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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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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118회 작성일 11-02-0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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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①고조선과 요나라

고조선은 BC 2000년쯤~BC 103년까지 존재한 한반도의 뿌리 국가라는 게 한민족의 지식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얘기였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우린 믿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런 믿음을 허문다. 먼지 허옇게 뒤집어쓴 역사책엔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916~1125)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다. 고조선이 오랑캐 나라로 이어졌다면 한민족은 뭐란 말인가. 한민족의 과거는 어떻게 된 걸까.




진나라(265∼419)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의아한 기록이 있다.

모용황(慕容<76A9>)은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용외가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때 연호) 초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 전쟁을 했다. 그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으며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 [慕容<76A9>字元眞, <5EC6>第三子也. …建武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末,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5EC6>卒, 嗣位(晉書 卷 109)]




우리가 대표적 오랑캐로 알고 있는 동호(東胡·후일의 남부의 거란계, 북부의 몽골계를 형성)의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니(당시 조선은 오늘날 요동·요서다). 조선은 한민족의 단어 아닌가.






역시 오랑캐인 거란족의 나라 요의 요사(遼史)에도 난감한 기록이 있다.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이다.




요가 고조선을 승통한 것은 영역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패수(浿水) 문제이다. 즉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어디인지에 따라 고조선의 ①대동강 중심설, ②요동 중심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20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이나 한족(漢族)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엔 삼국사기와 수경주(水經注·중국 북위 때 저술된 중국의 하천지)의 주석자인 력도원(<9148>道元·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현에서 흘러나오고라는 말을 중시하여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이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패수는 대동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수경 원문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鏤芳縣)에서 나온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사서들에서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紫蒙縣. 本漢鏤芳縣地. [(遼史 卷 38 地理志2 東京道)]고 나온다.




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黎 等城, 蓋平州之界 契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진서에는 모용외가… 자몽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는 기록이 나온다(晉書 卷 108)). 이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동호(요나라의 선민족)의 중심지가 일치하며 후대 요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동호, 즉 고조선이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는 고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본다.




이젠 다른 문제, 즉 신화를 살펴보기 위해 시기를 더 거슬러서 1세기 후반의 진수의 삼국지를 보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하여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즈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옛날 고리(<69C0>離) 왕의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닭 알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아이를 갖게 됐다고 했다. 시녀가 아이를 낳자 왕이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가 부여를 세워 다스렸다(三國志 魏書 扶餘傳)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秦開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90E4>千餘里(史記 卷110 匈奴列傳)]고 하는 기록이 있다.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鹽鐵論 卷 8 伐攻篇)라고 표현된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한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三國志 卷30 魏書30)]. 즉 고조선은 동호다. 이 동호는 어떤 존재일까.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東夷)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695B>矢)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 황제의 찬사로, 요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李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東胡)="맥(貊)으로" 보고 맥(貊)과 예(濊)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東胡)와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진서 요사 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

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사만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단군 이야기는 허황, 이치에 안맞아”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단군은 누구일까.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나라를 만든 국조(國祖)일까. 그게 진짜 고조선의 건국 신화일까. 이런 물음은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뿌리 신화로 생각하는 이들에겐 모독일 것이다. 단군이 한민족만의 신화라면 이상하다. 한반도 국가였던 고구려·백제·신라는 단군신화에 침묵한다. 그리고 1000년 지나 조선조에 와서 꽃을 피운다.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사서는 뜻밖의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사서에서 단군신화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처음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247년, 고구려 동천왕은 환도성에 병란을 겪어 평양성에 성을 쌓고 종묘사직을 옮겼는데)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집이다. 또는 왕의 도읍 터인 왕검이라고도 한다.”(“平壤者, 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三國史記 高句麗本紀東川王)고 적는다. 또 1325년(고려 충숙왕)에 쓰인 조연수묘지(趙延壽墓誌)에서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인데 … 평양 군자는 삼한 이전에도 있었고 천 년 이상을 살았다니 어떻게 이처럼 오래 살면서 또한 신선이 되었는가?”(平壤之先仙人王儉 … 平壤君子 在三韓前 壽過一千 胡考且仙)라는 기록이 있다.




‘선인왕검’이 누군지 알기는 어렵지만 ‘왕검’이란 표현 때문에 대체로 단군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이 ‘선인왕검’은 광범위한 고조선의 역사를 말하기보다 평양 지역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단군이라는 존재는 평양의 지신(地神)이나 씨족신(氏族神) 정도의 인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단군은 본래 한민족이 간직한 단군신화라고 볼 수 없다.




중국 산둥성 가상현 제령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의 벽화①. 은나라 왕의 후손으로 알려진 무영(武榮)의 묘다. 벽화엔 귀인이 천마를 타고 내려와 동쪽으로 가는 모습②, 곰과 호랑이 그림들④이 있다(붉은 사각형 내). 『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의 모습과 흡사해 단군신화의 살아있는 증거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벽화는죽은 무씨의 승천을 그린 것이며 곰은 잡신을 몰아내는 것이란 해석도 있다. 또 곰·호랑이 외에 많은 다른 동물들②③이 나와 단군신화를 말하기엔 무리란 지적이 나온다. 김운회 교수 제공


단군(檀君)이 ‘국조’로 최초로 나타난 기록은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다. 삼국유사에는 “옛 기록(古記)에 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이 내려와 곰과 교혼하여 단군이 태어나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세웠다고 한다(三國遺事 卷1)”고 기록돼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최초에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이끌었는가? 석제의 손자로 그 이름은 단군이라.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 은나라 무정 8년에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竝與帝高興戊辰 …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라고 한다. 제왕운기는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한시(漢詩) 형식으로 쓴 서사시다.




이 두 책은 모두 13세기 후반에 저술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이 단군과 관련해서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을 찾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위서(魏書) 고기(古記)등을 인용하지만 실제로 정사인 위서엔 단군신화가 없고 고기는 정확히 어떤 사서들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검증할 만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안정복은 “동방의 고기 등에 적힌 단군 이야기는 다 허황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기에 나오는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칭호는 법화경에서 나왔고, 그 밖의 칭호들도 다 중들 사이의 말이니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불교를 숭상하여 나타난 폐해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安鼎福 東史綱目第1上)”라고 했다. 정약용(丁若鏞)도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했다는 것은 믿을 만한 문헌자료가 없는 형편인데, 하물며 단군의 이름이 왕검이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 억지로 꾸며낸 것이다”(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라고 하였다.




단군을 강화하는 현상은 고려 후기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몽골 제국과의 항쟁기에 쓰인 단군본기(檀君本紀: 현재는 소실)에서는 “신라, 고구려,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은 모두 단군의 자손(壽)”이라고 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 국의 군장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이데올로기는 될 수 있지만, 과학적·역사적 증거는 될 수 없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출발하기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도 역사적 출발을 단군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선과 함께하지 않고 고조선과 어떠한 친연성도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이들 삼국이 그 스스로를 고조선과 연관시키는 그 어떤 기록도 없다.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확실히 받들어진 때는 고려 후기로, 그 기점은 몽골(원)의 세계 지배와 관련이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고려인들이 단군에 대해 인식한 것은 몽골의 침입과 간섭을 받으면서부터였다”고 지적한다. 즉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가졌던 세력이 새로운 민중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단군신화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에 단군신화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새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면 민간에 이미 단군이 인기 있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엔 정부 차원에서 단군신화를 정치이데올로기로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기록들이 많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선의 태조 13년 예조에서 올린 상서에서 “이성계를 단군 기자와 함께 중사(重事)할 것”을 주장했고 예조전서 조박(趙璞)은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고 최초의 민족 시조로 존숭하여 국민의식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하륜(河崙)은 “단군을 기자묘에 합사해야 한다”고 했고 조정은 받아들였다. 세종 때 변계량(卞季良)은 단군 존숭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여 삼국의 시조로서 단군의 위상을 정립하고 천자만이 행하는 제천의식을 부활시키기도 했다. 종합하면 단군신화는 몽골의 지배 하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반고려(反高麗)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정립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단군신화가 민간 전승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 근원을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이르는 보편적인 신화나 설화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환웅과 곰(웅녀)의 결합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交合)이라는 수조신화(獸祖神話)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고대관념이었다. 물론 수조신화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만 곰을 조상으로 보는 건국 또는 시조 신화는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까지 분포돼 있다. 중국 본토와는 거리가 있다.




다만 웅녀(熊女: 곰)에 대한 관념의 변이는 민족 이동 및 정치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컨대 시베리아에 가까울수록 곰의 중요성이 커져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남부(예를 들면, 한국 공주지역)로 내려갈수록 곰의 위상이 추락해 결국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된다. 단군신화에서 웅녀는 환웅의 역할을 지원하는 조연으로 나타나 정치적으로 환웅족에 의해 웅녀족(곰토템족)이 복속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신화 전문가인 서울대 조현설 교수는 “신화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정치세력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을 때 지켜진다”고 한다.




고대 한국인의 ‘곰 숭배’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보이는 ‘대금(大金)’이라는 말은 큰곰, 대칸(큰 임금)을 의미하고 용비어천가에서도 광개토대왕비를 대금비(大金碑)라 한다. 한글 연구가 발달한 북한에서는 일찌감치 ‘곰’이 ‘임금’의 ‘금’과 어원이 같은 말로 파악한다. 즉 한국어에서 최고의 존칭으로 사용된 말인 ‘님곰’, ‘왕검(王儉)’, ‘니사금(尼師今)’, ‘대금’, ‘한곰’, ‘임금’ 등은 모두 ‘곰’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단군신화에 보이는 ‘궁홀산(弓忽山)’에서 ‘궁홀’이 바로 ‘곰골’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양서에 나타나는 백제 수도의 옛말인 고마성(固痲城)(梁書 諸夷傳),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개모성(盖牟城)’과 마한 55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도 곰을 한자식으로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곰과 관련된 지명은 만주와 한반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야를 넓혀, 곰 숭배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아무르강의 울치족·나나이족이다. 울치족은 어린 곰을 기르다가 자라면 활로 죽여 그 고기로 잔치를 벌인다. 자신의 조상인 곰이 죽으면서 자신의 살을 후손들에게 먹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울치족과 동계인 나나이족은 아무르강 유역에 많은 암각화를 남겼는데 이것은 한반도 남단 울주의 암각화와 유사하여 관련 전문가인 부경대 강인욱 교수와 한국전통문화학교 정석배 교수는 이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만주어에서 마파(mafa)라는 말은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이것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의 언어에서만 발견되는데 모두 ‘할아버지’ 또는 ‘곰(熊)’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곰을 조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어학자 정호완(대구대)은 어머니도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곰→홈→옴→옴마(엄마)’]. 알타이어 학자 람스테트(Ramstedt)도 무성파열음 기역(ㄱ)의 변이를 ‘ㄱ→ㅎ→ㅇ’으로 풀이하였다. 정호완 대구대 교수는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 입문서인 신증유합(新增類合, 1576)에서 경(敬), 건(虔), 흠(欽) 등의 훈을 ‘고마’로 하여 고마(곰)가 경건하게 숭배하고 흠모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 주는 보기들을 지적하였다.




결국 단군신화는 13세기에 잡기류(雜記類)인 삼국유사와 시문집(詩文集)인 제왕운기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그 어떤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반고려·반원 세력의 정치적 민중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에 한국사의 주체들(고구려·백제·신라)이 단군과 관련해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한 증거들은 없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내용은 설화 수준으로 역사적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단군신화가 민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민간에는 단군신화와 유사한 신화나 설화가 광범위하게 전승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단군신화는 시베리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곰 숭배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변이과정을 통해 민족의 분화와 융합을 추적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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