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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본기(殷本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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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6,935회 작성일 04-08-3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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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본기(殷本紀)

은(殷)나라의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유융씨(有娀氏) 부족의 딸이며 제곡(帝嚳)1)의 둘째 부인이었다. 세 사람과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禹)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舜)임금이 설에게 명했다.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五品)2)이 펼쳐지지 않으니, 그대가 사도(司徒)를 맡아서 오교(五敎)3)를 널리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

순은 설에게 상(商) 땅을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소명(昭明)이 뒤를 이었다. 소명이 죽고 아들 상토(相土)가 이었다. 상토가 죽고 아들 창약(昌若)이 뒤를 잇고, 창약이 죽고 아들 조어(曹圉)가 사위했다. 조어가 죽자 아들 명(冥)이 뒤를 이었다. 명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진(振)이, 진이 죽자 아들 미(微)가, 미가 죽자 아들 보정(報丁)이 차례로 뒤를 이었다. 보정이 죽고 아들 보을(報乙)이, 보을이 죽고 아들 보병(報丙)이, 보병이 죽자 아들 주임(主壬)이 각각 뒤를 이었다. 주임이 죽자 아들 주계(主癸)가 잇고, 주계의 뒤를 천을(天乙)이 이었는데, 이가 바로 성탕(成湯)이다.

설에서 성탕에 이르기까지 상나라는 모두 도읍지를 여덟 번 옮겼는데 탕은 박(亳)4)에 도읍을 정했다. 이는 선왕(先王) 제곡을 추종하여 옛 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성탕은 『제고(帝誥)5)』를 지어 제곡에게 자기가 박(亳) 땅으로 돌아온 정황을 고했다.

탕은 하왕조에 의해 방백(方伯)이 되어 주변 제후국들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갈백(葛伯)6)이 귀신들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았음으로 그를 가장 먼저 정벌했다. 탕이 말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소.」

그러자 이윤(伊尹)7)이 듣고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남의 훌륭한 말을 귀담아 듣고 따른다면 도덕이 발전합니다. 군주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왕궁(王宮)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더욱 노력하시옵소서!」

이어서 탕이 갈백(葛伯)에게 말했다.

「그대가 천명(天命)을 공손히 받들어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큰 벌을 내려 결코 사면하지 않겠소!」

이에 『탕정(湯政)』8)을 지었다.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9)이다. 아형이 탕을 만나려고 했으나 방법이 없자 유신씨(有莘氏)10)의 잉신(媵臣)11)이 되어 정(鼎)과 조(俎)12)를 메고 탕에게 갔다. 그는 음식의 맛을 예로 들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여 탕이 왕도(王道)를 실행하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다르게 전하기도 했다.

「이윤은 처사였는데, 탕이 그를 맞아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탕의 초빙을 맞아들였다. 그는 탕의 신하가 되어 소왕(素王)13)과 구주(九主)14)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탕은 이윤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다. 이윤은 예전에 탕을 떠나서 하나라로 갔다가 하나라가 이미 부패했음을 목격하고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 북문(北門)으로 입성하다가 여구(女鳩)와 여방(女房)을 만난 후에 『여구(女鳩)』와 『여방(女房)』15)이라는 글을 지었다.

교외로 나간 탕이 사방에 그물을 치고 하늘에 축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말했다.

「천지사방에서 날아드는 모든 새들을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

탕이 듣고 말했다.

「어허! 한꺼번에 다 잡으려고 하다니!」

탕이 그 사람에게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서 다음과 같이 축원하도록 했다.

「왼쪽으로 가려고 하는 새는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새는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새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제후들은 이 소식을 듣고 감탄하며 말했다.

「지극한 탕의 덕이 금수(禽獸)에까지 이르렀구나!」

당시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황음무도하여 포악한 정치를 행하자 제후국인 곤오씨(昆吾氏)16)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탕이 군사를 일으켜 제후들을 인솔하고 이윤과 함께 직접 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한 후에 계속해서 걸왕까지 정벌하려고 하면서 군사들과 제후들을 향해 말했다.

「자, 여러분! 모두 이리 와서 내 말을 자세히 들으시오. 내가 감히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하려고 함이 아니라, 하나라의 걸왕이 너무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오. 하결을 정벌하려는 나에 대해 그대들의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하걸이 죄를 지었음으로, 나는 상제의 뜻을 두려워하여 하나라를 감히 정벌하지 않을 수 없소. 하늘은 나에게 죄를 너무 많이 저지른 하걸을 벌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오. 지금 여러분 가운데『 군주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고 전쟁에 참여하게 하였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하왕(夏王)이 죄를 지었다는데 어떤 죄를 지었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오. 하걸과 그 신하들은 큰 공사들을 일으켜 요역에 징발된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켰소! 또한 백성들의 재산을 가혹하게 착취했소. 그 결과 하나라 백성들은 나태해지고 서로 불목하게 되었소. 마침내 백성들은 『저 태양은 언제나 지려는고? 나는 차라리 저 태왕과 함께 사라지리라!』라고 말하기 시작했소. 하나라의 덕이 이와 같이 무너졌음으로 지금 내가 정벌하고자 함이오. 그대들이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도록 나를 도와준다면, 그대들에게 큰 상이 돌아가게 하겠소. 내 말을 절대 의심하지 마시오. 나는 결코 약속을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오. 만일 그대들이 나의 맹세하는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들에게 징벌을 내리고, 결코 너그럽게 대하지 않겠소.」

상탕이 이 말을 관리의 우두머리에 알려 그들로 하여금 『탕서(湯誓)』17)를 짓도록 했다. 이때 탕이『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칭했다.

걸왕이 유융씨(有娀氏)의 옛 땅에서 상탕과 싸워 패하고 명조(鳴條)18)로 달아나자 하나라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무너졌다. 탕임금이 삼종(三宗)19)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그의 신하 의백(義伯)과 중백(仲伯)이 『보전(寶典)』 편을 지었다. 탕임금이 하나라를 정벌하고 그들이 모셨던 토신(土神)20)의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하사(夏社)』21) 편을 지었다. 이윤이 제후들을 향해 하나라를 정벌한 공적을 제후들에게 공포했다. 이로써 제후들은 모두 탕의 명을 받들어 귀의했다. 상탕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안정시켰다.

탕왕이 본국인 박(亳)으로 돌아가던 중에 태권도(太卷陶)22)에 이르자 중뢰(中畾)23)가 『고명(誥命)』을 지었다. 탕은 하의 정령(政令)을 폐지하고 박(亳)으로 돌아와서 『탕고(湯誥)』를 지어 제후들에게 경계의 말을 고했다.

3월에 왕이 동쪽 교외에 나가서 여러 제후국의 군주들에게 선포했다.

「백성들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거나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내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

왕이 또 일렀다.

「옛날 하우(夏禹)와 『고요(皐陶)』24)는 오랫동안 밖에서 일하며 백성에게 많은 공을 세워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소. 이들은 동쪽의 장강(長江), 북쪽의 제수(濟水), 서쪽의 황하, 남쪽의 회수(淮水) 등 사독(四瀆)을 잘 흐르도록 다스려 만민이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소. 또한 후직(后稷)이 파종하는 방법을 전해주어 농민들이 백곡을 경작하게 되었소. 이들 삼공(三公)은 모두 백성을 위한 일에 공로를 세웠기에 그들의 후대가 모두 나라를 얻을 수 있었소. 옛날 치우(蚩尤)와 그의 대부가 난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았던 선례가 있소. 선왕들의 말씀을 따르는 데 힘써야만 하오」

왕이 또한 일렀다.

「정도(正道)를 행하지 않으면 그대들의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겠으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

이윤이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었고, 고단(咎單)은 『명거(明居)』를 지었다.

탕이 역법(曆法)을 개정하고, 복색(服色)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하였으며 조회를 낮에 하기로 결정했다.

탕이 붕어했을 때 태자 태정(太丁)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즉위하지 못하고 태정의 동생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이가 외병제(外丙帝)다. 외병제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외병제의 동생 중임(中壬)이 즉위하여 중임제가 되었다. 중임제가 즉위한 지 4년 만에 붕어하자 이윤은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을 즉위시켰다. 태갑은 탕임금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제가 되었다. 태갑제 원년에 이윤은 『이훈(伊訓)』,『사명(肆命)』,『조후(徂后)』를 지었다.

태갑제가 즉위하고3년이 되자 정사에 밝지 못하고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했다. 그래서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고 자신이 3년 동안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태갑제가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훌륭한 인물이 되자, 이윤은 태갑제를 영접하여 그에게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제가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太甲訓)』 3편을 지었다. 태갑제의 공덕을 기려 태종(太宗)이라고 칭했다.

태종이 붕어하고 아들 옥정(沃丁)이 섰다. 옥정제 때 이윤이 세상을 떠나 박(亳)에 장사 지냈다. 구단(咎單)이 이윤의 행적을 통해서 후세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옥정(沃丁』을 지었다.

옥정제가 죽고 동생 태경(太庚)이 즉위했다. 이가 태경제다. 태경제가 죽고 아들 소갑(小甲)이 즉위했다. 다시 소갑제가 죽고 동생 옹기(雍己)가 즉위했다. 이가 옹기제이다. 은나라의 국세가 쇠약해지자 제후들 중에 조현을 올리지 않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옹기제가 붕어하고 동생 태무(太戊)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제다. 태무제는 즉위하여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아름이 넘게 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서, 태무제가 두려워서 이척에게 그 영문을 물어보았다. 이척이 대답했다.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왕께서 행하신 정치에 잘못은 없었는지요? 왕께서는 덕을 행하고 몸을 수양하는데 힘쓰십시오」

태무제가 이척의 말대로 하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巫咸)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를 칭찬하였다. 무함은 왕실의 사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함애(咸艾)』와 『태무(太戊)』를 지었다. 태무제가 태묘(太廟)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原命』을 지었다. 태무제의 대에 와서 은나라가 다시 흥하게 되어 제후들이 은나라에 복종하게 되었기에 태무제를 은나라의 중흥자를 뜻에서 중종(中宗)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중종이 붕어하자 아들 중정(中丁)이 즉위하였다. 중정제는 오(隞)로 천도하였는데, 나중에 다시 하단갑제(河亶甲帝)에 이르러 상(相)으로 천도하였고, 조을(祖乙)이 다시 형(邢)으로 천도하였다. 중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外壬)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제다. 『중정(仲丁)』이라는 글에는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온전하지 못하다. 외임제가 죽자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제이다. 하단갑제 시기에 은의 정치는 다시 쇠락해졌다.

하단갑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을(祖乙)이 즉위했다. 조을제(祖乙帝)는 은왕조를 다시 부흥시켰다. 이때는 무함의 아들 무현(巫賢)이 상이 되어 정무를 담당했다.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祖辛)이 즉위하였고, 조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沃甲)이 즉위했다., 옥갑제가 붕어하자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인 조정(祖丁)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조정제(祖丁帝)다. 조정제가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南庚)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남경제(南庚帝)이다. 남경제가 붕어하자 조정제의 아들인 양갑(陽甲)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양갑제(陽甲帝)다. 양갑제 때에 이르러 은나라가 다시 쇠퇴하였다.

중정제 이후로 적자계승제도(嫡子繼承制度)가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의 아들로 제위를 계승하니, 제위계승 문제로 서로 다투게 되어 구세 동안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에 제후들이 조회하러 오지 않게 되었다.

양갑제가 붕어하자 동생인 반경(盤庚)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반경제다. 반경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은왕조는 이미 하북(河北)에 도읍하고 있었다. 이에 반경제는 성탕의 옛 도읍지에 거주하기 위해 다시 하남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은왕조는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고 원망하며 또다시 이동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경제가 제후와 대신들을 타일렀다. 「예전 고후(高后)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그분들이 제정한 법도는 따라야하지 않겠소? 그런데 지금 선왕의 법도를 저버리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펴칠 수 있겠소?」

이에 하남으로 옮기어 박(亳)을 정돈하고 탕의 법령을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 왕조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입조하게 된 것은 반경제가 성탕의 덕정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반경제가 붕어하자 동생 소신(小辛)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신제이다. 그러나 소신제가 즉위한 후 은나라가 다시 쇠락해지자 백성들은 반경을 사모하며 『반경(盤庚)』 3편을 지었다. 소신제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소을(小乙)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소을제다.

소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무정(武丁)이 즉위했는데, 무정제는 은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나 아직 자신을 보좌해줄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3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冢宰)가 결정하도록 하고서 나라의 기풍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무정제가 꿈속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그는 이름이 열(說)이라고 하였다. 무정제는 꿈에서 본 성인의 모습을 대신과 관리들 속에서 찾아보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재야에서 열심히 찾아보게 했는데, 드디어 부험(傅險)에서 열을 찾아냈다. 이때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나가서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무정제에게 알현시키니 무정제는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은나라가 훌륭히 다스려졌다. 무정제는 부험이라는 지명에서 성을 따와서 그를 부열(傅說)이라고 불렀다.

무정제가 성탕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날, 꿩이 날아와서 정(鼎)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제가 이를 불길하게 여기자, 조기(祖己)가 말했다.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십시오.」

조기는 계속해서 진언했다.

「무릇 하늘이 인간을 감찰하는 데는 그들의 도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수명에 길고 짧음은 있으나, 결코 하늘이 인간을 요절시키는 경우는 없으며, 인간의 행동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으므로 하늘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려서 그의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서야『이를 어찌하나?』 하고 한탄합니다. 아! 임금께서 백성을 위해서 힘껏 노력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는 일이며, 제사를 지내는 방법에는 상규(常規)가 있는 법이니 버려야 할 잘못된 방법을 신봉하지 마십시오!」

조기의 진언을 받아들인 무정제가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푸니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은나라의 국운이 다시 흥하게 되었다.

무정제가 붕어하자 아들 조경제(祖庚帝)가 즉위하였다. 조기는 무정제가 꿩이 정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하여 그를 고종(高宗)이라고 칭하고, 『고종융일(高宗肜日)』」과『고종지훈(高宗之訓)』을 지었다.

조경제가 붕어하여 동생 조갑(祖甲)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갑제이다. 갑제는 음란한 행동을 일삼았으므로 은왕조가 다시 쇠하게 되었다.

갑제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늠신(廩辛)이 즉위했다. 늠신제가 죽고 동생 경정(庚丁)이 즉위하니, 이가 경정제다. 경정제가 죽고 아들 무을(武乙)이 즉위했다. 이때 은나라는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했다.

무을제는 무도하여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그는 우상과 도박을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하였다. 또한 가죽으로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고서 이를【사천(射天)】이라고 명명했다. 무을제는 황하와 위수(渭水) 사이로 수렵을 갔다가 갑자기 친 천둥소리에 놀라서 그만 죽고 말았다. 이에 아들 태정(太丁)이 즉위했다. 태정제(太丁帝)가 붕어하자 아들 을(乙)이 즉위하였다. 을제(乙帝)가 즉위하자 은왕조는 더욱 쇠퇴해졌다.

을제의 큰아들은 미자계(微子啓)였으나, 계(啓)의 모친이 정비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 아들 이름은 신(辛)리라고 했는데 그의 모친이 을제의 정비였기 때문에 그가 태자가 되었다. 을제가 붕어하자 아들 신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제(辛帝)이고, 세상에서는 그를 주(紂)라고 부른다.

주제(紂帝)는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지혜는 신하의 간언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하여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술과 음악에 탐닉하고 여자들과 음락을 지나치게 즐겼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하여 그녀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악사인 사연(師涓)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北里)25)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음악을 새로 만들도록 했다.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걷어 들여 돈은 녹대(鹿臺)를 채우게 하고 곡식은 거교(鉅橋)27)를 채우게 하였다. 또한 천하에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물을 수집하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沙丘)의 원대(苑臺)를 크게 확장하여 여러 가지 야수와 새들을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주제는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또한 사구에 수많은 악공들과 광대들을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놀았다.

주제(紂帝)의 이런 행동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가고 배신하는 제후들도 나타나자, 주는 형벌을 강화시켜서 포락(炮烙)28)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삼공(三公)으로 삼았다.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에게 바쳤다. 그러나 주는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노하여 그녀와 함께 구후를 죽였다. 주왕은 구후의 시신에서 포(脯)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악후가 이를 따지자 그도 포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 소식을 듣고 혼자 탄식했는데, 숭후(崇侯) 호(虎)가 이 사실을 알고는 주에게 고자질하여, 주는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하여 주에게 바치자 주는 서백을 사면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서백은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의 형벌을 없애주기를 청원했다. 주가 이를 윤허하고 서백에게 궁시부월(弓矢斧鉞)을 하사하여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서방 제후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주는 비중(費中)을 등용하여 국정을 담당하게 했다.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만 채웠기 때문에 은나라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였다. 주는 또한 오래(惡來)29)를 등용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좋아했으므로 제후들은 이 때문에 은나라와 더욱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서백이 귀국하여 드러나지 않게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들이 주(紂)를 등지고 서백을 추종하게 되었다. 서백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따라서 주의 위세는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왕자인 비간(比干)이 간언을 했지만, 주는 듣지 않았다. 상용(商容)은 사람됨이 어질어서 백성이 그를 따랐으나, 주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서백이 기국(饑國)을 정벌하여 멸망시키자, 이 소식을 들은 주의 신하 조이(祖伊)가 주(周)를 원망하며 두려운 생각이 들어서 급히 주제에게 가서 고하였다.

「하늘이 이미 우리 은나라의 명을 단절시켰기 때문에 혜안(慧眼)의 소유자가 미래를 투시해보고 거북 껍질로 점을 쳐봐도 우리의 앞날이 길하지 않다고 나왔습니다. 이는 선왕들께서 우리 후손을 보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임금께서 음란하고 포악함으로써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 하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성이 편안히 먹지도 못하게 하였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법도를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임금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들『하늘은 어찌하여 재앙을 내리지 않으며, 대명(大命)은 어이하여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임금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주가 대답했다.

「내가 태어나서 국왕이 된 것은 천명(天命)이 있어서가 아니오?」

조이는 돌아와서 한탄했다.

「주왕에게는 간언할 수가 없다. 」

서백이 세상을 떠나자 발(發)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무왕이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맹진(盟津)에 이르자, 은나라를 저버리고 주나라로 모여든 제후가 800명이나 되었다. 모든 제후들이 주나라의 무왕에게 말했다.

「주(紂)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

무왕이 대답했다.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고 있소!」

무왕은 주를 정벌하기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갔다.

주왕은 갈수록 음란해져갔다.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간언했어도 주왕이 들으려고 하지 않자, 그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서 은나라를 떠났다. 그러나 비간이 말했다.

「신하는 죽더라도 임금께 충간해야 한다.」

비간이 계속해서 주왕에게 간언하자 주왕이 진노하여 말했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주왕은 비간을 해부하여 그의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여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왕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은나라의 태사(太師)와 소사(少師)는 은나라의 제기(祭器)와 악기(樂器)를 가지고 주나라로 달아나버렸다.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정벌했다. 주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대항하였으나, 갑자일(甲子日)에 그의 군대가 패했다. 주는 성으로 도망쳐 들어와 녹대로 올라가서 보옥으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왕은 주의 목을 베어 대백기(大白旗)에 매달았고, 달기는 참수했다. 그는 기자를 풀어주고, 비간의 묘에 봉분을 해주고, 상용이 살던 마을을 표창하였다. 그는 또한 주의 아들 녹보(祿父) 무경(武庚)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계승하도록 하고, 반경의 정령을 집행하도록 하자 백성들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에 주나라의 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군주를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으로 낮추어 불렀다. 은나라의 후예를 제후로 삼아 주에 귀속시켰다.

주나라의 무왕이 붕어하자 무경(武庚),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켰음으로,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시켜서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고 미자를 송(宋)에 봉하여 은의 후대를 잇도록 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나는 『송(頌)』에 의거하여 설(契)의 사적(事跡)을 순서대로 정리하였고, 성탕(成湯) 이후의 일은 『서(書)』와 『시(詩)』에서 취했다. 설의 성은 자씨(子氏)였으나, 그 후대가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 봉해졌으므로 각기 자기 나라의 이름을 성(姓)으로 삼게 되어 은씨(殷氏), 내씨(來氏), 송씨(宋氏), 공동씨(空桐氏), 치씨(稚氏), 북은씨(北殷氏), 목이씨(目夷氏) 등이 있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은나라의 제후들이 타고 다니던 로거(路車)가 가장 아름답다'라고 말했다. 은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숭상했다.」

주석

1)제곡(帝嚳)/ 상고시대 전설 상의 오제 중의 한 명이며 은나라를 세운 상탕의 선조인 설(薛), 주나라를 세운 주문왕의 선조인 기(棄), 그리고 요(堯)임금의 아버지다.

2)오륜(五倫) 즉 부자지간, 군신지간, 부부지간, 장유지간, 친구지간의 관계를 말한다.

3)오교(五敎)/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을 말한다.

4)박(亳)/ 현 산동성 조현(曹縣) 남쪽 20km 지점. 옛날 하왕조의 도읍지였다.

5)제고(帝誥)/ 공안국(孔安國) 설에 의하면 성탕이 천도하게 된 상황을 제곡(帝嚳)에게 보고하는 내용의 글이나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6)갈백(葛伯)/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에 있었던 하왕조 시 제후다.

7)이윤(伊尹)/ 탕(湯)임금을 도와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桀王)을 토벌한 상(商)나라의 창업공신. 이름은 지(摯)이고 아형(阿衡)이라고도 불렀다. 원래는 탕임금의 비인 유신씨(有辛氏)의 몸종이었다가 탕임금에 의해 발탁되어 상나라의 국정을 맡았다. 탕임금이 하나라를 멸하고 상왕조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탕임금의 뒤를 이은 외병(外丙)과 중임(中壬) 두 임금을 보좌했다. 중임의 죽자 태갑(太甲)을 왕으로 옹립하여 올바른 정치와 법도에 대해 가르쳤다. 태갑이 선지 3년이 되자 정치를 포학하게 하고 탕왕이 세운 법도를 어지럽히자 이윤은 태갑을 쫓아내고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올라 상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3년 후에 태갑이 자기의 과오를 뉘우치자 그는 태갑을 맞아들여 왕위에 복위시켰다. 태갑의 뒤를 이은 옥정(沃丁) 임금 때 죽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윤에 의해 쫓겨난 태갑이 7년 후에 돌아와 이윤을 살해했다고도 한다.

8)탕정(湯政)/ 상서(尙書) 윤정(胤政) 뒷 부분에 탕이 갈백을 정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전문은 전해지지 않는다.

9)아형(阿衡)/ 은나라의 재상에 해당하는 관직 이름이다. 손자와 공안국(孔安國)은 이윤의 이름은 지(摯)라 했다.

10)유신씨(有莘氏)/ 하(夏)나라 말기에 지금의 하남성 조현(曹縣) 북 10키로 있었던 소제후국으로 이곳에 있었던 속이 텅 빈 오래된 뽕나무 속에서 즉 공상(空桑)에서 탕(湯)임금을 도와 상(商)나라를 세운 이윤(伊尹)이 태어났다.

11)잉신(媵臣)/ 제후들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가는 남자 몸종이며 여자 몸종은 잉첩(媵妾)이라 한다.

12)정(鼎)과 조(俎)/ 정은 고대의 음심을 삶는 데 사용하는 좌우에 2개의 손잡이가 달린 원형의 솥이고 조는 음식을 닮는 그릇이다. 모두 제사를 지내는 제기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정은 전국의 보기로 전해지기도 했다.

13)소왕(素王)/ 높은 덕으로 존경을 받아 추대되었음에도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성인을 말한다.

14)구주(九主)/ 상나라의 창업공신인 이윤이 탕(湯) 임금에게 설파한 군주의 아홉 가지 유형 즉 1.법군(法君)/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군주 2.전군(專君)/독단적인 군주 3. 수군(授君)/다른 사람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군주 4. 노군(勞君)/스스로 힘써 천하를 위해 노력하는 군주 5. 등군(等君)/논공행상을 균등하게 잘하는 군주 6. 기군(寄君)/백성들은 고행하는데 그 위에 교만하게 군림하여 패망을 자초하는 군주 7. 파군(破君)/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 8. 고군(固君)/성지(城池)를 굳건하게 쌓을 뿐 덕을 베풀지 않은 군주 9. 삼세사군(三世社君)/ 어린 나이에 군위에 오른 군주

15)여구(女鳩)와 여방(女房) 두 사람은 도무 탕임금의 현신이다. 이윤이 지은 여구와 여방의 글은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사기집해의 공안국(孔安國) 설에 따르면 하나라가 부패해서 은나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라고 했다.

16)곤오씨(昆吾氏)/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일대에 있었던 하나라 때의 제후국이다.

17)탕서(湯誓)/ 상서(尙書)의 편명으로 상탕이 하걸을 토벌하기 전 명조(鳴條)에서 군사들과 제후들에게 훈시한 글이다.

18)명조(鳴條)/ 하나라의 마지작 왕 걸왕(桀王)이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과 싸워 도망쳐 숨은 곳이다.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북 봉구현(封丘縣) 서라는 태평어람(太平御覽)과 회남자(淮南子)의 설과 산서성 운성현(運城縣) 동북이라는 공안국(孔安國)의 설이 있다.

19)삼종(三宗)/ 하나라의 걸왕에 충성한 제후국 이름이다.

20)토신(土神)/ 전설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句龍)이 능히 물과 땅을 잘 다스렸음로 그가 죽은 후에 사신(社神)으로 받들어졌다고 했다.

21)하사(夏社)/ 원문은 일실되어 전하지 않으나 사신(社神)을 옮기지 못한 원인에 대해 기술한 상서의 편명이다.

22)태권도(太卷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시(定陶市)다. 일설에 의하면 도(陶)는 연문으로 본지명은 태권(太卷)으로 지금의 정도시 경내의 태경(太坰)이라는 곳이라고도 했다. 태경은 박에서 정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

23)중뢰(中畾)/ 탕왕의 상국으로 상서(尙書)에는 중훼(仲虺)라고 했다. 상서의 중훼지고(仲虺之誥)는 후대의 위작이고 그가 지은 것은 일실되었다.

24)고요(皐陶), 고도/ 순임금 때 동이족의 수령으로 형법을 관장하는 벼슬을 지냈다. 백성들은 모두가 그의 공평한 법 집행에 복종했다. 후에 우(禹)임금이 황하의 치수 공사를 할 때 도와 공을 세워 그에게 하나라의 임금자리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우임금보다 먼저 죽어 전할 수 없었다. 우임금은 그의 후손들을 영(英 : 지금의 호북성 영산(英山) 동북), 육(六), 허(許 : 지금의 하남성 허창시 부근) 등에 봉했다.

26)북리(北里)/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의『 古之封禪, 鄗上之黍, 北里之禾 所以爲盛』에 나오는 지명으로 북리(北里)는 미상이다.

25)북리(北里)/ 봉선서에『 호상(鄗上) 땅에서는 한 줄기에 여러 개의 이삭이 달린 기장이 출현하였고, 북리(北里)26)의 땅에서는 또한 여러 개의 이삭이 달린 벼가 나와서 이후에 태평성대가 이루어 졌고 강수와 회수사이의 땅에서는 띠가 세 개의 등줄기를 갖고 있는 것이 생겨나서 소위 신령스럽다는 뜻의 영모(靈茅)라고 불렀다.』라는 기사가 있다. 북리의 위치는 미상이다.

27)거교(鉅橋)/ 은나라 때 곡식창고의 이름이다. 지금의 하북 평향현(平鄕縣) 동남의 고형(古衡)의 장수(漳水) 동안에 있었다.

28)포락(炮烙)/ 포락지형으로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형벌이다. 주왕과 달기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불에 타죽는 죄수들의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

29)오래(惡來)/ 진나라의 시조 중의 한 사람이다. 진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중휼이 비렴(非廉)을 낳고 비렴은 오래(惡來)를 낳았다. 오래는 힘이 장사였고 비렴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무왕(周武王)이 주왕을 토벌할 때 오래(惡來)를 같이 잡아서 죽였다. 그때 비렴은 주왕(紂王)을 위하여 북방에 사자로 나가 있었다. 비렴이 북방에서 임무를 행하고 돌아왔으나 주왕(紂王)이 이미 죽어 보고할 사람이 없자 곽태산(霍太山)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다녀온 일을 고하였다.』

『은본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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