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시 대흥구(大興區)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낙랑군 묘분 > 고조선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낙랑군 묘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1,889회 작성일 15-05-13 03:27

본문

경화시보(京華時報)

기자 장연(張然)




일전에 기자는 북경시문물국(北京市文物局)의 고고학 관련인원이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황촌진(黃村鎮)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견된 대규모 묘분군에 대한 발굴사업에 대한 소식을 알았다. 두 번에 걸친 행한 발굴사업의 대상은 모두 129좌의 고분군이다. 현재 54좌의 분묘는 아직 발굴하지 않았다. 북경시문물국은 5월 말에서 6월 초까지 발굴작업을 끝낼 계획이고 동시에 문물보호사업도 함께 할 계획이다. 현재 묘분군에 대해 24시간 순찰을 돌며 감시하고 있는 중이며 적외선촬영기와 첨단과학기기를 동원하여 보호하고 있다. 아직 원래의 유적지를 그대로 유지보존할 것인지의 여부와 고고학적인 평가는 아직 내리기 전이다.


문물국의 설명에 의하면 새로 발견된 묘분군은 북경시 대흥구 황촌진 삼합장촌에 위치해 있으며 삼합장촌은 대흥구 중심지에서 북변으로 연결된 곳이다.


  북경시문물국의 책임자가 설명하기를 2010년 북경시 대흥구 황촌진 삼합장촌에 주거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A, B, C 세 구역으로 나누어 토지정리를 할 때 고고학적 탐사를 함께 시작했다고 했다. 정지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단지 국부적인 조사만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2013년 말에서 2014년 상반기 까지 7개월 동안 시행한 탐사작업의 결과 고대 묘분군 129좌를 찾아냈다고 했다. 2014년 10월 10일 북경시 문물연구소가 진행한 고분군에 대한 발굴작업은 불순한 일기 탓으로 계속 진행시키지 못하고 14년 12월 31일 발굴작업을 일단은 중지하고 동절기 동안 쉬어야했다. 다시 2달 반 동안 75좌의 발굴작업을 완료한 바 그 중 7좌는 東漢, 2좌는 北朝, 33좌는 唐朝, 또 33좌는 遼朝 때의 것으로 밝혀졌다. 묘지는 매우 긴 세월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각 묘분군이 조성된 연대도 크게 차이가 나고 또한 묘분의 숫자도 매우 많았으며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 이런 묘분군은 북경지구에서 극히 보기 힘든 경우였다고 했다.


 동한시대의 분묘 7기

 사다리꼴 모양의 벽돌관의 특징



 7기의 한나라 묘분은 전부 작은 벽돌방에 한 사람씩 부장한 형태로 관 또한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런 형태의 관을 벽돌덧널묘[磚槨墓(전곽묘)]라고 칭한다. 묘분은 모두 평민들 것으로 도기와 동전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해당 묘분군의 특징은 벽돌관에 사다리꼴 형이다. 하단부분은 넓고 높으며 상단은 좁으며 낮다. 그리고 장례용구는 현재의 것들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취하고 있다. 고고학 관계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그와 같은 모습의 관들은 모두 호인(胡人) 들의 장례문화에 속한다고 했다. 즉 호화(胡化)된 한인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원래 북경지방은 오랜기간 동안 한인과 호인들의 교류가 빈번하고 서로 혼인으로 융합되어 가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호인들의 장례문화를 받아들인 결과다. 역사상 북경지역은 오랜 기간 동안 한인과 호인들이 혼거한 사회였다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현(朝鮮縣)”에서 이주한 묘주인



 북조시대의 묘분 2기의 형태는 동한시대 때의 것과 유사하나 격동의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통일된 왕조의 존속기간이 극히 짧았던 관계로 정확한 분묘의 조성연대를 구명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특히 동한시기와 조위 시대의 분묘 구분은 극히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 분묘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북경지방에서 발굴된 분묘가 북조시대의 것인지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였으나 이 분묘를 기준으로 삼아 북조시대의 분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묘분의 발견은 북조시대의 분묘를 확인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고 북경지방의 북조시대에 조성된 묘장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었다.

분묘 안에서 명문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다. 그 명문을 통해 묘의 주인 이름이 한현탁(韓顯度)임을 알게 되었다. 선조의 호적은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고 동위(東魏) 원상(元象) 2년인 539년에 묻혔음이 확인되었다.


  고고학관련 인사의 설명에 의하면 원상은 북조의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 원선견(元善見)이 사용한 2개의 연호 중 하나라고 했다. 묘주인의 출신지는 의미심장하고 연구해야할 많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낙랑군은 서한의 한무제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지금이 한반도에 설치한 4개의 군 중 하나다.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성(朝鮮城)이고 조선현은 낙랑군 관할의 여러 현 중 하나다. 조선성은 지금의 북조선 평양 시구다. 그러나 서진 왕조 때 중원에 대란이 일어나 중원왕조들의 세력이 쇠퇴한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시작했다. 변경에 설치한 군현을 통제할 수 있는 실력이 예전 같지 못하다가 서기 313년 낙랑군은 모두 고구려에 의해 점령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유민들이 무엇 때문에 북경시 대흥구까지 흘러와 묻혔을까.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고고학 관련인사의 설명에 따르면 북위 태무제(太武帝) 척발도(拓跋燾)가 북방을 통일하던 과정(439년 북위의 북방통일)에서 연화(延和) 원년(432年),조선의 백성들을 비여(肥如)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에 조선현을 설치했다고 했다. 태무제의 그런 행위는 계획에 의한 인구이동 운동의 일환이었다. 비여는 지금의 진황도시 경내이고 현의 관할지는 지금의 창려(昌黎)、노룡(盧龍)의 남부와 서부 및 천안현(遷安縣) 일대였다. 조선현의 치소는 지금의 노령현 동쪽으로 북경 중심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조선의 유민들이 중국으로 들어온 후에 자기들의 선조들아 살았던 군을 그리워하여 같은 이름의 지명을 사용했다. 북위가 분열하여 황하 이동 지역을 차지한 동위는 도읍을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인 업성에 정했고 북경 대흥은 북경의 대흥구는 북방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업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곳에 동위 시대에 묘분군이 조성되었다고 했다.







북경시 삼합장묘지에서 출토된 고대유물의 의미

출처 :《中國社會科學報》2015年3月18日第715期

記者 張春海







일전에 북경시문물국(北京市文物局)은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는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황촌진(黃村鎮)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129좌의 고분군을 발굴했다고 공표했다. 고분군을 연구한 결과 그 중 75좌는 동한, 북조, 당, 요금(遼金) 시대 등 여러 왕조를 거쳐서 조성되어 시기가 같지 않고 형태도 매우 다양하다고 했다. 발굴된 묘장의 규모도 대단히 크고 시기도 오랜기간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매장된 유물이나 부장품의 내용도 풍부해서 과거 10년 동안 북경지국에서 발굴된 고고학족 성과 중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고분군이 위치한 곳은 지하철 대흥선(大興線)을 타고 갈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영정하(永定河)와 가깝다. 자료에 의하면 영정하는 빈번하게 범람하여 하도도 함께 수시로 바꾸었기 때문에 주변의 땅을 진흙으로 덮어 오히려 해당 묘분군을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원인이 되었다. 고분군은 2010년에 발굴되었고 2014년 북경시문물국 소속 연구소의 주관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거 지금은 잠시 계절적인 원인으로 잠시 중단된 상태다.




묘분 중 당대에 유행했던 장황설계(裝潢設計) 형식을 갖춘 묘실을 갖춘 묘분과 완전한 형태의 벽화가 그려진 요나라 시대의 묘분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한 좌의 묘분에서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굴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 명문(銘文)에는 묘의 주인은 한현탁이고 선조의 원래 고향은 “낙랑군 조선현”이며 동위 원상 2년(539년)에 조성되었다고 써 있었다. 유추해보면 해당 묘분은 어떤 정치적인 원인으로 한현탁의 조상이 이주한 증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낙랑군은 한무제 원봉(元封) 3년인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군으로써 치소는 조선현이다. 조선현의 옛 땅은 통상적으로 지금의 조선 평양시 내의 토성동(土城洞)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후에 낙랑군 조선현은 북위의 내지로 이동 되었다. 고염무(顧炎武)는 “모용씨가 영주(營州)의 경내에 조선현을 설치했다.”고 고증한 바가 있다.

  남북조시대 때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 조선현의 거주민을 비여(肥如)로 이주시키고 조선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여는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경내고 조선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이민사학자(移民史學者)들은 그것이 당시 처음으로 시행한 이주정책의 일환으로 생긴 일이라고 고증했다. 즉 북위 연화(延和) 원년(432년), 북위정권이 낙랑군 등 6개의 군( 지금의 요서 일대에 해당)에 거주하던 백성들 3만 호를 유주(幽州)로 이주시키고 그 중 조선현과 그 주민들을 비여로 옮겨 살게 했다고 했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시와 하북성 동북 일대이고 북위가 설치한 조선현의 치소는 지금의 요녕성 의현(義縣) 북쪽 일대다.

중국인민대학(中國人民大學) 고고학과 교수 이매전(李梅田) 박사는 묘의 주인 한현탁의 조상은 요서에서 호족으로 활약한 대족의 후손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본보 기자에게 설명했다. 묘지가 형성된 연대를 고려해 보면 묘주인은 북위 원상(元象) 2년과 연화(延和) 원년과는 시기적으로 107년의 시차가 나고 더욱이 한나라 시대와는 4-5백 년의 큰 시차가 있어 한현탁 본인이 요녕에서 연조(燕趙)의 땅으로 직접 이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시대적인 정황으로 유추해보면 한현탁의 선조가 요서지구의 낙량군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명문의 조선현(朝鮮縣)을 지금의 북조선 평양시 일대로 혼동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매전 교수 등은 해당 묘분이 반영하는 정황 특히 묘주의 가족이 이주했던 정황과 이주를 해야만 했던 환경 등은 명문과 기타 출토문물 전부를 발굴한 후에야 판단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