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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전역과 전적지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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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025회 작성일 09-06-1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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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전역(深河戰役)과 전적지 고찰




사르후전역[薩爾滸戰役] 이 발생한 해는 서기 1619년으로 명나라 萬曆47년, 조선 광해군 10년이다. 명나라의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임명된 양호(楊鎬)는 조정의 결정의 따라 휘하의 군사를 4대로 나누어 후금의 본거지로 진공시켰다. 4로군은 3월 1일 후금의 도성 하투아라[赫圖阿拉]에서 집결하여 협격하기로 했다. 하투아라는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新賓縣) 경내다. 명의 4로군 중 주력에 해당했던 서로군의 대장 두송(杜松)은 후금군을 경시한 나머지 부대와 진군속도를 맞추지 않고 독단적으로 앞서나아가 사르후라는 곳에서 가장 먼저 전멸당했기 때문 이 전쟁을 사르후대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개원에서 출발한 마림의 북로군 역시 무순(撫順) 서북의 상간애(尙間崖)에서 섬멸당하고 관전(寬甸)에서 출동한 유정(劉綎)의 동로군과 조선의 지원군은 환인현(桓仁縣) 경내인 심하(深河 : 지금의 육도하자(六道河子))와 와르커시[瓦爾客什]에서 전멸당하고 말았다.




동로군 대장은 유정(劉綎)은 명나라의 총병관(總兵官)으로써 힘이 장사에 72근 짜리 대도를 휘둘를 수 있는 맹장이었다. 그는 임진년 조일전쟁에 유격대장으로 참전했다가 종전 후 명나라에 귀국하여 사천(四川) 지방의 반란사건에 대한 진압작전에 활약하여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사천지방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징병이 여의치 않자 대부분의 병력을 절강(浙江)에서 징집하여 간신히 1만 5천의 병력을 모아 관전(寬甸)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다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여 그 병력을 동로군에 배속시켜 유정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만력 46년에 편성된 조선지원군은 강홍립(姜弘立)을 원수로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고 모두 3개 영 1만 3천의 병력이었다.




만력 47년 2월 22일과 23일 양일 간에 조선의 창성(昌城)에서 출발한 조선군은 압록강을 도하한 후 관전 경내에 당도했다.




2월 26일 관전을 출발한 유정의 명군은 양마전(亮馬佃)1)을 10키로 정도 남겨 둔 진자두(榛子頭)2)에서 미리 당도해서 대기하고 있던 조선군과 합류하여 동로군을 결성하고 호칭 4만 병력이라고 했다. 관전현 경내의 청산구(淸山溝)룰 통과한 동로군은 배동갈령(拜東葛嶺)3)으로 향해 진군을 계속하여 이윽고 후금의 동악부(栋鄂部)4) 경내에 들어섰다.




2월 27일 명군과 조선군은 별도로 평정산(平頂山)5)과 배동갈령(拜東葛嶺) 밑에서 숙영하고 다음 날인 2월 28일 보락보진을 통과하여 우모구(牛毛溝)를 지나 우모대산(牛毛大山)의 산정에 있는 우모대전자(牛毛大甸子)에 이르렀을 때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였다. 우모대전자의 옛 이름은 우모채(牛毛寨)로 지금의 사도하자향(四道河子鄕)의 대전자촌(大甸子村)이다. 동로군이 취한 진군로는 당시 조선 서부에서 신빈(新賓)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통로였다. 동로군의 행렬이 우모령에 이르렀을 때 후금 동악부 병력으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동악부 군사들은 큰 나무를 베어 길을 막았다.




2월 29일 군량을 보급을 받기 위해 우모채에서 휴식을 취하며 하루를 지체했다.




3월 1일 행군을 시작하여 당일 저녁 늦게 마가채(馬家寨)에서 숙영했다. 마가채는 지금의 사도하자(四道河子)와 삼도하자(三道河子) 중간 지점에 있는 촌락이다. 우모채와 마가채의 거리는 약 15키로에 불과했으나 당시 도로는 구불구불하게 나있었고 조그만 개울들을 무수히 건너야 했다. 개울의 깊이는 병사들의 허리까지 잠기게 하고 물살은 사나워 15키로의 거리를 행군하는데 만 하루가 걸린 것이다.




3월 2일 계속 북진하여 오시(午時)에 심하(深河)에 이르자 길이 막혔다. 심하는 지금의 환인현 육도하(六道河)다. 동로군이 맞딱뜨린 곳은 남북 양쪽에 구릉사이를 흐르는 지점이었다. 마가채와 약 10키로 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 후금 동악부의 우록액진(牛錄額眞)6) 3명이 6백 명의 기병들을 이끌고 방어선을 치고 동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3명의 우록액진은 애이나[額爾納], 애어허[額赫], 투바오[托保]였다. 명군과 후금은 이 곳에서 교전에 들어갔으나 중과부적인 후금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산으로 도주했다. 후금군은 애이나와 애이허를 위시하여 50여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 투보는 잔병을 수습하여 후퇴했다. 명군 측은 유정이 총애했던 수비관(守備官) 유길룡(劉吉龍)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그 밖에 여러 명의 병졸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심하에서 숙영하고 날이 밝아 3일 3일이 되었으나 조선군의 군량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군을 멈추고 하루 더 숙영했다.




3월 4일 진시(辰時)에 심하를 출발한 동로군은 예전처럼 명군이 앞서고 조선군이 뒤를 따랐다. 유정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매우 조심스럽게 행군을 하며 군사들에게 녹각지(鹿角枝)를 휴대시켰다. 녹각지는 가지가 달린 나무로써 적군과 조우하게 되면 진영을 세워 장애물로 사용하고 적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진형을 정비하기 위한 것으로써 사천의 반란군을 진압할 때 많은 효과를 본 유정이 개발한 전법이었다. 그러나 전날 저녁 황혼 무렵에 포성을 듣고 아군이 후금군의 본거지에 당도했다고 생각한 유정은 전투에 참가할 기회를 놓쳐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갑자기 군사들의 행군을 독촉했다. 다시 가합령(家哈嶺) 너머에 적군의 정찰병이 타나났다는 초병의 보고를 듣고 군졸들에게 녹각지를 모두 버리고 가벼운 군장으로 행군을 서둘러 북진했다. 사시(巳時)에 출발한 유정의 명군은 4시간 만에 그 선봉대가 와르커시[瓦爾客什]에 당도했다.




같은 날 새벽녘에 대선(代善) 등이 이끄는 후금의 대군은 가합령 산정에 도착하고 있었다. 명군의 선발대가 도착한 가합령 전방이 바로 와르커시였다. 대선 등 후금의 장군들은 말에서 내려 와르커시 밀림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명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 전에 심하에서 후금과의 싸움에서 중과부적으로 달아난 후금의 우록액진 투바오는 잔병을 이끌고 누루하치가 선발대로 보낸 다르한[達爾漢]과 및 아민(阿敏) 등이 이끄는 후금의 1천 기병과 함께 대선의 본대와 합류한 다음 와르커시 큰개울이 교차하는 남쪽 계곡 중에 매복했다. 사시(巳時)가 되자 산등성이에서 휴식을 끝낸 대선 등이 이끌던 후금군 주력이 와르커시 밀림에서 나와 전진하려고 하는 순간 마침 명군의 선발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적군을 발견한 명군은 그 즉시 상수리나무 숲으로 덮인 산 위로 올라 전투대형을 갖추자, 후금의 기병들도 그 동쪽 편에 있던 높은 산봉오리에 오른 후에 세 부대로 나누어 명군을 타격했다. 한 바탕 접전 끝에 명군의 선봉대는 모두 섬멸되고, 유격관(遊擊官)으로 선봉대장으로 명군 선발대를 이끌었던 교일기(喬一騎)는 단기로 몸을 빼내 탈출할 수 있었다. 이때 명군의 주력은 이미 와르커시계곡 중간 지점의 넓은 들판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와르커시 남쪽 계곡 중에 매복해 있던 투바오와 다르한 등의 후금 기병에 퇴로가 차단당한 상태였었다. 명군은 함정에 빠져 앞뒤에서 적군을 맞이하게 되어 마치 자루 속에 갇힌 형국이 된 것이다. 명과 후금 양군은 사시(巳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혼전을 벌렸다. 그 와중에 유정은 왼쪽 팔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고통을 참으며 화살을 뽑아 버리고 한쪽 손으로 대도를 휘둘러 후금병 수십 명을 연달아 베어 살해했다. 다시 유정은 얼굴에 자상을 입었으나 다시 죽을힘을 다하여 후금병과 싸웠다. 후금의 대패륵(大貝勒) 대선(代善)이 군사들에게 일제히 유정을 향해 활을 쏘라고 명을 내리자 유정은 마침내 화살을 몸에 무수히 맞고 숨을 거뒀다. 마침내 명군의 전 병력은 모두 복멸되었다. 명군의 주력군을 모두 섬멸한 후금군은 계곡 밖에 또 다른 일단의 군대를 발견했다. 강응건이 이끌던 명군과 강홍립의 조선군이었다. 후금군 본대는 그 즉시 화첨자진(鏵尖子鎭)의 동보촌(東保村) 부근에 영채를 세우고 강응건과 조선군의 소탕을 위해 이동했다.




3월 4일 조선군은 명군의 뒤를 따라 심하를 출발하여 서진했다. 3만에 달하는 동로군은 주로 보군의 속도에 맞춰 진군했다. 그날 조선군은 진시(辰時)에 행군을 시작했다. 그때 앞서 나간 명군은 후금군을 만나 혼전을 벌리고 있을 때는 사시(巳時) 경에 조선군은 숙영지에 나와 5키로 정도 전진하여 부찰(富察) 들판에 들어섰다. 그때 전방의 전투 중에 발포한 포성소리를 들은 조선군의 원수 강홍립은 전방에 적군이 출현한 것으로 의심하고 정세를 살피기 위해 황급히 말을 휘몰아 길 옆의 작은 산 봉오리에 올랐다. 이윽고 전방에 한줄기 광풍이 불더니 뽀안 먼지와 연기가 일어나 하늘을 열었다. 강홍립은 좌영의 선두부대에 즉시 군령을 발해 앞쪽의 높은 산등성이에 올라 진영을 설치하라고 했다. 그리고 중영은 언덕을 올라 그때 머물고 있던 높은 지대에 포진시키고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우영은 남쪽의 조그만 산봉오리에 포진하여 후위를 맡았다. 중영과 우영은 군령에 따라 곧바로 진형을 갖추었으나 전방의 좌영은 후금군이 이미 가까이 접근해 있기 때문에 고지에 오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평지에서 진영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좌영의 전방에는 100여 호 가량의 촌락이 있었으나 앞서 진군한 명군에 의해 모두 불태워지고 그곳에서 나는 연기가 좌영을 덮쳤다. 이때 명군의 전봉관(前鋒官)과 조선군 감군(監軍) 등의 교일기(喬一騎)를 포함한 명군 군관이 명군의 전대에서 탈출하여 조선군 진영에 당도해 대장 유정은 전사하고 명군은 전멸당했다고 통고했다. 그런 다음 2사람은 조선군 진영을 이탈하고 조선군 감군의 직을 맡았던 교일기만 남아 조선군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윽고 조선군 중영에서 연기와 먼지 속에서 후금의 기병들이 양익으로 나누어 그들의 전방에 포진하고 있던 좌영을 향해 돌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좌영의 세력이 고립된 것을 본 강홍립이 급히 후방의 우영에 전령을 보내 지원하도록 했다. 조선군의 두 영은 가까스로 진영을 연결했으나 후금의 기병이 일제히 돌격을 감행해왔다. 조선군의 화승총과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으나 재장전할 틈도 없이 후금의 기병이 이미 진영 중에 돌입하여 순식간에 두 영은 괴멸되고 말았다. 두 영과 중영의 거리는 불과 천 보 미만이었으나 결국은 구원할 수 없었다. 이윽고 3만에 달하는 후금의 철기병이 들판과 산 일대를 뒤 덮으며 조선군 중영을 겹겹이 포위했다. 후금군의 군세를 본 조선군은 두려움에 떨었고 조선군의 원수는 자살하려고 까지 했다. 후금군 사자가 찾아와 통역을 찾은 후에 조선군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조순군은 그날 밤 내내 포위망 속에 있다가 싸우자니 힘이 부쳤고, 후퇴하자니 퇴로가 끊겼기 때문에 후금군과 여러차례의 대화 끝에 다음 날 5일에 부득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후금군에 항복한 좌우영의 생존자 4-5천의 병력과 중영군은 후금의 도성 하투아라로 압송되었다. 조선군이 후금에 항복한 것을 본 명나라의 조선군 감군 교일기는 결국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나라의 동로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양호는 급히 전령을 아골관(鴉鶻關)에 당도하여 진군하지 않고 주둔하고 있던 이여백의 남로군에 보내 군사를 퇴각시키라고 했다. 이로써 명나라가 징집하여 네 방면으로 진공시켜 벌린 후금과의 전쟁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이 났다.




동로군이 후금군의 공격으로 섬멸된 지역은 지금의 지명으로 어디었던가? 최초로 인정된 곳은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경내였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후에 전쟁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지조사 결과 정확한 지명은 지금의 화첨자진(鏵尖子鎭)의 와자구(窪子溝) 일대로 확인되었다. 중화민국 시절 와자구 일대에서 고대전쟁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와자구의 주위환경을 살펴보면 남북으로 약 7.5키로에 중간의 가장 넓은 폭은 1.5키로에 달한다. 와자구에서 크고 작은 10여 개의 계곡이 합쳐지는데 가장 긴 계곡은 3-4키로 정도다. 계곡의 북단의 산능선은 신빈현과 접해있다. 능선은 그리 높지 않다. 계곡에는 한 가닥의 조그만 개울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육도하(六道河)의 상류인 부사하(富沙河)와 합쳐진다. 부사하는 이호래진(二戶來鎭) 부근의 흑와자(黑臥子)와 서쪽의 유림자하(柳林子河)와 합류하여 육도하의 주류가 된다. 와자구의 부근의 지리환경과 출토물의 증거와 강홍립의 막료로 참전했던 이민환(李民煥)의 종군기인 책중목록(柵中目錄)의 기사와 대조해서 연구해보면 와자구가 바로 왈가시(曰可時) 즉 와르커시에서 파생한 다른 이름인 것이다. 조선사람이 와르커시를 만족에게 듣고 왈카시로 기록한 것이다. 청초에 저술된 역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檔)에 따르면 와르커시[와이객십(瓦爾客什)]광야(曠野)로 기록되어있다. 즉 와자구 계곡 내의 중간 지접의 개활지를 의미한 것이다. 와르커시 숲은 마땅히 가합령(家哈嶺) 상의 수림에 해당하며 가합령은 바로 신빈현과 접하는 와자구 능선을 말한다. 동로군과 후금군의 전장은 바로 와자구 계곡의 중간지점의 개활지다. 동로군의 후속부대 강응건 부대는 바로 와자구 계곡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입구에서 전멸했고 유정에게 배속된 조선군은 부찰(富察)의 들판에서 섬멸된 것이다. 조선의 사료(史料)에는 부차(富車)로 기록되어있다. 부차의 들판은 지금의 화첨자진(鏵尖子鎭) 동보촌(東保村)에서 홍당석촌(紅塘石村)을 지나 이호래진(二戶來鎭) 부산촌두(釜山村頭)에 이르는 부사하(富沙河) 강변의 개활지를 말한다. 부사하는 육도하(六道河)의 상류의 지류로 부사라는 강이름은 부찰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심하(深河)는 화첨자진 경내가 아니고 이호래진(二戶來鎭) 흑와자(黑臥子) 부근이다. 이호래 주민들 사이에 중화민국 초기에 이호래의 용두(龍頭)라는 지역에서 한 기의 동으로 만든 포탄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동포는 마땅히 그때 명나라의 동로군의 장비였을 것이다.




동로군의 전장터인 와자구로부터 거리를 살펴보면 약 7.5키로에 달하는 남북으로 된 큰 계곡의 와자구가 끝나면 동쪽으로 방향이 바뀌어 화첨자진 동보촌과 홍당석촌을 지나 이호래의 부산두에 이르기까지 직선으로 뻗어있는데 이것은 또 다른 한 줄기의 큰 계곡이다.




부사하는 다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한 개의 큰 계곡을 흐르는 하천이다. 부찰의 개활지는 길이가 8-9키로에 가장 넓은 곳의 폭은 1.5키로 정도다. 약 15키로에 이르는 와자구와 부찰의 개활지가 바로 3만의 명조연합군과 3만의 후금군이 투입되어 양일 간에 걸쳐 접전을 벌이다가 후금군의 완승으로 끝난 사르후전역의 동쪽 전투였던 심하전역의 전장터다.






1)양마전(亮馬佃)/지금의 관전현 동쪽의 태평초(太平哨)다.




2)진자두(榛子頭)/ 태평초 서북의 한 마을이다.




3)배동갈령(拜東葛嶺)/ 지금의 관전현과 환인현 경계를 짓는 감천령(坎川嶺)이다.




4)동악부(棟鄂部)/ 환인현과 길림성 통화시(通化市) 경계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 명칭으로 원래의 성은 각라씨(覺羅氏)다. 1440년 건주여진의 건주좌위 소속으로 원래의 거주지였던 조선의 회령에서 길링성 파도강(婆堵江: 지금의 혼강(渾江))과 동고하(冬古河) 혹은 동악하(棟鄂河 : 지금의 대룡강(黛龍江으로 혼하의 지류) 일대로 이주했다. 이후로 동악하의 이름을 따서 동악부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동악부는 동악성을 축성하여 부족국가 형태를 이루며 지내다가 1588년 추장 하화례(河和禮)가 예하 부족들을 이끌고 누루하치에 귀의했다.




5)평정산(平頂山)/ 지금의 환인현 경내의 보락보진(普樂保鎭) 부근의 산이다.




6)우록액진(牛錄額眞)/ 여진의 군사조직의 지휘관으로 300명을 단위의 부대를 우록이라고 부르고 그 지휘자를 우록액진이라고 했다.



참고 : 청나라 창건시 8기군 편제


1. 니루[우록(牛彔)] : 기의 최소 단위로써 300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휘자는 우록액진(牛彔額眞)이다.


2. 지아라[갑라(甲喇)] : 5개 니루 1,500명으로 편성되고 지휘자는 갑라액진(甲喇額眞)이다.


3. 구사[고산(固山)] : 5개 지아라 7,500명으로 편성되고 지휘자는 고산액진 1인에 부지휘자 매륵액진(梅勒額眞) 2인을 두고 기(旗)라 했다.


4. 창건시 8기 전군을 통수권자 누루하치는 정황(正黃)과 양황(鑲黃) 두 기와 파아라(巴牙喇)라고 칭하던 호위군단 5,000명을 직접 지휘했다. 차자 대선(代善)은 정홍, 양홍의 두 두기, 5자 망고이태(莽古爾泰)는 양람기(鑲藍旗)을, 8자는 황태극(皇太極)은 양백기(鑲白旗), 장손 두탁(杜度)은 정백기, 조카 아민(阿敏)은 정람기(正藍旗)를 이끌고 8기군 각각의 지휘관들은 각각 별도의 호위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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