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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영산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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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147회 작성일 09-03-10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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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영산강전투


나주의 지배권을 둘러싼 고려와 후백제 간의 진정한 결전은 910년을 전후하여 나주포구(浦口)에서의 대해전이었다. 909년 오월국(吳越國)으로 가던 후백제의 사신이 목포 앞바다에서 왕건군에게 납치된 사건이 일어나자, 견훤은 대규모의 수군선단(水軍船團)을 이끌고 남하하여 나주포구에 집결해 있던 왕건의 전함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중과부적의 왕건은 처음에는 수세에 몰렸으나 병사들의 전의를 고취하여 빠르고 예리한 반격으로 견훤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그리고는 전열이 흐트러진 견훤의 전함들에 대하여 바람을 이용한 화공작전(火攻作戰)을 펼침으로써 그 절반 이상을 소각 또는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궁예정권은 나주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남해안에 대한 제해권(制海權)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금성전투에 의한 궁예정권의 나주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첫째, 나주에 구축된 왕건의 군사거점은 후백제의 배후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었다. 왕건의 고려 건국 이후 나주지역의 고려측 군현의 수는 40여 개로 늘어났고, 실제로 936년 태조가 후백제와 결전(決戰)을 벌였을 때에는 나주지역에서의 군사적 조력(助力)이 컸다고 전해진다.


둘째, 나주포구에 거점을 구축한 왕건의 수군은 후백제의 중국·일본과의 통교(通交)를 효과적으로 봉쇄 또는 방해할 수 있었다. 909년 왕건군에 의한 후백제 사신의 해상나포는 그 같은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셋째, 나주는 왕건의 해군이 남해안지역을 경략하는 전진기지가 되었다. 왕건의 수군에 의한 양주(경남 양산)의 구원(903), 진도(珍島)의 점령(909), 고려 해군에 의한 지금의 진주와 여수 및 남해도 일대의 경략(927)은 모두가 나주를 거점으로 한 해상작전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궁예와 왕건은 처음부터 이러한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금성전투의 결과적 의의는 군사적인 면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면에서 볼 때, 왕건의 나주 경략은 그를 궁예정권 하에서의 최고의 정치적·군사적 지위에 오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모여들게 함으로써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한 고려 건국의 인적(人的)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935년 6월에는 견훤이 그 아들 신검(神劍)에게 왕위를 빼앗 기고 금산사(김제)에 유폐되어 있다가 고려군이 점령 중인 나주로 탈출 하여 고려 태조에게 망명 한 정치적 대사건은 그 이듬해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고려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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