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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평전 1. 투사를 단련시킨 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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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533회 작성일 15-08-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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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평전

이희호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이희호 평전] ① 연재를 시작하며

어린시절에서 현재까지 90여년 삶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이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주인공입니다.


이희호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습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입니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습니다.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이 일대기는 매주 한 번씩 진행하는 이희호 이사장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고명섭 논설위원이 평전 형식으로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공적 지면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인간 이희호’의 극적인 삶이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 국민의 민주항쟁사와 더불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제목 ‘이희호 평전’ 글씨는 이 이사장의 친필)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투사를 단련시킨 투사 “시련의 세월에도 늘 한결 같은”


2009년 8월23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현대 정치사의 거인’ 김대중이 이 땅의 사람들과 영원히 작별했다. 이날 오후 국회를 떠난 영구차는 현충원에 고인을 내려놓기 전 서울시청 앞 광장을 들렀다. 민주주의 수호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모여든 수많은 시민을 앞에 두고 검은 상복을 입은 노구의 부인이 단상에 올랐다. 슬픔에 젖은 가녀린 몸에 어울리지 않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광장으로 울려 퍼졌다. 고인과 47년의 삶을 함께한 부인 이희호였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바라옵건대,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세상을 뜨기 전 김대중은 피로써 이룬 민주주의가 깨져 나가는 걸 보며 독재의 부활을 걱정했다. 2009년 5월23일 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자기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검찰을 앞세운 정권의 잔인한 보복이 끝내 전임 대통령의 자살을 불렀다. 김대중은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일기에 썼다. 김대중은 장례식에서 읽으려고 쓴 조사에서 비명에 간 후배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은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산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김대중은 정권의 방해로 이 조사를 읽지 못했다. 6월11일 6·15 남북공동선언 9돌 기념식이 열렸다. 김대중은 아픈 몸을 이끌고 참석해 혼신의 힘을 다해 말했다. “독재정권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그분들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 국민이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마지막 생기를 다 모아 쏟아낸 연설을 뒤에 남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은 쓰러졌다. 그것이 영원한 잠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의 새로 단장한 묘역에 묻혔다. 장례식 이후 지금까지 이희호는 매주 두 번씩 남편의 묘소를 참배한다.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빠지지 않았다. 화요일에는 지난날의 동지들, 측근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남편을 찾고, 금요일에 다시 홀로 묘소를 찾는다. 일이 있어 타지에 갔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라도 들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이 하늘에서도 이 나라 민주주의와 남북의 화해와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써 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의 몸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내지 않은 것 같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남편을 생각하며 같은 내용으로 기도합니다.” 이희호 곁에는 여전히 김대중이 있다.


1971년 대선 찬조연설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내가 앞장서 타도하겠다”

이듬해 유신 쿠데타가 일자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못하니 당신이 더 강하게 투쟁하시라”

남편이 납치되기 석달 전 “중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용감하게 싸워달라”

이 단호함은 김대중을 단련시켰다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

이희호의 삶은 김대중의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혔다. 그러다 보니 이희호 자신보다는 ‘김대중의 부인’으로 더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도 이희호는 주목받는 사회운동 지도자였다. 이름이 나는 데 굳이 김대중이라는 존재에 빚질 이유가 없었다. 미국에서 유학한 유망한 사회학 연구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여성문제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서 여성기독운동을 이끌었다. 총무로 취임해 활동한 4년 동안 이희호는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열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이희호는 김대중과 부부의 인연을 맺음으로써 삶의 행보가 바뀌었다. 운명은 두 사람을 현대사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이 걸은 길은 수난의 골고다 언덕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마냥 뒤따르는 길은 아니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즐겨 쓴 표현을 쓰자면, 두 사람의 일생은 ‘동행자’, ‘동역자’의 삶이었다. 함께 걷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는 삶이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동지, 가장 깊은 신뢰로 묶인 평생 동지였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동지로서 서로를 일으켜주었고 부추겨주었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고 자주 물었다. 동행자 이희호가 없다면 정치인 김대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전의 김대중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1983년 미국 망명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강연하던 중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독재자들의 핍박을 받던 시절 이희호는 남편의 안위가 걱정돼 기도로 밤을 새우면서도, 독재자와 싸우기를 중단하라거나 민주주의 투쟁 일선에서 물러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투쟁을 지원하고 독려했다. 1972년 10월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자 일본에 있던 김대중은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이희호는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가슴 답답해하고 있다”고 조국의 현실을 전한 뒤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적었다.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이 일어나기 석 달 전인 1973년 5월 편지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밝히면서도 “꾸준히, 용감하게 싸워나가 달라”고 또박또박 썼다.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니 이제 투쟁을 그만두고 타협하라고 할 수 있을 법도 한데, 이희호의 입에서는 끝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단호한 태도가 김대중의 양심을 단련시켰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나선 남편을 대신해 찬조연사로 전국을 돌 때 이희호는 연단에 서서 시민들에게 말했다.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이희호의 부드러움 속에는 부러지지 않는 철심이 들어 있었다. 그 철심이 남편의 민주주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김대중의 신조 ‘행동하는 양심’의 그 양심 한가운데 이희호가 있었다. 유신독재 시절 옥중의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늘 말하는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양심은 악의 편에 속한다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17절) 우리 크리스천은 사회를 새롭게 변혁하는 행함으로 지상의 천국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희호가 김대중의 양심을 지키고 키웠다는 사실을 김대중은 아내에 관해 쓴 글에서 솔직하게 밝혔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개가 아니다. 나의 진심이다. 1980년 당시 내가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했던 실력자가 나를 찾아와 온갖 회유와 협박을 했다. 나도 인간인데 그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한순간 흔들리던 나의 마음은 아내를 생각하며 올곧게 바로잡혔다. 아내는 결코 나의 배신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내게는 곧 목숨을 잃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내의 사랑을 택했다.”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내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이희호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간구하고 또 간구했다. 기도하다 밤을 새우는 날이 몇날 며칠인지 몰랐다. 성경 말씀을 읽고 또 읽었다. 남편이 쿠데타군에 잡혀가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던 때 이희호는 이사야서를 되풀이해 읽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떨지 말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망망한 바다에서 난파당한 배의 파편 한 조각을 붙들고 흘러가는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이 표류가 어디서 끝날지, 과연 육지가 나올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기댈 것은 기도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부서질 것 같았으나 기도로 버텼다.


이희호의 신앙 안에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하나로 만났다.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의 기복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었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희호가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은 남편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일꾼으로 동참하는 것이 남편이 할 일이었다. 그 신앙이 용기의 원천이었다. 김대중은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희호가 낸 용기야말로 ‘진리에 대한 헌신’, 곧 이희호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희호의 용기는 용서로도 나타났다. 자신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이희호는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77년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유학길에서 돌아와 여성인권운동을 이끌던 이희호

정치인 김대중을 만난 뒤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며 47년간 동행을 이어갔다

지금도 매주 두번 묘소를 찾는다 “당신, 하늘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써주세요”


많은 이들이 이희호에 대해 한결같음을 꼽는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그는 언제나 제자리를 지킨다”


“오직 악은 악으로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 이런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것은 남편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다 5년형을 받고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수난의 한가운데서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희호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직후에도 똑같이 기도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이희호가 보여준 이 용서의 정신은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했던 유언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때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공유한 용서는 신앙적 차원의 결단이고 신념이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희호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그를 생각하면 고린도전서의 이 구절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그 한결같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많은 이들이 이희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바로 그 한결같음을 꼽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고난의 시절이나 영광의 시절이나 한결같다.”


그런 한결같음은 매주 두 번씩, 빠지지 않고 남편의 묘소를 찾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희호는 그런 한결같음으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질고 강퍅한 시련의 현대사를 통과했다. 이희호가 걸은 길은 고난의 길이었고 믿음의 길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희호가 거쳐 온 그 세월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어린 날의 이희호를 만나게 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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