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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본기(項羽本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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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2,402회 작성일 09-03-0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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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7. 항우(項羽)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의 폐황하(廢黃河)) 사람으로 자는 우(羽)다. 처음 진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때 그는 24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 작은아버지 항량(項梁)은, 옛날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싸워 패하고 살해당한 항연(項燕)1)의 아들이다. 항(項)씨들은 세세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집안으로 항(項)2)에 봉해졌다. 이에 항을 그들의 성씨로 했다. 

  항적이 어렸을 때 글공부를 했으나 진전이 없어 때려치우고, 다시 검술을 배웠으나 역시 진전이 없었다. 항량이 노하며 꾸짖자 항적이 대답했다.

「글이란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하고, 검술이란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족합니다. 만인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그래서 항량은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항적이 크게 기뻐하며 개략적이나마 그 뜻을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결국은 학문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항량은 옛날 역양(櫟陽 : 지금의 섬서성 임동(臨潼) 동북 )에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을 때 기현(蘄縣)의 옥리 조구(曹咎)3)가 역양현(櫟陽縣)의 옥리 사마흔(司馬欣)4)에게 편지를 써서 선처를 부탁해 항량은 곧 석방될 수 있었다. 항량은 후에 살인을 하고 몸을 피해 오(吳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 땅으로 갔다. 오 땅의 어진 선비들과 대부들이 모두 몸을 일으켜 항량의 밑으로 들어왔다. 오 땅에 큰 공사가 있을 때나 상이 났을 때는 언제나 항량이 그 일을 주재하고, 암암리에 병법에 이르는 대로 빈객들과 강동의 자제들을 조직했음으로, 사람들은 그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후에 회계로 순수(巡狩) 나와 절강(浙江)을 건너는 진시황의 행렬을 보기 위해 항량과 항적이 같이 나와 구경했다. 항적이 성대한 행렬과 함께 지나가는 진시황을 구경하면서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 되겠다!」

  항량이 항적의 입을 막고 말했다.

「멸족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런 망언을 함부로 하는가?」

  항량은 이때부터 항적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항적은 키가 팔 척(尺)5)이 넘었고, 그 힘은 정(鼎)을 들 수 있었다. 재능과 기개가 뭇 사람에 비해 뛰어난 항적을 오 땅의 자제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진나라의 이세황제 원년, 즉 기원전 209년 7월, 진섭(陳涉) 등이 대택향(大澤鄕 :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동남의 유촌(劉村)에 있었던 소택이다.)에서 거병하여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해 9월 회계태수 은통(殷通)이 항량(項梁)에게 말했다.

「강서(江西)6)가 모두 진나라에 반하여 일어났소.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오. 먼저 행하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 후에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부림을 당한다고 나는 들었소. 내가 거병하여 공과 환초(桓楚)7)를 장수로 삼고 싶소.」

  그때 환초는 도망가 강호(江湖)에 숨어있었다. 항량이 대답했다.

「도망가 몸을 숨긴 환초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직 항적만이 알고 있습니다.」

  항량이 물러 나와 항적에게 칼을 들고 밖에서 대기하라고 명하고 다시 태수의 앞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청컨대 항적을 불러 그로 하여금 환초를 불러 오라 명하시기 바랍니다.」

  태수 은통이 허락하자 이윽고 항량은 항적을 불러 태수전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항량이 항량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이제 손을 써도 되겠다.」

  이에 항적이 즉시 칼을 뽑아 태수의 목을 베었다. 태수의 수급을  손에 든 항적이 태수인장을 허리에 둘렀다. 태수전에 있던 사람들이 매우 놀라 소란을 피우자 항적이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이에 태수부에 있던 관리들은 모두 놀라 땅에 엎드리고 아무도 감히 몸을 일으켜 대항하지 못했다. 항량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호족들과 관리들을 불러들여 대사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윽고 오성의 병사들과 회계군 관하의 각 현에 사람을 보내 장정을 모집하여 정병 8천을 얻었다. 항량은 오성의 호걸(豪傑)들을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 등으로 삼았다. 기용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와서 그 이유를 묻자 항량이 대답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 그대로 하여금 상례를 주재하도록 시켰으나, 그대는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소. 그래서 그대가 이번에 기용되지 못했소.」

 사람들이 모두 항량의 말에 승복했다. 마침내 항량이 스스로 회계태수가 되어 항적을 비장(裨將)으로 삼아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며 진무하고 복종시켰다.

  광릉(廣陵 :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揚州市)) 사람 소평(召平)이 진왕(陳王) 섭(涉)을 위해 광릉을 진무하기 위해 왔으나 미처 점령하지 못했다. 그 사이 진왕(陳王)의 군대를 대파한 진군(秦軍)이 장차 광릉으로 진격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은 소평은 즉시 장강을 건너 항량을 찾아갔다. 소평은 진왕의 명령을 가장하고 항량을 초나라의 상주국(上柱國)8)에 임명한다고 하면서 진왕의 명을 거짓으로 전했다.

「강동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군사들을 이끌고 하루라도 빨리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 군사들을 저지하시오.」

  항량은 즉시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했다. 이때는 이미 진영(陳嬰)이 동양(東陽 :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天長縣) 서북)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같이 힘을 합쳐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진영이라는 위인은 동양(東陽)의 영사(令史 : 현령에 속한 지방의 하급관리)로서 현청에 근무하면서 신심이 있고 성실한 태도로 일관하여 장자(長者)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동양의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더니 무리가 늘어나 수천에 달하게 되었다. 그들이 모의하여 수령을 세우려고 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진영에게 그들의 수령이 되기를 청했다. 진영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젊은 무리들이 강제로 진영을 그들의 수령으로 받들자 현의 관내에서 모인 무리는 2만 명에 달했다. 다시 젊은이들이 진영을 왕으로 추대한 다음 자기들은 창두군(蒼頭軍)9)과 같은 특공대를 칭하려고 했다. 진영의 모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네 집에 시집 온 이래 아직까지 나는 네 조상 중에 그 몸이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오늘 폭란이 일어나 네가 큰 이름을 얻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좋은 징조는 아닌 듯싶다. 차라리 남의 밑에 들어가서 일이 성사되면 제후(諸侯)에 봉해지게 되고,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 지목 받지 않기 때문에 도망가기가 쉬워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不如猶所屬, 事成有得封侯, 事敗易以亡, 非世所指名也]」

  그래서 진영은 감히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하고 군리들에게 말했다.

「항씨들은 대대로 초나라에서 장군의 직을 맡아왔던 가문으로 천하에 이름이 나있다. 오늘 대사를 위해 몸을 일으켰으니 우리의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이 아니면 불가할 것이다. 나는 초나라의 명문가 출신의 인사에 의탁하여 진나라를 필히 멸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 말을 따르니 동양의 모든 군사들은 항량(項梁)에게 귀속되었다.

  항량이 동양의 군사를 합한 기의군과 함께 이윽고 회수를 건너자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초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에 항량의 휘하에는 육칠 만의 군사가 모이게 되었다. 항량은 그 군사들은 이끌고 북상하여 하비(下邳 : 지금의 강소성 비현(邳縣) 서남)에 주둔했다.

  그 당시 진가(秦嘉)10)는 이미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세우고 팽성(彭城)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항량의 북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항량이 군리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진왕(陳王)이 먼저 대사를 일으켰으나 진(秦)나라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지고 도망쳐 지금은 그의 소재를 모르고 있다. 오늘 진가가 진왕을 배반하고 경구를 세운 행위는 대역무도한 짓이다.」

  이윽고 항량이 북진하여 진가를 공격했다. 진가의 군사들이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자 그 뒤를 추격하여 호릉(胡陵)에 이르렀다. 전열을 정비한 진가가 다시 항량군과 싸웠으나 하루만에 싸움에서 지고 자신은 전사했다. 진가의 군사들은 모두 항량의 초군에 귀속되었다. 진가군을 합친 항량군은 호릉에 주둔하면서 그 군사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때 진나라 장군 장한(章邯)은 토벌군을 이끌고 동진하여 율(栗:지금의 하남성 하읍현(夏邑縣))에 주둔하고 있었다. 항량은 별장(別將)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余樊君)을 보내 장한을 공격하도록 했다. 항량군은 싸움에서 패하고 여번군은 전사했다. 싸움에서 진 주계석은 잔병을 수습하여 호릉의 항량에게 도망쳐왔다. 항량은 즉시 본대를 이끌고 설(薛 :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 동남으로 전국 때 맹상군의 봉읍이다.)로 들어간 다음 패전 책임을 물어 주계석을 죽였다. 항량이 그 전에 항우(項羽)를 시켜 별동대를 이끌고 가서 양성(襄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진나라 병사들이 굳게 지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윽고 양성이 함락되자 항우는 성안 사람들을 모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였다. 진왕 섭(涉)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항량은 여러 별장들을 설(薛)로 불러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이때 패 땅에서 몸을 일으킨 패공(沛公) 유방(劉邦)도 설로 왔다.

  

  거소(居鄛 : 지금의 안휘성 동성(桐城) 남) 사람 범증(范增)은 나이 70이 되도록 향리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기계(奇計)를 공부했다. 그가 항량을 찾아와 말했다.

「진승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무릇 진나라가 육국을 멸할 때 초나라가 가장 무고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옛날 ‘초회왕(楚懷王)이 진나라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한 일’11)을 지금도 초나라 사람들은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나라의 부로들은 지금도 말하기를 ‘ 초나라 사람이 다 죽고 세 집만 남아있어도 반드시 진나라를 망하게 할 나라는 초나라일 것이다.’ 오늘날 진승이 먼저 거사를 일으켰으나, 초나라 왕실의 후예들을 세우지 않고 자기가 직접 왕이라 칭했음으로 그 세력이 커지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공께서 강동에서 몸을 일으키니 초나라의 장정들이 벌떼처럼 떼를 지어 공 곁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군의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군을 역임해 온 명문가였음으로 능히 초왕실의 후손을 찾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항량은 범증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즉시 초회왕의 후손 중  웅심(熊心)이란 사람을 찾아내어 초왕으로 추대했다. 그때 웅심은 민간에 섞여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초나라 백성들이 바라고 있었던 바였다. 진영을 초나라의 상주국으로 삼고 다섯 개의 현에 봉한 다음 회왕과 함께 우이(盱眙 : 지금의 강소성 우이현(盱胎縣) 동북의 우이산(盱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에 머물도록 했다.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호칭했다.

  설(薛)에서 수개월 동안 머문 항량의 초군은 출격하여 제나라의 항보(亢父 :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남)를 공격하고 전영(田榮)12) 및 사마용저(司馬龍且)와 함께 진군(秦軍)을 대파하고 동아(東阿)를 구했다. 전영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제왕 전가(田假)를 쫓아냈다. 전가는 초 땅으로 달아나고 제왕의 상국 전각(田角)은 조 땅으로 달아났다. 전각의 동생 전간(田間)은 제군을 이끌고 출격했다가 조 땅에 머물다가 감히 제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영이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왕으로 세웠다. 항량이 동아성을 함락시키고 도망가는 진군의 뒤를 추격하면서 사자를 전영에게 보내 제군을 이끌고 나와 같이 서쪽으로 진격하자고 제촉했다. 전영이 말했다.

「초 땅으로 달아난 전가와, 조 땅으로 달아난 전각과 전간(田間)을 죽여준다면, 군사를 내어 공의 뒤를 따르겠소.」

  항량이 대답했다.

「전가는 일국의 왕이었던 신분으로 궁한 처지가 되어 나에게 몸을 의탁해 왔는데, 차마 나는 그를 죽일 수 없소!」

  조나라 역시 전각과 전각을 죽이지 않고 제나라와 흥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제나라는 초나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항량의 명령을 받은 패공(沛公)과 항우(項羽)는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성양(城陽 :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甄城縣) 남)를 함락시키고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다시 서쪽으로 나아가 복양(濮陽 :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 남)의 서쪽에서 진군을 대파하고 복양성을 점령했다. 패공과 항우는 다시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사를 물리쳐 서쪽으로 나아가 옹구(雍丘 : 지금의 하남성 남사현(南祀縣)))에서 진군과 싸워 파하고 이유(李由)13)의 목을 베었다. 다시 방향을 바꾸어 외황(外黃)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항량이 동아에서 서쪽의 정도(定陶)로 나아가 주둔했다. 이윽고 항우 등의 장수들이 진군을 파하고 이유의 목을 베었다는 승전보를 접한 항량은 더욱 진군을 얕보며, 얼굴에는 교만한 기색을 띄웠다. 송의(宋義)가 항량을 보고 간했다.

「싸움에서 승리를 했다고 해서 장수들은 교만해지고 사졸들은 게으르게 된다면 그 부대는 다음 싸움에서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다소 나태해지고 진군의 세력은 더욱 늘어만 가고 있어 이에 신은 장군을 위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량은 송의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를 제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송의가 도중에 항량을 만나기 위해 초나라로 오던 제나라의 사자 고릉군(高陵君)을 만나 말했다.

「공은 무신군(武信君)을 만나기 위해 초나라로 가는 길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마도 무신군은 곧 있을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공은 행보를 천천히 하여 초나라에 들어가시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들어가신다면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과연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일으켜 보낸 군사들이 장한의 군영에 당도하자, 장한은 정도(定陶)에서 초군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항량은 싸움 중에 죽었다. 그때 항우와 유방은 외황을 버리고 진류(陳留)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황성은 진군이 굳게 지켰음으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이 서로 상의하며 말했다.

「항량의 본대가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우리 군사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사기가 매우 떨어져 있다.」

  곧이어 여신(呂臣)14)이 이끌던 부대와 함께 동쪽으로 후퇴했다. 여신의 부대는 팽성의 동쪽에, 항우의 부대는 그 서쪽에 주둔하고 패공 유방은 탕(碭: 지금의 하남성 하읍현 동)에 주둔했다.

  항량이 이끌던 초나라의 주력군을 대파한 장한의 진군은 초나라의 잔병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즉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하수를 도하한 후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그때 조왕은 조헐(趙歇)이었고, 장군은 진여(陳餘), 상국은 장이(張耳)였다. 세 사람이 함께 패잔병을 수습하여 거록(鉅鹿)으로 달아났다. 장한이 왕리(王離)와 섭간(涉間)에게 거록을 포위하라는 명을 내리고 자신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군량의 수송을 위해 용도(甬道)를 건설했다. 그때 진여가 지휘하던 수 만의 군사들은 거록의 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하북군(河北軍)이라 불렀다.

  초나라의 주력군이 정도에서 진군에게 패배하자 초회왕은 두려워하여 우이(盱眙)에서 나와 팽성으로 들어가 여신군과 항우군을 통합하여 자신이 직접 관장했다. 이어서 여신을 사도(司徒)로 그의 부(父) 여청(呂靑)을 영윤으로 삼았다. 유방은 탕군의 태수에 임명하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군사들을 지휘토록 했다. 그때 옛날 송의가 사자로 제나라에 가다가 도중에 만났던 제나라의 사자 고릉군이 초군의 군중에 있다가 초왕을 접견하고 말했다.

「송의가 얼마 전에 무신군의 군사는 필시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며칠 후에 초군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무신군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그 패전을 미리 예언한 송의야말로 가히 군사의 일을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초왕이 송의를 불러 군사의 일을 물어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차장(次將)으로, 범증(范增)은 말장(末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토록 했다. 별장(別將)들은 모두 송의(宋義)에게 귀속되어 경자관군(卿子冠軍)15)이라고 칭했다. 송의가 경자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안양(安陽)에 당도했으나 46일이나 지나도록 주둔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항우가 송의를 보고 말했다.

「내가 들으니 진군이 거록에서 조왕을 포위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속히 하수를 건너 우리 초군은 진군의 배후에서 공격하고 조군은 안에서 내응한다면 그들을 필시 파할 수 있습니다.」

  송의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소. 무릇 소의 등 뒤에 붙어 그 피를 빠는 날파리는 잡을 수 있으나 털에 붙어 있는 서캐는 어찌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지금 진(秦)이 조(趙)를 공격하여 이긴다 할지라도 그 군사들은 피로해 질 것이며, 그리되면 우리는 기회를 타서 진군을 파할 수 있소. 이와 반대로 진군이 이기지 못할 경우 군사들을 이끌고 서진하여 피로에 지친 그들을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승리를 취할 수 있소. 고로 진과 조 두 진영의 군사들이 먼저 싸우게 내버려두어야 하오. 무릇 철갑을 두르고 병장기를 휘두르며 싸움에 임하는 것은 내가 공보다 못하지만, 장막에 앉아서 작전을 짜는 일은 공보다 내가 더 낳을 것이오.」

  이에 송의는 군중에 다음과 같은 령을 내렸다.

「호랑이 같이 흉맹하거나, 서로 싸우는 양처럼 잔인하거나, 이리처럼 탐욕스러운 자는, 비록 싸움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쓸 수 없으니 모두 참하리라!」

  곧이어 송의(宋義)는 그의 아들 송양(宋襄)을 제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송양이 임지로 가다가 무염(無鹽)16)에 머물며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큰 연회를 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이윽고 날씨가 추워지고 큰비가 오니 사졸들은 추위에 떨고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항우가 보고 말했다.

「모든 힘을 다해 진군을 협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세상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콩잎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정도로 군중에는 군량미마저 동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의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송의를 장군에 임명하고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주어 진군을 막도록 했다. 그래서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항우가 새벽 일찍이 송의의 상장군 막사로 난입하여 장중에서 그의 목을 베고 군령을 발했다.

「송의와 제가 초나라를 모반하려고 해서 초왕께서 나에게 령을 내려 송의를 죽이라고 하셨다.」

  당시 여러 장수들은 항우의 기세에 눌려 복종하고 아무도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말했다.

「원래 장군의 집안이 초나라를 처음으로 세웠습니다. 오늘 장군께서 반역자를 주살하신 일은 당연합니다.」

  이어서 여러 제장들이 서로 상의하여 항우로 하여금 상장군의 직을 대리하게 했다. 항우는 사람을 제나라로 보내 송의의 아들 송양을 죽이고 다시 환초를 사자로 회왕에게 보내 송의가 모반을 꾀해 죽였다고 고하게 했다. 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당양군(當陽君) 경포(黥布)와 포장군(蒲將軍) 등을 모두 항우에게 속하게 했다.

  항우가 경자관군 송의를 죽이자 그 위세는 초나라를 진동시키고 그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즉시 경포와 포장군에게 2만의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 거록의 조군을 구원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진군과 싸워 하수 북쪽 강안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진여가 다시 사자를 보내 원병을 청하자 휘하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넌 항우는 배를 강물 속에 가라앉히고, 솥을 깨고, 막사를 불태운 후에 3일 치의 양식만을 지참케 하여 사졸들에게 필사의 의지를 보임으로써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했다. 이윽고 항우의 초군은 왕리의 진군과 회전에 들어가 아홉 번 싸워 모두 이기고 장한이 건설한 용도를 끊어 대승을 거두었다. 진장 소각(蘇角)은 싸움 중에 살해당하고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섭간(涉間)은 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죽었다. 이로써 초군은 다른 제후군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군을 구원하기 위해 거록으로 달려온 제후들이 세운 영채는 10여 개가 있었으나 아무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진군과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초군이 진군을 공격하자 제후군의 장수들은 모두 영루의 높은 곳에 올라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초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용감하여 일당십의 기개로 싸우면서 지르는 함성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자 제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윽고 진군을 대파한 항우는 제후군을 이끌던 장수들을 불러 회견한 후에 원문(轅門)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 허리를 굽히고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다. 항우는 이로써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항우에게 귀속되었다.


  장한은 극원(棘原 :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남)에, 항우는 장남(漳南 : 장수(漳水)의 남쪽)에 주둔하며 서로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이에 장한이 여러 번 퇴각하려고 하자 이세황제가 사자를 보내 장한을 책망했다. 장한이 두려워하여 장사(長史)17) 사마흔(司馬欣)을 사자로 보내 일의 전말을 고하도록 했다. 사마흔이 함양에 당도하여 사마문(司馬門)18)에서 3일을 기다렸으나 조고가 나타나지 않자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마흔이 두려운 생각이 들어 다시 장한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감히 고도(故道)를 이용하지 못했다. 조고가 과연 사람을 시켜 사마흔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윽고 사마흔이 장한의 군중에 도착해서 고했다.

「조고(趙高)가 조정 안에서 정사를 독단하고 있어, 그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반군과 싸워 이긴다면 조고는 우리의 공을 시기할 것이고, 이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으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진여 역시 장한을 설득하기 위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19)는 남정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켜 초나라를 동쪽으로 내쫓았으며, 북정하여 장평에서 조나라 대장 조괄(趙括)를 죽이고 그 군사 40여 만을 구덩이에 묻었소.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함락시키고, 땅을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했으나 결국은 진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되었소. 몽염(蒙恬)은 장군이 되어 북쪽의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고 유중(楡中)20)의 수천 리 땅을 넓혀 불세출의 큰공을 세웠으나 그 역시 양주(陽周 : 지금의 섬서성 자장(子長) 서북)에서 참수되었오. 그 이유는 진나라에는 공을 세운 사람이 너무 많아 그들에게 모두 봉지를 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을 이용하여 주살했기 때문이오. 장군이 진나라의 대장이 된 지 3년 동안, 수하의 군사 수십 만을 잃었으나 제후들은 서로 규합하여 그들의 군사들은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소. 오랫동안 이세의 눈과 귀를 막으며 아첨만을 일삼고 있는 조고는 나라의 정세가 위급하게 되어 이세황제로부터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안전만을 고려하여 수비로 일관한 장군에게 책임을 물어 주살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 장군을 대신하여 이세로부터의 화를 면하려하고 있소. 지금 장군이 밖에 나와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는 동안 조정내부와 틈이 벌어져 비록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고 또한 공을 세우지 못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장차 하늘이 진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있는 사람이나 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소. 오늘 장군이 안으로는 직간을 할 수 없고, 밖으로는 나라에서 버림받은 장수가 되어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하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소? 장군은 어찌하여 병사들의 방향을 바꿔 제후들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어 남면하면서 고(孤)를 칭하지 않으려고 하시오? 장군 자신은 형구(刑具)에 엎드려 요참형(腰斬刑)을 당하고 가족들은 주륙을 당하는 일과 어찌 견줄 수 있단 말이오?」

  장한이 의심하여 비밀리에 시성(始成)21)을 사자로 항우에게 보내 맹약을 맺도록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항우가 포장군(蒲將軍)에게 군사를 주어 밤낮으로 행군하여 삼호(三戶)22)에서 장수(漳水)를 건너 그 남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포장군은 진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항우가 휘하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남진하여 우수(汙水 : 장수의 지류로 하북성 임장현(臨漳縣) 서쪽으로 흘렀다)에서 다시 진군을 대파했다. 

  장한이 사자를 보내 항우를 만나 항복을 하겠다고 했다. 항우가 군리들를 불러 말했다.

「군량미가 얼마 남지 않아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여야 겠다.」

  군리들이 모두 말했다.

「옳은 판단이십니다.」

  장한은 항우와 원수(洹水 :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안양하(安陽河)다) 남쪽의 은허(殷墟 : 지금의 안양시 소둔촌(小屯村)으로 은나라의 도성이었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만나 항복의식을 행했다. 장한이 항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조고(趙高)가 진나라의 충신들을 모함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항우는 즉시 장한을 옹왕(雍王)에 임명하고 초나라 군중에 머물게 했다. 장사 사마흔(司馬欣)은 상장군이 되어 진군을 이끌고 제후군의 전대(前隊)를 맡아 진나라를 향해 진격했다.

  이윽고 진군의 행렬이 신안(新安)에 이르렀다. 당시 제후군의 군리와 사졸들은 모두 옛날 요역에 징발되어 여산릉(驪山陵) 공사에 동원되었거나, 하투(河套) 지방에 머물며 변경지역의 수비병 출신들이었다. 또한 서북쪽의 장성(長城) 축조 공사에 동원되어 관중지방에 살면서 진나라 관리로부터 인간 이하의 대접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진나라 군사들이 제후군에게 항복하자, 제후군의 군리와 사졸들은 그들을 마치 포로나 노예처럼 대하며 모욕을 가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며 말했다.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군에게 항복을 했다. 오늘 우리가 진군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제후들은 우리들을 그들의 노예로 삼아 동쪽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되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는 진나라로부터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제후군의 장수들이 그 소리를 몰래 듣고 항우에게 고했다. 항우가 즉시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 의논한 다음 말했다.

「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 항졸들을 기습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였다.


 

  항우의 제후군이 진나라 땅을 점령해 가면서 서쪽으로의 진군을 계속했다. 이윽고 제후군이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으나 진군이 견고하게 지켜 관중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패공(沛公) 유방(劉邦)은 진나라에 들어가 함양성(咸陽城)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항우가 대노하여 당양군(當陽君) 경포를 시켜 함곡관을 당장에 함락시키라고 했다. 이윽고 함곡관을 파하고 관중에 들어간 항우는 희서(戱西)23)에 주둔했다. 패상(霸上)24)에 주둔하고 있던 패공은 감히 항우를 접견하지 못했다. 패공의 휘하에서 좌사마(左司馬) 직에 있던 조무상(曹無傷)이 몰래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고했다.

「패공이 관중이 왕이 되기 위해, 진왕(秦王) 자영(子嬰)을 상국으로 삼고, 성안의 있던 보물들을 모두 취했습니다.」

  항우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내일 새벽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라! 패공의 군사들을 공격할 것이다.」

  당시, 항우의 40만 군사는 신풍(新豊 :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북)의 홍문(鴻門 : 지금의 임동현 동쪽의 산구릉 이름으로 지금은 항왕영(項王營)으로 부르고 있다)에, 패공의 10만 군사는 패상에 주둔하고 있었다.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말했다.

「패공이 산동(山東)에 있을 때는 재물과 여색을 탐했었지만, 오늘 관중으로 들어가더니 재물도 취하지 않고 여인들도 멀리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뜻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의 기품을 살펴보게 했는바 모두가 용호(龍虎)의 기상이 있고 오채(五彩)의 상서러운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천자의 기상이라 한시라도 빨리 공격하여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초나라의 좌윤(左尹)이며 항우의 작은아버지 항백(項伯)은 평소에 유후(留侯) 장량과 친교가 있었다. 장량은 그때 패공과 함께 패상에 있었다. 항백이 즉시 밤새 달려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가 장량을 비밀리에 만나 항우가 다음날 새벽에 공격할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이어서 항백은 자기와 같이 패공의 진영을 떠나자고 하면서 말했다.

「이곳에 머물다가 같이 죽을 필요가 있겠소?」

  장량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한왕(韓王)을 위해 패공에 보내진 사람입니다. 패공이 지금 위급하게 되었는데, 그를 놔두고 도망치는 행위는 의가 아닙니다. 나는 이 일을 패공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량이 즉시 패공에게 달려가 그 일을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랐다.

「내가 어찌해야 하겠소?」

「도대체 어떤 자가 대왕에게 함곡관을 지키라는 계책을 냈습니까?」

「한 소인배의 계책이오. 함곡관을 지켜 제후군의 입관을 막는다면 진나라 땅은 모두 나의 차지가 되어 이곳의 왕이 될 수 있다고 해서 내가 그의 말을 들었소.」

「그렇다면 대왕의 군사들이 항왕의 군사들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말입니까?」

  패공이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이왕 잘못되었으니 왈가왈부할 필요 없이 앞으로 어찌했으면 좋겠소?」

「우선 항백을 불러, 패공께서 결코 항왕을 배반할 뜻이 없었다고 말하십시오.」

「경은 어떻게 항백과 친교를 맺게 되었소?」

「옛날 진나라 치하에서 그와 친교를 맺고 같이 지내다가 항백이 살인하여 지를 짓자 제가 손을 써서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태가 이미 위급하게 되어 그가 달려와 나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두 사람 중 누가 연장자입니까?」

「그가 연장입니다.」

「경은 그를 내 앞으로 데려오기 바랍니다. 내가 큰형님을 얻어야 되겠소.」

  장량이 물러 나와 패공이 뵙기를 청한다고 항백에게 말했다. 항백이 즉시 패공의 처소로 가서 접견했다. 패공이 술잔을 받들어 항백을 위해 축수를 기원하고 두 사람의 자녀들을 혼인시켜 우의를 영원히 하자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관중에 들어온 이래 추호도 이 땅을 탐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진나라의 관리들과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부고를 봉하여 대장군께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장수들을 보내 함곡관을 지키도록 한 일은 다른 도적들의 출입을 방비하기 위해서였으나 뜻밖에 일이 이렇게 잘못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대장군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어찌 감히 제가 반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장군께서 추호도 배반할 뜻이 없다는 이 사람의 충심을 대장군에게 말씀드려주십시오.」

  항백이 허락하고 패공을 향해 말했다.

「새벽에 일찍이 항왕의 처소를 찾아가 사죄의 말을 올리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군의 목숨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항백이 밤중에 다시 패공의 진영을 떠나 항우의 진영에 당도해서 패공이 한 말을 항왕에게 전하며 말했다.

「패공이 먼저 관중에 들어가 함양성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어찌 네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오늘 대공(大功)을 이룬 사람을 공격하려고 하니 이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찾아오는 그를 좋은 뜻으로 맞이하기 바란다.」

  항왕이 허락했다. 패공이 다음날 새벽 백여 기(騎)의 군사들만을 거느리고 항왕의 진영이 있는 홍문(鴻門)에 당도하여 항우를 접견하며 사죄의 말을 올렸다.

「신과 장군은 온 힘을 기우려 진나라와 싸웠습니다. 장군은 하북(河北)에서 싸웠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관중에 먼저 들어오게 되어 다행히 장군을 이곳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인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대답했다.

「그것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일러줬기 때문이오. 그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곳에 있겠소?」

  항왕이 즉시 패공을 자기 진영에 머물도록 하며 음주를 즐기기 위해 연회를 베풀도록 좌우에게 명했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 앉았고, 아부(亞父) 범증(范增)은 남쪽을 향해 앉았다. 패공은 북쪽을, 장량은 서쪽을 향해 앉았다. 범증이 여러 번에 걸쳐 항왕에게 눈짓을 하다가, 다시 패옥(佩玉)을 들어 보이며 세 번이나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항우는 결코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범증이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온 다음 항장(項莊)을 불러 말했다.

「군왕의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 그대가 연회장에 들어가 축수를 드린 다음, 검무를 추겠다고 청하시오. 춤을 추다가 유방의 자리와 가까워졌을 때 칼을 내리쳐 죽이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오.」

  항장이 범증을 말을 듣고 연회장에 들어가 칼을 뽑아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우의 곁에 앉아있던 항백이 일어나 칼을 뽑아 검무를 추어 항장을 상대하면서 패공을 보호했다. 항장은 항백 때문에 패공을 찌를 수 없었다. 그때 장량이 연회장을 빠져 나와 군문 밖에 있던 번쾌를 불렀다. 번쾌가 장량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소. 지금 검무를 추고 있는 항장이 패공을 찔러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소.」

「그렇다면 패공의 목숨이 참으로 위험하다 하겠습니다. 신이 청하여 연회장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패공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번쾌가 즉시 칼을 허리에 찬 채로 방패를 들고 군문으로 들어갔다. 극을 든 호위무사들이 연회장으로 들어가려는 번쾌의 앞을 막았다. 번쾌가 방패를 휘두르자 무사들이 땅에 쓰러졌다. 번쾌가 연회장으로 들어가 장막을 거두고 서쪽을 향해 서서 항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머리털은 모두 꼿꼿이 서서 위로 향하고 부릅뜬 눈은 그 눈꼬리가 찢어지는 듯했다. 항왕이 번쾌의 모습을 보더니 칼을 집어 들고 자리에 일어설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장량이 끼어들며 말했다.

「패공의 참승(驂乘)25) 번쾌라는 자입니다.」

「참으로 장사로다. 그에게 한 말 들이 잔에 술을 따라주도록 하라!」

  번쾌가 감사의 절을 올리고 일어나 꼿꼿이 서서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항우가 다시 말하여 안주로 돼지 앞다리를 주도록 했다. 번쾌에게 주어진 안주는 익히지 않은 돼지 앞다리였다. 번쾌가 방패를 땅에 엎어놓고 칼을 뽑아 허벅지부분부터 잘라먹기 시작했다. 항왕이 보고 말했다.

「장사는 더 마실 수 있는가?」

「신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술 한 말 정도야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무릇 호랑이나 승냥이와 같은 진왕(秦王)이 사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할까 걱정하고, 아무리 중한 죄를 주어 죄인들을 처벌해도 그 벌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람에 천하가 모두 반기를 들게 되었습니다. 옛날 회왕(懷王)과 여러 장수들이 모두 약속하기를 ‘진나라 군대를 파하고 먼저 함양에 들어간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는다’라고 했었습니다. 오늘 패공이 먼저 진나라를 파하고 함양에 먼저 들어가서도 추호도 감히 재물을 탐내지 않고 궁실과 부고를 모두 봉한 후에 물러나 패상(霸上)에 주둔하며 대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장수 몇 사람을 함곡관에 보내 도적들의 출입을 방비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않은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온갖 고생 끝에 이룬 큰공이 이와 같음에도 아직까지 후작에 봉하여 상을 내리지 않고 있으면서 오히려 소인배들의 말에 귀를 기우려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으니 대왕께서는 삼가 그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항왕이 미처 번쾌의 말에 미처 응대하지 못하다가 이내 소리쳐 자리에 앉으라고 명했다. 번쾌가 장량 곁에 앉아 좌정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패공이 변소에 간다며 자리에 일어나면서 번쾌를 불러 같이 밖으로 나갔다.

  패공이 연회장을 빠져나가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자 항왕이 도위(都尉) 진평(陳平)을 시켜 자리에 돌아오도록 시켰다. 패공이 번쾌를 향해 말했다.

「지금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연회장을 떠나니 후에 후환이 있지 않겠는가?」

「크게 행하는 일은 세세한 몸가짐은 신경 쓰지 않으며, 큰 예절은 조그만 비난은 감수하는 법입니다. 지금 사람이 바야흐로 도마 위에 놓여져 어육이 되려고 하는 마당인데 어찌 인사드리지 못할 일을 걱정하십니까?」

  이에 패공이 자기 진영으로 가려고 하면서 장량에게 자기 대신 항왕에게 인사를 대신 올려달라고 말했다. 장량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이곳에 오실 때 어떤 예물을 들고 오셨습니까?」

「항왕을 위해서는 백벽 한 쌍을, 아부를 위해서는 옥으로 만든 주기(酒器) 한 쌍을 가져 왔으나 그들이 노하는 바람에 감히 바치지 못했소. 공은 나를 대신하여 그것들을 바치기 바라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당시 항왕의 군진은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군진은 패상(霸上)에 있어 서로 40여 리 떨어져 있었다. 패공은 항우에게서 몸을 빼내어 수레에서 떼어낸 말을 타고 자기 군진으로 달아났다. 번쾌(樊噲), 하후영(夏侯嬰), 근강(靳强), 기신(紀信) 등 4명의 장수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말을 탄 패공의 뒤를 도보로  따랐다. 패공의 일행은 이윽고 여산(驪山)을 돌아 지양(芷陽 :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패상으로 가는 소로가 시작되는 곳이다.)에 당도했다. 패공이 항우의 군진을 빠져 나올 때 장량에게 말했었다.

「여기서부터 우리 진영이 있는 곳까지는 불과 20여 리에 불과하오. 우리가 진영에 무사히 당도했을 때쯤에서 공께서는 항왕의 군중에 들어가 고하시기 바랍니다.」

  패공은 소로를 이용하여 패상의 군진으로 돌아가고, 장량은 다시 홍문의 연회장으로 들어가 항우를 접견하며 말했다.

「패공께서는 취기를 이기지 못해 인사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삼가 신에게 백벽 한 쌍을 주어 대왕께 바치고, 다시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

  항왕이 물었다.

「지금 패공은 어디에 있소?」

「패공은 대왕께서 지나치게 자신을 책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한 나머지 혼자 몸으로 몸을 빼내어 이미 자기 군중으로 돌아갔습니다.」

  항왕이 장량에게서 벽백을 받아 상좌에 놓았다. 아부(亞父)가 옥잔을 받아 땅에 놓고는 칼을 빼어 옥잔을 쳐 깨뜨리며 말했다.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패공은 자기 진영에 돌아가 조무상을 잡아서 죽였다.

  며칠 후에 항우는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함양으로 들어가 성중의 백성들을 모두 도륙하고, 항복한 진왕 자영(子嬰)을 죽였다. 이어서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질렀다. 궁궐을 태우는 불길은 3개월이 지나도록 꺼지지 않았다. 이윽고 항우는 진나라의 보물과 부녀자들을 취하여 동쪽으로 물러갔다. 어떤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관중은 험산과 큰 강에 의지할 수 있고, 땅은 비옥하여 패왕의 도성으로 삼을 만합니다.」

  진나라의 궁실이 모두 타버려 폐허가 된 모습을 본 항우는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말했다.

「부귀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비단옷을 입고 밤중에 걷는 것과 같을 것이다.」26)

  그 사람이 듣고 말했다.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관을 쓴 원숭이와 같다.’27)고 하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구나!’」

  항왕이 전해 듣고 그 사람을 잡아와 가마솥에 삶아 죽였다.

  항왕이 이윽고 초회왕에게 사자를 보내 관중의 처분에 대한 명을 물었다. 회왕은 옛날에 행한 약속대로 행하라고 했다. 항왕은 즉시 회왕을 의제(義帝)로 올렸다. 항왕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먼저 제후들과 장상들을 불러 말했다.

「천하에 란이 일어나자 제후들을 임시로 세운 다음 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손에는 예리한 무기를 단단히 붙잡은 다음 의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풍찬노숙하면서 3년만에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이 항적(項籍)과 함께한 여러 장상(將相)과 제군들이 힘써 노력한 덕분이다. 이 일에 있어서 의제(義帝)는 아무런 공도 세운 바가 없으니 내가 마땅히 땅을 나누어 공이 있는 사람들을 왕으로 삼아야 하겠다.」

  제장들이 모두 찬성하며 기뻐했다. 곧이어 천하를 나누어 제장들을 제후 왕으로 봉했다.

  항왕과 범증은 패공이 천하에 뜻을 두고 있다고 의심은 하였으나 홍문(鴻門)의 연(宴)에서 이미 화해를 맺어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자기들이 제후들과 한 약속28))을 위반함으로 해서 제후들이 반할까 두려워하여 음모를 꾸며 말했다.

「파(巴)와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이 험하여, 진나라의 죄인들을 모두 옮겨 살도록 하면 약속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제후들에게 공표했다.

「파와 촉 두 땅도 역시 관중에 속한 땅이다.」

  다시 그 이유를 달아 패공을 한왕(漢王)에 봉하여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원래의 관중(關中) 땅은 삼분하여 진나라의 항장 세 사람에게 다스리게 하면서 한왕을 한중에 가둬두도록 했다. 항왕은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咸陽) 이서의 땅을 다스리게 하고 그 도읍을 폐구(廢丘)에 정했다29). 항왕은 옛날 역양(櫟陽)의 옥리였던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은 항량에게 덕을 베품 은혜가 있었고, 도위 동예는 원래 장한에게 권하여 초나라에 항복시킨 공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왕은 사마흔을 새왕(塞王)에 봉하고 함양 이동에서 하수까지 다스리게 하고 그 도읍을 역양(櫟陽)에 두고30), 동예는 책왕(翟王)에 봉하고 상군(上郡)을 다스리며 그 도읍을 고노(高奴)에 두도록 했다.

  위왕(魏王) 표(豹)를 서쪽으로 옮겨 하동(河東)을 다스리게 하고 도읍을 평양(平陽) 두도록 했다.

  장이(張耳)의 총신이며 하구(瑕丘 : 지금의 산동성 연주시(兗州市) 경내)의 현령이었던 신양(申陽)은 옛날 그가 하남군(河南郡)에 있을 때 초군을 하상(河上)에서 맞이한 공로가 있음으로 하남왕에 봉하고 도읍을 낙양(駱陽)에 정하게 했다.

  한왕(韓王) 성(成)은 원래 한나라의 옛 영토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대로 그 땅에 봉하고 양책(陽翟)31)을 도읍으로 삼게 했다.

  조나라 장군 사마앙(司馬卬)은 하내(河內)32)를 평정하여 공을 세웠음을 들어 은왕(殷王)에 봉하여 하내를 다스리게 하고 조가(朝歌)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조왕(趙王) 헐(歇)은 그 봉지를 대(代)로 옮겨 대왕(代王)이 되었다.

  조나라의 상국 장이(張耳)는 평소에 어진 이름이 있었고 또한 항우에게 종군하여 관중에 들어간 공로가 있었음으로 상산왕(常山王)에 봉하고 옛 조나라의 땅을 다스리게 하고 양국(襄國)33)에 도읍을 두도록 했다. 당양군(當陽君) 경포(黥布)는 초장(楚將)이 되어 초군을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며 항상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구강왕(九江王)34))에 봉하고 육(六 : 지금의 안휘성 육안현(六安縣))에 도읍을 정하도록 했다. 파군(鄱君)35) 오예(吳芮)는 백월(百越)36)의 백성들을 이끌고 달려와 제후들을 돕고 계속해서 관중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이에 오예를 형산왕(衡山王)에 봉하고 주(邾 : 지금의 호북성 황강현 서북)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의제(義帝)의 상주국(上柱國)인 공오(共敖)37)는 남군(南郡)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이에 공오를 임강왕(臨江王)에 세우고 강릉(江陵)에 도읍을 두도록 했다. 연왕(燕王) 한광(韓廣)은 요동(遼東)으로 옮겨 요동왕(遼東王)에 봉했다.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초군을 돕고, 계속해서 관중까지 뒤따른 연나라 장수 장도(臧荼)를 연왕에 봉하고 계(薊)에 그 도읍을 정하게 했다. 

  제왕(齊王) 전불(田巿)을 교동왕(膠東王)에 옮기고, 제왕의 자리에는 전도(田都)를 봉하고 치소를 임치에 두게 했다. 전도는 항우를 위해 제장(齊將)이 되어 제후군과 함께 조나라를 구원하고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 전안(田安)은 항우가 하수를 건너 조나라를 구하려고 할 때 그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제북(濟北)의 여러 성을 함락한 다음 그 군사들과 함께 항우에게 투항해 왔음으로 제북왕(濟北王)에 봉하고 그 도읍을 박양(博陽)이 두게 했다. 전영(田榮)은 여러 번에 걸쳐 항량의 뜻을 거스르고, 이어서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는데 그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초군을 돕지 않았음으로 봉지를 주지 않았다.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장수의 인장을 버리고 숨어버려38) 제후군의 뒤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평소에 그가 현인이라는 명성을 얻었었고, 조나라를 세우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남피(南皮)에 살고 있던 그에게 주위의 3개 현을 봉지로 주었다. 그리고 파군(鄱君)의 장수 매현(梅鋗)은 세운 공을 기려 10만 호의 제후로 봉했다. 항우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고 9개의 군을 봉지로 삼으며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정했다.39)

  한(漢) 원년 4월40) 제후들에 대한 작위 수여를 마친 항우는 그 휘하의 군사들을 희수(戱水) 강안에서 해산하여 각기의 봉지로 돌아가 제후왕으로 취임하도록 했다. 항왕은 관중에서 나와 팽성으로 가는 중에 의제(義帝)에게 사자를 보내 그를 다른 곳으로 옮겨 살도록 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왕(帝王)들은 모두가 사방 천리 되는 땅을 흐르는 강의 상류에 살았습니다.」

  항우는 계속해서 의제에게 사자롤 보내 장사(長沙)의 침현(郴縣)으로 행차하기를 재촉했다. 이에 군신들은 점점 의제를 배반하고 그 곁을 떠났다. 이어서 항우가 비밀리에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와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에게 령을 내려 의제를 장강 가운데에서 죽였다.41) 한왕 성(成)이 진나라를 멸하는데 아무런 공을 세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 항우는 그를 봉지로 보내지 않고 팽성으로 데려간 후에 왕에서 폐하고 후(侯)로 강등했다가 다시 얼마 후에 죽였다. 장도(臧荼)는 자신의 봉국으로 가서 원래의 연왕 한광(韓廣)을 요동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한광이 듣지 않았다. 이에 장도는 한광을 공격하여 무종(無終)에서 죽이고 그의 봉지를 자기의 땅에 보탰다.

  항우가 제왕 전불을 교동왕으로 옮기고, 제장(齊將) 전도를 제왕(齊王)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들은 전영(田榮)은 대노하여 항우의 조치에 승복하지 않았다. 전영이 즉시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전도를 공격하자 전도는 초나라로 달아났다. 항우를 두려워한 제왕 전불은 몰래 달아나 교동왕이 되려고 하였다. 이에 노한 전영이 전불을 추격하여 즉묵(卽墨)에서 죽였다. 전영은 자립하여 제왕이 되고 이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공격하여 죽였다. 전영은 삼제(三齊)를 망라한 제왕(齊王)이 되었다. 전영이 팽월(彭越)에게 장군의 인장을 주고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진여가 몰래 장동(張同)과 하열(夏說)을 보내 제왕 전영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도록 했다.

「천하를 주재하고 있는 항우는 공정하지 못합니다. 지금 옛날의 제후왕들을 나쁜 땅으로 옮기도록 하고, 자기 밑의 신하와 장수들을 그곳의 좋은 땅에 봉했습니다. 원래 조나라 군주였던 조왕(趙王)을 쫓아내어 그로 하여금 북쪽의 험지인 대(代) 땅에 살게 한 일을 이 진여는 승복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들으니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시고, 또한 의롭지 않은 일을 따르지 않으신다고 하니 원컨대 이 진여를 도우시어 상산(常山)을 공격하여 하여 조왕의 옛날 땅을 찾게 하심으로써 조나라를 제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번국(蕃國)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제왕 전영이 진여의 청을 허락하고 진여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이에 진여는 휘하 삼 개 현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제나라 군사와 함께 상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장이는 달아나 한왕(漢王)에게 투항했다. 진여는 대(代) 땅에서 조왕 헐(歇)을 맞아들여 조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조왕은 이에 진여를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이때 한왕(漢王) 유방은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다시 평정했다. 이미 관중(關中)을 점령한 한왕은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한편 제(齊)와 조(趙)가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팽성의 항우(項羽)는 크게 분노했다. 이에 항우는 즉시 오현(吳縣)의 현령(縣令)이었던 정창(鄭昌)을 한왕(韓王)으로 삼아 한왕(漢王)의 동진을 막도록 명하고 다시 소공각(蕭公角) 등에게는 양나라에서 반기를 든 팽월(彭越)을 공격하도록 했다. 팽월은 소공각이 이끄는 초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한왕 유방이 장량으로 하여금 한(韓)나라 땅을 순시토록 하면서 항왕에게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했다.

「한왕 유방이 원래의 봉지를 잃어, 이에 지금 그 땅의 왕이 되려고 합니다. 만약에 유방을 관중에 봉해 준다면 동쪽으로의 진격을 멈추겠습니다.」

  다시 유방이 제와 조 두 나라의 반란을 알리는 사자를 항우에게 보내면서 말했다.

「제나라가 조나라와 힘을 합쳐 초나라를 멸하려 하고 있습니다.」

  항우가 서쪽으로 나가 한왕 유방을 공격하려는 생각을 멈추고 북쪽의 제나라로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이에 구강왕 경포에게 군사를 데리고 종군할 것을 명했으나, 경포는 병이 났다고 하면서 오지 않고, 단지 휘하 장수로 하여금 수 천 명의 군사만을 보내왔다. 항우는 이로써 경포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한(漢) 2년 기원전 205년 겨울, 항왕이 거느린 초군이 성양(城陽)에 이르자, 제왕 전영 역시 제군을 이끌고 나와 초군과 조우했다. 양군이 회전에 들어가 초군이 제군을 크게 물리쳤다. 싸움에서 패한 전영은 평원(平原)으로 달아났다. 평원의 백성들이 전영을 죽였다. 항우는 계속 북진하여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불살르고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어 죽였다. 그리고는 노약자나 부녀자들은 밧줄에 묶어 포로로 삼았다. 항우가 계속 북진하여 북해에 이르는 동안 도중의 많은 고을의 백성들을 몰살시켰다. 이에 초군의 만행에 분개한 제나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들어 반기를 들었다. 이때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도망병 수만 명을 수습하여 성양에서 몸을 일으켰다. 항왕이 제 땅에 남아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한(漢) 3년 봄, 한왕(漢王)이 다섯 제후들42)의 군사들을 모두 합한  56만 명을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계속 공격하도록 하고 자기는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노현(魯縣 :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경내)을 지나 호릉(胡陵 :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으로 나왔다. 4월 한왕(漢王)이 이미 팽성(彭城)에 들어가 그곳의 보물들과 미인들을 모두 거두고, 이어서 매일 주연을 열어 빈객들과 즐겼다. 이에 항우는 새벽에 서쪽의 소현(蕭縣)에서 출발하여 한군을 공격하면서 계속해서 동진하여 팽성에 이르고 정오 무렵에는 한군과 싸워 크게 무찔렀다. 한군은 무너져 모두 앞서기니 뒤서거니 도망치다가 곡수(穀水 : 팽성(彭城)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합류하는 회수의 지류)와 사수(泗水)43)에 빠졌다. 항우는 이 싸움에서 한군 10여 만을 죽였다. 모두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의 패잔병을 초군이 뒤를 추격하여 영벽(靈壁 :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서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렀다. 한군은 퇴각하여 초군에게 쫓기게 되자 수많은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중에 10여 만의 군졸들은 수수로 뛰어 들었다. 이로써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윽고 초군이 한왕이 속한 군대를 삼중으로 포위했다. 그때 갑자기 초군의 서북쪽에서 나무를 부러뜨리고 가옥을 날려버리는 큰바람이 일어나더니 모래와 돌을 날리며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지며 초군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초나라 진영은 대 혼란에 빠져 전열이 흩어졌다. 한왕은 그 틈을 타고 휘하의 장수 수십 기와 함께 간신히 몸을 빼내 달아날 수 있었다. 이에 한왕은 그의 가족들을 모두 거두기 위해 패현(沛縣)을 거쳐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항우도 역시 사람을 패현으로 보내 한왕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왕의 가족은 모두 달아난 후라 한왕도 그 가족들을 말날 수 없었다. 한왕이 도망치던 중에 어린 나이의 효혜(孝惠)와 노원(魯元)을 만나 모두 자기의 수레에 태우고 행진을 계속했다. 이윽고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한 한왕은 효혜와 노원을 수레에서 밀어서 떨어뜨렸다. 이에 수레를 몰던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이 수레를 멈추고 두 아이를 주어서 다시 태우기를 세 번이나 걸쳐서 했다. 하우영이 한왕을 보고 말했다.

「비록 사태가 급박하다 하여 수레를 빨리 몰 수 없다고 하지만, 어찌 두 아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이윽고 한왕의 일행은 초군의 추격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는 찾을 수 없었다. 태공과 여후를 호위했던 심이기(審食其)는 한왕을 찾으러 다니다가 오히려 초군을 만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초군은 팽성으로 돌아가 태공 일행을 항우에게 바쳤다. 항우는 그들을 휘하의 군중에 두며 데리고 다녔다.

  그때 여후의 오빠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이 한나라를 위해 군사를 이끌고 하읍(下邑 :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왕은 샛길을 이용하여 그에게 달려가 몸을 의탁하고 있으면서 조금씩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이윽고 한왕이 형양(滎陽)에 이르자 한나라의 패잔병을 모두 다시 모을 수 있었다. 소하(蕭何) 역시 전적에도 없는 관중의 노약자들을 모두 징발하여 형양으로 끌고 오자 한군의 위세는 다시 크게 일어났다. 초군이 팽성에서 나와  한군과 싸워 승승장구하다가 이윽고 형양의 남쪽 경읍(京邑)과 색읍(索邑)44) 사이에서 크게 싸웠다. 한군이 초군을 패퇴시키자 이에 초군은 더 이상 형양을 지나 서쪽으로 진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항왕이 팽성을 구하고 다시 한왕의 뒤를 추격하여 형양으로 나아가자 그 틈을 이용한 제나라의 전횡은 제나라의 대부분 땅을 수복하고 전영(田榮)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웠다. 제후들은 모두 팽성의 싸움에서 패배한 한왕을 배반하고 항우에게 붙었다. 한군이 형양에 주둔하면서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건설하고 오창(敖倉)45)으로부터 양식을 실어 날라 먹었다. 이에 항왕이 여러 차례 한나라의 용도를 공격하여 양식을 빼앗아 가자 한군은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를 두려워한 한왕은 항우에게 강화를 청하여 형양의 이서 지역을 한나라 영토로 삼으려고 했다.

  항우가 한왕의 청을 허락하려고 하자 역양후(歷陽侯) 범증(范增)이 간했다.

「지금이야말로 한왕을 처치하기가 가장 용이할 때입니다. 만약에 지금 그를 놓아주어 취하지 않는다면 후에 필시 후회막급일 것입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대로 강화를 포기하고 형양의 포위망을 더욱 압박하며 세차게 공격했다. 이를 두려워한 한왕은 진평의 계책을 받아들여 항우와 범증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이간책을 사용했다. 항우의 사자가 한왕의 진영에 당도했을 때 태뢰(太牢)의 예로 성대하게 준비한 음식을 차리게 했다가 이윽고 사자가 연회석에 당도하자 한왕이 갑자기 거짓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범아부(范亞父)의 사자인 줄 알았더니 뜻밖에 항왕의 사자였구려!」

  이어서 한왕이 시자들을 불러, 들여오던 음식을 가져가도록 하고 항왕의 사자를 위해서 간단하게 차린 음식을 들여오도록 명했다. 사자가 돌아와 그 일을 고하자, 항우는 범증이 한나라와 비밀리에 내통하고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기 시작하여 범증의 권력을 서서히 빼앗았다. 범증이 대노하여 항우에게 말했다.

「천하의 일은 이미 정해져, 이제는 군왕께서 스스로 일을 헤쳐 나가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저의 늙은 몸을 자유롭게 해 주시어 고향 땅에 돌아가 평민 속에 섞여 살게 해주시기 바랍니다.」46)

  항왕이 허락했다. 범증이 팽성을 향해 돌아가던 중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한나라 장수 기신(紀信)이 한왕에게 말했다.

「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제가 대왕으로 분장하여 초왕을 속여 보겠습니다. 그 사이 대왕께서는 초군의 포위망를 뚫고 몸을 빼내 성을 나가십시오.」

  이윽고 한왕이 형양성의 동문으로 갑옷을 입은 여인들 2천 명을 내보내자 초군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공격했다. 기신(紀信)이 좌독(左纛)47)을 꽂은 황옥거(黃屋車)48)를 타고 나오면서 말했다.

「성중의 양식이 모두 떨어져, 항왕에게 항복을 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초군은 모두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그때 한왕 역시 수십 기(騎)의 기병과 함께 형양(滎陽)의 서쪽 문을 통해 나와 성고(成皐)를 향해 도망쳤다. 이윽고 항왕이 한왕으로 위장한 기신을 보더니 물었다.

「한왕은 어디에 있는가?」

「한왕은 이미 성을 빠져나가 멀리 있습니다.」

  항우가 기신을 불에 태워 죽였다.

  한왕이 탈출할 때 어사대부 주가(周苛), 종공(樅公)에게 위왕(魏王) 표(豹)와 함께 형양성을 지키도록 했다. 주가와 종공이 모의했다.

「나라를 배신한 적이 있는 자와 함께 어떻게 성을 지킬 수 있겠는가?」49)

  두 사람이 즉시 위표를 죽였다.

  이윽고 초군이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주가와 종공을 생포했다. 항우가 주가를 보고 말했다.

「나의 장수가 되어 준다면, 나는 그대를 상장군으로 삼고 3만 호의 제후로 봉하겠다.」

  주가가 항우를 큰소리로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빨리 한왕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한군은 조만간에 너를 포로로 할 것이다. 너는 한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항우가 노하여 주가를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고 종공도 같이 죽였다.

  형양성을 나온 한왕은 남쪽으로 달아나 완(宛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에 완성구(宛城區)라고 있다)과 섭(葉 : 하남성 섭현(葉縣) 경내 남)으로 가서 구강왕 경포(黥布)를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같이 군사를 모은 후에 다시 성고(成皐)로 들어가 지키려 했다.

  한왕 4년, 기원전 203년,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성고를 포위했다. 한왕이 등공(滕公) 하후영(夏侯嬰)만을 데리고 성고 북문으로 탈출하여 황하를 건너 수무(修武 : 지금의 하남성 획가현(獲嘉縣) 소수무(小修武)다.)로 달아나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에게 몸을 의탁했다. 여러 장수들이 하나 둘씩 성고를 탈출하여 한왕과 합류했다. 얼마 후에 초군이 성고를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한왕이 군사를 공성(鞏城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 경내 서쪽 낙수(洛水) 서안에 있는 고을이다.)으로 보내 초군의 서진을 저지하도록 했다.

  한편 팽월은 하수를 건너 초나라의 동아(東阿)50)를 공격하여 초장 설공(薛公)을 죽이고 초군을 크게 무찔렀다. 항우가 즉시 동쪽에서 나와 팽월을 공격했다. 수무로 간 한왕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의 군사를 빼앗아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정충(鄭忠)이 한왕을 설득하여 그의 남진을 하내(河內)에서 멈추게 하고 그곳에 방벽을 쌓게 했다. 이어서 유고(劉賈)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가 팽월(彭越)을 도와 초군의 군량을 불태우도록 했다. 이에 항우가 군사를 움직여 동쪽으로 나가  팽월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이틈을 탄 한왕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남진하여 성고(成皐)를 다시 취하고 광무(廣武 :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이다.)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糧食)을 확보했다. 동해(東海)를 평정한 항우가  서쪽으로 나와 광무(廣武)에 진을 치고 한군과 수 개 월 동안 대치했다.

  그때 양나라 땅에서 팽월이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초군의 양도(糧道)를 끊었음으로 이를 매우 근심한 항우가 큰 도마를 만들어 그 위에 태공(太公)을 올려놓고 사자를 한왕에게 보내 통고했다.

「지금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태공을 가마솥에 삶아 죽이겠다.」

  한왕이 대답했다.

「나와 항우는 옛날 회왕에게 북면하며 명을 받을 때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래서 나의 부친은 항우의 부친이 되었다. 항우가 기어코 그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면, 그때 나에게도 그 국 한 사발을 나누어 보내주기 바란다.」

  항우가 노하여 태공을 죽이려 하자 그 숙부인 항백(項伯)이 말했다.

「지금 천하의 일이 어찌 될지 아직 알 수가 없고, 또한 천하를 도모하는 자는 그 집을 돌보지 않는 법이니 비록 한왕의 아비를 죽인다 한들 실익은 별로 없고 오히려 화만 더할 뿐이다.」

  항우가 항백의 말을 따라 생각을 바꿔 태공을 죽이지 않았다.

  한군과 초군이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면서 승부를 결하지 못하자 젊은 군사들은 군역에 시달림을 받았고, 노약자들은 수륙(水陸)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지치게 되었다. 이에 항우가 한왕에게 사자를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천하가 여러 해 동안 흉흉하게 된 원인은 오로지 우리 두 사람 때문이다. 원컨대, 나와 한왕이 싸워 자웅을 결한다면 천하의 백성들과 그 자제들이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에 한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단지 지혜로써 싸울 수 있을 뿐이지 힘으로는 싸울 줄 모른다.」

  항왕이 군중에서 선발한 장사를 출전시켜 싸움을 걸도록 했다. 그때 한군의 진영에 활을 잘 쏘아 누번(樓煩)51)이라고 칭하는 군졸이 있었다. 초나라 장사가 세 번이나 한군 진영 앞으로 나와 싸움을 걸어오자 누번이 재빨리 나가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항왕이 대노하여 몸에 갑옷을 걸치고 극을 손에 들고 나와 누번에게 싸움을 걸었다. 누번이 항왕을 향해 활을 쏘려고 하자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누번을 꾸짖었다. 누번은 감히 항우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손으로는 활을 잡아당길 수도 없어 마침내는 한군의 보루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한왕이 사람을 시켜 초나라의 장사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하자 그가 곧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이에 항우가 한왕의 진영과 가까운 광무(廣武)로 나아가 서로 마주보며 말을 나누었다. 한왕이 10가지에 걸친 항왕의 죄목을 열거했다.52) 항우가 노하여 두 사람이 결투를 하자고 청했다. 한왕이 거절하자 항우가 몰래 숨겨 가지고 간 쇠뇌를 쏘았다. 한왕이 항우가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달아나 성고(成皐)의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회음후 한신이 하북을 점령한 다음 제(齊)와 조(趙) 두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항우는 부하 장수 용저(龍且)를 보내어 그의 진격을 막게 했다. 한신의 기병대장 관영(灌嬰)이 초군을 공격하여 용저를 죽였다. 한신은 이로써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었다. 용저의 군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매우 두려워하며 우이(盱眙) 사람 무섭(武涉)을 한신에게 보내 천하를 셋이서 삼분하자고 설득하게 했다. 한신이 듣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다시 일어나 양나라 땅을 차지하고 초군의 양도를 끊었다. 항우는 해춘후(海春侯) 대사마(大司馬) 조구(曹咎)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장군은 이 성고(成皐)를 조심해서 지키기만 하시오. 아무리 한군이 도발을 해와도 결코 응전하지 말고 단지 그들이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기만 하시오. 내가 15일 내에 반드시 양나라 땅을 평정하고 팽월을 죽이고 장군과 합류하겠소.」

  항우는 즉시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다. 그러나 외항은 쉽게 함락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항복했다. 항왕이 노하여 외항의 15세 이상 되는 성인 남자 모두를 성의 동쪽 끝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라고 명했다. 당시 외황(外黃)의 현령(縣令) 문객들 중에 13살 난 아들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가 항우를 찾아가 말했다.

「외황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범하려는 강포(强暴)한 팽월에게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항왕이 동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외황의 백성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는 생각을 거두고 용서했다. 이윽고 항우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하자 외항과 수양(睢陽)에 이르기까지의 성읍에 사는 양나라의 백성들은 소문을 듣고 모두 다투어 항복해 왔다.

  한편 한군이 성고를 나와 초군을 향해 도전해 왔으나 초군 진영에서는 응하지 않았다. 한군이 5-6일 동안 계속해서 군사를 보내어 초군 진영에 욕을 해대니 이윽고 대사마 조구가 격분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와 사수(汜水)를 건너 한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초나라의 군사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한군이 일어나 공격했다. 한군이 초군을 크게 무찌르고 그들의 양식과 기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사마 조구, 장사 동예(董翳),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등의 초나라 장수들은 사수 가운데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대사마 조구와 장사 사마흔 두 사람은 원래 기현(蘄縣)과 역양(櫟陽)의 옥리로 있던 중, 항량(項梁)에게 덕을 베푼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항우의 신임을 받고 중용된 것이다. 그 당시 수양(睢陽)에 있던 항우는 조구가 한군과의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팽월과의 싸움을 멈추고 군사를 이끌고 형양의 초나라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때 한군은 종리매(鍾離眛)를 형양의 동쪽에서 포위하고 있었다. 이윽고 항우가 당도하자 초군을 두려워한 한군은 모두가 달아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때 한나라 진영은 오창(敖倉)으로 인해 식량이 풍부했으나 항우의 초군은 오랫동안의 싸움에 지치고 군량의 공급도 양도가 끊겨 충분치 않았다. 이때 한왕이 육고(陸賈)를 항우에게 보내 태공을 풀어주라고 청했으나 항우가 듣지 않았다. 다시 한왕이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항우가 허락하여 협약을 맺고 태공과 한왕의 가족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었다. 이에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한왕은 후공을 평국군(平國君)에 봉했으나 그로 하여금 은둔해서 살게 하고 두 번 다시는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다.53)한왕이 후공에 대해 말했다.

「그는 천하의 변사(辯士)라, 그가 거하는 나라는 모두 망하게 만들  것이다. 이에 내가 그의 봉호를 평국군이라고 했다.」

  한왕과 협약을 맺은 항우는 제후들의 군사들을 해산한 다음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갔다. 

  한왕도 역시 서쪽의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량과 진평이 말했다.

「한나라가 천하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고 제후들도 모두 우리에게 귀의했습니다. 더욱이 초나라의 군사들은 피로하고 양식은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초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하늘의 뜻입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천하의 나머지 반인 초나라 땅을 차지하십시오. 오늘 초왕을 놓아주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이른바 호랑이를 길러 화를 키우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한왕이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

  한왕 5년 기원전 202년 한왕은 즉시 항우의 뒤를 추격하여 양하(陽夏 : 지금의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경내)에 이르러 진영을 세우고 제왕 한신과 양왕 팽월의 군대와 합세하여 초군을 협격하기 위해 기일을 정해 약조했다. 그러나 한군이 고릉(固陵 :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경내 남)에 이르렀음에도 두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초군이 한군을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한왕이 다시 보루에 들어가 참호를 깊이파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한왕이 장량을 불러 물었다.

「제후들이 약조를 따르지 않으니 이제 어쩌면 좋겠소?」

「초나라 군사들과 싸워 이겼음에도 아직 한신과 팽월에게 땅을 떼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대왕께서 그들과 함께 천하를 같이 나눈다고 하면 그들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면 앞으로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진현(陳縣) 이동부터 동해에 이르는 땅은 한신에게 주시고, 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남) 이북에서 곡성(穀城 : 지금의 산동성 평음현(平陰縣) 동아진(東阿鎭))까지는 팽월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해 싸우게 한다면 초군을 격파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이에 한왕이「좋소!」 라고 대답했다.


 

四面楚歌(사면초가)


 

  이윽고 한왕이 사자를 한신과 팽월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해준다면 진현(陳縣) 이동부터 바닷가에 이르기까지의 땅은 제왕(齊王)에게 주고, 수양(睢陽) 이북에서 곡성에 이르기까지는 팽상국(彭相國)54)에게 주겠소!」

  한왕의 사자가 당도하자 한신과 팽월 두 사람은 모두 대답했다.

「청컨대 지금 군사를 내어 진격하고자 합니다.」

  한신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제에서 나오고 유고는 수춘(壽春)에서 진격하여 성보(城父 : 안휘성 박현(亳縣) 동남의 수춘(壽春) 서북)를 도륙한 후에 한신군과 합류하여 해하(垓河 : 지금의 안휘성 영벽현(靈璧縣) 동남)에 당도했다.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이 초나라를 배신하고 서(舒) 땅의 군사를 이끌고 육(六)을 도륙하고, 이어서 구강(九江)의 모든 병졸들을 규합하여 팽월을 따라 해하로 진격했다. 한왕(漢王)에게 속한 모든 제후군은 항우를 향해 진격하여 해하에 집결했다.

  항우는 해하에 보루를 구축하고 주둔하고 있었으나 군사는 적고, 양식은 다한 상태에서 한군과 제후군들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당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군이 사방에서 초가(楚歌)를 불렀다. 항우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항우는 한 밤중에 일어나 장중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는 우(虞)라는 미인을 사랑하여 싸움 중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추(騅)라는 준마가 있었는데 항상 타고 다녔다. 이에 항우는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力拔山氣蓋世 (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나약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할거나!


 

  항우가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미인도 따라 같이 불렀다. 항우의 뺨에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

  이윽고 항왕이 말에 올라타니 휘하의 부하 장사들 중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그날 밤 곧바로 한군의 포위망을 남쪽에서 뚫고 달아났다. 날이 밝자 한군은 비로소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기병대장 관영(灌嬰)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를 수 있는 군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항우의 일행이 음릉(陰陵 :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서북)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고 밭을 가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가 항우를 속여 왼쪽이라고 가르쳐줬다. 항우의 일행은 결국은 커다란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한군은 항우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항우가 즉시 일행과 함께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따르는 군사들은 겨우 28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수천의 한나라 기병이 항우의 뒤를 계속 추격했다. 한군의 추격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가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겨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나의 힘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다. 그렇게 해서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이 알게 해주겠다.」

  항우는 그를 따르던 기병을 4대로 나누어 네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그때 한군은 항우와 그 일행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항우가 그 기병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저 한군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가 그 수하 기병들에게 사면으로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게 되면 산 너머 동쪽의 세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항우가 드디어 큰 고함소리를 지르며 한군을 향해 돌격하자 한군은 모두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지리멸렬했다. 항우가 그 와중에 한군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다. 그때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가 기병대장이 되어 항우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항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적천후를 꾸짖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가 그 기병들과 함께 약속한  세 곳에서 만났다. 한군은 항우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추격군을 3대로 나누어 초군이 달아난 곳을 멀리서 포위했다. 항왕이 다시 한군을 향해 돌격하여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백여 명의 군사들 죽였다. 초군이 다시 모이니 그 중 죽은 군사는 단지 2명에 불과했다. 항우가 그 군사를 향해 물었다.

「자 내가 한 말이 어떠냐?」

  항우의 군사들이 모두 말했다.

「과연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왕은 계속 남쪽을 도망쳐 이윽고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오강의 정장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에게 말했다.

「강동(江東)55)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수효가 수십 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십시오.  이 강안에는 오직 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겁니다.」

  항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 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우가 계속해서 정장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장자(長者) 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

  항우가 이어서 그 부하들에게 모두 말을 버리고 걷도록 하고 손에는 짧은 무기만을 들고 한군을 향해 돌격했다. 항우 혼자만 죽인 한군의 숫자는 수백 인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 자신도 역시 몸에 십여 군데에 부상을 입었다. 항우가 지쳐서 앉아 있다가 한군의 기사마(騎司馬)56)인 여마동(呂馬童)을 보더니 소리쳤다.

「너는 옛날 내 부하였던 놈이 아니더냐?」

  여마동이 항우와 얼굴을 마주치자 곁의 왕예(王翳)를 향해  손가락으로 항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항왕(項王)이다.」

  그러자 항왕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항우가 말을 마치고 곧바로 쥐고 있던 단검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달려가 항우의 목을 취하자 여러 기병들이 달려들어 서로 짓밟으며 항우의 시신을 다투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마지막에 가서 낭중기(郎中騎)57) 양희(楊喜),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 낭중(郎中)58) 여승(呂勝), 기병(騎兵) 양무(楊武) 등이 각기 항우의 시체를 갈라 하나씩 차지했다. 그 다섯 사람이 모여 항우의 조각 난 시체를 맞춰보니 일치했다. 이에 항우에게 걸었던 만 호의 봉지는 모두 다섯으로 나누어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 : 지금의 하북성 헌현(獻縣) 서북)에, 왕예는 두연후(杜衍侯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남)에, 양희는 적천후(赤泉侯)59)에, 양무는 오방후(吳防侯 : 지금의 하남성 수평현(遂平縣) 경내)에, 여승은 열양후(涅陽侯 :지금의 하남성 진평현(鎭平縣))에 각각 봉했다.


 

  항우가 죽자 초나라의 남은 땅은 모두 항복을 했으나 오직 노현(魯縣)만은 그러지 않았다. 한왕이 휘하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노현의 백성들을 모두 도륙하려고 했다. 그러나 노현의 백성들은 예와 의를 지키며 그들의 주인을 위해 지조를 시켜 목숨을 바치려고 했음으로 한왕은 마음을 바꿔 항우의 머리를 가지고 노현의 백성들에게 보이며 항복을 권유했다. 이윽고 노현의 백성들이 한나라에 항복했다. 원래 초회왕이 기의할 때 항우를 노현에 봉했기 때문에 그가 죽었지만 항복을 하지 않은 이유는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노현의 백성들은 항우를 노공(魯公)의 예로 곡성(穀城)에 장사지냈다. 한왕이 항우를 위해 발상하고 그 빈소에서 흐느껴 울고는 돌아갔다.

  한왕은 여러 항씨 종족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항백은 사양후(射陽侯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회안현(淮安縣) 경내)에 봉했고, 도후(桃侯)60)122), 평고후(平皐侯)61), 현무후(玄武侯 : 미상이다.) 등도 모두 항씨로 후에 유씨(劉氏) 성을 하사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주생62)이「순임금의 눈동자는 두 개였다.」라고 한 말을 들었다. 또 나는 항우의 눈동자도 두 개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어찌 항우가 순임금의 후예이겠는가? 또한 그렇지 않다면 항우가 어찌 그리 갑자기 일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진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 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이윽고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의제를 쫓아내 죽이고 자립하자 제후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서 난이 일어났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고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으니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우본기 끝》


 


 

1)항연(項燕) : 전국 말 때 초나라의 명장으로 항량(項梁)의 부친이다.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의 하상(下相) 사람이다. 진시황 23, 기원전 224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이신(李信)을 패배시키고 초나라의 남군(南郡)을 회복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진시황 24,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왕전(王翦)에 의해 그가 이끌던 초군은 대패하고 초왕 부추(負芻)는 진군(秦軍)의 포로가 되었다. 항연은 창평군(昌平君)을 형왕(荊王)으로 세우고 회남(淮南)으로 들어가 진나라에 저항을 계속했으나, 다시 다음 해에 계속된 왕전의 공격으로 창평군은 난전 중에 죽고 항연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 원래 춘추 때 지금의 하남성 심구현(沈丘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의 이름이었으나, 노희공(魯僖公) 18년 기원전 643년 노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후에 다시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3)조구(曹咎) : 진한 때 서초(西楚)의 장령이다. 진나라 말에 기현(蘄縣)의 옥리로 있으면서 항량(項梁)과 교분을 맺었다. 항량이 역양현(櫟陽縣)에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자 조구가 역양현의 옥리로 있던 사마흔(司馬欣)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풀려나도록 했다. 후에 항량이 기병하자 장군에 임명되었고, 항량의 뒤를 이은 항우의 부하가 되어 대사마의 직위와 함께 해춘후(海春侯)에 봉해졌다. 한왕(漢王) 3년 기원전 204년 항우가 팽월(彭越)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할 때 조구에게 명하여 전략상의 요충지인 성고(成皐)를 지키도록 명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03년 한군(漢軍)의 격장군계(激將軍計)에 걸려 싸움에서 지자 사마흔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사마흔(司馬欣) : 진한 교체기 때 항우가 봉한 제후왕. 원래 역양현의 옥리 신분으로 죄를 지은 항량을 체포했다가 후에 석방해 줌으로 해서 항씨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후에 장사(長史)로 승진하고 다시 장한(章邯)이 진승(陳勝)을 물리치는데 도와 공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장한과 함께 초나라에 항복하여 상장군이 되었다. 항우는 후에 점령한 관중을 삼분한 후에 그를 새왕(塞王)에 임명했다. 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점령하자 그는 초나라를 버리로 한나라에 항복했다. 곧이어 항우의 초군이 유방의 한군을 수수(睢水)의 싸움에서 대파하자 다시 항우에게 돌아갔다. 한왕 4년 기원전 204, 대사마 조구(曹咎)와 함께 성고(成皐)를 지키다가 한군에 의해 사수(汜水)에서 크게 패하자 조구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팔척 : 진한(秦漢) 때의 한 척은 23cm임으로 지금의 칫수로 말하면 역 1m 90cm 정도다.

6)강서(江西) : 구강(九江)과 남경(南京) 사이의 장강은 동북으로 꺾여 흐른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완북(晥北) 일대를 강서(江西), 완남(晥南)과 소남(蘇南) 일대를 강동(江東)이라고 칭했다.

7)환초(桓楚) : 진한교체기(秦漢交替期) 때 초나라 장령으로 오인(吳人)이다. () 이세황제 원년 기원전 209년 진섭이 일어나자 그는 도망하여 대택(大澤)으로 도망가 숨었다. 아무도 그가 있는 곳을 아지 못했으나 그가 있는 곳을 알고 있던 항우가 불러 장수로 삼았다. 2년 후인 기원전 207년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義)를 죽이고 군권을 장악한 항우가 환초를 보내 그 일을 초회왕(楚懷王)에게 고하게 했다.

8)상주국(上柱國) :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관직명. 줄여서 주국(柱國)이라고 하며 국가를 버티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원래 초나라의 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벼슬이었으나 후에 초나라 무관의 최고관직이 되어 그 지위는 영윤(令尹) 다음이었다.

9)창두(蒼頭) : 전국 때 위()나라가 용맹한 무사들로만 뽑아 구성한 부대이름으로 그 표시로 머리에 푸른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무적의 군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0)진가(秦嘉)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8년에 죽은 진한교체기의 광릉(廣陵 :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揚州市)) 출신의 기의군(起義軍) 장령이다. 진나라 이세황제 원년 기원전 209년 진승이 진나라에 대항해서 거병하자 그와 동설(董緤)은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의 동해태수 경()을 담()에서 공격했다. 진승이 무평군(武平君) ()을 보내 진가의 군사들을 통수하는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그 명을 받지 않고 스스로 대사마가 되어 무평군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진가는 무평군을 진왕(陳王)의 명이라고 빙자하여 살해했다. 다음 해에 진승이 싸움 중 전사하자 그는 다시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세우고 자기는 상장군이 되어 팽성(彭城)에 주둔했다. 이때 유방(劉邦)과 장량(張良)이 같이 와서 진가를 따랐다. 이때 하비에 주둔하고 있던 항량이 북진하려고 하자 그의 북상을 저지하려고 하던 진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진가는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다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에서 경구와 같이 싸움 중에 죽고 그 군사들은 모두 항량의 군대에 합쳐졌다.

11)원문은 自懷王入秦不反이다. 초회왕(楚懷王 :재위 전328-299)이 진소양왕(秦昭襄王)의 회맹 요청을 받아들여 기원전 299년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일을 말한다. 초회왕은 초나라의 영토를 떼어달라는 진나라의 압력을 거부했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죽었다.

12)전영(田榮) : 제나라 왕족의 후예로 육촌형인 전담(田儋)과 함께 반진군을 일으켰다. 전영은 전담을 제왕으로 세우고 제나라 땅을 근거로 삼았다. 후에 장한이 전담을 살해하자 전영은 동아로 달아났다. 제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마지막 왕 왕건(王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제왕으로 삼고, 전각(田角)을 상국에,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았다. 후에 전영이 전가를 쫓아내고,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왕으로, 자신은 상국, 전횡(田橫)을 장군으로 세웠다. 전가는 초로, 전각과 전간은 조 땅으로 달아남으로 해서 이때부터 제와 초 두 나라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13)이유(李由) : 진나라 승상 이사(李斯)의 아들로 당시 삼천군(三川郡) 태수였다.

14)여신(呂臣) : 원래 진승(陳勝)의 시종으로 진승이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사(敗死)하자 그 잔병을 수습하여 진나라에 계속 대항하다가 후에 항량에게 투항했다.

15)경자관군(卿子冠軍) : 경자(卿子)는 당시 성인 남자에 대한 존칭으로 공자(公子)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는 풍류스럽고 소탈하다는 뜻이다. 송의는 일개 서생으로 일어나서 상장군이 되었다고 해서 그의 군대를 경자관군이라고 칭한 것이다.

16)무염(無鹽) :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경내 동. 은어술(隱語術)의 대가로 제선왕(齊宣王)의 비였던 종리춘(鍾離春)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17)장사(長史) : 대장군 혹은 승상부에 속해 그 사무를 맡아보던 관리의 장을 말한다.

18)사마문(司馬門) : 궁정의 외문으로 사마가 궁궐을 수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해서 사마문이라고 불렀다..

19)백기(白起)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7년에 죽은 전국 말 진나라의 명장이다.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조나라의 항복한 45만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 파묻어 살육을 자행했다. 후에 진나라의 상국 범수(范睢)와 틈이 벌어지고 다시 소양왕의 뜻을 거슬려 자살했다.

20)유중(楡中) : 지금의 내몽고자치주(內蒙古自 治州) 준격이기(準格爾旗) 부근에 있던 요새로 유림새(楡林塞) 혹은 유구구새(楡溪舊塞)로 불리었다.

21)시성(始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7년 죽은 진나라의 장령이다. 성은 시(), 이름은 성()이다. 일설에는 이름이 시성(始成)이고 성은 실전되었다고 했다. 진한 교체기 때 장한의 부하로 군후(軍候)에 임명되었다. 군후는 적정을 정찰하거나 군사들의 군기를 담당했던 직책이다. 장한을 따라 진승(陳勝)의 반군을 진압하는데 종군했다. 거록(鉅鹿)의 싸움이래 항우군의 추격으로 벌어진 싸움에 계속 패하자 장한의 사자로 초군 진영에 가서 맹약을 맺으려 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후에 장한을 따라 항우에게 항복했다. 이윽고 항우가 신안(新安)에 이르러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일 때 같이 살해되었다.

22)삼호(三戶) : 삼호진(三戶津)이다. 장수(漳水)의 상류로 장수를 건너는 나루터가 있는 곳이다. 지금의 하북성 자현(磁縣) 서남이다.

23)희서(戱西) : 희수(戱水)의 서쪽을 말한다. 희수는 위수(渭水)의 지류로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쪽으로 흘렀다.

24)패상(霸上) : 지금의 섬서성 백록원(白鹿原) 북쪽으로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흐르는 패수(霸水)에 기인한 지명이다. 파상(灞上)이라고도 한다.

25)참승(驂乘) : 고대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그 중앙에는 말을 모는 어자(御者), 어자의 오른 쪽에는 시종이나 심부름이나 호위를 하는 사람이 타고 왼쪽에는 주인이나 장군이 탔다. 병거의 경우는 차우(車右)라 했고 수레의 경우는 참승이라 했다.

26)원문은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27)원문은 沐猴而冠耳. 돼지 발에 진주라는 말과 같다. 외관만 그럴 듯하지 속은 엉터리란 말이다.

28)원래 초회왕(楚懷王)은 제후들이 모여 진나라 토벌군을 일으킬 때 진나라에 먼저 들어간 사람을 관중의 왕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항우는 진군하면서 항복한 군사들과 성민들을 도륙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현성(縣城)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진군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남성 남쪽의 길을 취하여 무관(武關)으로 진군한 유방은 항복한 성민들을 관대하게 대하고 다시 세객들을 보내 항복을 권유해 무관을 쉽게 통과하고 함양(咸陽)의 마지막 관문인 남전(藍田)에서 진나라의 대군과 싸워 이겨 항우보다 함양성에 먼저 입성하여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뒤이어 진나라에 들어온 항우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함양성의 모든 궁궐을 불태워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29)옹왕(雍王) 장한의 관할 구역은 진나라 내사(內史)의 함양 이서와, 농서, 북지(北地) 두 군을 포함했다.

30)새왕(塞王)의 관할구역은 진나라 내사(內史)의 함양(咸陽) 이동에서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이서 및 섬서성 단강(丹江) 상류와 서안(西安) 이동의 위수(渭水) 하류지방을 포함했다.

31)양책(陽翟) : 전국 때 한 나라의 영토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일대다. 우왕(禹王)이 세운 하()나라의 도읍이었다. 춘추 때는 정나라 땅으로 역읍(櫟邑)이었다가 전국 때 한나라 령이 되어 양책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진나라의 문신후 여불위(呂不韋)는 이곳 출신의 상인이었다.

32)하내(河內) : 진나라가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성 무척현(武陟縣) 서남의 회현(懷縣)에 그 치소가 있었다. 하남성 탕음(湯陰), 급현(汲縣), 신향(新鄕) 이서와 황하 이북 지역을 관할했다.

33)양국(襄國) : 진나라가 설치한 현의 치소로 지금의 하북성 형태시(邢台市) 서남에 있었다. 항우가 조양자(趙襄子)의 시호인 양()으로 이름을 바꿨다.

34)구강(九江) :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한 후 세운 군() 이름이다. 지금의 안휘성 경내의 회하(淮河) 이남과 공강(贛江) 유역 이동 및 강서성 대부분을 관할 구역으로 했다. 치소는 수춘(壽春)에 있었다.

35)() : 파양(鄱陽) 혹은 파양(番陽)을 말한다. 지금의 강서성 파양(波陽)의 옛 이름으로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하고 설치한 현 이름이다. 경포(黥布)의 출신지다.

36)백월(百越) : 춘추 때 월나라의 유민들이 세운 여러 나라들의 총칭이다. 초가 월을 멸하자 그 유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오령(五嶺) 일대로 이주했다가 다시 복건성(福建省) 및 광동성으로 남하하여 살면서 부락 단위로 군주를 세웠다. 이에 백월(百越)이라 한 것이다.

37)공오(共敖)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4년에 죽은 진한 교체기의 기의군 장령이다. 초나라의 의제 밑에서 주국(柱國)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남군을 공격했다. 한왕 원년 (206) 관중에 들어가 서초패왕을 칭한 항우가 그를 임강왕(臨江王)에 봉하고 그 도읍을 강릉에 두도록 했다. 후에 초나라로 돌아온 항우는 의제를 장사(長沙) 침현(郴縣)으로 옮겨 살도록 명하고 다시 공오에게 밀령을 내려 도중에 의제를 살해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2년 후에 병사했다.

38) 조나라의 상국 장이(張耳)가 거록(鉅鹿)에서 진장(秦將) 장한(章邯)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을 때 진여(陳餘)는 병사를 이끌고 장하(漳河)의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항우의 도움으로 거록의 포위가 풀리자 장이는 자기를 구원하러 오지 않은 진여를 책망했다. 이에 진여는 자기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은 장이에 대해 화를 내며 장수의 인장을 던져버리고 휘하 병졸 수 백 명과 함께 황하의 상류인 택중(澤中)으로 들어가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장이진여열전

39)서초구군(西楚九郡)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사수군(泗水郡), 탕군(碭郡), 설군(薛郡), 동해군(東海郡), 임회군(臨淮郡), 팽성(彭城), 광릉군(廣陵郡), 회계군(會稽郡), 장군(鄣郡) 등이라는 사전(史詮)의 설을 따른다.

40)한원년(漢元年) : 기원전 206년으로 이 해에 한고조 유방이 한왕에 봉해져 왕호를 시작했다고 해서 한나라 건국 원년으로 삼았다.

41)경포열전(黥布列傳)항우가 회왕을 의제로 세우고 도읍을 장사로 옮기게 한 후에 그곳에 들어가 살도록 강요했다. 다시 항우가 구강왕 경포에게 비밀리에 령을 내려 장사로 들어가던 의제를 공격하여 죽이도록 했다. 경포는 그해 8월 그 부하 장수를 시켜 의제를 추격하여 침현에서 죽였다[項氏入懷王爲義帝, 徙都長沙, 迺陰令九江王布等行擊之. 8, 布使將擊義帝, 追殺之郴縣]기사는 본 항우본기의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42)오제후(五諸侯) : 몇 가지 설이 있다.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한왕(韓王) 정창(鄭昌), 위왕(魏王) (),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말한다. (顔師古 )

전국(戰國) 때 습관적으로 사용했던 진나라와 그 동맹국인 제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제후국들을 칭한 말로써 천하의 제후국이라는 의미이다.

본편 말미에 항우를 찬미하는 글遂將五諸侯滅秦의 오제후(五諸侯)는 당시 제나라는 항우가 관중으로 들어갈 때 따르지 않고 초(), (), (), (), () 등의 5국 군사들만 들어갔다.

그러나 유방이 동쪽으로 나올 때는 안사고의 설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이끌고 나온 오제후는 한왕(漢王) 자신의 군사를 포함해서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그리고 항우에게 이미 반기를 들었던 산동의 제왕(齊王)과 조왕(趙王) 등의 5왕이다.

고로 이곳에서 말한 오제후란 실체가 아니라 천하의 군사를 의미하는 일반명사를 말한다.

43)사수(泗水) : 산동성 몽산(蒙山)에서 발원하여 곡부를 거쳐 팽성의 동쪽을 지나 지금의 안휘성 홍택호에서 합류하는 회수의 지류다.

44)경색(京索)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경()과 색()을 말한다. ()은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교외 동남에, 색은 형양시 시내에 있다.

45)오창(敖倉) : 진나라가 지금의 형양(滎陽)의 북쪽이며 하수의 남안에 있던 오산에 건설한 곡식창고 이름이다.

46) 원문은愿賜骸骨歸卒伍(원사해골귀졸오). 옛날 사람들은 자기가 관리가 되는 것을 그 군주에게 자기의 몸을 맡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나이가 들어 퇴직할 때는 군주에게 자기의 해골을 돌려달라고 해서 은퇴를 했다.귀졸오(歸卒伍)’는 평민의 신분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이다. 또한 졸오(卒伍)는 진나라 때 지방의 말단 행정조직으로 5()를 오(), 60() 300()를 졸()이라 했다.

47)좌독(左纛) : 황제가 탄 수레의 왼쪽에 다는 검정색의 소꼬리나 꿩 꼬리로 만든 장식물.

48)황옥거(黃屋車) : 노란 비단으로 수레의 지붕을 덮은 황제가 타는 수레.

49)원문은 반국지왕(反國之王)이다. 항우가 입관(入關) 할 때 위표는 휘하의 정병을 이끌고 종군했다. 그 공으로 위표는 항우로부터 서위왕(西魏王)에 봉해졌다. 한왕 유방이 관중에서 동쪽으로 나오자 위표는 곧바로 항복하고 유방과 함께 팽성을 공략했다. 항우가 반격하여 팽성에서 한군을 대파하자 위표는 후퇴하는 유방을 따라 형양으로 들어갔다. 이에 위표는 한왕에게 모친의 병세를 살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형양성에서 나와 항우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신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사로잡히자 다시 한왕에게 항복한 후에 형양성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주가와 종공이 변화무쌍한 위표를 의심하여 죽였다. 유표의 부인 박태후는 유방과 잠자리를 같이 한 후에 유항(劉恒)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한왕조 3대 황제인 유항이 한문제다.

50)동아(東阿) :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동북의 아성진(阿城鎭)을 말한다. 춘추전국 때는 제나라 땅으로 춘추 때는 가읍(柯邑)으로 전국 때는 아읍(阿邑)으로 불리다가 진나라가 이곳에 동아현을 설치했다.

51)누번(樓煩) : 진한 때 서북 변경에 살던 소수민족의 이름으로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잘 쏘았다. 이에 말을 타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누번이라고 칭한 것이다.

52)항우가 범한 열 가지 죄목은 고조본기 참조.

53)원문은匿不肯復見으로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한고조 유방이 후공을 일부러 피해 만나지 않았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후공이 봉작을 받지 않기 위해 유방을 피해 다녔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다는 설이다.

54)팽상국(彭相國) : 팽월은 위왕(魏王) () 밑에서 상국을 지냈다.

55)강동(江東) : 중국 고대에 부르던 지역 이름으로 지금의 안휘성 무호시(蕪湖市)와 강소성 남경(南京) 이남 일대를 가르킨다.

56)기사마(騎司馬) : 기병부대에서 군법을 관장하던 군리를 말한다.

57)낭중기(郎中騎) : 낭중기장(郎中騎將)의 약칭으로 낭중령에 속한 기병대의 중급 지휘관으로 궁궐의 숙위와 황제가 출궁할 때 호위를 맡았다.

58)낭중(郎中) : 황제의 측근에서 시위(侍衛)하던 관리다. 진나라 때 직무에 따라 삼분하여 삼랑(三郞)이라 통칭했다. 여인들이 거처하는 금원에서 근무하는 자는 중랑(中郞), 궁중에서 근무하는 자는 낭중(郎中), 궁밖에서 근무하는 자는 외랑(外郞)이라 했다.

59)적천(赤泉) : 지금의 하남성 절천현(浙川縣) 서남의 단수(丹水)를 혹은 하남성 노현(魯縣)이라는 설도 있다.

60)() : 항양(項襄)의 봉지로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동북 혹은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서남이의 고을이다. 항양은 항우의 친척으로 한왕 2년 기원전 205년 정도(正道)의 싸움에서 관영(灌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한왕에게 항복한 후에 객장(客將)의 신분으로 관영을 따라다니며 종군했다.

61)평고(平皐) : 항타(項佗)의 봉지로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동이다. 한신이 제나라 지역으로 진공하자 항우가 항타를 주장으로 용저(龍且)와 주란(周蘭)을 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이윽고 한신이 이끌던 한군과 유수(濰水)에서 싸워 대패하고 항타는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항복해서 한나라 장수가 되었다.

62)주생(周生) : 한나라 때의 유생이나 이름과 행적은 미상이다. 사마천과 동시대 혹은 그 전 인물이라고도 하며, 서주 때 현인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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