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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위대한 항일투사, 석정 윤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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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119회 작성일 12-01-28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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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 석정 윤세주


윤세주(尹世胄, 1901년 6월 24일 ~ 1942년 6월 2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명은 윤소룡, 호는 석정(石正)이다.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백범일지에는 석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출신.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세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평생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을 다니며 학생 운동을 하다가, 1919년 경성부에서 3·1 운동 시위에 참가한 뒤 고향에 내려와 밀양 지역 만세운동을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았으나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19세로 나이가 어린 편이었지만 윤치형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드러나, 궐석재판에서 밀양 만세운동과 관련자들 가운데 가장 중형인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김원봉이 그해 11월 결성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주요 기관에 폭탄 투척으로 테러 행위를 벌이기로 한 의열단은 그와 신철휴, 윤치형 등을 국내로 파견했다. 윤세주는 이때 체포되어 1927년에 출옥했다.


오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1932년 윤세주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난징의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뒤,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에 송병조, 김두봉, 김규식 등과 함께 핵심 인사로 참가했다. 이 조직에는 김구 계열을 제외한 좌우익의 많은 운동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1933년 발족한 민족혁명당의 모체가 되었다.


1938년에는 군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정치위원을 맡았다. 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1]였던 그는 민족혁명당 편찬위원회 등에서 일하다가, 1941년 김원봉과 헤어져 박효삼과 함께 화베이 지방으로 북상하여 팔로군과 공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무렵 김원봉과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국공 내전으로 중국의 권력이 양분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 관할 지구에 전략적으로 분산 배치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1942년 4만명의 일본군이 총공세를 벌인 태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총지휘하며 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 시신은 진광화와 중국 공산당 군벌들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조선항일의용군(朝鮮抗日義勇隊) 혹은 국제여단(國際旅團)이라고도 불렸으며 대장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독립군이다. 조선민족전위동맹 산하의 단체로 분류된다.

중일전쟁 이전 중국 본토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국민당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구나 김원봉의 진영에 들어가 국민당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애국단, 한국국민당, 의열단, 민족혁명당 등은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합의에 의해 운영되기보다 김구나 김원봉의 의사대로 운영되는 편이였다. 이에 박건웅은 부분적, 비밀적, 단속적 형태의 활동을 전면적, 공개적, 지속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박건웅은 국민당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위한 통일적 정책을 세우라고 요구하였다. 박건웅의 중국인 친구 나청도 '조선민족전선'에 기고하여 중한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이는 '평등 합작'과 '통일 지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조선인들이 자주적으로 혁명을 이끌고 국민당정부는 이를 민족단위의 전면적 연합으로 간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공합작후 공산주의단들이 팔로군을 형성하였듯이 조선민족도 독립된 부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 반전운동가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가 조선의용대조직계획방안을 작성해서 국제문제연구소장 왕봉생, 정치부장 진성, 부부장 주은래와 장여생, 정치부 제2청장 강택, 정치부 비서장 하충한 및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개석의 동의를 얻어냈다. 아오야마 가즈오의 초안에는 100명 정도의 조선인 독립부대를 창설하여 조직 중인 '일본,조선,대만 반파시스트동맹'의 중앙집행위원회가 지도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조선의용대를 국제의용군이라고 불렸다.


국민당정부에서 후원하였으며 제1지대와 제2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김원봉,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군사위원회 정치부원으로 참여하였다. 제1지대는 박효삼, 제2지대는 이익성이 맡았다. 제1지대는 민족혁명당 당원 등 42명으로, 제2지대는 전위동맹 중심의 74명으로 창설되었다.


최고기관은 지도위원회로 이춘암, 김성숙, 최창익, 유자명 그리고 정치부원 2인으로 편성되었다.


중국의 2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정부의 통일된 후원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 씩을 중국 측으로부터 지급받았다. 조선의용대는 큰 틀에서는 한중 평등 합작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내 장개석 직계인 남의사 계열의 인사들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좌익혁명가들로 판단했으며 최전선에 이들을 배치했다. 1939년 2월 약 7000명의 조선인 부대가 광주 부근에서 반란을 일으켜 일본을 장교들을 죽이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징병자들이 의용대에 합류하였다.


의용대는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팔로군 지구로 이동한 후에도 변치 않았고, 1945년 8월에 가서야 전투부대로 재편성되었고, 1945년말 만주로 들어가 전투부대로 규모가 커졌다.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은 조선의용대가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관할 하에 있는 중국 부대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였으므로 그들은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41년 김원봉과 의용대내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은 의용대가 화북으로 이동하자 중국 공산당과 함께 김원봉을 화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무정, 김두봉, 한빈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는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북조선의 성립 후에 연안파로 일컬어진다.


의용대의 전체 통제권을 상실한 김원봉이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의용대의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고, 김원봉은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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