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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인물 - 눌재 양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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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236회 작성일 11-11-17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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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한국사

양성지(梁誠之)



양성지(梁誠之 : 1415〜1482)는 세조가 ‘나의 제갈량’이라고 부를 정도 총애했던 인물이다. 또한 조선 후기 개혁군주인 정조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조선 초기 누구보다 애국적이고 주체적인 경륜가(經綸家)였다. 하지만 그는 아첨꾼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왜 비난을 받았으며, 왜 정조로부터 다시 주목받은 것일까?


정조의 스승 양성지

1776년 정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그런데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람은 정조보다 300년이나 앞선 시대를 살았던 양성지였다. 양성지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조정에서 간행한 모든 서책들을 비롯하여 선비들이 저술한 서책들도 모두 수집, 간행하여 보관케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와 같은 건의가 300여 년이 흐른 후에 실현된 것이다.


정조는 양성지를 존중하여, 그의 문집인 [눌재집]을 왕명으로 출간하고, 양성지의 자손들도 우대해 주었다. 정조는 양성지의 상소문의 대부분이 관념적인 주장이 아니라, 병학, 지리, 역사, 문학 등 각 분야의 실용적인 정책 제안을 담고 있다는데 주목했다. 정조는 양성지의 유용지학(有用之學), 경제실용(經濟實用)의 학문을 좋아했다. 그의 학문은 18세기 이후 실학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마하다

양성지는 조선 초기 신진 사대부인 양구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의 벼슬이 예빈시윤(종3품)에 이른 만큼, 그는 어린 시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1441년 27세의 양성지는 진사시, 생원시, 그리고 문과까지 세 차례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특히 문과에서는 전체 33명 가운데 3등으로 합격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인해 그는 벼슬길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집현전 부수찬(종6품)이 되었다. 2년 후에는 사간원 좌정언이 되어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에도 참석했다. 세종의 눈에 든 탓인지, 1443년 10월에는 집현전 수찬(정6품)이 되어 1450년까지 계속 집현전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집현전 생활 동안 그는 한방의학 백과사전인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특히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참여해 역사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는 1449년부터 국방에 대한 의견을 차츰 제시하여, 북방에 길게 뻗은 성곽인 행성(行城) 건설에 반대하고, 요충지 중심의 지역방어 개념인 진관(鎭管) 체제를 제안하고 이를 실현시켰다. 1450년에는 비변10책(備邊十策)을 제안하여,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다. 그는 외적에게 몸을 낮추고 예물을 많이 바쳐(卑辭厚幣) 평화를 추구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한번은 적에게 크게 이겨 저들과 우리의 군사력이 대등한 수준에 있음을 보여준 후 수호(修好)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고려가 요, 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과거 사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주 독립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

양성지는 조선을 중국과 함께 하늘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별개의 구역을 다스리는 나라라고 여겼다. 그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이며 부강한 조선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에 잠재된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 매몰되어 중국의 역사에는 밝은 대신, 한국사에 대해서는 도리어 아는 것이 부족했다. 반면 양성지는 우리 역사를 배울 것을 강조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들고 단군과 삼국의 임금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그는 우리 영토가 본래 요동을 포함한 ‘만리지국(萬里之國)’으로 우리 땅을 수복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명나라가 변방의 방어기지를 요양(遼陽)에서 봉성(鳳城)으로 옮기려고 하자, 그는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두 나라가 국경을 마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지만,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라고 경계를 한 것이다.


그는 명나라 사신이 조선의 활을 구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활이 장기인데, 명나라가 이를 아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병기(兵器)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신라의 노(弩) 기술자 구진천(仇珍川)이 당나라에 노를 만드는 기술을 알려주지 않은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풍부한 우리 역사 지식이 있었기에, 그는 이와 같은 정책 제안을 했던 것이다.


양성지는 자주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군정십책(軍政十策), 비변십책(備邊十策) 등을 건의하여 국방 강화를 주장했다. 또 국방과 관련된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沿邊防戌圖)] 같은 각종 지리서도 만들었다. 그는 여진 등의 외적 방어를 위해 무인(武人)을 우대하고, 여진족 가운데 귀순한 자들은 천대하지 말고, 조선 사람으로 만들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왕실의 호칭을 올리고, 5개의 작은 수도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는 등 조선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자주적인 사고의 정점은 환구단에서 천제(天祭)를 지낼 것을 주장한 일이다. 천제를 지내는 것은 오직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던 시대에, 양성지는 조선도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나라였음을 강조했다. 세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457년과 1464년 2차에 걸쳐 환구단에서 천제를 시행하였다. 아쉬운 것은 세조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까지 조선은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양성지 외에는 환구단에서 천제를 지낼 것을 제안할 조선의 사대부가 없었던 탓이다. 조선 선비들은 중국을 지나치게 숭상한 사대주의자들이 대다수였지만, 유독 양성지만큼은 달랐다.


다방면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

[눌재집] 권1의 비변십책 부분. 국방에 관한 근본대책을 상술하였다. 눌재집은 조선 초기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지리 등의 문물제도에 관계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그는 조선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예컨대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의창(義倉)을 설립하거나, 백정(白丁)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자고 주장했다. 또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 등을 주장하는 등 풍속에 대한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과거 시험의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고, 우리 음악(雅樂)의 보호 및 체계적 정리도 주장했다. 궁벽한 시골에 의사를 보내고, 변방의 백성을 구휼하라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

양성지의 호(號)인 ‘눌재(訥齋)’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는 실제로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그 어눌함을 항상 글로 뜻을 드러내어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知無不言)’는 평을 들을 만큼 자신을 끊임없이 독려한 성실한 인물이었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시대에 걸쳐 다양한 정책을 펼친 그는 공조판서, 대사헌, 홍문관대제학 등 국가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 성종 2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을 많이 가졌고, 임금에게 아부한다는 평가도 받아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 출신이지만, 사육신(死六臣)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중기 이후 사육신을 높게 평가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성지는 300년이 지나 정조를 만나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의 정치가 명분만을 앞세워 왜란과 호란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강력한 지도력과 실용정치를 요구하는 시대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계급질서를 옹호한 인물이었다. 비록 노비에게만 노역을 시키지 말자고는 했으나, 노비제 폐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인정하는 등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느 조선 선비들과 다르게,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안보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의 예를 잘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조선 스스로 자주 독립을 지켜낼 준비를 갖춤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그는 자주독립 정신에 충만한 조선을 위한 정치가였다.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아쉽게만 생각했던 주자학에 빠진 일부 선비들과 그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참고문헌 : 눌재집(訥齋集); 한영우, [양성지 - 조선 수성기 제갈량], 지식산업사, 2008.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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