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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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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19,131회 작성일 04-06-0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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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기6. 秦始皇(진시황)

 

진시황(秦始皇)은 진나라 장양왕(庄襄王)의 아들이다. 장양왕이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을 보고 반하여 취했다. 이어서 시황을 낳았다. 진소왕(秦昭王) 48, 기원전 259년 정월에 한단(邯鄲)에서 태어나서 이름을 정()이고 성은 조()라고 했다. 기원전 246, 시황이 13살 때 장양왕이 죽고 정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파(), (), 한중(漢中)의 땅을 병합한 상태였고 완()1)을 넘어가 영()을 점령하여 남군(南郡)2)을 설치하고 있는 상태했다. 북쪽으로는 상군(上郡)3) 동쪽으로는 하동(河東)4), 태원(太原)5), 상당(上党)6)등을 점령하여 군현(郡縣)을 두었으며 동쪽으로는 형양(滎陽)에 이르러 이주(二周)를 멸하고 삼천군(三川郡)7)을 두었다. 여불위(呂不韋)를 상국으로 삼고 십만(十萬)의 호()의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시황은 세상의 빈객(賓客)과 유세가(游說家)들을 불러서 그들을 이용하여 천하를 병합하려고 했다. 그들 중에서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사인(舍人)8)으로 삼고 몽오(蒙驁), 왕의(王齮), 포공(麃公) 등은 장군으로 삼았다. 시황이 즉위할 때는 나이가 어려 모든 국사를 대신들에게 위임하였다.

시황(始皇) 원년 기원전 246, 진양(晉陽)9)이 반하자 장군 몽오(蒙驁)를 보내 평정했다.

시황 2년 기원전 245, 포공(麃公)을 장군으로 삼아 권()10)을 공격하여 위군(魏軍) 3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시황 3년 기원전 244, 몽오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13개의 성을 점령했다. 왕의(王齮)가 죽었다. 10, 장군 몽오(蒙驁)가 위나라의 창()11)과 유궤(有詭)12)를 공격했다. 그해에 대 기근(饑饉)이 들었다.

시황 4년 기원전 243, ()과 유궤(有詭)를 함락시켰다. 3월에 군사를 철수시켰다. 진나라의 인질이 조나라에서 돌아오고 인질로 와 있던 조()나라의 태자가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10월 경인(庚寅) 날에 메뚜기 떼들이 동쪽으로부터 날아와 하늘을 가렸다. 천하에 전염병이 돌았다. 양식(糧食) 천 섬을 바친 백성들에게는 한 등급의 작호를 내렸다.

시황 5년 기원전 242, 장군 몽오(蒙驁)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산조(酸棗)13), ()14), ()15), 장평(長平), 옹구(雍丘)16), 산양성(山陽城)17)등을 모두 함락시켜 20여 개의 성을 차지하고 그 땅에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해 겨울에 큰 벼락이 떨어졌다.

시황 6년 기원전 241, (), (), (), (), ()가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고 수릉(壽陵)18)을 점령했다. 진나라가 군사를 출병시키자 다섯 나라의 군사들이 물러갔다. 군사를 내어 위()나라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동군(東郡)으로 도망친 위군(衛君)의 뒤를 추격했다. 위군은 그의 종족들을 이끌고 야왕(野王)19)으로 달아나 그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하여 위()나라의 하내(河內)땅을 차지하였다.

시황 7년 기원전 240,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나더니 다시 북쪽에서 보였으며 5월에는 다시 서쪽에서 나타났다. 장군 몽오(蒙驁)가 죽었다. ()20), ()21), 경도(慶都)22)를 공격하던 군사를 이동시켜 급()23)을 치게 하였다. 혜성이 다시 서쪽에 나타나 16일 동안 보였다. 하태후(夏太后)24)가 죽었다.

시황 8년 기원전 239,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동한 시황(始皇)의 동생 장안군(長安君) 성교(成蟜)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 보낸 토벌군에 의해 장안군은 둔류(屯留)25)에서 싸움 중에 죽고 그를 따르던 군리(軍吏)들을 모두 참수당했으며 그곳의 백성들은 모두 임조(臨洮)26)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성교(成蟜)의 토벌군 대장인 벽()이 죽자 둔류(屯留)의 병졸이었던 포학(蒲鶴)이 다시 란을 일으켰으나 싸움 중에 죽었다. 시황은 명을 내려 포학의 시체를 찾아 육시(戮屍)의 형을 가했다. 하수(河水)가 넘쳐 많은 물고기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사람들이 수레를 끌고 와서 잡아서 싣고 갔다. 노애(嫪毐)를 장신후(長信侯)로 봉하고 산양(山陽)의 땅을 봉지로 주고 그곳에 머물며 살게 했다. 궁실(宮室), 거마(車馬), 의복(衣服), 원유(苑囿)27), 사냥터 등 모두 노애가 제 멋대로 행했다. 나라의 모든 대소사는 노애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시행되지 않았으며 다시 하서(河西)의 태원군(太原郡)을 폐하고 노애의 봉지로 주었다.

시황 9년 기원전 238, 혜성이 나타났으며 그 중에는 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진 것도 있었다. ()의 원()과 포양(蒲陽)을 공격했다. 4월에 진왕(秦王)이 옹() 땅으로 나가 그곳에서 유숙했다. 기유(己酉)일에 진왕이 나이 20세가 되어 성년식을 치르고 허리에 보검을 차고 다니기 시작했다. 장신후(長信侯) 노애(嫪毐)가 역모를 꾀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자 진왕(秦王)의 옥새(玉璽)와 태후의 인장(印章)을 훔쳐 도성의 경비군(警備軍)과 왕의 호위군(護衛軍), 기마병(騎馬兵)을 출동시키고, 융족의 수령(首領)들과 그의 가신들을 데리고 기년궁(蘄年宮)을 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 시황은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명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함양성(咸陽城) 안에서 싸움이 벌어져 쌍방 간에 수백 명이 죽었다. 진왕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던 신하들에게는 모두 작위(爵位)를 내리고, 환관들도 나가 싸움을 거들도록 한 후에 그들에게도 한 급씩의 품위를 올려주었다. 노애가 당하지 못하고 싸움에 패하여 달아났다. 진왕이 즉시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노애를 생포하여 오는 자에게는 백만 전(), 죽여서 시체를 가져오는 자에게는 50만 전()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공포했다. 노애(嫪毐) 등의 일당이 모두 잡혀서 함양으로 압송되어 왔다. 위위(衛尉)28) (), 내사(內史)29) (), 좌익(佐弋)30) (), 중대부(中大夫) 영제(令齊)등을 참수하여 그 목은 효수(梟首)하게 했다. 노애(嫪毐)는 다섯 마리의 말에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그 종족들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그 가신들과 죄가 경미한 자들은 귀신(鬼薪)의 형에 처했다.31) 다시 4천여 명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촉군(蜀郡)의 방릉현(房陵縣)으로 옮겨가 살게 했다. 그 달에 혹한이 와서 얼어죽은 사람이 생겼다. 양단화(楊端和)가 연지(衍氏)32)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혜성(彗星)이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가 다시 북쪽에 나타났는데 북두칠성을 따라 80일 동안 남쪽으로 흘렀다.

 

시황 10년 기원전 237, 상국(相國) 여불위(呂不韋)가 노애(嫪毐)의 반란과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환의(桓齮)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와 조() 두 나라가 술을 싣고 와서 바쳤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가 와서 진왕(秦王)에게 간했다.

진나라가 바야흐로 천하를 도모하려는 순간에 있는데 대왕께서 모태후(母太后)를 옹성(雍城)의 별궁으로 보내어 살게 하셨으니 천하의 제후들이 알게 되면 그들은 모두 진나라에 등을 돌릴까 걱정이 됩니다.

진왕이 곧 태후(太后)를 옹성(雍城)에서 함양(咸陽)으로 데려와 그 남쪽의 감천궁(甘泉宮)에 살게 하였다. 진왕이 타국 출신의 빈객(賓客)들을 모두 색출하여 쫓아내려고 하자 이사(李斯)가 서표(書表)를 올려 상소하였다. 진왕이 축객령(逐客令)을 취소하였다. 이사가 진왕에게 말하기를 먼저 한()나라를 공격하여 취하면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이 두려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진왕이 이사에게 군사를 주어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한왕이 두려워하여 한비자(韓非子)와 함께 진나라의 공세를 늦추기 위한 계획을 의논하였다. 대량(大梁) 사람 울료(尉繚)가 와서 진왕에게 말했다.

진나라의 국세가 강하게 되어 그 밖의 제후국들의 왕은 마치 진나라 군현(郡縣)의 군주와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은 제후들이 합종(合縱)하여 힘을 서로 합한 다음 불시에 진나라를 공격하게 될 것을 근심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곧 지백(智伯)33), 부차(夫差) 및 민왕(湣王)34)이 망한 원인이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제후국들의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지모를 어지럽게 하는 데는 불과 30만 금의 황금이면 족하여 그들을 모두 멸할 수 있습니다.

진왕이 울료의 계책을 따르고 그를 접견할 때는 대등한 예절로 대하고 울료의 의복과 음식도 자기의 것과 같게 하였다. 울료가 측근에게 말했다.

진왕이란 위인은 그 상이 우뚝 선 콧날, 가로 길게 찢어진 눈, 맹금(猛禽) 같은 가슴, 시랑(豺狼) 같이 쉰 목소리,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흉악한 마음을 가슴에 감추고 있으면서 자기가 곤궁할 때는 밑의 사람일지라고 몸을 굽히나 일단 자기의 뜻을 얻게 되면 쉽게 그 사람을 잡아먹는다. 지금은 나와 같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나를 대할 때는 항상 나에게 몸을 낮추고 있으나 진왕이 장차 일단 천하를 얻게 되면 천하는 모두 진왕의 노획물이 되어 그와는 결코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 없을 것이다.35)

그리고 울료는 즉시 진나라에서 도망치려고 하였다. 진왕이 듣고 한사코 간청하여 머물게 하고 진나라의 국위(國尉)36)로 삼아 결국은 울료의 계책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계책의 시행은 이사가 주관하게 했다.

시황 11년 기원전 236, 왕전(王翦), 환의(桓齮), 양단화(楊端和) 등에게 위()나라의 업성(鄴城)을 공략하게 하여 9 개의 성을 빼앗았다. 왕전이 연여(閼與)와 요양(橑楊)을 공략하면서 모든 군사들을 한 부대로 통합하여 지휘하였다. 왕전이 통합군을 18일 간을 지휘하였는데 두식(斗食)37) 이하의 봉록을 받는 자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군사 10 명 중 2명만을 선발하여 종군하도록 했다. 이어서 업()과 안양(安陽)을 빼앗아 환의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38)

시황 12년 기원전 235,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사람들이 아무도 몰래 장사지냈다. 그 사인(舍人)들로써 장례식에 참가한 자들 중 당진(唐晉) 출신의 사람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 섬진(陝秦) 출신으로써 연봉(年俸)이 양식 600 석 이상이 관리들은 작록을 빼앗고 다른 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오백 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관리로써 장례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봉록은 그대로 놔둔 채 옮겨 살게만 하였다. 그 이후로는 나라 일을 처리할 때는 노애(嫪毐)나 여불위 때의 예를 따라 정도를 따르지 않는 자들의 사인(舍人)들은 모두 몰수하여 관노로 삼았다. 그해 가을 다시 노애의 사인들을 모두 촉() 땅으로 옮겨가서 살게 하였다. 이때 온 천하에 한발이 크게 들어 6월에 시작된 한발은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시황 13년 기원전 234, 환의가 조나라의 평양을 공격하여 조나라의 장수 호첩(扈輒)을 잡아서 죽이고 그 군사 10만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하남(河南)으로 행차하였다. 그해 정월에 혜성이 동쪽 하늘에 나타났다. 시월에 환의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시황 14년 기원전 233, 평양(平陽)에서 조군(趙軍)을 공격하여 의안(宜安)에서 파하고 그 장수를 잡아 죽였다. 한비자(韓非子)가 진나라에 사자로 왔다. 진왕이 이사의 계책을 써서 한비자를 억류시켰다. 한비자가 운양(云陽)에서 죽었다. 한왕이 신하되기를 청했다.

시황 15년 기원전 232, 군사를 크게 일으켜 일군은 업성으로 일군은 태원(太原)으로 출병시키고 랑맹(狼孟)을 점령하였다. 이해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시황 16년 기원전 231, 9월에 한나라가 헌납한 남양(南陽)의 땅을 지키기 위해 내사(內史) ()을 보내 당분간 지키도록 했다. 처음으로 남자의 나이를 관부에 등록시키도록 했다. ()나라가 진나라에 땅을 바쳐 그곳에 여읍(麗邑)을 설치하였다.

시황 17년 기원전 230, 내사 등()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왕 안()을 사로잡고 한나라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 그 땅에 영천군(穎川郡)을 설치했다. 지진(地震)이 있었다. 화양태후(華陽太后)가 죽었다. 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다.

시황 18년 기원전 229, 군사를 크게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했다. 왕전이 상지(上地)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형(井陘)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양단화(楊端和)는 하내(河內)와 강외(羌瘣)의 휘하에 있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조나라로 나아가 한단을 포위했다.

시황 19년 기원전 228, 왕전(王翦)과 강외(羌瘣)가 조나라의 마지막 남은 땅 동양(東陽)을 점령하고 조왕을 사로잡았다. 계속해서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로 진격하기 위해 중산(中山)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진왕이 한단(邯鄲)을 방문했다. 옛날에 진왕이 조나라에서 태어날 때 그의 외가와 원수진 사람들을 찾아서 모조리 산채로 땅에 파묻어 죽였다. 진왕이 상군(上郡)과 태원(太原)을 거쳐 함양(咸陽)으로 돌아왔다. 진왕의 생모가 죽었다. 조나라의 공자 가()가 그 종족 수백 명을 대리고 대()로 가서 스스로 대왕(代王)이라고 칭하고 동쪽의 연()과 군사들을 합하여 상곡(上谷)에 주둔했다. 큰 기근이 들었다.

시황 20년 기원전 227,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연나라를 침공할 것을 걱정하여 형가(荊軻)를 자객으로 보내 진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진왕이 알고 형가를 잡아 사지를 찢어 죽이고 백성들에게 보였다. 또한 왕전과 신승(辛勝)을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연과 대()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나라 군사를 맞이해서 대항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은 연()과 대()의 연합군을 역수(易水)39)의 서쪽에서 무찔렀다.

시황 21년 기원전 226년 왕분(王賁)이 연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을 공격하였다. 진왕이 왕전으로 하여금 증원군을 이끌고 가서 왕분을 돕게 했다. 왕전은 연나라 태자 단이 이끌던 연군(燕軍)을 격파하고 계성을 점령하였으며 태자 단의 목을 얻었다. 연왕은 동쪽의 요동(遼東)으로 도망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다. 왕전이 나이가 들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관직에서 물러나 자기의 향리로 은퇴했다. 신정(新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창평군(昌平君)을 영성(郢城)으로 옮겨가 살게 하였다. 큰 눈이 내려 그 깊이가 두 자 다섯 치나 되었다.

시황 22년 기원전 225, 왕분이 위()나라를 포위한 후에 공격하다가 하구(河溝)의 물을 끌어다 수공을 행하자 대량성(大梁城)이 무너졌다. 위왕이 항복을 청해 위나라의 남은 땅을 모두 점령했다.

시황 23년 기원전 224, 진왕이 다시 왕전을 불러 완강하게 그의 출전을 명하고 그에게 군사를 내주며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왕전이 진격하여 진()의 남쪽 초나라 땅을 모두 점령하고 형왕(荊王=楚王)을 사로잡았다. 진왕이 영성(郢城)과 진현(陳縣)에 행차했다.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이 창평군(昌平君)을 옹립하여 초왕으로 삼아 회수(淮水)의 남쪽에서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시황 24년 기원전 223, 왕전과 몽무(蒙武)가 초나라에 쳐들어가 초군을 격파하자 창평군(昌平君)은 싸움 중에 죽고 항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황 25년 기원전 222,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왕분을 장수로 삼아 요동의 연왕을 공격하게 했다. 왕분이 싸움 끝에 연왕 희()를 사로잡았다. 회군하던 길에 대()를 공격하여 대왕 가()를 잡아 포로로 하였다. 왕전이 계속해서 초나라의 강수(江水) 이남 지역을 평정하고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내어 그곳에 회계군(檜稽郡)을 설치하였다. 그해 5월에 천하에 잔치를 벌리게 하여 모든 백성들이 배불리 먹도록 했다.

시황 26년 기원전 221, 제왕(齊王) ()이 그의 상국 후승(后勝)을 시켜 제나라의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여 진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게 하였다. 진나라가 요동으로 진군하여 연왕을 사로잡아 회군하던 장군 왕분에게 명하여 행군로를 바꿔 제나라의 도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왕분이 제나라의 도성 임치성을 함락시키고 제왕 건을 사로잡았다.

진나라가 처음으로 천하를 하나로 합쳤다. 승상과 어사(御使)에게 령을 내리며 말했다.

옛날에 한왕(韓王)이 그 땅과 옥새(玉璽)를 바치며 신하되기를 청하고는 후일에 가서 그 맹세를 배반하고 조()와 위()가 연합하여 우리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내가 그것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전쟁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조왕(趙王)이 그의 상국(相國)인 이목(李牧)을 보내어 맹약을 맺었다. 그래서 인질로 와 있던 그의 아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러나 조왕이 맹약을 위반하고 태원에서 반기를 들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토벌하고 조왕을 사로잡았다. 조나라 공자 가()가 도망쳐 대()에서 스스로 대왕이라고 칭했음으로 다시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대를 멸망시켰다. 위왕(魏王)이 처음에는 진나라에 입조 하여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오히려 한조(韓趙) 두 나라와 모의하여 우리를 습격하려고 했음으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그들을 파했다. 형왕(荊王) ()이 청양(靑陽) 이서의 땅을 바친다고 했다가 다시 그 약속을 어기고는 남군(南郡)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의 군사들을 습격하였다. 그래서 내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형왕은 사로잡아 형() 땅을 평정하였다. 연왕(燕王)이 혼미(昏迷)하여 그의 태자 단()이 형가(荊軻)를 시켜 나를 암살하려고 하여 내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그 나라를 멸했다. 제왕이 그의 상국인 후승(后勝)의 계책을 써서 우리 진나라에 사절의 왕래를 끊고 반기를 들려고 하여 내가 군사를 보내어 제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평정했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으로써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란을 평정할 수 있었음은 종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여섯 나라의 왕들이 모두 그들의 죄과에 대한 처벌을 받자 천하가 크게 안정이 되었다. 오늘 내가 명호를 바꾸지 않는다면 내가 이룩한 공업을 후세에 전할 길이 없다. 경들은 제호(帝號)를 논의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승상 왕관(王綰), 어사대부(御使大夫) 풍겁(馮劫), 정위(廷尉) 이사(李斯) 등이 의논하여 시황에게 고했다.

옛날에 오제(五帝) 시대에는 그 땅의 크기가 천리를 넘지 않아 국경 밖에는 후복(侯服)과 이복(夷服)40)등으로 구분하여 제후들을 두었으나 그들 중에서 어떤 자들은 래조하고 어떤 자들은 입조하지 않았지만 임금은 그들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시어 잔적들을 소탕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해내(海內)의 땅을 모두 군현으로 만드셨으며 또한 법령을 하나로 통일하신 것은 상고(上古) 이래로 그 전례가 없었던 일이며 오제들도 미치지 못한 큰 공업을 이룩하셨습니다. () 등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여러 박사들과 논의한 결과 옛날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및 태황(太皇)이 있었고 그 중에서 태황이 가장 귀한 이름이다.’ 라는 전고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호(尊號)를 상주를 올리오니 왕을 태황(太皇)으로 하고 그 명령을 제()라 하고 령()을 조()라고 하시기 바라며 폐하께서 스스로를 칭할 때는 짐()이라 칭하십시오.

시황이 듣고 대답했다.

태황(太皇)에서 태() 자를 빼고 그냥 황()이라 칭하고 다시 옛날의 호칭인 제() 자를 취하여 나를 부를 때는 황제(皇帝)’라 하라! 다른 것들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

이어서 장양왕(庄襄王)을 태상황(太上皇)이라고 추존(追尊)하도록 했다. 시황이 다시 말했다.

나는 옛날 상고 때 제왕이 시호(諡號)를 사용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중고(中古)에 이르러 호가 생기고 제왕이 죽으면 시호를 의논하여 정했다. 이는 자식이 그 부친의 호를 의논하고 신하들이 그 군주를 의논한 일이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짐은 그것을 취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 이후로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고 짐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그 수를 헤아려 이세, 삼세에서 수만 세에 이르도록 영원히 이어가도록 하겠다.

시황제는 오덕(五德)41)이 순환하여 전해지는 것을 추론하여 주가 화덕(火德)을 천하를 얻고 다시 진나라가 주나라를 대신할 수 있었음은 주나라의 화덕이 이길 수 없는 수덕을 진나라가 갖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때를 수덕이 시작되는 해로 하고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다시 일년의 시작되는 날을 바꾸었다. 군신들이 조현하여 하례를 올리는 날도 101일에 거행했다. 의복, 깃발, 부절 등은 모두 검은 색을 최상으로 삼았다. 또 숫자는 6을 기본으로 삼고 부절과 법관(法冠)등의 넓이도 여섯 치로 하고 수레의 폭을 6자로 다시 6자를 한 보로 하였다. 수레를 끄는 말도 6마리로 하였고 다시 하수의 이름을 덕수(德水)로 개명하였다. 이것은 모두 수덕(水德)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시황은 강인하고 엄혹하게 모든 것들을 법에 의지하여 해결하고 일체의 인은(仁恩)과 화의(和意)를 배제하고 각박하고 가혹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만이 오덕의 명수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법만을 앞세워 한번 죄를 지으면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승상 왕관 등이 건의하였다.

제후들을 모두 멸하여 그 땅에 처음으로 군현(郡縣)을 설치하였으나 연(), (), () 땅은 모두 이곳에서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에 왕을 두어 다스리지 않으면 안정 시킬 수 없습니다. 청컨대, 황자들을 그 곳의 왕으로 세우시기를 청하오니 허락하시기 바랍니다.

시황이 왕관 등이 건의한 내용을 군신들끼리 의논하도록 했다. 군신들은 모두 찬성하였으나 정위 이사 한 사람만이 반대하며 말했다.

주무왕(周武王)이 은()을 멸하고 주()를 세웠을 때 그의 수많은 자제와 동성의 친족들을 분봉하여 각 나라의 제후로 봉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왕실과는 소원해 지고 서로간에 싸움이 일어나 원수지간이 되고 심지어는 서로 간에 전쟁을 일으켜 정벌하고 죽이고 했습니다만 주천자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천하는 폐하의 조상들 신령에 힘입어 하나로 통일되어 모두가 군현으로 되었습니다. 폐하의 자제들과 공신들에게 이곳에서 얻어지는 부세로 중상(重賞)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가 다른 뜻을 품지 않게 하는 것이 곧 천하를 안정시키는 방법입니다. 제후들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시황이 말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쉬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게 된 이유는 모두 제후들이 할거했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신령에 힘입어 천하를 처음으로 안정시켰는데 다시 제후들을 세운다면 그것은 곧 다시 전쟁의 씨앗을 심는 일과 같다. 그렇게 한다면 평화와 안녕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겠는가? 정위가 한 말이 옳다.

시황은 천하를 36군으로 나누고 각 군()에는 수(), (), ()42)을 두었다. 백성들을 검수(黔首)라고 바꾸어 부르게 하고 천하에 큰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다시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아놓고 녹여서 종과 악기를 만들고 다시 12개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1000 ()43)으로 모두 궁전의 뜰 안에 세워 두었다. 법률과 무게와 길이를 재는 단위를 통일하고, 수레와 그 폭을 표준화 시켰다. 또한 문자의 서체는 한 가지만 쓰도록 했다.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조선(朝鮮)에 닿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 북쪽으로는 황하를 천연의 방어선으로 삼아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천하의 부호들을 모두 함양에 옮겨 살게 하여 그 호수가 무려 12만 호에 달했다. 조상신을 모시던 종묘와 황제가 거했던 장대궁(章臺宮) 그리고 상림원(上林苑) 등은 모두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자리 잡았다. 진나라가 제후들을 파할 때마다 그들의 궁실을 본떠 함양의 북쪽 언덕에 궁궐을 축조하여 함양의 남쪽 위수 강안으로 나있는 옹문(雍門)의 동쪽으로 나가 경수(涇水)와 합류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구름다리로 연결된 전각(殿閣)과 주각(周閣)44)을 연이어 세우고 제후들을 멸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얻은 미녀들과 종고(鐘鼓)로 그 건물들의 안을 채웠다.

시황 27년 기원전 220, 시황이 농서(隴西)와 북지(北地)를 순수(巡狩)하고 계두산(鷄頭山)을 넘어서 회중(回中)에 이르러 머물며 위수 남안에 신궁(信宮)을 축조했다. 다시 신궁(信宮)의 이름을 극묘(極廟)로 바꾸고 그 모습을 마치 북두칠성의 형상를 닮게 하였다. 극묘(極廟)에서 력산(酈山)까지 길을 뚫어 통하게 하고 감천궁(甘泉宮) 앞에 전전(前殿)을 건설하고 용도(甬道)45)를 만들어 함양까지 통하게 했다. 그 해에 모든 관리들의 작위를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 치도(馳道)46)를 건설했다.

시황 28년 기원전 219, 시황이 동쪽의 군현을 순무하기 위해 출행 길에 추역산(鄒嶧山)47)에 올랐다. 산 위에 비석을 세우고 노() 땅의 유생(儒生)들과 의논하여 비석에 진나라의 큰 덕을 찬양하는 글을 새겨 넣도록 했다. 다시 유생들에게 봉선(封禪)48)과 산천에 지내는 망제(望祭)49)의 의식에 대해 물었다. 이어서 태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다. 태산에서 내려올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큰 나무 밑으로 몸을 피했다. 그래서 시황은 그 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내렸다. 양보산(梁父山)에 다시 선()을 행하고 다시 그곳에 비석에 비문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세상의 법도를 밝게 하시고 신하들은 마음을 닦고 근신하였다. 황제 재위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하나로 만드시어 세상의 모든 제후들이 와서 복종하지 않은 자가 없게 되었다. 몸소 먼 변방까지 순수하시어 그곳의 백성들을 진무하시고 이어서 태산에 오르시어 동쪽의 끝을 바라보시니 따르던 신하들이 황제의 행적과 사업의 본업을 생각하여 황제가 이룩한 공덕을 찬양하였다. 치세의 도가 행해졌도다. 모든 산업은 그 마땅함을 찾고 일체의 법칙은 크게 진작되어 대의는 맑고, 밝으며, 아름답고 선하게 되어 후대 자손들에게 전하여 영원히 승계 되어 변하지 않게 될 지어다. 성스러운 황제께서는 영명(英明) 통달하시어 이미 천하를 평정하시고 추호도 국정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도다. 매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시고 저녁에는 잠자리에 늦게 드시면서 천하를 이롭게 할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시고 백성들을 깨우치고 나라를 흥성 시킬 일에 골몰하셨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널리 깨우치고 멀거나 가까운 곳을 물론하고 치세를 이루어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사람이면 사람마다 높이어 받들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셨고 남녀가 각기 예에 따라 유별하게 하였고 개개인의 직분에 충실하게 하셨다. 안과 밖이 분명히 구분되게 빛을 비추고 황제가 임하는 곳은 모두가 청정하고 편안하게 되었도다. 후세 사람들은 황제의 은혜로운 정치를 영원히 이어 받을 지어다. 그 교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반듯이 이 유조(遺詔)를 영원히 받들 것을 힘써 경계(儆戒)하노라!

시황이 양보산에서 내려와 발해만을 끼고 돌아 동쪽으로 가서 황현(黃縣)50)과 추현(腄縣)51)을 지나 성산(成山)52)에 올랐다. 다시 서쪽의 추현(腄縣)으로 나가 지부산(之罘山)53)에 올라 그 곳에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새기도록 했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낭야산(琅邪山)에 오르자 매우 기뻐하며 그 곳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다시 그 곳의 백성들 3만 호를 낭야대(琅邪臺) 밑으로 옮겨 살게 하고 나이가 12세 미만인 사람들에게는 그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낭야대를 다시 증축하고 석비를 세우고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한 시를 새기고는 자기의 득의한 심정을 노래했다.

황제께서 재위에 계신지 28년만에 새로운 시대를 여시였다. 법도가 바르게 정비되고, 만물의 질서가 바로 잡히니 인사를 분명히 하시고 부자지간은 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 성스러운 지혜와 인의로써 천하의 도리를 밝히셨다. 또한 동쪽으로 나가시어 그 땅을 순무하셨다. 대사를 끝내시니 곧 바닷가에 당도하셨다. 황제의 공덕으로 모두가 본업에 열심히 살고있다. 농업은 장려하시고 말업(末業)54)은 억제하니 백성들의 생활은 풍부하게 되고 온 천하는 한 마음 한뜻이 되었다. 기계와 기구의 규격은 한가지로 통일 하셨고 문자는 한가지로만 쓰게 만드시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에 배와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만드셨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수명대로 천수를 누리고 살게 되어 그 뜻한 바를 얻지 못한 자가 없게 되었다. 사시의 때에 맞추어 일을 행하시니 과연 대진(大秦)의 황제 님이로다. 열악한 습속을 정비하시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 길을 가시어 백성들을 밤낮으로 돌보시느라 쉴 틈이 없으셨다. 의심을 없애고 법률을 정하시니 백성들 중 아무도 법과 기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들이 나누어 일을 맡으니 각 급의 관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알게 되어 모든 조치는 타당하게 되고 바르게 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황제의 지혜로움이 사방을 밝히기 때문이다. 존비와 귀천은 모두 자기의 분수를 넘지 않으며 간사한 자는 용납하지 않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만을 구하셨다. 일이 크거나 작거나 있는 힘을 다하여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먼 지방의 궁벽한 곳의 관리도 오로지 엄숙하고 장엄한 태도로 임하여 정직과 충성을 다해 정치가 상궤를 벗어나지 않게 하셨다. 세상을 어지럽힌 자는 죽이고 세상에 해를 끼친 자는 제거하시어 이를 일으키시어 복을 가져다 주셨다. 때에 맞추어 일을 조절하니 모든 성읍은 번창하게 되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 군사와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육친(六親)55)들이 서로 보살피며 의지하니 세상에 도적이 없게 되었다. 백성들이 교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니 세상의 법령과 제도를 빠짐없이 알게 되었다. 육합(六合)56)안의 모든 것은 황제의 것이 아닌 것이 없도다. 서쪽으로는 유사(流沙)57)를 건넜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북쪽으로는 대하(大夏)58)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넓히셨다. 세상의 어디에 살던 사람이고 황제의 신하가 아닌 사람은 없게 되었다. 이룩하신 공덕은 오제(五帝)를 뛰어넘으시고 그 은혜는 말과 소에게도 미쳤다. 황제의 은덕을 입지 않은 것은 없어 각기 자기 자리에서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

천하를 하나로 합치고 호칭을 황제로 한 시황은 동쪽의 땅으로 순행을 행하여 백성들을 위무하고 랑야(琅邪)에 이르렀다. 시황을 수종한 열후(列侯)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 열후(列侯)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 윤후(倫侯) 창무후(昌武侯) (), 윤후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丞相) 외림(隗林), 승상(丞相) 왕관(王綰), () 이사(李斯), ()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 양규(楊樛) 등이 해상(海上)에서 의논하였다.

옛날의 임금이란 다스렸던 땅은 불과 1000리를 넘지 못했고 제후들은 각기 그들이 봉해진 땅에 의지하여 어떤 제후들은 래조하여 조현을 하고 어떤 제후들은 조현을 드리지 않으면서 서로 간에 강역들을 침략하고 천하를 어지럽혀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업적을 돌이나 청동에 새겨 스스로 기념했다. 옛날의 삼황오제는 그 가르침이 같지 않은 관계로 세상의 법도가 분명하지 않게 되자 귀신들의 힘을 빌려 원방(遠方)을 속였다. 그러나 실제와 명분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그들의 몸이 죽기도 전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법도가 행해지지 않게 되었다. 오늘 황제가 해내(海內)를 통일하여 모두 군현으로 만드셨으니 세상은 평화롭게 되었다. 종묘의 덕을 밝히시고 도를 체득하여 덕을 행하셨으니 황제란 존호를 크게 이루셨다. 이에 군신들이 의논하여 황제가 이룩한 공덕을 칭송하고 비문에 새겨 후세에 영원히 전하고자 한다.

해상에서 의논이 끝나자 제인(齊人) 서불(徐市) 등이 서장(書狀)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이름하여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嬴洲山)이라고 하는데 신선(神仙)이 산다고 했다. 몸을 정결히 간수한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명을 청하여 삼신산의 신선을 찾겠다고 했다. 그래서 서불(徐市)에게 동남동녀 수천 명을 주어 바다로 나가게 하여 신선을 모셔오라고 했다.

시황이 도성으로 돌아오던 중 팽성을 지날 때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올라 기도하기를 사수(泗水)에 빠진 주정(周鼎)59) 건지기 위해 천여 명의 인부들을 물속으로 들여보내 찾아보게 하였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이어서 시황이 행렬을 서남쪽으로 바꾸어 회수(淮水)를 건너 형산(衡山)과 남군(南郡)을 각각 방문했다. 다시 시황 일행의 행렬이 부강(浮江)을 건너 상산사(湘山祠)60)에 이르렀다. 길을 가던 중에 큰바람을 만나 오랜 시간 동안 상강(湘江)을 건널 수 없었다. 시황이 주위의 박사(博士)들에게 물었다.

상군(湘君)61)은 어떤 신()인가?

박사들이 대답했다.

듣자오니 요임금의 딸이며 순임금의 부인입니다. 상군이 죽어 장사 지낸 곳이라고 합니다.

진시황이 듣고 화를 내며 3천 명의 죄수들을 풀어 상산(湘山)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게 하여 붉은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남군(南郡)으로 나와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함양으로 돌아왔다.

시황 29년 기원전 218, 황제가 동쪽으로 놀이를 나갔다. 황제의 행렬이 양무(陽武)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도적의 습격을 받아 매우 놀랬다.62) 습격을 한 도적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천하에 령을 내려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게 하여 10일 동안을 찾았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다시 산동으로 순행을 나가 지부산(之罘山)에 다시 올라가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글을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 재위 29년 봄철 햇볕이 바야흐로 뜨거워지려 할 적에 황제께서 동쪽으로 납시어 지부산에 오르셨다. 황제께서 산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시자 수행한 신하들이 경치를 찬양하며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창업의 공적을 노래했다. 위대한 성군께서는 치세를 이루시고 법도를 세우시고 나라의 기강을 밝히셨다.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시키셨으며 널리 예악(禮樂)과 은덕(恩德)을 베풀고 의로써 세상을 바르게 하셨다. 사악한 육국(六國)이 한없이 탐욕을 부리며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들을 가엾게 여기시어 육국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무덕을 크게 떨치셨다. 의를 지켜 제후들을 주살하고 신의를 세상에 행하여 먼 지방에 이르기까지 위엄이 밫나니 달려와 무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다. 천하의 강포한 자를 죽이고 백성들을 진무하여 천하가 안정이 되었으며 덕을 베푸시고 법을 밝히시어 천하를 운영하니 후세에 영원한 모범을 보이셨다. , 위대하도다! 천하는 성군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도다! 군신들이 모두 그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그 뜻을 세기니 영원히 변하지 않는 모범으로 전해질지어다.

다시 지부산의 동쪽 관람했던 곳에 다음과 같이 글을 새겼다.

황제 재위 29년에 황제께서 봄철에 먼 지방으로 시찰을 나가셨다. 바닷가에 당도하자 지부산에 다시 오르시어 아침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시었다. 따르던 신하들이 망망하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 감격하고 원래의 치도(治道)가 지극히 밝았음을 생각하였다. 성군께서 처음으로 법제를 시행하시어 강역 안의 일을 깨끗하게 정리하셨으며 강역 밖의 강포한 자들은 토벌하여 주살하여 무위를 변방까지 떨치시자 천하 사방이 진동하고 육국의 왕들을 사로잡았다. 천하를 하나로 병합하시고 재해를 멈추게 하셨으며 융적(戎狄)들을 울타리 안에다 가두시었다. 황제께서 덕을 밝게 하시고 천하를 경영하시며 백성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말을 듣는데 태만히 하지 않으셨도다. 대의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을 분명히 정비하셨으며, 모두 그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적당한 색깔과 표지를 정하셨다. 이에 신하들은 직분을 준수하며 각자의 의무를 알게 되어 모든 일에 의혹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의 풍습을 개량하고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모두 법도를 같게 하니 나이가 들도록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 일상적인 직무를 정해주니 후세 자손들이 그것을 계승한다면 이 성스러운 치세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군신들이 성상의 공덕을 찬양하여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며 이에 지부산에 비석을 세워 새겼다.

그후 시황제는 다시 랑야(琅邪)로 돌아와 상당(上党)으로 통하는 길을 거쳐 함양으로 돌아왔다.

시황 30년 기원전 218, 기록할만한 일이 없었다.

시황 31년 기원전 217, 12월 동짓달을 말하는 납월(臘月)을 가평(嘉平)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백성들에게 매 일리(一里)마다 6섬의 미곡과 양 두 마리를 하사했다. 시황이 무사 네 명을 데리고 함양 성 중에 미행(微行)을 나갔는데 밤에 란지(蘭池)63)에서 도적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나 무사들이 달려들어 도적들을 죽였다. 시황이 궁궐로 돌아와서 관중(關中)에 도적들을 20일 동안에 걸쳐 대대적으로 색출하게 하였다. 그해에 미곡 한 섬 가격이 1600 량으로 치솟았다.

시황 32년 기원전 216, 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연인(燕人) 노생(盧生)을 시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64)를 찾게 했다. 갈석산(碣石山)에 비석을 세우고 그 비문을 다음과 같이 새겼다.

황제께서 군사를 일으키시어 무도한 제후들을 주륙 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평정하셨다. 무력을 사용하여 포악한 자들을 멸하셨고 법령의 조문을 정하시어 죄 없는 백성들을 보호하시니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승복했다. 공로를 헤아리시니 소와 말에게까지 상을 주셨으며 내리신 은혜는 땅까지 기름지게 하였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써 제후들을 병합하시니 세상에 처음으로 천하를 태평하게 만드셨다. 성곽을 허무시고 하천의 제방을 파서 서로 통하게 했으며 험지의 요해지를 무너뜨려 평평하게 만드셨다. 천하의 땅이 모두 평평하게 되고 백성들에게는 요역(徭役)이 없어졌으며 천하는 진무되었다. 남자들은 밭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며 여자들은 가사를 돌보니 모든 일에는 질서가 있게 되었다. 황제의 은혜가 모든 백성들이 종사하는 업에 미치고 오래도록 같이 밭을 경작하니 평안한 생활을 누리지 않은 백성들은 없게 되었다. 군신들이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를 비석에 새겨 영원한 규범으로 삼기를 청했다.

이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에게 시켜 불사약(不死葯)을 구해오도록 시켰다. 시황이 북쪽의 변경 지방을 순무하고 상군(上郡)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鬼神)에 관한 일이라고 하면서 녹도서(錄圖書)65)를 지어 바치며 말했다.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호()!

호가 북쪽의 호인(胡人)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 시황은 즉시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군사 30만을 이끌고 북쪽의 국경을 넘어 호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몽염은 호인들을 물리치고 하투(河套) 남쪽의 땅 하남(河南)을 점령하였다.

시황 33년 기원전 215, 병역이나 요역을 피해 도망친 사람, 집이 가난하여 남의 노예가 된 사람과 장사를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을 붙잡아 군사로 만들어 오령(五嶺) 이남인 육량(陸梁) 즉 영남(嶺南)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에 그 땅에 계림(桂林)66), 상군(象郡)67), 남해(南海)68) 등의 군을 설치하도록 했다. 육량을 공격한 군사들을 모두 점령지에 머물며 살면서 지키게 하였다. 서북쪽으로는 흉노(匈奴) 족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고 유중(楡中)69)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음산(陰山)70)에 이르기까지 44현을 설치하고 황하 강안에 성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다시 몽염(蒙恬)에게 명하여 하수를 건너게 하여 고궐(高闕)71)과 양산(陽山)72), 북가(北假)73) 등의 땅을 점령하고 융인들을 몰아내고 그 곳에 요새를 지어 지키게 한 후에 계속해서 죄인을 이주시켜 새로 설치한 현을 흉노의 침입으로부터 막게 했다. 사사로운 제사를 민간이 지내는 것을 금지 시켰다. 서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시황 34년 기원전 214, 옥사를 행할 때 부정을 저지른 관리들을 색출하여 남북의 변경으로 유배 보내, 북쪽의 장성을 쌓게 하거나 남월(南越)을 지키게 하였다.

시황이 술을 내어 잔치를 벌리자 박사 70여 명이 앞으로 나와 축수를 기원하였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상주하였다.

옛날에 진나라의 땅은 그 크기가 천리에 불과했으나 폐하의 신령과 성명(聖明)에 힘입어 해내(海內)가 평정되고 만이(蠻夷)를 중원에서 쫓아내셨으며 해와 달이 비추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와서 복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후들의 땅을 정벌하여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고 사람이면 모두가 스스로 평안한 마음으로 즐기며 전쟁에 대한 근심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실로 만세에 전해 질 공업입니다. 상고시대 이래로 천하의 군주들 중 폐하의 위엄과 성덕을 따를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진시황이 매우 기뻐하였다. 박사로 있던 제인(齊人) 순우월(淳于越)도 주청을 올렸다.

신 등은 은과 주의 왕조가 천년을 계속되어 오면서 그 자제와 공신들을 제후로 봉하여 스스로를 보전하려고 하였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해내(海內)를 모두 병합하셨으나 폐하의 자제들은 오히려 평민으로 계시니 결국은 제나라의 전상(田常)74)이나 당진(唐晉)의 육경(六卿)75)과 같은 자들이 나타나면 황제를 보필하여 그들로부터 황실을 지켜내며 보필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 스스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일을 본받지 않고 능히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신 청신이 다시 폐하께 안전에서 아첨하는 마음으로 폐하의 과실을 지나친다면 이는 충신의 자세가 아닙니다.

시황이 령을 내려 순우월의 의견을 상론해 보라고 하였다. 승상 이사가 말했다.

오제는 서로가 정치를 이어받지 않았으며 삼대에 이르러서도 각기 답습함이 없이 각각 자기 방식대로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방식을 서로가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커다란 공적과 만세에 빛날 공덕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비단 어리석은 유자들만이 알고 있는 일은 아닙니다. 또한 순우월의 주장한 삼대의 제도로 어찌 지금 세상의 법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옛날 제후들이 서로 경쟁하며 유세가들과 학자들을 초빙하여 후대하였습니다. 지금 천하가 안정이 되어 법령이 한 가지로 통일되고 백성들은 저마다 농사와 기물을 만드는데 힘을 다하고 있으며 선비들은 학문에 열중하여 법령과 금조(禁條)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유생들은 당세의 제도를 따르지 않고 옛것만을 따르고 있음은 세상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 백성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습니다. 승상의 직을 맡고 있는 신()이 우매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옵니다. 옛날에 천하가 뿔뿔이 흩어져 혼란할 때 능히 하나가 될 수 없었고 그래서 제후들이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생들은 하는 말마다 옛것만을 이야기하고 당금의 일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며, 거짓으로 꾸민 일을 말하여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혀 왔습니다. 그 결과 사람마다 모두 자기가 배운 것만을 주장하며 조정에서 세운 것들을 비난해 왔습니다. 오늘 황제 페하께서 천하를 하나로 병합하시어 흑과 백을 따로 구별하는 일은 지극히 높으신 한 분만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사로이 배운 학문을 가지고 폐하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게 되면 백성들이 듣고는 그들도 각기 사사로이 배운 학문으로 서로 다투게 될 것입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며 벼슬길에서 물러나면 저잣거리에서 의견을 말하여 공론을 분분하게 합니다. 또한 군주에게 자기를 과시하여 이름을 얻으려하며 이상한 것을 주장하여 자기를 높이고 백성들을 이끌고 비방하는 말만을 만들어 낼뿐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지금 막지 않는다면 주상의 위세는 땅에 떨어지게 되고, 또한 그들은 무리를 지어 세상을 어지럽히게 됨으로 마땅히 금지시켜야 마땅합니다. 신이 청하옵건데 진나라에 의한 사관(史官)의 기록이 아닌 사서는 모두 불태워야 하며, 박사들이 관장하는 책이 아닌 서적 중 천하에 감추어진 ()》 《()와 백가들이 쓴 책들을 지방관들인 수()나 위()에게 조칙을 내리시어 모두 압수하여 불태우도록 하십시오. 또한 감히 시정에서 ()》 《()에 대해 논하는 자가 있다면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하여 백성들에게 보이게 하며 옛날 일로 지금의 일을 비방하는 자가 있다면 멸족을 시키시고 그것을 보고도 붙들지 않는 관리가 있다면 같은 죄로 다스립시오. 령을 내려 30일이 지났음에도 시서를 불태우지 않은 지방관들은 경형(黥刑)에 처한 후에 성단형(城旦刑)76)을 내리십시오. 의술과 약품에 관한 서적, 참위(讖緯)와 복술(卜術)에 관한 서적, 농사와 임업에 관한 책은 제외하시고 만약 법률을 배우고 싶은 자가 있다면 그로 하여금 관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도록 하십시오.

황제가 이사에게 그대로 시행하라고 허락했다.

시황 35년 기원전 213, 천하의 도로를 개수(改修)하였다. 운양(雲陽)을 지나서 구원(九原)에 이르는 대로를 건설했는데 산을 뚫고 계곡을 메꿔 직선으로 통하게 했으며 함양이 인구도 많고 선왕들이 지은 궁궐이 좁다고 생각한 시황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주문왕은 도읍을 풍읍(豊邑)에 정하고 주무왕은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여 풍호(豊鎬) 지간은 제왕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곧이어 위수(渭水)의 남쪽에 있는 상림원(上林苑) 가운데에 궁궐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前殿)을 건축했는데 동서의 넓이가 500 ()이며 남북의 길이가 50 ()77)으로 그 안에는 만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고 아래에는 5장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궐에서부터 남산으로 직접 올라 도달 할 수 있게 하였다. 남산의 꼭대기에 궐()을 세워 표지로 삼았다. 또 복도(複道)를 만들어 아방의 전전에서 위수를 건너 함양의 궁궐까지 연결시켜 북두칠성 중의 한 별인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가로질러 영실성(營室星)에 이르는 모습을 상징하게 하였다. 아방궁이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후에는 다시 좋은 이름을 골라 명명하려고 하였다. 아방에다 짓는 궁궐이라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아방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궁형과 도형에 처해진 죄수들 70만 여명을 동원하여 아방궁을 짓거나 여산(驪山)에다 시황 자신의 능묘를 축조하게 하였다. 북산의 돌을 캐내어 관을 만들고 촉()과 형()에서 목재를 가져왔다. 관중(關中)의 궁실은 300, 관외(關外)의 궁실은 400개에 달했다. 그리고 동해의 구산(朐山)78) 위에 비석을 세워 진나라의 동문으로 삼았다. 3만의 가호를 여읍(麗邑)으로, 5만의 가호를 운양으로 옮겨 살게 하고 10년간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노생(盧生)이 시황에게 말했다.

신등이 불사약과 신선을 구하여 돌아 다녔으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알 수 없는 무엇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하시어 악귀를 물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악귀가 물러가면 진인(眞人)이 찾아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시는 곳을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의 방문을 방해하게 됩니다. 진인이란 물속에 잠겨도 젖지 않으며 불 속에 있어도 타지 않고 구름과 바람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함께 한 영원한 존재입니다. 오늘에 이르러 금상폐하께옵서 비록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나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원컨대 궁궐에 머무시더라도 아무도 그 곳을 알게 하시지 못하게 하시고 그때를 이용하여 불사약을 구하시면 능히 얻을 수 있습니다.

시황이 대답했다.

내가 진인을 앙모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나를 부르기를 짐()이란 말 대신에 진인이라 칭하겠다.

시황이 즉시 령을 내려 함양성 주위의 2백 리 안의 궁실과 누각 270개를 모두 구름다리와 낭하(廊下)로 연결하게 한 후에 그 주위를 장막으로 두르게 했다. 다시 그 안에 종고(鐘鼓)와 미인들로 가득 채우고 모든 사람들을 각각의 부서에 등기하게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황제가 순시를 나가 머무를 경우 그가 머문 곳을 발설한 자가 있게 되면 모두 죽였다. 시황이 양산궁(梁山宮)에 머물 때 산에 올라가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수많은 거마와 종복들을 데리고 행차를 하던 승상 이사를 보고 마음속으로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시황의 옆에 있던 시자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승상에게 전해 줬다. 승상이 듣고 행차할 때 거마의 규묘를 줄였다. 시황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이것은 내 측근에 있던 놈이 나의 말을 누설했기 때문이다.

시황이 측근의 시자를 모두 불러 심문하였으나 아무도 자백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산궁의 산 위에서 자기를 시종했던 측근들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이후로는 시황이 순행 나가 머문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정사의 처리는 군신들이 시황의 결심을 받들어 행해졌고 모두가 함양궁 안에서 진행되었다.

후생(侯生)과 노생이 만나 서로 상의하였다.

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이 포악하고 이리의 심성에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위인입니다. 지금 자신은 제후의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병합하여 자기의 뜻을 얻었다고 생각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행하면서 고금을 통하여 자기에 미치는 자가 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옥리에 의해서만 해결하려고 하고 그래서 옥리만을 총애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박사들은 숫자가 70명에 이르지만 아무도 뚜렷하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으며 승상과 여러 대신들은 단지 결정된 일만을 전달받아 행하여 모든 일은 위의 뜻에 따라서만 행해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중형만을 즐겨하여 살륙을 행하여 자기의 위엄을 갖추려고 하고, 죄를 얻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단지 작록(爵祿)에 만 연연하여 아무도 감히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간하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자기의 잘못에 대한 말을 듣지 않으니 날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밑의 사람들은 황상으로부터 죄를 얻어 해를 입지나 않을까 마음 졸이며 모든 일을 거짓으로 둘러대고 뜻을 굽혀 좋은 말만을 여쭙고 있습니다. 진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한 사람의 방사(方士)2 가지 이상의 방술을 펼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방술을 행하였다가 효험이 나지 않을 때는 즉시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살펴 길흉을 점칠 수 있는 훌륭한 방사가 300명에 달하지만 그들은 모두 죄를 얻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되어 황상이 싫어하는 바를 꺼리고 그 뜻을 받들어 아무도 감히 정직하게 황제의 잘못을 간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천하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황상의 결정에 달려있어 심지어는 저울을 가져오게 하여 죽간과 목간으로 된 각종 서적과 문건의 중량을 달게 하여 매일 밤마다 읽어야할 책과 문건의 중량을 정해 놓고 읽다가 그 정해진 무게에 달하지 못하면 휴식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권세를 탐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우리는 그를 위해서 선약을 구해다 바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두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시황은 두 사람이 도망쳤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노하며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모두 수거하여 모두 불태우게 했다. 다시 수많은 문학사와 방술사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들을 곁에 둔 것은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기 위해 방사들로 하여금 선약을 만들고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옛날 한중(韓衆)이 한번 가더니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또한 서불(徐市) 등은 수만금을 낭비하고도 결국은 선약을 얻지 못했다. 더욱이 그들끼리 불법적인 방법으로 이를 도모하고 있으며 서로 비방만 하고 있다는 보고만을 매일 듣고 있다. 노생 등은 내가 존중하여 매우 후하게 대해주었으나 오늘 나를 비방하면서 나의 부덕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에 살고 있는 제생(諸生)들에 관하여 사람들을 시켜 조사해 보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써 백성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게 만들고 있었다.

시황이 어사를 시켜 제생들을 수색하며 조사하니 제생들은 서로가 자기들끼리 고발하니 시황이 스스로 정한 법령을 어긴 자들이 모두 460명에 달했다. 시황이 명하여 함양성 교외에 구덩이를 파고 모두 산채로 묻어 죽여 천하의 사람들에게 알려 후세에 본보기로 삼으려고 했다. 또한 유배된 사람들을 더 많이 선발해서 변경으로 보내 그곳을 지키게 했다. 시황의 장자인 부소(扶蘇)가 간하며 말했다.

천하가 안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의 백성들은 아직 복속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생들은 모두 공자의 법에 통달해 있는데 오늘 황상께서는 모두 중법으로 다스려 붙잡으니 천하가 불안하게 될까 신은 심히 우려하는 바입니다. 부디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시황이 듣고 노하여 부소를 북쪽의 상군(上郡)에서 장성의 축조를 지휘하고 있던 몽염(蒙恬)의 감군(監軍)으로 보내버렸다.

시황 36년 기원전 211,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79)을 범했다. 운성(隕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져 땅에 닿자 바위가 되었다. 백성들 중 어떤 사람이 그 바위를 주어서 위에 글을 새겼다.

시황제가 죽어서 땅이 갈라진 것이다.

시황이 듣고 어사를 보내 글을 쓴 사람을 찾아 잡아오라고 했으나 아무도 자기가 했다고 자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바위 주변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을 모두 잡아다 죽이고 그 바위를 불을 지른 후에 부셔버렸다. 불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시황이 박사들에게 명하여 선진인시(仙眞人詩)라는 노래를 지어 천하를 순행하며 머물 때 악인(樂人)들에게 명하여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게 했다. 그해 가을 시황의 사자가 관동(關東)으로부터 화음(華陰)과 평서(平舒)의 길을 밤중에 지날 때 어떤 사람이 손에 벽옥(璧玉)을 들고 사자의 앞길을 막으며 말했다.

나를 위해 이것을 호지군(滈池君)80)에게 가져다주게!

그리고 다시 말했다.

금년에는 조룡(祖龍)81)이 죽게 될 것이다.

사자가 그 사람에게 까닭을 물으려고 하니 사람은 홀연히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벽옥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사자가 벽옥을 가지고 도성으로 돌아왔다. 사자가 벽옥을 받들어 바치면서 시황에게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고했다. 시황이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산 속에서 사는 귀신이란 원래 일 년 앞의 일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지금은 시절이 가을철이라 금년도 거의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말한 일이 금년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즉 그의 말은 효험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어찌 산 속의 귀신이 내년의 일까지 맞출 수 있겠는가?

그리고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말했다.

조룡이라는 것은 인간의 조상을 말하고 조()란 즉 죽은 사람을 뜻하니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시황이 어부(御府)를 시켜 벽옥을 조사하게 했는데 그것은 곧 시황 28년 즉 8년 전에 강을 건너다 빠뜨린 화씨벽이었다. 그래서 시황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점괘가 천하를 순무하며 옮겨 다니는 것이 길하다고 했다. 3만 호의 백성들을 북하(北河)와 유중(楡中)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들의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었다.

시황 37년 기원전 210, 10월 계축(癸丑) 날에 시황이 순행을 나갔다. 좌승상 이사는 황제를 수행하고 우승상 거질(去疾)은 도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작은아들 호해(胡亥)가 따라가기를 간청하니 시황이 허락했다. 11월 시황의 행렬이 운몽(雲夢)에 이르러 순임금이 묻혔다는 구의산(九疑山)을 멀리서 바라보며 제사를 올렸다. 강수의 물길을 타고 항행하여 적가(籍柯)에 이르자 머물면서 풍경을 즐겼다. 다시 해저(海渚)를 건너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塘)에 이르렀다. 절강(浙江)에 이르자 파도가 심하게 쳐서 건너지 못하고 서쪽으로 120리를 거슬러 올라가 중류에서 강을 건넜다. 회계(會稽)에 도착하여 대우(大禹)에게 제사지내고 남해(南海)를 향하여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우게 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황제의 위대한 공덕으로 천하를 평정하니 그 입은 은혜는 영원하리라! 황제 재위 37년 친히 천하를 순행하시어 두루 먼 지방을 돌아보셨다. 회계에 오르시어 그곳의 습속을 고찰하시니 백성들이 공경하고 흠모하였다. 따르던 군신들이 그 공덕을 노래하고 황제께서 이룩하신 치적의 근원을 생각하고 그 높고 밝은 공덕을 회고하였다. 성스러운 황제께서 즉위하시어 처음으로 형벌을 정하시고 옛날의 법규를 명백히 밝히셨다. 처음으로 법식을 공평하게 행하셨으며 맡은 바 직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영원불변의 기강을 세우셨다. 여섯 나라의 왕이 전횡하고 이익만을 밝히고 오만하였고, 무리를 거느리고 스스로의 세력을 늘리려 하였다. 포학한 행동에 방자하고 무력에 의지하여 수시로 군사를 동원하여 천하를 어지럽혔다. 몰래 첩자를 보내어 합종을 도모하고 그릇된 행동을 일삼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들의 사악한 음모를 감추고 겉으로는 우리의 변경을 침범하여 재앙을 일으켰다. 황제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서 위엄으로써 그들을 죽이고 포학한 패륜아들을 남김없이 소탕하여 란적들을 멸망시켰다. 성스러운 덕은 넓고 깊어 육국에 살던 백성들은 황제의 은혜를 끝없이 입었으며 황제께 천하를 병합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듣고 다스리시니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평안하게 되었다. 만물을 관리하는 일을 주재하고 사실을 검증하는 일을 고찰하여 각기 그 이름을 불면하여 기록하게 하셨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가기의 뜻을 발하여 통하게 하여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면전에서 진술하게 하시고 아무도 그 실정을 숨기지 못하게 되었다. 허물을 감싸주고 도의를 널리 알리어 자식이 있음에도 개가를 행함은 죽은 지아비를 배반하는 부정한 짓이라 하셨다. 내외를 구별하여 예로써 대하게 하여 음탕한 짓을 금지시키자 남자나 여자나 모두 순결하고 성실해 졌다. 지어미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남자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게 하니 남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을 준수하였으며 그 부인이 몰래 도망가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되면 자식들이 그 여인을 어미라 하지 않게 하니 모두 교화를 받게 되어 바르게 되었다. 나쁜 습속들은 크게 다스려져서 온 천하의 백성들은 교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풍속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백성들은 법도와 법규을 지켜 평안하고 근면하게 되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백성들은 선량하고 청결하게 되고 모두가 스스로 법규를 지키기를 원해 천하가 태평하게 보전되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성스러운 법을 받들어 나라를 크게 다스리고 변경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어 병거와 병선이 뒤집히는 일이 없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을 써서 비문에 세길 것을 청하여 천세에 그 빛을 발하도록 했다.

시황이 오() 땅을 떠나 강승현(江乘縣)에서 강을 건너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랑야(琅邪)에 이르렀다. 방사 서불 등이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나갔으나 몇 년이 지나도 찾지 못하고 비용과 재물만 소비하여 시황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말을 꾸며 거짓으로 말했다.

동방의 봉래산(蓬萊山)에 가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으나 단지 커다란 상어가 길을 막고 있어 갈 수 없으니 원컨대 황제께서 활을 잘 쏘는 군사들을 별도로 뽑아 보내시어 상어를 만나면 가지고 간 기기와 활을 연속으로 발사 할 수 있는 연노(連弩)를 쏘아 잡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시황이 밤에 잠을 자다가 해신(海神)과 싸움을 한 꿈을 꾸었는데 해신의 모습이 마치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점을 치게 하여 해몽을 해보도록 했다. 박사가 대답했다.

바다 속의 귀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고기나 교룡(蛟龍)의 모습으로 변해 출몰합니다. 오늘 황제께서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갖추시고 제사를 지내신다면 악신(惡神)을 쫓아내고 신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황이 활을 잘 쏘는 군사들을 뽑아 고기를 잡는 기기와 연노를 배에 싣고 상어가 나타나면 쏘아 잡기 위해 친히 바다로 나아갔다. 랑야에서 바다로 나가 북상하여 영성산(榮成山)에 이르렀으나 큰 상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북상하여 지부산(之罘山) 근처에 이르렀을 때 대어(大漁) 한 마리를 발견하여 연노(連弩)를 쏘아 잡았다. 그리고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시황이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렀을 때 병이 들었다. 시황은 죽음이라는 글자를 매우 싫어하여 군신들은 아무도 감히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황제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새서(璽書)를 부소 앞으로 썼다.

함양으로 돌아와 나의 장례식에 참석하라!

그러나 시황은 새서의 내용대로 행하게 명하면서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에게 맡기고 사자에게는 직접주지 않았다. 그해 7월 병인 일에 시황이 함양으로 돌아오던 중 사구평(沙丘平)에서 죽었다. 승상 이사는 황제의 죽음이 밖에 알려지게 되면 시황의 여러 공자들이나 천하의 호걸들이 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비밀에 부치고 황제의 상을 발하지 않았다. 시황의 관을 온량거(轀凉車)82)에 싣고 옛날에 총애를 받았던 환관들을 참승(驂乘)83)으로 태우고 수레가 이르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리게 하였다. 오로지 시황의 어린 아들 호해와 시황의 총애를 받던 몇 사람의 환관만이 시황의 죽음을 알았다. 조고는 옛날에 호해에게 글과 옥사에 관한 율령과 법규에 관해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조고는 호해에게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조고, 호해 그리고 승상 이사가 비밀리에 모의하여 시황이 써서 봉하여 부소에게 전하라고 맡긴 새서를 뜯고 글을 바꾸었다. 승상 이사가 시황으로부터 사구평에서 유조를 받들었다고 하면서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다시 새서를 거짓으로 꾸며 공자 부소와 몽염의 죄를 나열하고 사형을 명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사열전에 기록되어있다. 시황의 시체를 태운 행렬이 정형(井陘)을 거쳐 마침내 구원(九原)에 당도하였다. 마침 계절이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철이라서 황제의 시신이 썩는 악취가 진동을 했기 때문에 환관들로 하여금 비린내가 나는 절인 고기 한 섬을 싣게 하여 시체 썩는 냄새를 막아보려 하였다. 이윽고 시황의 시신을 실은 행렬이 직도(直道)84)를 거쳐 함양에 당도하여 시황의 상을 발표하고 태자 호해가 뒤를 이어 이세(二世) 황제라 칭했다. 그해 9월 시황을 여산(驪山)에 장사지냈다. 시황이 옛날에 제위에 오르자 여산에 공사를 벌리기 시작하고 다시 천하를 병합하자 세상의 죄인 70여만 명을 보내 땅을 깊이파고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그 구멍을 매워 외관(外棺)을 만들고 다시 궁궐의 모형을 만들고 그 안에 작록에 따라 백관들의 모습을 흙으로 만들어 세운 후에 세상의 희귀한 보물과 기이하게 생긴 돌들을 모두 옮겨서 가득 채우게 하였다. 장인들에게 명하여 노궁(弩弓)을 기관으로 설치하여 자기의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화살이 발사되도록 만들었다. 수은을 부어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의 모습으로 만들고 기관을 설치하여 수은들을 흐르게 하였다. 위에는 천문의 모습으로 꾸몄으며 아래에는 천하의 지리를 본따서 만들었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고기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세 황제가 말했다.

선황의 후궁들을 자식이 없다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는 처사는 옳지 않다.

이세 황제가 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순장하도록 하자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시황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절차가 모두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덤 안에 설치된 기관과 가져다 놓은 수많은 진기한 보물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공인과 장인들은 종내에는 비밀을 누설할 것이다.’라고 했다. 장례를 치르는 대사가 모두 마무리되고 보물들도 모두 매장하자 묘도(墓道)의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또한 묘의 바깥문을 내려서 공인과 장인들을 안에 가두니 아무도 묘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묘 바깥에는 나무와 풀을 심어서 묘가 마치 산과 같이 되었다.

이세 황제 원년 기원전 209, 이세의 나이가 21살이 되었다. 조고를 낭중령(郎中令)85)으로 삼고 나라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이세가 조칙을 내려 시황(始皇)의 침묘(寢廟)86)에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의 숫자를 늘리고 여러 산천에 드리는 제사와 일체의 제사에 쓰이는 예물들의 숫자와 양을 늘리도록 했다. 다시 군신들에게 시황의 묘를 높이 받드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다. 군신들이 머리를 숙이면서 이세에게 상주하였다.

옛날에 천자는 칠묘(七廟)87), 제후는 오묘(五廟), 대부는 삼묘(三廟)를 두어 만세에 이르도록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선황의 묘를 가장 높이 받들어 사해의 모든 백성들이 헌상한 것들을 공물로 바쳐 희생을 늘리고 예를 두루 갖추어 더 이상 높이 받들 수는 없습니다. 선왕들의 묘가 어떤 묘는 서쪽의 옹성(雍城)에 있고 또 어떤 묘는 함양에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마땅히 한 곳에 모은 선왕들의 묘와 함께 시황의 묘에 제사를 지내시고 술을 따라 올려야 마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양공(襄公) 이후의 묘들은 이미 훼묘(毁廟)88)에 모시고 일곱 분의 조상들을 모실 칠묘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지금의 군신들은 예로써 나아가 제사를 받들면서 시황의 묘를 제왕의 첫째가는 묘로 받드시기 바랍니다. 황제께서는 선황의 예에 따라 짐()이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세 황제가 조고에게 그의 의견을 구하며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리고 제왕의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어 백성들이 나를 따르지 않고 있소. 선제께서는 천하의 군현들을 순행하시며 그 강함을 천하에 보이시어 위엄으로써 백성들을 복종하게 만드셨습니다. 오늘 내가 순행도 나가지 않고 나의 약함을 세상에 보인다면 신하들과 백성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오.

그해 봄철에 이세 황제가 동쪽으로 순행을 나가 군현을 방문하였다. 이사가 수행했다. 이세의 행렬이 갈석산을 넘어 해안에 당도하여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회계에 당도하였다. 시황제가 세운 비석에 모두 글씨를 새기고 비석의 옆면에는 수행한 대신들의 이름을 명기하여 선제가 이룩한 공업과 덕을 밝혔다. 비문에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세 황제께서 말씀하셨다.‘비석에 새겨진 공덕은 모두 시황제께서 이룩하신 일이다. 지금 황제의 칭호를 이어받아 사용하게 되고 시황제라고 구분해 놓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황제가 한 일처럼 보이게 되어 시황제의 업적과 공덕을 밝힐 수가 없을 것이다.’

좌우승상 이사와 풍거질(馮去疾), 어사대부 덕()이 황공하여 말했다.

신 등이 청하옵건대 황제께서 말씀하신 조칙을 이 비석에 새기게 하여 이 일을 명백하게 밝히게 해 주십시오. 신 등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세 황제가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이세 황제는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요동을 방문한 후에 함양으로 돌아왔다.

이세 황제가 조고의 의견을 존중하여 새로운 법령을 공표 하였다. 이어서 비밀리에 조고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대신들도 복종을 하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 힘이 강하고 이어서 여러 공자들은 나와 제위를 놓고 다투려고 하니 이를 어찌해야 하오?

조고가 의견을 말했다.

신은 원래부터 이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감히 행하지 못했습니다. 선황의 대신들은 모두가 누대에 걸쳐 이름이 높아진 귀인들이라 세상에 쌓은 공로가 오래도록 전해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작고 보잘것없는 소신을 총애하시어 높은 직위에 두시고 나라의 일을 보게 하시었습니다. 이 일로 대신들이 앙앙불락하는 마음으로 겉으로는 신을 따르고 있는 듯 하나 마음속으로는 불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천하를 순무하시면서 군현의 태수나 군사 책임자들 중 죄 있는 자들을 잡아 죽인다면 위로는 천하에 폐하의 위엄을 떨칠 수 있고 아래로는 폐하께서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자들을 제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문치를 중시할 때가 아니고 무력으로써 결판을 내야 하는 때라 원컨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시지 마시고 시세를 따르신다면 군신들은 이 일에 대해 대책을 논의할 시간도 없을 것입니다. 밝은 임금은 천한 사람을 귀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게 하고 또한 멀리 있는 사람을 불러 가까이 두게 하여 상하가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합니다.

이세 황제가 조고에게 말했다.

경의 말대로 하리라!

이어서 대신들과 여러 공자들을 주살하고 여러 가지의 죄형들이 소소한 근시나 미관말직인 삼랑(三郞)89)에게 까지 미치게 되어 그 죄목에서 능히 빠져 나올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여섯 명의 공자를 두현(杜縣)에서 처형하고 공자 장려(將閭)의 삼 형제를 내궁에 감금한 후에 그들의 죄를 나중에 논하려 하였다. 이세가 장려에게 사자를 보내어 령을 전했다.

공자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아 마땅히 죽음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 내가 형리를 보내어 법을 집행하겠노라!

장려가 듣고 말했다.

궁궐의 의식에서 나는 아직까지 빈찬(賓贊)90)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조정의 서 있었을 때는 황제 앞에서 아직껏 예절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황제로부터 명령을 받을 때는 나는 아직까지 한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어야 하는지 알려 주기 바란다.

사자가 장려를 보고 말했다.

신은 이 일에 대해 아는바가 없고 단지 폐하의 명만을 받들 뿐입니다.

장려가 하늘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오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

장려(將閭) 삼 형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허리에서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황실의 종실들은 모두 공포에 떨며 전전긍긍하였다. 군신들은 간하다가 비방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단지 록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몸을 사리기만 했고 백성들은 공포감에 몸서리를 쳤다.

그해 4월 이세 황제가 순행 길에서 함양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선제께서 함양의 궁궐이 좁다고 하시어 아방궁을 축조하게 하셨다. 그런데 실당(室堂)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붕어를 하시어 공사는 중단되고 인력과 장비를 여산으로 옮겨 능묘를 조성하는데 사용했다. 여산의 일이 이제 다 끝났음에도 아방궁 공사를 계속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선제의 큰 뜻을 저버리는 잘못을 저지르리는 일이다.

이세 황제의 명으로 아방궁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진무하고 그밖의 모든 것은 시황 계책을 그대로 따랐다. 건장한 군사 5만 명을 뽑아 함양에 주둔하며 도성을 지키도록 하고 그들에게 활쏘기, 군견, 군마와 짐승들을 조련하게 했다. 함양성 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많아지니 필요한 식량도 비례해서 많이 소요되었으나 창고의 식량을 헤아려보니 턱없이 부족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군현에 령을 내려 마초(馬草)와 곡식(穀食)을 함양으로 운송하도록 했다. 운송의 일애 동원되는 인부들은 스스로 양식을 휴대하여 함양을 중심으로 한 300리 지역 내에서는 그 곡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법을 적용하는 도가 더욱 가혹해 졌다. 그해 7월 수졸(戍卒) 진승(陳勝)이 형()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했다. 진승이 자립하여 초왕(楚王)이라고 하고 진() 땅에 거했다. 진나라의 관리들에게서 고통을 받던 산동의 군현에 살던 젊은이들이 모두 일어나 그들의 군수, 군위, 현령, 현승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고 진승에게 가담하고는 서로 간에 후()와 왕()이 되어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삼았는데 그 수효가 많아 이루 셀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간 알자(謁者)91)가 돌아와 반란자들에 관해서 이세에게 전했다. 이세가 듣고 노하여 알자를 하옥시키도록 했다. 후에 다른 알자가 당도하자 황제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군수와 군위들이 도적들을 잡거나 쫓아내서 이제는 남아 있는 자들이 없게 되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황제가 듣고 기뻐하였다. 무신(武臣)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었고, 위구(魏咎)는 위왕(魏王), 전담(田儋)은 제왕(齊王)이 각각 되었다. 패공(沛公)이 패()92) 땅에서 일어났고 항량(項梁)은 회계(會稽)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세 황제 2년 기원전 208년 겨울, 진승이 주장(周章) 등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진격시켜 희수(戱水)93)에 이르니 그가 거느린 군사들은 10만에 달했다. 이세가 놀라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소부(少府)94) 벼슬에 있던 장한(章邯)이 말했다.

도적들이 이미 이곳 가까이 다가왔고 또한 그들의 수가 많으니 가까운 군현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싸우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었습니다. 여산에 옮겨 노역을 시키고 있는 죄수들의 숫자가 많사오니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군사로 삼아 도적들을 공격하여 물리치십시오.

이세가 즉시 천하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려 장한을 장수로 삼아 주장(周章)이 이끄는 반란군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그의 뒤를 쫓아 조양(曹陽)95)에서 생포하여 죽였다. 이세가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으로 하여금 증원군을 이끌고 가서 장한을 돕도록 했다. 진승을 성보(城父)96)에서 죽이고 항량(項梁)을 정도(定陶)97)에서 파했으며, 위구(魏咎)를 임제(臨濟)98)에서 멸했다. 초나라 땅에서 일어난 도적떼들의 여러 대장을 죽인 장한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하수를 건너 조왕 헐()을 거록(鉅鹿)99) 땅에서 격파했다. 조고가 이세에게 말했다.

선제께서 등극하시어 천하를 다스린 지가 오래되어 군신들이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고 사악한 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연세가 어리시고 즉위하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어떻게 공경들과 조정에서 대사를 결정하시려고 하십니까? 일을 처리하는데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군신들에게 허점이 드르나게 됩니다. 천자가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목적은 원래 그 음성을 신하들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세 황제는 계속해서 궁궐의 깊숙한 곳에 거하면서 조고와 함께 모든 일을 결정했다. 그 후에 공경들은 이세에게 조현을 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도적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증가하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관중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동쪽으로 보내는데 쉴 새가 없었다. 우승상 풍거질,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馮劫)의 이름으로 상주문을 올렸다.

관동에서 수많은 도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자 나라에서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살해된 자의 숫자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아직도 그 소란이 끝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도적들의 수가 많아 국경의 수비, 군수품의 수송, 각종 요역으로 그 고생이 심하여 과중한 부세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아방궁의 축조를 잠시 중지하시고 변경지역의 군사들의 수를 줄이시고 요역과 군수품의 수송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상주문을 읽어본 이세가 말했다.

나는 한비자가 한 말을 알고 있소.‘요와 순임금은 나무를 베어다 깎지도 않고 서까래를 만들었으며 띠풀로 지붕을 이어 처마 끝을 잘라내지 않았으며 흙으로 빚은 그릇에 식사를 한 후에에 물을 마시며 지냈으니 이것은 설사 문지기의 생활이라고 해도 그와 같이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은 용문(龍門)에서 굴을 뚫어 하수를 중원으로 통하게 하여 정체된 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게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몸소 부삽을 들고는 정강이 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하여 그가 거느린 노예들의 수고로움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무릇 천하의 주인이 되는 사람을 귀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주인된 자는 스스로 뜻한 바를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있고 또한 법률을 엄중하게 밝혀두어 아랫사람들이 감히 그 시비에 대해 논하지 못하게 하여 이로써 해내의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오. ()의 순임금이나 하의 우임금은 천자의 몸이 되어 귀하게 되었으나 몸소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실정을 체험하며 백성들을 위해 헌신했으니 그들에게서 무엇을 본받을 수 있겠소? 짐은 만승의 지존이지만 실정에 맞는 바가 없으니 나는 천승)의 어가를 만들고 만승의 군사를 동원하여 나의 직위에 걸맞게 하려고 하오. 한편 선제께서는 제후의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겸병하고 평정하시어 밖으로는 사이(四夷)를 물리쳐 변경을 안정하게 하고 궁실을 새로이 축조하여 뜻을 얻었음을 세상에 보이셨음은 그대들도 곁에서 지켜 본 봐와 같소. 오늘 짐이 제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도적의 무리들이 들고일어났음에도 그대들은 그들을 막지도 못하고 다시 선제께서 행하신 일을 중단시키려고 하니 이것은 위로는 선제의 공덕에 대해 보답도 못하는 일이고, 아래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여 힘써 노력하지도 않았음이오! 그러고도 어찌 그대들은 관직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는 이사, 풍거질, 풍겁을 옥리에게 보내어 그들의 죄를 심문하게 하였다. 거질과 겁이 말했다.

장상은 욕됨을 받지 않는다!

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이사는 형옥에 감금되었다가 오형(五刑)100)에 해당하는 죄에 처해졌다.

이세 황제 3년 기원전 207, 장한 등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거록을 포위하자 초의 상장군 항우(項羽)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거록을 구하려고 하였다.

그해 9월 조고가 승상이 되고 결국은 이사의 죄를 논하여 살해했다.

여름 장한이 여러 차례 싸움에서 지자 이세가 사자를 보내어 질책했다. 장한이 두려워하여 장사 사마흔을 보내 자기가 싸움에 진 사연을 설명하게 했다. 조고가 조현도 시켜주지도 않고 아무런 지시도 내려주지 않았다. 사마흔이 두려워하여 도망쳤다. 조고가 군사를 풀어 잡아들이게 했으나 뒤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사마흔이 장한을 보고 말했다.

조고가 모든 일을 중간에서 전단하고 있어 장군께서 싸워 공을 세운다고 해도 죽게 되고 공을 세우지 못하면 못한 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항우가 진나라 군사들을 세차게 공격하여 왕리(王離)를 사로잡고 장한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제후들에게 항복해 왔다.

그해 8월 기해일에 조고가 란을 일으켜 이세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군신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하여 먼저 군신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사슴 한 마리를 이세 황제에게 바치며 말했다.

이것은 말이옵니다.

이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승상이 잘못 알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사슴을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세가 좌우에 대고 물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은 침묵하고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하면서 조고에 아첨하며 따랐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사슴이라고 했다. 조고가 마음속으로 사슴이라고 말한 자를 기억하고 있다가 죄를 뒤집어 씌워 모함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모든 군신들은 조고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조고가 예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다.

관동의 도적들이 무슨 일인들 이룰 수 있겠는가?

항우가 진장 왕리를 거록에서 사로잡고 계속 진격하자 장한 등이 퇴각하며 구원군을 보내달라는 상서를 올렸다. (), (), (), (), (), ()나라에는 모두 왕이 서고 자립하였다. 함곡관(函谷關) 이동 땅의 모든 백성들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후들에게 호응하였다. 제후들이 호응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였다. 패공도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조고에게 보내어 통하고자 했다. 이세가 노하여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한 조고가 병을 칭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세가 밤에 잠을 자다가 자기의 좌참마(左驂馬)를 물어뜯는 백호를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점을 쳐서 해몽을 하게 하였다. 점괘가 다음과 같이 나왔다.

경수(涇水)의 귀신이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이세가 곧 망이궁(望夷宮)에서 목욕재계하고 경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백마 4마리를 물에 던져 죽였다. 사자를 조고에게 보내어 관동의 도적을 아직도 진압하지 못한 일을 책망하였다. 조고가 두려워하여 아무도 몰래 그의 사위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과 그의 동생 조성(趙成)과 모의하며 말했다.

황제가 나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않다가 일이 급하게 되자 모든 화를 우리 집안에 뒤집어씌우려고 하고 있다. 내가 황제를 바꾸어 자영(子嬰)으로 세우려고 한다. 자영은 인자하고 부지런하여 백성들이 모두 즐겨 따를 것이다.

조고는 랑중령(郞中令)으로 하여금 안에서 호응하도록 하고 거짓으로 수많은 도적이 쳐들어 왔다고 하면서 염락으로 하여금 관리들과 군사들을 출동시키게 하는 한편, 염락의 모친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하여 인질로 삼았다. 관리들과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끈 염락이 망이궁(望夷宮)의 궁문으로 쳐들어가서 위령(衛令)과 복야(僕射)를 포박한 후에는 말했다.

도적이 쳐들어 왔다는데 어찌하여 막지 않는가?

위령(衛令)이 말했다.

궁궐을 경비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 경비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데 어찌 감히 도적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단 말이오?

염락이 즉시 위령의 목을 베고 군사들을 궁궐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군사들이 활을 쏘며 쳐들어가자 랑관들과 환관들이 크게 놀라 어떤 자는 달아나고 어떤 자들은 맨몸으로 대항하였다.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염락이 거느린 군사들에게 목숨을 잃어 죽은 자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랑중과 염락이 일제히 황제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가 악좌(幄坐)101)와 휘장에 활을 쏘았다. 이세가 노하여 좌우를 불렀으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두려워하여 대항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곁에는 환관 한 사람만이 곁에서 모시면서 감히 달아나지 못했다. 이세가 안으로 들어가 곁에 남아있던 환관을 향해서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진즉 나에게 고하지 않고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는가?

환관이 대답했다.

신이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한 이유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일에 대해 말씀 드렸다면 저는 이미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인데 어찌 제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이세의 면전에 서서 그의 죄를 나열하며 말했다.

그대는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멋대로 정사를 처리했으며 무도하게 수많은 사람을 죽여 천하가 모두 그대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대는 이제 스스로 알아서 목숨을 끊기를 바란다.

이세가 말했다.

승상을 한번 만나 볼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내가 원컨대 이 나라의 한 군()을 얻어 군왕으로 물러 앉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염락이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이세가 말했다.

그렇다면 만호후(萬戶侯)는 어떠한가?

염락이 다시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처자를 데리고 여러 공자들처럼 일반 백성으로 살고 싶다.

염락이 듣고 말했다.

나는 승상으로부터 천하를 위해 그대를 죽이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다. 그대가 비록 많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감히 승상에게 돌아가 그대의 죽음을 보고하지 않을 수 없다.

염락이 손을 휘저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어와 이세를 죽이라고 하지 이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염락이 돌아와 이세의 죽음을 조고에게 고했다. 조고가 즉시 여러 대신들과 공자들을 불러 이세의 죄를 물어 주살 했다고 하면서 말했다.

우리 진나라는 원래 일개 제후국에 불과하다가 시황께서 천하의 군주가 되어 제라고 칭했소. 오늘 나머지 6국이 모두 일어나 자립했으니 진나라의 땅은 갈수록 좁아져 이제는 제라는 칭호는 허명에 불과하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소. 마땅히 옛날로 돌아가 왕이라 칭해야 되겠소.

조고가 이세 황제 형의 아들 자영을 세워 진왕이라고 했다. 백성들의 방식으로 이세의 상을 치르고 두남(杜南)의 의춘원(宜春苑)에 장사지냈다. 조고는 자영에게 재계하고 종묘에 고한 후에 옥새를 받으라고 말했다. 종묘에서 5일 간을 재계한 자영이 두 아들을 불러 모의하였다.

승상 조고가 망이궁에서 이세를 살해하고 군신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나를 세웠다. 내가 들으니 조고가 초나라 반군과 밀약을 하여 진나라를 멸하고 자기가 대신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오늘 나로 하여금 재계하고 태묘를 배알하게 한 처사는 나를 종묘 안에서 죽이기 위해서다. 내가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으면 조고 승상이 틀림없이 나를 찾아올 것이니 그때 그를 죽이도록 하자.

조고가 여러 번 자영을 불렀으나 자영이 가지 않자 조고가 과연 친히 자영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말했다.

종묘의 일이 중한데 어찌하여 왕께서는 행차를 하시지 않으십니까?

자영이 갑자기 칼을 빼어들고 조고를 재궁에서 찔러 죽였다. 이어서 조고의 삼족을 멸족시키고 함양성 안에다 묻었다.

자영이 진왕이 된지 46일 만에 패공이 초군(楚軍)을 이끌고 무관을 파하고 관중으로 들어와 패상에 영채를 세워 주둔한 후에 사자를 보내어 자영에게 항복을 권해왔다. 목에는 사대(絲帶)를 두르고102), 백마가 끄는 흰 수레에 타고103) 천자의 옥새와 부절을 손에 받들고 지도(軹道)에 나와 항복하였다. 패공이 자영의 항복을 받아드리고 함양성에 입성하고 궁실의 부고를 봉하고 다시 패상(覇上)으로 철군하였다. 패상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자 제후들의 군사들이 당도하였다. 제후들의 맹주인 항우가 자영과 진나라의 공자 및 모든 종족들을 죽였다. 함양의 백성들을 도살하고 궁실을 불태우고 자녀들을 노략질했다. 부고의 금은보화들을 모두 거두어 제후들과 같이 나누어 가졌다. 진나라를 멸한 항후는 그 땅을 옹()104), ()105), ()106)으로 삼분하여 그곳에 각각 왕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를 삼진(三秦)이라고 통칭하였다. 항우는 진나라를 멸하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고 부르고 천하의 왕들과 제후들 위에 군림하였다. 진나라는 드디어 멸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천하는 모두 한()나라를 일으킨 패공에게 귀속되었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진의 선조는 백예(伯翳). 일찍이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때 공을 세워 봉토와 사성을 받았다. 하와 은 왕조를 거치면서 백예의 후손들은 쇠락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진나라가 일어나 처음에 서수(西垂)를 도읍을 정했다. 목공(繆公) 이래로 서서히 제후들을 잠식하기 시작하여 결국은 시황에 이르러 천하를 모두 병합하였다. 시황이 스스로 자기의 공이 오제를 능가하고 영토는 삼황 때보다 넓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같은 반열에 서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후에 가생(賈生)107)이 쓴 글은 참으로 훌륭했다.

 

가생(賈生)의 과진론(過秦論)

진나라가 제후들의 산동(山東) 30여 군()을 병합하고 나루터와 관문을 정비하고 험지에 의지하여 갑병을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진섭(陳涉)이 산란(散亂)한 수졸 수백 명을 규합하여 두 팔로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외치며 활이나 극을 든 병사도 동원하지 못하고 단지 호미와 곰방메 및 굵은 몽둥이만을 들고 단지 사람이 사는 집만을 바라보고 달려가 식사를 얻어먹고 천하를 종힁으로 누볐다. 진나라 사람들이 험지를 의지하여 대항하지도 못하고 관문을 닫지도 않고 자루가 긴 극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았으며 강노가 있었으나 쏘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나라 깊숙이 쳐들어와 홍문(鴻門)에서 싸울 때는 울타리와 같은 장애물도 없었다. 이러한 때에 산동에서 란이 발생하자 제후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웅호걸들이 차례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진나라가 장한을 장수로 삼아 동쪽으로 나가 반란군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장한은 자기가 거느린 삼군의 숫자가 많음을 기화로 외부의 제후들과 협상을 벌리면서 오히려 그의 임금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이다. 자영(子嬰)이 이세의 뒤를 이어 진왕으로 섰으나 그도 결국은 깨닫지 못했다. 만약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을 갖고 있었고 또한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장상의 보좌만이라도 얻었다면 비록 산동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는 하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고 종묘의 제사 또한 결코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 땅은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어 사방이 요새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목공(繆公)으로부터 진왕(秦王) 자영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의 군주가 모두 패자가 되었는데 어찌 그들이 모두 현명해서이기 때문이었겠는가? 지형과 지세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의 제후들이 옛날에 일찍이 마음과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공격했었다. 그 당시에 천하의 현인과 지사(智士)들이 모두 모였고 양장(良將)들은 각국의 군사들을 지휘하였으며 현상(賢相)들은 각기 자기들의 계책과 지략을 서로 상의하여 진나라를 도모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험난한 지형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나라 영토 안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제후들을 자기들의 경내 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친 진나라는 제후의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관새(關塞)의 문을 열고 반격을 가하였다. 결국은 산동의 백만 대군은 패주하고 붕궤 되었다. 이것은 산동의 군사들이 용기가 없거나 역량이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산동의 백만대군이 패주한 이유는 바로 지형이 불리하고 지세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조그만 고을들을 병합하여 대성으로 만들었고 지세가 험악한 관새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으며 영루를 높이 세우고 나가 싸우지 못하게 하고 관문을 닫아걸고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극을 메고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개 필부에서 일어난 제후들이라 이()로써 합종을 이룬 것이지 소왕(素王)108)의 행한 바를 따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서로간의 교분도 친밀하지 않았으며 그 아랫사람들은 의견을 통일시키지 못했으며 명분은 진나라를 멸한다 했으면서 기실은 이를 탐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진나라의 험난한 지형을 돌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물리치는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진나라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산동의 제후들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약자를 도와주고 강자를 억누르며 대국의 군주로써의 영()을 세운다면 어찌 천하를 얻지 못할까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몸은 천자의 귀함을 얻고 부는 천하를 가질 수 있었는데 오히려 그 몸은 남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 스스로 망국의 상황을 만회해 보려는 책략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진왕은 자기가 이룩한 공업에 스스로 만족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한 가지의 잘못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세가 그의 부왕의 잘못을 답습하여 계속해서 고치지 않고 잔학무도하여 죄형을 더욱 무겁게 하여 화환(禍患)을 불러들였다. 자영은 고립무원이 되어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뛰어 들었으니 그것은 그가 유약하고 주위에 보좌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의 진나라 군주가 모두 일생동안 미혹 속에서 살았으면서도 결국은 깨닫지 못했으니 진나라의 멸망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세상에는 시세의 형세변화에 밝은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선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왕에게 충성된 마음을 다하여 주상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바로 세상의 풍습에 너무나 많은 금기(禁忌)가 있어 충성된 말을 했다가는 말도 끝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몸은 육시(戮屍)가 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선비들은 귀를 기우려 듣기만을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두 다리를 한데 모아 서있으면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로써 진나라의 세 왕은 실도(失道)하고 충신들은 감히 간언을 드리지 못하고 지혜로운 선비들은 감히 그 계책을 내지 못했다. 천하가 이미 란을 일으켰으나 간사한 무리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니 어찌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진나라의 선왕들은 상하의 의사소통이 막히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 공경대부와 사()를 두었고 법을 세우고 형벌을 세웠다. 천하가 이 일로 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를 깨닫게 되었다. 진나라가 강할 때는 제후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반란을 평정했음으로 제후들이 복종하였고, 진나라가 쇠약할 때는 오패가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토벌했음으로 제후들이 따르게 되었다. 진나라의 땅이 다른 나라에 의해 점령당하여 축소되었을 때에는 관새 안으로 후퇴하여 지키고 밖으로는 제후의 나라들과 친근하게 지내어 능히 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 진나라가 번성하게 되자 그들의 엄한 법과 혹형은 천하를 떨게 만들었고 결국은 진국이 쇠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백성들은 진국의 엄한 법과 혹형을 원망하게 되어 천하가 모두 진국에게 반기를 들었다. 주나라는 오작(五爵)109)의 체제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천년이 넘게 유지할 수 있었으나 진나라는 그것의 본말을 뒤집어 없애 버리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망했다.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건대 안전함과 위험의 원리는 서로 대치되어 차이가 크다.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은 다면 후일의 거울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군주들은 나라를 다스릴 때에 상고의 일을 살펴서 당세의 정황을 검증해 보고 다시 사람의 일을 살펴셔 성쇠(盛衰)의 이치를 고찰하며, 모략과 형세가 적합한 지를 자세하게 살펴서 취사의 순서를 삼는다. 또한 변화의 때를 알아서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록 사직을 안정하게 지킬 수 있다.

진효공(秦孝公)은 효함(殽函)의 견고함에 의지하고 옹주(雍州)의 지세를 싸안으면서 군신이 한 마음으로 변경을 굳게 지키며 주왕실을 엿보며 천하를 석권하고 온 세상을 보자기로 싸서 차지하고 다시 사해를 자루 속에 쓸어 담아 천하를 집어 삼키려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商君)은 효공을 보좌하여 안으로는 법도를 세워 농사와 산업에 힘쓰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방어전을 준비하고, 밖으로는 연형(連衡)의 계책을 써서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여 진나라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든 채로 하서(河西) 이동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효공이 죽자 혜왕(惠王)과 무왕(武王)이 효공의 공업을 계승하고 다시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파()와 촉()을 빼앗았으며 동쪽으로는 비옥한 토지를 나누어 차지하였으며 요해지인 군현을 점거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회맹하여 진나라를 쇠약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래서 제후들은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이나 비옥한 땅을 아까워하지 않고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초빙하여 합종책을 실행하고 수호를 맺으며 호상 간에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 당시에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으며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어 이를 사군자(四君子)라 불렀다. 그들은 모두가 밝은 지혜를 갖추고 충성스럽고 천하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중하게 여겼다. 사군자들은 합종책을 따르고 연횡책을 버리기로 서로 간에 약조하였으며 한(), (), (), (), (), (), (), (), 중산국(中山國) 등의 군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하였다. 당시 육국의 모사로는 영월(寧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등이 있었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昭滑), 루완(樓緩), 적경(翟景), 소려(蘇厲), 악의(樂毅) 등의 무리는 각 제후국 사이의 의견을 소통하게 만든 종횡가였으며, 오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佗),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은 모두 친교를 맺고 각국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던 명장들이었다. 진나라 영토의 10배나 큰 땅에서 백만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관문을 두드리며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군사들이 관문을 열고 제후들의 군사들을 관문 안으로 맞아 들여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앞으로 나아가 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후퇴하더니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화살 한 개도 허비하지 않고 천하의 제후들을 곤경에 빠지게 했다. 제후의 군사들은 곧바로 해산하고 서로 간에 맺은 약속을 파기했으며 그들끼리 영토를 다투어 빼앗아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가 힘을 남겨 두었다가 9국 제후들의 군사들이 피로에 지쳤을 때 북쪽으로 그들을 뒤쫓아 백만의 군사들을 죽여 시체가 온 천하에 널리게 되었고 시체에서 흐른 피가 강을 이루어 가히 핏물 위에 군사들의 큰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진나라가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제압하고 다시 제후들의 땅을 분할하여 영토로 삼았으며 강국은 귀순하였으며 약국은 입조하여 조현을 올렸다. 진국의 왕위는 효문왕, 장양왕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의 재위기간은 짧았기 때문에 특기할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진시황에 이르자 앞서간 여섯 왕110)들이 남긴 공업을 계승하여 긴 채찍을 높이 들어 천하를 제어하며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던 주()나라를 병탄하고 제후들을 멸망시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여 정비하였고 몽둥이와 채찍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온 천하를 벌벌 떨게 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월(百越)111)의 땅을 취하여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설치하였고 백월의 임금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의 목에 줄을 감고 투항해 와서 자기의 목숨을 진나라의 형리에게 맡겼다. 다시 몽염을 시켜 장성을 축조하게 한 후에 그것을 울타리 삼아 북쪽의 변경을 지키게 하고 흉노를 700리 밖으로 몰아내자 호인들은 감히 남쪽으로 와서 말도 기르지 못하게 되었고 군사를 동원하여 활에 화살을 당겨 원수도 갚을 생각을 못했다. 이어서 선왕들의 치국의 도를 버리고 백가들이 쓴 책들을 불살라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통치하려고 하였다. 이름 있는 대성의 성곽을 허물고 영웅호걸들을 살해했으며 천하의 병장기를 함양에 모아놓고 쇳물로 녹여 종을 주조하고 다시 쇠로 만든 동상 20여 개를 만들어 백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런 다음 화산(華山)을 파서 성을 쌓고 하수(河水)를 해자로 삼아 높고 높은 성벽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자에 의지한 성에 살면서 외적의 침입에 방비하였다. 명장들을 험관과 요새에 보내어 강력한 쇠뇌로 지키게 하였다. 충성스러운 대신들이 있고 예리한 병기로 무장한 정예병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었겠는가?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시황은 마음속으로 관중의 방비는 마치 천리의 철벽으로 둘러친 성벽처럼 견고하여 자자손손에게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업을 이룩했다고 생각했다.

시황이 죽었으나 그가 남긴 위엄은 풍속이 다른 먼 변방까지 진동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한112) 집안 출신에 한낱 농사를 짓는 노예로 살던 진섭(陳涉)은 이곳저곳으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어양(魚陽)을 지키는 군사로 징발되었다. 진섭의 재능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했고 공자나 묵자처럼 어진 덕을 지니지도 못했으며, 도주공(陶朱公)113)이나 의돈(猗頓)114)처럼 거만금을 갖고 있던 부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변경을 지키러 가는 군사들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아 십장의 신분이 되더니 한 번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진승은 흩어져 도망치려고 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인솔하여 수백 명에 불과한 군사들의 대장이 되어 몸을 돌려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나무가지를 베어 병장기로 삼고 장대를 뽑아 깃발로 삼으니 천하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어 호응하였다. 모여든 백성들은 양식을 짊어지고 진승의 뒤를 따르니 산동의 영웅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진나라와 그 왕족들을 망하게 했다.

더욱이 천하는 약해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고 진나라 옹주 땅과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은 옛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견고하기가 그지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섭의 지위는 제(), (), (), (), (), (), (), (), 중산(中山)등의 군주들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을 정도로 비천했으며, 그가 거사를 할 때 사용했던 호미와 곰방메 그리고 가시나무로 만든 창은 제후들의 군사들이 사용했던 극과 갈고리 창에 비해 날카롭지 않았다. 더욱이 유배되어 변경을 지키러 가던 군사들의 수는 구국(九國)의 군주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또한 심모원려에 의해 행군과 용병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도 예전의 모사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의 성패의 결과는 서로 달랐고 이룬 공적은 서로 상반되었다. 만약 산동의 각 나라들과 진승이 당시에 갖고 있었던 것들의 장단점과 크고 작음을 각각 헤아려 보고 또한 그들의 권세와 실제로 소유하고 있었던 실력들을 비교해 본다면 둘 사이가 같은 수준이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구한 옹주의 좁은 땅과 천승의 작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진나라가 천하 아홉 개 주 중 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8주의 제후들을 불러 조배의 대열에 세워 오기를 100여 년에 걸쳐 해왔다. 그런 다음 마침내 육국을 합하여 천하를 통합하고 효산과 함곡관 사이에 궁실을 지어 천하를 다스리는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일개 필부였던 진승이 한번 일어나자 진나라의 칠묘가 무너지고 진왕의 목숨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인의를 베풀지 않고 공수의 도리를 잘못 적용한 때문이었다.

진나라가 천하를 한나라로 만들고 제후들을 겸병하여 남면하여 황제라 칭함으로써 사해를 다스리니 천하의 선비들이 귀의하여 순순히 복종하였으니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은 그 즈음 왕자가 없어진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자 오패가 차례로 일어났으나 그들 또한 죽은 지 오래라 천하에 령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은 저나마 무력을 사용하여 강자는 약자를 침략하고 큰나라는 작은나라를 범하여 병혁(兵革)의 일이 쉴 사이가 없이 일어나 백성들과 군사들이 피폐해 졌다. 오늘 진나라가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지존인 천자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때에 이르러 그 가련한 백성들은 모두 자기들의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누가 성심(誠心)으로 황상(皇上)을 경모하지 않았겠는가? 이때야말로 바로 마땅히 위엄과 권세로써 기왕의 공업(功業)을 확고하게 하여 나라가 안정되느냐 아니면 위태롭게 되어 무너지느냐의 관건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왕(秦王)이 탐욕스럽고 비루(鄙陋)한 마음을 갖고서 스스로 자기의 지혜를 과신하고 멋대로 행하면서 공신들을 믿지 않으며 군사들과 백성들을 멀리하고 또한 왕도(王道)를 저버리면서 사사로운 권세만을 고집하며 시서(詩書)와 고적(古籍)을 금하고 가혹한 형법만을 실행하니 교활한 사술(詐術)과 권세를 앞에 세우고 인의(仁義)를 뒷전으로 하여 포학한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는 시작으로 삼으려 했다. 무릇 천하를 겸병하려는 자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는 법이고 천하를 안정시키려는 자는 권변(權變)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중시하는 법이라 이것은 빼앗는 것과 지키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천하의 왕자가 되었지만 그 다스림의 방법을 교체하지도 않고 그 정령(政令)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이 서로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왕(秦王)은 아무런 보필하는 사람도 없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천하를 다스렸는데 이것은 진나라가 그렇게 빨리 멸망한 원인인 것이다. 만일에 진왕이 능히 상고 때의 정황을 고려하고 상()과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진나라의 정책을 제정하고 실행했다면 어찌 그가 죽은 바로 다음에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락만을 즐기는 나태한 군주가 그렇게 빨리 나타날 수 있었겠으며 나라가 기우러져 결국은 멸망의 화를 당했겠는가?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라의 우()임금, ()나라의 탕()임금,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이 만세에 빛나고 이룬 공업은 오래 간 것이다.

시황이 죽고 이세(二世)가 왕위에 오르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그가 어떤 방법으로 다스리는 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자들은 소매가 짧은 옷이나마 얻어 입고 굶주리며 허기에 찬 자들은 술 찌꺼기나 밀기울이나마 얻어먹을 수 있을까 바라고 있어 천하는 그들이 지르는 신음 소리는 새로이 등극한 새로운 임금에게는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지침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고생에 찌든 백성들을 어진 마음으로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세가 평범한 사람의 재주만이라도 갖추고 나라를 다스리면서 충신과 현자들을 임용하고 신하들과 임금이 한 마음으로 천하의 우환거리를 걱정하며 상복을 입었을 때 선제(先帝)의 잘못을 바로 잡고 땅을 나누고 백성들을 분산시켜 공신들의 후손들에게 분봉하여 나라를 세워 제후에 봉하고 또한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예로써 대하고 감옥을 비우고 육시의 형벌을 없애 버렸다면 그리고 수노(收帑)115)의 법과 같은 더러운 형벌들을 폐지하여 그들을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며 나라의 부고를 열어 그 재물과 폐백(幣帛)들을 혼자 어렵게 사는 사람이나 곤궁하여 빈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노역을 경감해 주며 백성들의 급한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고 법률을 간략하게 하고 형벌을 줄임으로써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며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자기의 몸가짐을 개변하고 품행을 수양할 수 있도록 하며 백성들은 각기 저마다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만민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고 위엄과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천하의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진나라에 모였을 것이었다. 즉 사해의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어 기뻐했을 것이며 오로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는 것만을 두려워하고 비록 교활한 백성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황상으로부터 마음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며 모반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신하라 할지라도 자기의 간교한 생각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며 그 결과 잔학한 란동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세(二世) 황제(皇帝)가 이러한 방법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법을 엄하게 하여 무도하게 백성들을 폭정으로 괴롭히고 중단된 아방궁의 축조를 다시 시작하였고 형벌을 번잡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겨 살육을 자행했으며 관리들의 다스림은 더욱 가혹해졌으며 상벌은 그 공정성을 잃고 부세의 부과는 한도가 없게 되어 천하에 공사를 수 없이 벌려놓아 관리들이 능히 그것을 관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어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음에도 황제는 구휼(救恤)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간사하고 거짓된 것들이 일제히 발생하여 상하가 서로 속이게 되어 죄를 얻게 된 자가 수도 없이 많게 되어 형을 집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길거리에서 다반사로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한 고통소리는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다. 군주와 대신들로부터 일반 서민대중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로운 생각을 갖게되고 몸은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처하게되어 어디를 가던지 안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이로써 동란에 쉽게 휩쓸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섭(陳涉)이 비록 상탕(商湯)이나 주무왕(周武王)의 어진 덕을 갖추지도 못하고 또한 존귀한 공후(公侯)의 적()도 갖지 못했음에도 대택(大澤)에서 두 팔로 가슴을 두드리며 한번 궐기하자 천하가 그에게 호응하여 진나라의 백성들을 위태롭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성군(聖君)들은 능히 일의 시작과 끝의 결과와 변화를 통찰하여 존망(存亡)의 관건을 파악하고 이로써 백성들을 통치하는 방법으로 삼아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했다면 반역을 일으킨 신하가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필시 그들을 돕는 백성들이 없었을 것이다. 고로 말하기를

안정된 백성들과 함께라면 의를 행할만 하나 위태로운 백성들하고는 함께 어울리게 되면 그릇된 일을 하기 쉽다.’

라고 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귀하기로는 천자에 이르고 부유하기는 천하가 다 자기 것이었는데 결국은 몸은 살륙(殺戮)을 면치 못한 이유는 바로 기우려 가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세(二世)가 저지른 잘못이다.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주석

 

1)()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에 있었던 고을로 춘추 때 초나라에 속했다가 전국 초에 한나라 땅이 되었다. 한리왕(韓釐王) 5년 진소양왕 16년 기원전 291년 진나라가 빼앗아 이곳에 남양군(南陽郡)을 설치했다.

2)남군(南郡) :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에 있었던 초나라의 도성인 영()을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기원전 278년 점령하고 설치한 군현 이름이다. 치소는 영()이다.

3)상군(上郡) : 전국시대 중기 때 위문후(魏文侯)가 명장 오기(吳起)를 시켜 하수(河水) 서쪽이 땅을 점령하고 그 땅의 남쪽에는 서하군(西河郡)과 북쪽에는 상군(上郡)을 설치했다. 진혜문왕(秦惠文王) 10, 기원전 328년에 진나라의 위협을 받은 위나라가 그 상군(上郡)에 포함된 15개 현을 모두 바치고 이어서 기원전 312년에는 상군의 남은 군현도 모두 진나라에 할양했다. 진나라는 기원전 304년에 상군을 설치하고 치소를 부시(腑施)에 두었다. 부시는 지금의 섬서성 북쪽, 유림(楡林)의 남쪽에 있었다.

4)하동(河東) : 전국 때 위나라가 설치한 군() 이름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산서성 심수(沁水) 이서와 산서와 하남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황하의 북쪽 및 산서와 섬서의 경계인 황하의 이동지방과 곽산(霍山) 이남지방이다. 진소양왕(秦昭襄王) 17년 기원전 290년 진나라의 위협을 받은 위나라가 하동의 땅 400리를 들어 바쳤다. 진나라는 이곳에 하동군(河東郡)을 설치하고 치소를 임분(臨汾)에 두었다. 임분은 지금의 산서성 곡옥(曲沃) 북쪽이다.

5)태원(太原) : 전국 때 조나라 땅이었으나 기원전 259년에 진소양왕이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차지했다. 다음 해에 조나라가 반격하여 다시 수복했으나 진효문왕 3년 기원전 247년에 다시 공격하여 빼앗은 다음 2년 후인 기원전 245년에 태원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진양(晉陽)이다.

6)상당(上黨) : 원래 춘추 때 당진에 속한 땅이었으나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당진을 삼분할 때 상당의 땅은 한과 조 두 나라가 나누어 가졌다. 한의 상당군은 진나라가 한나라 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인 야왕성(野王城)을 점령하여 본국과 통하는 길을 막자 상당군의 관리들은 상당군을 들어 조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기원전 259년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키고 상당군을 진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236년에는 조나라의 상당군마저 빼앗아 그 자리에 상당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장자(長子).

7)삼천군(三川郡) : 황하(黃河), 락수(洛水), 이수(伊水) 등 세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 해서 삼천(三川)이라 이름지었다. 지금의 황하 이남, 하남성 영보(靈寶) 이동, 중모(中牟) 이서를 관할했다. 한선왕(韓宣王 : 재위 기원전 332-312) 때 설치했다가 기원전 249년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한나라가 삼천군을 바치자 진나라는 이곳에 삼천군을 다시 설치했다.

8) 사인(舍人) : 전국 및 한조(漢朝) 초기에 왕족(王族) 등의 귀족들에게 속하여 그들의 자문역을 하던 사람을 말한다. 문하(門下) 혹은 식객(食客)과 통한다.

9)진양(晉陽) :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시구 남 청서현(淸徐縣)에 있었던 고을로 원래 조나라가 일어설 때 도성이었으나 장양왕(莊襄王) 4년 기원전 247년 장군 왕흘(王齕)을 시켜 상당군을 점령한 다음 태원군을 설치할 때 진양(晉陽)도 진나라 땅이 되었었다.

10)() :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북에 있던 고을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1)()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동북 30리의 옥장(玉帳)을 말한다.

12)유궤(有詭) : 전국 때 위나라 읍이나 후에 진나라 땅이 되었다. 상세한 위치는 미상이다.

13)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延津) 서남. 춘추 때 정나라 땅이었다가 후에 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위문후 32년 기원전 393년 위문후(魏文侯)가 정나라의 정벌하고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魏文侯32伐鄭, 城酸棗) 후에 진나라가 산조현(酸棗縣)을 설치했다

14)() :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동북에 있던 고을 이름으로써 춘추 때 남연국(南燕國)이 있던 곳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5)() : 지금의 하남성 봉구현(封丘縣) 북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6)옹구(雍丘) :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7)산양성(山陽城) : 지금의 하남성 초작시(焦作市) 동남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18)수릉(壽陵) :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산서성 북쪽의 상산(常山)을 말한다고 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19)야왕(野王) : 원래 한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산서성 심양현(沁陽縣)으로 위()나라 군주가 난을 피해 달아난 곳이다. 위나라는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진나라 이세 황제 때까지 존속해 있었다.

20)() :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曲陽縣) 서남으로 전국 때 조나라 성읍이다.

21)() :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북에 있었던 전국 때 조나라의 성읍이다.

22)경도(慶都) : 전국 때 조나라 읍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현(唐縣) 동북에 있었다.

23)() : 현 하남성 급현(汲縣)으로 전국 때 위()나라 땅이다.

24)하태후(夏太后) : 진소양왕(秦昭襄王)의 태자인 안국군(安國君 : 후에 효문왕(孝文王))의 희첩으로 이인(異人)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총애를 잃었다.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이인이 한나라 출신의 거상 여불위를 알게 되었다. 그때 안국군의 정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총애를 받고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이에 여불위가 화양부인에게 권하여 이인을 그녀의 적자로 삼고 이름을 자초(子楚)로 바꾸게 했다. 효문왕의 뒤를 이어 자초 즉 장양왕(莊襄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그녀는 하태후로 높여졌다.

25)둔류(屯留) : 전국 초기 때 한()나라 영토로 지금의 산서성 둔류현(屯留縣)이다.

26)임조(臨洮) : 지금의 감숙성(甘肅城) 민현(岷縣) 경내로 만리장성의 서쪽 시발점으로 유명하다.

27) 원유(苑囿) : 왕실에서 짐승을 놓아기르던 동물원을 말하며 규모가 큰 것을 원() 작은 것을 유()라 한다.

28)위위(衛尉) : 진한(秦漢) 때 구경(九卿)의 하나로 궁정내의 근위대 및 숙위(宿衛)를 총괄했다. 녹봉은 연 2천 석이다. 중대부령(中大夫令), 태위(太衛)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29) 내사(內史) : 국가의 기밀을 관장하던 부서의 장이다.

30) 좌익(佐弋) : 진한(秦漢) 시대 때 구경(九卿) 밑의 소부(少府)에 속한 관리의 이름. 좌익(左弋)이라고도 하며 좌익령(佐弋令)의 약자이다. 왕가나 황가(皇家)의 제사상에 올리는 오리와 기러기를 사냥하여 바치는 임무와 화살 및 쇠뇌의 제조를 감독하고 그 생산품을 왕가나 황가 및 변경의 지방 군현에 공급하는 임무를 관장했다.

31)귀신(鬼薪) : 일종의 형도(刑徒)에 해당하는 벌로 종묘에 삼 년 동안 기거하면서 필요한 나무를 구하여 바치도록 하는 노역(勞役)이나 관청에서의 잡역, 수공업으로 생산하는 노동자 등의 각종 노역에 종사하는 형벌로 형기는 3년이다.

32)연지(衍氏) : 전국 때 위나라의 고을로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북쪽에 있었다.

33) 지백(智伯) : 당진(唐晉)의 강력한 권문세가인 지씨(智氏)의 수장으로 자기의 세력을 믿고 한()과 위() 두 나라와 함께 진양성(晉陽城)에서 농성중인 조()씨들을 공격하다가 조씨들의 회유에 넘어간 한씨와 위씨들의 배신으로 오히려 싸움에서 패하고 지백은 살해되고 그 종족들은 멸족을 당했다. 한위조(韓魏趙) 삼가는 지씨들의 영토를 나누어 갖고 후에 당진(唐晉)을 삼분하여 전국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연의 84회 내용 참조.

34) 민왕(湣王) :제민왕(齊湣王)을 가리킨다. 재위 기원전 300-284. 제나라의 국력을 과신한 나머지 수시로 주변 제후국들을 침략했다.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회수 북쪽의 땅을 점령했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의 국경을 침범했다. 주나라를 엿보며 스스로 천자가 되려고 시도했다. 다시 대군을 발하여 송나라를 멸하자 격노한 진소야왕이 연(), (), 삼진(三晋) 등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했다. 5국은 각기 정예병들을 출동시켜 명장 악의를 대장으로 삼아 제군의 주력군을 임치성 밑에서 대파했다. 그는 도망쳐 거성(莒城)으로 들어갔으나 초장 요치(淖齒)에 의해 살해되었다.

35) 秦王爲人, 蜂准, 張目, 摯鳥膺, 豺聲, 少恩而虎狼心, 居約易出人下, 得志易輕食人, 我布衣, 然見我常身自下我. 誠使秦王得志于天下, 天下皆爲虜矣 不可與久游

36) 국위(國尉) : 진나라의 군사를 관장하는 부서의 최고의 우두머리

37) 두식(斗食) : 연간 곡식 100 섬 이하를 받는 진나라의 미관(微官)을 가리키는 말이다.

38) 시황 10년 조나라의 기사는 혼란스러워 분명하지 않다. 양옥승(梁玉繩)회주고증(會注考証)에 의하면 ;

10년 조나라에 대한 기사는 모두 전역(戰役)에 대한 일인데 왕전(王翦)이 주장(主將), 환의(桓齮)가 부장(副將), 양단화(楊端和)는 말장(末將)이 되어 모두 같이 출전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업성(鄴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우선 주변의 아홉 개의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왕전(王翦)은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연여와 요양(橑陽): 현 산서성 좌권현 경내)을 공격하고 환의는 업성(鄴城)의 전선에 남아 업성을 계속 공략하도록 했다. 환의가 왕전이 부재시 업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왕전이 다시 명령을 내려 요양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자기는 연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안양(安陽)은 력양(櫟陽)의 오기(誤記)이다.

39) 역수(易水) : 지금의 하북성 역현(易縣)과 보정시(保定市) 사이에 흐르던 황하의 지류

40)후복(侯服)과 이복(夷服) : 옛날에 임금이 살던 왕성을 중심으 로 사방 천리(千里) 안의 지역을 왕기(王畿)라 했고 그 밖의 역은 다시 아홉개의 지방으로 나누어 왕기와 가까운 순서대로 후복(侯服), 전복(甸服), 남복(男服), 채복(采服), 위복(衛 服), 만복(蠻服), 이복(夷服), 진복(鎭服), 번복(藩服)등의 구복(九服)으로 불렀다. 후복과 이복이라 함은 멀고 가까운 곳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41)오덕(五德) : 전국시대 때 음양가(陰陽家)인 추연(鄒衍)의 학설. 즉 수(), (), (), (), () 등 다섯 가지의 덕성이 상생상극(相生相克)하면서 순환을 반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왕조가 망하고 흥하는 것을 설명했다. 왕조가 하() () ()가 차례로 바뀐 것은 목덕(木德)의 하()를 금덕(金德)의 상()이 다시 상을 화덕(火德)의 주()가 이겨 왕조가 교체되고 다시 수덕(水德)의 진()이 화덕의 주를 대신했다는 오행설을 말한다.

42) () :()의 행정장관, () :()의 군사 책임자, () :()의 감찰관

43) () : 중량의 단위로 한 석은 120 근이다. 진한 때 한 근의 무게는 약 250그람임으로 한 석의 무게는 30키로그람이다. 천 석에 해당하는 동상 한 개의 무게는 30톤이다.

44) 주각(周閣) :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망루

45) 용도(甬道) :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양쪽에 담을 쌓은 길

46) 치도(馳道) :황제가 순수(巡狩)를 나가기 위해 이용하던 길로 함양(涵養)을 기점으로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동쪽을 나아가 연()과 제()에 통하고, 다른 한 길은 남쪽으로 오() 와 초() 및 강호로 통했다. 도로의 넓이는 50보에 매 3() 마다 가로수를 심었다.

47)추역산(鄒嶧山) : 고대의 산이름으로 주역산(邾嶧山), 추산(鄒山), 혹은 역산(嶧山)으로도 불린다.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동남쪽에 있다.

48)봉선(封禪) :태산(泰山)에 올라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을 봉()이라 하고 양보산(梁父山)에 올라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선()이라 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연의 본문 제 24회 후반부 내용 참조)

옛날 선인들이 태산(泰山)에 지내는 제사를 봉()이라 하고 태산의 낮은 봉우리인 양보산(梁父山)에 지내는 제사를 선()이라 한다. 태산에 봉하는 방법은 흙으로 제단을 쌓아 그 위에 금분으로 겉을 칠한 궤()속에 폭이 좁은 옥편(玉片)에 제문을 적어서 넣은 후에 올려놓고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하늘은 높으니 높은 형상의 땅을 정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양보(梁父)에 선()한다는 것은 형상이 낮은 곳을 택하여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갯버들로 수레를 만들고 수초와 볏짚으로 멍석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다음 그것들을 모두 땅에 묻어 땅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한다. 하상주(夏商周) 삼대가 천명을 받아 일어나 흥하게 된 것이며 하늘과 땅의 도움에 힘입어서라고 생각하여 아름다운 보은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이렇듯 전해진 것이다.

49) 망제(望祭) :명산대천을 찾아서 멀리 쳐다보며 올리는 제사

50)황현(黃縣)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용구시(龍口市) 황성집(黃城集)에 그 치소가 있었다.

51)추현(腄縣)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복산현(福山縣)에 그 치소가 있었다.

52)성산(成山) : 일명 성산각(成山角)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성현(榮成縣) 30리에 있는 고대의 산이름으로 산동반도의 최동단에 있었다.

53)지부산(之罘山) : 지금의 산동성 연태시(烟台市) 북쪽 해안에 지부도(之罘島)라고 있는데 그 섬 안에 있는 산이름을 말한다.

54) 말업(末業) :상업과 수공업

55) 육친(六親) : (), (), (), (), (), ()

56) 육합(六合) :, , , , , 북을 말하며 즉 세상의 모든 것 을 의미한다.

57)유사(流沙) : 고대 중국의 서북사막을 일컫는 말로써 통상적으로 감숙성(甘肅省)과 신강성(新疆省)의 경계지역에 해당한다.

58)대하(大夏)

59) 주정(周鼎) : ()은 원래 음식물을 담는 발이 셋 달린 그릇이었으나 후에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되었다. 하나라를 일으킨 우()임금이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각각을 상징하는 뜻으로 아홉 개의 정을 주조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후에 이것은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전국(傳國)의 보물이 되었다. 후에 상()으로 전해 졌다가 주무왕(周武王)이 상을 멸하고 구정을 빼앗아 낙읍에 두었다. 진나라가 동주를 멸하고 구정을 함양(咸陽)으로 옮길 때 그 중 한 개를 사수(泗水)에 빠뜨렸다고 했다.

60)상산사(湘山祠) : 상산(湘山)은 군산(君山) 혹은 동정산(洞庭山)이라고도 한다. 호남성 악양시(岳陽市) 서쪽 동정호(洞庭湖) 안의 섬 가운데에 있는, 순임금의 두 아내 아황(蛾黃)과 여영(女英)을 모신 사당이다.

61)상군(湘君) : 요임금이 그의 두 딸 아황(蛾黃)과 여영(女英)을 순()에게 주어 임금의 자질이 있는지를 시험했다. 순임금이 두 여인을 잘 다루어 화평하게 지내게 하자 요임금이 제위(帝位)를 순임금에게 전했다. 후에 순임금이 남쪽으로 나아가 순무하던 중 창오(蒼梧-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구의산(九疑山))에서 죽자 두 비()가 달려가 슬퍼하다가 상수(湘水)에 빠져 죽으니 사람들이 두 사람을 군산(君山)에 장사 지냈다. 그러자 두 여인의 무덤에서 반죽(班竹) 자라났다. 사람들이 대나무의 반점은 두 여인들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고 그 대나무를 상비죽(湘妃竹)이라고 이름지었다.

62) 박랑사(博狼沙) : 장량(張良)이 창해력사(滄海力士)를 시켜 진시황을 철퇴로 공격하게 하여 살해하려 했으나 진시황이 탄 가마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던 일을 말한 것이다.

63) 란지(蘭池) :진시황(秦始皇)이 함양(咸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인공 하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시(咸陽市) 동쪽으로 나있다.

64) 선문(羨門)과 고서(高誓) : 전설 속의 두 신선의 이름이나, 일설에는 선문고(羨門高)라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서()는 잘못된 글자라고 했다.

65) 록도서(錄圖書) : 후세의 참위서(讖緯書)를 말하며 진한(秦漢) 시대에 점을 쳐서 미래의 일을 예언한 책.

66)계림(桂林) : 지금의 광서성의 대부분과 광동성 주강 이남 지역을 관할했고 치소는 지금의 광서성 계평시(桂平市)인 중유(中留)에 두었다.

67)상군(象郡) :관할지역은 지금의 귀주성 동부와 광서성 서부 일대이고 치소는 지금의 광서성 숭좌현(崇左縣)의 임진(臨塵)이다.

68)남해(南海) : 주강 이북의 광동성 전지역을 관할로 했고 치소는 지금의 광주시 부근인 반우(番禺)에 두었다.

69)유중(楡中) :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섬서성 동북부 일대에 설치한 상군(上郡) 경내(사기색은). 감숙성 유중현(楡中縣) 일대(색은)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지역에 흐르는 황하의 지류 북하(北河)의 북안(사기정의).

70)음산(陰山) : 내몽고자치구 중부의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중국 고대의 산이름이다. 서쪽의 랑산(狼山)에서 시작해서 오랍산(烏拉山), 화산(樺山), 동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까지 장장 1200리로 연이어져 있는 산맥이다. 만리장성은 이 산의 남쪽 산록에 따라 축조되었다.

71)고궐(高闕) : 지금의 내몽고 항금후기(杭錦后旗) 동북에 설치했던 중국 고대의 북방민족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이름이다. 음산산맥 북쪽의 지형히 마치 대궐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72)양산(陽山) : 음산산맥의 최서단에 있는 랑산(狼山)의 옛 이름이다.

73)북가(北假) : 내몽고 경내의 하투(河套) 이북과 음산(陰山) 이남 사이의 땅을 말한다.

74)전상(田常) : 춘추대 제나라의 대신. 그 군주인 제간공(齊簡公)을 죽이고 평공을 세운 다음 자기는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었다. 이후로 제나라의 모든 권력은 전씨가 차지하게 되었다.

75) 육경(六卿) :춘추 후반기 당진의 유력한 6가의 대신. 즉 지(), (), 중항(中行), (), (), ()를 말한다. (), (), (), ()가 범씨와 중항씨를 제거하고 다시 한조위가 지씨를 멸한 다음 당진의 영토를 삼분함으로 전국시대의 시작이 되었다.

76) 성단형(城旦刑) :진한(秦漢) 시대에 형벌의 일종으로 북방의 변경으로 유배 보내어 낮에는 국경을 수비하고 밤에는 장성을 축조하는 노역에 처해졌던 형벌. 형기는 대체로 4년이었다.

77)일 보()는 약 1.4미터 즉 500보는 약 700미터이고 한 장()2.3 미터 즉 50 장은 115 미터이다. 즉 아방궁(阿房宮)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700 미터이고 남북의 넓이는 115미터에 달했다는 기사이다.

78) 구산(朐山)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연운항시(連云港市) 서남쪽의 금병산(錦屛山)을 말한다.

79) 심성(心星) :28수의 하나로 상성(商星)을 말하며 옛날 사람들은 형혹성은 요성(妖星)이고 심성은 천자(天子), 태자(太子), 서자(庶子)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80) 호지군(滈池君) : 수신(水神)의 이름. 진시황이 스스로를 수덕(水德)으로 천하를 통일했다고 하여 수신의 이름을 사용하여 진시황을 가르킨 것이다.

81) 조룡(祖龍) :진시황을 가리키는 말임. ()는 시()를 말하고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82) 온량거(轀凉車) : 창문을 열면 시원하고 닫으면 따뜻해지는 누워서 다닐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침대차. 후에는 상여를 칭했다.

83) 참승(驂乘) : 고대에 제왕이나 귀족들이 수레에 탈 때 그 주된 사람은 수레의 왼쪽에 타고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는 가운데에 그리고 자기의 호위나 시중을 위해 태우는 사람을 참승(驂乘)이라고 했다. 전차의 경우는 차우(車右)라고도 한다.

84) 직도(直道) :시황 35년 장군 몽염(蒙恬)에게 명하여 운양(云陽)에서 북쪽의 지금의 내몽고 지방인 구원군(九原郡)까지 뚫게 한 도로의 이름. 구불구불한 길을 직선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85)랑중령(郞中令) : 궁전의 문을 지키면서 백관들의 출입을 맡아보는 관직으로 지금의 경호실장에 해당한다.

86) 침묘(寢廟) : 종묘의 침과 묘의 합칭이다. 종묘 후면의 신주(神主)와 조상들의 유물을 두는 곳을 침()이라고 하며 전면의 제사를 드리는 곳을 묘()라 한다.

87) 칠묘(七廟) :천자나 황제의 종묘에는 그 왕조의 시조로부터 시작해서 7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신위를 모셨다. 주나라는는 문왕(文王), 무왕(武王)과 희씨(姬氏)의 시조 후직(后稷) (), 문왕의 고조부 아어(亞圉), 증조부 공숙조류(公叔祖類), 조부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 () 계력(季歷)등 일곱 명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제사를 지낼 때는 7대조까지 행했다.

88) 훼묘(毁廟) : 고대의 예법 중 오대조 이상의 신주는 종묘에서 태묘(太廟)로 옮겨 모셨는데 이를 훼묘(毁廟)라 했다.

89) 삼랑(三郞) :중랑(中郞), 외랑(外廊), 산랑(散郞)을 말한다.

90) 빈찬(賓贊) : 궁중(宮中)의 예법과 의식을 관장하던 관리

91) 알자(謁者) : 관직 이름. 사령(辭令)을 전달하는 일을 맡아보며 더러는 명을 받들고 출사(出使)하기도 했다.

92) ()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을 말함.

93) 희수(戱水) :여산(驪山)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동쪽을 거쳐 위수(渭水)와 합쳐진다.

94) 소부(少府) : 진나라의 관직이름. 구경(九卿)의 하나로 산해(山海)와 지택(池澤)의 수입 및 황실의 수공업을 관장하였다. 소부의 수입은 모두 황제의 사재가 되었다.

95)조양(曹陽) :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서남.

96) 성보(城父) : 지금의 안휘성(安徽城) 박현(亳縣) 동남

97) 정도(定陶) : 산동성 정도현(定陶縣)을 말함.

98)임제(臨濟) : 설이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동성 고청현(高靑縣) 고원진(高苑鎭) 서북(사기정의).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남( 사기지명고). 산동성 평구현(平邱縣) 임제정(臨濟亭) (한서 군국지)

99)거록(鉅鹿) :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 서남의 걸촌(乞村).

100)오형(五刑) : 고대의 다섯 가지의 형벌. 즉 얼굴에 글을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배는 의형(劓刑), 종지뼈를 제거하여 앉은뱅이를 만드는 빈형(臏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그리고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을 말한다. 빈형(臏刑)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나라의 병법가 손빈(孫臏)이 있고 궁형을 받은 사람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있다.

101) 악좌(幄坐) : 황자가 기거하는 방에 둘러친 장막

102) 원전에는 계경이조(繫頸以組)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대(絲帶)를 목에 감아 자살의 뜻을 나타내 보임으로써 항복한 임금이나 장수가 자기에 대한 한 처분을 승자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103) 원전에는 백마소차(白馬素車)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상복을 나타내어 전쟁에서의 패배자가 투항할 때의 차림새이다.

104)() : 섬서성 서부와 감숙성 동부지역을 말하며 진나라의 투항한 장수 장한(章邯)을 왕에 임명하고 옹왕이라고 불렀다.

105) () : 지금의 섬서성 동부지역으로 장한(章邯)과 같이 투항한 사마흔(司馬欣)을 왕으로 삼아 새왕(塞王)이라 불렀다.

106)() : 섬서성 북부지역을 말하며 동예(董翳)를 왕으로 삼고 책왕(翟王)이라 했다.

107) 가생(賈生) : 가의(賈誼-기원전 200년에 낳고 기원전 168년 에 죽었다)를 말한다. 락양(洛陽) 인으로 서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다. 굴원의 뒤를 이은 초사의 작가이며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굴원가생(屈原賈生) 열전 참조.

108) 소왕(素王) : 덕이 높아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는 있으나 왕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

109) 오작(五爵) :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등의 오 등급의 작위(爵位)

110) 육왕(六王) :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庄襄王)을 말하며 기원전 361년 효문왕 원년부터 장양왕이 죽은 기원전 247년 즉 116년 동안의 기간을 말함.

111) 백월(百越) : 고대에 월족(越族)들이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城), 광서성(廣西省), 월남(越南) 등지에 분포되어 여러 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종족 이름을 백월이라 한 것이다.

112) 원전(元典)의 옹유승추(瓮牖繩樞)를 말하며 그 뜻은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를 끼워 넣어 창문으로 삼고 새끼줄을 엮어 문지도리를 만든다는 뜻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일컫는 말.

113) 도주공(陶朱公) : 구천(句踐)을 도와 그를 패자로 만든 월나라의 재상.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오나라의 부차를 멸망시키자 구천으로부터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갔다. 범려는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꾸어 제나라에 출사하여 벼슬이 상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목축을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스스로를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했다. 후세에 전하는 <치부기서(致富奇書)>라는 책은 도주공이 쓴 것이다.

114)의돈(猗頓) : 노나라의 거부(巨富)로 원래 가난하게 살다가 도주공이 많은 부를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치부의 도를 물었다. 도주공이 그에게 목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하서의 의씨(猗氏) 땅으로 가서 소와 양을 길러 10년 만에 거만금의 대부호가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일설에는 염업을 일으켜 부호가 되었다고 했다.

115) 수노(收帑) : 고대의 연좌법(連坐法)으로써 집안의 가장이 죄를 짓게 되면 그 처와 자녀는 모두 관가의 노비가 되는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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