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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본기(秦本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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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9,543회 작성일 04-08-30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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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본기(秦本紀)

섬진(陝秦)1)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의 후예로써 여수(女修)라 했다. 여수가 베를 짤 때 검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여수가 그 알을 받아먹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대업이 소전(少典)2)의 딸 여화(女華)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여화가 아들 대비(大費)를 낳았다. 대비는 우(禹)가 치수공사를 할 때 곁에서 도왔다. 우가 치수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순(舜)임금이 현규(玄圭)3)를 하사하였다. 우가 현규를 받으면서 순임금에게 고했다.

「저 혼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대비가 곁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순임금이 듣고 말했다.

「아! 그대 비(費)여 우(禹)를 도와 공을 세웠구나! 내가 너에게 조유(皂游)4)를 내리노라. 너의 후손들은 장차 크게 번성하리라!」

순임금이 요성(姚姓)의 옥녀(玉女)를 대비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조유(皂游)를 하사 받은 대비(大費)는 순임금 곁에 있으면서 날짐승과 들짐승들을 조련하며 도왔다. 많은 날짐승과 들짐승들이 대비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가 백예(伯翳)다. 순임금이 백예에게 영씨(嬴氏) 성을 하사했다.

대비가 아들 둘을 낳았다. 장자는 대렴(大廉)이라 했는데 조속씨(鳥俗氏)의 선조가 되었으며 차자는 약목(若木)으로써 비씨(費氏)의 선조가 되었다. 약목의 현손 중에 비창(費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자손들 중 일부는 중국(中國)에 살았고 일부는 이적(夷狄)의 땅에 살았다. 하조(夏朝)의 걸왕(桀王) 때 비창은 하나라를 떠나 상나라에 귀의하여 탕(湯)임금을 위해 수레를 몰고 출전하여 명조(鳴條)의 땅에서 걸왕과 싸워 이겼다. 또한 맹희(孟戱)와 중연(中衍)은 대렴의 현손이다. 그들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의 말을 했다. 상나라의 임금 태무(太戊)5)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말을 몰고 달리게 하고 점을 쳐보게 하였다.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그들에게 임금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를 시키고 여인을 구해주어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상나라의 태무 임금 이후로 중연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공을 세우고 은(殷)나라를 도왔다. 영씨(嬴氏)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스스로 빛나게 만들어 마침내 제후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중연의 현손 중에 중휼(中潏)이라고 있었다. 그들은 서융(西戎)의 땅에 살면서 서수(西垂)6)의 땅을 지켰다. 중휼이 비렴(非廉)을 낳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장사였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를 같이 잡아서 죽였다. 그때 비렴은 주왕을 위하여 북방에 사자로 나가 있었다. 비렴이 북방에서 임무를 행하고 돌아왔으나 주왕이 이미 죽어 보고할 사람이 없자 곽태산(霍太山)7)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다녀온 일을 고하였다. 그때 비렴은 석관(石棺)을 하나 얻었다. 그 석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상제께서는 처보(處父-비렴의 자)로 하여금 은나라가 입은 재난을 피하게 하시고 석관을 내려 그 종족을 번성하게 하려고 함이라!』

비렴이 죽자 그를 곽태산에 장사 지냈다. 비렴의 막내아들에 계승(季勝)이라고 있었다. 계승이 맹증(孟增)을 낳았다. 맹증은 주성왕(周成王)의 총애를 받았다. 이가 택고랑(宅皐狼)8)이다. 고랑(皐狼)이 형보(衡父)를 낳고 형보(衡父)는 조보(造父)를 낳았다. 조보는 수레를 잘 몰아 주목왕(周穆王)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이름이 적기(赤驥), 도려(盜驪), 화류(驊騮), 록이(騄耳)등 여덟 마리의 명마9)를 얻어 사마(駟馬)로 삼아 서쪽으로 순수(巡狩)를 나가 그 즐거움에 돌아올 줄 몰랐다. 서(徐)나라10)의 언왕(偃王)11)이 란을 일으키자 조보(造父)가 목왕을 위해 수레를 번개 같이 몰아 삽시간에 주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주목왕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나라에 돌아와 서(徐)나라의 란을 진압했다. 목왕이 조보를 조성(趙城)12)에 봉했다. 비렴(非廉)이 계승(季勝)을 낳은 이후로5세인 조보(造父) 때에 이르러 조성(趙城)에 모여서 살게 되었으며 후에 진문공(晉文公)을 따라 유랑하다가 당진(唐晉)의 대부가 된 조쇠(趙衰)가 그의 후손이며 다시 조쇠의 자손들은 당진을 삼분한 조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오래혁(惡來革)은 비렴의 아들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오래혁(惡來革)은 여방(女防)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여방은 방고(旁皐)를 낳고 방고(旁皐)는 태궤(太几)를 낳고 태궤는 대락(大駱)을 낳았다. 대락은 다시 비자(非子)를 낳았다. 이들은 조보가 주왕의 총애를 받아 조성에 봉해 졌기 때문에 모두가 조성(趙城)에서 살게 되었고 성씨를 조(趙)로 삼았다.

비자가 견구(犬丘)에 살면서 말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말을 잘 길렀다. 견구에 살던 사람들이 주효왕(周孝王)에게 비자(非子)에 대한 말을 전하자 효왕이 불러 그에게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서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말은 크게 번식하였다. 효왕이 비자를 대락(大駱)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다. 대락의 부인이 된 신후의 딸이 아들 성(成)을 낳아 적자로 삼았다. 성이 대락(大駱)의 뒤를 이었다. 신후가 효왕에게 말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이 여산(驪山)에서 살 때 그 딸을 융주(戎主) 서헌(胥軒)의 부인으로 보내 중휼(中潏)을 낳았습니다. 이로써 융족들과 친하게 되어 주왕실에 귀의하게 되고 서수(西垂)를 지킬 수 있어 그곳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이르러 우리가 다시 대락에게 딸을 주어 적자 성(成)을 낳았습니다. 신(申)과 락(駱)의 두 번에 걸친 중혼(重婚)으로 되어 서융은 모두 복종하게 되어 왕께서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효왕이 대답했다.

「옛날 백예(柏翳)가 순임금을 위해 가축을 길러 번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순임금께서 백예에게 토지를 주어 제후로 봉하고 영(嬴)이란 성을 내렸다. 오늘 그 후손이 다시 짐(朕)을 위하여 말을 길러 번식시켜공을 세웠기 때문 짐이 땅을 나누어 부용(附庸)13)에 봉하노라!」

효왕은 비자(非子)를 진읍(秦邑)의 부용에 봉한 후에 영씨(嬴氏)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진영(秦嬴)이라고 불렀다. 또한 신후의 딸도 폐하지 않고 적자인 성으로 하여금 대락의 뒤를 잇게 하여 서융과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였다.

진영(秦嬴)이 진후(秦侯)를 낳았다. 진후가 재위10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백(公伯)이 뒤를 이었다. 공백이 아들 진중(秦仲)을 낳고3년 만에 죽었다. 진중3년에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제후들 중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서융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쳐들어와 견구(犬丘)에 살던 대락의 후손들을 모두 전멸시켰다.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하자 즉시 진중을 주나라의 대부로 삼아 서융을 정벌하게 하였다. 서융이 쳐들어와 진중을 죽였다. 진중은 공백의 뒤를 이어23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서융의 반격을 받고 싸움 중에 죽은 것이다. 진중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장자는 장공(庄公)이다. 주선왕이 장공과 그 형제들에게 군사7천 명을 주어 서융을 정벌하도록 명했다. 장공과 형제들이 서융으로 출정하여 융족들을 크게 물리쳤다. 그래서 다시 선왕은 진중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견구와 대락(大駱)의 땅을 주고 서수(西垂)의 대부로 삼았다.

장공이 서견구(西犬丘)14)에 살면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의 이름은 세보(世父)라 했다. 세보가 말했다.

「융족이 우리의 조부이신 진중님을 죽였다. 내가 융왕을 죽여 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한 다면 나는 결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융족을 공격하러 떠나면서 그의 장자 자리를 동생인 양공(襄公)에게 양보하였다. 양공이 태자가 되었다. 장공이 선지44년만에 죽자 태자 양공이 뒤를 이었다.

양공 원년 기원전777년 그의 여동생인 목영(穆嬴)을 풍읍(豊邑)에 살던 융족의 왕에게 시집보냈다.

양공2년 기원전776년 융족이 쳐들어와 견구를 포위하였다. 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이해서 싸웠으나 오히려 융족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세보는 융족에게서 풀려나 돌아왔다.

양공7년 기원전771년 봄에 주유왕(周幽王)이 포사(褒姒)를 총애하여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소생인 백복(伯服)을 대신 세웠다. 또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기만하자 제후들은 유왕에게 등을 돌렸다. 서융의 일족인 견융과 신후(申侯)가 주나라를 침범하여 유왕을 여산(驪山) 밑에서 죽였다. 진양공이 주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왕실에 공을 세웠다. 주나라가 견융의 난을 피해 그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진양공은 주평왕(周平王)이 락읍으로 천도하는데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평왕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양공을 제후에 봉하고 기산(岐山)의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나라에 주면서 말했다.

「융족이 무도하여 우리에게서 기풍(岐豊)의 땅 을 모두 빼앗아 갔다. 섬진(陝秦)이 능히 융족을 물리쳐 공을 세운다면 그 땅은 모두 섬진의 소유가 될 것이다. 」

평왕이 맹세를 행하고 진양공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진나라는 양공 때에 이르러 비로소 제후국이 되어 주변의 제후국들에게 사절을 보내고 빙향(聘享)15)의 예를 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유구(騮驅)16)와 황소, 숫양을 각각3 마리씩을 희생으로 잡아 서치(西畤)17)의 사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양공12년 기원전766년 서융을 정벌하여 기산(岐山)에 이르러 그곳에서 싸움 중에 죽었다. 아들 문공(文公)이 뒤를 이었다.

진문공(秦文公) 원년 기원전765년, 서수궁(西垂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공3년 기원전763년, 7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다음 해인 문공4년에 견수(汧水)와 위수(渭水)가 합류하는 곳에 당도하여 말했다.

「옛날 주나라가 이곳을 우리의 선조인 진영(秦嬴)에게 봉읍으로 하사했고 후에 결국은 우리는 이곳에서 제후가 되었다.」

진문공이 거북점을 치게 하여 그곳에 머물어 살게 될 경우 길흉을 점쳐보게 했다. 점괘가 길하게 나와 그 곳에 성읍(城邑)을 축조하였다.

문공10년 기원전756년, 부치(鄜畤)18)에 제단을 쌓고 소, 양 및 돼지 등을 희생으로 사용하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다.

문공13년 기원전753년, 처음으로 사관(史官)을 두어 나라의 큰일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들의 대부분이 교화(敎化)를 받아들였다.

문공16년 기원전750년, 문공이 군사를 동원하여 융을 정벌했다. 융이 패하여 달아났다. 그래서 문공은 주나라의 유민을 수습하여 섬진에 복속 시키고 그 영토는 기산에 이르게 되었다. 문공이 기산 이동의 땅을 주 천자에게 바쳤다.

문공19년 기원전747년, 문공이 진보(陳寶)19)를 얻었다.

문공20년 기원전746년, 처음으로 법을 만들어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정했다.

문공27년 기원전739년, 종남산(終南山)의 큰 가래나무를 배어 궁전을 지을 때 기둥으로 삼았으나 가래나무에서 청우(靑牛)가 튀어 나와 풍수(豊水)로 뛰어 들자 가래나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노특사(怒特祠)를 지었다.

문공48년 기원전718년, 문공의 태자가 죽어 시호(諡號)를 정공(靜公)이라 했다. 정공의 장자를 태자로 세우니 문공의 손자였다. 문공이 재위50년 만에 죽어서 서산(西山)20)에 장사지내고 정공의 아들이 뒤를 이었다. 이가 영공(寧公)이다.

영공2년 기원전714년, 영공이 평양(平陽)으로 천도하였다. 군사를 일으켜 탕사(蕩社)21)를 정벌했다.

영공3년 기원전713년, 박(亳)과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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