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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본기(孝景本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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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216회 작성일 13-07-09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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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11. 한경제(漢景帝)

효경황제(孝景皇帝)는 효문황제(孝文皇帝)의 가운데 아들이며, 모친은 두태후(竇太后)①다. 효문황제가 대왕(代王)으로 있을 때 전 왕후 사이에 세 아들이 있었다. 후에 두태후가 총애를 받게 되었을 때는 전 왕후가 세상을 뜨고 다시 그녀의 세 아들이 연이어 죽었다. 그래서 효경제가 제위(帝位)에 오르게 되었다.

효경황제 원년 기원전156년, 4월 을묘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했다. 을사일, 일반 백성들에게 매 호 당 작위를 한 계급씩 하사했다. 5월, 조서를 내려 전지(田地)의 조세를 절반으로 감했다.

효문황제를 위해 태종묘(太宗廟)를 건립하고 신하들에게 축하하러 오지 못하도록 영을 내렸다. 그 해 흉노가 대(代) 땅을 침범하자 조정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경제2년 기원전 155년, 소하(蕭何)의 손자 소게(蕭系)를 무릉후(武陵侯)에 봉했다②. 병역 의무를 시작하는 정년 남자의 연령을 만 20세로 규정했다. 4월 임오날, 효문황제의 모후가 세상을 떠났다. 광천왕(廣川王)③과 장사왕(長沙王)④이 각기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갔다. 승상 신도가(申屠嘉)⑤가 죽었다. 8월,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을 어사대부에서 승상으로 올렸다. 동북쪽 하늘에 혜성이 출현했다. 그 해 가을, 형산국(衡山國)⑥에 우박이 내렸다. 가장 큰 것은 직경이 무려 5촌(寸)이나 되었고, 가장 많이 내린 곳은 2척(尺)높이 쌓였다. 화성(火星)이 역행하여 북극성 자리를 침범했다. 달이 북극성의 천구상을 지나가고, 목성(木星)이 천정(天庭)에서 거꾸로 운행했다. 조서를 내려 남릉(南陵)⑦에 내사(內史)를 설치하고 대우(祋祤)⑧를 현(縣)으로 삼았다.  

경제3년 기원전 154년, 정월 을사일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서쪽 하늘에 유성이 출현했다. 자연재해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낙양(洛陽)의 동궁(東宮) 대전과 성루가 불탔다.

오왕(吳王) 유비(劉濞), 초왕(楚王) 유무(劉戊), 조왕(趙王) 유수(劉遂),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 치천왕(淄川王) 유현(劉賢),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가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동쪽으로 진군토록 했다. 경제는 그들을 위무하기 위해 조조(晁錯)를 죽이고 원앙(袁盎)을 사자로 보내 이를 통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양(梁)나라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경제는 대장군 두영(竇嬰)과 태위 주아부(周亞夫)에게 군사를 주어 반란을 평정했다. 6월 을해일, 조서를 내려 도주한 반란군과 초원왕(楚元王)의 아들 유예(劉藝) 등의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사면했다.

대장군 두영을 위기후(魏其侯)에 봉했다. 초원왕의 아들 평륙후(平陸侯)를 초왕으로 세웠다. 황자 유단(劉端)을 교동왕(膠東王)에, 황자 유승(劉勝)을 중산왕(中山王)에 봉했다. 그리고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를 치천왕(淄川王)에, 회양왕(淮陽王) 유여(劉餘)를 노왕(魯王)에,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강도왕(江都王)에 각각 개봉했다. 제왕(齊王) 유장려(劉將閭)와 연왕(燕王) 유가(劉嘉)가 죽었다.

경제4년 기원전 153년 여름, 황태자를 책봉하고 황자 유철(劉徹)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세웠다. 6월 갑술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했다. 윤달 9월, 역양(易陽)을 양릉(陽陵)으로 개명했다.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에 관문을 새로이 설치하고 관문 출입의 통행증을 소지하도록 하여 통행을 제한했다. 그 해 겨울, 조(趙)나라를 폐하고 한단군(邯鄲郡)으로 바꾸었다.

경제5년 기원전 152년 3월, 양릉과 동위교(東渭橋) 건설을 시작했다. 5월, 20만 전의 비용을 들여 일반백성들을 모집하여 양릉에 이주시켰다. 서쪽에서 거센 폭풍이 불어와 강도(江都) 일대를 강타하여 성벽이 12장(丈)이나 무너져 내렸다. 정묘일, 경제는 장공주(長公主)의 딸 진교(陳蟜)를 융려후(隆慮侯)에 봉하고, 광천왕(廣川王)을 조왕(趙王)으로 개봉했다.

경제6년 기원전 151년 봄, 중위(中尉) 조관(趙綰)을 건릉후(建陵侯)에, 강도(江都)의 승상 정가(程嘉)를 건평후(建平侯)에, 농서태수(隴西太守) 공손혼야(公孫渾邪)를 평곡후(平曲侯)에, 조(趙)의 승상 소가(蘇嘉)를 강릉후(江陵侯)에, 전장군(前將軍) 난포(欒布)를 유후(鄃侯)에 각각 봉했다. 양(梁)과 초(楚)의 두 제후왕이 세상을 떠났다. 윤달 9월, 치도(馳道)의 양쪽 가에 심은 가로수를 베고 난지(蘭池)를 메꾸었다.

경제7년 기원전 150년 겨울, 율희(栗姬) 소생의 태자 유영(劉榮)을 폐위시키고 임강왕(臨江王)으로 봉했다. 11월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그 해 봄, 양릉(陽陵) 건설을 위해 동원한 죄수와 노예들을 사면하여 석방했다. 승상 도청(陶靑)이 면직되었다. 2월 을사일 교동왕 유철(劉徹)의 모후 왕지(王娡)를 황후(皇后)로 책립했다. 정사일, 교동왕을 태자로 책봉했다.

경제 중원 원년 기원전149년, 전 어사대부(御史大夫) 주가(周苛)⑨의 손자 주좌거(周左車)를 안양후(安陽侯)에 봉했다. 4월 을사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하고 민가 매 호마다 작위 1급씩 하사했다. 금고(禁錮)⑩를 폐지했다. 지진이 발생했다. 형산(衡山)과 원도(原都) 두 지방에 우박이 내렸다. 가장 큰 것은 직경이 1척(尺) 8촌(寸)이나 되었다.

중원2년 기원전 148년 2월, 흉노가 연(燕)을 침범했다. 이 일로 인해 흉노와의 화친이 단절되었다. 3월, 경제가 죄를 문책하기 위해 소환한 폐태자 유영이 중위(中尉)의 부중에서 자살했다. 그 해 여름, 황자 유월(劉越)과 유기(劉奇)를 각각 광천왕(廣川王)과 교동왕(膠東王)에 각각 봉하고 열후(列侯) 네 명을 후로 세웠다. 9월 갑술일에 일식이 일어났다.

중원3년 기원전 147년 겨울, 제후왕국의 어사중승(御史中丞)이라는 관직을 폐지했다. 봄에 흉노왕 두 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투항해 오자. 경제는 이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황자 유방승(劉方乘)을 청하왕(淸河王)으로 세웠다. 3월, 서북쪽 하늘에 혜성이 출현했다. 승상 주아부(周亞夫)가 면직되고 도후(桃侯)의 작위에 있었던 어사대부 유사(劉舍)가 승상에 임명되었다. 4월, 지진이 발생했다. 9월 그믐 무술일 일식이 일어났다. 동도문(東都門) 밖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중원4년 기원전 146년 3월, 덕양궁(德陽宮)을 세웠다. 황충(蝗蟲)의 피해가 극심했다. 그 해 가을 양릉(陽陵)에서 노역으로 복역을 치르던 죄수들을 사면했다.

중원5년 기원전 145년 여름, 황자 유순(劉舜)을 상산왕(常山王)에 책봉했다. 10명을 열후에 봉했다. 6월 정사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하고 민가 매 호마다 작위 1급씩을 하사했다. 전국에 걸쳐 극심한 수해가 발생했다. 제후왕국의 승상(丞相)을 상(相)으로 바꾸었다. 그 해 가을 지진이 발생했다.

중원6년 기원전 144년 2월 을묘일, 경제가 옹(雍)에 나아가 오제(五帝)에게 교제(郊祭)를 지냈다. 3월 우박이 내렸다. 4월 양효왕(梁孝王), 성양공왕(城陽共王) 및 여남왕(汝南王)이 세상을 떠났다. 효왕이 죽은 양나라는 땅을 다섯으로 나누어 그의 아들 유명(劉明)을 제천왕(濟川王)에, 유팽리(劉彭離)를 제동왕(濟東王)에, 유정(劉定)을 산양왕(山陽王)에, 유불식(劉不識)을 제음왕(濟陰王)에 각각 봉했다. 네 사람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정위(廷尉)를 대리(大理)로, 장작소부(將作少府)를 작대장(作大匠)으로, 주작중위(主爵中尉)를 주작도위(主爵都尉)로, 장신첨사(長信詹事)를 장신소부(長信少府)로, 장행(將行)을 대장추(大長秋)로, 대행(大行)을 행인(行人)으로, 봉상(奉常)을 태상(太常)으로, 전객(典客)을 대행(大行)으로, 치속내사(治粟內史)를 대농(大農)으로 각각 개칭했다. 대내(大內)의 관직을 신설하여 2천석 봉록을 수장으로 하고, 좌우의 내관(內官)을 설치하여 대내의 밑에 두었다. 7월 신해일 월식이 있었다. 8월 흉노가 상군(上郡)을 침범했다.

경제 후원 원년 기원전143년 겨울, 중대부령(中大夫令)을 위위(衛尉)로 개명했다. 3월 정유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단행했다. 민가 매 호 마다 작위 1급씩 하사하고, 중이천석의 관리와 제후 및 상에게 우서장(右庶長)의 작위를 내렸다. 4월, 일반 민중들에게 모여서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특별히 윤허했다. 5월 병술일, 지진이 발생하고 아침에 재차 여진이 일어났다. 상용현(上庸縣)에서 잇달아 12일 동안 계속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7월 을사일 월식이 발생했다. 승상 유사(劉舍)가 면직되었다. 8월 임진일, 어사대부 위관(衛綰)을 승상에 임명하고 건릉후(建陵侯)에 봉했다.

후원2년 기원전 142년 정월,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지진이 일어났다. 질도(郅都)를 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주어 흉노를 막게 했다. 일반 민중들에게 모여서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닷새 동안을 특별히 허가했다. 내사(內史)와 각 군에 명하여 양곡으로 말을 사육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길 때에는 관청에서 말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죄수와 노예들에게 칠종포(七緵布)⑪를 입히도록 규정했다. 말을 이용하여 곡식을 빻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흉년이 들자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양식을 절약하도록 하였으며, 추수할 시기가 되지 않은 곡식을 식량으로 삼기 위해 미리 수확하는 일을 엄격히 금했다. 경사에 체류하는 열후들에게 명하여 각기 자기의 후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3월 흉노가 안문군(雁門郡)을 침범했다. 10월 장릉(長陵)의 관전(官田)에 조세를 부과했다. 큰 가뭄이 들었다. 형산국(衡山國)․하동군(河東郡)․운중군(雲中郡)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

후원3년 기원전 141년 10월, 태양과 달이 닷새 동안이나 계속 붉게 빛났다. 12월 그믐, 천둥이 치고 태양이 자주빛을 띄었다. 다섯 행성이 거꾸로 운행하고 태미원(太微垣)을 침범했다. 달이 태미원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지나갔다. 정월 갑인일, 황태자가 관례(冠禮)를 치렀다.

갑자일 효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유조(遺詔)를 내려 제후왕 이하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가부을 잇는 자들에게 모두 작위 1급씩 하사하고 아울러 전 백성들에게 가구마다 1백 전을 상으로 하사하도록 했다. 후궁의 궁녀들을 모두 귀가시키고 평생토록 부세를 면제해 주도록 했다. 태자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니, 그가 효무황제(孝武皇帝)다. 3월, 황태후의 동생 전분(田蚡)과 전승(田勝)을 각각 무안후(武安侯)와 주양후(周陽侯)에 봉했다. 경제를 영구를 양릉(陽陵)에 안장했다.

태사공은 말한다.

『한나라가 흥기한 후 효문황제가 널리 은덕을 베푸니, 천하가 감명을 받아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했다. 효경황제에 이르러 이성 제후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조(晁錯)가 동성 제후들의 봉지에 대해 삭지를 건의하자 오초칠국(吳楚七國)이 연합하여 조정에 반기를 높이 들었다. 이는 제후왕의 세력이 대단히 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너무 조급하게 서둘러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서야 주보언(主父偃)⑫이 건의한 계책을 채택하여 비로소 제후왕의 세력을 전진적으로 약화시켜 마침내 천하를 안정시키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국가의 안위(安危)에 대한 관건이 어찌 책략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주석

①두태후(竇太后): 양가의 처녀로 입궁한 두희는 여후의 시종이 되었으나 궁내에 그 수효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여후가 궁녀들을 내보내 제후왕들에게 각각 5명 씩을 하사할 때 두희는 대왕으로 있던 문제에게 하사되었다.

②《한서소하전(漢書·蕭何傳)》에 따르면 계(系)는 오자일 가능성이 높다. 같은 한서의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고혜고후문공신표(高惠高后文功臣表》와《소하전(蕭何傳)》에는 모두 가(嘉)로 되이었다. 무릉후(武陵侯) 또한 무양후(武陽侯)가 옳다. 무릉군은 지금의 호남성 남부와 귀주성 동부에 위치했던 한나라 때 군 이름으로 한 개 군 전역의 광대한 지역에 소가를 봉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양(武陽)은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郯城縣)으로 소가의 봉국이다. 소하전(蕭何傳)에 “경제 2년 조칙을 내리기를 ‘소하의 손자 소가를 열후에 봉하고 무양현 2천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라는 명백한 기사가 있다.

③광천왕: 경제의 아들 유팽조(劉彭祖)다. 오종세가(五宗世家)에 상세하게 나온다. 광천은 원래 신도국(信都國)으로 지금의 하북성 기현(冀縣) 일대다.

④장사왕(長沙王): 경제의 아들 유발(劉發)이다.

⑤신도가(申屠嘉): 신도가(申徒嘉)라고도 하며 성이 신도 이름이 가(嘉)다. 일찍이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항우(項羽)와 경포(黥布)를 공격했다. 혜제 때 회양(淮陽) 군수가 되었다가 문제 때 어사대부가 되었고 문제 후원년 2년(전 162년) 승상으로 임명되어 이 때에 죽은 것이다.

⑥형산(衡山): 한나라 초에 군이였다가 문제 16년 제후국이 되어 회남왕 유장(劉長)의 아들 유발(劉勃)이 형산왕에 봉해졌다. 관할은 지금의 안휘성, 호북성 및 하남성 경계 지역으로 형산군의 본래 땅보다 좁은 편이었다. 치소는 주현(邾縣)으로 지금의 호북성 황강현(黃岡縣) 서북이다. 경내에는 오악의 남악에 해당하는 형산(衡山)이 있는데 지금의 안휘성 곽산(霍山)이다.

⑦남릉(南陵): 지금의 산서성 서안시 동. 박태후(薄太后) 능묘 남대릉(南大陵)은 그 경내에 있다.

⑧대우(祋祤): 지금의 섬서성 요현(耀縣)

⑨주가(周苛):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04년에 죽었다. 고조가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할 때 종군했으며 한왕이 된 한중으로 들어갈 때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다시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할 때 항우군을 격파했다. 한 3년 기원전 204년 초나라가 형양(滎陽)을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자 고조가 형양성을 빠져나가면서 주가에게 성을 굳게 지키라는 임무를 맡겼다. 항우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포로가 된 주가는 항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항우를 꾸짖자 항우는 주가를 팽살형에 처했다. 고조가 그의 공을 기려 그의 아들 주성(周成)을 고경후(高京侯)에 봉했다.

⑩금고(禁錮): 관리가 되는 길을 막은 조치로써 당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 데릴사위, 뇌물을 수수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관리가 될 수 없다는 법이 있었다.

⑪칠종포(七緵布): 실날이 듬성듬성한 질이 조악한 천

⑫주보언(主父偃): 성은 주보(主父)고 이름은 언(偃)이다. 제나라 임치(臨淄)인이다. 한무제 때 중대부(中大夫)가 되어 여러 번에 계책을 올려 무제에 의해 채용되었다. 그는 일찍이 제후왕의 자제들을 위해 추은령(推恩令)을 건의하여 무제의 윤허를 받았다. 제후왕의 자제들을 모두 후에 봉함으로써 제후국들의 영지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수십 개의 성읍과 천리에 이르는 강대한 제후국들의 형세를 개변시켰다. 무제는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후왕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평진후주보언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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