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다시읽기(4) - 누루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 조선후기

병자호란 다시읽기(4) - 누루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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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681회 작성일 09-03-0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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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명의 지배 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 해서, 야인의 세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했던 종족은 해서여진이었다.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 등 네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던 무렵까지 가장 강한 부족은 예허부였다. 이렇게 여진족이 서로 갈라져 있던 상황 아래서 명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여진 부족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패자(覇者)의 출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1583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던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건주여진 내부에서 누르하치라는 ‘패자’가 등장하자 ‘견제 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누르하치와 해서여진의 격돌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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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해서연합군을 물리치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지배자였던 부자이(布齊)와 나림불루(納林布祿)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누르하치가 불손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지배자 멩게불루(蒙格布祿),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萬泰), 호이파부의 지배자 바인다리(拜音達 )를 끌어들였다.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에는 해서여진 뿐 아니라 몽골의 코르친(科爾沁)부족 등도 가담했다. 모두 아홉개 나라, 대략 3만 가까운 병력이 누르하치를 치기 위해 연합군을 구성했다.

누르하치는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당시 한창 뻗어 오르고 있었던 그의 기세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자카( 喀)라는 험준한 요새에 진을 쳤던 누르하치의 건주군은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부자이를 비롯하여 연합군 4000여명을 죽이고, 말 3000필, 갑주 1000개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울라부의 지배자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布占泰)를 생포했다.

아홉개 나라의 연합군으로도 누르하치를 제압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했다.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던 몽골족 가운데서 누르하치에게 귀부(歸附)하는 종족이 나타났다. 연합군에 가담했던 코르친 부족과 다른 몽골부족 칼카부(喀爾喀部)가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복종을 다짐했다.

코르친과 칼카 몽골의 귀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몽골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록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건주여진이 더욱 성장하여 후금(後金), 청(淸)으로 변신하고, 중원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몽골과의 제휴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훗날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산하이관(山海關)을 우회하여 베이징의 명나라 황궁(皇宮)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몽골의 협조 덕분이었다. 곧 몽골 부족이 만리장성 외곽에서 베이징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같은 인연 때문에 명을 멸망시킨 이후 청은 이번원(理藩院)을 설치하고, 열하(熱河)에 행궁(行宮)을 두어 몽골족을 우호적으로 통제하려고 시도하는데 그 단초는 바로 누르하치 시절에 마련되었던 것이다.

해서여진, 누르하치에게 손을 내밀다

해서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뒤부터 누르하치는 만주 전체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자신감이 넘친 누르하치는 1595년 6월, 군대를 이끌고 호이파부를 공격했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은 부잔타이를 주물러 울라부의 내정(內政)에까지 관여했다.

1596년 7월, 울라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만타이와 그의 아들이 피살되었다. 누르하치는 억류하고 있던 부잔타이를 송환했고, 부잔타이는 형의 뒤를 이어 울라국의 국주(國主)로 즉위했다. 누르하치에게 은혜를 입은 부잔타이는 누이 후나이를 건주여진으로 보냈고, 누르하치는 그녀를 동생 스르가치(舒爾哈齊)와 혼인시켰다.

당시 누르하치는 해서와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공격하는 한편, 그들 부족과 혼인을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폈다. 실제 누르하치의 첫째 부인인 나라씨(納喇氏)는 예허 출신이다. 누르하치는 16명의 부인들과의 사이에 모두 16남8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많았던 것은 바로 혼인정책의 소산이었던 셈이다. 누르하치의 세력이 커지자 해서여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1597년 예허, 울라, 하다, 호이파부는 일제히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부도했음을 사과한 뒤 우호를 다시 맺자고 요청했다. 누르하치는 느긋하게 이들과 화약(和約)을 맺었다. 바야흐로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로 떠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명의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명은 개입하여 누르하치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럴 처지가 못되었다. 바로 이 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을 침략했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났던 것이다. 잠시 랴오양(遼陽), 광닝(廣寧) 등지로 물러나 있던 명군은 대거 조선으로 들어갔고, 명 조정의 관심은 온통 일본군에게 쏠렸다.

이나바 이와기치가 ‘누르하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떠벌렸던 데는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해서여진과 화약을 맺어 여유를 얻은 누르하치는 1598년 1월,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몽골의 안출라쿠(安楚拉庫)를 공격하여 1만여에 이르는 인축(人畜)을 획득했다. 정복 전쟁을 통해 인구도 늘고, 재물도 늘었다. 임진왜란 시기 누르하치의 행보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누르하치, 내실을 다지고 정체성을 강조하다

이미 말했듯이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지휘관일 뿐 아니라 탁월한 상인이기도 했다. 그는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모피와 인삼의 유통로를 장악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명나라라는 대시장(大市場)과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명 상인들을 통해 소금, 직물 등 생필품이 유입되다가 점차 은(銀)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은 여진족 내부에서 화폐로 유통되었고, 유통경제에 눈을 떴던 누르하치는 1599년 만주 지역에서 금은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수렵과 채집 위주의 여진족 경제에 변화가 일어났고, 화폐의 확보를 위해서 주변국과의 무역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어느 집단이나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힘이 강해지면 자의식도 따라서 커지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무렵, 누르하치는 자신이 통일한 건주 부족을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만주’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문수(文殊)’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만주는 ‘문수보살의 도(徒)’를 의미한다.

누르하치는 이제 ‘만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해서나 야인여진은 물론 명에 대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다. 정체성을 찾고 싶은 열망은 문자(文字)를 만들려는 노력으로도 나타났다.1599년 누르하치는 만주 문자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까지 만주는, 서신을 주고받는 등의 일상생활에서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명이나 조선 등과 주고받는 외교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이같은 현실에서 몽골 문자를 토대로 만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석촌동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에 만주어, 한문, 몽골어 등 3개국 문자가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은 이같은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났다.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명군 역시 철수를 시작했다. 명은 다시 만주로 감시의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로서는 ‘좋은 시절’이 끝난 것을 의미했다. 명의 압력이 누르하치에게 미칠 기미가 보이자 당장 세력판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약을 맺은 이후 잠시 잠잠했던 하다와 예허가 누르하치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만주와 하다, 예허, 명 그리고 궁극에는 조선까지 얽힌 격변의 또 다른 막이 올랐던 것이다.


[2]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해서여진과 몽골의 연합군마저 물리친 누르하치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하다, 호이파, 울라 등 해서의 여러 부족들을 강온(强穩), 양면으로 통제하여 가장 강한 예허부(葉赫部)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당시 해서여진이 누르하치에게 맞서려면 4부 사이의 단결이 절실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누르하치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 수 없었다. 하다, 호이파, 울라는 차례대로 누르하치에게 각개격파되었고, 혼자 남은 예허는 결국 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예허의 그 같은 전략을 꿰뚫었다. 그는 해서여진을 공략하는 동안, 자신을 견제했던 명에 몸을 낮추었다. 명의 견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여 명분을 축적하고, 내실을 다졌다.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숨고르기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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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와 호이파를 멸망시키다

1599년 하다의 국주(國主) 멩게불루는 예허와의 갈등으로 전쟁을 하게 되자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멩게불루가 셋째아들을 볼모로 보내자 누르하치는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다를 원조하려 했다.

다급해진 예허는 개원(開原)에 주둔한 명군 지휘부를 움직여 멩게불루를 질책했다.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은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멩게불루에게 자신을 딸을 아내로 주었다. 멩게불루는 예허의 요구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와의 동맹을 철회했다. 누르하치와 예허, 명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의 ‘눈치보기’였다.

격분한 누르하치는 하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멩게불루를 사로잡았다. 그러자 명이 개입했다.1601년 명의 만력제(萬曆帝)는 사신을 보내 누르하치를 질책하고, 하다의 유민들을 멩게불루의 아들 우루구다이(武爾古岱)에게 반환하라고 강요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요구에 따라 유민들을 송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허가 하다를 공격하여 우루구다이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누르하치는 명에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자신이 하다를 격파한 것은 문제삼고, 예허의 침략은 그냥 넘어가는 이중적 태도를 따졌다. 하지만 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은 삼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이파를 정벌하는 과정도 하다의 경우와 유사했다.1607년 9월, 호이파의 신료들이 모반하여 예허로 귀순하자, 국주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7명의 볼모를 보내왔다. 그러자 예허는 바인다리에게 “누르하치에게 볼모 보낸 것을 취소하면 귀순한 자들을 송환하겠다.”고 제의했다. 바인다리는 예허에게 속아 누르하치에게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결국 정벌에 나서 바인다리 부자를 살해하고, 호이파를 병합했다. 예허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울라 격파와 조선에 미친 파장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해서 부족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울라였다.1596년, 울라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억류하고 있었던 부잔타이(布占泰)를 송환하여 국주로 즉위시킨 바 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은혜에 감사하여 혼인 관계를 맺고 동맹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수시로 향배를 바꾸어 배신과 복종을 반복했다. 부잔타이는 국주가 된 이후 모두 7차례나 누르하치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누르하치 또한 자신의 딸을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을 부잔타이에게 아내로 주어 다독였다.

부잔타이는 끝내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압박하여 곤경에 처하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조선에 손을 내민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610년, 누르하치의 압박 때문에 위기에 처하자 부잔타이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직첩(職帖)을 하사해주고 교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울라의 세력은 두만강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은 부잔타이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그에게 직첩을 주고, 관복을 하사했다.

광해군의 의도는 그들을 회유하여 두만강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와 해서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변의 추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1610년 2월14일의 경우,‘이 오랑캐가 겉으로는 누르하치와 화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은 형상이 있다. 예허와의 중간 길이 끊기고, 교역의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에서 교역하기 위해 우리의 의도를 떠보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보를 기초로 누르하치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했다. 나아가 곧 닥쳐올 ‘누르하치와 명의 대결’이라는 파장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팔기제(八旗制)를 완성하다

누르하치는, 향배가 무상했던 부잔타이를 공격하여 1613년 마침내 울라부를 멸망시켰다. 예허만 빼놓고 해서여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윽고 1616년, 국호를 아이신(金)으로 고치고, 칸(汗·한)으로 즉위했다. 바야흐로 12세기 한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구다(阿骨打)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지배하는 종족이 다양해지고,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팔기제(八旗制)였다. 팔기제는 니루(牛)라는 만주족 고유의 조직에서 기원했다. 만주인들은 수렵 등을 나갈 때 10명을 한 조로 삼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아, 그를 니루라고 불렀다.‘니루’란 ‘큰 화살’을 뜻한다.

누르하치는 성년 남자 300명을 1니루로,5개의 니루를 1자란(甲喇)으로, 다시 5개의 자란을 1쿠사(固山)로 편제했다.1쿠사는 결국 7500명인 셈인데 그것을 한자로는 기(旗)라고 했다.

‘기’는 군사조직이자 정치, 사회조직으로 모든 만주인은 예외 없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각 기에는 고유한 깃발이 있는데 황색, 백색, 홍색, 남색만으로 제작된 것을 정기(正旗), 황색, 백색, 남색 깃발에 홍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과 홍색 깃발에 백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을 양기(旗)라고 한다.

1616년 누르하치는 본래 4기였던 것을 8기로 확충했다. 해서여진을 통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귀순해 오는 한족과 몽골족이 늘어나면서 한군팔기, 몽골팔기가 등장했다.“나가면 병사가 되고 들어오면 인민이 되는(出則爲兵 入則爲民)” ‘군민일체’,‘군정일체’의 팔기제의 효용성은 엄청났다. 평소 일상 생활과 전쟁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게 편제된 팔기제 아래서 후금(後金)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과 전투 능력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쇠망의 조짐이 뚜렷했던 명군이, 조직화된 팔기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팔기는 1644년, 청이 베이징으로 입성한 뒤에도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원 장악 이후, 팔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별도의 호적에 편입된 특수 신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지(旗地)라 불리는 토지를 하사 받고, 그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원 입성 이후 기인들은 오로지 만주어를 익히고 궁술(弓術)을 연마하여 관리나 군인으로 등용되었다. 다른 농공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권도 컸지만 의무도 명확했다. 기인들에게 만주어를 익히게 하고, 궁술을 연마시킨 것은 결국 만주족이 지닌 정체성과 야성(野性)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수십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이상의 한족을 270여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1616년, 팔기제를 완성하면서 누르하치는 명과 일전을 겨룰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던 셈이다.



[3]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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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순성 성주 이영방(李永芳)이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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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군사 주둔지인 푸순성.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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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인 예친왕 다이샨(代善).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4]1618년 4월15일 푸순성을 포위한 누르하치는 성주 이영방(李永芳)에게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이영방이 망설이자 후금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영방은 항복했다. 푸순성을 접수한 누르하치는 성안에 있던 한인(漢人) 상인들을 풀어 주었다. 그들에게 ‘칠대한’이 적힌 문서를 들려주고, 고향으로 돌아가 내용을 알리라고 했다. 자신의 거병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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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1일 광녕총병 장승음(張承蔭)이 푸순성을 구원하려고 달려왔다. 만주 주민들을 세거지에서 쫓아내고 수확을 금지시켰던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병력은 1만명에 불과했고,6만명까지 불어난 후금군에 참패해 전사하고 말았다.‘명실록(明實錄)’은 ‘장승음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力屈死之)’라고 적었다.

‘중화(中華)의 대국’이 ‘오랑캐의 소국’에 밀리기 시작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이후 누르하치가 요동의 명군을 공략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각 지역에 분산배치돼 있던 명군을, 대규모의 병력을 집중시켜 격파하는 것이었다.

명, 충격 속에 대책을 모색하다

푸순성 함락과 장승음 전사 소식에 명의 조야는 술렁거렸다. 특히 이영방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소식은 ‘경악’ 그 자체였다. 요동 전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요동이 무너지면 산하이관이 흔들리고, 궁극에는 베이징까지 위협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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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조정을 더욱 불안하게 한 것은 누르하치가 코르친 등 몽골 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몽골 지역으로 진입하면, 명이 요동에 설치한 변장(邊牆)을 우회해 명군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료들은 상소를 올려 산하이관의 방어를 강화하라고 촉구했다.‘사납고 건방진 오랑캐’를 즉각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타났다.

하지만 당시 요동에 배치된 명군의 전력은 미덥지 못했다.1618년 6월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최경영(崔景榮)은 ‘요동의 방어선은 2000리나 뻗어 있는데 병력은 고작 8만∼9만명 정도뿐’이라고 했다.9만명이라고 해봤자 광활한 지역에 분산배치돼, 개별 지역이 팔기병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을 경우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더욱이 당시 요동의 명군은 군량 등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푸순 함락 직후, 병부상서 설삼재(薛三才)는 요동에 대한 군수지원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1617년 가을부터 당시까지 요동 방어를 위해 지출했어야 할 군비(軍費)가 은 50만냥인데, 그것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향(遼餉·요동으로 보내는 군비)을 확보하고, 병력을 확충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염출해야만 했다.

설삼재는 호부(戶部)의 창고가 비었음을 실토하고 만력제(萬曆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의 ‘사금고(私金庫)’인 내탕(內帑)에 쌓여 있는 은화를 좀 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설삼재뿐만이 아니었다.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거의 한결같이 내탕을 풀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만력제는 내탕에 수백만냥을 쌓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인색한 황제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짐의 내탕이 공허해 요동의 군사비를 대기가 곤란하다.”고 했다.

만력제란 인물은

역사가들의 만력제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다.‘명은 숭정제(崇禎帝) 대에 망했지만, 망하는 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만력제’라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만력제의 정치적 행태를 ‘태정(怠政)’‘파공(罷工)’이라 부른다.‘정사를 돌보는 데 게으르고, 황제의 역할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만력제는 1573년 열 살에 즉위해 1620년 쉰여덟 살로 죽을 때까지 48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정치를 팽개친 것은 아니었다.1584년 무렵까지는 뛰어난 재상이자 ‘스승’이었던 장거정(張居正)의 보좌를 받아 상당한 수준의 치적을 이뤘다. 조정의 기강이 잡혔고, 세입(稅入)이 앞 시기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척계광(戚繼光)과 이성량의 활약으로 남방의 왜구(倭寇)나 북방의 몽골, 여진의 위협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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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4년 장거정이 죽은 뒤부터 만력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 역사학자 옌충녠(閻崇年)은 만력제가 즉위 과정에서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이 순조롭게 황제가 되었던 것,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인 데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1599년까지 임진왜란을 비롯한 세 차례의 큰 전쟁(萬曆三大征)을 치른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다.

만력제는 융경제(隆慶帝)의 셋째 아들이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두 형이 유년 시절에 죽는 바람에 여섯 살에 황태자로 책봉됐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융경제 또한 재위(在位) 6년 만에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만력제는 황태자가 된 지 불과 4년 만에 자연스럽게 즉위했다. 누르하치나 홍타이지를 비롯한 청의 역대 군주들이 후계자로 선택되는 과정에서 왕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던 것, 조선의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뒤 16년 동안이나 부왕(父王)의 견제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만력제는 그야말로 ‘행운아’였다. 역경을 모르고 일찍이 권좌에 올라 안일에 빠지기 쉬웠던 데다, 비만과 신병(身病) 때문에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것, 나아가 만력삼대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방종에 빠지게 됐다.

이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대신해 정사를 거의 도맡다시피 했던 장거정마저 사라지자 만력제의 한계는 곧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태정’의 실상은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였던 ‘태정’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1600년 이후 20년 가까이 조정의 회의를 거의 주재하지 않았다. 신료들은 만력제에게 ‘조정에 나와 정사를 재결(裁決)해 달라.’고 수없이 주청했지만 그야말로 마이동풍이었다. 최고 관직인 대학사(大學士) 가운데는 심지어 3년 동안 만력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만력제는 신료들이 자신에게 올린 상소나 건의에 대해 회답을 주지 않았다. 상소문은 ‘불보(不報)’ ‘유중(留中)’이라 하여 회답이 없는 상태로 궁중에 방치됐다. 당사자의 사망이나 사직 때문에 고위 관직이 비어도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았다. 푸순성 함락 직후 대학사 방종철(方從哲)이 ‘누르하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바로 비어 있는 관직을 채우라는 것이었다.

황제가 조정에 나오지 않고, 신료들의 결원을 보충하지 않으며, 상소나 건의의 내용을 재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었다. 정사를 팽개친 만력제는 도대체 무엇을 했을까?

주색(酒色)에 빠지고 토목공사에 몰두했다. 죽은 뒤에 묻힐 정릉(定陵·현재의 명 13릉 가운데 하나)을 미리 짓기 위해 은 800만냥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탕이 축나는 것이 아까워 환관들을 전국 각지로 보냈다. 백성들로부터 비용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환관을 앞세운 마구잡이식 수탈에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푸순성이 함락될 무렵 만력제가 보인 행보는 누르하치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설삼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내탕을 풀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이미 명의 앞날에 낙조(落照)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병력을 운용할 비용이 없으면 누르하치를 제대로 막을 수 없고, 그를 막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면 자신이 황제 자리에 있을 수도, 수백만냥의 내탕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과연 몰랐던 것일까? 누르하치가 한창 떠오르고 있을 때, 최고 권력자가 만력제였다는 사실이 명에는 불행이었던 셈이다.


[5]누르하치의 푸순 점령 직후, 명 조정의 신료들은 당장 병력을 동원하여 이 ‘괘씸한 오랑캐’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명의 내부사정은 간단치 않았다. 만력제의 태정(怠政)과 황음(荒淫)에서 비롯된 난맥상은 명의 발목을 잡았다. 환관(宦官)들의 발호가 심각했고, 당쟁은 격화되었다. 재정은 고갈되었고,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증세(增稅) 조처가 취해졌다. 민원(民怨)이 높아지고, 반란을 꾀하는 분위기가 퍼져갔다. 우여곡절 끝에 누르하치를 치기 위한 원정군은 편성했지만 영 미덥지 못했다. 명은 결국 조선과 예허에 손을 내민다. 병력을 내어 원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누르하치의 도전으로 촉발된 불똥이 조선으로 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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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세( 稅)의 폐단, 명을 병들게 하다

만력제가 오랫동안 조정에 나오지 않고, 신료들을 접견하지 않으며, 그들의 상소나 건의에도 답하지 않자 자연히 환관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황제의 생각이나 명령이 오로지 환관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만력제는 향락과 토목공사에 필요한 재원(財源)을 환관들을 시켜 긁어 모았다. 환관들에게 흠차태감(欽差太監)이란 직함을 주어 전국으로 파견했다. 광감( 監), 세감(稅監), 염감(鹽監), 주감(珠監) 등 다양한 명칭의 태감들은 각지에서 백성들에게 명목도 없는 세금을 마구잡이로 강탈했다. 영세한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 상세(商稅)를 긁어내고, 약간의 은화를 빼앗기 위해 민가를 철거했으며 무덤까지 파헤쳤다. 반항하는 백성들에게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둘렀다.

환관들이 각지에서 참혹한 수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식은, 베이징에 갔던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백성들은 아우성을 쳤다.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호북(湖北)에 파견되었던 환관 진봉(陳奉)의 패거리가 폭력을 휘두르며 수탈을 자행하자 백성들은 궐기했다. 그들은 진봉의 부하 16명을 붙잡아 강물에 던져버렸다. 운남(雲南)에서는 성난 백성들이 환관 양영(楊榮)의 숙소를 습격하고, 폭력을 자행한 양영의 패거리 200여명을 살해했다.

환관들의 발호는 요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603년 환관 고회(高淮)는 부하 수백명을 이끌고 요양(遼陽), 진강(鎭江), 금주(金州), 복주(復州) 등 요동 일대를 휩쓸었다. 그들은 민간에서 수십만냥의 은화를 강탈했고, 그 때문에 여염이 텅 비어버렸다.

17세기 초, 만력제가 환관들을 시켜 자행했던 수탈을 보통 ‘광세( 稅)의 화(禍)’라고 부른다. 무자비한 수탈 때문에 전국 각지의 상공업은 위축되고, 국가의 공적 세입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민심은 조정으로부터 떠나고, 민변(民變)이라 불리는 저항운동이 각지를 휩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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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고민 끝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꾀하다

푸순의 함락과 장승음의 패전 소식이 알려진 직후부터 명 조정에서는 누르하치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군 편성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광세의 폐’로 말미암아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여의치 않았다. 나라의 공식 금고인 태창(太倉)이 비어버린 상태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군수를 조달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만력제는, 내탕을 풀어 군자금에 보태라는 신료들의 거듭된 요청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1618년 4월27일 직예순안(直隸巡按) 왕상항(王象恒)은 이미 일선에서 물러난 장수들 가운데 가정(家丁)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총병(總兵), 부장(副將) 등의 직책을 주어 요동으로 보내자고 했다. 가정이란 국가에 소속된 정규병력이 아니라 장수 개인이 사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군사를 말한다. 일종의 사병(私兵)인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 사령관인 이여송(李如松)도 다수의 가정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 왔었다.

‘퇴역 지휘관’들이 거느린 가정을 활용하자는 왕상항의 주장은, 정규군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하는 것이 어려웠던 명의 실정을 잘 보여준다.16세기 후반의 척계광(戚繼光)처럼 의지할 만한 현직 지휘관이 없는 상황에서 이미 물러난 장수들이라도 불러들여야 했다. 윤 4월이 되자, 물러나 있던 지휘관들을 불러들이라는 만력제의 조칙이 내려졌다. 양호(楊鎬), 유정(劉綎), 이여백(李如栢), 왕국동(王國棟), 시국주(柴國柱) 등이 줄줄이 불려와 다시 기용되었다.

양호는 정유재란 당시 명군 사령관이었고, 유정과 이여백도 조선에 참전했던 장수들이었다.‘어제의 용사’들이 전투력을 얼마나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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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달 17일 호과급사중(戶科給事中) 관응진(官應震)이 ‘오랑캐를 제어하기 위한 세 가지 방책(禦奴三策)’을 내놓았다. 그가 제시한 방책의 핵심은 누르하치를 제압하기 위해 조선과 예허를 끌어들이자는 것이었다.

관응진은 후금이 북으로는 예허와, 남으로는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는 예허가 과거부터 누르하치와 첨예하게 대립해 왔던 사실,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명으로부터 ‘구원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두 나라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예허로부터 군사들을 빌려 후금의 오른쪽을 치고, 조선으로부터 조총수(鳥銃手) 3000명을 징발하여 후금의 왼쪽을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형적인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이었다.

조선과 예허는 고분고분한 오랑캐로 지칭

이이제이란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견제한다.’는 것이다. 요코야마 히로아키(橫山宏章)에 따르면 이이제이책은 중화(中華)가 와해될 위기에 처할 적마다 어김없이 나타났다고 한다. 막강한 북방민족의 공격에 시달렸던 송(宋)의 왕안석(王安石)과 사마광(司馬光), 서구와 일본의 군사적 도전에 쩔쩔맸던 청말(淸末)의 이홍장(李鴻章)은 물론 2차 대전 이후 소련을 이용하여 미국을 견제하려 했던 마오쩌둥(毛澤東)에 이르기까지 이이제이책은 중국의 전통적인 위기탈출 전략이었다. 관응진은 ‘어노삼책’에서 조선과 예허를 가리켜 ‘고분고분한 오랑캐(順夷)’라고 지칭했다. 명에 ‘고분고분한 오랑캐’를 이용하여 ‘도전을 일삼는 사나운 오랑캐’를 응징하자는 것이었다. 그같은 발상은 관응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1618년 푸순 함락 이후, 명 조정에는 조야(朝野)의 지식인들로부터 누르하치를 제압하기 위한 방책들이 빗발쳤다.

그 내용을 모아 책으로 묶은 것이 오늘날 전하는 ‘주요석획(籌遼碩)’이다.‘요동을 도모하기 위한 큰 계책’ 정도의 뜻을 지닌 이 책에서도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조선을 이용하자고 강조했다.

이윽고 1618년 윤 4월27일 조선 조정에는 병부좌시랑(左侍郞) 왕가수(汪可受)가 보낸 격문이 도착했다. 왕가수는 먼저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다.‘조선이 사람의 몸이라면 명은 그 머리이고, 조선이 나무라면 명은 그 뿌리’라고 했다. 이어 임진왜란 시기 명이 조선에 군대를 보내 일본군을 격퇴시킨 ‘은혜’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부터 조선의 식자들과 명의 인사들 가운데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군이 원군을 보냄으로써 ‘망해 가던 조선을 다시 살린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왕가수는 ‘재조지은’을 상기시킨 뒤, 본론을 이야기했다. 명이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누르하치를 공격하는 데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격문을 받는 즉시 군병을 정돈시켜 대기하다가 기일에 맞춰 나아가 토벌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겉으로는 ‘요청’인 것 같지만 사실상 ‘명령’이었다.

왕가수의 격문을 받은 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0년, 광해군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찾아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왜란이 남긴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황에서 조선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명의 요구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와 악연을 맺을 것인가? 거부하여 ‘재조지은’을 배신할 것인가? 푸순성을 삼켜버린 누르하치의 불길이 바야흐로 조선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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