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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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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741회 작성일 09-03-0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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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사람들은 주저없이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을 꼽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부분적인 통일로 우리민족의 활동 무대가 좁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가 축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옛 땅에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사의 아쉬운 부분은 발해의 멸망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들고 싶다.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는 우리의 생활터전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는 중간에 윤관의 지휘 하에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9성을 쌓는 등영토를 넓혔으나, 곧 힘들게 얻은 영토를 신라 출신 유학자들의 압력으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묘청을 위시한 서경파들이 칭제건원, 금국정벌을 내세우며 고토 수복의 기운이 일다가 김부식 등 개경파가 서경파를 실각시킴으로써, 만주는 우리 역사와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2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는 아니 우리민족은 만주 땅을 수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12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중원을 지배한 몽골족의 원나라는 홍건적의 난 등으로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거지중 출신 주원장이 양쯔강에 명나라를 건국함으로써, 원은 명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했다. 당시 중원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요동은 무인지경 즉, 원도 명도 아닌 주인이 없는 빈 땅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원나라는 명나라의 공격을 막기에 바빴고 명나라는 중국 남부에서 세운 나라라 아직 북쪽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명나라는 새로 세운 나라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고려에 공녀를 바치라는 등 고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해왔다. 더욱이 고려에서 파견한 사신을 억류하는 등 고려에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다가 우왕 때에 고려가 수복한 쌍성총관부에 철령위를 설치할테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등 고려를 자극하자, 그렇지 않아도 명나라의 거만함에 질린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을 수복하겠다며, 요동반도에 쳐들어갈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최영에 이어 당시 고려 제2인자였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다. 그렇다면 당시 이성계가 내세운 4불가론이 군사학적 차원에서 말이 되는 주장이었을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로 쳐들어가는 이소역대(以小逆大)는 불가하다




이는 우리 역사를 살펴볼 때 맞지 않는다. 우리 역사를 보면 인구와 영토면에서 수나라와 당나라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작은 고구려가 이들의 침략을 보기좋게 패배시켰고, 가까운 예로 고려 역시 요나라의 80만 대군을 물리치고, 오히려 강동6주를 획득하였다. 세계사에서도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긴 사례가 있다. 대제국이었던 페르시아의 25만 대군은 그리스 반도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47,000명의 군사에게 패했다. 또한 1세기 왕망의 40만 대군도 후일 후한을 세운 유수의 군사(당시 이들은 국가라고 하기에는 미흡, 반란집단) 13,000명에게 패했고, 4세기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은 동진을 토벌하여 중원을 통일하고자 약 90만 명의 군사를 일으켰지만 동진의 사현이 이끄는 8만 명의 군대에 무너졌다. 이것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이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명나라와 고려의 절대적인 국력 차이는 있었을 것이지만 고려가 요동에 쳐들어간다고 해도 명나라가 요동정벌군을 막기 위해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는 1368년 건국한 후 아직 내부정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에 몽골의 잔존세력인 북원이 지금의 북경 근처와 내몽골에 살고 있었고, 북방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로인해 명나라는 수도를 금릉(지금의 중국 남경)에 두었다. 더욱이 명은 서촉(사천성), 광동, 농서(지금의 감숙성)에 있던 군벌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 내의 다른 지역을 평정하기도 바빴던 명나라가 과연 고려와 맞붙을 여력이 있었을까?




더욱이 고려의 최고 지휘자 최영은 원나라를 위한 원병을 이끌고 가 한족 반란군을 여러 차례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 아울러 1362년에는 이성계 자신이 사병 2,000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을 공격해 그 괴수인 관선생과 사유의 목을 벤 적이 있다. 한족의 대군을 무찌른 경험이 있는 최영은 역시 같은 경험이 있는 이성계가 있었기에 요동정벌을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쟁에서 국가적 역량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역량이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병사와 장수의 역량도 중요한 변수다. 을지문덕과 양만춘이라는 뛰어난 장수들이 자신들보다 몇 배 혹은 몇 십배 많은 적들을 물리친 것이 그걸 증명한다.







더운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




더워서 안된다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고려군이 덥다면 그들과 싸워야 하는 명나라 군대도 더위에 찌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가을에 치자고 했지만, 고려가 점령해야 하는 요동은 겨울이 빨리 온다. 가을인 9월에 작전을 시작하면 10월쯤에는 요동벌판에 찬바람이 불고, 또한 출정시기를 늦출수록 그만큼 명나라는 준비할 시간을 벌게 된다.




여름이 농번기라서 안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나라에서 농번기가 아닌 때가 어니 있는가? 봄에는 파종을 해야 하고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는 모내기를 해야 한다. 가을에는 곡식이나 채소를 수확해야 한다. 그럼 겨울에는 어떨까? 아마도 추워서 못 간다고 하지 않을까? 군대는 절실한 필요에 의해 동원되는 것이지 여름철, 겨울철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농사꾼이 덥다고 농사 안 짓겠다는 논리와 다를 바 무엇이겠는가?







기허왜승(基虛倭乘), 빈 틈에 왜병이 노릴 수 있으니 불가하다




이는 당시 왜의 사정을 모르는 무식의 소치이거나 억지 변명에 지나지 않다. 이 때 왜구는 이미 진포, 관음포, 운봉, 황산의 전투에서 연달아 막대한 타격을 입어 대대적인 침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더욱이 진포해전에서 고려 수군의 화포에 500척의 배가 불탔고, 살아남은 군사도 황산에서 이성계와 이지란이 이끄는 고려군에 걸려들어 '며칠 간 주변의 내에서 핏물이 흘렀다'고 할만큼 완벽하게 궤멸되었다. 또한 일본은 당시 아시카가 막부(무사들이 세운 군사정부)가 약화되어 통일된 상태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유능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죽고 난 후 아시카가 막부(1333~1573:무로마치 막부)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무인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치하에서 민심은 흉흉하고 국토는 사분오열되어 통일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상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은 양유와 같은 고려 승려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사를 돌볼 때였다. 즉, 당시 왜는 고려를 침략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날씨가 덥고 비가 많이 오니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군에 전염병이 돌 수 있어 불가하다




똑같은 상황에서 고려군만 이처럼 불리한 여건에 놓일 리는 없다. 불리한 자연조건은 우리 쪽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 쪽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고, 그들 역시 덥고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 또한 고려는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여름에 싸운 적도 많았다. 그 때 어느 장군이 여름이라 활이 풀어지고 전염병이 돌아 전투를 할 수 없다고 말을 한 적이 없다. 더구나 이성계는 이미 공민왕 시절(1369)에 지용수 장군이 이끄는 정벌군에 참전해 원의 요양성을 함락시킨 일이 있었다. 비록 추측이지만 이성계는 요동이 취약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고려의 정벌이 성공한다면 우선 군사 수천 명을 뽑아 명나라가 내부 정비에 여념이 없는 사이 백성을 옮겨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중원은 몰라도 당시 요동반도는 고려로서는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명은 주력군이 북원과의 전투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요동에 배치된 명나라 군사는 거의 소수였다. 고려의 출병 소식을 보고받은 주원장이 크게 당황하여 친히 종묘에 나가 전쟁의 길흉 여부를 점칠 정도였으니 말이다.여기에다 요동의 주민 대부분이 원나라가 세운 심양왕의 다스림을 받고 있던 고려인과 여진인이었다. 요동에 거주하는 주민들 대다수가 한족이 아닌 고려인과 여진족이었으니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그대로 진군했으면, 모르긴 몰라도 고려는 요동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성계는 칼 끝을 요동이 아닌 고려 수도 개경으로 돌려, 우왕과 최영을 내쫓고 자신이 대권을 잡았다. 그 후 그는 차례로 창왕, 공양왕을 내세우며 자신이 왕이 될 기반을 다져갔다. 그리고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새 왕조 조선을 개창하였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신하의 왕위찬탈을 극악한 범죄로 인식하였다. 심지어 『맹자』를 읽고, 맹자가 군주가 천명을 위반할 때 정벌하여 축출해도 좋다는 역성혁명론에 대해 분노항, 맹자의 제사를 금지할 정도였다. 당연히 주원장은 주변 제후국들의 역성혁명에 대해 철저히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일례로 1391년 레뀌리에 의해 점성국(占城國:베트남)에서 왕위찬탈이 일어나자 주원장은 점성국의 조공을 거부했고,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는 레뀌리의 찬탈을 구실로 1406년 겨울 20여 만의 군댈르 동원하여 점성국을 정복하였다.




하지만 주원장은 이성계의 왕위 찬탈에 대해서는 문책하지 않고 승인해주었다. 왜 주원장은 베트남의 역성혁명은 인정하지 않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인정했을까? 『태조실록』에는 1397년 3월 예문춘추관학사 권근이 명 태조의 칙위조서, 선유성지, 어제시와 예부의 자문 2통을 받아 귀국했다. 선유성지를 보면 주원장이 이성계의 찬탈을 승인한 이유가 명백히 나온다.




조선의 왕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홍무 21년(1388)에 너희 조그만 나라 군마가 압록강에 이르러 장차 이 중국을 치려했다. 그 때에 이성계가 단번에 회군하여 지금과 같이 왕위를 얻었고, 고려는 국호를 조선이라 고쳤으니 천도(天道)에 따른 일이다.




최영은 이인임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이성계가 역심을 품고 있으니 경계하라고 했으나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이성계를 깊이 신뢰하였다.최영 장군이 이성계를 요동정벌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임명한 것은 이러한 최영의 무한한 신뢰 외에 여진인들 사이에서 성장한 이성계가 여진족을 아우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지 아닌가 싶다.




만약 고려가 요동을 정복했다면, 늘어난 백성의 수와 요하변의 드넓은 농지, 그리고 요하 주변에서 지금도 많이 나는 철 등으로 인해 고려의 국력이 크게향상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좋은 기회를 거부했다. 사람에게만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게도 기회는 온다. 그런데 이성계와 조선왕조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아니 이성계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일부러 그 기회를 일부러 안 살린 것은 아닐까?

참고 :




김성남, 『전쟁세계사』, 뜨인돌, 2008

김태영, 『소설 단군』, 유림, 1996

이윤섭, 『역동적 고려사』, 2004











출처 http://blog.naver.com/enlil84/40059816023 이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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