고 ‘급총주서(汲冢周書)’라고도 불리는 <일주서(逸周書>에는 치우가 적제(赤帝, 炎帝)를 공격해오자, 적제가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둘이 힘을 합하여 치우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기록에 따라 내용의 차이가 있지만, 치우와 황제의 전쟁은 중국 건국 신화의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한족(漢族)이 스스로를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이라고 표현하듯이 황제와 염제의 부족이 연맹을 이루어 치우가 이끌던 구려(九黎)의 부족연맹을 격퇴시킨 과정은 중국의 고대 국가 성립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또한 오늘날에도 구이저우성[貴州省] 등지에 주로 분포하는 먀오족[苗族]은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기며, 단풍나무 숭배 등 치우와 관련된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치우 신화는 일반적으로, 황제와 염제로 상징되는 화하족(華夏族)과 치우로 상징되는 남방부족 사이의 대립이 표현된 것으로 해석된다.


치우는 전설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짐승의 몸을 하고, 머리는 구리, 이마는 쇠로 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하며, 바람과 비, 안개 등을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81명이나 72명의 형제가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그가 거느렸던 부족의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황제와의 전쟁에서 치우는 도깨비와 요괴를 거느렸다고 표현될 정도로 전투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때문에 예로부터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전신(戰神)’이나 ‘병기의 신(兵主神)’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따르면 진시황(秦始皇)이 8신(神)에게 제(祭)를 지낼 때, 1일과 2일에 각각 하늘과 땅을 관장하는 천주(天主)와 지주(地主)에게 제를 지내고, 3일째에 군병(軍兵)을 관장하는 병주(兵主)인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패공(沛公)으로 칭하면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풍습은 후대에도 이어져 <송사(宋史)> 등에도 출정(出征) 등을 앞두고는 치우에게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치우를 병주신(兵主神)으로 숭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용어하도(龍魚河圖)>에 따르면, 치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천하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황제는 치우의 형상을 그려 위세를 보였으며, 이에 모두가 다시 복종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치우의 형상이 다양한 문양으로 그려져 민속에서 폭넓게 나타나게 된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중국의 고대 천문학에서는 꼬리가 굽어 깃발처럼 보이는 꼬리별[彗星]을 ‘치우기(蚩尤旗)’라고 하여 그 별이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사기(史記)>의 ‘천관서(天官書)’에는 뒤가 상아모양 깃발(象旗)마냥 굽어 있는 치우기 혜성을 보면 사방(四方)에 정벌(征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치우기의 관측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치우를 전신(戰神)으로 숭배하던 풍습과 관련되어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 이후 치우를 자민족의 역사와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조선 숙종 원년인 1675년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 치우는 환웅(桓雄)의 명에 따라 황제와 탁록에서 전쟁을 벌여 승리하여 여러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연수(桂延壽)가 1911년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는 치우가 환웅이 세운 신시국의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으로 황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회대(淮岱)와 기연(冀兗)의 모든 땅을 신시의 영토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두 책 모두 위서(僞書) 논란과 함께, 학계(學界)에서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평가되지 않으며, 사대주의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비판하고 단군 중심의 민족주의적 역사 의식을 고취하는 데 목적을 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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