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영토 변천사- 9. 공민왕의 실지 회복 > 통사

한국의 영토 변천사- 9. 공민왕의 실지 회복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2,728회 작성일 09-03-15 18:06

본문


공민왕 : 고려 제31대 왕(1351~74 재위).




처음 이름은 기(祺)이고, 뒤에 전(顓)으로 고쳤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고, 아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다.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개혁정치

공민왕은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다음해 1월에 몽고식의 변발(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암시했다. 곧이어 2월에는 권신(權臣)이 변칙적으로 인사행정을 하여 더 큰 폐단을 낳던 정방(政房)을 혁파하여 정치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아울러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여기에서 공민왕은 역대 선왕 및 기자(箕子)에 대한 봉사(奉祀)를 언급하여 그의 자주의식의 일면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정치면에서 왕의 권능을 직접 발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제면에서는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에 대한 시정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 전민변정사업). 얼마 뒤 8월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는 부원배(附元輩)를 중심으로 하는 권문세족의 반발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즉위한 지 1년 만인 9월에 조일신의 난이 발생하여 공민왕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대신 부원세력이 강화되어 더이상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356년(공민왕 5)에 이르러 마침내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원의 세력이 약화되는 대륙의 정세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전격적으로 주살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압록강 이서와 쌍성(雙城)지역을 공격했다. 뒤이어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원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官制)도 문종 때의 것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24항목에 걸치는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공민왕 즉위 초의 전민변정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 시도와 그 맥락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홍언박을 정점으로 하는 왕의 외척세력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재위 8년과 10년에는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따라서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이 개혁도 전반적인 면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공민왕 14년부터 또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먼저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신설하여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都堂)의 권리를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던 외방의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이전에도 설치된 바 있는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두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전민을 변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권문세족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여 신돈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정치적인 제휴가 이뤄졌다.




신돈이 등장한 이후 공민왕과 신돈, 신진사대부가 추진하였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시도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되자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공민왕대 마지막 개혁 시도였던 신돈의 개혁도 중도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반원정책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1년은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으로,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도 이때를 전후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위(帝位)를 둘러싼 분쟁과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순제의 실정(失政)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진 틈을 타 각지에서 한인(漢人) 반란군이 봉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원은 토벌군을 파견하여 그 진압에 힘썼는데, 고려에도 군대파견을 강력히 요청했다. 일찍이 공민왕은 왕자로서 원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원의 쇠약상을 목격한 바 있으며, 즉위하여서는 곧 반원 의지를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을 굳히지 못한 공민왕은 부득이 원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1354년(공민왕 3)에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했다.




고려 조정군은 다음해에 귀국했는데, 고려는 이 기회에 원이 동요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큰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드디어 적극적인 반원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기철 등의 부원배(附元輩)를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관제를 문종 때 것으로 복구했다. 그리고 평리(評理) 인당(印)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략케 하여 파사부 등 3참을 깨뜨리고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雙城) 지역을 쳐서 회수하는 등 여러 조처를 단행했다. 아울러 중국 대륙의 정세변동을 빨리 파악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이나 방국진(方國珍) 등의 군웅과 자주 교빙했다.




이에 대해 원은 크게 반발했다. 비록 원은 전보다는 약해졌으나 공민왕으로서는 아직 원과 정면으로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가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서북면을 공략했던 인당을 베어 사과한 것 등은 부득이한 조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원의 압력을 받아 동요하고 있을 때인 공민왕 8년과 10년, 북방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원은 이를 수수방관하여 다시금 국력의 쇠약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거기에다가 1363년(공민왕 12)에 원 세력과 결탁한 김용의 반란, 1364년 원이 직접 개입한 덕흥군 옹립 사건 등이 일어나 고려와 원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그러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원이 북쪽으로 쫓겨가자, 고려는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명과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맺었다. 아울러 공민왕은 익군(翼軍)을 조직하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지용수를 서북면원수로 삼아 압록강 북쪽의 만주지역에 있던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했고, 랴오둥의 중심지인 랴오양을 공격하여 그 성을 빼앗았다. 이후에도 공민왕은 반원친명정책(反元親明政策)을 계속했으나, 이후 고려말의 복잡한 국내외 정세는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을 가져왔다.




네이트사전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3-20 07:20:07 통사(으)로 부터 이동됨]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