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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멸망-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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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3,522회 작성일 04-05-1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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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의 멸망

 

{삼국유사}는 단군이 세운 조선을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고 부르고 이를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여 '고조선(古朝鮮)'이라 하였다. 흔히 고조선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개창한 조선시기에 들어와서야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고려 혹은 그 이전 시기부터 단군조선을 지칭하는 말로 고조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는 일반적으로 단군조선뿐 아니라 기자조선·위만조선을 함께 일컬어 고조선이라고 한다. 종래의 이해대로 단군조선이 기자조선(箕子朝鮮)―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계승된 것이었는지, 최근의 일설(一說)대로 단군조선과 무관하게 성립한 기자조선을 위만조선이 계승한 후 단군조선의 영토를 잠식하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중국측 문헌에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위만이 세운 위씨조선(衛氏朝鮮)부터이다. 위씨조선은 우거왕(右渠王) 때에, 발달된 철기 문화에 기초한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지고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였으며, 중국과 토착 사회를 중개하는 중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함으로써 동방 사회의 강자로 등장하였다. 이에 한반도 내부의 진국(辰國)과, 압록강 중류와 동가강(佳江) 유역에 자리잡고 있던 예군(濊君) 남여(南閭)의 세력은 큰 압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근접한 지역에서 압력을 받던 예군 남여는 한(漢)에 투항을 하고 말았는데 한 나라는 이를 계기로 하여 예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고 예인(濊人)을 이용하여 위씨조선에 압력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의 이러한 뜻은 예인의 반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창해군도 몇 년 만에 없어졌다 [자료1]. 고조선은 기자조선 후기 이후로 철기 문화의 발달과 진전으로 말미암아 심한 사회 변동을 겪고 있었다. 청동기를 만드는 데에는 구리와 주석의 확보가 동시에 요구되었으므로 청동기의 소유가 일부 우세 부족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하였으나, 철기는 고열(高熱)을 낼 수 있는 방법만 알면 도처에 분포한 철광에서 얼마든지 손쉽게 제련해 낼 수 있었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정치 세력의 질과 수가 전지역에서 크게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家)를 중심으로 할 만큼 소유 주체의 규모가 축소되어 있었던 데다가 철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니 가부장권이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써 이들이 구태의연하게 수취를 강요해 오는 중앙의 통치 체제에 반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됨에 따라 야기된 사회 변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 정부는 끝내 새롭게 성장하는 이들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위만(衛滿)에게 쉽사리 정권을 빼앗기고 만 준왕(準王)의 모습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거니와, 우거왕과 뜻이 맞지 않아 2천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가버렸다는 조선상 역계경의 경우에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고조선과 진국'의 자료6]. 위씨조선에 복속하던 예군 남여가 한에 투항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한은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후 이 지역에 4군을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그 통치의 방향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여하한 영도 세력의 성장도 적극적으로 방해하여 소규모로 개별화시킴으로써 직접 통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영향으로 말미암아 군현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까지도 점차 경제적 문화적으로 그 영향권 속에 흡수되어 갔다. 한(韓) 사회에서도 진국을 중심으로 한 기존 질서가 동요되어 각기 성장한 각급 읍락의 수장세력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소국(小國)들의 분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제 새로운 정치 체제의 성립은 안팎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내지 않으면 이룩되기 어렵게 되었다. 즉 안으로는 각처에서 흥기하는 수장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터전을 발견하여 이들을 자기 지배체제 속에 편입하는 문제였고, 밖으로는 중국 문화의 지배력에서 이탈하는 한편 다투어 일어나고 있던 다른 새외민족(塞外民族)과의 충돌에서 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제였다. 중국 군현의 통제와 이에 대항하는 우리 민족의 투쟁은 이같은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토착 사회 내부는 이미 60여 조의 법금으로도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분화되어 있었다 [자료1] [자료7]. 특히 고구려 지역에서 사회 분화의 정도가 두드러졌다. 《삼국지》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으며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렀고, 하호가 멀리서 양식과 어염(魚鹽)을 공급해 왔다."고 한 것은 그 편모를 엿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능케 했던 배경으로는 첫째, 고구려의 영역 내에 평야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 생산량이 빈약하여 그 결핍분을 전투에 의한 노획으로 보충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전쟁을 통하여 주변세력을 복속시키고 그 지역의 산물을 요구하였으니, 고구려인으로서는 전투가 곧 생산활동이었고, 그러한 약탈경제적 구조로 말미암아 계급관계를 비롯한 사회 조직의 분화가 철저히 이루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인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나서 평소에도 언제나 뛰어다녔다고 하며, 결혼할 때에 아예 수의(壽衣)를 지어왔다고 한다. 생산 활동으로써의 전투는 일상생활이었으며, 따라서 죽음도 역시 상사로 여긴 때문이었다. 둘째로는, 강력한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두고 등장한 재지 수장세력들을 통합하는 역사 경험은 전대(前代)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어서 그 진행 과정 자체가 보다 분화되고 강화된 계급현상을 초래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농업공동체의 부족적(部族的) 기반과 그 이해 관계를 완전히 해체한 위에서 새로운 체제를 형성하였던 나집단(那集團)들을 다시 국가적 이해 관계 속에 통합해 들이는 과정은 사회 조직의 철저한 재편성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중앙 권력은 점차로 지금까지 각 부족들이 개별적으로 행사해 오던 대외 무역권과 외교권을 박탈해 나아갔다. 한군현으로부터 조복(朝服)과 의책(衣)을 받는 수장층의 명부를 스스로 주관하여 각 수장층의 개별 행동을 막았기 때문에 현도군이 할 수 없이 작은 성―뒤에 고구려인들이 이 성을 책구루(溝)라 불렀다―을 쌓았던 것은 이러한 사실의 반영이다 [자료4]. 이 때의 조복의책은 곧 군현에 대한 신속(臣屬)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역권의 부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화되어 나간 중앙 권력은 나집단(那集團)을 점차 행정구역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부(部)로 편성하였다. 고구려가 중앙의 계루부(桂婁部)를 중심으로 하여 방위에 따라 절노부(絶奴部), 소노부(消奴部), 관노부(灌奴部), 환나부(桓那部)의 5부를 성립시켰던 것은 태조왕 대(A.D. 53∼146)의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삼한사회에서도 군현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해 나가려는 노력은 집요하게 시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세기 후엽에는 군현이 능히 제어하지 못 할 정도로 진전을 보았다. 이 시기는 후한(後漢)의 말기로서 중국이 내부에서 동요하던 때이기도 하였다. 이를 틈타, 한(韓) 사회에서 강력하게 대두하던 백제·신라세력이 낙랑과 교전하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넓히고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촉(蜀)·오(吳)와 대립하던 위(魏)가 안정되어 낙랑과 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립하자 사정은 급박해졌다. 한(韓)·예(濊) 지역 토착사회의 각 군장에게 [왕(王)]이니 [후(侯)]니 [읍군(邑君)]이니 하는 중국식의 관호를 부여하고 개별적으로 조복의책을 줌으로써 통합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분열과 대립을 획책하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조복의책을 받은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 분열의 정도를 반영한다 [자료3]. 이들은 위솔선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伯), 장(長), 후(侯) 등 위 나라의 관호를 받고 위의 토착사회 지배를 위한 출장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사회(韓社會)의 사회·경제적인 여건에서 말미암은 것일 터이지만, 일찍이 진국(辰國)의 해체가 유이민의 대규모 유입과 그 철기 문화의 압력으로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기 때문에 신흥 수장층이 그 문화적인 낙차를 중국의 군현을 통하여 쉽게 메우고자 한 데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즉 수장세력의 성장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기존 체제를 극복하고 나름대로 그것을 새롭게 재편성하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요된 조건에 힘입어 일단 기존체제를 부정하는 단계에서 어설프게 성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기존 체제를 재편하면서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외부 문화의 지원이 필요하였던 것이고, 한사회(韓社會)의 수장들은 이러한 상황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였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 방면과 한·예 방면에서 중국의 군현에 대응하는 방식과 수준이 달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자가 처한 내부 문제를 각기 철저하게 풀어나갔다는 점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대(對) 한족 투쟁이 성공적으로 매듭지워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史記} :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사서로 원명은 {태사공서(太史公書)}이다. 사마천은 조선이 멸망하던 B.C. 108년에 태사공이 되면서 사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여 B.C. 91년에 이 책의 대강을 완성하였다. 따라서 이 사서의 조선열전은 조선의 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사정, 특히 한(漢)의 조선 침략 이후 전개된 전투 과정이 상세하며, 자료적 신빙도도 높다. {後漢書} : 남송(南宋)의 범엽(范曄 ; 398∼445)이 지은 後漢 14세 195년간(25∼219)의 정사(正史). 본기 10, 지 30, 열전 80으로 총 120권. 표(表)가 없다. 지 30권은 범엽이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양인(梁人) 유소(劉昭)가 사마표(司馬彪)의 {속한서(續漢書)} 8편을 취하여서 보결한 것이다. 육이열전(六夷列傳)의 맨 앞에 나오는 [동이열전]에는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북옥저· 예· 한· 왜의 각전(各傳)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삼국지}의 기사를 부분적으로 수정한 것에 불과하고, 서술 내용 보다는 체제의 형식에 치우쳐 사실을 오도한 부분이 많으며 특히 한전(韓傳)은 개악(改惡)이 심하다고 평가되어 있다. 그렇지만 동옥저전·예전 등에 다른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 사료가 기술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생각컨대, 치밀한 문헌적 분석 없이 무턱대고 두찬(杜撰)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은 옳바른 태도가 아니라 할 것이다. {三國志}: 진(晉) 나라의 진수(陳壽 ; 233∼297)가 그 말년에 사찬한 삼국시대 66년간(220∼265)의 정사. 위지(魏志) 30, 촉지(蜀志) 15, 오지(吳志) 20으로 총 65권. 삼국 중 위 나라를 정통으로 삼아 그 제(帝)를 본기에 서술하고 촉·오의 제는 열전에 서술하여 후일 정통(正統)에 대한 시비와 논쟁을 야기시켰다. 5세기 중엽 남송(南宋)의 배송지(裴松之)가 어환(魚)의 {위략(魏略)}·왕은(王隱)의 {촉기(蜀記)}·장발(張勃)의 {오록(吳錄)} 등 여러 가지 기록을 추가 보충한 것이 오늘에 전한다. [동이전]은 권30 [오환선비동이전(吳丸鮮卑東夷傳)]에 수록되어 있는데, 중국과 직접 관계되는 대외적 사건의 기술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동이(東夷) 제족(諸族)의 지리·정치·사회·문화의 실상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서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진수가 동이 지역을 실제로 답사하여 그 견문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문(傳聞)에 의존하여 안일하게 서술한 것이어서 어느 시기의 전문을 채록한 것인지 기사(記事) 내용의 시점(時點)이 불분명한 경우도 있고 지나치게 치우친 중국 중심의 시각(視角)을 보이는 경우도 있는 만큼 다른 사서와의 정밀한 문헌적 비교 검토를 거친 뒤에 사료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金貞培, {韓國民族文化의 起源}, 1973. 高麗大學出版部.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博英社. 盧泰敦, [古朝鮮史硏究의 現況과 課題], {韓國上古史}, 1989, 民音社. 權五重, {樂浪郡硏究}, 1992, 一潮閣. 



출전 : 미상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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