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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기(周本紀) 4-2. 동주(東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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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8,516회 작성일 04-05-12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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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본기(東周本紀)


평왕이 즉위했으나 주나라 도읍 종주(宗周)는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모두 폐허가 되고 또한 견융이 부단히 침략해 왔음으로 이를 피하여 도읍을 락읍(駱邑)으로 옮겼다. 주나라는 평왕 때에 이르러 더욱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세력이 센 제후들은 세력이 약한 주위의 제후들을 공격하여 병합하기 시작하여 제(齊), 초(楚), 진(晉), 진(秦)등이 방백이 되어 주왕실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평왕 49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이 즉위했다.1)

평왕 51년, 기원전 720년, 평왕이 죽었으나 태자 설(洩)이 일찍 죽어 그 뒤를 잇지 못하고 평왕의 손자인 림(林)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환왕(桓王)이다.

환왕 3년, 기원전 717년, 정장공(鄭庄公)이 래조했으나 환왕이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환왕 5년, 기원전 715년, 정백(鄭伯)이 원한을 품고 태산에 제사 지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어서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주왕실이 정나라에 하사했던 노나라 근처의 팽전(祊田)과 주공에게 제사 지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라고 하사했던 정나라 인근의 노나라 소유인 허전(許田)을 바꾸었다.

환왕 8년, 기원전 712년, 노은공(魯隱公)이 시해되고 노환공이 섰다.

환왕 13년, 기원전 707년, 환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였으나 오히려 환왕 자신이 정나라 장수가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하자 회군하였다.

환왕 23년, 기원전 697년, 환왕이 죽고 태자 타(佗)가 즉위하였다. 이가 장왕(庄王)이다.

장왕 4년, 기원전 693년, 주공 흑견(黑肩)이 장왕을 죽이고 왕자 극(克)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신백(辛伯)이 그 사실을 장왕에게 고하여 주공 흑견은 잡혀서 죽고 왕자 극(克)은 연(燕)나라로 도망쳤다.

장왕 15년, 기원전 682년, 장왕이 죽었다. 그 아들 호제(胡齊)가 뒤를 이었다. 이가 리왕(釐王)이다.

리왕 3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齊桓公) 패자(覇者)를 칭하기 시작했다.

리왕(釐王) 5년, 기원전 677년, 리왕이 죽었다. 그 아들 랑(閬)이 뒤를 이었다. 이가 혜왕(惠王)이다. 장왕이 살아 있을 때 장왕은 비첩(婢妾) 요희(姚姬)를 사랑하여 그 사이에서 왕자 퇴(頹)를 낳았다. 장왕이 왕자 퇴를 총애하였다. 혜왕이 즉위하여 2년, 째 되던 해에 변백(邊伯)등 오대부(五大夫)의 장원을 빼앗아 왕실 전용의 동물원으로 만들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변백 등의 오대부들은 란을 일으켜 연(燕)과 위(衛)의 군사들을 불러들여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이 온(溫) 땅으로 달아났다가 다시 정나라 땅인 력읍(櫟邑)으로 몸을 피했다. 오대부가 왕자퇴를 주왕으로 추대하였다. 왕자퇴와 오대부들이 매일 온갖 음악과 춤으로 즐기면서 세월을 보내자 정백과 괵공이 노했다.

혜왕 4년, 기원전 673년, 정백과 괵공이 군사를 동원하여 왕자퇴와 오대부를 공격하여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혜왕 10년, 기원전 667년, 제환공(齊桓公)에게 방백의 직위를 내렸다.

혜왕 25년, 기원전 652년, 혜왕이 죽고 태자 정(鄭)이 즉위하였다. 이가 양왕(襄王)이다.

양왕의 모친은 일찍이 죽고 계비를 다시 세웠다. 이가 혜후(惠后)다. 혜후가 아들 숙대(叔帶)를 낳았다. 혜왕이 숙대를 매우 사랑하자 태자의 신분으로 있었던 양왕은 이를 매우 두려워했었다.

양왕 3년, 기원전 649년, 숙대가 융(戎), 적(翟) 등과 모의하여 양왕을 공격하였다. 양왕이 숙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숙대는 몸을 피해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환공이 관중(管仲)은 주나라에, 습붕(隰朋)은 진(晉)나라에 각각 보내어 융(戎)을 평정하게 하였다. 혜왕이 관중(管仲)을 상경(上卿)에게 행하는 예를 따라 대하였다. 관중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미천한 관료이고 지금 우리 제나라에는 왕실에서 직접 명하여 나라를 지키고 있는 고(高)씨와 국(國)씨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왕의 신하인 상경(上卿)이 있습니다. 만약에 매년, 봄과 가을에 왕명을 받들기 위해 입조하고 있는 두 상경이 왕도에 오면 그때는 그 분들을 무슨 예를 행하여 대하시려고 하십니까? 두 분의 상경으로 인하여 제가 감히 상경의 예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구씨(舅氏)2)의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 그대의 큰 공적을 기리고자하니 그대는 짐의 명을 거역하지 말라!」

관중이 결국은 하경(下卿)의 예를 받고 돌아왔다.

양왕 9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齊桓公)이 죽었다. 12년, 기원전 640년, 제나라로 도망친 왕자 숙대(叔帶)의 죄를 용서하여 귀국을 허락하였다.

양왕 13년, 기원전 639년, 정나라가 활국(滑國)3)을 공격하자 왕이 유손(游孫)과 백복(伯服)을 보내 활국을 위해 정나라에 강화를 청하였으나, 정나라는 오히려 두 사람을 옥에 가두어버렸다. 당시 정백(鄭伯) 문공(文公)은 원래 문공의 부군(父君)인 정려공(鄭厲公)이 괵공(虢公)과 함께 왕자 극(克)을 토벌하여 혜왕(惠王)을 복위시켜 주왕실에 큰공을 세웠으나 혜왕이 괵공에게만 주기(酒器)와 옥작(玉爵)를 하사하고 려공에게는 단지 동경(銅鏡)만을 하사한 일에 대해 원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양왕(周襄王)이 위(衛)나라와 활국(滑國)만을 비호했음으로 분노한 정백이 유손과 백복 두 사람의 왕사(王使)를 옥에 가둔 것이다. 양왕이 노하여 적(翟)을 시켜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부신(富辰)이 간하며 말렸다.

「옛날 우리 주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할 때 진(晉)과 정(鄭)나라의 힘에 의존한 바가 컸습니다. 왕자 퇴(頹)의 란(亂) 때도 정나라가 도와주어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사소한 원한 때문에 정나라를 버리시는 일은 불가합니다.」

양왕이 부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양왕 15년, 기원전 637년, 왕이 적의 군사들을 시켜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왕이 적(翟)의 도움에 감격하여 적주(翟主)의 딸을 비로 삼으려고 했다. 부신이 다시 간했다.

「평왕(平王), 환왕(桓王), 장왕(庄王), 혜왕(惠王) 네 분의 왕들께서 모두 정나라의 도움을 입었습니다. 왕께서 왕실과 동성인 정나라를 버리고 오랑캐 나라인 적주와 친하게 지내심은 불가합니다.」

양왕이 역시 부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양왕 16년, 기원전 636년, 왕이 적후(翟后)를 쫓아내 별궁에 유폐시켰다. 적인(翟人)이 쳐들어와 적후를 유폐시킨 양왕의 행위를 견책하고 담백(譚伯)을 죽였다. 부신이 말했다.

「제가 누차에 걸쳐 정나라를 버리고 적국(翟國)과 가까이 지내면 안 된다고 간했던 이유는 이와 같은 결과가 일어나 대왕의 원망을 듣게 지나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부신이 말을 마치고 성안의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군(翟軍)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당초에 혜후(惠后)가 왕자 대(帶)를 주왕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여 자기의 심복들을 시켜 길을 열어 적인(翟人)들을 주나라로 불러들였다. 양왕은 어쩔 수 없이 정나라로 도망치자 정나라는 양왕을 범읍(氾邑)4)에 안치시켰다. 왕자 대(帶)가 스스로 주왕의 자리에 올라 양왕이 쫓아내고 유폐시킨 적후(翟后)를 취하여 비로 삼은 다음 온(溫) 땅으로 가서 머물렀다.

양왕 17년, 기원전 635년, 진문공(晉文公)이 왕자 대(帶)를 잡아서 죽이고 양왕을 주왕에 복위시켰다. 양왕이 이어서 진문공에게 규(珪)5)와 창(鬯)6) 및 천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동궁적시(彤弓赤矢)7)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진문공(晉文公)을 방백으로 명하고 다시 하내(河內)의 다섯 고을의 땅8)을 진(晉)나라에 주었다.

양왕 20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晉文公)이 양왕(襄王)을 하양(河陽)의 천토(踐土)로 불렀다. 제후들이 달려와 양왕에게 조현(朝見)을 드렸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기술할 때 이일을 꺼려하여 ‘천자가 사냥을 하기 위해 하양(河陽)으로 나갔다.’라고 썼다.

양왕 24년, 기원전 628년, 진문공(晉文公)이 죽었다.

양왕 31년, 기원전 621년, 진목공(秦穆公)이 죽었다.

양왕이 재위 32년만인 기원전 620년에 죽고 태자 임신(任臣)이 뒤를 이었다. 이가 경왕(頃王)이다.

경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613년에 죽고 그의 아들 반(班)이 섰다. 이가 광왕(匡王)이다.

광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607년에 죽고 그의 동생 유(瑜)가 뒤를 이었다. 이가 정왕(定王)이다.

정왕 원년, 기원전 606년, 초장왕(楚庄王)이 육혼(陸渾) 땅의 융(戎)을 정벌하고 락읍에 사자를 보내어 주나라의 구정(九鼎)에 관하여 물었다. 정왕이 왕손만(王孫滿)을 보내 구정은 천명에 의해 전해질 뿐이라고 대답하게 하자 초장왕이 군사를 물리쳐 회군하였다.

정왕 10년,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군사를 끌고 와서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백(鄭伯)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였으나 곧바로 나라를 회복하였다.

정왕 16년, 기원전 591년, 초장왕이 죽었다.

정왕이 재위 21년만인 기원전 586년에 죽고 그의 아들 이(夷)가 즉위하였다. 이가 간왕(簡王)이다.

간왕 13년, 기원전 573년, 진(晉)나라 신하들이 그 군주인 려공(厲公)을 시해하고 공자 주(周)를 주나라에서 불러와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가 진도공(晉悼公)이다.

간왕이 재위 14년만인 기원전 57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설심(泄心)이 즉위하였다. 이가 영왕(靈王)이다.

영왕 24년, 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최저(崔杼)등이 그들의 군주인 제장공(齊庄公)을 시해하였다.

영왕 27년, 기원전 545년, 왕이 죽고 그 아들 귀(貴)가 즉위하였다. 이가 경왕(景王)이다.

경왕 18년, 기원전 527년, 왕비가 낳은 태자가 매우 영명(英明)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경왕 20년, 기원전 525년, 경왕이 왕자 조(朝)를 사랑하여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행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다. 왕자 개(丐)의 무리와 왕자 조의 일당들이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조신(朝臣)들이 경왕의 장자인 왕자 맹(猛)을 옹립하여 왕위에 즉위시켰으나 왕자 조(朝)가 맹을 공격하여 죽였다. 왕자 맹(猛)의 시호는 도왕(悼王)이다. 진후(晉侯)가 왕자 조를 공격하여 왕자 개(丐)를 주왕으로 세웠다. 이가 경왕(敬王)이다.

경왕 원년, 기원전 519년, 진(晉)나라가 경왕을 입국시켜 즉위시키려 하였으나 왕자 조가 본국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음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택(澤)9)에 머물렀다.

경왕 4년, 기원전 516년, 진후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경왕을 호송하여 왕도로 들어갔다. 왕자 조(朝)는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반열에 서서 경왕을 받들었다. 제후들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주성(周城)의 성곽을 수리했다.

경왕 16년, 기원전 504년, 왕자 조(朝)의 일당이 다시 란을 일으키자 경왕은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경왕 17년, 기원전 503년, 진정공(晉定公)이 경왕을 호송하여 주나라에 환국 시켰다.

경왕 39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군주인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경왕 41년, 기원전 479년,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했다. 공자(孔子)가 향년,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경왕이 재위 42년만인 기원전 478년에 죽고 그 아들 인(仁)이 즉위하였다. 이가 원왕(元王)이다.

원왕이 재위 8년만인 기원전 469년에 죽고 그의 아들 개(介)가 즉위하였다. 이가 정왕(定王)이다.

정왕 16년, 기원전 453년, 삼진(三晋)인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가 힘을 합하여 지백(智伯)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정왕이 재위 28년만인 기원전 442년에 죽고 정왕의 장자인 거질(去疾)이 섰다. 이가 애왕(哀王)이다. 애왕이 즉위한지 3개 월 만에 그의 동생 숙(叔)이 애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사왕(思王)이다. 사왕이 스스로 왕이 된지 5개 월만에 그의 막내 동생인 외(嵬)가 사왕을 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가 고왕(考王)이다. 이 세 왕은 모두 정왕의 아들들이었다.

고왕이 재위 15년만인 기원전 426년에 붕(崩)하고 그의 아들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가 위열왕(威烈王)이다.

고왕이 그의 동생을 하남(河南)에 봉했다. 이가 환공(桓公)이다. 흑견(黑肩)이 죽은 후로 계속해서 비어있던 주공(周公)의 자리를 환공으로 하여금 잇게 했다. 환공이 죽고 그 아들 위공(威公)이 뒤를 이었다. 위공이 죽고 다시 그의 아들 혜공(惠公)이 뒤를 잇고는 자기의 막내 아들을 공(鞏)에 봉하고 천자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동주의 혜공(惠公)이다.

위열왕(威烈王) 23년, 기원전 403년, 구정(九鼎)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그 해에 이르러 왕은 한(韓), 위(魏), 조(趙) 삼가(三家)의 수장(首長)들을 제후로 봉했다.

위열왕이 재위 24년만인 기원전 402년에 죽고 그 아들 교(驕)가 즉위하였다. 이가 안왕(安王)이다. 이 해에 도적들이 초성왕(楚聲王)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안왕이 즉위 26년 만인 기원전 376년에 죽고 그 아들 희(喜)가 뒤를 이었다. 이가 열왕(烈王)이다.

열왕 2년, 기원전 374년, 주나라 태사 담(儋)이 진헌공(秦獻公)을 보고 말했다.

「원래 주와 진(秦)은 한나라였다가 나누어지게 되었는데 그 후로 500년후에 다시 합쳤다가 다시 17년후에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열왕 재위 7년, 기원 369년에 죽고 동생 편(扁)이 즉위하였다. 이가 현왕(顯王)이다.

현왕(顯王) 5년, 기원전 364년, 진헌공(秦獻公)을 치하하고 방백의 직위를 내렸다.

현왕 9년, 기원전 360년,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진효공(秦孝公)에게 보냈다.

현왕 25년, 기원전 344년, 진나라가 제후들을 주나라에 모이게 하여 회맹을 가졌다.

현왕 26년, 기원전 343년, 주왕실이 진효공에게 방백의 칭호를 내렸다.

현왕 33년, 기원전 336년, 왕이 진혜왕(秦惠王)을 치하하였다.

현왕 35년, 기원전 334년,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진혜왕에게 보냈다.

현왕 44년, 기원전 325년, 진혜왕(秦惠王)이 왕호를 칭했다. 그 후에 모든 제후들이 같이 따라 왕호를 사용하였다.

현왕이 재외 48년만인 기원전 321년에 죽고 그 아들 정(定)이 즉위하였다. 이가 신정왕(愼靚王)이다.

신정왕이 재위 6년만인 기원전 31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연(延)이 즉위하였다. 이가 난왕(赧王)이다. 난왕이 재위에 있을 때에 주나라는 동서로 나뉘어 다스려 지게 되었다. 난왕은 도읍을 서주(西周)로 옮겼다. 서주 무공(武公)의 공태자(共太子)가 일찍 죽었다. 무공에게는 5명의 서자가 있었을 뿐 옹립할 적자가 없었다. 사마전(司馬翦)이 초왕(楚王)에게 말했다.

「땅을 주어 공자 구(咎)를 태자로 옹립하는 편이 차라리 좋을 것입니다.」

좌성(左成)이 반대하며 말했다.

「불가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땅을 주어 공자 구(咎)를 돕는 일을 주나라가 오히려 반대한다면 주공의 처지만 어렵게 되어 주나라와의 관계는 멀어 지게 됩니다. 차라리 사마전(司馬翦)을 보내 주나라 왕이 누구를 태자로 세우고 싶은지 잘 살펴보라고 명한 후에 그로 하여금 초왕에게 왕자 구(咎)를 위해 땅을 청해보겠다고 넌지시 암시하게 하십시오.」

결국 서주는 공자 구(咎)를 태자로 삼았다.

난왕(赧王) 8년, 기원전 307년, 진(秦)나라가 의양(宜陽)10)을 공격하였다. 초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구했다. 그러나 초나라는 주나라가 오히려 진(秦)나라를 도왔다고 의심하여 거꾸로 주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소대(蘇代)가 초왕에게 주나라를 위해 유세하였다.

「어찌 감히 주나라가 진나라를 불러들이는 화를 스스로 자초했겠습니까? 주나라가 초나라보다 진나라를 더 가까이 대한다고 견책하심은 결과적으로 주나라를 진나라로 보내는 일과 같으며 그리되면 소위 진나라는 ‘주진(周秦)’이 될 것입니다. 주나라가 자기들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게 되면 필시 그들은 매 번 진나라에 부탁하게 되고 이는 진나라가 주나라를 취하는 아주 교묘한 책략이리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말씀드린다면 주나라가 진나라와 가까이 지낸다 할지라도 왕께서는 다만 좋다고만 말하시고 또한 주나라가 진나라와 멀어 지더라도 다만 좋게만 대하시어 주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멀어지게 하십시오. 그리되면 주나라는 진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초나라로 돌아올 것입니다.」

진(秦)이 동서(東西)의 두 주나라의 길을 빌려 한(韓)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주나라는 길을 빌려주자니 한나라의 후환이 두려웠고 빌려주지 않자니 진(秦)나라의 위세가 두려웠다. 사염(史厭)이 주왕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한(韓)나라의 공숙(公叔)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을 전하지 않으십니까? 한공숙(韓公叔)에게 ‘진나라가 감히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는 것은 동주(東周)를 믿기 때문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동주에게 얼마간의 땅을 떼어주고 초나라에는 인질을 보내지 않는가?’ 라고 전하게 하여 한나라가 우리의 말대로 한다면 진나라는 초나라가 구원병을 보낼까 두려워하고 또한 한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은 동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한나라를 정벌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진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강한 한나라가 주나라에게 땅을 떼어 준 것은 장차 주(周)가 진(秦)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며 주나라로서는 감히 그 땅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게 하면 진나라는 필시 주나라로 하여금 한나라의 땅을 받지 말라고 말할 명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나라가 한나라로부터는 땅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진나라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도록 할 수 있을 방책입니다.」

진나라가 서주(西周)의 왕을 불렀으나 서주왕이 가기를 꺼려하였다. 그래서 서주왕이 사람을 한나라 왕에게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진나라가 주왕을 부른 목적은 장차 한나라 땅인 남양(南陽)을 공격하기 위해서입니다. 한왕께서는 어찌하여 군사를 남양으로 보내지 않으십니까? 서주왕은 이로써 진나라의 부름에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아도 되고 또한 서주왕이 진나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감히 하수를 건너 남양(南陽)을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주와 서주가 싸움을 하자 한나라가 서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보내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동주를 위하여 한왕(韓王)에게 말했다.

「서주는 천자의 나라라 옛날부터 전해오는 명기(名器)와 보물이 무수히 많습니다. 대왕께서는 잠시 군사의 출정을 보류하시면 동주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서주는 부고에 있는 명기와 보물들을 가지고 와서 대왕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결국은 서주의 명기와 보물들은 모두 대왕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난왕(赧王)이 성군(成君)이라고 불리었다.11) 초나라가 한나라 땅인 옹지(雍氏)12)를 포위하자 한나라가 동주에게 갑옷과 양식을 구했다. 동주의 임금이 두려워하여 소대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소대가 말했다.

「군주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능히 한나라로 하여금 그들의 청을 거두어들 이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군주를 위하여 고도(高都)13)의 땅까지 얻어서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주나라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 된다면 앞으로는 그대의 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겠소.」

소대가 한나라의 상국을 만나서 말했다.

「초나라가 옹지의 땅을 석 달을 기한으로 정하여 포위했는데 지금 다섯 달이 넘도록 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나라가 이미 지쳐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상국께서 우리 주나라에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고 하신 명령은 지쳐있는 초나라에 한나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고한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나라 상국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래서 한나라 상국이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는 명령을 취소한다고 전하게 했다. 소대가 다시 한나라 상국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주나라에게 고도(高都)를 주지 않습니까?」

한나라 상국이 대노하며 소대를 꾸짖었다.

「내가 이미 갑옷과 식량을 구하라는 명을 거두어들여 주나라 역시 많은 것을 이미 취했는데 무슨 연고로 고도를 주나라에 주라고 하는가?」

소대가 말했다.

「만일 한나라가 고도를 주나라에 준다면 주나라는 그 뜻을 꺾어 한나라와 친해지고 그 소식을 듣게 되는 진나라는 대노하여 주나라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周)와 진(秦)은 사자의 왕래가 끊어지게 되고 이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고도(高都)로써 주나라를 얻게 되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주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한나라 상국(相國)이 말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소!」

과연 한나라는 고도의 땅을 주나라에 주었다.

난왕 34년, 기원전 281년, 소려(蘇厲)가 주왕(周王)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한위 두 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사무(師武)를 크게 패퇴시키고 다시 북쪽의 조나라 땅 인(藺)과 이석(離石)의 두 고을을 취할 수 있었음은 모두가 백기(白起) 장군의 용병술 덕분입니다. 진나라는 용병에 능한 장수를 많이 거느리고 또한 하늘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장수들과 군사들을 일으켜 새(塞)14)를 나와 위나라의 대량(大梁)을 공격하니 만일 대량이 떨어진다면 우리 주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왕께서는 사람을 보내 백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하여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초나라에 양유기(養由基)라는 활의 명인이 있었다. 백 보 앞에서 버드나무 잎을 쏘아서 백발백중으로 맞추자 좌우에 있던 수천 사람이 보고 모두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한 사람의 장부가 곁에 있다가 말했다. ‘활을 매우 잘 쏘니 내가 가르칠 만하다.’ 양요기가 듣고 노하여 활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칼을 허리에서 뽑아 손에 들고 그 장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대가 어떻게 나를 가르친단 말인가?’ 그 장부가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 왼손으로는 손을 쭉 뻗어 활을 지탱하고 오른 손으로는 활시위를 잡아당겨 활을 구부리는 방법으로 활 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말이 아니오. 무릇 버들잎을 백보 밖에서 활로 쏘아 백발백중 맞힌다 해도 쉴 때를 모른다면 오래가지 않아 기가 떨어지고 힘이 딸려 활이 흔들려 화살을 과녁에 맞출 수가 없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 한발이 빗나간다면 백발이 다 쓸모없게 될 것이오. 오늘 장군께서 한(韓)과 위(魏)의 군사를 파하고 또한 위나라 장수 사무(師武)를 크게 무찔렀고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 두 읍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니 공의 공적(功績)은 이미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다시 군사를 이끌고 새(塞)를 통과하여 이주(二周)를 지나 한(韓)나라를 등지고 위(魏)나라의 대량(大梁)을 공격하다가 만일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앞서 세운 공들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공은 차라리 병을 핑계하여 출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난왕 42년, 기원전 273년, 진나라가 화양(華陽)에서 위나라와의 약속을 깨뜨렸다15). 주나라의 대신 마범(馬犯)이 주왕에게 말했다.

「청컨대 저로 하여금 위(魏)나라의 양왕(襄王)에게 사절로 보내어 우리 주나라의 성을 쌓으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마범이 위(魏)나라에 가서 양왕에게 말했다.

「주왕이 병들어 만일 죽게 된다면 이 마범도 틀림없이 죽게 될 것입니다. 제가 청하옵건대 구정(九鼎)을 대왕에게 바치게 하겠으니 대왕께서는 이 마범의 뒤를 돌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양왕이 대답했다.

「구정만 가져온다면 그대의 장래는 내가 돌보아 주리라!」

양왕은 즉시 군사를 마범에게 주고 주나라를 지켜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게 했다. 마범이 다시 진왕(秦王)에게 가서 말했다.

「위나라가 군사를 보낸 목적은 주나라를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은 주나라를 공격하여 병합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왕께서는 시험삼아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나가 위나라 군사들의 동태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마범의 말을 들은 진왕이 과연 군사를 출병시켰다. 마범이 다시 양왕에게 달려가 말했다.

「주왕이 병이 호전되었음으로 제가 구정을 가져오려고 해도 성공하기가 쉽지가 않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조금 더 기다렸다가 주왕의 병이 다시 깊어지면 그 때 다시 도모하여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군사를 주나라를 보내어 지키고 있다고는 하나 천하의 제후들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있어 후에 구정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주나라에 군사를 보낸다면 그때는 제후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보내신 군사들에게 명하여 주나라 성을 쌓게 하신다면 우리가 구정을 탐내서 군사를 보낸 사실을 숨길 수 있습니다.」

양왕이 허락하여 위나라 군사들로 하여금 주나라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난왕 45년, 기원전 270년, 진나라에서 온 주왕의 빈객(賓客)이 주나라 공자인 주최(周最)에게 말했다.

「공께서 만약에 진왕의 효도에 대해 칭송하고 그로 인하여 태후의 식읍으로 응(應) 땅을 바친다면 진왕을 필시 기뻐하게 되어 이는 공이 진나라와 교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진나라와의 교류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면 주왕은 필시 공(公)이 공(功)을 세웠다고 상을 내리겠지만 진나라와의 사이가 원만하게 되지 않는다면 주왕에게 진(秦)나라와 교류를 맺으라고 전한 사람은 필시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공격하자 주최가 진왕을 찾아가 말했다.

「왕을 위해 계책을 드린다면 주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주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실리(實利)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진나라의 위세는 천하를 두렵게 할뿐입니다. 진나라의 위세를 천하가 두렵게 여긴다면 필시 제후들은 동쪽의 제나라와 힘을 합치게 됩니다. 진나라의 병사들이 주나라를 공격하다가 지치게 되면 천하는 모두 제나라를 중심으로 힘을 합하게 되고 그리 되면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없게 됩니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를 지치게 만들려고 왕께 권하여 주나라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진과 그 밖의 나라들이 모두 지치게 된다면 천하에 령이 서지 않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난왕 58년, 기원전 257년, 삼진(三晋)이 힘을 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주왕(周王)이 상국에게 명하여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으나 진나라가 주나라의 상국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에 중도에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주나라의 상국에게 말했다.

「진나라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는지 가볍게 여기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진나라는 삼진(三晋)의 정세를 알고 싶어하니 상국께서는 급히 진나라에 납시어 진왕을 뵙고 『청컨대 왕을 위하여 동방의 정세를 고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공은 필시 진왕으로부터 중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공을 중히 여기게 되면 그것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로써 주나라는 진나라의 신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제나라가 주나라를 중하게 여기게 연유는 주최(周最)가 옛날부터 제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나라는 항상 강국들과 교분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주나라의 말을 믿고 군사를 동원하여 삼진(三晋)을 정벌하였다.

난왕(赧王) 59년, 기원전 256년, 진(秦)이 한(韓)나라의 양성(陽城)16)과 부서(負黍)17)를 공격하여 취했다. 서주가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등을 돌리고 제후들의 합종(合縱)에 참여했다. 서주왕은 장차 천하의 정예 군사들을 이궐(伊闕)에 모이게 한 후에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여 이후로 진나라가 양성(陽城)을 통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진소왕(秦昭王)이 노하여 장군 규(摎)를 보내 서주를 공격하였다. 서주의 임금이 진나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의 용서를 빌며 주나라의 36개 읍(邑)과 그 백성들 3만 명을 바쳤다. 진나라가 모두 받아들이고 주나라의 임금을 돌려보냈다.

난왕이 죽자 주나라 백성들이 동쪽으로 달아났다. 진나라가 주나라의 구정(九鼎)과 보기(寶器)들을 차지하고 주나라 왕을 탄호(憚狐)로 옮겨 살게 하였다. 그리고 7년, 후인 기원전 249년에 진(秦)의 장양왕(庄襄王)이 동주(東周)를 멸했다. 동주와 서주 모두 진나라에 병합되어 주나라 종묘에 대한 제사가 끊어 졌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했다.

「학자들은 모두 주(周)가 은의 주왕(紂王)을 멸하고 락읍(洛邑)에 거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왕이 락읍에 도성을 축조하고 성왕(成王)이 소공을 시켜 머물기에 어떠한지를 점을 치게 하고 구정(九鼎)을 옮겼으나 주나라는 풍호(豊鎬)에 도읍을 정했다. 견융(犬戎)이 침입하여 유왕(幽王)이 살해되자 주나라를 곧 동쪽의 락읍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소위 ‘주공을 필(畢)에 장사를 지냈다’라는 말에 나오는 필(畢)은 호경(鎬京)의 동남쪽에 있던 두중(杜中)이다. 진이 주나라를 멸하고 나서 한(漢)나라가 90여 년,만에 다시 일어났다. 한나라의 천자가 태산(泰山)에 제사지내기 위해 동쪽으로 순수(巡狩)하며 하남에 당도하여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가(嘉)의 30리의 땅에 봉했다. 천자는 그 후손을 주자(周子) 남군(南君)이라고 부르고 열후(列侯)의 지위를 주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주본기 끝>

주석

1)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 원년,은 공자가 지은 춘추가 시작된 해다. 춘추는 노은공 원년,에 시작해서 노애공(魯哀公) 14년, 기원전 481년, 모두 242년, 간의 역사서이다.

2) 구씨(舅氏)/ 주무왕(周武王)이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기 때문에 제나라와의 관계를 외삼촌의 나라로 부른 것이다.

3) 활국(滑國)/ 현 하남성 언사시(偃師市)에 있던 소 제후국

4)범읍(氾邑)/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부근으로 춘추 때 정나라 땅이다.

5) 규(珪)/왕이나 제후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데 사용했던 옥기(玉器).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이 졌으며 왕이나 제후가 제사를 지낼 때 증빙으로 삼았다.

6) 창(鬯)/ 제사 지낼 때 신에게 바치는 향기가 나는 방향주(芳香酒)

7)동궁적시(彤弓赤矢)/ 동궁(彤弓) : 붉은 색을 칠한 활을 말하는데 고대에 제왕(帝王)이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상으로 하사한 것으로 천자 대신 죄를 지은 제후들을 토벌하는 권한을 준다는 것을 상징하였음. 적시(赤矢) : 붉은 칠을 한 나무로 만든 화살을 말함. 동궁호시(彤弓弧矢)라고도 함.

8) 양왕이 진(晉)나라에 하사한 다섯 고을은 양(楊), 번(樊), 온(溫), 원(原), 찬모(攢矛)를 말한다.

9) 택(澤)/ 현 산서성 진성현(晉城縣) 부근

10) 의양(宜陽)/ 전국시대 한성(韓城)을 말함.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宜陽縣)이다.

11) 성군(成君)/ 전국책(戰國策)에 ‘ 한나라 군사가 서주에 쳐들어오자 주왕이 성군(成君)을 시켜 진(秦)나라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고 했는데 당시 이일은 잘못된 기록이다.

12) 옹지(雍氏)/ 즉 옹량(雍梁)을 말하며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을 동북쪽을 가르킴.

13)고도(高都)/ 전국 때 한(韓)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서쪽.

14) 새(塞)/이궐새(伊闕塞)를 말함. 낙양의 남쪽에 있으며 양산이 서로 마주하고 있어 마치 궁궐과 같이 보인다. 이수(伊水)가 두 산 사이로 흘러 이궐(伊闕)이라고 했다.

15) 진파화양약(秦破華陽約)/ 진소왕 33년, 진(秦)이 화양에서 위나라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객경(客卿) 호상(胡傷)으로 하여금 위나라의 장군 망묘(芒卯)와 그 군사들을 공격하게 하여 위군을 크게 무찔렀다.

16)양성(陽城)/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의 고성진(告城鎭)

17)부서(負黍)/ 전국(戰國) 때 한 나라 영토로써 현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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