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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평전-길을 찾아서" 부산 피란지서 만난 김대중과 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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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779회 작성일 15-09-0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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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회고록 - 길을 찾아서

부산 피란지서 만난 김대중과 이희호…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했다

해운회사 운영하던 김대중은 자신의 배로 피란민들 실어주고 그 인연으로 둘은 부산서 처음 만나 한 달 한 번 모임서 서로 가슴을 텄다.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 김대중과 “이지적이고 활달한 여성” 이희호는 함께 걸으며 시국과 인생을 논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다시 만난 것은 1961년 늦가을이었다. 군부가 일으킨 5·16 쿠데타가 헌정 질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반년쯤 지난 뒤였다. 김대중은 민주당 대변인을 지냈다는 이유로 연행돼 두 달 동안 창살 안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김대중은 예전의 말벗을 찾아가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보려면 먼저 김대중의 상처(喪妻)와 이후의 쓰라린 날들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첫 부인 차용애의 이른 죽음이 없었다면 이희호와 김대중이 동반자 관계를 맺을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이 차용애를 알게 된 것은 1944년 여름이었다. 차용애는 목포공립실과고등여학교(목포여중)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태평양전쟁 말기의 혼란을 피해 집에 돌아와 있었다. 목포의 해운회사에 근무하던 김대중은 사무실 밖에서 양산을 쓰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알고 보니 목포상고 동창의 여동생이었다. 김대중은 친구의 집을 자주 찾아갔다.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장래를 약속했다. 문제는 장인 될 사람이었다. 인쇄업으로 재산을 일군 차용애의 아버지는 언제 징병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남자를 사위로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담판이 벌어졌다. 차용애는 아버지 앞에서 당돌하게 말했다. “저는 대중씨한테 시집 못 가면 죽어버리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1945년 4월 결혼했다.

김대중과 차용애의 결혼생활은 해방정국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행복했다. 결혼 이듬해 태어난 딸을 잃는 아픔도 함께 겪었다. 딸을 잃을 무렵 태어난 아들 홍일이 두 사람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한국전쟁이 터져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때에 둘째아들 홍업이 태어났다. 김대중은 1951년 자신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의 거점을 부산으로 옮기고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훗날 김대중의 아내가 될 이희호는 그때 부산에서 김대중을 알게 됐고 가족과도 인사했다. 모임이 열린 광복동 다방에 김대중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아내를 소개했다. 이희호의 기억 속에 남은 차용애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고 느낄 만큼 매력있는 여성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김대중과 차용애는 다시 목포로 돌아갔다. 부산 시절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만행을 몸서리치게 보았던 김대중은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인생에 불행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첫 도전에 실패한 김대중은 정치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하고 1955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사업을 접은 김대중은 한국노동문제연구소 주간으로 일하며 웅변학원 강사를 하고 차용애는 미장원을 열어 생활비를 벌었다. 1956년 장면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한 김대중은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인제 지역에 출마했다. 생면부지의 땅이었지만 유권자의 80%에 이르는 군인 표에 기대를 걸었다.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장애물이 막아섰다. 이승만 정권의 주구나 다름없던 선거관리위원회가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두 번째 도전도 무위로 끝났다.

김대중은 선거관리위원회를 후보등록 방해죄로 제소했다. 다음해 3월 승소 판결이 났다. 6월에 인제 보궐선거가 열렸다. 김대중은 다시 인제로 갔다. 이승만 정권은 이번에도 어처구니없는 부정선거로 대응했다. 군인들에게 공개투표를 강요했다. 일선 중대장들이 투표함을 타고 앉아 여당 후보를 찍은 표만 집어넣고 다른 표는 찢어버렸다. 김대중은 세번째 도전에도 실패했다. 그 시절 선거는 곧 돈이었다. 한번만 나서도 기둥뿌리가 뽑힐 정도로 집안이 휘청거렸다. 세번 연거푸 미끄러지자 빈손만 남았다. 서울에 올라와 일곱번이나 옮긴 전세방엔 당장 먹을 식량조차 없었다. 아내의 미장원도 빚 때문에 넘어갔다.

차용애는 집에서 머리할 손님을 받았다. 독한 파마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평소에도 가슴앓이로 고생하던 차용애의 몸은 남편의 연이은 낙선과 집안 살림의 파산을 견뎌내지 못했다. 어느 날 가슴앓이가 심해 약을 먹었는데 어디가 잘못됐는지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놀란 김대중은 의사를 부르러 뛰쳐나갔다. 의사를 데리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벌써 숨을 거둔 뒤였다. 1959년 7월2일, 산천이 짙푸른 여름날이었다. 초등학생 두 아들을 남기고 차용애는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1960년 ‘4·19혁명’은 야당인 민주당에 집권의 기회를 주었고 김대중은 의원 배지는 달지 못했으나 탁월한 대중연설 실력을 인정받아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운명은 더 잃을 것이 없는 남자에게서 아내마저 앗아갔다. 절망의 밑바닥이 또 꺼져 내렸다. 한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내,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보지 못한 아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가족을 돌보았던 아내를 생각하며 김대중은 통곡했다. 아내의 관 앞에 주저앉아 엄마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큰아들 홍일은 그때의 아버지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아버님은 35살이셨는데 그 젊음과 그때까지 가지고 계시던 에너지를 몸속에서 모두 빼내듯이 그렇게 울고 또 우셨다. 나는 그때 열두 살이었지만 아버님의 슬픔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장례기간 내내 김대중은 잠도 자지 않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러다가 이 사람마저 병나게 생겼다며 주위에서 걱정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안 잡수시면 저도 먹지 않겠습니다.” 어린 홍일이 울면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제야 김대중은 아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아버님은 초등학생인 내가 굴건 상복을 한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나를 힘껏 껴안으시면서 흐느끼셨다.” 김홍일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차용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하는 데 도움을 준다. 어느 날 차용애는 어린 홍일의 얼굴을 감싸고는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홍일이 눈이 왜 이렇게 이쁜고. 남자는 눈이 좀 우락부락해야 하는데. 남자 눈이 요렇게 쌍꺼풀지고 커서는 곤란한데…. 남한테 속기 쉽고 착하기만 한 눈….”

김대중은 아내를 가슴에 묻었다. 차용애는 김대중의 마음속에 서른세 살의 얼굴로 남았다. 서러움이 휑한 가슴을 뚫고 지나가면 김대중은 두 아들을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갔다. 팔각정에 올라 “어머니는 저세상에서 너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또 울었다.

절망의 나날이었지만, 계속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승만 독재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됐다. 자유당 정권은 제4대 대통령 선거를 1960년 3월15일로 앞당겼다. 이승만-이기붕 정·부통령을 당선시키려는 공작은 선거판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분노한 민중이 자유당 정권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4·19 혁명이었다. 이승만은 항복하고 경무대를 떠났다. 허정 과도정부가 꾸려진 뒤 새 헌법안이 통과되고 7월에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가 열렸다.

김대중은 민주당의 민의원 후보로 인제에 또다시 도전장을 냈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불운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바뀐 선거법이 문제였다. 군인들은 고향으로 부재자투표를 했다. 김대중은 인제에 연고가 있는 후보에게 간발의 차로 밀렸다. 또 낙선이었다. 민주당은 대승을 거두었고, 의원내각제하에서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김대중은 의원 배지도 없이 민주당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이듬해 3월 김대중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앞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 의원 자격을 잃었다. 김대중은 인제 보궐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다시 나섰다. 5월13일 김대중은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다섯 번의 도전 끝에 얻은 감격스러운 승리였다. 이튿날 당선증을 받아들고 김대중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울었다. 선거구민들에게 당선 인사를 하고 5월16일 서울로 향했다. 그날 새벽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아홉 달밖에 안 된 때였다. 김대중은 쿠데타군의 국회 해산으로 의석에 앉아보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쿠데타군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에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밝혔지만, 그것은 거사를 정당화하려고 끌어다 댄 명분일 뿐이었다. 5·16 주체세력이 군사쿠데타를 모의한 것은 장면 정권이 출범하고 겨우 18일이 지났을 때였다. 국무총리 장면은 선량한 민주주의자였지만,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강단과 지도력이 부족했다. 미국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기 상황은 장면 정권 편이었다. 반란 병력이라고 해봐야 3500명뿐인데다 작전도 허술했기 때문에 정부가 초기에 나섰더라면 진압할 수 있었다. 장면은 수녀원에 숨어들어 55시간이나 나오지 않았고 대통령 윤보선은 반란세력이 자신을 추대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쿠데타를 방관했다.

한국전쟁 뒤 정치 뛰어든 김대중은 번번이 실패하며 첫 아내를 잃었다. 5번 도전 끝에 민의원 당선됐지만 5·16으로 당선증은 휴지조각 됐다. ‘말벗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답답하고 우울했던 그의 머리에 또렷이 떠오른 얼굴은 이희호였다

군부는 거사에 성공하자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구악을 일소한다며 부패 혐의를 걸어 민주당 당직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쿠데타 세력은 피의자를 닦달해 부패의 티끌이라도 끄집어내려고 했다.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었다. 검사는 김대중을 무혐의로 풀어주었다. 장면 정권은 순진하고 소심했으나 부패한 집단은 아니었다. 장면은 집무실에 점심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장면의 너그러운 인품을 존경했지만 총리의 심약함과 우유부단함에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에게 남은 것은 휴지가 된 의원 당선증뿐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정치하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무직자로, 낭인으로 떨어졌다. 김대중은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말벗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른 얼굴이 이희호였다. 그랬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 통하고 뜻이 맞았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첫 대면을 했다. 두 사람이 인연을 맺는 데 다리 구실을 한 사람이 대한여자청년단 간부 김정례였다. 이희호와 함께 활동하던 김정례는 1·4후퇴 때 서울의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려고 인천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피란민을 싣고 갈 배의 주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었다. 김정례는 젊은 사업가에게 사람들을 부탁하고 부산에 오게 되면 한번 만나자고 했다. 뒤에 부산으로 거점을 옮긴 김대중은 김정례를 찾았다.

김정례는 김대중과 만나는 자리에 여자청년단 간부들과 함께 나왔다. 바로 거기에 이희호가 있었다. “우리 일행 여럿이 김대중씨와 점심을 같이 먹었어요. 그 만남이 계기가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그 뒤 면우회에서 다시 만났지요.” 김대중은 면학동지회가 문을 넓힌 덕에 면우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 달에 한번씩 열린 그 모임에서 이희호와 김대중은 가슴을 터놓고 대화했다. 김대중은 이희호에게서 받은 인상이 강렬했던지 그 시절 이희호의 모습을 훗날에도 명확히 기억했다. “그는 여자청년단을 한다면서 곧잘 군복을 염색한 옷을 입고 다녔다. 나에게는 그 차림이 오히려 여성스럽게 보였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 그 웃음이 예뻤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기억 속에 “이지적인 눈매를 지닌 활달한 여성”, “젊음이 용솟음치는 생기발랄한 여성”으로 인화됐다. 뒷날 회고하는 글에서 김대중은 자기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위이고 공부를 많이 한 ‘인텔리 여성’ 이희호 앞에 서면 주눅이 들었고 수줍음과 자신없음으로 움츠러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태도는 김대중이 마음으로만 느꼈던 것인 듯하다. 이희호는 그 시절 김대중에게서 수줍어하거나 움츠러드는 모습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이희호가 본 김대중은 “눈이 크고 핸섬한” 멋쟁이였다. 또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였다.

그때 두 사람이 서로 확인한 것이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랬겠지만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삭막한 피란지에서 몇 시간씩 걸으며 대화하기도 했다. 대화의 풍경이 사뭇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부산역에서 멀지 않은 감천으로 산책을 간 적도 있다. 감천의 오솔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시국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통령 이승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고 있을 때여서 정치 현실을 걱정하며 함께 분개했다. 이희호는 생각이 깊었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했다. 각자 품은 꿈도 이야기했다.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사정이 좋아지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이희호는 당차면서도 따뜻한, 더없이 좋은 말벗으로 김대중의 기억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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