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 고조선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페이지 정보

작성자 양승국 조회 5,649회 작성일 05-11-09 15:43

본문

기자조선고(箕子朝鮮考)

1. 기자의 조선입국 원인과 그 시점

문헌기록에 의하면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했을 때는 이미 기자는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했다.

《상서대전(尙書大傳). 태평어람(太平御覽)》

은나라를 멸한 주무왕은 공자 녹보(祿父)를 세워 그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다. 기자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를 인내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달아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인 기자는 할 수 없이 주나라에 신하로써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어 도망간 지 12년 만에 주왕에게 조례를 올리기 위해 돌아왔다. 이에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洪範)》①에 관해 물었다.

《사기(史記) 송세가(宋世家)》

은나라를 멸한 묻자 기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늘이 하우(夏禹)에게 홍범구조(洪范九條)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윤리가 바로 서게 되었습니다. 구조는 1조 오행(五行), 2조 오사(五事), 3조 팔정(八政), 4조 오기(五紀), 5조 황극(皇極), 6조 삼덕(三德), 7조 계의(稽疑), 8조 서징(庶徵), 9조 향용오복(饗用五福)과 외용육극(畏用六極)입니다.」

그래서 무왕은 즉시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그 후에 기자가 조례를 드리기 위해 은허(殷墟)를 지날 때 폐허가 된 은나라 궁궐터에 자라고 있는 곡식을 보고 마음이 상하여 《맥수(麥壽)》②란 시를 지었다.

《후한서(后漢書). 지리지(地理志)》

은나라의 도의가 무너지자, 기자는 조선으로 들어가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쳐 교화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를 기르는 법과, 베를 짜는 법을 가르쳤다.

《후한서(后漢書). 동이전(東夷傳)》

옛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는 그곳의 백성들에게 예의아 농사짓는 법과, 누에를 기르는 법을 가르치고 다시 8가지 항목의 규범을 만들었다.

《잠부론(潛夫論).오덕지(五德志)》

주무왕이 송에는 미자계를, 조선에는 기자를 봉했다.

《수경(水經), 패수주(浿水注)》

한조 때 허신(許愼)의 말을 따르면, 조선은 원래 기자의 나라다. 기자가 백성들에게 도의와, 농사법과, 직조법, 그리고 믿음과 덕을 가르치고, 8조의 법금을 제정, 알게 해서 예속을 이루게 했다.

《조선사략(朝鮮史略)》

주무왕이 은을 멸하자 기자는 중국인 5천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갔다.

위의 많은 문헌에 서로 반복해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간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원인은 기자가 주왕실로부터 책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史記).송세가(宋世家)》등의 문헌기록은 기자가 조선에 들어간 시점은 기자가 무왕에게 홍범(洪範)에 관해 말하자 무왕에 의해 조선에 봉해진 직후였다고 했다.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논한다면, 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한 후, 만일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가 즉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필시 주왕의 형인 미자(微子)와 동일하게 중원의 어떤 지역에 봉해졌을 가능성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기자가 조선에 책봉된 시점은 결코 먼저가 아니고 무왕과의 홍범구조에 관해 문답한 후였고 또한 당시 황량하고 머나먼 변새 밖의 조선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우리들은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간 시간을 추측할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 《후한서(後漢書) 지리지(地理志)》 등의 문헌 기록 등은 서로 비슷하여 감옥에서 석방된 기자가 그 즉시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상서대전》에는「기자가 조선으로 들어간(箕子走之朝鮮)」 원인은「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자신의 처지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 (不忍周釋)」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자가 감옥에 갇힌 원인은 여러 번에 걸쳐 주왕(紂王)에게 간한 결과였고 그 간함도 결국은 효력이 없어 나라는 이내 망하고 대세는 이미 판가름이 났다고 생각한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후에 황망히 북쪽으로 달아난 행동은 그와 같은 사정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북쪽의 조선 방향으로 달아났던 이유는 당시의 정치와 군사적인 정세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상말주초(商末周初) 시 은허(殷墟)의 서쪽과 남쪽은 이미 주나라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으며 《좌전》에 의하면 동쪽의 동이는 주왕(紂王)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했기 때문에 기자가 달아날 수 있었던 곳은 북쪽 방향 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상족들의 원주지는 원래 북방이었다. 상족의 시조 설(薛)의 아들 소명(昭明)은 지석(砥石)에서 살았다는 기사가 있다. 지석은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의 발원지인 지금의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백차(白岔) 일대다. 기자가 북쪽의 백차라는 곳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곳이 상왕조의 발흥지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북쪽의 유(幽) 땅은 당시 조선과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두 지방은 서로 경제적, 문화적 왕래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왕실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상서대전》, 《사기 송세가》에는 모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기 주본기》에는 무왕이 기자를 봉한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사기》에 서로 다르게 기재한 원인은 당시 사마천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사실이 확실치 않고 이설이 병존했음으로, 믿을만한 일은 믿음으로, 미심쩍은 일은 미심쩍은 대로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방법은 사기를 저술할 때 채용한 사마천의 저술기법이기도 했다. 고대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한 사실을 결코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해도 그러나 당시의 조선은 지금의 한반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헌에서 말하는 조선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재연구하여 추정할 수 있었다.

2. 기자조선의 위치에 대한 고찰

기자가 조선으로 들어간 사실은 대다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 기록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부정하는 근거는 상말주초(商末周初) 시 교통 여건상 기자가 지금의 한반도에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예을 들어 고힐강(顧頡剛) 선생은 주초에 무왕이 기자를 봉한 곳은 지금의 산서성 서부였다고 주장한다. 고대문헌의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라는 기사는 진한(秦漢) 시대 이후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역사적인 사실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설도 몇 가지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고힐강 선생은 기자가 산서성 서쪽에 봉해졌다는 근거로써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써는, 《좌전(左傳)》 희공(僖公) 15년의 기록에「나는 당숙(唐叔)이 진(晉)에 책봉을 받았을 때 기자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 후손들은 필시 창대하게 되리라! 당진국의 장래는 이후로 계속 크게 번성하리라!’」 이 대화는 섬진(陝秦)과 당진(唐晉)이 한원(韓原)에서 싸운 뒤에 섬진의 목공이 당진의 혜공(惠公)을 석방하고 귀국시키려고 할 때 한 말이다. 고힐강 선생은 이 기사를 근거로 당숙(唐叔) 우(虞)는 성왕이 당(唐)을 멸한 후에 그 땅에 책봉을 받았음으로, 만일 기자가 무왕에 의해 조선에 책봉 받았다면 그 당시의 교통여건 상으로는 그렇게 먼 거리를 두고 기자가 당숙 우의 책봉 사실을 전해 듣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자가 봉지로 받은 지역은 당진과 섬진에서 멀지 않았을 곳이라고 추정했다.

둘째로는, 《춘추(春秋)》 희공(僖公) 33년 조에 산서성 경내의 기(箕)라는 지명에 근거를 든다. 이 기사로 고힐강 선생은 기자가 봉지로 받은 곳은 산서성 서부로 비정(比定)했다. 《좌전(左傳)》 15년 조의 기사는 주초(周初)에 기자가 한반도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 견해는 올바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후의 회공 33년 조의 기(箕)라는 지명만으로 기자가 산서성 서부 지역의 땅에 책봉되었다는 결론을 충분치 못하다. 산서성의 기(箕)라는 곳은 상나라 때 기씨들의 선주지일 가능성이 있다. 《사기․송세가》에 의하면「그 후에 기자가 주왕실에 조현을 드리기 위해 은허(殷墟)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 기사 역시 기자조선은 산서성의 서쪽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당시 조현을 드리기 위해 방문하려고 했던 주왕실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의 종주(宗周)에 있었다. 그래서 만일 기자가 산서성 서부에 책봉을 받았다면 곧바로 남쪽으로 직진하여 종주로 들어갔지 동쪽으로 우회하여 은허를 지나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기․송세가》의 기사에 근거해서 기자조선의 대체적인 방향은 은허(殷墟) 이북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외에 고힐강선생은 주초의 조선은 지금의 한반도 내에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인식 하에서 고힐강 선생은 ‘기자봉조선(箕子封朝鮮)’ 과 관련하여 고대 문헌에 기재된 조항을 전부 부정하여 소위 ‘근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는 설로 역사를 기술했다. 우리들은 그와 같은 방법의 역사 기술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주초의 기자조선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겠는가?

전국과 진한(秦漢) 시대 이후의 문헌 중에서 조선(朝鮮)이라는 지명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1)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

곽박(郭璞)이 행한 주에서 ‘조선은 지금의 낙랑이다’라고 했다. 동해는 지금의 황해이고 북해는 지금의 발해만이다.

2)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 바다의 동쪽과 산의 남쪽에 있다.」

역시 곽박의 주에 ‘조선은 지금의 낙랑이며 기자가 책봉된 땅이다. 열(列)은 강 이름이며 지금의 대방(帶方)에 있으며 대방에는 열구현(列口縣)이 있다.’라고 했다. 곽박은 사마씨가 세운 진(晉)나라 때 문인이다. 진나라가 설치한 조선현(朝鮮縣)은 열수(列水)의 동쪽에 있었고 낙랑군 령이며, 열수의 하구는 대방군에 속했다. ‘ 해북산남(海北山南)’에서 해(海)는 지금의 한반도의 강화만(江華灣)을, 산(山)은 한반도 내의 낭림산(狼林山)을 지칭한다. 곽박의 산해경 주는 한나라와 진(晉)나라에 관련된 한반도 내의 지리적인 위치는 서로 부합한다.

3)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낙랑군 조선 조(條)의 응소(應劭)가 붙인 주석에 말하기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다고 했다.

낙랑군은 한무제가 한반도에 설치한 나라의 군현이다.

4) 《후한서(後漢書) 지리지(地理志)》

「은나라가 쇠망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들어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 옷감 짜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살인한 자는 죽인다 등의 팔조범금(八條犯禁)을 제정하여 지키게 했음으로 그곳의 백성들은 교화되어 서로 남의 물건을 가져가지 않으며 대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놓고 살 수 있게 했다. 참으로 훌륭한 일로써 어질고 현능한 사람의 표본이다. 때문에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슬퍼한 나머지 바다로 나가 구이(九夷)로 들어가 살려고 했다.

5) 《삼국지(三國志) 동이(東夷) 예전(濊傳)》

「예(濊)는 남으로 진한(辰韓), 북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옥저(沃沮)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는 지금의 조선의 동쪽에 있다. 호는 2만에 달했고 옛날 기자가 들어가 살면서 8조의 범금을 만들어 교화하여 집집마다 대문을 잠그지 않았으나 백생들은 아무도 물건을 훔쳐가지 않았다. 기자 이후 40 대에 이르러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자 왕호를 칭했다. 그러나 한(漢) 및 진(晉) 왕조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자조선은 한나라가 한반도에 세운 낙랑군으로 인식했다. 낙랑은 지금의 한반도 북부 일대다.

그러나 문헌의 기사에 나오는 서주 초 기자가 들어갔다는 조선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다. 다른 문헌들을 대조하여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상말주초 때 기자가 달아났다는 조선이라는 곳은 아마도 지금의 하북성 난하(灤河) 강안이라고 추측되며 이에 대해 고염무(顧炎武) 선생은 그의 저서 《일지록(日志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산해경(山海經)의 ‘조선은 지금의 열양(列陽) 동쪽에 바다의 북이고 산(山)의 남에 있다.’의 기사는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樂朗縣)으로 기자가 책봉된 땅으로 고구려 경내에 있다. 후에 모용씨(慕容氏)도 영주(營州) 경내에 조선현을 설치하고 북위(北魏) 왕조는 평주(平州)③에 조선현을 두었으나 그 곳은 한나라가 세운 군현과는 천여 리가 떨어진 곳에 있었다. 또한 《일통지(一統志)》에 ‘조선성은 영평부(永平府)에 즉 지금의 난하 서안(西岸)) 경내에 있고 기자가 책봉된 곳이다.’ 즉 기자가 책봉된 곳을 지금의 영평이라고 한 비정은 당시 일통지의 편찬을 책임졌던 유신령(儒臣令)이란 사람이 고사의 일에 정통하지 못한 결과이며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일통지(一統志) 기사의 내용을 참조하여 미루어 보면 주초의 조선은 아마도 난하(灤河)의 강안 즉 연나라의 동북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정(常征) 선생도 역시 그의 저서 《석대보정(釋大寶鼎)》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기자가 책봉된 곳은 조선(朝鮮) 이수(二水) 사이의 땅으로 비정된다.」 조수(朝水)는 지금의 조하(潮河), 선수(鮮水)는 지금의 당산(唐山) 두하(陡河)의 옛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주초의 조선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한반도가 아니라 하북성 당산시 부근의 조백하(潮白河)와 두하(陡河) 사이의 땅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반도로 들어간 사람은 기자가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연나라의 세력에 밀려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봐야한다.」

연나라가 건국된 후, 그 세력이 계속 북쪽으로 확장되자 기자는 그 종족인 은족들을 이끌고 동북 방향으로 옮겨야만 했고 따라서 서주 말기 혹은 춘추 때 이르러서야 기자족은 요서(遼西) 지구에 이르렀다고 우리들은 추측할 수 있다.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에「소진이 합종을 행하기 위해 북쪽으로 들어가 연문후(燕文侯)에 유세하기를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遼東)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서쪽에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 남쪽으로는 호타(呼沱)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라는 기사가 있다. 소진이 말한 네 방향의 지명은 모두 연나라가 중심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번갈아 가며 대귀 식으로 구성되어 그 억양을 멈추고 바뀌는 효과를 보고 있다.「북으로는 임호와 누번」의 어귀는 먼 곳을 먼저, 가까운 곳을 뒤에 언급했다. 누번은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중부 일대이고, 임호는 그 서북에 있었다.「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의 구절은 가까운 곳을 먼저, 먼 곳을 후에 언급했다. 그리고 운중은 지금의 내몽고 탁극탁(托克托) 동쪽이고 구원은 운중 이서로 지금의 포두시(包頭市) 서쪽 일대다. 그리고「남으로는 호타(呼沱)와 역수(易水)」의 구절은 또한 먼 곳을 먼저, 가까운 곳을 후에 언급했다. 호타(呼沱)는 호타하(滹沱河)로 하북성 중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관통하는 강이고 역수의 위치는 호타하의 북쪽으로 하북성 역현(易縣)에서 발원한다. 이와 같이 볼 때「동쪽으로는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라는 구절은 마땅히 가까운 곳을 먼저, 먼 곳을 나중에 말했다고 보고 조선은 마땅히 요동의 서쪽에 있었다고 비정해야 한다. 따라서 연문후(燕文侯) 때 조선은 연나라의 동쪽 국경과 접하고 , 다시 그 동쪽에 요동이 있었다.

후에 끊임없이 동북 방향으로 세력을 뻗친 연나라에 의해 기자조선은 원주지에서 쫓겨나 요동지구로 옮겨갔다.《구당서(舊唐書)‧고려전(高麗傳)》의「요동의 땅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곳이다.」라는 기사는 이를 말한다.

다시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의「연나라가 강성할 때부터, 일찍이 조선과 진번(眞番)을 공략하여 연나라에 속하게 하고, 치소를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했으며, 장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후에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에 속하게 하여 변방의 경계로 삼았다. 진나라의 뒤를 이어 일어난 한나라는, 조선의 땅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옛날 진나라 때 세운 요동의 요새를 다시 수리하여, 패수를 한나라의 경계로 삼고,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位置吏 築障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라는 기사는 연소왕 때 조선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장수절의 사기색은(史記索隱) 설에 따르면 「自始全燕時(자시전연시)」를「始全燕時, 謂六國燕方全盛之時.」라고 해석했다. 즉「육국 중 연나라가 강성하기 시작했던 때는 연소왕(燕昭王)부터였다.」 또「嘗略屬眞番, 朝鮮(상략속진번조선)」은「常略二國以屬己也(상략이국이속기야).」라고 해석했다. 즉「연나라가 진번과 조선 두 나라를 취하여 속국으로 삼았다.」라는 뜻이다. 연소왕 때 조선은 연나라에 의해 멸망되었음을 설명한 구절이다.「置吏(치리)」,「築障塞(축장색)」의 뜻은 곧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을 멸한 후에 취득한 땅의 지배를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음을 의미한다.「遼東外徼(요동외요)」의 뜻은 요동군 경계 밖의 장색 즉 외장성(外長城)을 뜻하고「復修遼東故塞(복수요동고색)」은 전국 때 건설한 요동의 외장성을 새로 수리했다는 뜻이고「至浿水爲界(지패수위계)」는 폐수에 이르러 그 경계로 삼았다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패수는 당시 한반도의 청천강을 의미함으로 당시 진번과 조선의 땅은 모두 한반도의 청천강 이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국 시기 연소왕 이전에는 조선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연소왕이 강역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의 나라를 멸했다는 기사는 다른 문헌에도 나와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三國志)․위략(魏略)》에「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朝鮮侯)는 주나라가 쇠약하게 되자 스스로 높여 왕호를 칭하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는 연나라의 야심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칭왕한 후에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에 반격을 가하여 주왕실을 받들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후는 대부 예(禮)의 간함을 받고 연나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그만 두었다. 후에 조선후의 명을 받아 연나라에 사자로 들어간 예는 유세를 행해 연나라가 조선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멈추게 했다. 다시 얼마 후에 조선의 후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포학하게 되자 연나라는 장군 진개(秦開)④를 시켜 연나라의 서쪽 변경의 땅 2천 여 리의 땅을 취하고 이윽고 번한(番汗)에 이르러 경계로 삼았다. 이때부터 조선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연나라가「동쪽으로 나아가 땅을 공략하려고 하자」 조선이「예(禮)를 사자로 삼아 서쪽으로 나아가 연나라에 유세하게 했다.」의「서설(西說)」은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증거하는 말이다. 연나라의「동쪽으로 나아가 땅을 공략하려고 하자」 조선 역시「군사를 일으켜 연나라에 반격을 가하려고 했다.」도 역시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뜻한다. 진개(秦開)는 연나라를 위해 변경 밖을 공격하여 2천여 리의 땅을 점령하고「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진격을 멈추었다. 번한은 지금의 한반도 청천강과 대동강 유역이다. ‘새로 점령한 2천여 리의 땅’은 모두 조선 한 나라 만의 땅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략(魏略)》의 주제는 조선이고 그래서 조선의 일을 기재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실은 연나라 장군 진개가 점령한 2천여 리의 땅은 연나라 동쪽에 있었던 동호와 진번을 모두 포함한 광대한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사기(史記)․흉노열전(匈奴列傳)》 중에 진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후에, 연나라의 유능한 장군이었던 진개가 동호에 인질로 잡혀왔다가 호인(胡人)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다가 인질에서 석방되어 연나라로 돌아온 진개는 연군을 이끌고 동호를 습격하여 그들을 쫓아냈다. 동호는 천여 리를 쫓겨 가야 했다. 이에 연나라는 그 땅에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그 주위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의 군을 설치하여 동호의 침입에 대비했다.」그 밖의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의 ‘嘗略屬眞番, 朝鮮’은 안사고(顔師古)가 그의 주에 ‘전국 때 연나라가 공략하여 얻은 땅이다’라한 말은 진번도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은 곧 쇠약해 졌다.’의 말은 이때부터 조선이 쇠망해졌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쇠망해진 조선은 어디로 갔는가? 서진의 장화(張華)는 그의 저서 박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기자는 조선으로 들어가 거주했다. 후에 연나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했다. 이에 바다로 들어가 조선의 국사(國師)가 되었다.’라고 했다. 즉 기자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들어갔음을 말했다.

이것으로써 알 수 있는 사실은, 전국시대 연소왕 때 망한 기자조선의 후예들은 아마도 한반도로 들어가고 ‘낙랑조선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자조선의 전국 때 역사 단면은 고고학상 발굴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사기. 조선열전》에 따르면 연소왕 때 연나라가 진번과 조선의 땅을 병탄하고 기자조선은 한반도로 들어갔다고 기술한 다음 ‘築鄣塞’ ‘至浿水爲界’라고 했다. 이 일단의 장색(鄣塞)들 유적이 속속 발굴되어 사기의 기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연나라 북쪽의 장성은 안과 밖의 두 가닥이 있다. 그 중 외장성은 서쪽의 하북성 위장(圍場)에서 시작해서 동쪽으로 이어져 내몽고의 적봉(赤峰), 오한기(敖漢旗), 나만(奈曼), 고륜(庫倫)을 거쳐 요녕성 부신(阜新), 창무(彰武), 법고(法庫)로 들어가 다시 요하(遼河)를 건너 개원(開原), 철령(鐵嶺), 청원(淸原)에서 남쪽으로 꺾어 신빈(新賓), 환인(桓因), 관전(寬甸)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가 지금의 평양 북쪽의 신안주(新安州) 부근으로 이어져 있다. 성벽은 흙이나 돌로 쌓았으며 창무와 가까운 곳에 선명하지는 않으나 그 유적이 발굴되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개원(開原)으로 연결되어 조선으로 들어간 장색 형태로 된 장성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는 이미 그러한 형식의 장색이 발굴된 바 있다. 한 북한 학자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대녕강(大寧江) 동쪽 제방에 예부터 만리장성이라고 불렸다. 그 장성은 박천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뻗어나가 곧바로 압록강에 이르고 다시 계속해서 압록강 북안으로 이어졌다.」라고 했다. 또「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그 총 연장이 300리에 달하는 장성은 박천군 중남리(中南里), 태주군(泰州郡) 용흥리(龍興里), 동창군(東倉郡) 학봉리(鶴峰里)와 신안리(新安里) 부근의 대녕강과 그 지류 창강하(昌江河)에서 창강하의 지류인 흥천(興川)에 이르기까지 약 300리에 걸쳐 꾸불꾸불 이어져 있다.」고 했다. 주봉한(朱鳳瀚) 선생도 그의 《논중국동북지구여조선반도출토적단경곡인청동단검(論中國東北地區與朝鮮半島出土的短莖曲刃靑銅短劍)》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전국 초기 이후에 ‘짧은 자루에 곡선 칼날을 한 청동검[短莖曲刃靑銅劍]’이 요서 지역에서 사라진 사실은 아마도 동호 세력이 전국 중기 이후 요서지역에서 쇠락해졌음을 의미하거나 혹은 동진하던 연나라 세력에 의해 요서지역에서 축출되었음을 의미한다. 전국 중기부터 중원식 검이 이미 요동반도에서 출토되는 현상은 바로 연나라 세력이 동진하여 요동의 원주민들을 압박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라고 했다. 동북지구의 청동단검의 분포는 《사기(史記)》나 《위략(魏略)》 등의 문헌상 기록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임운(林澐) 선생 역시 그의 저서 《‘연박’화‘연박방’(‘燕亳’和燕亳邦)》에서 이미 다음과 같이 추측한 바가 있다.「아마도 연나라의 요서군은 원래 맥(貊) 인들의 원주지에 설치한 군현인 듯하고, 요동군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을 점령한 후에 설치한 군현으로 유추된다.」그밖에 한반도 내에서 발군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기자조선이 한반도로 들어간 이후에도 연나라와 빈번한 왕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주석

①홍범(洪範) : 기자(箕子) 왈「예전에 곤(鯤)이 홍수를 막으면서 오행(五行)의 질서를 어지럽히니, 하늘이 이에 크게 노하여 큰 법칙 아홉 가지를 주지 않자, 상도(常道)가 이로 인해서 깨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곤은 요임금으로부터 벌을 받아 죽고, 곤의 아들 우(禹)가 그의 일을 이어 받아 오행의 질서를 되찾아 다시 일으켰습니다. 이에 하늘은 큰 법칙 아홉 가지를 우에게 주니, 상도가 다시 순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가 오행(五行)이고, 둘째가 오사(五事)이고, 셋째가 팔정(八政), 넷째가 오기(五紀), 다섯째가 황극(皇極), 여섯째가 삼덕(三德), 일곱째가 계의(稽疑), 여덟째가 서징(庶徵), 아홉째가 오복(五福)을 누리는 것과 육극(六極)을 피하는 것입니다.

1. 오행은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입니다. 물은 만물을 기름지게 하며 또한 아래로 흐르고, 불은 불꽃을 왕성하게 하며 또한 위로 솟고, 나무는 굽기도 하고 또한 곧기도 하며, 쇠는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고, 흙은 씨를 뿌리고 수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이 아래로 흘러 기름지게 된 사물은 짜고, 불꽃이 위로 솟아 왕성해진 사물은 쓰고, 굽기도 하고 곧기도 한 나무는 시고, 마음대로 변형된 쇠는 맵고, 흙에서 씨를 뿌리고 수확한 사물은 답니다.

2. 오사(五事)는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입니다.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씨는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관찰력은 명확해야 하고, 청취력은 분명해야 하고, 사고력은 예리해야 합니다. 몸가짐이 공손하면 마음은 엄숙해지고, 말씨가 따를 수 있도록 되면 잘 다스릴 수가 있고, 관찰력이 명확하면 지혜롭게 되고, 청취력이 분명하면 계책이 따르기 마련이고, 사고력이 예리하면 성스럽게 됩니다.

3. 팔정(八政)은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입니다.

4. 오기(五紀)는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 등의 다섯 가지입니다.

5. 황극(皇極)은 군주가 정교(政敎)를 시행하기 위해 세운 준칙을 말하는데, 때가 되어 오복의 도를 구해서 백성들에게 시행하면, 백성들은 왕의 준칙을 따르게 되고, 또한 왕께서는 준칙을 어떻게 유지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왕의 백성들은 사악한 붕당의 풍조를 가지지 않게 되며, 또한 굴종하고 결탁하는 행위도 하지 않게 되어 모두 왕께서 세운 그 준칙을 지키게 됩니다. 무릇 그 백성들은 계획을 가지고 행동하며 아울러 몸가짐도 갖추니, 왕께서는 응당 그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준칙을 지키지 않았더라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왕께서는 응당 그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왕께서는 환한 얼굴과 기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고, 본인 스스로 미덕을 애호한다고 하는 자에게는 작록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왕께서 세운 준칙을 지킬 수 있습니다. 홀아비와 과부와 같은 약자들을 모옥하지 말아야 하고, 권세가와 같은 고명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있고 아울러 실천력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능을 발휘하게 한다면 국가는 창성하게 됩니다. 무릇 정직한 사람에게는 부를 주고 선한 도로써 잘 접대하여야 합니다. 만약 왕께서 정직한 사람들을 국가에 잘 이용하지 못하면, 그들은 죄를 범한 것처럼 가장하여 왕을 떠나게 됩니다. 또한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왕께서 작록을 하사하신다면 왕의 행위를 죄악으로 몰고 갑니다. 사적인 일에 치우치지도 말고, 간사한 말에 기울지도 말며, 오직 성왕의 정의만을 준수해야 합니다. 아울러 편애하지도 말고 오직 성왕의 정도만을 준수해야 합니다. 악에 치우치지 말고 오직 성왕의 정도만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적이 일에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넓어집니다. 사적인 것에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평탄해집니다. 배반하지 말며 간사한 것으로도 기울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성왕의 길은 정직해집니다. 군주된 자는 준칙을 지키는 자들을 모아야만 하고, 신하된 자는 준칙을 만든 사람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군주는 준칙에 따라 행하고, 또한 신하들로 하여금 그의 말을 전하게 하여, 이로써 백성들을 교육하면 곧 천심을 따르는 일이 됩니다. 무릇 백성들은 준칙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군주가 그것을 받아들여 실행하면 곧 천자가 되어 그 광휘를 더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천자는 백성들의 부모가 되고, 나아가 천하의 성왕이 됩니다.

6. 삼덕은 첫째가 정직이고, 둘째가 강극(剛克)이고, 셋째가 유극(柔克)입니다. 천하가 평안하면 정직으로 가르치고, 천하가 강포(强暴)하여 불순하면 강(剛)으로 다스리고, 천하가 화순(和順)하면 유(柔)로써 다스립니다. 깊이 숨겨진 음모는 강으로써 극복하고, 고명한 군자들은 유로써 다스립니다. 그리하여 군주는 작록과 포상을 공정하게 내리고, 형벌 또한 공평하게 내리며, 좋은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신하는 작록과 포상을 내리지 않으며, 형벌 또한 내리지 않으며, 좋은 음식을 즐기지 못합니다. 신하가 만약 작록과 포상을 내리고, 형벌 또한 내리며, 좋은 음식도 즐긴다면, 그 해(害)는 집안에 미치게 되고, 그 흉(凶)은 나라에 미치게 되어, 관리들은 모두 부정을 저지르며, 백성들은 각자의 본분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7. 계의(稽疑)는 복(卜)과 서(筮)에 정통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임용하여, 그들에게 복과 서롤 행하도록 시키는 일입니다. 우선 복을 보면, 어떤 것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비가 그쳐 구름이 위에 떠있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뜬 구름이 이어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안개 모양이고, 어떤 것은 음양의 양 기운이 서로 침범하는 모양입니다. 다음으로 서롤 보면 내괘(內卦)가 있고 또한 외괘(外卦)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일곱 가지가 됩니다. 이 중에서 복점은 다섯 가지이고 서점은 두 가지인데, 이것을 추정하고 또한 변화시켜 길흉 여부를 가리게 됩니다. 귀복(龜卜)과 점괘(占卦)를 볼 줄 하는 사람들이 복서의 관직에 임명되는데, 만약 세 사람이 귀조(龜兆)와 괘상(卦象)을 판단하게 된다면, 즉 의견이 같은 두 사람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왕께서 큰 의문이 생기면, 내심 깊이 생각한 뒤 관원들과 의논하고, 그 연후에 백성들과 토론을 벌이고, 마지막으로 다시 귀복과 점괘를 쳐봅니다. 왕께서 찬성하시면, 귀복도 찬성하는 것이고, 점괘도 찬성하는 것이고, 관리들도 찬성하는 것이고, 백성들도 찬성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대동(大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왕 스스로도 강해지고, 자손들 또한 흥성해지게 되니, 바로 대길(大吉)입니다. 만약 왕께서 찬성하시고, 귀복도 찬성하며, 점괘도 찬성하는데, 관리들이 반대하고,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리(吉利)입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찬성하고, 귀복도 찬성하며, 점괘도 찬성하는데, 왕께서 반대하시고, 관리들이 반대해도 길리입니다. 만약 왕께서 찬성하시고, 귀복도 찬성하는데, 점괘가 반대하고 관리들이 반대하며, 백성 또한 반대하면, 안으로는 길이나, 바깥으로는 흉험이 따릅니다. 만약 귀복과 점괘가 모두 사람들의 의견과 상반된다면, 조용히 지낼 때에는 길리이나, 거동만 하면 반드시 흉험이 따르게 됩니다.

8. 서징(庶徵)은 혹 비가 오고, 혹 맑고, 혹 따뜻하고, 혹 한랭하고, 혹 바람이 부는 그러한 징조를 말하는데, 이 다섯 종류의 기상(氣象)이 모두 구비되고 또한 그 순서에 따라 진행되면, 모든 초목은 어김없이 무성해집니다. 그 중 어느 한 기상이라도 과다해지면, 곧 흉재(凶災)가 따르고, 아울러 부족해도 역시 흉재가 따릅니다. 아름다운 행위의 징표를 말하자면, 군주의 정치가 맑고 밝으면 햇빛처럼 대지를 비추고, 군주의 두뇌가 밝고 지혜로우면 기후가 때맞추어 추위가 다가오고, 군주의 정리가 통달해 있으면 때맞추어 바람이 생깁니다. 추악한 행위의 징표로 말하자면, 군주의 행위가 광망(狂妄)하면 자주 비가 내리고, 천자의 행위가 주제넘으면 자주 가뭄이 생기고, 군주가 향락에 안주하면 자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군주가 행하는 일이 성급하면 자주 추위가 찾아들고, 군주의 마음이 어두우면 자주 바람이 몰아칩니다. 군주의 직책은 대단히 중요하며 일 년을 위주로 하고, 대신은 각자 직책이 있어 한 달을 위주로 하고, 여러 백관들은 다시 그 잭책을 나누어 하루를 위주로 합니다. 년, 월, 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백곡이 풍성하게 되고, 정치 또한 밝아지며, 어진 신하들은 그 명성을 드높여 국가는 안녕을 누리게 됩니다. 년, 월, 일이 거르거나 어긋나게 움직이면 백곡이 보잘것없이 되고, 정치 또한 어두워지며, 어진 신하들은 숨게 되어 국가는 안녕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백성은 곧 하늘에 떠 있는 여러 별들과 같습니다. 어떤 별은 바람을 좋아하고, 어떤 별은 비를 좋아합니다. 해와 달의 운행에 겨울과 여름이 있는 것처럼 별들에게도 각각 상규(常規)가 있습니다. 그래서 달이 별을 만나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게 됩니다.

9. 오복(五福)은 첫째가 수(壽)이고, 둘째가 부(富)이고, 셋째가 강녕(康寧)이고, 셋째가 유호덕(攸好德)이고, 다섯째가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육극(六極)은 첫째가 8세 이전에 죽는 흉(凶), 20세 이전에 죽게 되는 단(短) 그리고 30세 이전에 죽게 되는 절(折) 등이며, 둘째가 병에 걸리는 질(疾), 셋째가 걱정거리가 생기는 우(憂), 넷째가 가난하게 사는 빈(貧), 다섯째가 추하게 살거나 흉하게 죽는 악(惡), 여섯째가 몸이 쇠약해지는 약(弱)입니다.

②맥수(麥壽)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피어나고[麥穗漸漸兮(맥수점점혜)]/벼와 기장은 싹이 올라 파릇파릇하구나![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그 교활했던 아이가[彼狡童兮 (피교동 혜)]/나를 좋아하지 않았음이라![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

③평주(平州)

1. 후한 초평(初平) 원년 서기 190년 공손탁(公孫度)이 요동(遼東)을 근거로 할거할 때 스스로 평주목이라고 칭했다. 삼국 때 위(魏)가 유주(幽州)의 동쪽을 떼어내어 평주라 하고 유주에 속하게 했다. 치소는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노성(老城)인 양평현(襄平縣)에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없어졌다가 서진(西晉) 태화(泰和) 10년 서기 274년 다시 설치했다. 지금의 요녕의 육고하(六股河) 이동, 북표(北票), 부신(阜新), 철령(鐵嶺) 이남, 본계(本溪) 이서와 이남 및 한반도 중부이북 지구를 관할했다. 영가(永嘉)의 란 후에 그 치소를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昌藜縣)으로 옮겼다. 북위(北魏) 왕조 때 영주(營州)로 개칭했다.

2. 5호16국 시대 때 전진이 설치한 군현으로 치소는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인 용성(龍城)에 두었다.

3. 전연(前燕) 때 설치한 군현 이름으로 치소를 용성에 두었다가 후에 지금의 요녕성 개주시(蓋州市) 경내의 평곽현(平郭縣)으로 옮겼다. 북위 때 영주(營州)에 편입되었다.

4. 북위(北魏) 천사(天賜) 4년 서기 407년 설치한 군현이름으로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일대인 비여성(肥如城)에 두었다.

④진개(秦開) : 전국 때 연(燕)나라 장수다. 처음에 북방의 유목민인 동호(東胡)에 인질로 잡혀갔다 동호인들의 신임을 얻어 그 땅의 정황을 모두 자세하게 파악했다. 그가 연나라에 다시 돌아오자 연소왕은 그에게 군사를 주어 동호를 습격하게 했다. 진개는 동호를 정벌하고 천여 리에 달하는 땅을 연나라에 국토로 삼았다. 연나라는 새로 확보한 땅에 장성을 건설하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의 군(郡)을 설치하고 동호의 침입을 막았다.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