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의 심하전역(深河戰役)에 파병되어 산화한 조선군 병사들을 끝내 외면한 조국 조선 > 조선후기

명청의 심하전역(深河戰役)에 파병되어 산화한 조선군 병사들을 끝내 외면한 조국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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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2,696회 작성일 09-05-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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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전역(深河戰役)에 파병되어 산화한 조선군 병사들…조국은 끝내 외면




“백수의 늙은 서생은 모래밭에 뒹구는 백골이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운명인가 합니다.”




1619년 3월1일. 요동파병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이민환이 군량미 보급을 맡은 윤겸진에게 쓴 편지다. 춥기는 하지, 식량 보급은 전혀 이뤄지지 않지, 명나라 장수는 되지도 않는 지시를 내리지…. 이민환의 울부짖음은 조선군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지난 1월 말 심하전역(深河戰役)의 현장답사에 나서 조선군이 몰살당한 비극의 벌판을 둘러본 이승수 한양대 강사의 말.




“4일 오후 한나절 동안 김응하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8000명이 죽었습니다. 바로 그곳이 요녕성 본계시 환인 만족자치현 홍당석 벌판입니다. 길 왼쪽 언덕에 피신한 강홍립군은 동료들이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을 겁니다. 다음날 항복하고 후금군과 함께 허투알라로 갔어요.”




그뿐이 아니었다. 이승수씨에 따르면 강홍립을 따라 투항한 조선군 가운데 탈출한 뒤 돌아온 조선군사는 2700명이었다. 탈출하지 못한 이들은 농노(農奴)가 되었다. 탈출하다가 굶어 죽은 조선군 시신도 길에 즐비했다. 파병군 1만3000명 가운데 1000~1500명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홍세태(1653~1725)가 지은 ‘김영철전’은 심하전역에서 포로가 된 김영철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다. 19살 때 참전한 김영철은 후금 장수의 가노(家奴)가 되었다. 혼인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나 향수를 이기지 못했다. 탈출을 감행해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국은 만어와 한어가 능통하다는 이유로 평생 부려먹었다. 1637년 가도정벌, 1640년 개주전투, 1641년 금주전역 등에 차례로 차출된다. 그는 무려 86살까지 군역에 시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수성졸(성을 지키는 졸병)을 면치 못했다. 홍세태는 김영철을 동정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사정이 이럴진대 무엇으로 천하의 충의지사를 권면할 것인가(何以勸天下忠志之士)!”




김응하 장군은 그래도 전쟁영웅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와 함께 산화한 파병군 병사들의 넋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다. 광해군은 1619년 9월 명나라 총병 유정과 유격 교일기의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싸운 조선군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수씨는 “지배층의 관심은 오로지 의리와 명분을 밝히는 것이었으며 비참하게 죽었거나 포로가 된 파병군 병사들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고 일침을 놓았다.




〈이기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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