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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高位次 改換事件(양고위차개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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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2,654회 작성일 11-12-2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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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高位次 改換事件(양고위차개환사건)


耽羅開國(탐라개국)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는 三姓祀(삼성사) 창건초부터 第一位(제1위)에 良乙那(양을나), 第二位(제2위)에 高乙那(고을나), 第三位(제3위)에 夫乙那(부을나) 次順(차순)으로 모셔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英祖朝(영조조)에 이르러 高乙那(고을나) 후손 한 사람이 한때 高乙那(고을나)를 首位(수위)로 위패를 바꾸어 놓아 큰 物議(물의)를 일으켰다. 분분한 世論(세론)속에 允九淵(윤구연)牧使(목사)가 朝廷(조정)에 上疏文(상소문)을 올리고 그 진상이 조사되어 王命(왕명)으로 良乙那(양을나)를 首位(수위)로 원상환원된 사건이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이다. 사건의 내막은 이러하다.


영조27년(1751) 고을나의 후손 高允奎(고윤규)가 奸計(간계)를 꾸며서 숙종36년(1710)에 崔啓翁(최계옹)목사가 神位板(신위판)에 있는 『○○乙那府君』이라는 府君 두 글자를 빼고 그냥 『乙那』로 고쳐쓴 바 있음을 기화로 최목사가 위패를 바꿔 놓았다 하여 第一位(제1위) 良乙那(양을나) 위패 자리에 고을나 위패를 바꾸어 모시고 말았다. 이 부당한 처사에 격분한 윤구연 목사는 이를 시정하기로 마음먹고 長文(장문)의 上疏文(상소문)을 조정에 올렸는데 문제의 『卞正狀草(변정장초)』는 王朝實錄(왕조실록)에까지 기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允九淵(윤구연) 牧使(목사)의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譯文(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역문)


『양을라와 고을라 위패 순위를 바꾸어 놓은 것을 바로잡아 주십시요』 하고 제주 목사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월이다.』


엎드려 올리옵니다.


이곳 제주도 사람들은 양을라 고을라 부을라 三神人(삼신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이 없는데 그 자손된 자가 어찌 감히 자기 시조이신 신인(神人)들의 행적에 망녕된 물의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온데 어리석은 高允奎(고윤규)무리들이 위로는 임금님을 속이고 관가를 어지럽히고 있어서 그 대강을 아뢰오려고 하옵니다.


숙종조 임오년(肅宗 壬午年 서기1702)에 삼성묘를 창건할 때 고적(古籍)과 국사(國史)를 상고하여 그 순위를 양을라 고을라 부을라의 순서로 결정하고 제사를 올리어 온지가 벌써 오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사온데 오늘날에 와서 고윤규라는 자가 모든 삼성사 문적이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기회로 삼아서 자기들의 족보 서문에 『삼성사 삼신인의 위패 순서가 당초에는 고을라가 수위(首位)에 있던 것을 경인년에 최목사가 양을라를 수위로 조작하여 놓았다』고 써 놓고 또 제주도 도내를 돌아 다니며 헛된 소리를 퍼뜨려서 백성들을 꾀여 충동하기를 『최목사가 삼성사 신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흉년이 든다고 선동하는 한편 고후익(高厚益)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거짓을 꾸며 상소를 하고 또 육지에서 고한주(高漢柱)라는 자를 끌여 들여서 삼신인의 위패를 바꾸어 놓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삼성묘 건축 당시 삼신인의 위차(位次)를 정할 때 상고한 국사와 고적은 동국통감(東國通鑑)과 탐라지(耽羅誌), 여지승람(與地勝覽), 남차록(南사錄), 고씨 구보서(高氏舊譜序) 등의 책들이온데 그 상고한 문적이 이러하올진대 이와같은 사적을 무시하고 위패 순위를 다툰다는 일은 허망된 일이옵니다. 그리고 또 삼성묘 건축 당시 그 역사를 맡아 감독한 책임자 중에는 고씨가 많았었고 그 고씨들은 바로 자기들의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들인데 그분들이 정하여 놓은 것을 어떻게 그 자손들이 뜯어 고치려고 하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을 힐난하는 일이옵니다. 그리고 또 최목사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때 위패에 쓰인 『부군』(府君)이라는 두 글자 만을 『을라』로 고쳐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즉 비록 지난 날의 관장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헐뜯을 수는 없습니다. 또 신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흉년이 든다는 선동인즉 임오면(壬午年)이후로 오히려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년사의 풍흉은 자연의 조화인데 앞으로의 풍흉을 자기들이 어떻게 예언할 수 있겠사옵니까 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짓이옵니다.


생각하옵건데 양씨이건 고씨이건 양 고 두 을라 할아버지는 두 성(姓)의 조상이온즉 이랬으면 어떻고 저랬으면 어떠하오며 또 누구가 꼭 위가 되고 누구가 꼭 아래이어야 한다고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까마득하게 오래 되는 신인(神人)의 행적을 어리석은 백성들이 억측할 수 없는 일이옵기에 그 당시 국사에 의빙해서 위차(位次)를 정하였던 것이온데 고윤규 무리들이 『고씨가 임금이었으니까 위패가 위에 있어야 한다』는 광언망설(狂言妄設)이 이를데 없아옵니다. 삼신인(三神人)이 탐라국을 처음으로 창건하였을 때 군신지의(君臣之義)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헤아릴 바 없사오나 사적에 양을라가 장(長)이고 고을라가 다음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아온즉 장(長)과 차(次)의 순서는 엄연히 있었던 것으로 헤아리옵니다.


十五世(세) 후에 내려와서 고씨에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벼슬이 있었으나 양씨에게도 꼭 같이 성주와 왕자의 벼슬이 있었아온즉 가사(假使) 후세에 와서 군신(君臣)의 지위(地位)를 보존하지 못하였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이유로 삼아서 시조(始祖)의 사적(史蹟)을 의심하여 고을라가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허무맹랑한 말이온즉 이것은 변정(卞正)할 필요도 없이 물리쳐야 옳다고 헤아리옵니다. 또 앞서 아뢰온 바와 같이 삼성묘 창건 당시 위패 수위(首位)에 양을라를 모시었아온즉 지금 만일 위패를 바꾸어 봉안한다면 이것은 또 왕을 기만하는 결과가 되옵니다. 국사가 있기 전에 만일 상고할 근거가 있다면 고윤규 무리들이 어찌 감히 손을 뻗힐 수 있으며 국사 이전에 문적이 없다면 윤규 무리들은 왕을 기만한 죄를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각별히 살피시여서 신(神)의 뜻을 편안히 하여 주시고 아울러서 분규를 막아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끝)



결국 이 사건은 영조대왕의 『使之一從國史(국사(國史)에 따라 처리하라)』하라는 下命(하명)에 따라 고윤규의 罔計(망계)는 무산되고 位牌(위패)의 順位(순위)는 원상대로 환원되었지만 이 사건은 많은 敎訓(교훈)을 後世(후세)에 남겼다.


그 후 영조48년(1772)에 양을나 후손 양세현(梁世絢)이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삼성사를 중수하고 삼성단 밑에 있는 민간 소유의 밭을 사들이고 담장을 개축하고 나무를 심었으며 제향 때에 잔을 올리는 선후문제로 일어나는 분쟁을 없이 하기 위하여 헌작을 한꺼번에 올리도록 하는 규약을 만들어서 분규를 해소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으나 『良高位次卞正』(양고위차변정)사건은 그 후유증이 아직까지도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삼성전 제향홀기(三聖殿 祭享忽記)와 축문(祝文)에 적지 않은 모순이 남게 되었고, 더욱이 유감스럽게도 '高·梁·夫(고량부)' 삼성(三姓)이니 '高夫梁(고부량)' 삼성이니 하는 그릇된 삼성위차 호칭(三姓位次 號稱)을 간혹 듣고 또 책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식한 소치일 뿐만 아이라 역사를 오도하는 결과가 된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바르게 쓰고 전해야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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