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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본기(孝漢本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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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6,168회 작성일 13-07-1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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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12 한무제(漢武帝)


효무황제(孝武皇帝)는 효경황제(孝景皇帝)의 가운데 아들이며, 그의 모후는 왕태후(王太后). 경제 4년 기원전 153, 효무황제는 황자(皇子)의 신분으로 교동왕(膠東王)에 봉해졌다. 경제 7년 기원전 150, 황태자 유영(劉榮) 폐위되어 임강왕(臨江王)으로 봉해지자, 그는 교동왕의 신분으로 태자로 책봉되었다. 재위 기원전 141년에 경제가 재위 16년 만에 죽자 태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효무황제이다. 효무황제는 즉위 초부터 특히 귀신을 숭배하여 제사 올리는 일을 중시했다.

무제(武帝) 건원(建元) 원년은 기원전 140년이다. 그때는 이미 한나라가 흥기한지 60여년이 지나 천하가 태평하고 무사했음으로 조정의 관원들은 천자에게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역법과 복색 등의 제도를 바꾸기를 청원했다. 

유가의 학설을 숭상한 금상황제는 현량(賢良)을 등용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문장과 학문이 뛰어난 조관(趙綰)과 왕장(王臧)등을 공경대신(公卿大臣)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제후들의 조현을 받기 위해 옛 주나라의 전례를 따라 장안성 남쪽 교외에 명당(明堂)을 건립할 것을 천자에게 건의했다. 그들이 유가의 설에 따라 천자의 순수(巡狩), 봉선(封禪), 역법과 복식의 변경 등의 개혁조치들을 추진하다가 미처 시행하기도 전에 당시 황노학을 신봉하고 있던 두태후(竇太后)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녀는 유가의 학설을 싫어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조관 등을 감시하게 한 결과 사적인 이익을 꾀해 불법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잡고 조관과 왕장들을 체포하여 옥리에게 넘겨 심리하게 했다. 조관과 왕장 등은 자살하고 그들이 시행하려고 했던 개혁조치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건원 6년 기원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황상은 현량문학으로 초빙한 공손홍(公孫弘) 등을 등용했다.

그 이듬해, 황상은 처음으로 옹현(雍縣)에 나아가 오치(五畤)에서 오방(五方)의 천제에게 교제(郊祭)를 지냈다. 그 후로는 3년마다 교제를 올렸다.

이 때 금상폐하는 신군(神君) 한 사람을 구하여 상림원(上林苑)의 제씨관(蹏氏觀)에 모셨다. 그 신군은 이른바 장릉(長陵)에 사는 한 여인으로 자신이 낳은 아이가 요절하자 이를 너무나 비통해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의 혼령이 동서(同壻) 완약(宛若)의 몸에 그 형상을 드러냈다. 완약의 몸에 현신한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제사를 지냈다. 평원군(平原君)도 그녀에게 제사를 지낸 사람 중의 하나였다. 평원군의 후손들은 이로 말미암아 모두 현귀해졌다. 무제가 즉위할 때 궁궐 안에서 풍성한 재물을 준비하여 그녀에게 성대한 제사를 올렸는데, 문득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 왔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때 이소군(李少君)도 조신(竈神)에게 제사를 지내 노쇠를 막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술(方術)을 황상에게 제시하자 황상이 그를 매우 중히 여기었다.

이때 이소군(李少君)은 일찍이 심택후(深澤侯)의 추천으로 입조하여 방술과 의약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와 고향 및 경력 등을 속이고 항상 나이가 70세라고 자칭하며, 자기는 귀신을 몰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쇠를 방지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술을 행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소군은 방술에 의지하여 널리 각 제후국을 주유하였으나 아내와 자식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귀신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로장생할 수 있는 방술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투어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바쳤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엄청난 돈과 비단 및 의식(衣食) 등을 축재할 수 있었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소군을 본 사람들은 그가 어느 지방 출신인지도 모르면서도 다투어 그를 믿고 신봉하게 되었다. 이소군은 선천적으로 방술을 애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묘한 언사로 인간사를 알아맞히는 일에 뛰어났다. 그가 일찍이 무안후(武安侯)를 모시고 주연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좌중에는 90여 살 된 노인이 있었다. 그가 과거에 자기 할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갔던 곳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노인이 어렸을 때 이소군도 그 할아버지와 함께 동행한 적이 있어 그 장소를 안다고 말하자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소군의 알현을 받은 황상은 그에게 옛 동기(銅器)를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군이 대답하였다.

이 동기는 제환공(齊桓公) 10년에 백침(栢寢)의 누대에 진열해 둔 것이옵니다.

황상이 사람을 시켜 그 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검증해 보도록 했다. 그 동기는 과연 제환공 때 만들어진 동기였음이 밝혀졌다. 이 일로 말미암아 궁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으며, 소군은 이미 나이가 100세가 넘은 신선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소군은 황상에게 말했다.

조신(竈神)에게 제사를 드리면 신물(神物)을 얻을 수 있고, 신물을 얻게 되면 단사(丹沙)를 황금으로 정제(精製)할 수 있으며, 황금이 만들어진 후에는 그것으로 식기를 제조하여 사람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수명이 연장되면 바다 가운데 있는 봉래(蓬萊)에 살고 있는 신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신선을 만나면 하늘과 땅에 지내는 봉선(封禪)을 거행하여 장생불사할 수가 있는데, 황제(黃帝)는 바로 그렇게 해서 신선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찍이 바다에서 유람하던 중에 만난 안기생(安期生)이 제게 대추를 주었는데 박처럼 컸습니다. 안기생은 봉래의 선경을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신선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신선에 뜻을 두고 계신다면 그 분을 만나실 수 있사오나, 뜻을 같이하실 수 없으면 그 분은 몸을 피해 숨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천자가 처음으로 직접 조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방사를 바다에 보내 안기생과 같은 선인을 찾아보게 하는 한편, 단사 등 각종 약물을 가지고 황금을 정제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소군은 병으로 죽었다. 천자는 소군이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여겨 즉시 황현(黃縣)과 추현(錘縣) 일대의 문서관(文書官)을 지내던 관서(寬舒)에게 명하여 이소군의 방술을 계승하도록 하였으며, 봉래에 산다는 선인 안기생을 찾아보도록 하였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이후 바다와 인접해 있는 연()과 제() 등에서는 황당무계한 방사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와 이소군의 뒤를 이어 잇달아 신선에 관한 일을 말하였다. 박현(亳縣) 사람 박유기(薄誘忌)가 태일신(太一神)에게 제사드리는 예절에 대해 상소하며 말했다.

천신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신은 태일신이고 태일신을 보좌하는 신이 오제(五帝)입니다. 고대에 천자께서 매년 봄과 가을 두 철에 경사의 동남쪽 교외로 행차하여 교제를 거행할 때 소, , 돼지의 삼생(三牲)을 제물로 차려 놓고 이레 동안 제사를 지냈으며, 아울러 제단 위에 팔방으로 통하는 층계를 만들어 귀신이 통행하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이에 천자는 태축(太祝)에게 명하여 장안(長安) 동남쪽 교외에 태일신의 사당을 건립하고 박유기가 말한 방식대로 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상소하였다.

옛적에 천자께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생(三牲)을 산 재물로 바치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자 천자가 그 상소를 윤허하고 즉시 태축에게 명하여 박유기가 이전에 건의한 태일신의 제단에서 그 신들의 제사를 모시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상소한 방식대로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 후 또 어떤 사람이 상소하였다.

고대에 천자께서는 항상 봄 가을 두 철에 재앙을 없애고 복을 구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셨는데, 황제(黃帝)의 제사에는 효조(梟鳥)와 장수(獐獸) 한 마리씩을, 명양신(冥羊神)의 제사에는 양을, 마행신(馬行神)의 제사에는 청공마(靑公馬), 태일신과 고산산군(皐山山君) 및 지장(地長)의 제사에는 소를, 무이군(武夷君) 제사에는 말린 고기를, 음양사자(陰陽使者)의 제사에는 소를 각각 제물로 바쳤습니다.

천자는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그가 말한 방식대로 전에 박유기가 건의한 태일신의 재단 밑에서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 후 천자의 상림원(上林苑)에 흰 사슴이 있었는데, 그 사슴의 가죽으로 화폐를 만들어 천자의 어진 정치가 하늘에 감응되어 나타난 길조를 선양하고 다시 은과 주석을 합금하여 금속 화폐를 주조하여 흰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화폐로 쌓았다. 이듬해 천자는 옹현(雍縣)으로 행차하여 교천제를 지내고 외뿔 달린 들짐승을 포획하였는데, 그 생김새가 노루와 비슷했다. 주관하는 관원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과 땅에 올린 제사를 상제께서 흠향하시고 이 외뿔 달린 짐승을 내리셨으니 이는 아마도 기린인 듯합니다.

그래서 오치에 각각 소 한 마리씩을 제물로 더 바치고 요제(燎祭)를 지냈다. 제후들에게 은으로 주조한 금속 화폐를 상으로 하사한 금상은 하늘과 땅의 뜻에 부합되어 감응한 상제가 내린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말했다.

이 때 제북왕(齊北王)은 천자가 장차 봉선의 대전을 거행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제북왕의 봉지인 태산과 그 주위 땅을 바치겠다는 글을 올렸다. 천자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현()과 읍()을 그에게 하사하여 이를 보상해 주었다. 상산왕(常山王)이 죄를 지어 유배당하자, 그의 동생을 진정(眞定)에 봉하여 선왕(先王)의 종묘를 받들게 하고, 상산국을 군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오악(五嶽)의 땅은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관할 구역으로 되었다.

그 이듬해 제나라 출신의 이름이 소옹(少翁)이라는 자가 귀신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방술을 빙자하여 천자를 알현했다. 그때 마침 황상이 총애하는 왕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소옹은 밤이 되자 방술을 써서 왕부인과 부엌귀신의 형상을 불러들였다. 장막 곁에서 이를 지켜본 황상이 즉시 그를 문성장군(文成將軍)에 봉함과 동시에 재물을 상으로 하사하고 빈객의 예를 갖추어 그를 대접하였다. 문성장군이 말했다.

황상께서 만일 신선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신선이 머무는 궁실이나 입고 있는 피복(被服) 등과 비슷한 것들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신선은 오지 않아 만날 수 없습니다.

천자는 소옹의 말을 따라 그 즉시 여러 가지 색깔의 구름을 그린 신거(神車)를 만들도록 하고 오행상극(五行相剋)과 간지(干支)의 원리에 따라 선택한 길한 색칠을 해서 몰게 하여 악귀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또 감천궁(甘泉宮)을 짓고, 궁중에 대실(臺室)을 세워 실내에 천신, 지신, 태일신 등 뭇 신들의 형상을 그려 놓았다. 또 천신을 부르기 위해 제기를 구비해 놓았으나 1년이 지나도록 문성장군의 방술은 날이 갈수록 영험을 잃어갔고, 신선도 오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끝에 비단에 글씨를 써서 소에게 먹이고는 소의 뱃속에 기이한 물건이 들어 있다고 말하였다. 사람을 시켜 소를 잡아 글자가 써진 비단을 얻었으나 비단에 써진 글이 괴이하기 짝이 없었음으로 천자는 이를 의심하게 되었다. 비단글씨의 필적을 알고 있던 사람이 있어 조사하게 한 바 마침내 그 글자가 날조되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문성장군을 죽인 천자는 그 일을 비밀에 부쳤다.

그 후 다시 백량대(柏梁臺)와 동주(銅柱)을 세우고 그 위에 선인(仙人)의 손바닥 모양을 본뜬 받침대를 만들어 이슬을 받아 옥가루와 섞어 마셨다. 문성장군이 죽은 그 이듬해, 천자가 병에 걸려 병세가 매우 위중하자 무의(巫醫)들이 각종 처방과 약을 써 보았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유수(遊水) 사람 발근(發根)이 말했다.

상군(上郡)에 어떤 무당이 있는데, 그는 병을 앓으면서 자신의 몸에 신령을 강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황상은 그를 불러 감천궁에 머물게 하여 자신의 병의 완쾌를 위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윽고 무당의 몸에 병이 생기자 천자는 사람을 보내 무당을 통하여 신군(神君)께 물어보도록 시켰다. 무당의 몸에 강림한 신군이 말하였다.

천자는 병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병세가 좀 차도가 있게 되면 무리해서라도 부축하여 감천궁으로 나오면 나를 만나게 되리라.

그 후 천자의 병세가 호전되어 감천궁으로 행차하자 천자의 병든 몸은 완전히 회복 되었다. 천자는 즉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수궁(壽宮)을 지어 신군을 받들었다. 신군 중 가장 존귀한 신은 태일신이며, 그 신을 보좌하는 대금(大禁)과 사명(司命) 등의 신선들은 모두 태일신을 높이 받들었다. 뭇 신선들의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가 없고 다만 그들의 음성만이 들리는데, 사람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그들은 이따금 왔다가 가곤 하였는데, 그들이 올 때에는 솨솨 바람 소리가 났다. 뭇 신들은 실내의 장막 속에 기거하는데, 이따금 낮에도 말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밤에 말했다. 볼제(祓祭)를 드린 후에야 비로소 수궁(壽宮)에 들어가곤 했던 황상은 무당을 주인으로 삼아 차린 음식을 흠향하였으며, 뭇 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당을 통하여 전달했다. 천자는 또 다시 수궁과 북궁(北宮)을 증수했고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웠으며 제사에 소용되는 각종 제기를 차려 놓고 신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신군이 한 말은 사람을 시켜 기록하게 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화법(畵法)이라고 했다. 이러한 말들은 세상의 일반사람들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으며 특별히 심오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천자는 혼자 마음속으로 즐거워할 뿐, 그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일반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3년 후, 해당 관리가 천자에게 진언하였다.

기원(紀元)은 하늘이 내린 상서로운 조짐에 따라 명명해야지 단순히 ‘1, 2...’하는 식으로 숫자로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맨 처음 연호는건원(建元)으로 두 번째 연호는 장성(長星)이 출현하였으니원광(元光)으로, 세 번째 연호는 교제(郊祭)를 지낼 때 외뿔 달린 들짐승을 포획하셨으니원수(元狩)로 정해야 합니다.

그 이듬해 겨울, 천자는 옹현에서 교제를 거행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금 상제께는 짐이 몸소 제사를 올렸으나 후토신께는 올리지 못했다. 이는 옛 법에 어긋난 처사가 아닌가?

해당 관리들은 태사공과 사관(祠官) 관서(寬舒) 등과 의논하고 나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에 바치는 희생은 누에고치나 밤 크기만한 뿔이 달린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친히 후토신에게 제사를 지내시려면 마땅히 연못 한가운데의 동산 위에 다섯 개의 원형 제단을 세우고, 각 제단마다 누런 송아지 한 마리씩을 제물로 바친 후에, 제사가 끝나면 그 희생물을 모두 땅에 매장해야 하며,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황색 의상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천자는 동쪽으로 순행나가 분음현(汾陰縣)의 동산 위에 처음으로 후토신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고 관서 등이 말한 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황상은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예법에 따라 멀리 바라보며 지신에게 절을 올렸다. 제례를 모두 마치고 형양(滎陽)을 거쳐 귀경 길에 오른 천자는 이윽고 행차가 낙양을 지날 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하은주(夏殷周) 삼대는 지금으로부터 아득히 먼 옛날인지라 제사를 받드는 그들의 후손을 모두 보존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제 사방 30리의 땅을 주왕조의 후예에게 하사하여 주자남군(周子南君)으로 봉하니, 그곳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 받들게 하라.

그 해 천자는 처음으로 각 군현을 순수하고 태산에 이르렀다. 같은 해 봄, 낙성후(樂成侯) 정의(丁義)는 난대(欒大)를 소개하는 글을 올렸다. 난대는 교동국(膠東國)의 궁인으로서, 예전에 문성장군과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으로 후에 교동왕(膠東王)의 약제사가 되었다. 낙성후의 누나는 교동국 강왕(康王)의 왕비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강왕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회첩의 아들이 뒤를 이어 교동왕의 자리에 올랐다. 강왕의 왕후는 행실이 음란하여 새로 즉위한 왕과 사이가 나빴다. 두 사람은 법적수단을 동원해 서로 해치려고 했다. 마침 문성장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강왕의 왕비는 낙성후를 통해 난대를 천자에게 알현시킨 후에 방술을 강론하여 황상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그때 천자는 문성장군을 너무나 일찍 죽여 그가 지닌 방술이 모두 전수되지 못하게 되었다고 못내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난대를 만나게 된 황상은 크게 기뻐했다. 난대는 키가 크고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많은 책략을 말하고 천자의 면전임에도 감히 큰소리를 치면서 태연자약했다. 그는 황상에게 허풍을 떨었다.

신은 일찍이 바다를 왕래하던 중에 안기생과 선문고(羨門高) 등의 선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신을 신임하지 않았습니다. 또 강왕(康王)은 일개 제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방술을 그에게 전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신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왕에게 이를 아뢰었지만 강왕 또한 신을 신용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스승은????황금도 만들 수 있고, 황하의 제방도 안 터지게 막을 수 있으며, 불사약도 구할 수 있고, 신선도 불러들일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은 문성장군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방사들이 모두 입을 꽉 다물고 있는데 어찌 감히 방술에 대한 말을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황상이 말했다.

문성장군이 죽은 이유는 말의 간을 먹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진실로 그의 방술을 연구하여 정리할 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난대가 말했다.

신의 스승은 속세를 떠난 신선이라 결코 남에게서 구하는 바가 없고 단지 남이 찾아와 그 분에게 구할 뿐입니다. 폐하께서 필히 신선을 불러 만나보시려고 한다면 신선에게 보내는 사자의 신분을 존귀하게 만들어야 하고 사자로 하여금 친족들을 거느리게 하여 빈객을 대하는 예를 행하여 접대하셔야지 결코 소홀히 대하시면 안 됩니다. 사자에게 각종 인장과 신표를 주어 지니게 해야만 비로소 신선은 만날 수 있어 폐하의 뜻을 전달할 있습니다. 비록 그렇게 하더라도 신선이 만나줄 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신선에게 보내는 사자를 극진히 받들어야만 비로소 신선을 초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황상은 우선 난대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작은 방술을 펼쳐보라고 시켰다. 난대가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늘어놓자 바둑돌은 저절로 서로 부딪치며 싸웠다.

난대의 방술을 본 황상은 홍수로 황하의 제방이 무너져 내릴까 두려워하고 있었고 연금술로 황금도 만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오리장군(五利將軍)에 봉하였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난대는 다시 네 개의 금인(金印)을 얻어 몸에 천사장군(天士將軍), 지사장군(地士將軍), 대통장군(代通將軍) 및 천도장군(天道將軍)의 신표를 차고 다니게 되었다. 황상은 다시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룰 내렸다.

옛날 하우(夏禹)는 아홉 개 하천을 소통시키고 사독(四瀆)이 큰 물에 잠겨 제방을 쌓느라 요역이 그칠 날이 없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린지 28년 만에 짐에게 방사 한 사람을 보낸 하늘의 뜻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말이 있고, 또 점괘(漸卦)????기러기가 물가의 높은 언덕으로 서서히 날아간다.홍점우반(鴻漸于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오늘 짐이 오리장군을 만났음을 말하는 괘인 것 같다. 지사장군을 2천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낙통후(樂通侯)에 봉한다.

황상은 계속해서 난대에게 열후에게 하사하는 최상급 관저(館邸)와 노복 1천 명을 하사하고, 아울러 황상이 사용하지 않는 어가와 궁중의 장막 등 각종 기물을 주어 그의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또 위황후(衛皇后) 소생의 장공주(長公主)를 그에게 출가시키고 황금 1만 근을 주었으며, 그녀의 봉호를 당리공주(當利公主)로 바꾸었다. 천자가 친히 오리장군의 관저를 방문하여 난대의 안부를 물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물건을 공급하는 사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황상의 고모인 대장공주(大長公主)로부터 조정의 장상(將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대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그의 집으로 보내 정성을 다해 바쳤다. 그 후 천자는????천도장군(天道將軍)????이라는 인장을 옥에다 새긴 후에 새의 깃털을 짜서 만든 옷을 입힌 사자를 시켜 난대에게 보냈다. 사자가 밤에 백모(白茅) 위에 서서 옥인(玉印)을 바치자 난대에게 바치자 난대는 새의 깃털로 만든 옷을 걸치고 백모 위에 서서 받았는데, 이는 옥인을 받는 자가 천자의 신하가 아님을 나타내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가 허리에 찬 옥인을 천도(天道)라고 부르게 한 것은 그가 천자를 대신해 천신이 왕림하도록 인도한다는 뜻에서였다고 했다. 그때부터 오리장군은 밤마다 자기 집에서 신선의 강림을 비는 제사를 지냈으나 신령은 오지 않고 온갖 잡귀들만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잡귀들을 잘 부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난대는 행장을 꾸려 동해 바다로 가서 그의 선사(仙師)를 찾겠다고 말했다. 난대는 천자를 알현한 지 한 달만에 인수(印綬) 여섯 개를 몸에 차고 다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귀와 명예는 천하를 진동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연()과 제()의 바닷가에 사는 방사들은 모두가 자신도 신선을 부를 수 있는 비술이 있다고 팔을 휘두르며 장담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 해 여름 6, 분음(汾陰) 출신 무당 금()이 위수(魏脽)의 후토신을 모시던 사당의 경계에서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갑자기 땅이 갈고리 모양으로 솟구쳐 올랐다. 금이 사람을 시켜 땅 속에서 정()을 얻었다. 그 정은 보통 정과 크기가 다를 뿐만 아니라 표면에는 문양이 새져 있었다. 그러나 글자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무당이 그곳 지방관에게 보고하자 그 관리는 하동군(河東郡)의 태수 승()에게 이를 보고했고 승은 다시 조정에 보고했다. 천자는 사자를 파견하여 무당 금이 솥을 얻게 된 경위를 자세히 조사해 보라고 명했다. 사자는 돌아와 솥을 얻은 경위는 허위로 꾸며내지 않았다고 고했다. 이에 황상은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올린 후에 정을 감천궁으로 호송하도록 하고 천자도 만조백관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 행차했다. 정을 따라 나선 천자의 일행이 중산(中山)에 다다랐을 때 날씨가 쾌청한 가운데 열기가 뻗치더니 하늘에 황색 구름이 일어나 세상을 덮었다. 때마침 고라니 한 마리가 지나가자 황상은 친히 활을 쏘아 잡아서 감천궁에서 제사를 올릴 때 제물로 바쳤다. 이윽고 감천궁에 당도하여 보정을 위한 제사를 끝낸 공경대부들은 모두 입을 모아 보정(寶鼎)을 높이 받들자는 의견을 황상에게 주청했다. 그러자 천자가 말했다.

근래 황하가 범람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짐은 해당 군현에 순행(巡幸)을 나가 지신(地神)인 후토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백성들을 위해 곡식이 잘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이에 금년에 마침내 풍년이 들었으나 아직까지 감사제를 올리지 못했음에도 이 보정이 땅에서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옛날 태호(太昊) 복희(伏羲)께서 보정을 하나 만드셨는데, 한 개를 만드신 이유는 통일(統一)의 뜻으로, 천지만물은 하나로 귀결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황제(黃帝)께서는 세 개의 보정을 만드셨는데 이는 각각 하늘과 땅 및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우(夏禹)는 전국 구주(九州)에서 구리를 모아 아홉 개의 커다란 보정을 만드셨는데, 이는 상제와 뭇 신들을 위한 제사를 올릴 때 희생을 삶아 제물로 올리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세상에 성군이 출현하면 이 보정들이 나타났음으로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전해졌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미해지고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송나라의 사직이 파괴되자 이 보정은 땅속에 묻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시경(詩經주송(周頌사의(絲衣)》㉗에 다음과 같은 노래말이 있습니다.

 

自堂徂基(자당조기)

당에서 내려와 마당에 임하고

 

自羊徂牛(자양조우)

양에게 갔다가 소에게서 멈추며

 

鼐鼎及鼒(내정급자)

가마솥을 살펴보고 옹솥을 쳐다보네

 

不吳不敖(불오불오)

떠들지도 않고 오만하지도 않으니

 

胡考之休(호고지휴)

장수하시는 어버이의 복이로다.

 

지금 이곳 감천궁에 안치한 보정을 살펴보면 표면에 찬란히 비나는 광채는 마치 용이 노니는 듯 변화무쌍하니 이는 우리나라가 장차 무궁무진한 복록을 얻는다는 길조를 뜻합니다. 그리고 지난번 황상께서 감천궁으로 행차하시던 도중 중산에 이르자 하늘에서는 황백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 황상의 어가를 덮었고 땅에서는 고라니가 갑자기 튀어나와 지나갔습니다. 이는 실로 그지없이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폐하께서 커다란 활과 화살 4대로 노루를 잡아 제단에 희생으로 바쳐 하늘과 땅의 신령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성대하게 올리셨습니다. 오직 천명을 받은 천자만이 마음속으로 하늘의 뜻을 헤아려 천제의 덕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이 보정을 선조들을 모신 묘당에 보인 후 감천궁 내의 천제를 모시고 있는 전정에 보관하여 하늘이 명백히 내리신 신령스러운 길조에 부응하십시오.

천자는 신하들의 주청을 허락하고 그대로 시행하도록 했다.

한편 봉래의 신선이 산다는 섬을 찾아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했다.

봉래의 선도(仙島)가 멀리 있지 않은데도 갈 수가 없는 까닭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리는 상서로운 기운이 없기 때문인 합니다.

그래서 황상은 즉시 운기(雲氣)를 살피는 데 뛰어난 전문 관원을 파견하여 서기(瑞氣)를 살피도록 하였다.

그 해 가을, 황상은 옹현에 행차하여 교제를 올릴 채비를 할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말했다.

오제는 태일신의 보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땅히 태일신을 모시는 사당을 세우신 후에 황상께서 친히 교제를 지내셔야 합니다.

그러나 황상은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제나라 출신의 방사 공손경(公孫卿)이 말했다.

폐하께서 보정을 얻으신 금년은 겨울이 신사일인 초하루로 동지의 절기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보정을 만드신 절기와 일치합니다. 신이 가지고 있는 목간에황제께서 완구(宛胊)에서 보정을 얻으신 후 이 일에 대하여 대신인 귀유구(鬼臾區)에게 물으시자 귀유구는 이렇게 대답했다.????황제께서 보정과 신책(神策)을 얻으셨는데. 금년은 기유일인 초하루가 동지입니다. 이는 천도(天道)의 계통과 합치하니 이러한 순환 반복은 끝이 나면 다시 시작됩니다.????그래서 황제께서 해와 달에 비추어 역법(曆法)을 추산해 보셨는데, 그 후 대체로 20년마다 초하루가 동지가 되었으며, 모두 20차례가 반복된 도합 380년 만에 황제는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르시게 되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신은 소충(所忠)을 통하여 이것을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충은 이 목간의 내용이 불합리하고 허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의심한 나머지보정 문제는 이미 정해졌는데 또 다시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폐하께서 신임하시는 사람을 통해 이를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황상이 크게 기뻐하며 공손경을 불러 묻자, 공손경이 대답했다.

신은 신공(申功)으로부터 이 목간을 받았습니다만 신공은 이미 죽었습니다.

황상이 물었다.

신공은 어떤 사람인가?

공손경이 대답했다.

신공은 제나라 사람으로 선인 안기생과 친교를 맺고 서로 왕래하며 황제(黃帝)의 도를 전수받았는데, 다른 책은 남기지 않고 오직 정()에 관한 책만 한 권 남겼습니다. 이 책에 씌어 있기를 한왕조의 흥성한 시기는 황제가 보정을 얻었던 때와 서로 일치한다. 한왕조의 성인(聖人)은 고조의 손자 혹은 고조의 증손자 대에 나올 것이다. 보정의 출현은 천제의 뜻이 나타난 것과 같으니 마땅히 봉선의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 봉선을 행한 제왕은 모두 72인에 달하지만 오직 황제(黃帝)만이 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공은 신에게????한왕조의 군주도 태산에 올라 봉제(封祭)를 지내면 선인이 되어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황제의 시대에는 제후국이 1만 개에 달했고,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는 제후국의 수효는 7천 개에 이르렀습니다. 천하의 이름난 산은 모두 여덟 개인데, 그 중 세 개는 만이의 땅에 있으며 나머지 다섯 개는 중원 땅에 있습니다. 중원 지구에는 화산(華山), 수산(首山),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그리고 동래산(東萊山)입니다. 이 다섯 개의 산들은 모두 황제가 자주 유람하며 신선과 만나던 곳입니다. 전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선술을 배운 황제는 선도(仙道)를 반대하는 백성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귀신을 비난 하는 사람들을 모두 처형하였습니다. 이렇게 100여 년을 행한 후에야 황제도 비로소 신선과 상통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옹성의 교외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3개월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별호를 대홍(大鴻)이라고 부르는 귀유구(鬼臾區)가 죽자 그도 역시 옹성의 교외에 묻혔습니다. 홍총(鴻冢)이란 바로 그의 무덤을 칭하는 말입니다. 황제는 그 후에도 명정(明廷)에서 수많은 신선들을 만났습니다. 명정(明廷)이란 바로 감천궁(甘泉宮)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한문(寒門)이란 지금의 곡구(谷口)를 가리킵니다. 황제는 수산(首山)의 구리를 캐서 형산(荊山) 아래로 가져가 보정을 주조했습니다. 보정이 완성되자, 기다란 수염을 늘어뜨린 용이 황제를 맞이해 가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황제가 용의 등에 올라탈 때 군신들과 후궁들 70여 명이 따라 같이 올라타자 용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 때 용의 등에 올라타지 못한 나머지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뽑히면서 땅에 떨어지고 말았는데, 그 때 황제의 활도 같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활과 용의 수염을 부등켜 안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이 일 때문에 그곳을????정호(鼎湖)????라 하였고, 그 활을????오호(烏號)????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난 천자가 탄식했다.

, 내가 정말 황제처럼 될 수만 있다면 신발을 벗어 내던지듯 천자의 자리도 내버릴 수 있는데!

천자는 공손경을 낭관(郎官)에 임명하고 그를 동쪽 태실산에 파견하여 신선을 기다리게 하였다.

공손경의 말을 쫓아 옹현으로 출행하여 교제를 올린 후에 농서군(隴西郡)으로 계속 나아가 서쪽의 공동산(崆峒山)에 올랐다가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황상은 사관(祠官) 관서(寬舒) 등에게 감천궁 내에 태일신의 제단을 세우도록 명했다. 제단은 옛날 박유기가 말한 양식대로 3층으로 세웠다. 오제의 제단은 태일신 제단 아래를 빙 둘러싸게 배치하여 각기 고유의 방향에 맞추었다. 황제의 제단은 서남쪽에 두고 귀신들이 왕래하도록 여덟 개의 통로를 만들었다. 태일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옹현의 오치에 각각 바치는 제물과 같았으나, 그것 이외에도 단술, 대추, 육포 등을 추가하고 검정 소 한 마리를 잡아 조두(俎豆)에 올렸다. 그리고 오제에게는 희생과 단술만을 바쳤다. 또 제단 아래의 사방에는 오제를 보좌하는 뭇 신들과 북두성의 신주를 모셔 놓고 일일이 제사를 지냈다. 제사가 끝나면 귀신들이 흠향한 제물들을 모두 거두어 불태웠다. 희생으로 바친 제물 중 소는 하얀 색깔의 것을 썼는데, 사슴고기는 쇠고기 안에 넣고, 돼지고기는 사슴고기 안에 넣어 물에 담갔다. 태양신에게는 소를 바치고 월신에게는 양 또는 돼지를 바쳤다. 태일신의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은 수를 놓은 보라색 옷을 입었으며, 오제의 제사를 맡아보는 제관은 오제의 각기 다른 고유의 색깔에 맞추어 입었다. 또 태양신의 제사를 맡아보는 제관은 붉은색의 옷을 걸쳤으며, 월신의 제사를 관장하는 제관은 흰옷을 입었다.

그 해 11월 신사일 동지날, 천자는 해가 뜨기 전 새벽녘에 처음으로 교외에 나가 태일신에게 제사지내고 다시 아침에는 태양신에게 저녁에는 오후에는 월신에게 지냈다. 그러나 제사에 참석한 천자는 신들에게 큰절을 올리지 않고 읍례(揖禮)만 표했다. 태일신의 제사는 옹현에서 교제를 지내는 방식과 동일한 의식을 갖추어 지탰고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았다

하늘은 처음으로 보정(寶鼎)과 신책(神策)을 황제(皇帝)에게 내려, 초하루가 지나면 다시 초하루를 맞이하게 되어 순환 반복을 거듭하고 끝나면 다시 시작된다는 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에 황제(皇帝)는 이곳에서 삼가 공손히 경배를 올립니다.

이 때 의식을 치루기 위해 착용한 복식은 모두 황색이었고,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제단 위는 횃불로 가득 차 있었으며, 제단 주변에는 희생을 삶는 기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때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말했다.

제단 위에서 광채가 빛나고 있사옵니다.

공경대신들이 보고 말했다.

황상께서 처음으로 운양궁(雲陽宮)에서 태일신에게 교제를 거행하실 때 사관(祠官)들이 벽옥(璧玉)과 휼륭한 희생을 삼가 공손히 받들어 뭇 신들게 바쳤는데, 그 날 밤 아름다운 광채가 나타났으며 그 이튿날 낮에는 황색의 운기(雲氣)가 하늘을 높이 뻗쳤었습니다.

태사공(太史公)과 사관(祠官) 관서(寬舒) 등이 말했다.

신령이 강림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복록을 보우한다는 상서로운 징조임으로 천자께서는 마땅히 광채가 나타난 지역에 태일신을 위한 사당과 제단을 지어 하늘의 상서로운 조짐에 답해야 합니다. 태축(太祝)에게 명하시어 이 일을 관장케 하시고 가을과 겨울 두 계절에 제사를 받들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황상께서 직접 3년마다 한 번씩 교제를 거행하십시오.

그 해 가을, 남월(南越)을 정벌하기 위해 태일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승리를 기원했다. 모형(牡荊)으로 만든 깃대에 해, , 북두칠성 및 승천하는 비룡을 그려 넣어 태일삼성(太一三星)을 상징하는 깃발을 달아 태일신에게 제사지낼 때 맨 앞에 꽂아놓고????영기(靈旗)????라고 불렀다. 출전하는 군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태사(太史)는 영기를 받들고 정벌하려는 나라의 방향을 가리켰다.

이 때 신선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떠난 오리장군(五利將軍)은 감히 바다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에 올라 제사만을 지낼 뿐이었다. 황상은 몰래 사람을 시켜 그를 미행하도록 하여 그의 행적을 조사해 본 결과 그는 어떤 신선도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오리장군은 거짓으로 자신의 스승을 만났다고 거짓말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방술은 이미 신통력이 다하여 이렇다 할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 그래서 황상은 오리장군을 살해했다.

그 해 겨울 하남(河南)에서 신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공손경은, 구지성(緱氏城)위에서 선인의 자취를 발견했는데, 꿩처럼 생긴 신물이 성 위에서 출몰한다고 천자에게 보고했다. 천자는 직접 구지성으로 행차하여 그 자취를 살펴본 뒤 공손경에게 말했다.

너도 문성장군이나 오리장군처럼 짐을 속이려고 하는 짓이 아닌가?

공손경이 대답했다.

신선이 군주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군주가 신선을 찾아가는 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선을 찾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지 않습니다. 신선을 찾는 일은 현실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일 같지만 해와 달을 거듭하여 오랜 세월 동안 정성을 들여야만 비로소 신선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군국(郡國)에서는 일제히 도로를 새로 놓거나 정비한 후에 궁전의 누대(樓臺)와 명산에 세워진 신묘(神廟)를 말끔히 단장시키고 천자의 왕림을 기다렸다.

그 해 남월을 정벌하고 얼마 후에 황상이 총애하는 이연년(李延年)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천자를 알현하였다. 황상은 그의 뛰어난 음악에 대하여 극구 칭찬하고 공경들에게 말했다.

민간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고무(鼓舞)의 음악이 있는데 조정이 지내는 교제에는 음악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올바른 일이라고 하겠는가?

공경들이 대답했다.

옛날 하늘과 땅에 제사지낼 때에는 꼭 음악을 함께 연주했습니다. 그 이유는 음악을 들어야만 비로소 신령들이 제사에 올리는 제물을 흠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태호 복희씨가 소녀(素女)에게 명하여 50현의 슬()을 타게 하셨는데, 그 가락이 너무 슬퍼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태호께서 25현으로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월을 평정한 공을 기려 태일신과 후토신에게 감사드리는 제사를 올릴 때 처음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게 했으며, 노래하는 가동(歌童)들의 수를 늘렸다. 25현의 거문고와 공후(箜篌)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자 이 악기들은 이때부터 성행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겨울, 황상은 공경들에게 말했다.

고대의 제왕들은 맨 먼저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해산한 후에 비로소 봉선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래서 천자는 북으로 삭방군(朔方郡)으로 순행을 나가 병력 10여만 명을 소환한 후에 거느리고 황도(皇都)로 돌아오는 길에 교산(橋山)의 황제(黃帝)의 능에 제사를 지낸 후에 수여(須如)에서 군대를 해산했다. 황상이 공경들에게 물었다.

내가 듣건대 황제는 죽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에 무덤이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어떤 사람이 대답했다.

황제가 신선이 되어 하늘이 올라간 후에 군신들이 그의 의관을 거두어 여기에 묻었기 때문입니다.

감천궁에 당도한 황상은 장차 태산에서 봉선을 행하기 위해 그 예행으로 먼저 태일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보정을 얻은 이후 황상은 공경대신 및 유생(儒生)들과 함께 봉선을 거행하기 위한 의식에 대해 의논했다. 그러나 봉선은 여지껏 거행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거행한 것은 아득히 오래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의례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생들은상서(尙書)》《주관(周官)예기왕제편(王制篇)등에 기록되어 있는 망사(望祀)’사우(射牛)’ 등에 관한 조항을 채용하여 봉선의 제전(祭典)을 거행할 것을 주청했다. 그 때 이미 90세가 넘은 제나라의 정공(丁公)이라는 사람이 말했다.

봉선은 불사(不死)와 같은 말입니다. 진시황도 태산의 꼭대기에 올라 봉선의 제전을 거행하는 중에 비를 만나 끝내 거행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폐하께서 꼭 상봉에 올라 봉선의 제전을 거행하려 하신다면, 힘들어도 참으시며 조금씩 오르셔야 합니다. 그러면 비바람은 멈추게 되어 산위에 올라 봉제의식을 거행하실 수 있습니다.

이에 황상은 유생들에게 명하여 사우(射牛)의 의식을 연습하게 하고 봉선의 의례를 제정하도록 하였다. 수년 동안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바야흐로 봉선의 제전을 거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떠나려 할 즈음 황상은 황제(黃帝) 이래로 봉선의 의식을 거행한 제왕들은 모두 기이한 신물(神物)을 바쳐 신선을 만났다는 말을 공손경과 방사들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황상은 황제와 그 이후의 제왕들처럼 봉선의 제전을 거행할 때 봉래의 방사들 힘을 빌려 신선을 초치함으로써 세속을 초월하여 자신의 덕행이 황제 이전의 아홉 제왕(帝王)에 비견할 만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유가의 학술을 광법위하게 채용하여 꾸미려고 했다. 그러나 유생들은 봉선의 제전에 관하여 명확하게 천명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시경(詩經)서경(書經)등 옛 전적에 구애되어 감히 자유로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못했다. 황상이 봉선의 제전에 쓸 제례를 유생들에게 보여 주면, 그들 중에는 고대의 것과 다르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서언(徐偃)은 같은 사람은????태상(太常)과 사관(祠官)들이 행하는 제례는 고대 노()나라의 것만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주패(周覇)라는 사람은 유생들을 불러 모아 봉선 의식에 관해 의논했다. 이에 황상은 서언과 주패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유생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임용하지 않았다.

이해 3, 황상은 동쪽으로 순행길에 나서 먼저 구지성을 방문하고 이어서 중악(中嶽)인 태실산에 올라 제사를 거행했다.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관들은????만세????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의식이 끝난 후 천자와 함께 산 위에 올라간 사람에게 물어 보았지만 만세를 부른 일은 없었다고 했다. 다시 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다른 무리의 사람들에게도 물어 보았지만 역시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천자는 3백 호의 민가를 태실산 신령의 봉읍(封邑)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고????숭고읍(崇高邑)????이라 이름 지었다. 천자는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 태산의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그때는 정상에는 아직 초목에 무성하게 자라기 전이었기 때문에 석비(石碑)만을 위로 운반해 태산의 정상에 세웠다.

황상은 이어 동쪽으로 나아가 해안 지대를 계속 순행하며 8(八神)에게 제사를 오렸다. 그 때 제나라 사람들이 글을 올려 신기한 방술을 담론하는 자는 1만 명을 헤아리나 영험함을 입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아뢰었다. 그러나 천자는 더 많은 배를 증파하여 바다에 신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수천 명에게 봉래의 선인을 찾도록 명했다. 공손경은 그때마다 부절을 들고 항상 앞장서서 명산으로 신선을 모시러 갔다. 천자가 동래에 도착하자 공손경이 고했다.

밤에 키가 수 장에 이르는 거인을 보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다만 커다란 발자국만 남겼는데, 금수의 발자국과 흡사했습니다.

또 신하들을 가운데 어떤 사람이 고했다.

개를 끌고 가던 어떤 노인이????나는 천자를 만나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황상은 큰 발자국을 보았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개를 끌고 가던 노인이 바로 바로 선인임이 틀림없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천자는 바닷가에 머물며 방사들에게 전거(傳車)를 내어 주고 수천 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신선을 찾게 했다.

4, 봉고현(奉高縣)으로 돌아온 천자는 봉선 의례에 관한 유생들과 방사들의 견해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근거가 납득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봉선을 시행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러서 먼저 양보산(梁父山)에 당도한 천자는 지신에게 예를 갖추어 제사지냈다. 을묘일 유생들에게 사슴가죽으로 만든 관()과 홀()을 꽂은 붉은 관복을 걸치게 하여 시중으로 삼은 천자는 친히 사우(射牛) 행사를 치렀다. 천자는 태산 아래 동쪽에 제단을 쌓고 태일신에게 지내는 고제의 제례에 따라 봉제를 거행했다. 제단의 폭은 한 장 두척, 제단의 높이는 팔 척이며, 재단 아래에는 옥첩서(玉牒書)를 두었는데, 그 제문의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부쳤다. 제사를 마치고 천자는 시중 중에서 봉고도위(奉車都尉) 곽자후(霍子侯)만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 제단을 쌓고 다시 봉제를 올리고는 그 내용도 일체 비밀에 부쳤다. 이튿날 천자는 산의 북쪽 길을 택하여 하산했다. 병진일, 태산의 동북쪽 기슭에 있는 숙연산(肅然山)에서 후토신을 위해 의례를 갖추어 선제를 거행했다. 봉선을 행할 때 천자는 황색의 제복을 입고 몸소 절을 올렸으며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음악이 연주되었다. 또 강회(江淮) 일대에서 산출되는 영모(靈茅)로 신령이 앉는 깔개를 만들었고 오색의 흙으로 제단을 메웠다. 또한 먼 지방에서 나는 진기한 야생 동물, 날짐승, 흰 깃털의 꿩등을 풀어 의례를 성대하게 행했다. 그러나 시우(兕牛), 모우(旄牛), 서우(犀牛), 코끼리 등은 희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천자와 수행원들은 모두 태산으로 돌아온 후에 해산했다.

천자가 하늘과 땅에 지내는 봉선의 의식을 거행할 때 밤에는 하늘에 광채가 언뜻 나타났으며, 낮에는 제단 위에서 흰 구름이 솟구쳐 올랐다. 태산에 올라 봉선을 거행하고 돌아와서 명당에 좌정한 천자를 보고 만조백관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가 천자의 장수를 기원했다. 이에 천자는 어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짐은 보잘 것 없는 몸으로 지고무상(至高無上)한 황위를 계승한 이래 늘 전전긍긍하며 맡은 소임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덕은 얕고 예악의 제도에도 밝지 못했다. 그러나 짐이 태일신을 제사지낼 때 하늘에 상서로운 광채가 끊임없이 나타났었다. 나는 기이한 현상에 그만 압도당하여 몸이 떨렸고, 중도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감히 멈추지 못하고 마침내 태산에 올라 봉제를 올리고, 양보의 숙연산(肅然山)에서 선제를 거행했다. 이제 짐은 덕을 쌓고 새롭게 태어나 사대부들과 다시 새로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노라! 백성들에게 백 호당 소 한 마리와 술 10섬씩을 하사하고 80세 이상의 노인과 고아 및 과부에게 포백 2필을 하사하도록 하라. 또 박(), 봉고(封高), 사구(蛇丘), 역성(歷城)의 백성들에게는 금년에 내야 할 조세를 면제해 주도록 하라. 또 을묘년의 사면과 동일한 대사면을 단행하도록 하라. 짐이 순행하면서 지나간 지방에서는 복작(復作)의 집행을 중지하고, 2년 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붙이도록 하라.

천자는 또 다음과 같은 조서도 내렸다.

고대에 천자는 5년마다 한 차례씩 순수(巡狩)하면서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제후들이 천자를 조현하기 위해 머무는 곳이 있었다. 특별히 명하노니, 제후들이 태산 아래에 머물 수 있도록 관사(官舍)를 짓도록 하라.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 후에는 비바람으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방사들이 또 다시 봉래산 등에 머물고 있다는 신선들을 을 금세라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자, 이에 황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 신선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천자는 다시 동쪽으로 순행을 떠나 바닷가에 도착하여 멀리 바다를 바라다보며 봉래의 선도(仙島)를 볼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봉거도위(奉車都尉) 곽자후(霍子侯)가 갑자기 급살을 맞고 그날로 죽어 버리자 황상은 그때서야 비로소 그곳을 떠나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갈석(碣石)에 이르렀다. 다시 요서(遼西) 일대를 순행하고 나서 북방의 변경을 한 바퀴 돌고 황도로 돌아왔다. 이 때 해당 관리들이 천자에게 의견을 말했다.

보정(寶鼎)이 출현한 그 해의 연호를 원정(元鼎)으로 하고, 폐하께서 태산에 올라 봉제를 거행하신 금년을 원봉(元封) 원년으로 하심이 마땅합니다.

그 해 가을 동정(東井)에 혜성이 출현하였다. 그로부터 10여일 후, 다시 삼태(三台)에 혜성이 나타났다. 망기좌(望氣佐) 왕삭(王朔)이 고했다.

신이 천문을 관측하고 있을 때 덕성(德星)이 조롱박만하게 나타났다가 잠시 후에 사라졌습니다.

해당 관리가 말했다.

폐하께서 한왕조가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봉선을 거행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토성으로 보답하신 것입니다.

이듬해 겨울 천자는 옹현에서 오제에게 교제를 올리고 돌아와 경건한 마음으로 태일신을 제사지내며 다음과 같은 축문을 읽었다.

덕성)이 사방에 빛을 발하니, 이는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수성(壽星)이 뒤이어 나타나 멀리 밝게 빛나고 신성(信星)이 끝없이 빛나니, 이에 황제는 태축이 제사하는 각 신령들을 삼가 경배하나이다.

그 해 봄 공손경은 동래산에서 신선을 만났는데,????신선이 천자를 만나 보고 싶어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천자는 구지성으로 행차하여 공손경을 중대부에 임명했다. 뒤이어 천자는 동래산으로 가서 수일 동안 머물렀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만 거인의 발자국만 보았을 뿐이었다. 천자는 또 다시 방사 천여 명을 파견하여 신선과 영약을 찾아오게 하였다. 그 해에 가뭄이 들었다. 천자는 순행할 정당한 명분이 없던 차에 이를 구실삼아 만리사(萬里沙)에 가서 기우제를 올린 뒤 태산에 이르러 재차 제사를 오렸다. 돌아오는 길에 호자구(瓠子口)에 들러 황하(黃河)의 터진 제방을 메우는 공사 현장을 방문하여 공사를 격려하기 위해 이틀간 머물며 하신(河神)에게 제물을 바치고 제사한 후에야 그 곳을 떠났다. 천자는 이름난 두 장군에게 군사를 이끌고 호자구로 달려가 황하의 제방 공사를 수행하라고 명했다. 그 결과 두 지류(支流)로 나뉘어 흐르는 황하의 물줄기를 하나로 합쳐 놓아 하우(夏禹)가 치수했던 당시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때는 남월은 항복하여 한나라에 복속된 상태였었다. 용지(勇之)라는 월()나라 사람이 진언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숭상하는 습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언제나 귀신이 나타나고 효험이 있곤 했습니다. 옛날 동구왕(東甌王)은 귀신을 숭상하여 천수를 160세까지 누렸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귀신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쇠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천자는 월나라 무당에게 명하여 그곳 방식대로 사묘(祠廟)를 세우게 했다. 제대(祭臺)는 있으나 제단이 없는 이 사묘(祠廟)에서도 천신과 상제 및 뭇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냈으며, 아울러 닭의 뼈를 이용하여 점을 쳤다. 황상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월나라 방식의 사묘와 닭뼈를 이용한 점술이 유행하게 되었다. 공손경이 말했다.

선인은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선인을 만나러 가실 때마다 조급하게 떠나시곤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구지성(緱氏城)에 세우신 것과 똑같은 묘당(廟堂)을 황도에 건립하시고 육포와 대추 등의 제물을 차려 놓으신다면 신선을 초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높은 누각에 있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황상은 영을 내려 장안에는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 감천(甘泉)에는 익연수관(益延壽觀)을 건립하도록 하는 한편, 공손경에게 부절을 주어 제구(祭具)를 설치한 후에 신선을 기다리게 명했다. 다시 통천대(通天臺)를 새로 짓고 그 아래에 제물을 차려 놓고 신선을 기다렸다. 또다시 명을 내려 감천궁에 전전(前殿)을 새로 짓고 각 궁실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궁궐의 방 안에서 영지초(靈之草)가 돋아나고 다시 황하의 제방이 터진 곳을 막고 통천대(通天臺)를 건립했기 때문에 하늘이 감응하여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나 번쩍이게 되었다고 생각한 황상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감천궁의 방 안에서 아홉 줄기의 영지가 돋았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죄수들이 감옥 밖에서 치르는 노역을 사면해 주도록 하라.

이듬해에 조선(朝鮮)을 정벌했다. 그 해 여름에 가뭄이 들자 공손경이 말했다.

황제(黃帝) 때에도 봉단(封壇) 속의 흙을 말리기 위해 가뭄이 들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황상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가뭄이 들게 한 것은 봉토(封土)를 마르게 함인 듯하니, 천하에 영을 내려 영성(靈星)을 모시는 제사를 올리도록 하라!

그 이듬해, 황상은 옹현으로 나아가 교제를 거행하고 나서 회중도(回中道)를 거쳐 순행에 나섰다. 봄에 명택(鳴澤)을 방문한 뒤 서하(西河)를 거쳐 귀경길에 올랐다.

그 이듬해 겨울, 황상은 남군(南郡)을 순행하고 강릉(江陵)에 이르렀다가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현(潛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천주산을 남악(南岳)이라 부르게 했다. 계속해서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 심양현(尋陽縣)과 종양현(樅陽縣)을 거쳐 팽려택(彭蠡澤)를 지나는 도중 명산대천이 있으면 머물러 제사를 지냈다. 다시 발길을 북쪽으로 돌려 낭야군(瑯耶郡)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4, 천자는 봉고현(奉高縣)에 당도하여 봉제를 거행했다.

처음 천자가 태산에서 봉제를 거행하기 위해 태산의 동북쪽 기슭에 건립한 명당(明堂)은 지세가 험준하고 탁 트이지 않았다. 이에 황상은 봉고(奉高) 부근에 별도로 명당을 세우려 하였지만, 그 형식이나 규모를 알지 못했다. 그 때 제남(濟南) 출신 공숙대(公玉帶)가 황제(黃帝) 시대의 명당도를 바쳤다. 그 명당도에는 사방에 담장이 없는 전당(殿堂) 한 채가 그려져 있었고 띠로 이어져 있는 지붕에 사면에는 물이 흐르고, 복도(複道)가 설치되어 있었다. 윗 길은 서남쪽에서 전당으로 들어가는 주루가 있었는데 곤륜도(昆侖道)라고 불렀다. 천자는 이 통로를 통하여 전당으로 들어가 상제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황상은 봉고현 경내의 문수(汶水) 강변에 공숙대가 바친 명당도에 따라 명당을 짓도록 명했다. 그리고 5년 후 황상이 봉제를 거행할 때 명당의 상좌(上座)에서 태일신과 오제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고황제(高皇帝)의 위패를 맞은편에 모셨다. 그리고 하방(下房)에는 태뢰 20두씩을 제물로 바쳐 후토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곤륜도를 통해 명당에 임한 천자는 처음으로 제사지내는 예의를 갖추어 제례를 몸소 행했다. 제례를 마친 후에 다시 명당 아래에서 요제(燎祭)를 올렸다. 황상은 다시 태산의 정상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제문을 비밀에 부쳤다. 태산에서 내려온 황제가 그 아래에서 오제에게 제사지낼 때, 각기 배정된 방위에 따랐으나 황제(黃帝)와 적제(赤帝)만은 한자리에 모셔 놓고 지냈고, 제사를 담당하는 관원들을 배치하여 각기 제사를 받들어 모시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 태산 위에서 횃불을 들면 산 아래에서도 모두 횃불을 들어 호응했다.

그리고 2년 후 11월 갑자일이 초하루이자 동지(冬至)와 겹치자 역법(曆法)을 추산함에 있어 이를 기점으로 삼았다. 천자는 친히 태산으로 행차해서 그 날에 명당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봉선의식은 거행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축문(祝文)만을 읽었다.

하늘은 황제(皇帝)에게 태원(太元)의 신책(神策)을 추가로 내리시니, 역수(曆數)가 일주하면 다시 시작합니다. 황제는 태일신을 경배하나이다.

이어서 천자는 동쪽으로 가서 바닷가에 이르러, 신선을 찾기 위해 바다로 나갔던 사람들과 방사들을 살펴보았지만, 이렇다 할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도 천자는 신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11월 을유일 백량대(柏梁臺)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12월 오삭일(午朔日)에 황상은 친히 고리산(高里山)으로 행차하여 선제를 거행하고 후토신에게 제사지냈다. 계속해서 천자는 발해(渤海)로 나아가 봉래산의 뭇 신들에게 망사(望祀)를 올리고 신선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백량대의 화재로 인하여 귀경한 황상은 감천궁에서 각 군국(郡國)의 상계서(上計書)를 검토하고 비준했다. 공손경이 말했다.

황제(黃帝)께서 청령대(靑靈臺)를 건립하신 지 12일 만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자 다시 명정(明庭)을 세우셨습니다. 명정이 바로 이곳 감천궁입니다.

이때 방사들 중에도 고대 제왕들 가운데 감천궁에 도읍을 정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천자는 제후들의 조현을 받기 위해 감천궁 내에 제후들이 머무는 관사를 짓게 했다. 남월 사람 용지(勇之)가 말했다.

월나라 풍속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한 자리에 집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본래보다 더 크게 지어야 재앙을 제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축조한 건장궁(建章宮), 예전에 비하여 그 규모가 훨씬 더 장엄하고 출입문이 더 많았다. 또 건장궁의 전전은 미앙궁(未央宮)보다 더 높았을 뿐만 아니라 동쪽에는 높이가 20여 장에 달하는 봉궐(鳳闕)이 있었고, 서쪽에는 당중지(當中池)라는 연못을 조성했으며 , 둘레가 수십 리나 되는 호랑이를 키우는 동물원도 있었다. 또 그 북쪽에는 태액지(太液池)라는 커다란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 연못 가운데 세워진 점대(漸臺)의 높이는 무려 20여 장에 달했다. 태액지에는 전설에 나오는 네 개의 신산(神山)인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을 축조하고 그곳에 산다는 바다거북과 바닷고기 등의 형상을 조각하여 세웠다. 또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을 세웠고 벽문(壁門)을 설치하여 신조(神鳥)의 형상을 본뜬 조각상을 세웠다. 또 신명대(神明臺)와 정간루(井干樓)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50여 장에 이르렀으며, 누대(樓臺)와 누대 사이에는 황제의 전용 수레가 통행할 수 있는 전용 고가도로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해 여름 한나라 조정은 역법(曆法)을 다시 개정하여 한 해의 시작을 정월로 바꾸었으며, 수레와 복식의 색깔을 황색으로 정했고, 관직명과 인장의 글자 수를 다섯 자로 규정했다. 이 해를 태초(太初) 원년(기원전 104, 한무제 재위 37)으로 정하였다. 이 해에 서역(西域)의 대완국(大宛國)을 정벌했다. 매뚜기 떼가 극성을 부렸다. 정부인(丁夫人)과 낙양인 우초(虞初) 등이 방술을 펼쳐 흉노와 대완에게 재앙이 내리도록 귀신에게 기도했다.

그 이듬해 해당 관리들이 옹현의 오치에 올리는 제사에 희생을 익힌 제물과 향기가 나는 제물을 올리지 않았다고 고했다. 이에 천자는 즉시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희생 송아지를 삶아 각 치()에게 바치도록 하고, 희생으로 바치는 송아지의 털빛은 오행이 상극하는 원리에 따라 각 방향 고유의 천제가 이기는 색깔에 맞추도록 했다. 또 제사에 희생으로 바치는 장마(壯馬)를 목마(木馬)로 대체하되 다만 오제에게 제사지낼 때와 천자가 친히 교제를 거행할 때에만 장마를 바치도록 정했다. 또 여러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에는 모두 장마 대신 일률적으로 목마로 대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순행하는 곳에서는 장마를 희생으로 바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기타 나머지 의례는 종전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천자는 동해의 해변으로 순행을 나가 신선을 찾으러 간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다. 그 때 방사 한 사람이 말했다.

황제(黃帝) 시대에는 5() 12()를 지어 놓고 집기(執期)라는 곳으로 나아가 신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영년사(迎年祠)라고 했습니다.

황상은 방사의 말을 쫓아 그가 말한 대로 누대(樓臺)를 짓도록 명하고, 명년사(明年祠)라고 이름지었다. 황상은 황색의 복식을 갖추어 입고 친히 그곳에 나아가 상제에게 제사를 올렸다.

공옥대가 말했다

황제(黃帝) 때 태산에 제단을 쌓고 봉제를 거행했지만, 풍후(風后), 봉거(封巨), 기백(岐伯) 등의 신하들은 황제에게 동태산(東泰山)에서 봉제를 올리고 범산(凡山)에서 선제를 거행하도록 주청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두 산에서 제사를 올려 서로 합치된 부절을 얻고서야 비로소 장생불사(長生不死)할 수 있었습니다.

천자는 즉시 제사를 올릴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명한 뒤 동태산(東泰山)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동태산은 명성과는 달리 왜소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제사를 대신 올리도록 하고 봉선의 대전(大典)은 거행하지 않았다. 황상은 공숙대에게 그곳에 남아 제사를 받들고 선인을 기다리도록 명했다. 그해 여름 천자는 다시 태산으로 다시 나와 관례대로 5년마다 한 차례씩 거행하는 봉선의 대전을 행하고 다시 석려(石閭)에서 선제를 거행했다. 이른바 석려는 태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곳으로, 방사들이 입을 모아 신선들이 사는 땅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황상이 직접 그곳에 납시어 선제를 올린 것이다.

5년 후 천자는 다시 태산으로 출행하여 봉제를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상산(常山)에 들려 제사지냈다. 금상폐하께서 건립한 태일사와 후토사에는 3년에 한 차례씩 천자가 직접 교외에 나가 교제를 올렸다. 금상폐하께서는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처음으로 봉선을 5년에 한 차례씩 거행했다. 박유기의 건의로 건립된 태일사와 삼일사(三一祠), 명양사(冥羊祠), 마행사(馬行祠), 적성(赤星祠) 등의 다섯 신사(神祠)에는 관서(寬舒)가 영도하는 사관(祠官)이 매년 계절마다 제사를 올렸고, 그 밖의 후토사를 포함한 여섯 신사는 모두 태축(太祝)이 주관했다. 그리고 팔신(八神)의 각 신사(神祠)와 명년사(明年祠) 및 범산(凡山祠) 등 기타 저명한 신사(神祠)에는 천자가 순행에 나서 지나갈 때에만 제사를 거행하고, 천자가 떠난 후에는 이를 중단하였다. 방사들이 건의하여 세운 신사에는 건의한 자들이 각기 제주가 되어 제사를 주관하였으나, 본인이 죽은 후에는 제사가 단절되었으며, 사관(祠官)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은 없었다. 그 밖의 제사는 모두 예전대로 시행되었다. 금상폐하께서 봉선의 대전을 거행한 이래 12년 동안 오악(五岳)과 사독(四瀆)의 신령들에게 두루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방사들이 신선을 맞이하기 위해 제사를 올리고 바다에 나가 봉래의 선도(仙島)를 찾아 나섰지만 끝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던 공손경의 노력도 결국 거인의 발자국을 가지고 떠들어댔을 뿐 이렇다 할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이렇게 되자 천자는 방사들의 괴상야릇한 말에 점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농락에서 해어나지 못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신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방사들의 수는 점점 많아졌지만 이렇다 할 효험이 없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황상의 순행을 따라 하늘과 땅의 뭇 신들과 명산대천에 올리는 제사와 봉선의 대전에도 참여하였으며, 수궁(壽宮)에 들어가 신에게 제사지내며 올리는 축문을 곁에서 들으며 방사들과 사관(祠官)들의 뜻을 세심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물러나 예로부터 귀신에게 지내 온 제사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안팎의 사정을 모두 소상히 밝혀 후세의 군자들이 이를 살펴볼 수 있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조두(俎豆)와 옥백(玉帛)의 세세한 규정 및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례와 격식 등은 해당 관리들이 기록하여 모두 보존해 두었다.

 

주석

현량(賢良) : 현량방정(賢良方正) 혹은 현량문학(賢良文學)이라고 한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 한무제가 시행한 제도로 자신이 시행한 정책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擧賢良方正能直言極諫者라는 조칙을 내려 선발한 인재들에게 관직을 수여했다.

조관(趙綰 : ?-139)) ; 서한의 대신으로 대()나라 출신이다. 일찍이 신배공(申培公)으로부터 시경을 전수받았다. 무제 때 어사대부가 되어 장안 남쪽 교외에 명당을 지어 제후들의 조현을 받아야한다고 주청했다. 황노학설을 신봉하던 두태후의 반대에 부딪쳐 박해를 받아 자살했다.

왕장(王臧 ;?-139) : 서한의 대신으로 난릉(蘭陵) 출신의 유가(儒家). 일찍이 한경제 때 태자의 소부(少傅)를 지냈다. 무제가 즉위하자 유가의 학술을 높여 현량을 초빙할 때 문학으로 조관과 함께 공경(公卿)에 임용되었다가 랑중령으로 옮겼다. 장안의 남쪽 교외에 명당을 건립하여 제후들의 조현을 받도록 천자에게 주청했으나 두태후의 반대에 부딪쳐 조관과 함께 핍박을 받아 감옥에서 자살했다.

명당(明堂) :고대 중국에서 천자나 황제가 정령(政令)을 폈던 건물이다. 선조와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올리고, 제후의 조회(朝會)를 받으며, 존현(尊賢) ·양로(養老)하는 국가의 큰 의식을 행했다. 시대에 따라서 호칭이 변하여 하()나라에서는 세실(世室), ()나라에서는 중옥(重屋), ()나라에서는 명당이라고 하였다. 위는 둥글고 밑은 네모난 모양의 건축물로서,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에서는 5실제(五室制)를 말하고, 대대례기(大戴禮記)에서는 9실제를 말하여,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기원전 113년 한무제가 제남(濟南) 사람 공옥대(公玉帶)가 바친 도면에 따라서 태산(泰山) 북동쪽의 주나라의 명당터라는 곳에다 명당을 세웠다. A

오치(五畤) : ()은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鳳翔縣) 경내로 진()나라 군주들이 세웠던 오방(五方)의 천제(天帝)들을 위한 사당이다. 옹은 진덕공(秦德公)에 의해 기원전 677년에 진나라의 도성이 된 이래 전국시대인 기원전 393년 진헌공(秦獻公) 재위 2년 때까지 근 300년 동안 진나라의 도성이었다. 춘추 초기 진문공(秦文公)이 백제(白帝)를 위해 부치(鄜畤)를 세우고, 계속해서 진선공(秦宣公)이 청제(靑帝)를 위해 밀치(密畤), 진영공(秦灵公)이 오양(吴阳)에 상치(上畤)와 하치(下畤)를 세워 적제(赤帝)와 황제(黄帝)에게 제사지내기 시작했으며 한고조는 흑제를 위해 북치(北畤)를 세웠다.(张守节 사기正义)” 북위의 지리학자 역도원(郦道元)수경주(水经注위수(渭水)한성제(漢成帝) 건시(建始) 2년에 옹의 오치를 부수고 장안의 남쪽 교외에 皇天上帝를 위해 교천제를 지냈다. ”라고 했다.

평원군(平原君): 한무제 모후 왕지(王娡)의 모 장아(臧兒)를 말한다. 즉 한무제의 외조모다.

심택후(深澤侯): 한고조의 공신 조장야(趙將夜)의 손자이고 심택대후(深澤戴侯) 조두(趙頭)의 아들인 조호(趙胡). 경제 3년 기원전 154,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아 심택후가 되었다.

무안후(武安侯): 한무제의 황태후 왕지의 이부 동모제 전분(田蚡)의 봉호다. 후에 태위(太尉)가 되었다가 승상을 역임했다.

백침대(柏寢臺): 제환공이 지금의 산동성 광요현(廣饒縣)에 세운 누대다.

단사(丹沙): 주사(朱砂)로 유황과 수은이 주성분으로 된 진홍색의 천연광석이다. 약용과 안료로 사용된다. 고대 방술사들은 이것으로 선단을 만들어 복용하면 불로장생한다고 믿었다.

태축(太祝): 제관(祭官)으로 기도나 제사롤 올릴 때 의식을 주관했다. 주례(周礼)에 춘관(春官) 종백(宗伯)의 속관으로 제사와 기도의 일을 관장하는 관리다. 진한(秦汉) 왕조도 주례를 따라 태축영승(太祝令丞)을 두어 태상경(太常卿)에 속하게 했다.

요제(燎祭): 중국 고대에 행했던 제사의식의 하나로 옥과 흰비단 및 희생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태워 하늘에 올리는 제사다.

제북왕(濟北王): 한고조 유방의 막내아들 회남려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의 손자이고 제북왕 유발(劉勃)의 아들이다. 경제(景帝) 6년 기원전 151년 유발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제북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무제 28년 기원전 113년 무제가 태산에 올라 봉선(封禪)을 행하라고 하자 이를 미리 알고 서장을 올려 태산 주위의 현과 읍을 모두 조정에 바쳤다. 무제는 다른 곳의 현을 주어 보상했다. 기원전 97년 죽었다.

상산왕(常山王): 경제의 막내아들 유순(劉舜)의 장남 유발(劉勃)이다. 경제 12년 기원전 145년에 상산왕에 봉해진 유순은 교만하고 음행을 행하며 여러 차례 법을 어겼으나 그때마다 경제의 용서를 받았다. 원정 4년 기원전 114년에 죽은 유순의 뒤를 이어 제북왕의 자리에 오른 유발은 몇 개월 만에 죄를 지어 봉국은 없어지고 자신은 방폐되었다.

오악(五嶽): 중악 숭산(嵩山), 동악 태산(泰山), 서악 화산(華山), 북악 항산(恒山), 남악 형산(衡山)을 말한다.

백량대(柏粱臺) : 높이가 45미터나 되는 한무제가 세운 고대(高臺)로 향백(香柏)으로 대들보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長安縣) 백량촌(柏梁村)에 유지가 있다.

동주(銅柱): 한무제가 건장궁(建章宮) 신명대(神明臺)에 세운 구리 기둥으로 높이가 30, 67미터 둘레가 7() 즉 일곱 아름이나 되었다. 동주 위에 신선의 손바닥을 닮은 받침대를 달아 받은 이슬을 옥석의 가루를 섞어 만든 것을 옥로(玉露)라고 부르고 상시로 복용하면 불로장생한다고 생각했다.

볼제(祓祭): 중국 고대의 미신으로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려달라고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이다.

주자남군: 주나라의 후예 희가(姬嘉)를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에 봉하고 끊어진 주나라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교동강왕(膠東康王): 한경제의 아들 유기(劉奇) 한경제 중원2년 기원전 148년에 교동왕에 책봉되었다가 한무제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회남왕 유안(劉安)이 모반을 일으키려고 하자 병거와 화살을 준비하여 호응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모의가 발각되어 유안은 자살하고 유기는 자책감에 또한 자살했다.

같은 극은 서로 밀치고 다른 극은 서로 잡아당기는 자성의 원리를 이용하여 황제를 속였다.

사독(四瀆): 네 개의 큰 하천으로 황하, 장강, 회수(淮水) 및 제수(濟水)를 뜻한다.

위수(魏脽) : 지금의 산서성 만영현(萬榮縣) 경내로 한나라 때는 분음현(汾陰縣) 관할이었다.

감천궁(甘泉宮) : 진시황(秦始皇)이 기원전 220년에 섬서성(陝西省) 함양시(咸陽市) 서북의 50키로 떨어진 지금의 순화현(淳化縣) 경내의 감천산(甘泉山) 자락에 짓기 시작한 궁전이다. 후에 한무제(漢武帝)가 건원(建元 140135) 연간에 고광궁(高光宮영풍관(迎風館통천대(通川臺) 등을 증축하여, 주위 45(18)에 걸쳐 12(), 11() 등을 짓고 모두 감천궁(甘泉宮)이라 했다. 또한 산곡(山谷)을 따라 운양(雲陽) 주위의 500리에 감천원(甘泉苑)을 조성하여 궁전대각(宮殿臺閣)을 지었는데 100개소 이상이었다. ()의 양웅(楊雄)이 지은 감천부(甘泉賦)에 그 위용(偉容)이 묘사되어 있다.

중산(中山) : 지금의 섬서성 순화현(淳化縣) 경내에 있었던 산이름이다. 감천궁 가는 도중의 산이다.

송나라 : 주무왕이 폭정을 행하던 상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주왕조를 세운 후에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상나라의 고토에 봉했다가 주성왕 때 삼감(三監)의 부추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에게 토벌당하고 은나라 유민의 일부를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인 상()으로 이주시키고 주왕(紂王)의 서형 미자개(微子開)를 봉해 국호를 송이라고 칭하고 작위는 주나라의 신하국이 아니라 동등한 신분의 공작으로 했다. 송나라는 서주 및 춘추시대를 지나 전국시대 말엽인 기원전 286년 제민왕(齊湣王)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땅은 제나라에 병탄되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絲衣(사의)

- 새하얀 제복(祭服) -

 

絲衣其紑(사의기부)

생사로 지은 제복이 깨끗하고

 

載弁俅俅(대변구구)

머리에 쓴 제관은 의젓하구나!

 

自堂徂基(자당조기)

당에서 내려와 마당에 임하고

 

自羊徂牛(자양조우)

양에게 갔다가 소에게서 멈추며

 

鼐鼎及鼒(내정급자)

가마솥을 살펴보고 옹솥을 쳐다보네

 

兕觥其觩(시굉기구)

외뿔소 잔 굽어 있고

 

旨酒思柔(지주사유)

맛있는 술 부드럽거늘

 

不吳不敖(불오불오)

떠들지도 않고 오만하지도 않으니

 

胡考之休(호고지휴)

장수하시는 어버이의 복이로다.

 

부다. 사의(絲衣)는 물감을 들이지 않은 생사로 짠 제복(祭服)이다. ()은 깨끗한 모양이다. ()는 실음이다. ()은 고대 귀족들이 쓰던 관모로 무관들이 쓰던 관은 피변(皮弁), 문관들의 것은 작변(爵弁)이라고 했다. 구구(俅俅)는 공손한 모습이다. ()는 문함(門檻) 혹은 문숙9門塾)으로 마당을 지칭하낟. ()는 대정이고 자()는 옹솥으로 소정이다. ()는 어조사이다. ()는 화()이고 오()는 떠들썩함이다.

이 시 또한 제사할 때 술을 바치며 부르는 노래다. 사의(絲衣)와 작변(爵弁)으로 제의(祭衣)를 갖춘 사람이 당에 올라 올라가 동이가 깨끗하고 변두(籩豆)가 정결한지를 보고 다시 마당에 내려가서 여러 가지 기물과 제물이 모두 깨끗하게 갖추어졌음을 고하고, 또 양()으로부터 소에 이르기까지 희생이 갖추어졌음을 정막(鼎幕)을 걷고 고하니 제레의 의식이다. 또한 능히 그 위의(威儀)를 삼가하여 떠들지 않으며 태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능히 장수의 복을 얻을 수 있음이다.

絲衣 一章이니, 九句이다.

수산(首山) : 뇌수산(雷首山)이라고 하며 지금의 산서성 하곡부(河曲部)의 영제현(永濟縣)에 있는 산이름으로 백이숙제가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수양산이 이곳이다.

태실산(太室山) :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북쪽의 숭산(嵩山)의 한 봉우리로 소실산(少室山)과 함께 중악(中嶽)이라고 칭했다.

동래산(東萊山) ; 지금의 산동성 용구시(龍口市) 경계에 있는 해발 600여 미터 높이의 래산(莱山)을 말한다.

공동산(崆峒山) : 지금의 감숙성 평량시(平凉市) 12키로 서쪽의 해발 2100미터 높이의 산으로 동쪽으로 서안(西安) 서쪽으로는 란주(蘭州), 남쪽으로는 보계(寶鷄), 북쪽으로는 은천(銀川)을 조망하며 관중에서 실크로드로 통하는 요새지다.

모형(牡荊): 마편초(馬鞭草) 과에 속하는 낙엽 관목으로 엷은 자줏빛의 꽃이 핀다. 줄기와 잎은 이뇨(利尿), 통경(通經)의 약재로 쓰인다.

구지성(緱氏城): 지금의 하남성 언사시(郾師市) 경내에 유지가 있다. 구지산(緱氏山)은 춘추 때 주영왕의 아들 왕자교(王子喬)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연년(李延年)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87년에 죽은 서한의 음악가로 음악가다. 그가 노래로 작곡하여 한무제에게 바친 노래는 경국지색이라는 성어의 전고가 되었다. 북방에 한 가인이 있으니 절세미녀로 혼자 떨어져 외롭게 살고 있다. 한 번 쳐다보면 성이 기울고 다시 쳐다보면 나라가 기운다. 어찌 성이 기울고 나라가 망하는 것을 모를까 보냐마는 가인은 다시 얻기 어려우니...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한무제가 그 누이인 평양공주에게 과연 그와 같은 절세가인이 있느냐고 묻자 그 절세가인은 이연년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이연년의 동생을 입궐시켜 이부인이라고 불렀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게 된 이연년은 협률도위에 임명되어 황궁의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았다. 권력을 얻은 후 교만하게 처신한 이연년은 이부인이 죽은 후에 처형되고 그 가족도 멸족되었다. 대완과 흉노에 대한 정벌전을 수행한 이광리(李廣利)는 이연년의 동생이다.

곽자후 : 표기장군 곽거병의 아들이다.

복작(複作) : 형을 사는 죄수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는 제도

호자구(瓠子) : 옛 황하의 지류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남쪽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산동성 견성(甄城)과 운성(鄆城)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꺾어 양산(梁山), 동아(東阿)를 지나 장청(長淸)에서 제수(濟水)로 유입했다. 한무제 원광(元光) 3년 기원전 132, 황하가 범람하여 호자에서 둑이 터져 동남쪽으로 흘러 거야택(巨野澤)을 지나 사수(泗水)로 유입되어 회수(淮水)와 통했다. 이로써 양()과 초() 일대는 매년 재해를 입게 되어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원봉(元封) 2년 기원전 109, 무제가 칙명을 발해 호자구에 황하의 제방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물길을 막고 그 제방 위에 선방궁(宣房宮) 지었다.

통천대(通天臺) : 감천궁 내에 지은 30장 즉 70미터 높이의 대로써 200리 밖의 장안성이 보였다고 했다. 通天臺

복도(複道) : 상하 2층으로 된 낭하로 위로는 천자가 아래로는 일반 관리들이 통행했다. 혹은 이중으로 된 낭하를 말하낟.

곤륜(昆侖) : 지금의 티베트와 신강성 사이의 곤륜산을 말한다. 황제가 곤륜산 산정에 신선을 위해 512루를 지었다고 하는 전설에 근거하여 한무제가 명당도에 따라 명당에 5성과 12루를 재건했기 때문에 곤륜도라고 명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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