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때 진나라의 군사들이 적군의 수급에 메달렸던 이유 > 춘추전국

전국 때 진나라의 군사들이 적군의 수급에 메달렸던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4,098회 작성일 10-07-08 14:13

본문


진나라는 효공(孝公 : 재위 전 362-338년) 때부터 법가사상가의 지도 아래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의 운용제도과 군제(軍制)에 대해 혁신적인 개혁을 행해 천하의 쟁패전에 뛰어든 이래 몇 대에 걸친 군주들의 노력에 의해 결국은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했다. 겸병전쟁 수행 중 상대국 군졸들의 목을 베는 행위는 일상적인 현상이 되었으며 진한(秦漢) 교체기에 이르러서도 진나라는 사술과 무력을 숭상하는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나라로 인식되었다. 전국시대 말 저명한 유세가인 노중련(魯仲連)은 이미 진나라를 예의를 버리고 무공만을 숭상하는 나라라고 확실히 지적한 바가 있다. 진나라 군사들의 적군에 대한 참수행위는 청나라 때 사가 양옥승(梁玉繩)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진나라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과정 중 참수한 적군의 수효는 약 166만 8천 명에 달한다고 했다.

“ 사서(史書)에 누락되어 기재되지 않은 경우는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고, 고대로부터 적군을 참수하는 일은 많았다고 하나, 진나라처럼 전적으로 적군의 수급에 매달린 나라는 없었다.”

진나라가 참수한 적군의 수효가 170만 좌우라고 한 양옥승의 통계는 다른 학자들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산업시대 이전의 시대는 생산성이 낮아 인구의 많고 적음이 나라의 강하고 약함을 결정했다. 그래서 상대국 백성들을 잡아와 자국의 노동력으로 이용하는 것이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 중 하나였다. 군대는 한 나라가 소유하고 있는 인구의 정화(精華)로써 적군을 무찌르고 잡은 전쟁포로를 본국의 군대에 포함시키거나 노예로 삼는 것일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진나라는 그런 일반적인 행위를 따르지 않고 군공(軍功)을 이용한 작위(爵位) 제도를 실행했다. 적군의 수급을 얻는 것을 독려하여 그 수량에 따라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공의 결정하고 그에 따르는 부귀와 신분을 보장했다. 그럼으로써 진나라는 참수행위를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육국에 대한 겸병 행위를 보다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1. 진나라가 참수행위를 독려한 원인




전국칠웅 중 오로지 진나라만이 참수행위를 숭상했던 이유는 대체적으로 3가지 이유에서 였다.




첫째는 진나라 군주들의 강열한 의지의 반영이고,

둘째는 군공(軍功)과 작위(爵位) 제도 때문이며,

셋째는 이익(利益)과 무를 숭상하는 민풍에 기인한 것이다.




먼저 진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모두 제후의 신분을 벗어나 천자나 제왕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진나라는 변방에 치우쳐 중원의 문화에 대해 낙후된 지역에 위치해 있다가 서주 말에 이르러 비로소 관중 지역으로 이주하여 목축업을 생업으로 삼아 생활했다. 유목민들은 무력을 숭상했음으로 진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용감했고 그들이 기르는 말들은 중요한 군사자원이었기 때문에 상왕조나 주왕조의 통치자들은 진나라의 강한 군사력을 자기들의 토치기반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일찍이 순임금 때 진나라의 선조 대비(大費)는 조수(鳥獸)를 훈련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통치기간 중 그들 선조 중 단지 7명의 지도들만이 재능과 힘으로 상왕조과 주왕조의 왕들을 위해 양마(養馬)의 직으로 복무할 수 있었을 뿐이다. 왕실의 가신 신분으로 당시 상왕조와 주왕조의 귀족사회를 이루는 핵심계층의 독점울이며, 더욱이 그들의 예악(禮樂)을 근저로한 신비감으로 충만한 중원문물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동경한 중화문물의 내용은 단지 예악문화의 표면적인 형식에 한했다. 그래서 진족(秦族)들은 왕실에 오락을 제공하고 군역에 복무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일이었다. 진족들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얻는 데는 품행과 공덕을 쌓은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윽고 서주가 망하고 동천할 때 진양공(秦襄公)은 주평왕(周平王)을 호송하여 동주왕조의 창건을 도왔다. 그때서야 비로소 진족의 수장 지위는 가신의 신분에서 제후의 반열에 올라서서 중원의 제후들과 같은 신분으로 왕래를 할 수 있었다. 춘추시기 주왕실이 더욱 쇠미해지자 패자를 칭하는 일이 제후들이 추구하는 정치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패자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던 진목공(秦穆公) 또한 활기차게 시도했다. 그는 진나라의 온 국력을 집중하여 중원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으나 당시 패권국 진(晉)나라에 의해 좌절되고 결국은 서융(西戎)의 패자만으로써 만족해야 했다. 진나라의 동쪽 여섯 나라는 진나라를 이적(夷狄)의 나라로 여겼기 때문에 항상 진나라의 동진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했다. 진목공이 죽을 때 시작된 순장제도로 말미암아 내정이 혼란해진 진나라는 계속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가 전국시대 헌공(獻公) 때에 이르자 비로소 나라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진목공은 기원전 621년에 죽었고 진헌공은 기원전 385년에 군위에 올랐다. 진헌공은 통일천하에 대한 야망을 품은 영명한 군주로 진나라가 진목공 사후 중권제후국에 비해 낙후되었던 가장 고질적인 악습이었던 순장제도를 폐지했다. 목공이 죽을 때 진나라의 대소 신하 177명에 대해 순장을 행한 이래로 그 후계자들은 계속 그 제도를 답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헌공의 뒤를 이은 효공(孝公)은 진나라가 옹주(雍州)에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중원의 제후국 군주들에 의해 이적으로 대우를 받아 회맹을 초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조종(祖宗)으로 받들던 진목공의 공업을 본받아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효공은 상앙을 임용하여 변법을 시행해서 진나라의 모든 부문을 크게 개혁했다. 그 결과 크게 증강된 국력은 진나라가 산동의 육국을 병탄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로 진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왕호를 칭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결과 진혜문왕(秦惠文王) 대에 이르러 그의 재위 14년에 드디어 왕호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진무왕은 “ 과인이 수레를 타고 삼천을 통과하여 주왕실을 엿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무왕의 뒤를 이은 진소양왕(秦昭陽王)은 기원전 288년은 스스로 제호를 사용했으며 진시황 대에 이르러 황제를 칭했다. 진시황은 태산에 봉선(封禪)을 행하고 전국을 순행했으며 지나가는 곳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웠다.

진나라의 역대 군주들은 제왕의 업을 이루는 것을 갈망한 나머지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제왕의 업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과감하게 시도했다. 진효공은 상앙이 제출한 부국강병이 치술에 대한 4가지 방안 중 강국을 이루어내는 통치술에만 흥미를 보였다. 상앙을 임용하여 법가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개혁을 실행하고 천하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통합하는데 목적을 두고 농사와 전투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 진나라가 추구하는 정치의 핵심이었다.




2. 군공에 의한 작위제의 시행。




작위제도는 삼대라고 칭하는 하은주(夏殷周)시대부터 시작되어 서주시대의 통치자들은 혈연의 친소와 군공의 대소, 부족세력의 강약 등의 조건으로 작위를 수여하고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승리의 과실을 나누어 향유함으로 새로운 통치절서를 세웠다. 그러나 서주의 분봉 행위는 처음 한 번으로 끝났고 분봉된 후로는 결국은 작위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자동적으로 세습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예악의 제도와 정벌이 선후로 행해짐으로 해서 제후, 대부, 가신 등의 통치계급이 등장했다. 그와 같은 신흥세력들은 사회자원들을 자기들의 소용에 따라 재배치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춘추시대 이후로 군공과 국가에 공헌한 공적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는 방식이 전통적인 세습제도를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대체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군공을 장려하기 위해 국가를 개혁하는 것이 각국의 공통적인 관심사였다. 위(魏)나라의 이리(李悝)는 ' 애써 농사에 힘쓰는 자는 먹을 수 있고,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자는 봉록을 받을 수 있다.'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변법을 단행했고, 오기(吳起)는 초나라서 변법을 행할 때 " 지방제후로 봉한 지 3세가 지나면 작위를 국가가 거둬들이고 백관들의 녹봉을 절감해서 그 비용으로 강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燕)나라 또한 ' 비록 공자라 할지라도 국가에 공을 세우지 못한 자는 읍에 봉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진나라가 실행한 군공작위(軍功爵位) 제도는 열국 중 가장 구체적이고도 실행 가능한 제도했다. 그 기본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 작위는 20등급으로 구분하고 작위를 수여하거나 작위를 한 급씩 올리는 조건은 전쟁에 나가서 적군의 1명의 목을 베는 것으로 했다.




작위에 따른 상응하는 대우는 그 등급에 따라 토지, 주택의 면적, 부세, 노예의 수, 공공생활을 하는 데 향유할 수 있는 음식이나 거마 등의 표준이 차등을 두었다. 작위는 다시 자기나 가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속죄나 속신(贖身) 등에 이용할 수 있었다. 사병들이 벤 적군의 수급 1개를 그 병사를 한 등급 귀하게 만들었다. 즉 토지, 재부(財富) 및 권리 등 세 가지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진나라의 군공작위 제도에 따른 작위의 수여의 유일한 기준은 군사들이 전쟁에 나가서 베어오는 적군의 수급으로써 토지나 노예의 점유, 상금의 획득, 속죄나 속신 등 모든 것과 작위는 서로 직접적인 연계되어 있었다. 작위는 부와 권력을 획득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였으며 생활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것들은 모두 작위에 따라 구분되어 향유할 수 있었다. 그 작위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군의 수급을 얻는 것 뿐이었다. 그와 같은 동기로 인해 전쟁에 임한 군사들은 결사적이 된 것이다.




군공작위제도의 목적은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적인 신분을 높이는 수단이었음으로 만일 다른 방법이 이익을 얻는데 좀더 효과적이었다면 군공작위제도는 해소되었을 것이다. 진나라의 경제제도는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이었다. 따라서 부는 반드시 토지에 의존해야만 이룰 수 있었고, 그 토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전쟁에 종군해서 적군의 수급을 얻어 작위와 교환해야 했다. 진나라는 십오(十伍) 단위로 한 호적제도는 창안하여 백성들을 상호 감시하게 하는 연좌제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제나라는 문화와 상업이 발달했고 도굴업과 오락이 성행했으나 진나라는 군공작위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진나라가 만든 군공작위제도가 백성들 사이에서 변치 않은 지지를 받은 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사회적인 신분과 재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9-03-31 04:32:05 위진남북에서 이동 됨]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