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세종② 사신 보내 明 황제 설득, 윤관이 개척한 북쪽 땅 되찾아 > 조선전기

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 세종② 사신 보내 明 황제 설득, 윤관이 개척한 북쪽 땅 되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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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2,917회 작성일 10-04-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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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조선왕을 말하다.성공한 국왕들 세종⓶

사신 보내 明 황제 설득, 윤관이 개척한 북쪽 땅 되찾아




외교 문제의 가장 민감한 현안은 영토 문제다. 영토 분쟁은 외교로 해결하는 방법과 무력으로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외교적 논리로써 명분의 우위를 획득하고 무력으로 명분을 현실화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종은 외교와 무력을 적절히 활용해 명(明)과의 분쟁을 방지하면서도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를 조선 강역으로 만들었다.




성공한 국왕들 세종⑤ 육진 개척




태종과 세종은 외형상 명나라에 사대(事大)했다. 두 임금은 사대라는 형식적 관계를 통해 대국인 명과의 분쟁을 방지하면서 강역 문제에 대해선 실리를 꾀했다. 태종과 세종은 조선이 명과 전쟁을 회피하면서 확보할 수 있는 북방 최대 강역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의 공험진(公<5DAE>鎭)이라고 보았다. 고려 예종 3년(1108)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이 17만 군사를 이끌고 북진해 성을 쌓은 곳이 공험진이다.




고려사 예종 3년조는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6성을 쌓은 것과 관련해 왕에게 글을 올려 축하하고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종은 조선이 고려를 계승했으니 고려의 북방 경계는 자연히 조선의 강역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4년(1404) 예문관 제학(提學) 김첨(金瞻)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 “본국 동북지방의 공험진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의 고을이 모두 본국의 영토입니다”라는 국서를 보냈다. 두만강 북쪽 공험진까지가 조선의 강역이라고 설명하는 국서였다.




육진(六鎭) 지도. 세종은 김종서를 보내 육진을 개척하고 두만강 북쪽의 공험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태종은 ‘고려 공민왕이 재위 5년(1356) 명나라에 신달(申達)하고 공험진 남쪽을 본국에 환속시키고 관리를 보내 다스렸다’면서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합의된 국경선임을 상기시켰다. 그후 이 국경선은 명나라 홍무(洪武:주원장의 연호) 21년, 즉 고려 우왕 14년(1388) 요동(遼東)의 소유권을 두고 고려와 명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고려에서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本國:고려)에 환속시켜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도 설명했다. 태종은 그 결과 “이전처럼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했다”고 말했다. 공험진은 원나라뿐만 아니라 명나라 시조(주원장)도 고려 강역으로 인정한 땅이란 뜻이다.




그러나 그 강역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는데 세종이 비로소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종은 강역을 공험진까지 확장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먼저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세종은 신하들에게도 이를 숙지하게 했다. 세종은 재위 15년(1433) 1월 최윤덕을 평안도절제사로 보낸 후 그해 3월 여러 신하에게 공험진에 대한 숙제를 준다.




“윤관이 주(州)를 설치할 때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명 고조)가 조선 지도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 경계라’라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해서 아뢰라.(세종실록 15년 3월 20일)”




세종실록은 이에 대해 “주상이 이때 파저강(만주의 혼강) 정벌에 뜻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전교가 있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종이 ‘윤관이 설치한 길주와 지금의 길주가 같은 지역인가’라고 물은 것은 의미심장했다. 원래 길주는 함길도가 아니라 만주에 있지 않았느냐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려사절요 우왕 3년(1108)조는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 및 공험진에 방어사·부사·판관을 두고 함주 및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길주를 비롯해 윤관이 쌓은 4성이 모두 공험진 근처에 있으리라고 세종은 생각했던 것이다.




지명이 사람들의 이동에 따라 변천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330여 년 전 고려에서 설치한 길주가 만주에 있었다는 세종의 견해는 타당한 것이었다. 공험진에 대한 이런 화두를 던진 세종은 재위 14년(1432) 12월 좌대언(左代言:좌승지)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감사로 삼아 두만강 북쪽 강역을 확장하게 했다. 김종서를 함길도 감사로 삼기 10개월 전인 그해 2월 활과 화살을 내려주면서“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을 쏴라”고 말했다. 문신에게 활을 내려주며 항상 차고 있으라고 당부한 것은 그에게 북방 강역 확장의 임무를 맡기겠다는 포석이었다. 무신이 아닌 문신을 쓴 이유는 단순하게 군사력으로 여진족을 밀어내는 것만으로 강역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여진족을 회유해야 하고 무엇보다 조선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토관직(土官職:지역인들에게 주는 관직)을 대거 신설하고 일반 백성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허용하는 특혜를 주면서 함길도 이주를 권했으나 먼 북관(北關)으로 이주하려는 백성은 많지 않았다. 세종 19년(1437) 경상도 개령읍(開寧邑)의 아전 임무(林茂)가 자신의 팔뚝을 자르고, 세종 21년(1439)에는 전라도 옥과현의 호장(戶長) 조두언(趙豆彦)이 자살해 함길도 이주를 피하려는 사건까지 발생했을 정도로 육진 이주는 꺼리는 일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김종서는 벼슬을 주고 양식을 지급하는 등의 정책으로 육진 거주 백성을 늘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세종은 재위 21년(1439) 3월 공조 참판 최치운(崔致雲)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이 조선 경계’라고 선언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미 사신 김첨(金瞻)을 보내 공험진 남쪽이 조선 영토라고 말했음을 상기시켰다.




“신의 부친께서는 홍무 21년 태조 고황제의 성지(聖旨)에 따라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김첨을 사신으로 보내 주달(奏達)했습니다.(세종실록 21년 3월 6일)”




명의 시조 주원장이 공험진 이남을 고려(조선) 영토로 인정했다는 논리에 명나라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다. 개국 시조의 유지를 어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공험진이 국경임을 못 박은 그해 8월 세종은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를 내려 “동북 강역은 공험진이 경계라는 말이 전해진 지는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는 알지 못한다. 공험진이 장백산(長白山:백두산) 북쪽 산기슭에 있다 하나 역시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윤관이 세운 비석을 언급했다.




“고려사에는 ‘윤관이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는데, 지금 들으니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한다. 본진(本鎭:공험진)이 선춘점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세종실록 21년 8월 6일)”




세종은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를 세운 공험진 선춘점을 찾으면 조선의 국경이 명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실록에는 김종서의 보고 내용은 실려 있지 않지만 김종서가 공험진과 선춘점의 위치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해 보고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보고 내용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해 조선 초기의 각종 지리서를 편찬할 때 사료로 이용됐다.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조항이 이를 말해준다.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다…고려 예종 2년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을 쌓아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고려의 윤관 장군이 함주에서 공험진까지 9성을 쌓고 ‘고려지경’이란 비석을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함길도의 사방 경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함길도의) 동쪽은 큰 바다에 임하고, 남쪽 경계는 철령(鐵嶺)이며,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했는데, 높은 봉우리가 백두산에서부터 기복(起伏)해 남쪽으로 철령까지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다. 북쪽은 야인(野人:여진족)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다.(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철령에서 공험진까지 1700리가 함길도의 남북 길이라는 것이다. 같은 책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조는 공험진의 위치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두만강과 접해 있는 경원에서 “북쪽으로 공험진까지 700여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까지 700여 리”라는 것이다. 세조 때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작성한 동국지도(東國地圖) 역시 공험진과 선춘령이 두만강 북쪽으로 표기돼 있다. 조선과 명의 북쪽 국경은 두만강 북쪽 700여 리 지점이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은 세종 때의 조선 국경을 두만강으로 축소시켰지만 당대의 많은 기록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명나라로부터도 인정을 받은 국경선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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