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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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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2,297회 작성일 09-12-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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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紀9 呂太后(여태후)

 

여태후(呂太后)는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취한 아내다. 그녀는 혜제(惠帝)와 딸 노원태후(魯元太后)를 낳았다. 고조가 한왕이 된 이후 다시 정도(定陶)1)에서 척부인(戚夫人)을 얻어 매우 총애했다. 척부인은 후에 조은왕(趙隱王)이 된 여의(如意)를 낳았다.

혜제는 위인이 어질고 나약하기만 하여, 고조는 태자를 폐위하고 척부인의 소생 여의 책봉하려고 했다. 태자는 고조 자신을 닮지 않고 여의야 말로 자기를 닮았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조의 총애를 받은 척부인은 항상 황제를 따라 관동까지 따라다니곤 하다가 어느 날 고조의 면전에서 밤낮으로 울며 자기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해 달라고 애원했다. 여후는 나이가 들자 늘 집 안에 머물러 있게 되니, 고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게 되어 점점 소원해졌다. 척부인의 아들 여의는 조왕(趙王)에 봉해진 이후 일찍이 몇 번에 걸쳐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대신들의 간언과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태자는 가까스로 폐위되는 운명을 모면할 수 있었다.

여후는 사람됨이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고, 일찍이 천하를 평정하는 고조를 보좌했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을 죽이는 데에 있어서 그녀의 임김이 작용할 때가 많았다. 여후의 오빠들은 모두 고조의 부장(部將)이었다. 큰오빠 주여후(周呂侯)가 적과 싸우다가 패사하자 그의 아들 여대(如臺)와 여산(呂産)은 역후(酈侯)와 교후(交侯)에 각각 봉해졌다. 또 그녀의 작은오빠 여석(呂釋)은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고조 12년 기원전 1954월 갑진 일에 고조가 장락궁(長樂宮)에서 승하하자, 태자가 제위를 계승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유비(劉肥)는 혜제의 배다른 형으로, 제왕에 봉해졌다. 유비를 제외한 그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혜제의 동생이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조왕에, 박부인(薄夫人)의 아들 유항(劉恒)은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비빈들의 소생으로, 유회(劉灰)와 유우(劉友)는 양왕(梁王)과 회양왕(淮陽王), 유장(劉長)과 유건(劉建)은 각각 회남왕(淮南王)과 연왕(燕王), 고조의 동생 유교(劉交)는 초왕(楚王), 고조 맏형의 아들 유비(劉鼻)는 오왕(吳王)에 각각 봉해졌다. 유씨와 동성이 아닌데도 제후왕으로 봉해진 공신은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아들 오신(吳臣)으로 그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다.

척부인과 조왕을 가장 증오했던 여후는 척부인을 영항(永巷)2)에 가두고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사자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조나라에 보냈으나 그때마다 조나라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이 말했다.

고제께서 신을 조나라에 보낸 목적은 나이가 어린 조왕을 잘 보살피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척부인에게 원한이 깊은 태후께서 조왕을 불러 같이 죽이려고 한다고 하니 제가 감히 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또한 조왕은 지금 병이 나서 아픈 몸이니 조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여후가 듣고 대노하여 사자를 다시 보내 주창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주창이 장안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다시 사자를 보내 조왕을 소환했다. 조왕이 출발하여 미처 장안에 당도하기 전에 인자한 성격의 효혜제는 태후가 의도한 바를 미리 알고 친히 패상(霸上)으로 나아가 조왕을 맞이하여 함께 궁으로 들어가 침식을 같이 하며 옆에 끼고 보호했다. 조왕을 죽이려는 태후는 한참 동안 기회를 얻지 못했다. 효혜제 원년 12월 기원전 19412월 황제가 사냥을 아침 일찍 나갔다. 조왕은 나이가 어렸음으로 일찍 일어나지 못해 궁에 남았다. 조왕이 혼자 남았다는 소식을 들은 태후가 사람을 시켜 짐주를 마시게 했다. 날이 밝아 효혜제가 환궁했을 때는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회양왕 유우(劉友)3)가 조왕(趙王)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해 여름 조칙을 내려 역후(酈侯)4)의 아버지 여택(呂澤)5)을 추서하여 영무후(令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후가 척부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벙어리가 되게 하는 음약(瘖藥)을 먹인 뒤 그녀를 변소에 내다 버려 그곳에서 기거하게 했다. 여태후는 그녀를 인체(人彘)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며칠 후 여후는 혜제를 불러 사람돼지????를 구경시켰다. 혜제는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한참 후에야 혜제는 그것이 척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이때부터 혜제는 병으로 몸져 드러누워 1년 내내 일어나지 못했다. 혜제는 여태후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이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됩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써 천하를 다스릴 면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혜제는 온종일 술과 여자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결과 병을 얻게 되었다.

혜제 2년 기원전 193,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6)와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7)가 조현을 위해 장안에 들어왔다. 10월 어느 날, 혜제는 여태후의 면전에서 주연을 베풀고 제도혜왕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혜제는 제왕이 자기보다 나이가 위인 형이기 때문에 가정의 예법에 따라 제왕을 상석에 앉혔다. 이를 보고 여태후가 진노했다. 여후는 사람을 시켜 짐주(鴆酒) 두 잔을 따라 제왕의 면전에 놓도록 한 뒤 제왕에게 일어나 그녀를 위해 축수하라고 명했다. 제왕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고 축수하기 위해 일어서자 혜제도 따라 일어나 술잔을 들고 함께 여태후의 축복을 기원하려고 했다. 당황한 태후는 자리를 박차고 황급히 일어나 혜제가 손에 든 술잔을 손으로 쳐서 엎어 버렸다. 제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술잔에 든 술을 마시지 못하고 짐짓 만취된 것처럼 가장하여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에게 물어 본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짐주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태후를 두려워한 제왕은 장안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심에 싸였다. 제나라의 내사(內史) ()가 제왕에게 권했다.

태후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혜제와 노원공주뿐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70여 개의 성을 보유하고 계신 데 비해 노원공주는 식읍으로 서너 개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 보유하고 계신 봉지 중 하나의 군을 태후에게 바쳐 공주의 탕목읍(湯沐邑)8)으로 삼게 한다면 태후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봉국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은 즉시 태후에게 성양군(城陽郡)을 바치고 아울러 공주를 왕태후(王太后)로 존칭하였다. 태후는 크게 기뻐하고 이를 허락했다. 그리고 제왕이 머무는 관저에서 주연을 베풀어 주고 한바탕 실컷 술을 마시게 하고 나서 제왕을 귀국하게 해 주었다.

혜제 3년 기원전 192, 장안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혜제 4년에 이르러 절반 정도가 진척되고, 혜제 5-4년을 거쳐 마침내 완공되었다. 제후들이 황제를 접견하기 위해 서울 장안으로 모여들었고, 10월에 입조하여 황제에게 축하를 표시하였다.

혜제 7년 기원전 188, 가을 8월 무인 날 혜제가 죽었다. 발상 기간 동안 여태후는 곡만 할 뿐 눈물을 흘리지 아니했다. 그 당시 시중(侍中)을 맡고 있었던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아들 장벽강(張辟强)15살이었다. 벽강이 승상 진평에게 말했다.

태후에게 아들이라곤 혜제 하나뿐인데 지금 승하하셨는데도 곡만 하고 비통해하지 않습니다. 승상께서는 그 연유를 알고 계십니까?

진평이 되물었다.

그 연유가 무엇인가?

벽강이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은 승하하신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므로 태후께서 승상을 위시한 조정의 대신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승상께서 태후께 청하여 여대(呂臺), 여산(呂産), 여록(呂祿) 등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남군과 북군을 거느리게 하고 아울러 여씨 집안 사람들을 입궁시켜 대권을 장악하게 한 후에야 비로소 태후는 안심할 것이며, 여러 대신들께서도 화를 모면할 수 있습니다.

승상이 장벽강의 권고대로 하니 과연 태후는 아주 흡족해 하고, 그때야 비로소 비통하게 곡을 하기 시작했다. 여태 일가는 이때부터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여 섭정을 시작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9월 신축 일, 혜제를 안장했다. 태자가 제위를 계승하여 즉위하고 고조의 분묘에 참배했다.

고황후(高皇后) 여치(呂雉) 원년 기원전 187, 조정의 모든 영을 일률적으로 여태후 명의로 내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대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여태후는 모든 제후왕을 여씨로 봉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고황후는 조정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여씨들을 제후왕으로 봉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도록 명하고 우승상 왕릉(王陵)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릉이 대답했다.

고제께서는 일찍이 흰 말을 희생으로 삼아 그 피로 대신들과 앞으로 유씨의 자제가 아닌 자가 왕이 된다면 천하가 공동으로 주멸하라.‘라고 맹세하셨습니다. 그런즉 지금 여씨를 왕으로 봉하신다면 이는 고조의 맹약을 위배하는 행위입니다. ".

여태후가 듣고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다시 좌승상 진평과 강후 주발에게 의견을 물었다. 주발 등이 대답했다.

일찍이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그 자제분들을 왕으로 봉하셨습니다. 이제 태후께서 황제의 직권을 행사하시니 그 형제분들과 여씨를 왕으로 봉하신다 해도 문제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여태후는 기뻐하며 조정을 나섰다.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책망했다.

당초에 고제께서 삽혈(歃血)로 맹약하실 때 설마 그대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 이제 고제께서 승하하시니 태후께서 여씨의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려 하는데 그대들은 도리어 태후의 사욕을 눈감아 주고 아첨하여 당초의 맹약을 어겼다. 이제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고제를 뵙겠는가?

진평과 주발이 말했다.

지금 조정에서 대면한 채 책망하고 간쟁하는 것은 우리들이 당신만 못하겠지만,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당신께서 우리만 못할 것이오.

왕릉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11월 여태후는 왕릉을 우승상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황제의 태부로 임명했다. 왕릉은 병을 핑계삼아 면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여태후는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에 임명하고 박양후(壁陽侯) 심이기(審食其)9)를 좌승상에 임명했다. 그러나 심이기는 좌승상 본연의 직무를 처리하지 아니하고 낭중령(郎中令)10)의 일을 관장하여 궁중의 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심이기는 늘 여태후에게 곁에서 머물러, 태후의 총애와 신임을 한 몸에 받아 국사를 전횡하게 되었다. 공경대신들이 정무를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그에게 보고하고 심이기가 결정했다. 한편 여태후는 역후(酈侯) 여대(呂臺)의 부친 여택(呂澤)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하고, 이를 계기로 여씨 일가를 왕으로 분봉하는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4, 여태후는 여씨 일가를 후()로 봉할 발판을 위해 우선 고조의 공신으로 낭중령의 직에 있었던 풍무택(馮無擇)을 박성후(博成侯)11)에 봉했다. 노원공주가 세상을 떠나자,????노원태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녀의 딸 장언(張偃)을 노왕(魯王)에 봉했다. 장언의 부친은 바로 조왕에서 폐위된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 또 제도혜왕 유비(劉肥)12)의 아들 유장(劉章)13)을 주허후(朱虛侯)에 봉하고 여록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제왕의 승상 수()14)는 평정후(平定侯)에 봉하고 소부(少府) 양성연(陽成延)15)은 오후(梧侯)에 봉했다. 뒤이어 여종(呂種)16)을 패후(沛侯)에 봉하고 여평(呂平)17)을 부류후(扶柳侯)에 봉하였으며, 장매(張買)18)를 남궁후(南宮侯) 봉하였다.

여태후는 다시 여씨 일가를 왕으로 봉하기 위해 우선 혜제의 후궁 소생 유강(劉强)을 회양왕(淮陽王)에 책봉한 일을 필두로 하여 유불의(劉不疑)19)를 상산왕(常山王), 유산(劉山)20)을 양성후(襄成侯), 유조(劉朝)21)를 지후(軹侯), 유무(劉武)22)를 호관후(壺關侯)에 각각 봉했다. 여태후가 대신들에게 여씨 일가를 제후왕으로 봉할 것을 주청하도록 넌지시 암시하자, 대신들은 역후(酈侯)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으로 책봉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여태후가 허락했다. 혜제 3년 기원전 192년에 건성후(建成侯) 여석지(呂釋之)23)가 죽었을 때 그의 작위는 장자 여칙(呂則)에게 전해졌으나, 혜제 7년에 여칙이 죄를 지어 폐출되어 작위를 상실했었다. 이에 여태후가 건성후의 작위를 여칙의 동생 여록으로 하여금 잇게 하고 호릉후(胡陵侯)로 개봉했다.

고황후 2년 기원전 186, 상산왕 유불의가 죽자 그의 동생 양성후(襄成侯) 유산(劉山)를 상산왕의 자리를 잇게 하고 이름을 유의(劉義)로 바꿨다. 11월 여왕(呂王) 여대가 죽자. 숙왕(肅王)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아들 여가(呂嘉)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했다.

고황후 3년 기원전 185년은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

고황후 4년 여수(呂嬃)24)를 임광후(臨光侯)에 봉하고, 여타(呂他)25)를 유후(兪侯), 여경시(呂更始)를 췌기후(贅其侯), 여분(呂忿)을 여성후(呂成侯)에 각각 봉했다. 또 과거에 제후왕의 승상을 지낸 다섯 사람을 후()에 봉했다.

선평후 장오와 노원공주의 딸이 효혜제의 황후였으나 끝내 후사가 없었다. 이에 고후는 황비에게 거짓으로 임신한 것처럼 위장시키고 후궁이 낳은 갓난아기를 안고 와 자신이 낳은 아이로 만든 후에 영아의 생모를 죽이고 태자로 세웠다. 혜제가 세상을 떠난 후 태자가 된 그 아이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사연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어린 황제가 우연한 기회에 자기의 생모는 살해당하고 자신은 효혜황후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가 원한에 차서 말했다.

황후는 무엇 때문에 나의 생모를 살해하고 나를 자기의 아들로 삼았단 말인가? 지금은 내가 나이가 어리지만 장성하면 반드시 그 원한을 갚으리라.

이 말을 전해들은 여태후는 몹시 걱정하여 혹시나 훗날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한 나머지 그를 비밀리에 영항(永巷)에 가두었다. 그리고는 황제가 중병에 걸렸으므로 좌우 대신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황제를 만나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말했다.

대저 천하를 얻어 만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하늘이 만물을 덮고 대지가 만물을 포옹하듯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무해야만 비로소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황제를 섬기는 법이오. 또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편안한 마음으로 융합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고 할 수 있소. 지금 황제께서는 병환을 얻은 지 오래되었으나 쾌유치 않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제위를 이어받아 종묘에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으니 천하를 그에게 맡길 수 없게 되었소, 그러니 마땅히 다른 사람을 찾아 그를 대신하도록 해야 하오.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황태후께서 천하의 만백성을 위해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키는 데에 이토록 사려깊게 숙고하셨으니, 저희들은 머리 숙여 명을 받들고자 하옵니다.

태후는 황제를 폐위하고 몰래 죽였다. 5월 병진 일에 상산왕 유의(劉義)를 황제로 세우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바꿨다. 연호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태후가 줄곧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지후(枳侯) 유조(劉朝)를 상산왕으로 올려 봉했다.

태위(太尉)라는 직책을 설치하고 강후 주발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고황후 5년 기원전 1838, 회양왕(淮陽王) 유강(劉强)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 호관후(壺關侯) 유무(劉武)를 회양왕으로 올려 봉했다.

고황후 610, 여왕(呂王) 여가(呂嘉)가 교만하여 발호한다는 소식을 들은 여태후는 그를 폐위시키고 숙왕(肅王) 여대(呂臺)의 동생 여산(呂産)을 대신 여왕에 봉했다. 그 해 여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제도혜왕의 아들 유흥거(劉興居)를 동모후(東牟侯)에 봉했다.

고황후 7년 정월, 조왕 유우(劉友)를 경사로 소환했다. 제려의 딸을 왕비로 맞은 유우는 그녀를 총애하지 않고 다른 애첩을 더 좋아했다. 왕비가 질투한 끝에 화가 치밀어 여태후에게 달려가 남편인 유우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면서 반역을 꾀했다고 참소했다.

여씨가 어떻게 왕에 봉해질 수 있는가! 태후가 100살이 되면 반드시 내가 그들을 주멸하겠다.

여태후가 노기충천하여 즉시 조왕을 소환했다. 경사에 당도해 관저에 머무르고 있던 조왕을 여태후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며 위병들을 시켜 연금시키고 음식도 주지 못하게 했다. 조왕의 어의가 몰래 음식을 주다가 발각되어 죄를 받았다. 조왕이 굶어 죽어가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여씨가 권력을 전횡하니 유씨가 위태롭구나,

제후왕을 협박하여 여씨의 딸을 강제로 왕비로 주었네!

질투심에 사로잡힌 왕비가 죄가 있다고 나를 모함하니,

참소하는 여자가 나라를 어지럽히는데도 황제는 이를 깨닫지 못하네.

나에게는 충신이 없어서인가,

무슨 연유로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는가?

황량한 들판에서 자결하나니 푸른 하늘이 시비를 가려주리라!

! 못내 한스럽구나, 미리 자살하지 못했음이!

왕이 굶어 죽었으니 동정할 자 누가 있겠는가?

여씨가 천리를 끊어 버리니 하늘에 복수를 부탁할 수밖에...

 

諸呂用事兮劉氏危(제려용사혜유씨위)

迫脅王侯兮彊授我妃(박협왕후혜강수아비)

我妃旣妬兮誣我以惡(아비기투혜무아이악)

讒女亂國兮上曾不寤(참여난국혜상증불오)

我無忠臣兮何故棄國(아무충신혜하고기국)

自結中野兮蒼天擧直(자결중야혜창천거직)

于嗟不可悔兮寧蚤自財(우차불가회혜영조자재)

爲王而餓死兮誰者憐之(위왕이아사혜수자련)

呂氏絶理兮託天報仇(여씨절리혜탁천보구)

 

 

정축 일에 유폐되어 굶어죽은 조왕은 평민의 장례 절차에 따라 장안성 밖 평민들의 묘역에 묻혔다. 기축 일, 일식 현상이 일어나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마음이 불쾌하고 답답해진 여태후가 이를 싫어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나 때문이로다.

2, 양왕 유회(劉灰)를 조왕으로 개봉하고 양왕의 자리에는 여왕 여산(呂産)을 옮겨 앉혔다. 그러나 여산은 봉국에 부임하지 않고 조정에 남아 황제의 태부(太傅)를 겸임하도록 했다. 여왕에는 황자(皇子) 평창후(平昌侯) 유태(劉太)를 봉하고 양나라는 여국(呂國)으로 개명했으며 원래의 여국은 제천국(齊川國)으로 개명했다. 여수(呂嬃)의 딸을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에게 출가 시키고 유택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여씨 일족을 제후왕으로 봉한 여태후는 자기가 죽고 난 훗날 유택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운 나머지 그를 낭야왕(琅邪王)으로 임명하여 그의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조왕으로 개봉된 양왕 유회(劉灰)가 마음 속으로 불판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여태후는 여산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켜 왕후로 삼게 했다. 조왕비의 시종과 관원들이 방자하게 굴며 몰래 조왕을 감시했음으로 조왕은 자유로이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조왕에게는 총애하는 첩이 하나 있었는데 조왕비가 사람을 시켜 짐주(鴆酒)로 그녀를 독살했다. 조왕이 네 수의 시를 지어 악공(樂工)들로 하여 이를 부르도록 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조왕이 6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는 조왕이 여자 때문에 황실의 예법을 저버렸다고 여겨 즉시 그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권한을 박탈했다.

선평후 장오가 세상을 떠나자, 여태후는 그의 아들 장언을 노왕(魯王)에 봉하고 장오에게 노원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해 가을, 여태후는 대왕 유항(劉恒)에게 사자를 보내 그를 조왕으로 바꾸어 개봉하려는 뜻을 전하여 그의 마음을 떠보려고 했다. 대왕은 여태후의 뜻을 사양하고 대국에 머물면서 변방을 지키겠다고 원했다.

태부 여산과 승상 진평 등은 무신후(武信侯) 여록이 열후 가운데 서열이 제일 높음으로 그를 조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진언했다. 태후가 허락하고 아울러 여록의 부친 강후(康侯)를 조소왕(趙昭王)으로 추존하도록 했다. 9월 세상을 떠난 연영왕(燕靈王) 유건(劉建)에게는 첩에게 난 소생이 있었다. 태후는 사람을 보내 첩의 소생을 죽여 그의 후손을 없애고 봉국(封國)을 폐했다.

고황후(高皇后) 8, 기원전 18010월 여숙왕(呂肅王)의 아들 동평후(東平侯)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높여 봉하고 여통의 동생 여장(呂莊)을 동평후(東平侯)에 봉했다. 3월 중순, 여태후가 불제(祓祭)26)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도(軹道)27)를 지나는데 개처럼 보이는 짐승이 그녀의 겨드랑이를 툭 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점을 쳤는데 그녀에게 독살당한 조왕 여의(如意)가 귀신이 되어 내리는 앙화때문이라고 했다. 그 후부터 여태후는 겨드랑이에 통증을 느끼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여태후의 외손자 노원왕 장언은 어린 나이에 또 일찍 부모를 잃어 의지할 데 없는 고아에 유약했음으로 장오(張敖)의 옛날 희첩이 낳은 두 아들 중 장치(張侈)는 신도후(信都侯)에 봉하고 장수(長壽는 락창후(樂昌侯)에 봉해 노원왕을 보좌하도록 했다. 이어서 중대알자(中大謁者)28) 장석(張釋)을 건릉후(建陵侯)에 봉하고 여영(呂榮)을 축자후(祝玆侯)에 봉했다. ()이나 승()의 직책을 맡은 궁중의 여러 환관들을 관내후(關內侯)29)에 봉하고 각각 식읍 5백 호씩을 주었다.

  7월 병이 위중하게 된 여태후는 조왕 여록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북군을 지휘하도록 하고 여왕(呂王) 여산은 남군을 통솔하도록 했다. 여태후가 여산과 여록을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신 후에 대신들과 무릇 유씨가 아닌 자가 제후왕이 된다면 천하가 함께 그를 토벌해야 한다.’라고 맹약했다. 지금 여씨들이 제후왕이 되었으니 대신들은 틀림없이 마음속으로 불평하고 있다. 내가 죽게 되면 황제는 나이가 어려 대신들이 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때는 반드시 병권을 장악하여 황궁을 지키고 나의 장례를 먼저 치르기 전에 반드시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황궁을 보위하도록 하라. 그 전에는 절대로 나의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제압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신사(辛巳) 일에 여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여태후는 죽기 전에 조서를 남겼는데 제후왕들에게는 각각 황금 1천 근과, (), (), 열후(列侯), (), () 등의 관리들에게는 그 봉록에 따라 황금을 하사하고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여록(呂祿)의 딸을 황후로 삼게 했다.

여태후의 장례가 끝나자 좌승상 심이기(審食其)는 황제의 태부(太傅)가 되었다.

 용기가 있고 힘이 센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은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의 동생이다. 두 사람은 모두 제애왕(齊哀王) 유양(劉襄)의 동생들로 장안에 살았다. 당시 제려씨가 정권을 전단하여 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고제의 옛날 대신들인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 등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여록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주허후는 아무도 몰래 그녀로부터 여씨들의 옴모를 알게 되었다. 제려(諸呂) 씨들에게 주살될 것을 두려워한 주허후는 사람을 몰래 그의 형 제애왕에게 보내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시켜 제려씨들을 주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면서 자신은 조정대신들과 연합하여 안에서 내응하려고 했다. 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당시 제나라 재상을 맡고 있던 소평(召平)이 말을 듣지 않았다. 8월 병오에, 제왕이 사람을 시켜 소평을 죽이려고 했으나 소평이 알고 군사를 일으켜 제왕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왕은 결국 제나라 상국 소평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격시켜 사술을 써서 낭야왕(琅邪王)의 군사를 빼앗아 합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진군했다. 상세한 이야기 제도혜왕세가에 있다.

 제왕이 즉시 제후왕들에게 격문을 보내 말했다.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아들과 동생들을 제후왕으로 봉할 때 도혜왕(悼惠王)을 제왕에 봉했습니다. 도혜왕께서이 돌아가시자 효혜제께서는 유후(幽侯) 장량(張良)을 시켜 본인에게 제왕의 뒤를 잇도록 했습니다. 효혜제께서 돌아가시자 여태후가 정권을 오로지하고 나이가 많아 제려씨들의 말을 듣고 황제를 폐하고 다른 사람으로 세우는 일을 멋대로 했습니다. 또한 세 명의 조왕을 살해했으며, (), (), () 등 세 나라를 폐하고 제려씨들을 왕으로 삼고 제나라를 넷으로 쪼갰습니다. 충신들이 간했으나 황제는 어지러운 말에 현혹되어 듣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태후께서 돌아가시고 황제는 아직 나이가 어려 천하를 다스릴만한 역량이 없어 그저 대신들과 제후들에게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씨 일가는 제멋대로 자신들의 벼슬을 올리고 병권을 장악하여 위세를 과시하며 열후와 충신을 협박하는가 하면, 황제의 명령인 것처럼 사칭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유씨들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에 과인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들어가 부당하게 제후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주살하려고 합니다.

경사에서 제애왕의 기병소식을 듣게 된 상국 여산 등은 즉시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제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형양에 당도한 관영은 부하장수들과 의논하며 말했다.

관중의 병권을 쥐고 있는 제려씨들이 유씨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한다. 오늘 내가 제군을 격파하고 경사에 돌아가 승전을 고한다면 여씨들의 세력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관영은 더 이상 동진하지 않고 형양에 주둔하고 움직이지 않고 사자를 보내 제왕과 제후들에게 강화를 맺고 있다가 여씨들이 란을 일으키면 힘을 합하여 그들을 주살하자고 알렸다. 제왕이 듣고 그 즉시 군사를 물리쳐 제나라의 서쪽 경계로 후퇴하여 관영의 약속을 기다렸다.

 여록과 여산이 관중에서 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안으로는 강후와 주허후의 존재가 껄끄러웠고 밖으로는 제()와 초() 두 나라를 두려워했으며 또한 관영이 배반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일단 관영의 군사들과 제군이 교전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즉시 결행하지 못했다. 당시 제천왕(齊川王)은 유태(劉太), 회양왕(淮陽王)은 유무(劉武), 상산왕(常山王)은 유조(劉朝)로 세 사람은 명목상으로는 소제(少帝)의 동생들이고 노원왕(魯元王) 장언(張偃)은 여태후의 외손이었으나 모두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봉국에 부임하지 않고 장안에 머물고 있었다. 경성을 지키는 남군과 북군의 대장은 여씨 일족인 조왕 여록과 양왕 여산이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과 관리들은 모두 자기 목숨에 대한 안전을 자신할 수 없었다.

태위의 직을 맡고 있었던 강후 주발은 군중으로 들어가 군사를 부릴 수 없었다. 그때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30)은 노환으로 집에 있었고 그의 아들 역기(酈寄)는 여록과 사이가 좋았다. 강후와 승상 진평이 모의하여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하자 역상은 그의 아들 역기에게 조왕 여록을 찾아가 설득하도록 시켰다. 역기가 여록을 찾아가 자기 부친이 하는 말을 전했다.

고제께서는 여태후와 함께 천하를 평정한 후에 유씨들은 9명이, 여씨들은 3명이 제후왕에 봉해졌소. 그것들은 모두 대신들의 의론을 거쳐 제후들에게 공포되었고, 제후들 역시 그것이 합당하다고 했소. 오늘 태후께서 돌아가셨으나 황제는 나이가 어리고 그대는 조왕의 인끈을 차고서도 서둘러 봉국에 부임하여 번국을 지키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상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거주하여 대신들의 의심을 사고 있소. 그대는 어찌하여 상장군의 인장과 군사들을 태위에게 넘기지 않고 있소? 청컨대 양왕에게도 상국의 인장을 반납하고 대신들과 맹약을 행하고 봉국으로 돌아가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제나라는 군사를 해산할 것이며 대신들은 안심하고 그대는 베개를 높이 베고 천리 땅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여록이 역기의 말이 옳다고 믿고 상장군의 인장을 반납하고 군사를 태위에 속하게 하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시켜 여산을 포함하여 제려씨들의 부로들에게 고하게 하자 어떤 사람은 옳다하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해서 의견이 분분하여 결정하지 못했다. 역기의 말을 믿고 있었던 여록이 사냥을 나가다 고모가 되는 여수(呂嬃)의 집을 들려 그 일을 고했다. 여수가 대노하여 말했다.

만약 장군의 신분으로 병권을 버린다면 여씨들은 몸 붙일 데가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주옥과 보기들을 모두 꺼내와 당하로 팽개치며 말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인데 구태여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좌승상 심이기(審食其)가 면직되었다.

8월 경신 날 새벽, 당시 어사대부의 직을 대행하고 있던 평양후 조줄(曹窋)이 상국 여산을 찾아가 정사를 의논했다.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돌아온 랑중령(郎中令)31) 가수(賈壽)가 여산을 나무라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지금까지 봉국으로 부임하지 않으시다가 이제야 가신다고 하는데 과연 가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관영과 제초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여씨들을 주멸하려 한다고 상세히 고하고 여산으로 하여금 황급히 궁궐로 들어가 기선을 취하라고 재촉했다. 평양후가 듣고 승상과 태위에게 달려가 전했다. 태위가 북군의 지휘부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북군을 지휘할 수 있는 신표인 부절(符節)은 양평후(襄平侯)32) 기통(紀通)이 갖고 있었다.

 기통이 부절을 지참하고 거짓으로 황제의 칙령이라고 전하여 태위를 북군의 진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태위가 다시 역기와 전객(典客)33) 유게(劉揭)에게 령을 내려 여록에게 달려가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황제께서 태위인 나에게 북군을 맡도록 하고 그대는 봉국에 부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둘러 장군의 인장을 반납하고 경사를 떠나도록 하시오. 명에 따르지 않는다면 화를 입게 될 것이오.

여록은 역기(酈寄)가 자기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즉시 장군의 인장을 풀어 전객에게 주고 태위로 하여금 북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태위가 영문으로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고, 유씨들을 따르겠다는 군사들은 왼쪽 어깨를 들어내라!

군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들어내어 유씨들을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태위가 북군의 장군 막사에 당도하기도 전에 여록은 이미 장군의 인장을 풀어 놓은 뒤에 군영을 떠났음으로 북군의 지휘권은 결국 태위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군은 아직 여산이 지휘하에 있었다. 평양후 조줄이 여산의 음모를 듣고 승상 진평에게 고했다. 이에 진평은 주허후를 불러 태위를 돕도록 했다. 태위는 주허후에게 군문을 지키게 하고 평양후를 시켜 위위(衛尉)에게 자기의 명을 전하게 했다.

상국 여산을 궁문에 들이지 말라!

여록이 이미 북군의 군영을 떠난 지 모르고 있었던 여산이 미앙궁(未央宮)으로 쳐들어가 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위병들에게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궁문 앞에서 배회했다. 평양후는 싸움에서 여씨들을 이기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태위에게 달려가 상황을 전했다. 태위는 그때까지도 여씨 종족들에 대항해서 이길 수 없다는 두려운 생각으로 감히 여씨들을 주살하라고 확실히 명을 내리지 못하고 궁문을 지키고 있던 주허후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시간을 지체하지 하지 말고 궁궐로 들어가 황제를 지키시오.

주허후가 군사를 청하자 태위는 1천여 명의 군사를 내주었다. 주허후가 미앙궁에 미처 이르기 전에 궁정의 뜰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여산을 발견했다. 그때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주허후가 여산을 공격하자 여산은 달아나고 갑자기 하늘에서 바람이 크게 일어 여산을 따르던 관원들은 혼란에 빠져 감히 주허후의 군사들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주허후가 여산의 뒤를 추격하여 랑중령(郞中令)의 부중에 딸린 변소에서 살해했다.

 주허후가 이미 여산을 살해하자 황제는 알자에게 부절을 주어 주허후의 노고를 위로하도록 했다. 주허후가 알자에게서 부절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알자가 주지 않았다. 주허후는 할 수 없이 알자와 함께 수레에 타고 부절을 신표로 삼아 달려가 장락궁(長樂宮)의 위위(衛尉) 여갱시(呂更始)의 목을 벴다. 주허후가 돌아와 북군의 군중에서 태위에게 고했다. 태위가 일어나 주허후에게 절을 하고 그 공로를 치하하면서 말했다.

오직 여산만이 근심거리였는데 주허후께서 주살했으니 천하는 이미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즉시 군사들을 나누어 여씨 종족에 속하는 남녀나 나이를 불문하고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했다. 신유일에 여록을 잡아 참하고 여수는 몽둥이로 쳐서 죽었다. 또 사람을 보내 연왕 여통(呂通)을 주살하고 노왕 장언은 폐위시켰다. 임술일, 황제의 태부 심이기가 좌승상으로 복위되었다. 무진일 제천왕을 양왕으로 옮기고 조유왕(趙幽王) 유우(劉友)의 아들 유수(劉遂)를 조왕에 봉했다. 주허후 유장을 제나라로 보내 제려씨들을 주살한 일을 고해 군사를 해산하도록 했다. 형양에 주둔하고 있던 관영 역시 군사를 해산시키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여러 대신들이 만나 은밀히 상의했다.

소제와 양왕, 회양왕, 상산왕 등은 모두 효혜제의 진짜 아들이 아니오. 여후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의 아들을 궁으로 들여온 후에 그 모친을 죽이고 후궁에서 양육하여 혜제의 아들로 만들어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제후왕으로 만들어 여씨들의 세력을 강화시킨 것이오. 지금 이미 여씨 종족들은 멸족되었으나 그들이 세운 황제나 제후왕들을 그대로 남겨놓을 경우 그들이 장성해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몸 붙일 데가 없게 되오. 차라리 제후왕들 중에 어진 사람을 찾아 새로 세우는 편이 좋겠소.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제도혜왕은 고제의 장자고 그의 적자가 지금 제왕으로 있으니 혈통을 말한다면 고제의 적장손 계통입니다. 마땅히 황제로 세울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대신들이 모두 말했다.

여씨들이 외척으로 악행을 자행하여 유씨들의 사직을 위협하여 거의 끊어지게 할 뻔 했고 공신들을 혼란에 빠뜨렸소. 지금 제왕의 모친은 사()씨로 그 외삼촌 사균(駟鈞)은 포악한 자요. 우리가 제왕을 황제로 세운다면 또 다른 여씨가 등장할 뿐이오.

그래서 회남왕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그 외가 사람들도 역시 포악하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했다.

대왕(代王)이야말로 고제의 아들 중 지금 유일하게 살아있는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오. 위인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며 도량이 넓고 후덕합니다. 태후의 집안 박() 씨들은 매사에 조심하여 인성이 훌륭합니다. 또한 나이 많은 사람을 세우는 것이니 순리에도 맞고 그의 어진 마음과 효성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으니 마땅히 세울만 합니다.

그래서 서로 상의한 끝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대왕을 불렀다. 대왕이 사람을 보내와 사절한다는 말을 전했다. 다시 사자를 대왕에게 보내자 그때서야 대왕은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대 땅을 출발하여 장안을 향해 출발했다. 윤달 9월 말 기유일에 장안에 당도한 대왕은 대왕(代王) ()에 여장을 풀었다. 대신들이 모두 달려와 알현을 행하고 천자의 옥새(玉璽)를 바치며 일제히 대왕을 천자로 받들었다. 대왕이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군신들이 계속해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도록 청하자 결국 허락했다.

동모후 유흥거(劉興居)가 말했다.

여씨들을 주멸하는데 세운 공이 없음으로 청컨대 황제를 위해 궁궐을 청소하는 일을 맡고 싶습니다.

그래서 태복(太僕)의 직에 있던 등공(縢公) 여음후(汝陰侯)34)와 함께 입궁하여 소제를 보고 말했다.

그대는 유씨가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없소.

두 사람은 즉시 황제의 좌우에 극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위병들을 해산시켜 쫓아버렸다. 그 중 몇 명이 물러가려고 하지 않자 환자령(宦者令)35) 장택(張澤)이 타이르자 그들 역시 물러갔다. 등공이 수레를 불러 소제를 태우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소제가 물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등공이 대답했다.

궁궐 밖의 관사에 모실 것입니다.

등공은 소제를 소부(少府)에 속하는 관사에 머물게 하고 천자가 타는 법가를 몰고 대왕의 관저로 가서 말했다.

궁궐을 청소했습니다.

대왕이 그날 저녁 미앙궁으로 들어갔다. 극을 들고 단문(端門)36)을 지키고 있던 열 명의 알자(謁者)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천자가 안에 계신데 그대는 도대체 누구이건데 황궁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대왕이 태위에게 고하자 태위가 달려와 알자들을 설득했다. 알자들은 모두 무기를 거두고 물러갔다. 대왕이 즉시 입궁하여 정무에 임했다. 그날 밤, 관리를 시켜 양왕, 회양왕, 상산왕 및 소제를 관사에서 모두 죽였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대왕은 재위 23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

 

<여태후본기 끝>

 

주석

1)정도(定陶) : 지금의 하남시 정도시로 중국 고대로부터 상업의 중심도시로써 유명했다.

2)영항(永巷) : 원래 궁녀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방과 방이 마치 골목길처럼 연이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후에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고 장()과 승()의 관리를 두어 관리했다.

3)유우(劉友) : 고조의 아들로 고조 10년 기원전 198년 회양왕(淮陽王)으로 봉해졌다. 혜제(惠帝) 원년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가 여태후에 의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조왕으로 개봉되었다. 여태후의 전권을 반대한 까닭에 박해를 받아 죽었다. 시호는 유().

4)역후(酈侯) : 여택의 둘째 아들로 그의 형 여산(呂山)이 양왕(梁王)으로 봉국을 옮기자 여왕(呂王)의 제후왕을 이어받았다.

5)여택(呂澤) : 여후의 큰오빠다. 한고조 유방이 기의할 때 문객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한중(漢中)으로 들어가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으며, 다시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한 후에 동진할 때 군사를 이끌고 가장 먼저 탕()에 입성했다가 유방이 팽성이 싸움에서 항우에게 지고 패주할 때 뒤를 따르며 호위했다. 고조 6눈 기원전 201년 주여후(周呂侯)에 개봉되었다가 기원전 199년에 죽자 영무후(令武侯)에 추증되고 다시 도무왕(悼武王)에 추서되었다.

6)유교(劉交) : 유방의 아복동생으로 자는 유(). 독서를 좋아하고 예능에 재능이 많았다. 어렸을 때 부구백(浮丘伯)으로부터 시경(詩經)을 수학했다. 진나라 말 고조가 기병할 때 종군하여 관중에 같이 들어가 그 공으로 문신군(文信君)에 봉해졌다. 다시 고조가 항우와 다툴 때 종군하여 항상 곁에서 수발했다. 기원전 204년 한신이 차지하고 있던 초왕의 자리를 대신했다. 시호는 초원왕(楚元王)이다. 기원전 179년에 죽었다.

7)유비(劉肥) : 고조의 아들로 혜제(惠帝)의 이모형이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혜제 2년 기원전 193년 입조하여 혜제와 같이 술을 마시는데 군신의 예를 취하지 않고 형제처럼 대했다. 여후(呂后)가 노하여 술잔에 독을 타서 죽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는 내사(內史) ()의 조언을 쫓아 자기 영지의 일부인 양성군(陽城郡)을 헌납하여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魯元公主)의 탕목비에 충당하게 했다. 이로써 여후는 유비를 용서했다. 기원전 189년에 죽었다.

8) 탕목읍(湯沐邑) :원래는 고대에 제후들이 천자를 조현할 때 영지의 일부를 하사하여 그곳에서 나오는 부세로 제후들이 조현을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토록 한 것을 의미했으나 한나라 이후 황제, 황후, 공주 등의 사유토지를 지칭했다.

9)심이기(審食其)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패현(沛縣) 출신이다. 진말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할 때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유방이 정벌을 위해 밖으로 출전할 때 그는 패현에 남아서 여태후와 아들 유영(劉盈)을 받들었다. 이윽고 초한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태후와 유영이 항우에게 사로잡히게 되자 그는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후에 초한이 홍구를 경계로 강화를 맺을 때 태공 등의 유방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어 한나라에 돌아왔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섭정이 된 여후는 심이기를 좌승상에 임명하고 매우 신임하고 총애했다. 문제 3년 기원전 177년 회남왕 유장(劉長)에 의해 살해되었다.

10) 낭중령(郎中令) :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으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낭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11)풍무택(馮毋擇) :기원전 185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로 진말 여태후의 큰오빠 여택을 위해 낭중이 되어 유방의 기의군에 참여했다. 유방이 서진하여 관중으로 들어갈 때 그는 군사들을 이끌로 진격하여 옹()을 취했다. 초한 전쟁 중에는 항우를 공격하는데 전력을 다해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 박성후(博成侯)에 봉해지고 3년 후에 죽었다.

12)유비(劉肥) :고조의 서출 장남으로 여후(呂后)와 정식 결혼 전에 조씨(曹氏)와 정을 통해 낳았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제왕에 봉해졌다. 재위 13년 만인 기원전 189년에 죽고 시호는 도혜(悼惠).

13)유장(劉章) :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아들이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에 주허후(朱虛侯)에 봉해졌다. 여후가 죽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할 때 그는 미앙궁에서 승상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고 있던 여산(呂産)을 살해했다. 그 공으로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성양왕(城陽王)에 봉해졌다. 2년 후에 죽었다.

14)() : 제수(齊壽) 혹은 제수(齊受)라고 부른다. 진말 고조가 유() 땅에서 기병할 때 그는 남아서 고조의 가족을 돌봤다. 이어서 한왕에 봉해진 고조에 의해 효기도위(梟騎都尉)에 임명된 그는 항우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후에 루번(樓煩)의 장수를 포로로 잡았다. 서한이 창건되자 제나라의 승상(丞相)이 되었다가 고후 원년 기원전 187년 평정후(平定侯)에 봉해졌다가 재위 9년 후인 기원전 179년에 죽었다.

15)양성연(陽城延) : 성은 양성이고 이름은 연이다. 진말 고조가 기병할 때 겹()에서 합류하여 군장(軍匠)이 되었다. 한중(漢中)에 들어갔을 때는 소부(少府)가 되었으며 후에 한나라가 창건되자 장락궁과 미앙궁을 건설했으며 후에 장안성 축조의 책임을 맡아 완성했다. 그 공로로 여태후 원년 오후(梧侯)에 봉해져 5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기원전 182년에 죽었다.

16) 여종(呂種) : 여태후의 작은 오빠 여석지(呂釋之)의 둘째 아들이다.

17) 여평(呂平) : 여태후의 언니 장후(長姁)의 아들이다.

18)장매(張買) : 진말 유방이 기병할 때 기병 장수였던 그의 부친 장월인(張越人)과 함께 참전했다. 군공을 쌓아 태중대부에 임명되었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 남궁후(南宮侯)에 봉해졌다. 여태후가 죽자 진평과 주발이 제려씨를 주멸할 때 여씨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같이 살해되었다.

19) 유불의(劉不疑) : 역시 혜제의 아들로 고후 2년 어린 나이에 죽었다.

20) 유산(劉山) : 혜제의 아들로 유불의가 죽자 상산왕의 작위를 잇고 혜제가 죽자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름을 유의(劉義)로 바꿨다. 그는 비록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여태후가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음으로 기년이 없다.

21)유조(劉朝) : 혜제의 아들로 여태후가 죽고 문제가 즉위하자 諸呂 씨가 주살 될 때 회양왕(淮陽王) 유무(劉武) 및 소제(少帝) 유홍(劉弘 : 劉山)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22)유무(劉武) : 혜제의 아들로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 호관후(壺關侯)에 봉해졌다가 6년 기원전 181년 회양왕(淮陽王)이 되었다. 문제가 즉위하자 여씨 일당으로 취급되어 살해되었다. 한문제의 아들이며 한경제의 동생인 양효왕 유무와는 동명이인이다.

23)여석지(呂釋之) : 여태후의 작은 오빠로 기원전 193년에 죽었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유방이 천하를 평정하는데 세운 공으로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가 9년 만인 기원전 192년에 죽었다. 시호는 건성강후(建成康侯). 여태후 7년 기원전 181년 조소왕(趙昭王)에 추존되었다.

24)여수(呂嬃) : 여태후의 여동생으로 번쾌의 부인이다.

25)여타(呂他) : 여타는 서한의 개국공인인 여영(呂嬰)의 아들이다. 여영은 진말 유방이 기병할 때 군량창고를 지키는 하급관리인 연오(連敖)가 되어 종군했다. 여영은 한중에 들어간 유방에 의해 도위(都尉)가 되어 제후들을 평정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여타가 그 공로를 계승하여 유후(兪侯)에 봉해졌다.

26)불제(祓除) : 중국 고대에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거행한 일종의 제사의식이다. 통상적으로 정월이나 삼월에 종묘나 사직단 혹은 강변에서 지냈다.

27) 지도(軹道) : 한나라 때 최소 행정구역 단위인 정()의 이름으로 지도(枳道)라고도 한다. 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북에 있었다. 진시황본기에 자영(子嬰)이 백마(白馬)가 끄는 흰 수레 소거(素車)에 천자의 옥쇄와 절부를 받들고 지도로 나와 항복했다. ’라는 기사가 있다. 중국 고대의 도로 이름으로 하남 제원현(濟原縣)에서 산서성 고원지대와 예북평원(豫北平原)을 연결하는 교통로였다. 역대 왕조의 군사상 필쟁지지(必爭之地)였다.

28)중대알자(中大謁者) : 대알자는 황제의 문서를 수발하고 칙령을 전하며 빈객의 접대 등을 관장하는 관리다. ()은 환관이 맡았음을 의미한다.

29)관내후(關內侯) : 원래 전국시대 때 진()나라의 작위 제도로 한나라가 따랐다. 20등작 중 19등에 해당하는 작위로 20등작인 철후(徹侯, 혹은 열후(列侯))와 함께 후로 호칭되었으나 철후와는 달리 봉국이 없었기 때문에 관내(關內)의 왕성 지역에 거했음으로 붙여진 호칭이다.

30) 역상(酈商)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80년에 죽은 서한의 개국공신이다.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경내의 진류(陳留) 고양(高陽) 출신이다. 진말 진승(陳勝)이 기의하자 그는 수천 명의 장정을 모아 기병하여 호응했다. 진이세 3년 기원전 207년 그의 형 역이기(酈食其)의 소개로 유방을 접견하고 기()의 군졸들을 모두 이끌고 귀의하여 유방의 비장(裨將)이 되었다.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장사(長社)를 공격할 때 성루에 가장 먼저 올라 그 전공으로 신성군(信成君)에 봉해졌다. 계속해서 유방이 완성(宛城) 등의 17개 성을 공략할 때 활약하여 장군으로 승진하고 유방으로부터 특명을 받아 순관(旬關 : 지금의 섬서성 순양(旬陽))으로 나아가 서진하여 한중을 평정했다. 진나라가 망한 후에 농서도위(隴西都尉)에 임명되어 북지군(北地郡)과 상군(上郡)을 공략했다. 곧이어 장한(章邯)의 부장(部將) 옹장군(雍將軍), 주류(周類) 소장(蘇駔) 등의 부대를 패퇴시키고 그 군사를 규합하여 한군 주력으로 삼아 삼진(三秦)을 평정하는데 활약했다. 그 공으로 식읍 6천호를 하사받았다. 이어서 초한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나가 동진하여 거야(巨野)에서 초군의 명장 종리매(鍾離昧)가 이끄는 초군을 대파했다. 그 공으로 양나라의 상국으로 특임되고 식읍 4천호가 더해졌다. 계속해서 유방을 위해 종군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항우를 멸하는데 주역을 담당했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연왕 장도(臧荼)가 반하자 종군하여 탈룡(脫龍)과 역수(易水) 두 곳에서 반군을 격파했다. 이에 명목상으로 우승상에 오르고 탁후(涿侯)에 봉해졌다. 다시 주발과 함께 계속 북진하여 대() 땅을 평정하고 대나라 상국 정종(程縱) 등을 잔당들을 포로로 잡았다. 경사로 돌아와 위위(衛尉)가 되어 태상황의 호위를 맡았다. 후에 다시 진희(陳稀)와 영포(英布)의 토벌전에 종군했다. 고조12년 기원전 195년 곡주후(曲周侯)로 개봉되었다. 같은 해에 고조가 붕어했다. 여태후와 심이기가 모의하여 고조의 장수들을 모조리 주살하려고 고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상을 발하지 않자 그는 심이기를 설득하여 그 계획을 중지하도록 했다. 후에 병이 들어 오랫동안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다가 여태후 8년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자 그는 주발의 강압에 의해 그의 아들 역기(酈寄)를 시켜 북군의 병권을 갖고 있던 여록(呂祿)을 유인하여 군영을 떠나게 했다. 순조롭게 북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주발은 제려씨들을 모두 멸족시켰다.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31)랑중령(郞中令) :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으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낭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32)양평후(襄平侯) : 기성(紀成)의 아들 기통(紀通)을 말한다. 한고조 유방을 따라 종군하다가 진중에서 죽은 기성의 공훈으로 그 아들 기통이 봉해졌다.

33)전객(典客) :중국 고대왕조의 관명으로 제후들과 이민족들과 사무를 관장했던 진한시대 때 9경 중의 한 사람이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大鴻臚)로 다시 변경했다.

34)하후영(夏侯嬰)을 말한다.

35)환자령(宦者令) : 환자(宦者)는 고대 궁정 안에서 황제와 그 가족들의 수발을 들던 내관이다. 즉 환관(宦官), 중관(中官), 내관(內官) 등으로 호칭된다. 주대에는 시인(寺人)이라고 불렀다. 진한(秦漢) 때는 소부(少部)에 속했고 엄인(閹人) 즉 거세한 남자로 충원했다. 한나라 때는 제후왕들도 두었다. 환자령은 내시들의 우두머리다.

36)단문(端門) : 궁궐의 남쪽 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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