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인물 - 연산군 > 조선전기

한국의 역사인물 - 연산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3,347회 작성일 11-11-14 12:08

본문

연산군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燕山君, 1476. 11. 7~1506. 11. 6, 재위 1495~1506)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군주일 것이다. 그 명성은 물론 오명이다. 12년에 걸친 길지 않은 치세 동안 두 번의 사화(士禍)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을 자행하다가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反正)으로 폐위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오명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그 당대에 확고히 내려졌다. 일반적인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나 ‘종’이 아닌 ‘군’이라는 묘호(廟號)가 붙여졌고 그의 시대를 다룬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렸으며, 종묘에서 배제되고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초라한 ‘묘’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판정을 대표하는 외형적 상징들이다.




연산군이 자신의 치세를 파탄시킨 일차적인 원인과 책임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그에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보여준 심리와 행동은 분명히 기이하고 부당한 측면이 많았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그 개인에 국한하는 소박한 판단을 넘어 시대적인 맥락을 넓고 깊게 고려해 파악하는 시각은 연산군과 그의 시대를 좀더 정확하고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강력한 왕권의 추구

연산군은 매우 순조로운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고(성종 14년(1483) 2월 6일), 12년 동안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유일하지만 중요한 결함은 모후(母后)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분명했지만, 암투와 치정이 난무하던 전근대의 궁중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산군은 이처럼 전체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런 원인을 분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주제는 삼사(三司)다. 잘 알듯이 삼사는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이다. 그 관서(官署- 관청과 그 부속기관)는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로 갖고 있었다.




비판적 언론기관인 삼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시기는 성종 때였다. 우선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성종 16년, 1485) 삼사를 포함한 주요 관서들은 그 기능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런 제도적 변화와 함께 세조대 이후 과도하게 팽창한 대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왕의 의도가 작용함으로써 삼사는 국정의 필수적인 관서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었다.




이것은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의 전제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구조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뤄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런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凌上)’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척결하는데 치세 내내 전력을 기울였다. 그 대상은 처음에는 삼사였지만, 점차 신하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능상의 혐의가 번져가는 과정은 폭정의 격화와 동일한 의미였다.




갈등의 고조와 무오사화

널리 알듯이, 연산군대의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무오사화(연산군 4, 1498)와 갑자사화(연산군 10, 1504)였다. 두 사화를 관통한 주제는 앞서 말한대로 능상의 척결이었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과 삼사는 수륙재(水陸齋)의 설행, 외척의 임용, 폐모(廢母)의 추숭(追崇- 추존) 등 많은 사안에서 충돌했다. 대신과 삼사의 공방도 격화되었다.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은 대간의 간언을 거부한 국왕의 행동을 “영주(英主)의 위엄 있는 결단”이라고 칭송했고, 사간원 정언(정6품) 조순(趙舜)은 그런 “노사신의 고기를 먹고 싶다”고 극언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왕과 대신들은 당시의 가장 심각한 폐단이 삼사라는 데 합의했고, 신중히 기회를 노린 끝에 첫 번째 숙청에 착수했다. 그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세조를 비판한 김종직(金宗直)과 김일손(金馹孫)의 불온한 문서([조의제문(弔義帝文)]과 사초)였지만, 앞서 설명한 상황적 맥락을 고려할 때 궁극적인 목표는 삼사의 능상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국왕과 주요 대신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제한된 숙청을 단행했다. 피화인(被禍人- 사화에서 처벌된 사람)은 52명으로 사형 6명(11.5%), 유배 31명(59.6%), 파직ㆍ좌천 등이 15명(28.8%)이었다. 이런 형량(특히 사형이 매우 적다는 사실)과 인원은 조선 최초의 사화라는 거대한 상징성에서 예상하기 쉬운 결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외형은 그 사건이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경고였음을 보여준다.




첫 번째 사화로 삼사는 일단 움츠러들었다. 왕정의 원리상 강력한 왕권의 확립과 행사는 그리 잘못된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오사화까지 연산군의 통치는 일반적인 수준에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시작되었다. 국왕은 삼사를 제압해 확보한 왕권을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건설적인 분야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기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했다. 그 과정은 유례 없는 폭정으로 이어졌다.




왕권의 일탈과 갑자사화

무오사화를 거치면서 삼사는 상당히 온순해졌고, 국왕과 대신의 권력은 그만큼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이 시점에서 국왕은 결정적인 판단 착오를 저질렀다. 그는 자의적(恣意的)인 욕망의 충족과 해소를 자유로운 왕권 행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했다. 그런 행태는 연회ㆍ음행(淫行- 음란한 행실)ㆍ사냥에의 탐닉, 금표(禁標- 출입금지를 알리는 푯말) 설치와 민가 철거, 발언의 통제 등 극한적이고 기이한 황음(荒淫- 주색에 빠져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그런 과정의 궁극적인 결과는 과도한 재정지출에 따른 국가경제의 파탄이었다. 무오사화 이듬해인 재위 5년부터 세출(20만 8522석 1두)은 세입(20만 5584석 14두)을 초과했다. 재위 7년에는 이른바 ‘신유공안(辛酉貢案)’을 제정해 기존의 공납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민생의 부담과 재정의 유용은 격증(激增- 수량이 갑자기 늘어남)했다.





이처럼 왕권의 일탈이 심각해지면서 삼사는 다시 간쟁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오사화로 위축된 삼사가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은 역설적이게도 연산군 자신이 제공한 것이었다. 주목할 측면은 이런 흐름에 대신들도 동참함으로써 연산군 후반의 정국은 대신과 삼사가 연합하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본원적으로 견제와 비판의 관계에 있는 대신과 삼사가 인식을 공유했다는 것은 이 시기 연산군의 폭정이 얼마나 심각했는가를 반증해준다.




그러나 국왕은 이런 이례적 상황을 능상의 풍조가 삼사뿐 아니라 대신에게까지 만연한 결과로 해석했고, 이제 이전과 같은 간접적이며 제한적인 숙청으로는 그런 풍조를 일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갑자사화는 권력의 자의성과 자율성을 혼동하면서 전제 왕권의 몽상과 황음에 침윤되어가던 국왕이 행사한 폭력의 극점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 사건은 규모와 방식, 피화인의 성격과 결과 등 많은 측면에서 무오사화와 달랐다. 우선 모두 23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피화되었고, 사형이 절반을 넘었다(122명, 51.1%). 즉 그것은 전면적이며 가혹한 숙청이었던 것이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대신(20명, 7.5%)보다 삼사(92명, 39.7%)가 많이 처벌되었지만, 한명회(韓明澮)ㆍ정창손(鄭昌孫)ㆍ윤필상(尹弼相)ㆍ성준(成俊)ㆍ한치형(韓致亨, 이상 영의정)ㆍ이극균(李克均)ㆍ어세겸(魚世謙, 이상 좌의정)ㆍ이세좌(李世佐, 예조판서) 등 당시의 거의 모든 주요 대신들이 사형이나 부관참시됨으로써 실제로는 대신의 피해가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 사화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할 사항은 연산군이 폐모(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되면서 광기 어린 보복을 자행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한 소설에서 발단해 너른 대중적 파급력을 갖게 된 그런 삽화는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그런 중대한 일을 국왕이 10년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연산군은 즉위 직후 폐모가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재위 1년 3월 16일). 그 날 수라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아들의 비통을 깊이 알려준다. 갑자사화에서 폐모 사건의 보복은 숙청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데는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 사건의 본질적인 원인이나 목표를 구성하지는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핵심적인 주제는 능상의 척결이었다. 폐모 사건은 선왕의 잘못된 판단을 저지하지 못해 현재의 국왕을 참척(慘慽- 부모가 자식을 잃는 것과 같은 지극한 슬픔)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이유에서 가장 심각한 능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연산군 시대의 역사적 의미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은 그야말로 극심한 폭정이 휩쓴 황무한 시간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시기에 국왕은 모든 행동을 제약받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갈망한 전제 왕권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편집증적 심리와 행동에서 보이듯이 그의 내면은 그만큼 파괴되어 있었다.




능상의 척결을 목표로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려는 연산군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실패는 물론 쓰라린 상처였지만, 중요한 교훈과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삼사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졌다는 사실이었다.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가 보여




주듯이 삼사의 기능이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경험한 초유의 정치적 파탄은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군림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가 현실에 더욱 원숙해지는 성장통이었다.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이런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조선시대 정치사와 사회사를 전공하고 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