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동이열전 > 고조선

후한서-동이열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6,592회 작성일 09-04-29 06:13

본문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1. 머리말

[後漢書]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王制云:「東方曰夷.」夷者, 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一]. 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二]. 夷有九種[三], 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四]. 故孔子欲居九夷也.

[一]事見風俗通.

[二]山海經曰:「君子國衣冠帶劍,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並在東方也.

[三]竹書紀年曰「后芬發即位三年, 九夷來御」也.

[四]竹書紀年曰「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即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后少康即位, 方夷來賓」也.


[왕제王制](예기-왕제편)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夷)라는 것은 저(柢-뿌리)인데, 어질고 생명을 사랑하여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남을 일컫는 것이다. (1) 그래서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 또는 ‘불사의 나라’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2) 이(夷)에는 9가지 종류가 있는데, (3)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가 그것이다. (4) 그래서 공자가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


(1)[풍속통風俗通]에 보인다

(2)[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린다’고 한다. [외국도外國圖]에 이르기를 ‘낭야와 3만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또 [山海經]에 이르기를 ‘불사인(不死人)이 교경(交脛)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의 몸이 검고 오래 살며 죽지 않는다’고 한다. 모두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이르기를 – 분발(芬發 -고대 왕조인 하나라 때 임금. 아래에 설, 상, 소강 모두 같음)후(后) 즉위 3년에 구이가 내어(來御)했다

(4)[竹書紀年]에 이르기를 – 설(泄)후 21년에 견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에 명을 내렸다. 상(相)후 즉위 2년에 황이를 정벌했다. 7년에 우이가 내빈(來賓)했다.소강(少康)후가 즉위하자 방이(方夷)가 내빈했다.


昔堯命羲仲宅嵎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一].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二]. 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三].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四].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敝, 東夷寖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五].




[一]孔安國尙書注曰「東方之地曰嵎夷. 暘谷, 日之所出也」.

[二]太康, 啟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羿所逐也.

[三]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 竹書紀年曰:「后發即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四]仲丁, 殷大戊之子也. 竹書紀年曰「仲丁即位, 征于藍夷」也.

[五]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옛날 요(堯)임금이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에 자리잡게 하여 양곡(暘谷)이라 했는데 아마도 해가 뜨는 곳이다. (1) 하후씨(夏后氏) 태강(太康-하나라 3번째 임금)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 (2) 소강(少康-6번째 임금) 이후 대대로 왕화(王化)를 입어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고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3)걸(桀)이 폭정을 하니 여러 이(夷)들이 내침했는데 은나라 탕(湯-은나라 시조)이 혁명하고 그들을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중정(仲丁-은나라 10번째 임금)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략했다. (4) 이때부터 3백여 년 동안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했다. 무을(武乙-28번째 임금) 때에 이르러 (은나라는) 쇠약해지고 동이(東夷)가 점차 번성하여 마침내 회(淮), 대(岱)로 옮겨와 중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5)


(1)공안국(孔安國)이 [상서尙書]의 주석에서 이르기를–동방의 땅을 우이(嵎夷)라 한다. 양곡(暘谷)은 해가 뜨는 곳이다.

(2)태강은 계(啟)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물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예(羿)에 의해 축출되었다.

(3)소강은 중강(仲康)제(帝)의 손자이고 상(相)제(帝)의 아들이다. [竹書紀年]에 이르기를 ‘발(發)후(后) 즉위 원년에 제이(諸夷)가 왕실에 복종하고 들어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옮긴이 - 하나라 왕위 계보: 우 – 계 – 태강 – 중강 – 상 – 소강 -……- 발 - 걸)

(4)중정(仲丁)은 은나라 대무(大戊)의 아들이다. [竹書紀年]에 이르기를 ‘중정이 즉위하여 남이를 정벌했다’고 한다

(5)무을(武乙)은 제(帝) 경정(庚丁)의 아들인데 무도(無道)하여, 가죽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우러러보며 활로 쏘며 말하길 ‘하늘을 쏜다’고 했다.


及武王滅紂, 肅愼來獻石砮、楛矢. 管、蔡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一]. 康王之時, 肅慎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二].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三],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騄之乘[四],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五]. 於是楚文王大舉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斗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六]. 厲王無道, 淮夷入寇, 王命虢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七]. 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修霸, 攘而卻焉. 及楚靈會申, 亦來豫盟[八]. 後越遷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一] 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既伐管叔、蔡叔, 滅淮夷.

[二]博物志曰:「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尸子曰「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三]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四]史記曰:「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盜驪、驊騮、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五]造父, 解見蔡邕傳.

[六]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邳縣北. 徐山在其東. 博物志曰「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斗, 爲楚所敗, 北走此山」也.

[七]毛詩序曰:「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其詩曰:「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辟四方, 徹我土疆.」

[八]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무왕(武王: B.C 1134-1116)이 주(紂)를 멸하자 숙신이 와서 석노(石砮-돌화살촉)와 호시(楛矢-호나무 화살)을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나라를 배반하여 이적(夷狄)을 끌어들이자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東夷)를 평정했다. (1) 강왕(康王: B.C 1078-1053)때 숙신이 다시 이르렀다. 그 후 서이(徐夷)가 왕호를 참칭하고 구이(九夷)를 이끌고 종주(宗周-주나라 도읍인 호경)를 공격하여 서쪽으로 황하에 이르렀다. 목왕(穆王: B.C 1001-947)은 서이의 세력이 한창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떼어내어 서언왕(徐偃王)이 이를 주관하게 했다. (2) 언왕은 황지(潢池) 동쪽에 거처하였는데 땅이 사방 5백리이고(3) 인의(仁義)를 행하니 뭍에서 조공하는 나라가 서른 여섯이었다.


그 뒤에 목왕이 적기, 녹이가 이끄는 수레를 얻어(4) 조보가 이를 몰아 초나라에 고하여 서나라를 정벌하도록 명하니 하루 만에 (초나라에) 도착했다. (5) 이때 초문왕(楚文王)이 대군을 일으켜 서나라를 멸했다. 언왕이 어질어 권도의 술수를 모르고 차마 싸우지 못했으므로 패하게 되었다. 이에 북쪽으로 팽성(彭城) 무원현 동쪽 산 아래로 달아났는데 백성 중에 그를 따른 자가 만여 명이었다. 이 때문에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 이름하였다. (6)


려왕(厲王: B.C 878-841 ; 841-828은 려왕을 축출하고 제후들이 공동섭정한 共和시대)이 무도(無道)하여 회이(淮夷)가 침입했는데 왕이 괵중(虢仲)에 명하여 이를 정벌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선왕(宣王: B.C 827-782)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토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했다. (7)


유왕(幽王: B.C 781-771 서주 마지막 임금)이 음란하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침입했는데 제환공이 패권을 잡고 이를 물리쳤다. 초나라 영(靈: B.C 540-529)이 신(申)에서 회맹했을 때 (회의가) 또한 참여하여 맹약했다. (8) 그 뒤에 월나라가 낭야(琅邪)로 옮겨 와 회이와 힘을 합해 전쟁을 벌여 마침내 여러 제후들을 침범해 포악하게 굴고 작은 나라들을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1)[상서尙書]에 의하면, 무왕(武王)이 죽자 3감(三監-은나라 유민을 감독하기 위해 주공의 동생인 관숙,채숙,곽숙을 三監으로 임명)과 회이가 배반했는데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하고 대고(大誥-일종의 포고문)를 지었다고 한다. 또 이르기를, 성왕이 관숙, 채숙을 토벌한 후 회이를 멸했다고 한다

(2)[박물지博物志]에 이르기를-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물가에 버렸다. 외로운 과부에게 곡창(鵠倉)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버려진 알을 물고 돌아왔다. 그녀가 그 알을 덮어 따뜻하게 하니 마침내 어린 아이가 나왔다. 태어날 때 반듯이 누워 있었으므로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데려왔는데,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아 서나라 임금이 되었다 [시자尸子](중국전국시대 사상가 또는 그의 저서)에 이르기를-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언(偃)이라 이름하였다

(3)[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황수(黃水)는 일명 왕수(汪水)인데 포수(泡水)와 합쳐져 패(沛)에 이르러 사(泗)로 들어간다. 산양(山陽) 동쪽에서부터 해릉(海陵)의 북쪽이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

(4)[사기史記]에 이르기를–조보(造父)는 수레를 잘 몰아 주 무왕(繆王="목왕穆王)의" 총애를 얻었다. 적기(赤驥),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騄耳)가 끄는 사마(駟-사두마차)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사냥을 즐기며 즐거움에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5)조보(造父)에 관해서는 채옹전에 상세히 보인다

(6)무원(武原)은 현이고 옛 성이 지금의 사주(泗州) 하비현 북쪽에 있다. 서산(徐山)은 그 동쪽에 있다. [박물지博物志]에 이르기를, ‘서왕(徐王)의 괴이함은 범상하지가 않다. 무원현 동쪽 10리에 있는 서산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은 진(陳)과 채(蔡)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 하고 붉은 활과 화살을 얻었는데 스스로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여겨 언왕을 자칭했다. 목왕(穆王)이 이를 듣고 사자를 사마에 태워 보내 하루 만에 초나라에 도착했는데 초나라로 하여금 그를 공격하게 했다. 언왕이 어질어 차마 싸우지 못하여 초나라에 패하고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7)[모시서毛詩序]에 이르기를-강한(江漢)이라는 시는 윤길보가 선왕을 칭송한 것이다. 쇠퇴해진 나라로 난을 다스리고 소공에 명하여 회이를 평정했다 [모시毛詩]에서 이르기를-강한은 출렁이고 병사들은 가득하다. 즐기는 것도 노니는 것도 아니요 회이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召虎)에 명하여 사방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

(8)[좌전左傳]에 의하면, 초나라 영왕, 채후(蔡侯), 진후(陳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회이(淮夷)가 신(申)에서 회맹했다고 한다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一], 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篡位, 貊人寇邊[二]. 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故章、和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鈔;桓、靈失政, 漸滋曼焉.


[一]前書曰「朝鮮王滿, 燕人.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漢興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東走, 渡浿水, 居秦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及故燕、齊亡(任)[在]者, 王之, 都王險」也.

[二]前書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 嚴尤奏言貉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


진나라가 6국을 아우르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는 모두 흩어져 민호(民戶)가 되었다. 진섭(陳涉: 진시황 사후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의 자字가 섭)이 거병하여 천하가 붕괴하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난을 피한 곳이 조선인데(1)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백여 년 후에 무제(武帝)가 이를 멸하니 이때부터 동이(東夷)가 상경(上京-수도)과 통하게 되었다. 왕망(王莽)이 찬역하자 맥인(貊人)이 변경에 침입했다. (2)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25-56) 초에 다시 와서 조공했다. 요동태수 제융(祭肜: 41-69년 요동태수로 재임)이 북방에서 위엄을 떨쳐 해외에까지 미칠 때 예(濊), 맥(貊), 왜(倭), 한(韓)이 만리를 와서 조공했고 장제(章帝: 75-88), 화제(和帝: 88-105) 이후로 외교사절이 서로 통했으나, 영초(永初: 107-113) 때에 이르러 어려운 일이 많아지자 침입하기 시작했고 환제(桓帝: 146-167), 영제(靈帝: 167-189)가 실정(失政)하자 (동이가) 점차 번성하였다.


(1)[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 조선의 왕인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 때부터 일찍이 진번 조선을 복속하여 관리를 두어 보루를 쌓았다. 한나라가 흥하여 연나라를 복속했는데 연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위만은 동쪽으로 망명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에 머물렀다. 점차 조선만이(朝鮮蠻夷)와 옛 연(燕), 제(齊)의 망명인들을 역속(役屬)하여 왕이 되고 왕험(王險)에 도읍을 정했다.

(2)[전한서] - 왕망이 고구려병을 뽑아 호(胡)를 치려 했으나 (고구려는) 이에 응하지 않으려 했는데 군현(郡縣)에서 이를 강요하니 모두 새외로 달아나 이 때문에 범법(犯法)하여 도적이 되었다. 주군(州郡)에서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에게 책임을 돌리자 엄우(嚴尤)는 맥인이 범법한 것은 추의 죄가 아니므로 마땅히 달래어서 안정시켜야 한다고 진언했다


自中興之後, 四夷來賓, 雖時有乖畔, 而使驛不絕, 故國俗風土, 可得略記. 東夷率皆土著, 憙飲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所謂中國失禮, 求之四夷者也[一]. 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 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一]左傳曰, 仲尼學鳥名[官]於郯子, 既而告人曰:「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其信也.」


국가가 중흥한 이후로 사이(四夷)가 내빈(來賓)하였고 비록 때때로 배반한 일도 있으나 사역(使驛)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국속(國俗)과 풍토(風土)를 대략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이가 대체로 모두 정착생활을 하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혹은 관변(冠弁-고대 두의頭衣의 일종)에 비단옷을 입고 그릇으로는 조두(俎豆)를 사용한다.


중국이 예의를 잃으면 이를 사이(四夷)에서 구한다는 말이 있다.(1) 무릇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을 모두 일컬어 사이(四夷)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공(公), 후(侯), 백(伯), 자 (子), 남(男)을 모두 일컬어 제후(諸侯)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좌전左傳]에 이르기를 – 중니(공자)가 담자(郯子)에서 새 이름 관직(鳥名官)을 배우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천자(天子)가 실관(失官)하면 사이(四夷)에서 배운다고 했는데 이는 일리 있는 말이다.”


※ 옮긴이 -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 송나라(우리 고려 때인 조광윤의 송나라 아님)의 범엽이 찬술했는데, 지(志) 부분은 그 이전인 진(晉)나라 때 사마표의 [속한서]를 합본하였습니다. 즉 紀, 列傳(송의 범엽)+ 志(진晉의 사마표) 입니다. 여기에 대한 주석은 紀, 列傳 = 당나라 때 이현 / 志 = 남북조 시대 양梁 나라 때 유소..입니다.


즉 지금 소개하는 동이열전은 열전이므로 본문은 송나라 때 범엽 + 주석부분은 당나라 때 이현인 셈입니다. 본문과 주석을 이해하는데 이 점 참조하시기 바라구요. (예를들어, 군국지의 경우라면 본문은 진나라 사마표 + 주석은 양나라 유소)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는 진나라(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진晉) 때로 [후한서]보다 먼저 쓰여졌습니다. 또 삼국지에 많은 주석을 첨가한 배송지(이른바 배주)도 남북조 시대 송나라 때 사람으로 범엽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데, 배주가 후한서보다 조금 더 빠릅니다. (즉, 진수 삼국지 – 배주 – 범엽 후한서)


이런 복잡한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삼국지]와 [후한서]가 우리 고대사에 중요 문헌으로 활용되는 상황이므로, 만들어진 시대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구요. 예를 들어 원작자가 '지금'이라고 할 때 그 지금이 언제라는것 같은거요. 근데 저도 헷갈려서 간단한 표로 만들어 봤습니다 ^^;







2. 부여

[후한서] 권85 동이전 / 부여

[後漢書]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夫餘)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에 약수가 있다. 사방 2천리이고 본래 예(濊)의 땅이다.


初, 北夷索離國王出行[一], 其侍兒於後妊身[二], 王還, 欲殺之. 侍兒曰:「前見天上有氣, 大如雞子, 來降我, 因以有身.」王囚之, 後遂生男. 王令置於豕牢[三], 豕以口氣噓之, 不死. 復徙於馬蘭[四], 馬亦如之. 王以爲神, 乃聽母收養, 名曰東明. 東明長而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奔走, 南至掩?水[五], 以弓擊水, 魚鱉皆聚浮水上, 東明乘之得度, 因至夫餘而王之焉.




[一]「索」或作「橐」, 音度洛反.

[二]妊音人鴆反.

[三]牢, 圈也.

[四]蘭卽欄也.

[五]今高麗中有蓋斯水, 疑此水是也.


당초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의 왕이 출행하였다가 (1) 시아(侍兒-시녀)가 뒤에 임신하자 (2) 왕이 돌아와 그녀를 죽이려 했다. 시아가 말했다, “전에 하늘에 기운이 있는걸 보았는데 크기가 계란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게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뒤에 마침내 남자아이를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놓아두자 (3)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기니 (4) 말 또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왕이 이를 신이하게 여겨 그 모친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동명(東明)이라 이름지었다. 동명이 장성하여 활을 잘 쏘니 왕이 동명의 용맹함을 꺼려 또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달아나 엄수(掩水)에 이르러 (5)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모여 물위로 떠올라 동명이 이에 올라타 물을 건널 수 있었고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1) ‘索’은 혹은 ‘橐’(탁)이라고도 하는데 발음은 ‘度洛’(반절 표기)

(2) ‘妊’의 발음은 ‘人鴆’

(3) ‘牢’는 ‘圈’(가축의 우리)

(4) ‘蘭’은 ‘欄’(가축의 우리)

(5)지금 고려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는데 이 개사수가 이것(본문중의 엄수)이 아닐까 생각된다


於東夷之域, 最爲平敞, 土宜五穀. 出名馬、赤玉、貂豽[六], 大珠如酸棗. 以員柵爲城, 有宮室、倉庫、牢獄. 其人麤大彊勇而謹厚, 不爲寇鈔. 以弓矢刀矛爲兵. 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狗加, 其邑落皆主屬諸加. 食飲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升降. 以臘月祭天, 大會連日, 飲食歌舞, 名曰「迎鼓」. 是時斷刑獄, 解囚徒. 有軍事亦祭天, 殺牛, 以蹄占其吉凶[七]. 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絕. 其俗用刑嚴急, 被誅者皆沒其家人爲奴婢. 盜一責十二. 男女淫皆殺之, 尤治惡妒婦, 既殺, 復尸於山上. 兄死妻嫂. 死則有槨無棺. 殺人殉葬, 多者以百數. 其王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六]豽似豹, 無前足, 音奴八反.

[七]魏志曰:「牛蹄解者爲凶, 合者爲吉.」


동이의 영역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직하며 토지는 오곡(五穀)에 적합하다. 명마(名馬)과 적옥(赤玉), 담비(貂)와 놜(豽)이 나오는데, (6) 큰 구슬은 대추 크기만 하다. 원책(員柵-둥근 성책)을 성(城)으로 삼고 궁실, 창고, 감옥이 있다. 사람들은 신체가 장대하고 강용(彊勇)한데 성품이 근후(謹厚)해 노략질하지 않는다. 궁(弓), 시(矢), 도(刀), 모(矛)를 병장기로 삼는다.


6가지 가축이름을 딴 관직으로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등이 있고 그 읍락은 모두 제가(諸加)에 예속된다. 음식을 먹을 때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회동할 때 배례하여 잔을 씻고 (단을) 오르내리며 읍양(揖讓)한다. (옮긴이-주객의 상견례를 묘사하는 듯. 중국예법과 유사한 것으로 묘사)


섣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대회를 열어 연일 음식, 가무를 즐기니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금하고 죄인을 풀어 준다. 또한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 지내는데, 소를 죽여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친다. (7) 길을 갈 때 밤낮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그 노랫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 풍속은 형벌이 엄격해 사형 당한 자는 그 가인(家人)들을 모두 노비로 삼고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시킨다. 남녀가 음란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하는 여인을 미워하여 (여인을) 죽인 후 그 시신을 산에 버린다. 형이 죽이면 형수를 처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다른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하는데 (순장되는 이가) 많을 때는 백여 명에 이른다. 왕을 장사 지낼 때는 옥갑(玉匣)을 사용한다. 한조(漢朝)에서는 늘 옥갑을 현도군에 비치해두었는데 왕이 죽으면 이를 가져다 장례에 사용했다.


(6) ‘豽’은 표범과 비슷한데 앞다리가 없고 발음은 ‘奴八’(반절 표기)

(7)[위지魏志]에 이르기를 – 발굽이 갈라지면 흉조, 붙어 있으면 길조로 여긴다


建武中, 東夷諸國皆來獻見. 二十五年, 夫餘王遣使奉貢, 光武厚答報之, 於是使命歲通.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永寧元年, 乃遣嗣子尉仇台(印)[詣]闕貢獻, 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 順帝永和元年, 其王來朝京師, 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 桓帝延熹四年, 遣使朝賀貢獻. 永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 斬首千餘級. 至靈帝熹平三年, 復奉章貢獻. 夫餘本屬玄菟, 獻帝時, 其王求屬遼東云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즉위연호) 중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조공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부여왕이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후하게 답례했다. 이때부터 사절이 해마다 통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에 이르러 부여왕이 처음으로 보기(步騎) 7-8천 명을 이끌고 낙랑을 침략해 그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했다. 그 후에 다시 귀부(歸附)했다.


영녕(永寧) 원년(120년), 적자인 위구태(尉仇台)를 파견해 대궐로 나아가 조공하자 천자(天子)는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 비단을 하사했다.


순제 영화(永和) 원년(136년), 부여왕이 경사(京師)에 내조(來朝)하자 황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궁중음악의 일종)와 각저희(角抵戲)를 베풀었다.


환제 연희(延熹) 4년(161년), 사신을 보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永康) 원년(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여 명을 이끌고 현도를 침략했는데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파하고 천여 급의 머리를 베었다.


영제 희평(熹平) 3년(174년), 다시 봉장(奉章)하여 조공했다. 부여는 본래 현도(군)에 속했는데 헌제 때 부여왕이 요동(군)에 속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3. 읍루

[후한서] 권85 동이전 / 읍루

後漢書_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挹婁)


挹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有五穀、麻布, 出赤玉、好貂. 無君長, 其邑落各有大人. 處於山林之閒, 土氣極寒, 常爲穴居, 以深爲貴, 大家至接九梯. 好養豕, 食其肉, 衣其皮. 冬以豕膏塗身, 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蔽其前後. 其人臭穢不絜, 作廁於中, 圜之而居. 自漢興已後, 臣屬夫餘. 種衆雖少, 而多勇力, 處山險, 又善射, 發能入人目. 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 長一尺八寸, 青石爲鏃, 鏃皆施毒, 中人即死. 便乘船, 好寇盜, 鄰國畏患, 而卒不能服. 東夷夫餘飲食類(此)皆用俎豆, 唯挹婁獨無, 法俗最無綱紀者也


읍루(挹婁)는 옛날의 숙신국(肅愼國)이다. 부여 북동쪽 천여 리에 있다.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 북옥저(北沃沮)와 접하는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는 산이 많고 험하다. 사람의 형상은 부여와 닮았으나 언어는 각기 다르다. 오곡(五穀), 마포(麻布)가 있고 적옥(赤玉), 호초(好貂)가 산출된다.


군장(君長)이 없고 읍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산과 숲 사이에서 사는데 토기(土氣)가 매우 차가워 항상 동굴을 파서 거주하며 (동굴이) 깊을수록 귀하게 여겨 대가(大家)는 사다리 아홉 개 깊이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좋아해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두텁게 여러 번 발라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지내는데 짧은 베조각(尺布)으로 앞뒤를 가린다. 사람들은 냄새가 나고 불결해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이를 둘러싸서 거주한다.


한나라가 흥한 이후로 부여에 신속(臣屬)했다. 무리의 수가 비록 적지만 용맹하고 힘이 세다. 또한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능히 눈을 맞춘다. 활은 길이가 4척인데 그 힘이 쇠뇌(弩)와 같다. 화살로는 호나무(楛)를 쓰는데 길이 1척 8촌이고, 푸른 돌을 화살촉으로 쓰는데 화살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사람이 맞으면 죽는다.


배를 타고 약탈하는 것에 능해 이웃 나라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나 급히 제압하지는 못한다. 동이, 부여에서는 음식을 먹을 때 모두 조두(俎豆)를 사용하나 오직 읍루만은 조두가 없고 법속에 가장 기강(綱紀)이 없다




4. 고구려

[후한서] 권85 동이전 / 고구려

後漢書_卷八十五 동이열전(東夷列傳)


高句驪, 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地方二千里, 多大山深谷, 人隨而爲居. 少田業, 力作不足以自資, 故其俗節於飲食, 而好修宮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凡有五族, 有消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一]. 本消奴部爲王, 稍微弱, 後桂婁部代之. 其置官, 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二]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 武帝滅朝鮮, 以高句驪爲縣[三], 使屬玄菟, 賜鼓吹伎人.


[一]案今高驪五部:一曰內部, 一名黃部, 即桂婁部也;二曰北部, 一名後部, 即絕奴部也;三曰東部, 一名左部, 即順奴部也;四曰南部, 一名前部, 即灌奴部也;五曰西部, 一名右部, 即消奴部也.

[二]古鄒大加, 高驪掌(賀)[賓]客之官, 如鴻臚也.

[三]前書元封中, 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部)[郡]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 조선, 예맥, 동쪽으로 옥저, 북쪽으로 부여와 접한다. 그 땅은 사방 2천리에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사람들은 여기를 따라 거주한다. 논밭이 적어 부지런히 경작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음식을 절약하는 풍속이 있지만 궁실(宮室)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모두 다섯 부족으로, 소노부(消奴部)[삼국지]-연노부(涓奴部)로 표기,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있다. (1) 본래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미약해져 그 뒤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했다.


그 관직으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대가(古鄒大加), (2) 주부(主簿), 우태(優台), 사자(使者), 조의(帛衣), 선인(先人)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고 (3) 고취(鼓吹-궁중의식 때 쓰이는 음악 또는 악기), 기인(伎人)을 하사했다.


(1)지금의 고려 5부로 보면, 첫째, 내부(內部), 일명 황부(黃部)가 계루부이고, 둘째, 북부(北部), 일명 후부(後部)가 절노부이고, 셋째, 동부(東部), 일명 좌부(左部)가 순노부이고, 네째, 남부(南部), 일명 전부(前部)가 관노부이고, 다섯째, 서부(西部), 일명 우부(右部)가 소노부이다.

(2)고추대가(古鄒大加)는 고려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관직으로, 홍려(鴻臚-중국의 관직명)와 같다

(3)[전한서]에 의하면 원봉(元封-한무제 때 연호) 중에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부(군)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其俗淫, 皆絜淨自憙, 暮夜輒男女群聚爲倡樂. 好祠鬼神、社稷、零星[四],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禭神, 亦以十月迎而祭之. 其公會衣服皆錦繡, 金銀以自飾. 大加、主簿皆著幘, 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 形如弁. 無牢獄, 有罪, 諸加評議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其昏姻皆就婦家, 生子長大, 然後將還, 便稍營送終之具. 金銀財幣盡於厚葬, 積石爲封, 亦種松柏. 其人性凶急, 有氣力, 習戰斗, 好寇鈔, 沃沮、東濊皆屬焉. 句驪一名貊(耳). 有別種, 依小水爲居, 因名曰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五].


[四]前書音義:「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辰日祠以牛, 號曰零星.」風俗通曰「辰之神爲靈星」, 故以辰日祠於東南也.

[五]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 有小水南流入海, 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


그 풍속은 음란하고, 청결한 것을 좋아한다. 한밤중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 노래부른다. 귀신(鬼神), 사직(社稷), 영성(零星)(4)에 제사 지내는 것을 좋아해 10월에 제천대회(祭天大會)를 열어 이를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大穴)이 있어 이를 수신(禭神)이라 불렀는데,[삼국지]에는 ‘隧神’으로 표기 또한 10월에 이를 영접하고 제사지낸다.


공적인 모임에서는 의복으로 모두 비단옷을 입고 금은(金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 주부(主簿)는 모두 (머리에) 책(幘)을 쓰는데 관책(冠幘)처럼 뒷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형태는 고깔과 같다. 감옥은 없고 죄인이 있으면 제가(諸加)가 평의(評議)해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혼인할 때는 모두 처가에서 살다가 아들을 낳아 장성한 뒤에 이들을 데리고 돌아오며, 장례에 쓸 물건(送終之具)을 조금씩 준비한다. 금은과 재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데 돌을 쌓아 봉분으로 삼고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인성(人性)이 흉급(凶急)하고 기력(氣力)이 세고 전투에 능해 약탈을 좋아하며 옥저(沃沮),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했다. 구려(句驪)는 일명 맥(貊)이라고도 한다. 그 별종(別種)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해 살았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렀다. 좋은 활이 산출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5)


(4)[전한서-音義]에서 ‘용성(龍星)의 좌각(左角)을 천전(天田)이라 하니 즉 농상(農祥)이다. 진일(辰日)에 우성(牛星)에 제사하는데 이를 영성(零星)이라 불렀다’고 했다. [풍속통風俗通]에서 ‘진(辰)의 신(神)이 영성이다’고 했으니 진일(辰日)에 남동쪽에 제사지낸 것이다.

(5)[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이르기를 –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 바다로 유입된다. 구려의 별종이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했다.


王莽初, 發句驪兵以伐匈奴, 其人不欲行, 彊迫遣之, 皆亡出塞爲寇盜. 遼西大尹田譚追擊, 戰死. 莽令其將嚴尤擊之, 誘句驪侯騶入塞, 斬之, 傳首長安. 莽大說, 更名高句驪王爲下句驪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建武八年, 高句驪遣使朝貢, 光武復其王號. 二十三年冬,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二十五年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왕망 초에 구려병(句驪兵)을 뽑아 흉노를 토벌하려 했다. 고구려인들이 따르지 않자 강박(彊迫)하여 파견했는데 모두 새(塞) 밖으로 달아나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했으나 싸우다 죽었다.


왕망이 장수 엄우(嚴尤)에 명하여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구려후 추(騶)를 새(塞) 안으로 유인하여 참하고 그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였고 고구려왕(高句驪王)을 하구려후(下句驪侯)로 고쳐 불렀다. 이때부터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약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建武) 8년(서기 32년), 고구려가 사자를 보내 조공하자 광무제가 다시 그 왕호(王號)를 회복시켰다.


건무 23년(서기 47년) 겨울, 구려 잠지락부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으로 와서 내속했다.


건무 25년(서기 49년) 봄,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달래자 모두 돌아가 새(塞)에 머물렀다.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 國人懷之, 及長勇壯, 數犯邊境.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安帝永初五年, 宮遣使貢獻, 求屬玄菟. 元初五年, 復與濊貊寇玄菟, 攻華麗城[六]. 建光元年春,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 捕斬濊貊渠帥, 獲兵馬財物. 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 遣使詐降;光等信之, 遂成因據險阨以遮大軍, 而潛遣三千人攻玄菟、遼東, 焚城郭, 殺傷二千餘人. 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 而貊人已去.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七], 殺略吏人. 蔡諷等追擊於新昌, 戰歿, 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 俱沒於陳, 死者百餘人. 秋, 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 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 與州郡幷力討破之, 斬首五百餘級.


[六]華麗, 縣, 屬樂浪郡

[七]縣名, 屬遼東郡也


그 후 구려왕 궁(宮-6대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국인(國人)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장성하자 용맹하고 굳세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했다. 화제 원흥(元興) 원년(105년) 봄, 다시 요동에 들어와 6개 현을 약탈하자 태수 경기(耿夔)가 이를 격파하고 거수(渠帥-중국 고대사서에서 주변민족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범칭. 군장君長보다는 격이 낮음)를 참했다.


안제 영초(永初) 5년(111년), 궁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현도에 속할 것을 청했다.


원초(元初) 5년(118년), 다시 예맥(濊貊)과 함께 현도를 약탈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했다. (6)


건광(建光) 원년(121년) 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나와 고구려를 공격해, 예맥의 거수를 포획하거나 죽이고 병마(兵馬)와 재물(財物)을 노획했다. 이에 궁이 사자(嗣子-적자,상속자)인 수성(遂成-7대 차대왕, 태조대왕의 동생)을 보내 2천 여명을 지휘해 요광 등을 맞이하게 하고 사신을 보내 거짓항복 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자 수성은 험요지를 점거해 대군(大軍)을 차단하고 은밀히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도, 요동을 공격해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살상했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