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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교치(僑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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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2,738회 작성일 15-05-3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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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교치(僑置)에 관하여

[http://www.coo21.rgro.net/(稽古諮) 에서 전재]

1. 글 머리에


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나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에 관련된 책이라면 무조건 읽어왔다. 그러면서 맨 처음 역사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에 눈을 뜨게 해주었던 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연구(朝鮮上古史硏究)》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장 의문을 갖는 부분이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세웠다는 한사군이 무엇인지 아무리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나하면 강단사학자와 민족사학자 내지는 재야 사학자의 주장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는 한문공부도 심화시킬 겸 주로 중국 원전으로 된 《삼국지연의》 ·《금병매》 ·《수호지》 등을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다가 문득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떠 올라 한문으로 된 이 책이 혹시 있는가 하여 중국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사이트의 책 목록을 뒤지던 중 어떤 중국 학자가 한국의 모대학 교수와 함께 표점을 해서 중국에서 펴낸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었다. 당장 구하여 역시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어 보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공부하면서 실학자들의 저서를 달달 외우면서 알게 된 《열하일기》라는 책도 그런 류의 유명한 실학자가 쓴 것으로만 알았는데 이 책을 전부 읽어보니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거기에 인용된 수많은 서목이라든가 청나라의 내로라는 하는 학자들과 필담을 통해 문학이며 철학이며 사상 등을 아무 거리낌없이 소통하는 것을 보고 한문의 위력은 역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가 그 책 가운데서도 가장 관심을 갖고 정독을 하게 된 곳은 한사군에 관한 그의 독특한 견해 부분이었다. 이에 관한 것은 필자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통해서 본 한사군 · 평양 · 패수》라는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 처음 접하게 된 남북조시대에 유행했다던 "교치(僑置)"라는 생소한 말이었다.

 

교(僑)란 말은 우리가 재일교포할 때 쓰는 그런 말이다. 옥편에는 "높을 교"로 되어 있으나 이 글자는 타관생활을 하다는 뜻도 있다.


오늘날은 지식정보화시대이다. 우리가 뭣 좀 안다는 의미의 단순한 지식이라는 것이 별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웹서핑을 누가 얼마나 잘하느냐가 지식을 좌우하는 시대이다. 도대체 부모며 선생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아는 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든지 인터넷 검색만 하면 단 수초만에 수만건에 달하는 관련 지식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언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전자시대에 요구되는 지식은 머리에 저장되는 게 아니라 하드와 서버에 외장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검색술, 정보의 바다를 서핑하는 항해술이다. 이를 디지탈리터러시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이 아주 오늘의 지식 세계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어 메모를 해두었는데 디지탈리러러시(digital literacy)란 말이 매력있게 들린다. 리터러시란 식자, 읽고 쓰는 능력, 교양 등으로 사전에 나와 있으니 어떻게 새길 것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긴다. 오늘 거창한 이 주제를 놓고도 나에게는 아무런 지식이 없다.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에 뛰어 들어 중국의 남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호아상(胡阿祥)이란 분이 자기에게 학문적 지도를 마지 않았던 고민(高敏) 선생의 80회 생신 기념 논집에 쓴 "《교치의 원류와 동진조 교주 · 군 · 현의 발생(僑置的源流與東晉南北僑州郡縣的産成)》"이라는 논문 한 편을 다운받아 이를 정리하는 한편 거기 논문에 인용된 필자도 무척 존경하는 유명한 고힐강 선생의 《중국강역연혁사(中國疆域沿革史)》란 책을 중국의 국학사이트에서 다운받아 이를 대충 정리해서 쓰는 것이다. 왜 국내 서적은 참고하지 않았느냐는 말이 나올 법하다. 우리나라 사전에는 교치란 고대민족문화출판사에서 펴낸 《중한사전(中漢辭典)》에만 올려 있다. 단국대학교에서 펴낸 4권 짜리 《한국한자사전(韓國漢字辭典)》이라는 사전이 있었다. 혹시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적 《열하일기》에 나온 말이라서 실려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해당 글자를 찾아 보았으나 실려있지 않았다.


(1) 한사군

우리에게 한사군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사군에서 우리에게 가장 궁금한 것이 있다. 가장 먼저 이 말이 나온 것이 사마천의 《사기》인데 사마천은 출생년도는 확인되었으나 죽은해가 미상이다. 출생년도도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대략 기원전 145년 혹은 135년 설이 있으며 사망한 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전한 원봉 3년(B.C108)년에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는데 굥교롭게도 그가 태사령이 되던 해에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당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되었다. 한사군을 맨 처음 언급한 기록은 《사기(史記)》이다. 《사기》란 것이 연월의 표시가 아주 애매하다. 물론 정확하게 몇 월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간지도 써 있지 않고 그해 봄(其春), 그 이듬해(其明年), 그후 삼년(其後三年), 그해 가을(其秋), 이때(是時), 이해(是年) 등으로 되어 있어 종잡을 수가 없다. 일일이 메모해 가면서 읽어 보아야 제대로 연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기(史記) · 효무제본기(孝武帝本紀)》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해, 그 이듬해 등으로 표기해서 어느 때인 줄 알 수 없다. 어떻거나 거기에는 "其明年, 伐朝鮮, 夏旱(그 이듬해, 조선을 쳤다. 여름에 가물었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음에 더 자세한 내용은 《사기(史記) · 조선전(朝鮮傳)》에 나와 있는데 《조선전》의 내용을 읽어 보아도 모략전술을 펴서 조선을 거져 먹으려다가 도리어 참패를 당했으며 결국에는 조선의 배신자들 때문에 겨우 조선을 멸하기는 했는데 그 전쟁에 동원된 한나라의 육 · 해군 최고사령관이 기시형을 당하거나 폐서인이 되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나며, 조선의 배신자요 매국노들은 획청후 · 날양후 등의 봉호를 받는 영광을 입었는데 그 지역(획청 · 날양)도 한반도내가 아니다. 이는 한사군이 우리 한반도 내에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떻거나 《조선전》에 나온 한사군 관련 내용은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4군을 만들었다(遂定朝鮮爲四郡)"이란 단 7자일뿐이다. 4군이 어느 곳이란 말도 일체 없다.

 

중국 사람들 담대하고 천연덕스럽다. 자기들 역사에 영토를 확장하는 거창한 일을 해냈는데도 아무런 전후 관계없이 그저 "조선을 벌하다"고만 하였고 그 후속 기사에 "여름에 가물었다"는 기록밖에 없으며, 마침내 조선을 평정했다면서 그 4군의 구체적인 이름조차 없다. 물론 《사기》는 기전제 사서의 효시이기는 하지만 지리지가 없다. 이러한 기록들이 뒤 이어 나온 반고의 《한서》에서 비로소 그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한서(漢書)》는 《사기(史記)》보다 약 100년 뒤에 쓰여진 책이므로 한 단계 발전된 사서답게 연호도 제대로 챙긴다. 한무제의 재위기간 동안 무려 10개의 연호를 가지고 있다. 명나라나 청나라에서는 재위기간 동안 단 하나의 연호를 갖는 것과 대비된다.

《한서 · 무제기》 원봉 2년(B.C 109) 기사에 의하면 겨울 1월 기사가 먼저 나고 다음에 봄과 여름 4월 기사가 나오고 이달 맨 마지막에 "조선왕이 요동의 도위를 공격하여 죽였으므로 천하의 사형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쳤다(朝鮮王攻殺遼東都尉, 乃募天下死罪擊朝鮮)"는 기록이 나온다. 또 이해 가을에 누선장군 양복(楊僕)과 좌장군 순치(荀彘)가 죄인 가운데서 응모한 자들을 데리고 조선을 쳤다고 하였다.

   삼년(B.C108) 여름에 조선이 그 나라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매, 그 땅을 낙랑 · 진번 · 임둔 · 현도로 만들었다(朝鮮斬其王右渠, 以其地爲樂浪眞番臨屯玄菟)다고 하였다. 남의 나라 왕을 공작을 통해 죽였으면 적어도 시해(弑害)라고 해야 국제간의 예의요 또한 어법에도 맞다. 신하가 제왕을 죽이는 시(弑)라고 한다. 이해의 기록 가운데 재미 있는 것은 조선을 멸하는 데 공을 세운 장수들에 대해 논공행상은 커녕 이들에 대한 처분에 있다.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군사들을 많이 잃게 한 죄로 사형에 처할 것이로되 속전을 내고 겨우 서민이 되었으며, 좌장군 순치(筍彘)는 공을 다투었다는 죄목으로 기시형에 처해졌다.

  한무제의 조선침략전쟁과 관련하여 《자지통감》에서 너무도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 바 있어 소개한다. 아시는 분은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소개하는 것이다. 누선장군의 정확한 죄목은 열구(列口)에 도착과 동시에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하는데 제 마음대로 앞질러서 조선군을 마구 공격하다가 군사들을 많이 잃은 죄였다. 열구(列口)를 오늘날 평양으로 들어가는 대동강 입구쯤으로 오해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그 근거는 《자치통감》의 열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있는데 그 주는 원나라의 호삼성(胡三省)이란 분이 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열구. 반지(班志: 반고의 《한서 · 지리지》를 가리키는 말)에는 열구현(列口縣)은 낙랑군에 속한다고 하였고, 곽박이 말하기를, 《산해경(山海經)》에서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도 그 지역은 마땅히 열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어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긴다.(《班志》, 列口縣屬樂浪郡. 郭璞曰: 《山海經》, 列水在遼東. 余謂其地當列水入海之口.)


그런데 어떤가 우리네 식민사학자들 그곳이 평양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요. 열구현은 낙랑군에 있다는 전제 하에 곽박의 견해를 보태어 보면 열구는 결국 요동에 있는 셈인데 왜 이런 명백한 이치도 모른단 말인가. 호삼성이 말한 "여위(余謂)"에서 "謂"는 말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다, 생각한다는 뜻이 있음에 유의해야 하며, 이곳은 내 생각으로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요즘 사람들이 논문을 쓰면서 자기의 견해를 말할 때 잘 쓰는, 필자가 생각건대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서》에는 지리지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거기에는 위 4군 가운데 진번 · 임둔이 아예 없다. 또 거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우리 《삼국사기 · 고구려본기》를 보라. 고구려 대무신왕 20년(A.D 37) 낙랑(樂浪)을 습격해서 멸했다고 했다. 따라서 낙랑군은 진즉 역사의 무대에서 없어진 것이다. 이런 기록에 대해 일본 학자들이나 중국사람들은 입을 맟추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제 나라 역사나 잘 챙기면 될 것이지 왜 남의 나라 역사를 들먹이는지 알다고도 모르겠다. 거기에 부화부동하여 우리의 식민사학자까지 합세하여 제 나라의 역사를 험담한다. 자기들의 역사와 다르다커니 자기들의 기록에 없다는 게 그들의 비난 논거다. 중국의 역사기술 태도는 자기 것은 자세하고 쓰고 주변 것은 간략하게 기록한다. 자기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은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자기들 기록에 없다는 것은 그들의 역사적 인식 범위가 우리가 사는 지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그 원흉은 당태종에 있다고 본다.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을 뿐 아니라 수나라도 고구려를 치다가 결국 망했다. 그런 감정으로 그가 직접 관여하여 편찬한 《진서(晉書)》를 비롯한 7개의 사서에 고구려 · 백제 · 신라 등 삼국의 실체가 엄연한데도 마치 부족국가인 것처럼 수십 개의 나라 이름을 죽 열거해 놓았을 뿐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실체가 그들의 역사에서도 분명한 《고구려전》은 만들어야 할 터인데 고구려는 맥이(貊夷)로 백제는 마한(馬韓) 등으로 기록하는 등《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등을 적당히 글자 몇 자 고쳐서 겨우 마치 한반도에 78개의 부족국가들이 난립햇던 것처럼 《삼한전(三韓傳)》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고구려 관련부분과 《진서》나 《위서》의 기록이 도대체 맞지를 않는다. 그런 것은 모르고 도리어 우리의 초기 기록이 믿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한서》를 쓴 반고(班古)는 기원 1세기경 동한 때 사람으로서 아버지 반표(班彪)가 썼던 《사기후전(史記後傳)》을 이어받아 《한서》를 썼는데 사실은 이도 다 완성을 보지 못해 일부는 그의 누이 동생인 반소(班昭)가 완성했다. 그가 살아 생전에 진번 · 임둔이 진즉 없어졌으니 그래서 지리지에 관련 기록이 없다. 한사군이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에 설치되었으며 지명은 어떻게 비정되는지는 너무 설이 많아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교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2) 교치(僑置)

   교치의 사전적 정의는 앞서 소개한 《중한사전(中漢辭典)》에 "육조시대에 다른 나라에 빼앗긴 땅 이름을 자국 수중에 있는 땅에다 옮겨 놓음으로써 그 땅이 빼앗기기 않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대민족문화연구소, 《중한사전(中漢辭典)》, 2006년 전면개정판, 1555쪽 참조)

   앞서 서두에서 소개한 바 있는 호아상(胡阿祥)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교치를 논하는 분들은 매양 동진에서 교치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하면서 그 예로 고힐강 · 사념해 두 분이 쓴 《중국강역연혁사(中國疆域年革史)》 제15장 제2절에 나와 있는 "원제 태흥 3년에 낭야국 과강의 백성들로써 건강(建康)에다 회덕현(懷德縣)을 교치(僑置)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제도의 남상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다.(<U>http://economy.guoxue.com/article.php/9777</U> 참조)

   그러나 호아상 교수는 《한서(漢書) · 고제기(高帝紀)》에 나와 있는 고조 12년(B.C 195)의 기록에, "풍(豊) 사람들을 관중으로 옮기게 하여 평생토록 세금을 내지 않도록 하였다는 기록에서 소급하여 그 원류를 찾고 있다. 그에 대한 한나라 응소(應邵)의 주에 이르기를, "태상왕(한 고조 유방의 아버지)이 고향인 풍(豊)으로 돌아가실 생각만 하므로, 고조는 이에 사시리(寺市里)에 풍현(豊縣)과 같이 성을 쌓고 신풍(新豊)으로 불렀으며 풍(豊)의 백성들을 옮겨다 이곳으로 채웠다고 하였다.

   한고조는 그 이전인 7년(B.C 200)에도 역읍(酈邑)이라는 곳에 성을 건설하고 사직을 만들고 도로와 정원을 만들고 백성들이 사는 집을 풍읍(豊邑)처럼 꾸며 태상왕이 예전에 함께 살던 사람들을 모두 데려다 그곳에 채워 함께 살도록 했었다. 그리고 태상왕이 죽자 그 곳을 신풍(新豊)이라고 했음은 이미 언급했다. 왜 그랬을까. 자기 아들 덕에 태상왕이란 높은 직책에 올랐지만 자기가 예전에 살던 고향의 모습이며 친구들이 눈에 밟여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예전에 살던 굴을 향해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위에서 원류라고 소개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요, 더더구나 실토기우(失土寄寓: 자기가 살던 땅을 잃어버리고 한 때 다른 곳에 몸을 붙이고 사는 것을 말한다)는 아니다라고 하면서 논자는 교치(僑置)의 전형인 실토기우(失土寄寓)의 예로서 동한 때 설치했던 현도군과 그 관할 고구려(高句麗) · 상은대(上殷台) · 서개마(西盖馬) 삼현을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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