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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韓國)의 유래와 이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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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8,017회 작성일 07-03-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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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부의 저서 잠부론 중 '其後韓西亦姓韓‘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이병도가 인용했던 ‘잠부론’ ‘其後韓西亦姓韓’라고 한 부분을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왕부의 글을 지나치게 의역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왕부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왕부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관련된 ‘잠부론’ 문장의 전문을 보자(志氏姓條 부분).













晉穆侯生桓叔, 桓叔生韓萬, 傅晉大夫. 十世而爲韓武侯, 五世爲韓惠王, 五世而亡國. 襄王之孼孫信, 俗人謂之韓信都. 高祖以信爲韓王孫, 以信爲韓王, 後徙王代, 爲匈奴所攻, 自降之. 漢遣柴將軍擊之, 斬信於參合, 信妻子亡入匈奴中. 至景帝, 信子頹當及孫赤來降, 漢封頹當爲弓高侯, 赤爲襄城侯. 及韓嫣, 武帝時爲侍中, 貴幸無比. 案道侯韓說. 前將軍韓會, 皆顯於漢. 子孫各隨時, 帝分陽陵·茂陵·杜陵. 及漢陽·金城諸韓, 皆其後也.




信子孫餘留匈奴中者, 亦常在權寵, 爲貴臣. 及留侯張良, 韓公族姬姓也. 秦始皇滅韓, 良弟死不葬, 良散家貲千萬, 爲韓報讎, 擊始皇於博浪沙中, 誤椎副車. 秦索賊急, 良乃變姓爲張, 匿於下邳, 遇神人黃石公, 遺之兵法. 及沛公之起也, 良往屬焉. 沛公使與韓信略定韓地, 立橫陽君城爲韓王, 而拜良爲韓信都. 信都者, 司徒也. 俗前音不正, 曰信都, 或曰申徒, 或勝屠, 然其本共一司徒耳. 後作傳者, 不知信都何因, 彊妄生意, 以爲此乃代王爲信都也. 凡桓叔之後, 有韓氏·言氏·嬰氏·禍餘氏·公族氏·張氏, 此皆韓後姬姓也.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













문제의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왕부의 글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글은 씨성조(氏性條)에 나오는 것으로 한씨 성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다. 왕부는 이 글에서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연나라 근처에 있던 한후와 관련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문장으로만 볼 때 왕부는 조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조선의 왕성이 한씨였던 것처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왕부의 글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앞에서 인용한 글은 씨성조(氏性條)에 나오는 것으로 한씨 성을 설명하기 위한 부분이다. 왕부는 이 글에서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연나라 근처에 있던 한후와 관련 있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문장으로만 볼 때 왕부는 조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고조선의 왕성이 한씨였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왕부는 이 글에서 전국시대의 한국은 진나라 목후의 아들인 환숙을 조상으로 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주나라 왕성인 희성(姬姓)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숙 이후 환숙을 공동조상으로 하는 여러 성씨가 출현했는데, 그 중에 한씨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왕부는 이 희성에서 파생한 한씨 성을 가지 사람들과 연나라 지역에 있던 한후국의 한씨와 고조선의 한씨가 종족적으로 관련이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이들 모두가 한씨를 성으로 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其後韓西亦姓韓’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 생각해 보자. ‘잠부론’ 주석에는 ‘韓西’의 한(韓)을 조(朝)의 오기로 보고, 서(西)는 선(鮮)과 호용되는 글자로 보아 이를 조선으로 보기도 하는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한서’를 조선과 관련된 나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잠부론’에서 한씨를 다룬 전문의 흐름으로 볼 때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한서’를 조선으로 보면 인용한 전문의 흐름으로 볼 때 모순이다. 이는 왕부가 지적하려고 한 한씨들의 발생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먼저 ① 한숙(桓叔)의 후예인 전국시대 한국의 한씨가 있었다. 이들은 ‘사기’ 한세가와 ‘잠부론’ 내용으로만 보면 진나라 목후의 손자이자 환숙의 아들인 한만(韓武子)의 3대손으로 진 경공 시기(기원전600~581)에 활동한 한궐 때부터 한씨 성을 사용했다. 그런데 ② 뒤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나라 근처에 있던 한국은 주 선왕의 재위 기간(기원전827~782년)에 이미 있었다. 그리고 ③ ‘한씨 성을 가진 한서’가 가리킨다고 본 조선(후조선)은 주나라 초기부터 있었다.










선후로 보면 조선이 가장 앞서고, 다음이 연나라 있었던 한국이며, 마지막이 전국시대의 한국이 된다. 세 집단의 발생시기를 염두에 두고 왕부의 글 전체를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其後韓西亦姓韓’에서 ‘其後’를 연나라 주변의 한후가 있은 후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면 ‘한서의 한’은 조선일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한후보다 늦게 한씨 성을 사용한 전국시대의 한국이다.













필자는 ‘其後韓西亦姓韓’은 ‘시경 한혁편의 한국과 이름이 같은 한국이 서쪽에 있었으며 그들의 성이 한씨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삽입한 문장이고 위만에게 공벌당했다는 나라는 한학편의 한국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여기에 위만에게 공벌당한 한국은 연나라 주변에 있던 한국의 후예들이 주도한 나라인 조선(韓氏朝鮮)을 지칭한다. 즉, 왕부는 한혁편에 나오는 한국과 조선이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부의 글은 이같이 이해한 사람이 이미 있었다. 한치윤은 왕부가 말하려고 한 것은 “주 선왕 때 한(韓)나라가 연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 뒤에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닷가로 옮겨가서 살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명대의 곽조경(郭造卿)도 “선왕 때의 한국이 동천하여 (고)조선을 이루고 (고)조선 왕 준이 위만에게 패망하여 남천하고 삼한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곽조경에 견해에 대해 리지린은 곽조경이 고조선과 삼한까지도 조선족의 국가가 아니고 서주의 후(侯)였던 한국이 통치한 나라라고 한 것은 왕부의 망설에 근거한 것이 자명하다고 비판했다. 이는 리지린도 왕부가 한후국의 조선이 관련된 듯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其後韓西亦姓韓’에서 西는 東의 오기라고 이병도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윤내현과 같이 지나치게 의역하여 기자조선과 고조선 둘을 설정하고 그들 모두 한씨 성을 가진 나라로 볼 필요가 없게 된다.




후기 주체는 한씨였다













앞서 살펴본 대로 왕부·곽조경·한치윤은 ‘시경’ 한혁편의 한후와 조선이 관련이 있는 듯이 말했다. 한치윤 다음으로 한민족과 한후의 관련성을 제기한 사람은 김상기다. 그는 “후조선의 왕실이 한(韓)을 성으로 한 것이나 준왕이 남하하여 한왕(韓王)이라고 일컬은 것은 모두 그들이 한부족(韓部族) 출신인 데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원래 기주(岐周)의 서쪽 지역에 살다가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으로 이주하여 서주 초·중기에 한국이 되었다. 그 후 서주 중·말기에 이르러 동남으로부터 진(晋)의 침공과 서북으로부터 험윤이 압박해 오자 다시 동으로 이동하여 연나라 부근인 지금의 하북 고안현(固安縣) 근처로 진출했으며, 종국에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김상기는 한부족은 주나라의 조성인 희(姬)성이 아닌 독자적인 한족이라고 했다. 필자도 한혁편의 중원 지역을 거쳐서 이동해 왔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그들은 김상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에 동북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사실은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그런데 한혁편 한후의 후예가 주도한 나라와 후조선을 동일하게 보면 기존의 기자조선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문제가 제기된다. 잘 알다시피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열전 및 ‘위략’ 등에는 위만에게 곰벌당하여 정권을 빼앗긴 인물은 준이며, 준은 기자의 후손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기자 혹은 기자 집단이 주초에 고죽국 경내로 들어와 연나라와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여 대릉하 중류로 진출한다. 그러던 중 연나라 주변에 있던 한국이 주나라 평왕 때(기원전 770~720) 진(晉)에게 멸망하면서, 그 지도자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 지역으로 돌아온다. 기자조선으로 들어온 한후의 후예들은 기자족과 연합하여 조선을 이끄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후의 후예들이 조선이 주체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한후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 한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한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면 기자 혹은 기자 집단을 인정한다 해도 한민족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화하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혁편 한후의 후예들이 후조선 중기 이후의 주체가 되었다면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기자조선과 ‘제왕운기’의 후조선인 기자 조선의 후기 주체는 한씨가 되어 ‘한씨조선’이 되는 것이다.









※왕부(王符)

자는 절신(節信)으로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사상가. 농민폭동 속에서 계속되는 세속에 분개하여 숨어 살면서 30여 편의 책을 썼다. 그의 천도천명관(天道天命觀)은 도가(道家)의 자연관과 순자의 자연법칙설을 섭취한 것이었다. 중국 안정군(安定郡) 임경(臨涇: 감숙성 진원(鎭原)의 서) 출신으로 대표작으로는 잠부론이 전해진다.





가문이 미천하여 고향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았으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마융(馬融) ·두장(竇章) ·장형(張衡) ·최원(崔瑗) 등과 친하였다. 절개를 굳게 지켰고, 농민폭동 속에서 계속되는 세속에 분개하여 숨어 살면서 30여 편의 책을 썼다.




그의 천도천명관(天道天命觀)은 도가(道家)의 자연관과 순자(荀子)의 자연법칙설을 섭취한 것이었다. 천명설은 이원론적 경향을, 인식론은 유물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또 도덕과 법률에도 중세적 평등관에 입각한 비판을 가하고, 인민을 현혹시키는 종교에 반대하는 등 사회모순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름을 나타내기 싫어하여 그의 대표작인 저서도 《잠부론(潛夫論)》이라 이름붙였다. 《잠부론》(현행본 10권)은 민간의 저작인데도, 《후한서(後漢書)》에서 왕충의 《논형(論衡)》 및 중장통(仲長統)의 《창언(昌言)》과 동류로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도, 그 가치가 높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형진 | 일빛 | 2006년 08월 11일

책소개 상고시대 한민족 자존심의 뿌리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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