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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 중산국(中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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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476회 작성일 08-05-0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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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朝鮮의 이름을 딴 기자의 후예 선우·중산국



선우·중산국에 대한 역사서를 보면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춘추좌전’ 소공 12년조의 두예(杜預) 주(注)는 “선우는 백적(白狄)의 별종”이라 했고, 사마정(司馬貞)이 ‘사기’를 주석한 색은(索隱)에는 “중산은 옛 선우국이며 성은 희성(姬姓)”이라 했다. 여기서 백적은 북방의 오랑캐이고, 희성은 주나라 왕의 성(姓)이다. 결국 이 사료에 따르면 선우나 선우의 뒤를 이은 중산은 (은)상, 즉 동이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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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 우청셴에서 확인된 선우황비문. 선우·중산국="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금석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서인 ‘속한지(續漢志)’는 “선우는 자성(子姓)”이라 했고, ‘성씨변증(姓氏辯證)’도 “선우는 자성(子姓) 계열이며 은의 후예”라고 했다. 자성(子姓)은 은(상)나라 왕의 성씨이다. 즉 선우(鮮虞·鮮于)는 은나라 후예의 성씨라는 뜻이다. 왜 이렇게 둘쭉날쭉할까. 한 나라의 출자(出自)를 두고 오랑캐(백적)의 별종이라느니, 주나라 왕의 성씨라느니, 다시 은나라 왕의 성씨라느니 혼선을 빚는 것이다. 바로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침략을 받았던 선우·중산국의 신세를 방증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



“사서에 따르면 선우국은 춘추시대 때인 BC 660년 무렵 북방 오랑캐인 백적(白狄)으로부터, BC 530년부터는 강대국이었던 진(晉)의 침략을 계속 받았어요. 중산국으로 복국(復國)한 이후인 BC 406년에는 위(魏)의 침략을 받아 20여년간 식민지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선우 중산의 역사가 왜곡되지 않았을까요?”(이형구 선문대 교수)



오랑캐 백적이 선우를 침략한 이후 선우의 족명이 백적의 별종으로 잘못 알려졌고, 원래 주나라의 봉국으로 희씨성을 하사받은 위나라의 식민지가 됨에 따라 희성(姬姓)으로 변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춘추전국시대판 ‘창씨개명’인가. 언뜻 그런 느낌도 들었다.



중산국의 본거지인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시 싼지셴(三汲縣)에서 중산왕릉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이 1978년 무렵 대만에도 전해졌다. 당시 국립대만대에서 유학 중이던 이형구의 눈이 빛났다. 이미 중산국이 은(상)의 후예가 세운 나라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그였다.



“역사서에 기록된 중산국="은(상)의" 후예라는 대목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차였지. 당시 기자조선에 대해 천착하고 있었던 때였잖아요.”



이미 선우가 (은)상의 후예, 즉 다름 아닌 기자의 후예임을 시사하는 자료 하나 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던 때였다.







1968년 역사학자 천판(陳槃)이 펴낸 ‘춘추대사표열국작성급존멸선이(春秋大事表列國爵姓及存滅선異)’라는 책이었다. 기존 사서를 근거로 중국 중원에 산재했던 춘추시대 170여 소국의 역사를 비정한 역사책인데, 바로 선우라는 항목이 있다.



“선우는 일명 중산이라 한다. 회남자는 우(虞)는 혹 우(于)라 했다. 선우(鮮于)는 그 선조가 자성인데(其先子姓), 기자는 조선에 봉하고(以箕子封朝鮮),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핑산으로 추정)에 봉했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鮮于)씨라 했다.(子孫因合 ‘鮮于’爲氏)”(천판)



기막힌 일이다. 선우국이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딴 것이라니. 그런 와중에 중산국 발굴보고서를 입수한 것이었다. 우선 중산왕릉이 중산왕의 묘곽, 즉 석곽묘의 형태로 발견된 점이 눈에 띄었다. 석곽에 판축봉분의 형태로 조성된 묘제.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검토해왔던 발해문명권의 전형적인 묘제가 아닌가. 또한 왕릉의 ‘중(中)’자형 대묘와 조주분(鳥柱盆·새 모양의 기둥을 박은 그릇), 그리고 옥기문화 등은 은(상)문화와 놀라운 일치를 보였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젊은 고고학도는 1년 뒤 깜짝 놀랄 소식을 접한다.



■ 선우도 기자(箕子)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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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계는 선우가 기자의 후예라는 내용을 뺀 비문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다.

대륙에서 막 출간된 1979년판 ‘문물’지를 어렵게 입수한 것이다. 당시 대만에서는 이른바 중공 간행물이 철저히 금수되고 있었다. 이 학술지는 이때 중산국 발굴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았는데, 대륙의 저명한 역사학자 리쉐친(李學勤)의 글은 이형구를 자극시켰다.



“최근 톈진(天津) 우칭셴(武淸縣) 가오춘(高村)에서 발굴된 선우황(鮮于황)비는 ‘선우씨는 상나라 기자(箕子)의 후예다’(鮮于氏系商箕子後裔)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선우="은(상)의" 후예인 것도 모자라 아예 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굴됐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리쉐친 등은 짤막한 내용만을 전하고는 비문 내용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자료, 즉 중국사회과학원이 펴낸 ‘문물고고공작30년’이라는 책에는 선우황비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왔다.



즉, 1973년 5월 톈진시 우칭셴에서 827자가 새겨진 동한시대의 비석이 확인되었다는 것이었다. 비석 상단에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로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는 동한시대 환제 때인 AD 165년임을 뜻하는 연호(연희·延熹 8년)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감질나는 내용이었다. 책에 실린 비문 탁본은 전체가 아니라 오른쪽 상단이 잘린 채 실려 있어서 전체 내용은 알 수 없었다. 특히 비문 주인공의 출자와 성씨, 고향 등을 적은 오른쪽 상단, 즉 비문의 맨 첫 부분을 잘라 놓았으므로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선우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인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잖아요. 얼마나 기막힌지….”



이 교수는 당장 홍콩으로 날아갔다. 전체비문을 탁본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수소문 끝에 전체탁본을 구할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탁본의 첫 줄을 읽으니 과연 ‘기자(箕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베이징~톈진 사이 우칭셴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의 희생양 된 선우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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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鮮于황)이 은(殷)나라 기자의 후예라는 사실을 기록한 비문내용.

여기서 선우황비 발견을 둘러싼 ‘쌉싸래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본다. 중국 현대사가 안고 있는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과거사이다. 우칭셴에서 선우황비가 확인된 때는 바야흐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1973년 5월 우칭셴 가오춘 인민공사 란청(蘭城)대대 사원이 흙 속에 파묻혀 있던 선우황묘비를 발견한다. 톈진 역사박물관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비는 높이 2.45m, 폭 81㎝, 두께 12㎝나 되는 엄청난 크기였다.



비석의 주인공인 선우황은 AD 107~113년 사이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이셴(代縣) 부근을 관할하는 안문(雁門)태수가 되었고, 125년 81살을 일기로 죽는다. 비석은 그가 죽은 지 40년 뒤(165년)에 손자가 세운 것이다. 죽은 자를 추념하는 비문이므로 당연히 온갖 달콤한 수식어가 동원되었던 게 당연하다. 그런데 1974년 톈진시 문물관리처 우칭셴 문화관은 ‘문물’지라는 학술지에 희한한 내용의 글을 싣는다.



“(발굴이 끝난 뒤) 문물관리처, 현(縣) 문화관, 란청대대의 동지들이 이 비문을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반면교재로 삼았다. 그래서 비문이 출토된 현장에서 란청대대원과 빈하중농들이 함께 모여 비림비공 대회를 열었다.~”



이 내용을 담은 쪽글의 소제목이 ‘비문을 반면교재로 삼고 린뱌오(임표·林彪)와 그가 선양하려 했던 공맹의 가르침을 호되게 비판하다(以碑文作反面敎材 狼批林彪和他宣揚的孔孟之道)’이다.



비문 하나 발견한 것 가지고 비림비공운동을 펼칠 만큼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극에 달할 때였다. 글에 실린 비판 내용을 보면 섬뜩하다.



우선 유심주의적 천명관을 고취시켜 착취계급의 인민통치를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또 인정(仁政)과 예치(禮治)를 선양, 반혁명정치의 사기극을 연출했으며, 역사를 마음껏 왜곡하여 지주계급의 죄상을 덮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선우황비를 세운 자는 봉건통치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주인의 공덕을 기려 독초와 같은 유가반동사상을 퍼뜨렸다는 얘기다. 그 예로 비가 세워졌던 동한(東漢)시기 선우황이 다스렸던 “안문군에서는 기근이 심해서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人相食) 지경에 이르렀다”는 후한서 ‘안제기(安帝紀)’를 인용하기도 했다.



학술지는 한술 더 떠 “무도한 자의 행위는 그들의 바람과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마오쩌둥 주석의 어록까지 굵은 글씨로 인용했다. 선우황비가 만들어진 지 불과 19년 만인 AD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끝내 멸망했음(AD 220년)을 빗댄 것이다.



19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기자(箕子)의 후예는 이렇게 공맹과 린뱌오(임표)의 추종세력으로 찍혀 졸지에 문화대혁명의 희생양으로 수모를 겪은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저명한 학자나 정치가도 수정주의자, 주자파, 공맹·린바오 추종세력으로 찍히면 비참한 꼴로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던 광란의 시기였으니….



■ 중산국에 즐비한 은(상)의 흔적



또하나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어느 학술지에도 기자와 관련된 탁본 내용이 실리지 않는다는 거지. 중산국이 기자의 후예였음을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겠지.”(이 교수)



어떻든 이 선우황비가 발견됨으로써 선우·중산의 선조 논란과 성씨 논란은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리쉐친 등 중국 학자들도 선우황비뿐 아니라 중산군 근처에서 잇달아 출토되는 은(상)나라의 유적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중산의 땅으로 판명된 정딩(正定)시 신청푸(新城鋪) 유적에서는 명문이 있는 상나라 청동기가, 가오청(藁城)시 시타이(西臺) 유적에서는 상나라 청동기와 옥기가 세트로 확인된다. 또한 허베이성 성도 스자좡(石家庄)시에서는 27곳의 상나라 유적이 확인되었다.”(리쉐친)



이형구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에 은(상)나라 후예인 자성(子姓)의 선우국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이 지역은 은(상)나라 시절 은(상)의 제후국인 기자의 기국(箕國)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은(상)이 멸망하자 기자(箕子)는 첫째 아들과 옌산산맥을 넘어 본향, 즉 고조선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타이헝(태행·太行)산록에 숨어 들어 이 선우·중산국 영역에서 은(상)의 복국(復國)을 꿈꾸지 않았을까.”



이 교수의 이야기를 한번 조목조목 풀어보자.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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