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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본기(孝文本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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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8,978회 작성일 10-10-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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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10. 한문제(漢文帝)

 

 

효문황제(孝文皇帝)는 고조(高祖)의 여덟 아들 중 가운데 아들[중자(中子)]이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봄, 진희(陳豨)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대() 땅을 평정한 고조는 유항(劉恒)을 대왕(代王)에 봉하고 중도(中都)를 도읍으로 삼게 했다. 유항은 태후 박씨(薄氏)의 소생이다. 그의 대왕 재위 17년은 고황후(高皇后) 8년으로 기원전 180년이다. 그해 7월 고황후가 승하했다. 9월 여산(呂産)을 필두로 여씨(呂氏) 일가가 반란을 일으켜 유씨(劉氏) 천하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대신들이 함께 힘을 합쳐 여씨 일가를 주멸(誅滅)한 후 의견을 모아 대왕(代王)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 그것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에 기록 되어 있다.

 

승상 진평(陳平)과 태위(太尉) 주발(周勃) 등은 대왕(代王)을 맞이하기 위해 사자를 파견했다. 대왕은 좌우의 대신들과 낭중령(郎中令) 장무(張武) 등에게 자문을 구했다. 장무 등이 입을 모아 말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고제(高帝) 때의 대장(大將)들로써, 용병(用兵)을 잘하고 기만적인 책략에 능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대신의 지위에 머무르는 데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고제와 여태후의 위세가 두려워 그대로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여씨 일가를 주멸하여 장안(長安)을 피로 물들이고서 입으로는 대왕(代王)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이니, 가벼이 믿으시면 안 됩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병환을 핑계로 가지 마시고 사태를 관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중위(中尉) 송창(宋昌)이 나서서 말했다.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옳지 않습니다. ()나라 말기, 조정이 부패하자 각 나라의 제후들과 전국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동시에 구름처럼 봉기하여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긴 자가 만 명을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최후에 천자의 보좌에 오른 사람은 오직 유씨(劉氏)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호걸들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단념했습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고제께서 유씨의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시어 경계선이 개의 이빨처럼 들쭉날쭉 서로 맞물리게 하여 서로 견제하도록 하시니, 이것이 이른바 반석(磐石)처럼 굳건한 종족(宗族)들의 번국(藩國)입니다. 그래서 천하가 유씨의 강대한 세력에 신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왕조가 건립되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진()왕조의 가혹한 법령을 폐지했습니다. 새롭게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푸시니 사람마다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여 본분을 지켰음으로 인심이 동요하지 않고 안정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셋째입니다. 무릇 여태후의 위세로 여씨 종족 셋을 왕으로 세우고 정권을 장악하여 제 멋대로 휘둘러 댔습니다. 그러나 태위(太尉)가 부절(符節)에 의지하여 간신히 북군(北軍)에 들어가 한 번 크게 외치자 장병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왼쪽 팔을 들어내어 유씨(劉氏)에게 충성하고 여씨(呂氏)를 저버리겠다는 뜻을 나타내어 마침내 여씨 일가를 주멸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늘이 내려 주었지 결코 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제 설사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해도 백성들이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습니다. 어찌 저들의 무리가 또 다시 유씨들을 버리고 그들을 추종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씨가 안으로는 유씨의 친족인 주허후(朱虛侯) ()1)과 동모후(東牟侯) 흥거(興居)2)를 두려워하고, 밖으로는 오()와 초() 회남(淮南) 낭야(琅邪) () () 등의 황족 출신 제후왕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3). 이제 고제(高帝)의 아드님으로는 회남왕(淮南王)과 대왕(代王)이신 폐하뿐이십니다. 그중 대왕께서는 연장자이시며 어질고 덕망이 높으시며, 자애롭고 효성이 지극하기로 널리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천하의 인심이 대왕 폐하에 쏠려 있음을 알고 회남왕(淮南王) 대신 제위(帝位)에 추대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대왕(代王)은 박태후에게 이를 고하여 상의하기로 하고 잠시 결정을 미루었다. 그 사이에 귀갑(龜甲)을 이용하여 점을 쳐 보게 한 결과, 귀갑 위에 가로로 커다란 균열 무늬가 생겼다. 복사(卜辭)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커다란 가로 무늬가 이처럼 굳세니, 장차 천왕(天王)이 되어 하()나라의 계()처럼 부업(父業)을 계승하여 한()나라를 성대하게 빛내리라!”

대왕(代王)이 물었다.

과인은 이미 왕이거늘 또 무슨 왕이 된다고 하는가?

복자가 말했다.

복사(卜辭)에서 말하는 천왕(天王)이라 함은 바로 천자(天子)를 말합니다.”

그래서 대왕은 태후의 동생 박소(薄昭)를 장안(長安)에 보내 강후(絳侯) 주발(周勃)을 만나보게 했다. 주발 등의 대신들은 대왕을 천자로 추대하게 된 까닭을 박소에게 상세히 설명했다. 박소가 돌아와 고했다

그들이 한 말한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대왕은 밝게 웃으며 송창(宋昌)에게 말했다.

과연 그대의 말이 맞았습니다.”

대왕은 즉시 수레에 올라 송창에게 배승(陪乘)시키고, 장무(張武) 등 여섯 사람은 전거(傳車)를 타고 뒤따르게 하여 장안을 향해 떠났다. 일행이 이윽고 고릉(高陵)에 이르자 행렬을 멈추고 송창으로 하여금 먼저 장안성으로 들어가 사태의 추이를 알아보도록 시켰다. 장안성의 모든 관리들이 성문을 나와 송창을 위교(渭橋)에서 영접했다. 송창이 돌아와 사실대로 고하자 대왕이 수레를 달리게 하여 위교에 당도했다. 대신들이 모두 배알하면서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했다. 대왕이 수레에서 내려 신료들에게 답례했다. 태위 주발이 대왕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신이 독대하여 조용한 자리에서 긴밀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창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공적인 것이라면 공개적으로 말하도록 하시오. 만일 사적인 일이라면 대왕 폐하께서는 사사로운 말은 받아드릴 수 없소.????

주발은 무릎을 꿇고 황제의 옥쇄와 부절(符節)을 대왕에게 바쳤다. 대왕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대국(代國)의 관저로 가서 상의합시다.”

대왕이 수레를 타고 대국의 관저로 향해 출발하자 여러 신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승상 진평(陳平), 태위 주발, 대장군 진무(陳武), 어사대부 장창(張蒼), 종정(宗正) 유영객(劉穎客), 주허후(朱虛侯) 유장(劉章),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 전객(典客) 유게(劉揭)가 차례로 대왕 앞으로 나아가 재배를 올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황자(皇子) 유홍(劉弘) 등은 모두 효혜황제(孝惠皇帝)의 아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위를 계승할 수 없습니다. 저희들이 음안후(陰安侯)4), 경왕후(頃王后)5), 낭야왕(琅邪王), 종실(宗室), 대신(大臣), 열후(列侯)를 비롯한 2천 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급 관원들과 상의한 결과 모두들 입을 모아 '대왕(代王)께서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황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시니 고제의 계승자로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소서!”

대왕이 말했다.

고제의 종묘를 받드는 일은 나라의 대사요. 과인은 능력이 부족하여 종묘를 모시는 큰일을 감당하기에 부적하오. 바라건대 초왕(楚王)에게 청하여 적합한 인물을 물색해 보도록 하시오. 과인은 감당할 수 없소.”

군신들이 땅에 엎드려 재삼 간청했다. 대왕이 서쪽을 향해 앉아 세 차례나 극구 사양하자, 군신들이 대왕을 부축하여 남쪽을 향해 앉혔지만 대왕은 또 다시 두 차례나 사양했다. 승상 진평 등이 입을 모아 말했다.

소신들이 엎드려 헤아려 보건대 고제의 종묘를 받들 수 있는 분은 대왕뿐이시며, 천하의 제후들과 백성들조차도 적임자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소신들은 종묘와 사직을 위해 제위가 비게 되는 일을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헤아려 대왕께서는 소신들의 청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소신들은 삼가 다시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바칩니다.”

대왕이 말했다.

종실(宗室), 장상(將相), 제후(諸侯), 열후(列侯)들 중 모두 하나같이 과인보다 더 나은 적임자가 없다고 하니 과인은 감히 사양할 수가 없겠소.

마침내 대왕(代王)은 천자의 자리에 즉위했다. 군신들은 조당의 예의(禮儀)에 의거 봉록과 직급의 높고 낮음에 따라 대왕 앞에 시립했다. 이어서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과 동모후 유흥거가 명을 받아 먼저 황궁으로 들어가 깨끗이 청소하게 한 후 법가(法駕)를 몰고 나와 대국의 관저로 가서 황제를 영접했다. 황제는 그날 밤 미앙궁으로 들어가 집무를 시작했다. 황제는 송창을 위장군(衛將軍)6)에 임명하여 궁정과 도성의 위수(衛戍)부대를 통괄하도록 하고 장무(張武)를 낭중령(郎中令)7)에 임명하여 궁전을 순시하고 경위(警衛)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다시 전전(前殿)으로 돌아와 조당의 황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날 깊은 밤에 황제는 칙서를 내렸다.

근래에 정권을 장악한 여씨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둘러 대역무도한 음모를 꾸며 유씨들의 종묘를 위해(危害)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정의 장상(將相), 열후(列侯), 종실(宗室) 및 대신들이 그들을 주멸하여 응분의 징벌을 내렸다. 이제 짐()이 즉위하게 되었으니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하노라! 민가(民家)의 가장(家長)마다 작위(爵位)를 일급(一級)씩 하사하며, 그 아내들에게는 1백 호()당 일정량의 쇠고기와 술을 하사하라. 아울러 닷새 동안 온 천하의 사람들이 서로모여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하니 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효문황제 원년 기원전 17910월 경술일(庚戌日), 낭야왕(琅邪王) 유택(劉澤)을 연왕(燕王)으로 개봉했다.

신해일(辛亥日), 황제는 천자가 등극하는 섬돌에 올라 제사를 주관하고 고조의 묘를 배알(拜謁)했다. 우승상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고 태위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했다. 그리고 태위의 자리에는 대장군 관영을 임명했다. 여록에게 빼앗겼던 옛 제()와 초()의 봉지를 모두 본래의 제후왕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임자(壬子) , 황제(文帝)는 거기장군(車騎將軍) 박소(薄昭)를 대()에 파견하여 황태후를 서울 장안으로 영접해 오도록 했다. 황제가 조령(詔令)을 발했다.

여산(呂産)과 여록(呂祿)은 각기 스스로 상국과 상장군이 되어 황제의 칙령을 제멋대로 발해 장군 관영에게 군대를 주고 제()를 공격하도록 하여 유씨 천하를 빼앗으려 기도했다. 그러나 관영 장군은 제를 공격하지 않고 군대를 형양(滎陽)에 주둔시킨 채 도리어 제후들과 함께 여씨 일족을 주멸하려고 했다. 이윽고 여산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이 여산 등의 병권을 빼앗으려고 도모하는 중에 주허후 유장이 맨 먼저 여산 등을 주살했다. 태위 주발은 자신이 직접 양평후 기통(紀通)을 데리고 부절을 휴대하고 북군의 군영에 들어가고 전객 유게는 자신이 직접 조왕(趙王) 여록의 인신(印信)을 빼앗았다. 이제 그 공을 따져 태위 주발에게는 식읍 3천 호를 가봉(加封)하고 황금 5천 근을 상으로 하사한다. 그리고 유장과 기통에게는 각각 식읍 2천 호와 황금 1천 근씩을 상으로 하사한다. 전객 유게는 양신후(陽信侯)에 봉하고 황금 1천 근을 상으로 하사한다.”

12, 황제(文帝)가 말했다.

법령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준칙이므로, 법을 사용하는 목적은 포악함을 금지하고 사람들을 선량하게 인도하는 데에 있다. 이제 죄인들은 이미 법에 따라 처리하였는데, 다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그들의 부모처자 형제들까지 연좌(連坐)하여 모조리 잡아들여 치죄(治罪)하고 있다. 그러나 짐은 그런 방법에는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바라건대 경들은 내 말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해 보라.

관원들이 말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법령을 제정하여 그들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연좌제를 실시하여 죄인은 물론 죄가 없는 그의 친족까지 함께 잡아들여 치죄하는 목적은 그들을 심리적으로 견제하여 감히 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유래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으며, 예전부터 있어 온 관습으로 합당하다고 사료됩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법률이 공정해야만 백성들이 충성을 다하고 처벌이 정당할 때에만 비로소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고 복종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관리들의 책무는 백성들을 다스려 선한 곳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선()을 지향하도록 바르게 인도하지도 못하면서 불공정한 법령으로써 그들을 치죄한다면, 이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흉포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연좌제를 어찌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법령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짐은 이런 법령은 아무런 이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대들은 재삼 심사숙고해 의논해보라!”

관리들이 모두 말했다.

폐하께서 백성들에게 펼치시려는 크고 높은 덕은 신등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그 법을 폐지토록 하겠습니다.”

정월, 관원들이 진언을 올렸다.

일찍 태자를 세우시는 것은 종묘를 받드는 중요한 일입니다. 청컨대 태자를 책봉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은 부덕할 뿐만 아니라 상제신명(上帝神明)께서 짐의 제사를 흔연히 받아 주시지도 않으시고 천하의 백성들도 만족스러워하지 않고 있다. 지금 내가 설령 어질고 덕망있는 사람을 널리 구하여 제위를 선양할 수는 없을지언정 미리 태자를 책봉하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은 나의 부덕함을 가중시키는 일이다. 어찌하여 짐에게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선양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태자를 책봉하는 일은 후에 의논하기 바란다.”

대신들이 물러나지 않고 다시 진언했다.

미리 태자를 책봉하는 일은 종묘와 사직을 중히 여기며 천하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초왕(楚王) 유교(劉交)님은 짐의 막내 숙부로, 연세가 많아 세상의 일에 경험도 많으시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밝으신 분이다. 또한 오왕 유비(劉濞)님은 짐에게 형님뻘이 되는데 은혜롭고, 어질고, 덕이 높으신 분이다. 또한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은 짐의 막내동생으로 덕()과 의()를 겸비한 재능으로 짐을 보좌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짐의 계승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가? 제후왕, 종실(宗室)의 형제, 그리고 공신(功臣)들은 모두 어질고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인물들이라, 그 중에서 덕성과 명망이 높은 사람을 천거하여 짐이 못다 이룬 사업을 완수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사직(社稷)을 돌보게 되는 것이며 또한 천하의 복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런 사람을 천거하지는 않고 오히려 태자만을 반드시 책봉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짐이 재덕을 겸비한 인물들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아들만을 생각하며 천하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짐은 절대 그런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겠다.”

대신들이 재차 진언했다.

옛날 은(殷周)가 나라를 세우고 1천여 년 동안 안정하게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천하를 다스린 왕조 가운데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된 왕조는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은()과 주() 두 왕조가 일찍 태자를 세우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계승자를 반드시 아들로 세우는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제(高帝)께서 친히 사대부(士大夫)를 이끌고 온 천하를 평정하시고 제후들을 봉하시어 우리 한왕조의 태조(太祖)가 되신 이래 자손이 계승하여 끊임없이 대를 이어 가도록 하신 일은 천하의 대의(大義)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제께서 옛날의 계승제도를 확립하시어 온 천하를 안정 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세워야 할 태자를 버리고 제후와 종실 중에서 선택하신 자손이 계승하게 하는 일은 고조(高祖)의 본뜻에 어긋납니다. 따라서 태자를 후계로 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폐하의 황자 모()는 가장 나이가 많으며, 온화하고 인자하니, 청컨대 그를 태자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그때야 비로소 대신들의 주청을 윤허했다. 그리고 천하의 백성들 중 마땅히 부친을 계승할 자들에게는 모두 작위(爵位)를 한 계급씩 올리게 했다. 장군 박소(薄昭)를 지후(軹侯)에 봉했다.

3, 관리들이 황제에게 황후를 세울 것을 청했다.

박태후(薄太后)가 말했다.

"황자(皇子)들은 모두 동모(同母)소생이니 태자의 모친을 황후로 세우시오."

황후의 성은 두()씨이다. 황후를 두씨로 세운 황제는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를 여원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 가정이 빈곤한 사람 및 80세 이상 된 노인과 9세 미만의 고아에게 일정량의 포백(布帛)과 쌀, 고기 등을 하사했다. 대국(代國)에서 올라와 제위에 오른지 오래 되지 않은 황제는 천하에 덕과 은혜를 베풀고, 제후들을 안무하고, 사방의 이족들과 모두 화합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려고 했다. 또한 대국에서부터 그를 수종하여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올라온 공신들에게도 상급을 하사했다. 황제가 말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제려(諸呂)를 주멸한 후 짐을 영접하러 왔을 때, 짐은 미심쩍어 망설였고, 대국의 대신들도 모두 만류하였다. 오직 중위 송창만이 장안으로 임하도록 권고하여 짐은 비로소 선조의 유업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짐은 송창의 공을 높여 위장군(衛將軍)에 이미 임명했으나 다시 장무후(壯武侯)에 봉한다. 그리고 짐을 따라 장안으로 온 나머지 여섯 사람은 모두 9(九卿)에 임명한다."

황제가 다시 말했다. 

고제(高帝)를 따라 촉()과 한중(漢中)에 들어간 68명의 열후(列侯)에게는 식읍 3백 호를 각각 더하고, 회양(淮陽) 군수 신도가(申徒嘉) 10명에게는 식읍 5백 호씩, 위위(衛尉) () 10명에게는 각기 식읍 4백 호를 하사하라. 회남왕의 외삼촌 조겸(趙兼)은 주양후(朱陽侯), 제왕(齊王)8)의 외삼촌 사균(駟均)은 청곽후(淸郭侯)에 봉한다.”

그해 가을, 상산국(常山國)의 승상을 지냈던 채겸(蔡兼)을 번후(樊侯)에 봉했다. 어떤 사람이 우승상 주발(周勃)에게 유세했다.

승상께서는 원래 제려(諸呂)들을 주살하고 대왕을 영립하여 제위에 올린 대공신(大功臣)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공로로 인해 가장 높은 상을 받고 가장 존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부귀가 지극히 높은 곳에 올랐으니 장차 큰 화가 승상의 몸에 닥칠 것입니다.”

그래서 주발은 병을 칭하고 우승상의 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좌승상 진평(陳平)이 승상의 직을 홀로 맡았다.

문제 2년 기원전 17810, 승상 진평이 죽자 다시 강후(絳侯) 주발을 승상에 임명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기에 옛날에는 제후들이 세운 나라들은 1천여 개인데 모두 각기 자신의 봉지(封地)를 지키면서 때가 되면 조정에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고 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고통은 줄게 되고 상하가 즐겨하며 덕을 잃은 지방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열후들이 모두 장안에 거주하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봉읍에서 세수(稅收)를 실어 나르는데 많은 비용과 함께 고통이 심할 뿐만 아니라 열후들 역시 봉지의 백성들을 교화하여 다스릴 수 없음이라! 이에 열후들에게 명하노니 각기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가 살라. 장안에 관리로 임명되어 직책을 맡은 열후와 칙령으로 특별히 허가받은 열후들은 자신의 태자를 봉국(封國)에 파견하여 직접 백성들을 보살피도록 하라.”

 11월 그믐, 일식(日蝕)이 있었다. 12월 보름, 일식이 또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은 만백성을 낳고 만백성은 자신들을 위해 군주를 두어 그들을 다스려 부양하도록 했다고 했다. 만일 군주가 부덕하고 공평한 정치를 베풀지 못하면 하늘은 이런 재변(災變)으로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 행위에 대해 경계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일식이 11월 그믐날에 있었고 다시 12월 보름에 있었다. 이보다 더 큰 재변이 또 어디 있겠는가! 짐이 종묘(宗廟)를 보존하고, 이 보잘 것 없는 짐에게 천하의 만민과 제후들이 의탁하였으니, 나라의 통치가 안정되거나 어지럽게 되느냐는 모두 짐 한 사람과 짐의 좌우에서 팔다리처럼 보좌하고 있는 2-3명의 집권 대신들의 책임이다. 짐이 밑으로는 도리에 맞춰 백성들을 부양하지 못하고 위로는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게 만들었으니 그것은 짐의 부덕이 컸기 때문이다. 짐이 내린 이 칙령이 당도하면 모든 관리들은 짐이 저지른 잘못들을 지적하거나, 짐의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바를 고하라. 천자에게 직간할 수 있는 현량방정(賢良方正)9)을 천거하여 짐의 부족한 점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라! 또한 각급 관리들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임하여 요역을 줄이고 비용을 경감하는 데 힘씀으로써 백성들을 편하게 하라! 먼 이족에게까지 덕을 베풀지 못했으니 그런 이유로 나는 항상 외지인들이 나쁜 마음을 갖고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노심초하고 있으니 각급 관리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대비책을 세우도록 하라. 지금 변방에 주둔하고 있는 수자리 병사를 마음대로 해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군대에 령을 내려 수도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고 나를 보위하려고 해도 더 이상 어찌 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짐은 위장군(衛將軍)에 속하는 군대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태복(太僕)10)이 관리하는 말은 당장 필요한 숫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역참(驛站)으로 보내도록 하라.????

  정월 황제가 말했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짐이 직접 개간한 밭을 몸소 경작하여 종묘의 제사에 소요되는 곡물로 사용해야겠다.”

3, 관리가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하라고 주청하자 황제가 말했다.

조유왕(趙幽王)11)이 옛날 경사에 불려와 억류되어 굶어 죽은 일을 짐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해서 그의 장자 수()를 이미 조왕의 자리를 잇게 했다. 수의 동생 벽강(辟彊)과 제도혜왕(齊悼惠王)의 아들 주허후 장(), 동모후 흥거(興居) 역시 조정에 공이 있음으로 제후왕에 봉하고자 한다.”

황제는 즉시 조유왕의 작은 아들 벽강을 하간왕(河間王)에 봉하고, 다시 제나라의 큰 군을 떼어내어 주허후는 성양왕(城陽王), 동모후는 제북왕(齊北王), 황자 무()는 대왕(代王), 황자 참()은 태원왕(太原王), 황자 읍()은 양왕(梁王)에 각각 봉했다.

황제가 말했다.

옛날 천하를 다스릴 때 조정에 깃발을 꽂아 대책을 진언할 수 있게 하고(진선지정 :進善之旌), 나라의 정치에 대해 비방하는 글을 쓸 수 있는 목패(木牌)를 설치해 (비방지목 : 誹謗之木) 백성들의 의견을 소통하게 하자 간언하는 자들이 줄을 이어 달려왔다. 그러나 지금의 법은 그것들을 비방과 요언의 죄로 다스려 신민들은 감히 마음속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황제는 자기의 과실에 대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현능한 사람들이 먼 곳에서 올 수 있겠는가? 이런 법은 마땅히 폐지해야만 한다. 또한 백성들이 황제를 저주하고서 서로 비밀로 하기로 약속하고는 후에 서로 고변하면 관리들은 이를 대역죄로 다스리고, 만일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하면 관리들은 다시 그들을 비방죄(誹謗罪)로 다스리니 우매한 백성들은 결국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된다. 짐은 이런 형벌을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다. 오늘 이후로는 이런 법으로 백성들을 처벌하지 않겠다."

9, 황제는 처음으로 병사를 조련하거나 장군을 보낼 때 사용하는 군권의 상징인 호부(虎符)는 구리로 만들고, 사자가 출입할 때 징발할 수 있는 징표인 사부(使符)는 대나무로 만들어 군의 태수와 봉국의 승상에게 보냈다.

문제 3년 기원전 17710월 그믐 정유(丁酉) , 일식이 일어났다. 11, 황제가 말했다.

"일찍이 열후(列侯)들에게 각기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내렸으나 다른 이유를 대어 자신의 봉국에 부임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승상은 짐이 높이 받드는 대신이니, 원컨대 열후들의 앞에 서서 봉국(封國)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그래서 강후 주발은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영음후(潁陰侯) 관영을 태위에서 승상으로 올렸다. 태위의 직은 폐지하고 그에 속했던 일은 모두 승상이 맡아보게 했다.

4, 성양왕 유장(劉章)이 세상을 떠났다. 회남왕 유장(劉長)이 그의 수행원 위경(魏敬)을 데리고 경사에 왔다가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죽였다.12)

5, 흉노(匈奴)가 북지군(北地郡)을 침략하여 하남(河南)13) 지구를 점령하고 노략질해 갔다. 황제가 처음으로 감천궁(甘泉宮)14)에 행차했다.

6, 황제가 말했다.

"우리 한나라는 일찍이 흉노와 형제의 의를 맺어 변방을 서로 해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많은 물자를 흉노에게 주었다. 그런데 지금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자기들 땅에서 나와 무리를 이끌고 이미 우리 한나라의 땅으로 복속된 하남(河南) 지구를 강점했다. 아무런 까닭 없이 우리나라의 변경지대를 횡행하며 그곳의 관리와 병사들을 잡아 죽이고 변경을 지키던 만이의 부족들을 쫓아내어 그들을 원래 살던 곳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변경지대의 관리들을 능욕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노략질해갔다. 그것은 참으로 오만무도한 짓으로써 한나라와 흉노 사이에 맺은 맹약을 배반한 일이다. 변새의 관리들에게 속해 있는 기병 85천 기를 모두 고노(高奴)15)에 모이게 하고 승상 관영(灌嬰)을 보내 지휘토록 하여 흉노에 반격하도록 하라.”

황제는 계속해서 명을 발해 경사에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난 중위(中尉) 소속의 정예 병사들을 위장군(衛將軍) 예하에 배속시켜 장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신묘(辛卯) , 황제는 감천궁(甘泉宮)을 출발하여 고노(高奴)로 행차했다. 돌아오는 길에 태원(太原)에 들러 옛날 대()나라 왕이었을 때의 신하들을 접견하고 모두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각자의 공로에 따라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하여 봉록과 상금을 수여하고 향촌의 백성들에게는 쇠고기와 술을 하사했다. 특히 진양(晉陽)과 중도(中都)의 백성들에게는 부세(賦稅)3년 동안 면제해 주었다. 황제는 태원(太原)에서 열흘 동안 머물며 유람했다.

황제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대 땅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북왕 유흥거(劉興居)가 반란을 일으켜 형양(滎陽)을 습격하려고 했다. 그래서 황제는 조명을 내려 흉노를 치기 위해 출동시킨 관영의 군대를 경사로 철수시키고 극포후(棘蒲侯) 진무(陳武)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제북왕를 토벌하게 했다. 또한 기후(祁侯) ()를 장군으로 삼아 형양에 주둔시켜 지키도록 했다.

7월 신해(辛亥) , 황제가 태원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유사(有司)에 조명을 내렸다.

제북왕이 덕을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켜 봉국의 관리들과 백성들을 대역죄에 연루시켰다. 제북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관군이 당도하기 전에 스스로 안전을 꾀하여 항복하거나, 군사들이 땅이나 성읍을 가지고 투항하거나 하게 되면 그들을 모두 사면하고 원래의 관직과 작위를 돌려주도록 하라! 유흥거와 왕래했던 자들도 역시 사면하도록 하라!”

8월 제북의 군대를 격파하고 유흥거를 사로잡았다. 제북왕과 함께 반란에 참가한 관리와 백성들을 모두 사면했다.

문제 6년 기원전 174, 관리들이 회남왕 유장(劉長)의 일을 고해왔다.

회남왕은 선제의 법을 폐하고 천자의 조칙을 따르지 않고 있으며 행동거지는 법도가 없습니다. 출입할 때는 천자만이 행하는 의장을 갖추고 법령을 멋대로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포후 진기(陳奇)와 공모하여 모반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자를 민월(閩越)와 흉노에 파견하여 그들의 군사를 얻어 한나라의 종묘사직에 위해를 가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군신들이 의논한 바, 마땅히 회남왕 유장을 죽여 기시(棄市)에 처해야 합니다.”

황제가 차마 회남왕을 법대로 처형하지 못하고 그의 죄를 사면했으나 작위와 봉국을 몰수하고 다시는 제후왕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신하들이 회남왕을 촉()의 엄도(嚴道)와 공도(公道) 일대의 땅에 안치시켜야 한다고 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유장이 미처 유배지에 당도하기 전에 도중에 병이 들어 죽었다. 황제가 매우 슬퍼했다. 그 후 16년이 지나서 회남왕으로 추준하고 려왕(厲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서 그의 세 아들에게 회남왕, 형산왕(衡山王), 여강왕(廬江王)에 각각 봉했다.

문제 13년 기원전 167, 황제가 말했다.

짐이 하늘의 도에 대해 들은 바, 화는 원한에서 시작되고 복은 덕을 쌓음으로써 받는다고 했다. 관리들의 잘못은 마땅히 짐의 잘못이다. 오늘 비축(秘祝)16)의 관리들이 나라의 모든 잘못을 아래 신하들에게 돌리고 있어 짐의 부덕함을 날로 크게 하고 있다. 짐은 결코 그것을 취하지 않겠다. 그런 폐단을 없애도록 하라!”

 5월 제나라의 태창령(太倉令)17) 순오공(淳於公)이 죄를 얻어 형을 받게 되자 조정의 옥리에게 조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여 장안으로 압송하도록 했다. 태창공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5명이 있었다. 태창공이 관리에게 체포되어 잡혀가게 되자 그의 딸들을 꾸짖었다.

아들은 하나도 없고 이렇게 급할 때 아무 쓸모가 없는 딸년들만 있구나!”

그의 막내딸 제영(緹縈)이 마음이 상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아버지를 따라 장안까지 와서 서장을 올렸다.

저의 부친은 관리가 되어 제나라에서는 모두 청렴하고 공평하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법에 저촉되어 형을 받아 죽기라도 한다면 다시는 살아날 수 없으며, 또한 형을 받아 신체라도 훼손된다면 다시 붙일 수 없게 됩니다. 비록 전의 잘못을 뉘우쳐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해도 다른 길이 없게 됩니다. 원컨대 저를 관비로 만들어 아버지의 죄를 속죄해주시고 스스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서장을 읽고 그 뜻이 매우 가련하다고 생각하여 그 즉시 조칙으로 내려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유우씨(有虞氏)18) 치세 때 도안과 색깔이 다른 의복을 입히고 모자를 쓰게 하여 죄인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여 죄를 범하지 않도록 했다고 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지극한 다스림 때문이었다. 오늘 날,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는 육형(肉刑)이 세 가지나 있는데 죄를 짓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 잘못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짐의 덕이 두텁지 못하고 교화가 밝지 못해서가 아닌가? 훈도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법망에 빠지는 것을 나는 심히 부끄러워하고 있다. 시경(詩經)'다정하고 화목한 군자여, 백성들의 부모로다!'19)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백성들 중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게 되면 교화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형벌부터 가하여 혹 자기의 행위를 고쳐 선을 행하려고 해도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짐은 그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무릇 형벌을 행함에 사지와 몸을 절단하거나 피부와 살점을 뜨게 되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재생할 수 없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아프겠으며 부도덕한 행위인가? 어찌 백성들의 부모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육형을 당장 폐하라!”

황제가 또 말했다.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다. 그 어떤 것도 이보다 더 힘써야 할 일은 없다. 오늘 열심히 농사를 짓는데 종사해도 오히려 부세(賦稅)를 내야만 한다. 이것은 농업과 상업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농업을 장려하려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전세(田稅)를 폐지하라!”

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겨울, 흉노가 노략질을 하기 위해 변경으로 들어와 조나(朝那)20)를 공격하여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 손앙(孫卬)을 죽였다. 황제가 즉시 세 장군을 농서(隴西), 북지(北地) , 상군(上郡)으로 보내 주둔하도록 하고, 중위(中尉) 주사(周舍)를 위장군(衛將軍)에 임명하고, 낭중령(郎中令) 장무(張武)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하여 주둔하도록 했는데 동원한 병력이 전차 일천 승, 기병 10만 명에 달했다. 황제가 친히 군사들의 노고를 위무한 후에 사열을 행하고 칙령을 밝힌 후 군리와 사병들에게 상을 내렸다. 황제가 몸소 전선에 나아가 흉노를 공격하려고 하자 군신들이 불가하다고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황태후가 나서서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때서야 황제는 비로소 자기의 뜻을 굽히고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에, 성후(成侯) ()을 내사(內史), 란포(欒布)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흉노를 공격하도록 했다. 흉노는 멀리 도망쳐 숨어버렸다.  , 황제가 말했다.

짐이 희생(犧牲)과 옥백(玉帛)을 바쳐 상제와 종묘에 제사를 받들어 오기를 지금이 14년이 되어 짧은 세월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명민(明敏)하지 못한 짐이 천하에 군림하고 있으니 나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선조와 천지신명께 제사를 드리는 곳을 넓히고 옥백을 많이 바치도록 하라. 옛날 선왕들은 널리 은덕을 베풀었음에도 결코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으며 온갖 신명들에게 제사를 올리면서도 복이 내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현능한 사람을 높이고 인척을 낮추었으며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후에 생각했으니 참으로 지혜가 밝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내가 들으니 제사를 주관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오로지 짐 한 사람만을 위해서 복을 빌고 백성들을 위해서는 복을 빌지 않는다고 하니 짐은 참으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부덕한 짐이 이와 같이 혼자만 복을 누리고 백성들은 전혀 누리지 못하니 그것은 짐의 부덕함을 가중시키는 일일 뿐이다. 제사를 주관하는 관리들에게 명하니 앞으로 신령들에게 제사를 올릴 때 정성을 다해 모시되 복이 짐 한 사람에게만 내리라고 빌지 말도록 하라!”

 이 해에 율력에 정통한 북평후(北平侯) 장창(張蒼)을 승상으로 삼았다. 노나라 사람 공손신(公孫臣)이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21)을 황제에게 상서하여 토덕에 해당하는 시기임으로 그로 인하여 황룡이 나타날 것이며 마땅히 정삭(正朔)과 복색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그 일에 관해 조정에서 의논해보라고 승상에게 명했다. 승상 장창이 추산한 결과 당시는 수덕이 발흥할 시기에 해당함으로 마땅히 매 년 10월을 정삭으로 하고 흑색을 숭상해야 함으로 공손신의 주장은 맞지 않으니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황제에게 청했다.

문제 15년 기원전 165, 황룡이 성기현(成紀縣)22)에서 나타났음으로 천자가 즉시 노나라의 공손신(公孫臣)을 다시 불러와 박사로 삼고 토덕(土德)을 하늘에게 고하게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말했다.

신령스러운 이물(異物)이 성기(成紀)에 나타났으나 백성들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풍년이 들었다. 짐이 친히 상제와 여러 신들에게 교제(郊祭)를 지내려고 한다. 제사를 관장하는 예관(禮官)들은 이 일을 의논하되 그 일이 힘든 일이라고 여겨 나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고하도록 하라!”

해당 관리들과 예관들이 모두 대답했다.

옛날 천자가 몸소 여름에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래서 이룰 교제(郊祭)라 했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벽옹(辟雍)23)에 처음으로 행차하여 오제(五帝)에게 교제를 지냈다. 다시 맹하(孟夏) 4월에 하늘이 내려준 은덕에 답례하는 제사를 올렸다.

조나라 사람 신원평(新垣平)이 망기(望氣)24)에 통했다고 하면서 황제를 접견하여 오제(五帝)의 사당을 위양(渭陽)에 지어 제사를 올린다면 주나라 전국(傳國)의 보물인 주정(周鼎)을 얻고 다시 아름다운 보옥(寶玉)이 출토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 16년 기원전 164, 황제가 친히 위양(渭陽)의 오제(五帝) 묘에 교제(郊祭)를 올리고 여름에 다시 천제(天帝)에게 제사를 지내 경의를 표하고 적색을 숭상하기 시작했다.

문제 17년 기원전 163, 옥배(玉杯)를 얻었는데 그 표면에 황제께서 장수하신다 (인주연수 ; 人主延壽)라고 써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연호를 새로 시작하여 원년으로 삼고 천하의 백성들에게 서로 모여 술과 음식을 즐길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해에 옥배의 일을 꾸민 사실이 발각되어 신원평은 삼족이 멸족되었다.

문제 후원 2년 기원전 162, 황제가 말했다.

짐이 사리에 밝지 못하고 덕을 널리 베풀지 못하여 주변의 외국들 중 일부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지 못했다. 먼 국경 밖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지 못했으며 기내(畿內)의 봉지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열심히 노력해도 편안하게 거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모두 짐의 덕이 박하여 널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계속해서 흉노가 변경을 침략하여 수많은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음에도 장군들과 관리들은 짐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짐의 부덕만을 가중시켜왔다. 이와 같이 그렇게 오랫동안 계속해서 일어난 전쟁으로 재난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중원의 안이거나 밖이거나를 막론하고 나라들이 안녕할 수 있겠는가? 오늘까지 짐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 천하를 위해 부지런히 힘쓰며 만민의 질고를 걱정하느라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하루도 편안하게 지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수레를 앞뒤에서 볼 수 있고, 길바닥에 난 수레바퀴 자국이 줄을 잇게 될 정도로 사자를 자주 흉노에 보내 짐의 뜻을 선우(單于)에게 전했다. 마침내 내 뜻을 이해한 흉노가 옛날의 화친관계로 돌아가 이제는 사직의 안전을 꾀하고 만민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옛날의 세세한 과오를 버린 선우는 짐과 화친하여 대도를 취하여 형제의 의를 맺게 되어 이제는 천하의 선량한 백성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짐은 흉노와 화친을 행하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금년부터 이를 시행하도록 하라!”

문제 후원 6년 기원전 159, 흉노의 3만 기병이 상군(上郡), 또 다른 3만 기병이 운중(雲中)을 침략했다. 황제가 중대부 영면(令勉)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하여 비호(飛狐)25)에 주둔하게 하고, 초나라 상국 소의(蘇意)를 장군으로 삼아 구주(句注)26)를 지키게 했으며, 장군 장무(張武)는 북지(北地)로 보내 흉노의 침략에 대비케 했다. 다시 하내(河內) 태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에 주둔시키고 종정(宗正) 유례(劉禮)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覇上)에 주둔하게 하여 장안의 수비에 만전을 기하게 했으며 축자후(祝玆侯)27)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棘門)28)에 주둔하면서 흉노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몇 달 후 흉노가 자기 땅으로 돌아가자 군사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 해에 천하에 한해(旱害)가 들고 메뚜기 떼가 창궐했다. 황제가 은혜를 베풀어 제후들에게는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을 면제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했던 숲과 호수를 개방했으며, 궁실의 복식을 절약하게 하고 황제가 출행시 끌고 다니는 구마(狗馬)의 수도 줄이게 했다. 낭관과 관리들의 수를 줄였으며 나라의 창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제했고, 양식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도 허용했다.

패릉(霸陵)29)을 조성할 때 모든 기구는 와기(瓦器)로 사용하고 금(), (), 구리, 주석 등의 값비싼 것으로는 장식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분묘를 높이 쌓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남월왕 위타(尉佗)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무제(武帝)라고 칭했다. 그러나 황제는 남월을 정벌하는 대신 한나라에 살고 있던 위타의 형제들을 불러 귀하게 접대함으로 해서 덕으로써 대하자 위타는 제호를 버리고 신하를 칭했다. 흉노와 화친을 맺었으나 흉노는 약속을 어기고 변경을 침입해서 약탈해갔다. 그래서 령을 내려 변경의 수비를 강화했으나 군사를 동원하여 흉노의 땅으로 깊이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백성들이 변경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오왕(吳王) ()30)가 거짓으로 병이 났다는 핑계로 조현을 올리지 않았으나 황제는 궤장(几杖)31)을 하사하여 향후로는 조현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했다. 원앙(袁盎)과 같은 신하들이 급박하고 신랄한 언사로 간언했으나 황제는 항상 관대한 마음으로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곤 했다.

장무(張武) 등의 대신들이 금품을 뇌물로 받았다가 발각되자 황제는 오히려 황실의 부고에 있던 금품을 꺼내 하사하여 대신들로 하여금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게 하고 죄를 묻기 위해 옥리에게 넘기지 않았다. 문제는 재위 전 기간 동안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는데 힘썼음으로 해내(海內)는 호구가 늘고 백성들은 부유해졌으며 예의가 성하게 되었다.

 효문제가 대()에서 올라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23년 동안 제위에 있으면서 궁실, 원유(園囿), 구마(狗馬), 복식(服飾), 거가(車駕) 등을 하나도 늘리지 않았고, 백성들이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곧바로 정령을 완화시켜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 한 번은 로대(露臺)를 짓기 위해 장인을 불러 비용을 계산해보라고 했다. 장인은 황금 100근이 필요하다고 고했다. 황제가 듣고 말했다.

황금 100금이면 중류의 백성들 가정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하는 돈이다. 내가 선제들이 물려준 궁실들을 사용하면서 언제나 짐에게는 그것들이 과분하여 부끄러워했는데 어찌 그런 로대가 필요하겠는가?”

황제는 항상 투박한 옷을 입었고 사랑하는 신부인에게는 땅에 끌리지 않는 옷을 입도록 했으며 수를 놓은 휘장을 치지 말도록 함으로 해서 검소한 생활을 보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다.

 문제 후원7년 기원전 158년 기해(己亥) , 황제가 미앙궁에서 별세하면서 유지를 남겼다.

짐이 듣기에 모든 천하만물은 태어나서 죽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죽음이란 하늘과 땅의 이치이고 만물의 자연스러움이다. 어찌 지나치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상은 모두 삶을 좋다고 여기고 죽음을 싫어하면서도 장례를 호화롭게 치러 생업을 파탄나게 만든다. 또한 복상(服喪)을 지나치게 중히 여겨 산 사람을 상하게 한다. 나는 그것들을 따르지 않겠다. 하물며 짐은 부덕하여 백성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오늘 죽음에 이르니 다시 장례를 무겁게 행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오래 동안 곡을 강요하여 추위와 더위로 시달리게 만들고, 천하백성들의 아비와 자식들로 하여금 나의 죽음을 애도하게 만든다. 또한 늙거나 어린 사람들이 마음을 상하게 하며, 그들의 음식을 손해나게 만들며 그들의 귀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를 받들지도 못하게 해서 짐의 부덕함을 가중시키니 천하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짐이 종묘를 지키는 자리에 올라 온전치 못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천하의 주인 된 자의 자리에 앉아 군림하기를 20여 년이 지나도록 천지간의 신령과 사직의 복을 받아 사방이 안녕하고 병란이 없었다. 짐이 불민하여 항상 잘못을 저질렀으니 선제들이 이룩한 덕에 비추어 부끄러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날수록 끝이 좋지 못할 까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다행히 천수를 다하여 고조의 사당에서 후손들이 공양하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 있게 되어 비록 영명하지 못했음에도 좋게 끝을 맺게 되었으니 어찌 내가 슬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천하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령을 내리노니 모두 사흘 동안만 애도하고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또한 내 장례 기간 동안 장가나 시집가는 일과 제사, 음주, 육식을 금하게 하지 말라! 상복을 입고 내 장례를 담당하여 맨발로 조곡을 해야 하는 노역들에게 신발을 신도록 하라! 상복에 메는 허리띠의 넓이는 3촌을 초과하지 말도록 할 것이며 병거와 무기를 진열하지 않도록 하라. 백성들 중에서 남녀를 징발하여 궁궐에 들여 곡을 하는 절차도 생략하도록 할 것이며, 궁중의 사람들 중 곡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아침과 저녁에 각기 15번씩만 하도록 하고 장례가 끝나면 중지하도록 하라! 아침과 저녁에 곡을 할 때가 아니면 함부로 아무 때나 곡을 하지 말도록 하라! 장례가 끝났으면 대공(大紅)15, 소공(小紅)14, 섬복(纖服)7일만 입고 상복을 벗도록 하라!32) 이 조령(詔令) 속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것들은 모두 이 조령에 준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천하에 이 조령을 포고하여 짐의 뜻을 명백히 밝혀서 알게 하라! 또한 나의 무덤이 조성되는 패릉(覇陵)의 산천은 그 모습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라! 부인(夫人) 이하 소사(少使)에 이르기까지 모두 궁궐을 나가게 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33)”

중위(中尉) 주아부(周亞夫)를 거기장군에, 전속국(典屬國) 서한(徐悍)을 장둔장군(將屯將軍)34)에 임명했다. 그리고 랑중령(郞中令) 장무(張武)를 복토장군(復土將軍)35)에 임명하여 황궁 부근의 여러 현에서 사졸 16천 명, 수도 직할령인 내사(內史)에서 15천 명을 동원하여 패릉에 관곽(棺槨)을 안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메꾸는 일을 맡도록 했다.

 을사(乙巳) 군신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황제의 존호를 효문황제라고 지어 올렸다. 태자가 고제 묘() 앞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정미(丁未) 태자가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를 칭했다.

한경제(漢景帝) 원년 기원전 15610, 황제가 조서를 어사에게 내렸다.

대체적으로 옛날 선왕들 중에서 공업을 이룬 분은 조()라 하고 덕을 이룬 분은 종()이라 했다. 그래서 해당하는 예의와 음악을 각각의 공적과 덕에 따라 만들었다. 내가 들으니 음악으로 칭송하는 일은 덕이 높은 바를 기린 것이고 춤으로 칭송하는 일은 공업을 기린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고제묘(高帝廟)에 제사를 올리며 헌주를 할 때 무덕<(武德)>36)<문시(文始)37)>를 연주하고 <오행(五行)>38)을 춤췄다. 효문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릴 때, 관문과 다리에서 검문을 폐하여 백성들이 아무데고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하셨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차별하지 않고 동동하게 대하셨다. 비방죄(誹謗罪), 육형(肉刑)을 없앴으며, 장로(長老)들에게 상을 내리셨고, 고아와 늙어서 자손이 없어 혼자 사는 노인들을 구휼하여 중생들을 구제하셨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신 것이나 원하시는 것을 절제하시고, 헌상품을 받지 않으셨으며 자신을 위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지 않으셨다. 죄인들의 가족들을 몰수하여 노비로 만들지 않으셨으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으셨고, 궁형을 없애셨으며, 후궁의 미인들을 궁 밖으로 내보내어 개가를 시킨 일은 백성들의 후사가 끊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짐은 불민하여 효문황제의 모든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비록 옛 성왕들의 치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효문황제께서 몸소 행하신 일들이다. 효문황제께서 베푸신 높은 덕은 하늘과 땅에 비할 수 있으니 그 혜택은 사해를 덮어 하늘 아래 은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문황제의 빛나는 공적은 마치 일월과 같으심에도 묘당에 올리는 음악이 없다. 이에 짐은 심히 송구한 마음이 들어 마땅히 효문황제의 묘당에 제사를 올릴 때 그 분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기 위해 소덕무(昭德舞)를 지어 연주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조()의 공업과 종()의 덕을 사서에 기록하여 만세에 전해 영원토록 빛나게 한다면 짐의 마음은 매우 기쁠 것이다. 이에 승상, 열후, 중이천석(中二千石)39) 이상의 관리들과 예관(禮官)들은 모두 함께 논의하여 합당한 제례를 만들어 상주하라!”

이에 승상 신도가(申徒嘉) 등이 상주했다.

폐하께서 효도를 영원히 행하기 위해 소덕(韶德)의 무곡(舞曲)을 지어 효문황제의 높으신 덕을 세상에 밝히라고 명하신 것은 소신을 포함한 신하들이 어리석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신 등이 의논하여 올립니다. ‘세상에 이룬 공업은 고황제보다 큰 것이 없고 세상에 베푼 덕은 효문황제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고황제의 사당은 마땅히 태조(太祖)를 모시는 사당으로, 효문황제의 사당은 태종(太宗)을 모시는 사당으로 되어야 합니다. 천자는 마땅히 대대손손 조종으로 두 분을 받들도록 해야 합니다. 군국(郡國)의 제후들은 각기 효문황제를 위해 태종의 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어야 합니다. 제호왕과 여후들은 매년 사자를 황도에 보내 천자가 조종의 사당에 제사를 올릴 때 참석하게 해야 합니다. 청컨대 이것을 죽백에 적어 천하에 폐하의 명으로 선포하시옵소서.”

황제가 허락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여 한 세대가 지나면 반드시 어진 정치가 행해지고 선인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여 100년이 지나면 폭정이 없어지고 사형의 제도가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진실로 이 말이 맞지 않은가? 한나라가 일어나서 효문황제까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덕이 지극히 성해졌다.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식(服飾)을 바꿨었으며 봉선을 행하기를 지극히 조심하고 삼가는 자세로 임해 지나치게 겸양함으로 해서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 오호라! 그렇다하더라도 어찌 어진 정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

 

孝文在代 兆遇大横(효문재대 조우대횡)

효문황제가 대() 땅에 있음에

귀갑(龜甲)을 태워 커다란 가로무늬를 얻어

 

宋昌建冊 絳侯奉迎(송창건책 강후봉영)

송창의 말을 따르니 강후가 맞이했다.

 

南面而讓 天下歸誠(남면이양 천하귀성)

남면하여 사양하니 천하의 인심이 효문황제의 몸에 모였다.

 

務農先籍 布德偃兵(무농선적 포덕언병)

농업을 일으키고자 몸소 밭을 갈아 모범을 보이고

덕을 베풀며 전쟁을 멈추었다.

 

除帑削謗 政簡刑清(제노삭방 정간형청)

황실의 비용을 줄이고 비방죄를 없애니

정령은 간결하게 되고 형벌은 공정해졌다.

 

綈衣率俗 露臺罷營(제의솔속 노대파영)

투박한 옷을 입고 백성들의 습속을 따랐으며

로대를 짓는 비용을 아끼고 군역을 줄었다.

 

法宽张武 獄恤缇萦(법관장무 옥휼제영)

장무 등의 대신들에게 관대한 법을 적용했으며

제영(緹縈)의 청을 받아들여 창공(倉公)의 죄를 구휼했다.

 

霸陵如故 千年頌聲(패릉여고 천년송성)

패릉(覇陵)은 옛날과 변함이 없고

효문황제의 성덕은 천년이 지나도록 칭송되네!

 

(색은술찬(索隱述贊))

 

주석

1) 유장(劉章)/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의 둘째 아들이다. 유비는 고조 유방이 여후와 정식 결혼하기 전에 난 서장자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에 주허후(朱虛侯)에 봉해졌다. 여후가 죽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할 때 그는 미앙궁에서 승상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잡고 있던 여산(呂産)을 살해했다. 그 공으로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성양왕(城陽王)에 봉해졌다. 2년 후에 죽었다.

2) 유흥거(劉興居)/ 한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의 셋째 아들이다. 고후 6년 기원전 182,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고후가 죽자 여려 대신들과 함께 대왕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2년 기원전 178, 제북왕(齊北王)에 봉해졌다. 문제 3년 문제가 북쪽의 흉노를 치기 위해 장안을 비우고 태원(太原)으로 순행한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시무(柴武 : 陳武)와의 싸움에서 패해 자살했다.

3) 당시 고조의 형제나 아들로써 황제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는 제후왕들이다. 초왕은 유방의 막내동생 유교(劉交), 회남왕(淮南王)은 조왕 장오(張敖)의 미인 조희(趙姬) 사이에 난 막내아들 유장(劉長), 낭야왕(琅邪王)은 문제가 즉위한 후 연왕(燕王)에 개봉된 고조의 사촌동생 유택(劉澤), 제왕(齊王)은 유방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劉肥)의 장자 유양(劉襄)이다.

4) 음안후(陰安侯)/ 한고조 유방의 형 유백(劉伯)의 부인이다. 고조가 포의일 때 친구들과 함께 유백의 집에 들려 밥을 얻어먹었는데 어느 날 국이 없다는 거짓말로 밥을 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앙심을 품게 된 고조는 후에 황제가 되어 형제와 아들들을 제후왕이나 후에 봉할 때 유백은 이미 죽었으나 그의 아들들에게는 아무런 작위를 주지 않았다. 태공이 유방에게 유백의 가족에게도 작위를 내리라고 하자 형수는 음안후(陰安侯), 그의 아들 유신(劉信)은 갱힐후(羹頡侯)에 봉했다.

5) 경왕후(頃王后)/ 한고조 유방의 둘째 형 유중(劉仲)의 부인이다. 대왕(代王) 유중(劉仲)의 시호가 경()이었음으로 그의 사후 그녀를 경왕후(頃王后)라고 칭한 것이다. 경왕후는 후에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한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생모다.

6) 위장군(衛將軍)/ 한나라가 설치한 대장군(大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거기장군(車騎將軍) 다음가는 최고 무관직이다. 그 직위는 금인자수(金印紫繡)를 지니며 삼공에 버금갔다. 경사의 금군(禁軍)을 통괄하며 또한 경사의 남북군 최고 통수권자다. 조정회의에 참석하여 국사를 결정하고 다시 상서(尙書)의 일을 처리할 때는 실제로 조정에서 정무를 맡았다. 업무를 처결하는 별도의 막부(幕府)가 있었으며 속관들은 대장군의 경우와 같았다.

7) 랑중령(郎中令)/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으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랑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8) 제왕(齊王)/ 원래 제왕은 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였으나 문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는 유비의 아들 애왕(哀王)도 죽고 손자 유칙(劉則)이 제문왕(齊文王)으로 재위하고 있었다.

9) 현량방정(賢良方正)/ 한나라 때 시행한 천거제도로 줄여서 현량(賢良)이라고 한다. 한문제 2년 기원전 178년에 처음 실시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황제의 칙령이 있을 때 수시로 행한 관리 선발제도다. 품행이 단정하고 황제에게 직언과 극간(極諫)을 할 수 있는 인재들을 발탁하기 위해 시행했다. 일반적으로 군국(郡國)에서 한 명씩을 천거하면 중앙에서 다시 시험을 보아 선발하여 관직에 임명했다. 성적이 우수한 자는 일반적으로 비교적 높은 관직에 임명되어 적지 않은 유명인사가 이 제도로 채용되었다. 조조(竈錯)는 현량으로 천거되어 책문에 높은 점수를 얻어 중대부에 임명되었고, 현량으로 천거되어 박사가 된 공손홍(公孫弘)은 후에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동중서(董仲舒) 역시 현량으로 천거되어 책문으로 높은 점수를 얻어 강도(江都)의 상국(相國)에 임명되었다.

10) 태복(太僕)/ 주왕조 때 하관(夏官)의 속관이었으며 진한(秦漢) 왕조가 전례를 쫓아 설치했다. 황제의 수레와 말을 관리했으며 질록은 2천 석에 구경의 한 명이다.

11) 조유왕(趙幽王)/ 고조의 아들 유우(劉友)를 말한다. 고조 10년 기원전 198년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혜제(惠帝) 원년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가 여태후에 의해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조왕으로 개봉되었다. 제려(諸呂)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나 다른 여인을 사랑하다가 왕비가 반란을 모의했다고 여태후에게 참소하자 소환당해 역관에 갇혀 아사했다. ()는 그의 시호다.

12) 벽양후 살해사건 /유장(劉長)의 모친 조희(趙姬)는 원래 조왕 장오(張敖)의 미인으로 조나라를 지나가던 고조에게 바쳐졌다. 고조와 잠자리를 같이 한 조희는 그 날로 임신하여 유장을 임신했다. 후에 관고(貫高) 등이 고조를 암살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자 그들과 함께 체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된 조희는 옥리에게 고조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옥리가 고조에게 그 사실을 품했으나 그때는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장오에게 매우 노해있었기 때문에 조희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조희의 동생 조겸(趙兼)이 그 사실을 벽양후 심이기를 통해 여태후에게 알렸으나 질투심으로 인해 여후는 고조에게 말하지 않고 벽양후 역시 여후에게 힘써 간하지 않았다. 조희는 유장을 낳은 후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조는 후회하여 회남왕 경포의 반란을 평정하고 유장을 대신 봉했다. 회남여왕 유장은 자기의 모친이 죽은 것은 당시 여후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던 심이기가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벽양후를 죽인 것이다.( 열전 58. 회남형산)

13) 하남(河南)/ 지금의 내몽고 오로도스 지역을 흐르고 있는 하수 남안의 땅을 가리킨다. 원래 오로도스 지역을 흐르고 있는 황하 유역의 땅을 하투(河套)라고 불렀다. 흉노의 원주지였으나 한무제가 무력으로 점령하여 한나라 영토로 삼았다. 중원에 위치한 하남성 유역과 다른 곳이다.

14) 감천궁(甘泉宮)/ 지금의 섬서성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던 감천산에 축조한 궁궐로 원래 진이세 때 임광궁(林光宮)으로 불렀으나 한무제가 확장 증건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진나라는 원래 지금의 섬서성 함양 동북쪽에 도성을 세우고 위수 남쪽의 지금의 로현(盧縣) 근처에 축조한 궁궐이다. “ 진시황본기에 진왕이 태후를 옹()에서 함양으로 영접하여 감천궁에 다시 살게 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서는 의 감천궁을 말한다.

15) 고노(高奴)/ 지금의 섬서성 연안시(延安市)로 상군(上郡)의 치소다.

16) 비축관(秘祝官)/ 황제를 위해 신령에게 복을 빌고 재앙을 없애 줄 것을 기도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리다. 기도의 내용은 황제에게만 알리고 신하들에게는 비밀로 했기 때문에 비축이라고 한 것이다.

17) 태창령(太倉令)/ 지금의 재경부장관에 해당하는 대사농(大司農)의 속관으로 경사의 식량수급을 담당했다.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했다. 질록(秩祿)6백석이다. 한나라가 제후왕국에 설치하여 곡물창고를 주관하도록 하고 그 장을 태창령이라고 했다.

18) 유우씨(有虞氏)/ 순임금의 성씨로 즉 순임금의 치세를 말한다. 요임금의 성씨는 도당씨(陶唐氏).

19) 원문은 '愷悌君子民之父母'으로 시경 大雅 生民之什 泂爵에 나오는 시귀다.

20) 조나(朝那)/ 지금의 영하성(寧夏省) 고원현(固原縣) 동남

21)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 원래 추연(鄒衍)이 주장하기 전 유가의 오행설(五行說)에서 기원한다. 천지만물은 모두 오행(五行) 혹은 오덕(五德), 즉 금(), (), (), (). ()가 순환을 거듭하며 생성되고, 1년 가운데 이 다섯 가지 원소의 세력이 번갈아가며 성한다는 것이 바로 오덕설이다. 예컨대 봄에는 목()에서 덕이 성하고, 여름에는 화()에서 덕이 성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의 일(人事)은 마땅히 오행의 운행과 합치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럼으로 군주된 자에게는 계절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고 했다. 오덕설을 누가 창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순자는 자사와 맹자를 그 창시자라고 했는데 확실치 않다.

음양가 추연은 오행설을 확대하여 천지가 생성된 이래 인류의 역사는 곧 오행의 세력 즉 오덕이 번갈아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왕조 흥망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삼게 되었다. ''의 덕이 성하게 되었을 때 인류사회에 의 덕을 대표하는 갑왕조가 일어나고 그의 복색.제도 및 통치철학은 반드시 의 덕과 부합해야만 한다고 했다. 예컨대 주왕조는 화덕이 성할 때 성립했으며, 그래서 복색 등에 있어서 붉은 색을 숭상했다고 했다. 의 덕이 쇠하게 되면 의 덕이 흥성하게 되고 사회는 을왕조가 나타나 갑왕조를 대신한다고 했다. 오덕종시설은 전국시대 말, 이미 사조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각 제후국들은 이 설에 영향을 받아 천하를 통일하려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으며, 한왕조에 이르러서는 유학 속에 음양학이 침투하여 정치.사회 등에 크게 위력을 떨치게 되었다.

22) 성기현(成紀縣)/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天水市) 북쪽 약 50키의 정녕현(靜寧縣) 서쪽이다.

23) 벽옹(辟雍)/ 고대 중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교외에 설치한 장소를 말한다. 황제(黃帝), 염제(炎帝 : 赤帝), 청제(靑帝), 백제(白帝), 흑제(黑帝) 등의 5제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교외에 있었다.

24) 망기(望氣)/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기운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 미신의 고대 중국에 성행하던 미신의 일종이다.

25) 비호(飛狐)/ 지금의 하북성 내원현(淶源縣)과 울현(蔚縣) 사이의 관문인 비호구를 말한다. 당시 비호구는 흉노가 하북평원으로 진군하는데 거쳐야 하는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26) 구주(句注)/ 지금의 산서성 대현(代縣) 서북의 안문산(雁門山)에 있었던 북쪽 변경의 관문이다.

27) 집해(集解)에 서광(徐廣)의 말을 인용하여 惠景間侯者年表松玆侯 徐悍라고 했다. 漢書에서는 송자후 徐厲가 장군이 되어 棘門에 주둔했다고 했다. 서려 혹은 서한은 고조가 패현에서 기의할 때 舍人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후에 랑이 되어 漢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관중으로 나와 三秦을 평정할 때 雍王 章邯의 가솔들을 포로로 잡아 공을 세웠다. 상산의 승상으로 임명될 때 후에 봉해졌다. 고후 4년 기원전 184년 송자후에 봉해지고 문제 후원 6년 기원전 158년 흉노가 대거 변경을 침입하자 장군에 임명되어 극문에 주둔했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157년에 죽고 아들 徐悼가 뒤를 이었다.

28) 극문(棘門)/ 지금의 섬서성 함양(咸陽) 동북에 있던 관문으로 원래는 진궁문(秦宮門)이라고 했다.

29) 패릉(霸陵)/ 문제의 능으로 지금의 서안시 동쪽 교외의 백록원(白鹿原)에 조성하고 이 능의 관리를 위해 현을 설치했다. .

30) 유비(劉濞 : 기원전 215-154), / 한고조 유방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한나라 초에 패후(沛侯)에 봉해졌다가 고조가 경포의 란을 평정하고 오왕(吳王)에 봉했다. 그러나 오왕이 된 유비는 한나라 조정의 제도를 따르지 않고, 사전을 주조하고 제염을 운영하면서 죄를 짓고 도망 중에 있는 사람들을 널리 모았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어사대부 조착(晁錯)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후왕들의 봉지를 깎으려고 하자 그는 초(), (), 교서(膠西), 교동(膠東), 제남(齊南), 치천(淄川) 등의 제후왕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상 이 일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이라고 부른다. 경제는 주아부(周亞父)를 보내 란을 진압했다. 유비는 싸움에서 지고 동월(東越)로 달아났다가 월인들에게 피살되었다.

31) 궤장(几杖)/ ()는 작은 탁자로 물건을 올려 놓거나 몸을 기대는데 사용하고 장()은 지팡이다. 당시 오왕 비()는 연로했음으로 기장을 하사하여 매년 정기적으로 올리게 되어 있는 조현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32) 중국 고대사회를 지탱했던 가장 중요한 제도 중의 하나였던 오복(五服)으로 규정된 복상기간에는 사망자의 신분과 사망자와의 친분관계에 따라 각기 상복의 종류와 기간을 달리했다. 복상기간을 가장 길게 지내는 순서에 따라 3년을 참최(斬衰), 2-3년을 제최(齊衰), 9개 월을 대공(大功: 大紅), 소공(小功)5개 월, 가장 짧은 게 치르는 시마(緦麻) 즉 섬복(纖服) 등이 있었다. 즉 한문제는 자기와의 친분관계에 따라 입게 되는 서로 다른 상복 기간을 대폭 줄여 자기의 죽음으로 인해 백성들의 생업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다.

33)진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답습한 서한 왕조는 황제의 정비는 황후라 칭하고 그 외의 부인 이하를 합쳐 모두 8품으로 위계가 있었는데 역시 진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답습했다. 8품의 순서는 황후, 부인(夫人)미인(美人)양인(良人)팔자(八子)칠자(七子)장사(長使)소사(少使).

34)장둔장군(將屯將軍)/ 서한 초기 가장 높은 장군직은 대장군(大將軍)과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대사마(大司馬)라는 칭호에 직위는 승상과 같은 서열이었고 그 다음에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장군(衛將軍), 전후좌우(前後左右)장군으로 상경(上卿)의 서열에 모두 금인과 자수(紫綬)를 부여받았다. 그 외에 열장군(列將軍) 혹은 잡호장군(雜號將軍)이라고 불리는 무관직의 하나에 장둔장군이 있었는데 주둔지의 병사들을 감독하고 통솔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35) 복토장군(復土將軍)/ 열장군 중의 하나로 황릉의 감독을 맡았다.

36) 무덕(武德)/ 고조 4년에 만든 무무(武舞)로 손에 간척(干鏚)을 들고 춤을 추었다.

37) 문시(文始)/ 요순 때 만들어졌다는 문무(文舞)로써 원래의 이름은 소무(韶舞)로 고조 때 문시로 바꾸었다. 춤추자는 손에 우모(羽旄) 즉 꿩의 깃털과 소꼬리 혹은 우약(羽籥) 즉 꿩깃과 피리를 들고 추었다. .

38) 오행(五行)/ 주나라 때의 무곡(舞曲)으로 진시황에 의해 오행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손에 간척을 들고 5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39) 중이천석(中二千石)/ 한나라 때 최고 관리들의 녹봉으로 세 가지가 있었다. 중이천석은 연 2160, 진이천석(眞二千石)2천석, () 이천석은 1440석이었다. 중이천석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태상(太常), 낭중령(郎中令), 위위(衛尉), 태복(太僕), 정위(廷尉), 전객(典客), 종정(宗正), 소부(少府), 중위(中尉) 등이다.

 

< 효문본기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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