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 고조선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2,707회 작성일 13-11-13 16:52

본문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낙랑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무제 원봉3년에 열었다.망은 이곳은 낙선樂鮮으로서 유주幽州에 붙였다고 했다.응소는 이곳이 옛날 조선국이라 했다. 62,812戶요,인구는406,748人.운장雲鄣이 있고 현縣은25개 이다.


위 지도는《당토명승도회>의'영평부'지도다.위 지도에 난하가 보이고,고조선성이 보이며,고죽국이 보인다.난하를 옛날에는 요수라 하였다.이 요수(난하)의 동쪽이 요동지방이고,서쪽이 요서지방이다.이 지역은 과거 고조선의 강역이었다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한서-설선열전]은"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유주는 북경부근이다.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작성한[중국역사지도집]제2권27~28쪽에서는 일제 식민사학과 학국 주류 사학계의 위치비정을 받아들여 유주의 관할지를 한번도 중북부지역까지 길게 늘여서 그려놓았다.그러나 북경 부근에 있던 유주자사가 내몽골 만주 그리고 한반도까지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낙랑은 옛 우북평 북연이다.

[광여]에 영평부 연혁을 기술하면서“옛 우북평 북연이 낙랑이다”라고 하였다.북평군은 어양군과 함께 오늘날의 하북성 난하 부근에 있었다.낙랑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하나의 근거가 된다.


낙랑군25현:《한서》《지리지>樂浪郡소속25현

조선朝鮮,염한冉邯,패수浿水,함자含資, 점제黏蟬[占蟬],수성遂成,증지增地,대방帶方,사망駟望,해명海冥,열구列口,장잠長岑,둔유屯有,소명昭明,누방鏤方,제해提奚,혼미渾彌,탄열吞列,동이東暆,불이不而,잠태蠶臺,화려華麗,사두매邪頭昧,전막前莫,부조夫租


낙랑군의 25현을 다 뒤져봐도 한반도 내에는 없다


조선현

국역사지도집 제 4책 북조 위조에는 난하 부근에 평주 소속으로 조선현이 있다. 이때 조선현은 백록산과 백랑수가 있는 즉 대릉하 유역 아래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원래 낙랑군의 조선현이 있던 자리여서 그 흔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금나라 시대에도 오늘날의 내몽고 적봉시 부근에 각각 삼한현을 설치한 사례가 있다. 이 지역이 만약 우리민족과 전혀 무관하다면 남북조 시대 북조의 위가 왜 여기에 조선현을 설치하고 요나라와 금나라 시대에 어째서 이곳에 삼한현을 설치했겠는가. 이것을 우연의 소치로 돌리기보다는 이곳이 원래 역사적으로 고조선 낙랑군의 터전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사료를 토대로 검토해보면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갈석산 일대 난하 유역 부근의 낙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조선현(朝鮮縣)의 위치를 살펴본다.

「朝鮮城在永平府境內 郡名 孤竹古名 北平爲秦名 盧龍爲魏名 北燕爲平州及樂浪郡 北魏改樂浪爲北平. 조선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 북평은 군 이름이다. 고죽은 옛 이름이고, 북평은 진나라 때 이름이며, 노룡은 북위 때 이름이다. 북연 때는 평주와 낙랑군이라 불렀고, 북위 때 낙랑군을 북평군으로 바꾸었다.」


大明一統志 北平郡

북위(北魏) 때 북평군(北平郡) 노룡현(盧龍縣)이 설치된 곳이나, 명(明)나라 때 영평부(永平府)가 설치된 곳은 난하(灤河) 방면이므로, 조선현(朝鮮縣)이 설치된 곳은 난하 방면이다.


遂城縣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수성현은 본래 낙랑군 25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수서 지리지에는 수성현이 상곡군의 소속현으로 되어있다. 한나라의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그 소속현 중의 하나인 수성현이 수나라 시대에 갑자기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부근에 있던 상곡군에 소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사기 고제본기] 색은에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이곳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고 하였다.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발해를 마주하여 우뚝 솟아 있다. 중국 공산당 간부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북대하가 이부근에 있다.


증지현,패수현,함자현,대방현,대수현

증지增地: 망은 이곳을 증토增土라고 하였다.


패수현(浿水縣), 증지현(增地縣)은 패수(浿水) 가에 있었다


함자含資,대방帶方,대수帶水 :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함자현(含資縣), 대방현(帶方縣)은 대수(帶水) 강변에 있었다



낙랑군 지역의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전한서지리지(前漢書地理志)에 의하면 낙랑군(樂浪郡) 지역에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있었고, 패수(浿水) 가에는 패수현(浿水縣)과 증지현(增地縣)이, 대수(帶水) 가에는 함자현(含資縣)과 대방현(帶方縣)이 각각 있었다.

「패수현에는 패수가 있는데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浿水(縣) 水西至增地入海」前漢書 地里志

「함자현에는 대수가 있는데 대수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含資(縣) 帶水西至帶方入海」前漢書 地里志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요양현(遼陽縣)에 대한 주석(註釋)을 보면 요양(遼陽)이 한(漢) 시대에 패수현이라고 적혀 있다. 「요양현..한 시대의 패수현이다. 遼陽縣...漢壩水縣」遼史 地理志 [註 浿水縣의 오기로 보인다.]



요양(遼陽) 옆을 흐르고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은 태자하(太子河)이므로, 위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 문구에 의하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는 태자하(太子河)이다. 또 대수(帶水)는 패수(浿水)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므로, 태자하(太子河)와 하류(下流)에서 만나는 혼하(渾河)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낙랑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는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는 요동반도에 있는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이다.


점제현

일본은 낙랑군이 평양중심으로 형성된 중국의 부속지역이라고주장하고 있으나 점제비를 분석한 결과, 중국 랴오닝성 근방 화강석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낙랑군은 조선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점제비는 낙랑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점제현이 있었으며, 점제현장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비였어요. 방향이 갈석산에 맞으며, 돌산을 쪼아 다른 비석을 그곳에 맞춘 것 이지요” (손보기 교수)


해명현 :망은 이곳을 해환海桓이라고 했다. 海冥이 아니라 溟海일 가능성이 높다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를 살펴보면 《한서 지리지>에 낙랑(樂浪)군의 현 중에 해명현(海冥縣)이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을 보면 해명(海冥)이 아니라 명해(溟海)일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자치통감》

左十二軍出 鏤方 長岑 溟海 葢馬 建安 南蘇 遼東 玄菟 扶餘 朝鮮 沃沮 樂浪 等道.

고구려 공격 당시 좌 12군의 진군 경로를 나타내는데, 여기에 보면 명해(溟海)가 있다. 《자치통감>의 주석에 溟海葢即漢樂浪郡之海冥縣(명해는 대개 즉 漢 낙랑군의 해명현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도 자치통감을 따라 해명(海冥)이라 하지 않고 명해(溟海)라 하였다. 명해(溟海)라는 지명은 자치통감이 쓰여진 이후의 어떤 사서의 지리지에도 나타나지 않다가 갑자기 명일통지에 나타난다.



《명일통지》

溟海, 在昌黎縣東二十里. 명해(溟海)는 창려현(昌黎縣)에서 동쪽으로 20리에 있다.

응소는 한서지리지의 交黎가 바로 昌黎라고 하였다. 따라서 낙랑군 해명현 즉 명해는 창려의 동쪽 20리에 있다는 것인데, 1805년에 발간된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에 나온 지도에 표기된 것을 보면 창려의 동쪽에 溟海가 표기된 사실을 알수가 있다. 결국 중국측이 주장하는 낙랑군(樂浪郡)은 今 요녕성 난하 주변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사지리지] 흥주(興州)는 본디 한나라 때에는 해명현(海冥縣)이었으며,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다.


장잠長岑현 장잠현은 요동에 있다


《후한서(後漢書)> ‘최인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하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후한서 최인 열전을 보면 최씨가 낙랑에서 유력한 가문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인은 후한의 화제(和帝)(88~105) 때의 사람으로 그가 좌천되어 낙랑 지역으로 부임을 명받자 먼 곳으로 갈 수 없어 낙향한 관리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에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이 전권을 휘두르면서 방자하게 굴었는데 탁군(涿郡)의 하급 관리로 있던 최인(崔駰)이 글을 올려 그의 장단점에 대해 자주 지적하였다. 이에 두헌은 그를 멀리하여 최인의 고과(考課)를 높게 매겨 바깥으로 내보내 장잠장(長岑長)이 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장잠현(長岑縣)은 낙랑군에 소속되었다.그 땅은 요동에 있다.


(崔駰) 崔駰字亭伯, 涿郡 安平人也. …… 及憲爲車騎將軍, 辟駰爲掾. 憲府貴重, 掾屬三十人, 皆故刺史·二千石, 唯駰以處士年少, 擢在其閒. 憲擅權驕恣, 駰數諫之. 及出擊匈奴, 道路愈多不法, 駰爲主簿, 前後奏記數十, 指切長短. 憲不能容, 稍疎之, 因察駰高第, 出爲長岑長. 長岑, 縣, 屬樂浪郡, 其地在遼東. (後漢書 卷五十二 崔駰列傳 第四十二)

요사지리지 숭주(崇州)는 본디 한나라 때의 장잠현(長岑縣) 지역이었으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되는 곳에 있다


누방鏤方현

수경 패수조에 보면 패수의 위치에 관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다.

浿水出樂浪郡樓方縣 東方過於臨溟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 나와 동쪽으로 임명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중국 쪽의 물은 대개가 아니, 모두가 동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왜 그런가하면 서쪽엔 바다가 없기 때문이다.

설문해자 浿 해석은 아래와 같다


수경주(水經注) 패수조의 해석은 패수는 동쪽 바다로 흘러간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청천강이나 압록강은 말이 안되는 것이고 현재의 중국 위치에서 찾아봐야 한다.


루방현은 어디인가?

수경의 원문으로 돌아보자 [수경]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을 살펴보면 나온다”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문헌들을 살펴보면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대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고 나온다.


청나라 때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1613~1682)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紫蒙縣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黎 等城, 蓋平州之界 契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우리가 배운 고조선은 가짜다 김운회 교수 24p) 김운회 교수의 글을 따라서 요사의 기록을 자세히 보자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漢)나라 누방현(鏤芳縣)의 땅이다. 후에 불열국(拂涅國)으로 동평부(東平府)를 두고 몽주(蒙州)의 자몽현(紫蒙縣)을 거느리게 했다. 후에 요성(遼城)으로 옮겨 함께 황령현(黃嶺縣)으로 들였다. 발해(渤海)가 다시 자몽현(紫蒙縣)으로 삼았다. 호(戶)가 일천(一千)이다.


紫蒙縣。本漢鏤芳縣地。後拂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後徙遼城,併入黃嶺縣。渤海復爲紫蒙縣。戶一千。>


탄열현,열구현

탄열呑列현: 분여산分黎山, 열수列水가 여기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흘러 점제黏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820리이다.


열구列口현 열구와 탄열은 열수와 관계가 있다.


[성경통지] 열수(列水)는, 한나라 때의 낙랑군에 열구성(列口城)이 있는데, 열수가 나오는 곳이다.


곽박(郭璞)의 《산해경주(山海經注)》를 보면, 열수가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사기 조선전의 열수洌水

[史記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 第五十五

集解張晏曰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為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索隱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故名也 汕一音訕

朝鮮王滿者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為置吏築鄣塞 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為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為界屬燕.]

[注 正義潮仙二音 括地誌云 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注 集解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 索隱韋昭云 古邑名 徐廣曰昌黎有險瀆縣 應劭注地理志遼東險瀆縣朝鮮王舊都 臣瓚云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

史記 朝鮮傳 注에 나오는 濕水, 洌水, 汕水는 어느 강일까?

洌水와 汕水의 위치는 古地圖에 나오지 않지만 濕水는 宋나라 때 만든 禹迹圖에 그 위치가 나오는데, 현재 桑乾河 방면이다. 이 물이 永定河로 흘러 海河(우적도에는 沽水로 적혀 있다.)를 지나 천진 방면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隋書地理志 馬邑郡에는 濕水가 나온다.


「馬邑郡舊置朔州 開皇初置總管府 大業初府廢 統縣四 戶四千六百七十四 善陽後齊置 縣曰招遠 郡曰廣安 開皇初郡廢 大業初縣改曰善陽 置代郡 尋曰馬邑 又有後魏桑乾郡 後齊以置朔州及廣寧郡 後周郡廢 大業初州廢 神武後魏置神武郡 後齊改曰太平 後周罷郡 有桑乾水 雲內後魏立平齊郡 尋廢 後齊改曰太平縣 後周改曰雲中 開皇初改曰雲內 有後魏都 置司州 又有後齊安遠 臨塞 威遠 臨陽等郡屬北恆州 後周並廢 有純真山 白登山 武周山 有濕水 開陽舊曰長寧 後齊置齊德.長寧二郡 後周廢齊德郡 開皇初郡廢 十九年縣改曰開陽」 志第二十五 地理中

위에 인용한 史記 朝鮮傳 문구에는 燕나라에 서쪽 땅을 빼앗기기 전까지 上谷, 漁陽, 右北平 등지가 朝鮮의 영역이었는 점과, 濕水가 桑乾河 방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史記 朝鮮傳 注에 나오는 洌水는 고대에 지금의 永定河, 海河 방면으로 흘러간 강줄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注 正義潮仙二音 括地誌云 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문구의 朝鮮은 西北韓을 가리키는데, 이곳은 後漢 때 樂浪郡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朝鮮의 語原이 생겨난 시기는 管子, 山海經이 지어진 春秋戰國時代이므로, 이때에 朝鮮은 渤海北岸에 있었다. 즉 朝鮮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시기의 洌水는 西北韓이 아니라 渤海北岸에 있었다.

혹자는 漢書地理志 樂浪郡 呑列縣에 나오는 列水를 史記 朝鮮傳 注에 나오는 洌水로 보고 있으나, 樂浪郡 呑列縣에 나오는 列水는 朝鮮의 어원이 생겨나게 된 濕水, 汕水와 함께 있었는 洌水가 아니다.

漢書地理志 樂浪郡 문구를 살펴본다.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 縣二十五 朝鮮 龠邯 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 含資 帶水西至帶方入海 黏蟬 遂成 增地 莽曰增土 帶方 駟望 海冥莽曰海桓 列口 長岑 屯有 昭明南部都尉治 鏤方 提奚 渾彌 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行八百二十里 東暆 不而東部都尉治 蠶台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위 漢書地理志에 나오는 列口는 樓船將軍이 왕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간 곳으로 朝鮮의 어원이 생겨나게 된 濕水, 汕水와 함께 있었는 洌水가 아니다.

「樓船將軍亦坐兵至列口 注蘇林曰列口縣名也 胡三省曰其地當洌水入海之口 臣召南 按樂浪郡有列口縣然非洌水入海之口也 志曰呑列縣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然則列口在黏蟬縣矣」 출처:

http://dsr.nii.ac.jp/toyobunko/XI-3-A-b-53/V-95/page/0051.html.ja


따라서 呑列縣과 관련하여 나오는 列水는 濕水와 함께 朝鮮의 어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오는 洌水와 전혀 다른 강이고, 고대에 遼河, 渾河, 太子河가 하류에서 합쳐 바다로 들어간 洌水이다.


열구列口현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무덤군과 장무이 무덤. 이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이 나왔다고 대방군 지역으로 확정한 것이지만 낙랑군이 망한 지 35년 후에도 이 지역은 한사군이 지배했다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주류 사학계는 대방군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군으로 보는 데 이론이 없을지 모르지만 《후한서> 주석자는 “곽박(郭璞)이 《산해경>에서 ‘열(列)은 강의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열구가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동이현東暆 불이현不而 잠태현蠶台 화려현華麗 사두매현邪頭昧 전막현前莫 요조현夭祖

《삼국지》 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부도위의 치소는 불내성(不耐城)이며, 별도로 고개 동쪽의 7현을 주관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낙랑군 불이현은 동부도위의 치소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불내(不耐)는 바로 불이(不而)의 음이 바뀐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은 바로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낙랑에 소속된 동이(東暆), 불이(不而), 잠대(蠶台), 화려(華麗), 야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이다. 《무릉서(茂陵書)》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이다.” 하였으며, 《삼국지》 예전에는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은 모두 예(濊)로써 백성을 삼는다.”

단단대령(單單大山領) 서쪽은 낙랑(樂浪)에 소속 되었고 고개 동쪽 칠현(七縣)은 도위를 두어 다스리게 했다. 이 지방 백성은 모두 예(濊)땅 백성인데 뒤에 와서는 도위를 없애고 그곳 우두머리(渠帥거수)를 뽑아 후(侯)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지금의 불내(不耐),예(濊)는 모두 그 종족들이다.


단단대령單單大嶺 방어선

吉林合達嶺과 千山山脈 산줄기를 이용한 방어선으로 고구려의 가장 중요한 방어선이다. 이 방어선은 吉林에서 撫順 방면을 지나 千山山脈을 지나 西韓灣에 이르는데, 만주 중앙을 비스듬히 길게 가로 지른다. 이 단단대령 방어선은 太子河가 천산산맥 산줄기를 뚫고 흐르는 계곡(南路)과 渾河가 천산산맥 산줄기를 뚫고 흐르는 계곡(北路)이 약점이다. 그래서 南路와 北路에 차단성을 쌓았고, 南路와 北路가 합치지는 곳에 五女山城을 쌓아 지키고 거기서 판차령을 넘어 국내성으로 가는 길에 관마장차단성과 망파령차단성을 쌓아 수도 국내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켰다. 이 단단대령방어선은 桓仁이나 集安을 지키는 아주 중요한 방어선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군사들은 단단대령 방어선에서 결사적으로 방어하였고, 단단대령 방어선의 南路나 北路 중 한 곳이라도 뚫리면 고구려왕은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즉 난하 방어선은 중국왕조 정벌군의 補給路와 後軍路를 차단하여 중국왕조 군사들을 孤立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단단대령 방어선은 중국왕조 군사들이 首都로 진군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단단대령의 위치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

안정복 :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이병도는《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한다.

북한의 이지린은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192쪽》: “단단대령의 령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단단대령 = 개마대산》

단단대령은 북경의 동북이자, 적봉의 서쪽에 대체로 남북으로(약간 서북에서 동남으로) 뻗은 지금의 칠로도산(七老圖山)에 해당한다.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예전에 전한말(서기 8년 망)에 단단대령의 동부 낙랑의 영동7현이 분명히 고구려에 속했다고 되어있다.

초기고구려의 강역도 서발해의 북에 있었던 것이다. 이 영동7현은 하북성의 동부에 있던 낙랑군의 북부에 해당하고 현재의 칠로도산의 동부, 적봉(赤峰)과 승덕(承德) 사이로부터 난하의 흐름을 따라 창려, 산해관 정도까지일 것이다.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