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자앙 시선 [ 陳子昻詩選 ] > 초당

진자앙 시선 [ 陳子昻詩選 ]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1,480회 작성일 11-11-07 18:18

본문

진자앙 시선 [ 陳子昻詩選 ]

송용준(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1.

중국 시의 전개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당연히 ≪시경(詩經)≫에서부터 시작하겠지만 중국 시사(中國詩史)에서 당시(唐詩)의 형성에 대해 언급할 때는 대부분 한말(漢末)의 건안1) 시(建安詩)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찍이 거샤오인(葛曉音)도 <초ㆍ성당(初ㆍ盛唐) 시가(詩歌) 혁신의 기본 특징>에서 당시 시가 혁신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여러 단계를 거친 초ㆍ성당 시가 혁신의 발전 과정을 보건대,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일으킨다”는 건안 시대 삶의 이상의 회복, “잘된 것을 찬양하고 잘못된 것을 풍자”하는 전통적 풍아관(風雅觀)의 탈피, 창작과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의 점차적 극복, 내용과 미적 형식에서의 계승과 혁신에 대한 정확한 대응, 건강한 심미적 표준에 의한 제(齊)ㆍ양(梁) 시기 시가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비판적 계승 등은 성당 시의 이상주의적 경향과 낙관적이고 앙양된 기조를 형성시켰으며, 나아가 성당 시로 하여금 남조(南朝)의 문채(文采)에 한(漢)ㆍ위(魏)의 풍골(風骨)2)이 융합된 완미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초ㆍ성당 문인들이 화려한 문풍(文風)에 반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며, 초ㆍ성당의 시가 혁신이 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여타 시대의 시가 혁신 운동과 구별되는 기본적인 특징이다.3)




실제로 대부분의 문학 사가들은 성당에 이르러 시인들이 건안의 풍골과 제ㆍ양의 표현미를 결합시킨 것이 내용과 형식을 겸비한 성당 시를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한대(漢代)의 악부시(樂府詩)4)를 살펴보면 당시의 사회문제를 반영하고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이 적지 않은데, 건안의 시인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둘을 통일시켜 동한(東漢) 문인들의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인생관을 건강하고 긍정적인 인생관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은 이상과 현실의 모순 속에서 적극적인 현실 참여를 통해 국가와 인민을 구하고, 자신이 처한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고 비판함으로써 인생의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찾고자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건안 풍골(建安風骨)5)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라는 격변의 시대에서 작가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상이한 내용으로 표현되었다. 조조(曹操)ㆍ조비(曹丕)ㆍ조식(曹植)과 건안칠자(建安七子)6) 등은 신구 왕조(新舊王朝)의 교체기에 사회 동란을 종결짓고 이상적인 정치를 회복할 것을 사명으로 삼아 남다른 호기와 기백을 보여주었고, 완적(阮籍)ㆍ혜강(嵇康)ㆍ좌사(左思)ㆍ도연명(陶淵明)ㆍ포조(鮑照) 등은 시대 격변 속에서 젊은 시절에 지녔던 이상의 실현이 불가능해지자 회의와 부정으로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진보적 문인들의 작품은 모두 인생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들이 선택한 길이 현실 참여이건 은둔이건 방황이건 간에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사고와 불후한 명성 추구를 출발점으로 삼았으니, 그것이 바로 건안 풍골의 기본 정신이며 진(晉)ㆍ송(宋) 이전 ‘한(漢)ㆍ위(魏) 흥기(興寄)’7)의 핵심 내용이다.




진ㆍ송 이후 건안 풍골이 점차 사라지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 상황 및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정신 면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진(西晉)의 통치자들은 정권 찬탈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민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토해내는 애원(哀怨)의 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황제의 덕정(德政)에 의한 태평성대를 찬미하고 칭송하는 시가를 요구했다. 그에 따라 비판과 풍자가 시가에서 배제되고 전아(典雅)한 말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대(漢代) 유가(儒家) 시가 이론의 핵심 사상인 시교설(詩敎說)8)이 찬미와 풍자를 함께 중시하는 데서 찬미와 칭송 위주로 바뀐 것이 시가가 갈수록 아화(雅化)되고 경직된 원인이다. 서진 이후 시교설은 한ㆍ위 악부시가 지녔던 현실 비판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아하고 교조적이며 판에 박힌 시풍(詩風)을 조장할 뿐이었다.9)




한편 서진 이후 제왕(帝王)ㆍ종실(宗室)ㆍ귀족(貴族)과 대사족(大士族) 등이 문단을 독점했는데, 그들의 특권 의식은 사상 감정의 빈곤을 초래했고, 찬탈이 빈번히 자행된 시대 환경 속에서 문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무감각해져 버렸다. 사족(士族)과 한족(寒族)10)을 막론하고 더 이상 인생의 의미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진지한 태도로 생각하지 않았고, 문인들은 일신의 안락과 영화를 추구하며 정치 변란이 자신에게 가할지도 모를 재앙을 두려워했다. 그런 정신 속에서 남북조 문인들은 건안 풍골을 계승하는 대신 제왕을 모신 자리에서 응조시(應詔詩)11) 및 신변잡사를 가영(歌詠)하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한정시(閑情詩)를 대량으로 창작했다. 이렇게 해서 진ㆍ송 이전 사상 감정의 표현에 치우쳤던 서정시가 교제와 심심풀이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서진의 문인들이 찬미와 칭송의 시가 관념에 사로잡혀 단조로운 아송체(雅頌體)의 시가를 창작하고, 악부와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아화(雅化)시켜 초기 악부 고시(古詩)의 소박하고 통속적이며 평이한 본래 면모를 상실했을 때, 사조(謝脁)와 심약(沈約)을 대표로 하는 제ㆍ양 문인들은 진ㆍ송 교체기에 탄생한 남조 악부민가(樂府民歌)에서 제련해 낸 새로운 시가 언어가 문인 시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12) 아울러 남조 민가의 언어가 평이하고 낭송이 순조로운 특징과 진ㆍ송 이래 대장(對仗)13과 언어의 표현미를 추구하는 경향을 결합시키고, 당대의 구어 속에서 성률의 규칙을 제련해 내 근체시의 전신(前身)인 영명체(永明體)14를 탄생시켰다.




그 후 청려한 언어, 유장한 성정(聲情)과 신기한 구상으로 시를 쓰는 것이 양(梁)ㆍ진(陳)의 시인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한 예술적 경향이었다. 그에 따라 자구(字句)의 조탁을 통해 각종 율시(律詩)의 구식(句式)이 점차 형성되었고, 율시와 근사한 5언 8구체와 5언 4구의 소시가 대량으로 출현해 12구 이상의 중편 고시(中篇古詩)를 대신했으며, 진ㆍ송 때에는 아직 속체(俗體)로 보였던 7언 시와 5언 가행이 점차 5언과 함께 중시되는 형식이 되었다. 아정(雅正)한 4언체 시는 기본적으로 시단에서 물러났고, 다만 소수의 공연시(公宴詩)와 교묘가사(郊廟歌辭) 속에 남게 되었다. 진(陳)ㆍ수(隋) 시기에 배우(排偶)의 기풍과 변문(騈文)이 동시에 극성으로 치달아 신체와 고체가 모두 변려화(騈儷化)되는 과정에서 7언 가행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그 결과 5언은 모두 미완성의 율시처럼 되었고, 7언은 미완성의 가행처럼 되었다. 이른바 근체시는 제ㆍ양의 시가 남조 악부민가의 학습을 통해 전아하고 난삽한 진ㆍ송의 시풍을 변혁하고 당대의 구어에서 청신자연(淸新自然)한 시가 어휘를 제련한 후, 양ㆍ진 시기에 다시금 아화되고 내용ㆍ형식ㆍ격조상에서 화려한 문풍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 변화는 제ㆍ양에서 성당에 이르는 200년간 시가 언어의 기본 풍모 및 표현 예술상에서 몇몇 중요한 특징을 결정했다.




2.

당대(唐代)에 들어와 시는 초당에서 성당을 향해 나아가며 자각적인 혁신 과정을 거쳤다. 사람들은 전대 시가에 대한 결산과 평가를 통해 점차 건안 시가의 풍골을 학습하고 제ㆍ양의 문풍을 비판할 필요성을 인식했고, 성당에 들어서서는 건안 풍골과 제ㆍ양의 형식미와 표현미를 결합시킨다는 공통된 인식이 형성되었다. 성당의 시가가 형식과 내용을 함께 잘 갖춘 이상적인 풍모를 형성한 것은 이 혁신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 왕조 건립은 400여 년간의 사회적 혼란을 종식시켰고, 육조(六朝)와 수(隋)가 망한 교훈을 되새겨 정치와 문풍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사상 감정을 표현하는 진지한 내용과 강건한 풍골이 결핍된 제ㆍ양의 화려한 문풍을 바로잡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 태종(太宗)과 정관(貞觀, 627∼649) 시기의 중신(重臣)들은 대부분 관용과 변증의 태도를 취해 문예가 정치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전통적 편견을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제ㆍ양 이후로 누적된 화려한 문풍의 위세가 수그러들지 않았고, 태종 자신이 남조 문화에 대한 경모에서 많은 제량체(齊梁體) 시를 지었기 때문에 제ㆍ양의 유풍을 청산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그들은 왕정의 찬미와 칭송을 아음(雅音)15)으로 생각하고, 아음은 반드시 우아하고 화려해야 한다는 유가의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당시 형성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된 건안 정신을 경시하거나 부정했다. 그 결과 내용적으로 태평성대를 찬송하면서 대우(對偶)와 화려한 표현에 심혈을 기울인 상관체(上官體)16)가 용삭(龍朔, 661∼663) 연간에 출현했다.17) 이와 같이 당초의 군신(君臣)은 내용 개조를 통해 이전의 문풍을 개혁하려고 했지만 태평성대와 왕정을 찬양하고 군주에게 권면하는 내용의 시들이 정치와 교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이후의 시에 나타나는 건안 풍골을 창작 속에 담아내지 못했다.




상관의가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죽임을 당한 후 상관체를 “기골이 모두 사라지고, 강건함을 찾아볼 수 없다”18)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창작을 통해 현실 속 삶의 내용과 원대한 이상을 표현함으로써 건안 정신을 계승한 초당사걸(初唐四傑)19)에 의해서 당시는 혁신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그들의 시를 읽어보면 정관 시기 이래 세상과 시대를 바로잡고 구하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위업과 공덕을 찬미하며, 교만과 광영에의 안주를 경계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들이 궁정문학과 다른 점은 환상과 열정, 그리고 “성명(聖明)이 펼쳐지는 시대에 초야에 묻혀 지내는 것”20)을 달가워하지 않는 참여 정신과 그것이 실현되지 못했을 때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는 것인데, 이러한 기골이야말로 초당 시풍 변화의 핵심이다. 그것은 “빈천함을 달게 여기고 세월이 흘러감을 애석해하며, 공명심을 가슴에 품고 흘러가는 세월에 슬픔을 느낀다”21)라고 하는 인생의 의기(意氣)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으로부터 시작되어 건안의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줄곧 계승되었던 풍아(風雅) 정신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22) 왕발(王勃)은 자신의 문학 사상을 <상이부배시랑계(上吏部裴侍郞啓)>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이 끊어진 후로 도의(道義)의 문장은 떨치지 못했습니다. 굴원과 송옥은 경박한 풍조의 근원을 앞에서 이끌었고, 매승(枚乘)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음풍(淫風)을 뒤에서 퍼뜨렸습니다. 군주(君主)를 이야기하는 자는 궁실(宮室)과 원유(苑囿)의 웅장함을 언급하고, 명사들을 언급하는 자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무례하고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달관했다고 말합니다. 위(魏) 문제(文帝)가 그들을 등용했던 까닭에 중원이 쇠퇴했고, 송(宋) 무제(武帝)가 그들을 귀중히 여겼기 때문에 강동(江東)이 혼란에 빠졌던 것입니다. 심약과 사조는 문장을 다투었지만 결국 제ㆍ양의 불길한 징조가 되었을 뿐이고, 서릉(徐陵)과 유신(庾信)은 함께 문장을 떨쳤지만 주(周)ㆍ진(陳)의 재앙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따라 이치를 깨달은 자들은 혀를 움츠리고 말하지 않았고, 폐단을 간파한 자들은 옷을 털고서 급히 떠나가 버렸습니다. <잠부론(潛夫論)>23)과 <창언(昌言)>24)의 글은 그것을 지어서 시대에 역행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주공(周公)과 공자의 가르침은 후대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시행되질 않았으니 천하의 문장은 파괴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25)




이처럼 왕발에게 있어서 올바른 문장이란 도덕 교화를 선양하고, 정치사회에 도움을 주는 공용성을 지녀야 했다. 따라서 그는 공자가 죽은 후 문풍이 쇠미해지기 시작해 굴원으로부터 남조 말에 이르기까지 음염(淫艶)한 문풍이 성행한 시기로 간주하고 그 문학적 가치를 모두 부정했으니, 그가 건안 정신의 실질적 내용을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6) 이 점이 초당사걸의 창작과 이론 사이의 모순이며 한계였다. 그러나 그들의 시가는 이론의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작을 통해 건안 문학의 전통을 계승해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3.

초당사걸 이후 당시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진자앙(陳子昻)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문학 정신에 있어서 건안의 기골과 제ㆍ양의 문풍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해 초당사걸이 극복하지 못했던 이론과 창작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당초의 상관체로부터 문장사우(文章四友)27)와 심전기(沈佺期)ㆍ송지문(宋之問)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발전해 온 궁정의 형식주의 문풍을 비판했고, 잘된 것을 찬양하고 잘못된 것을 풍자하는 유가의 풍아관을 탈피해 한ㆍ위의 풍골과 흥기를 시에 담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죽편서(修竹篇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의 우수한 전통이 쇠퇴한 지 500년28)이 되었습니다. 한ㆍ위의 풍골이 진ㆍ송대에는 전해지지 않게 되었으나 문헌이 남아 있어 그것을 증명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한가할 때 제ㆍ양대의 시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미사여구와 전고의 다용을 다투어 비흥기탁(比興寄托)29)이 완전히 끊어졌으니, 언제나 그 때문에 길게 탄식하며 옛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사모했고, 후대로 갈수록 퇴폐해져서 시가 창작의 우수한 전통30)이 출현하지 못할까 봐 늘 불안했습니다. 어제 해삼(解三)31)의 집에서 명공(明公)32) 동방규(東方虯)33)의 <영고동편(詠孤桐篇)>34)을 보았는데, 골기(骨氣)35)가 드러나고 소리와 감정이 드날리어 빛나고 깨끗하며 악기의 소리가 나는 듯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마음을 씻고 눈을 밝혀서 마음속 깊은 곳의 울분을 토로한 것입니다. 뜻밖에도 위대(魏代) 정시(正始) 시기의 음률36)을 다시 여기서 보게 되었으니, 건안 연간의 작가들로 하여금 서로 바라보며 웃게 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37)38)




진자앙은 이 글에서 제ㆍ양의 시가 “미사여구와 전고의 다용을 다투어 흥기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비판하고, 시가 혁신의 관건이 건안 문인들의 원대한 포부와 기개를 회복해 시 속에 한ㆍ위의 풍골과 흥기를 표현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한ㆍ위의 풍골과 흥기야말로 세상과 시대를 구하고자 하는 삶의 이상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세상과 시대에 대한 구원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삶의 의미에 대한 탐색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공을 세우고 이상적 정치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강렬한 추구로 구체화하는 한편, 현실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인식하에 관직에 나서거나 물러서거나 절조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진자앙은 비록 시가의 내용 면에서 복고 속의 혁신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지만, 미적 형식의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그는 아름답고 화려한 수식을 중시하는 제ㆍ양의 글쓰기를 비판하고, 그 결과 제ㆍ양 이후 시가의 예술적 형식에 있어서의 새로운 변화를 무시했다. 그의 <감우시(感遇詩)> 38수는 완적의 <영회시(詠懷詩)>를 모방해 내용적으로는 인생의 참뜻과 시대적 사명을 탐색하고, 형식적으로는 비유에 이치를 담아내는 비흥 상징의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러면서 그는 예술적 형식에 있어서도 한ㆍ위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 방면에서 그의 복고는 비유를 통해 이치를 논하고 감정을 실어내는 표현 방식을 회생시키는 것이었는데, 그의 창작 실천을 통해 볼 때 이것은 그다지 큰 개혁의 의미를 지닐 수 없었다.39) 교연(皎然)이 <복고통변체(復古通變體)>에서 “심전기와 송지문의 시는 복고가 적고 변화가 많지만, 진자앙의 시는 복고가 많고 변화가 적다”40)라고 지적한 것처럼 계승과 혁신의 관계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실천해 시가의 내용과 형식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당시를 완성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은 성당 시인들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진자앙 이후 초ㆍ성당 교체기에 당시의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장열(張說)과 장구령(張九齡)이 있다. 장열은 진자앙과 동시대인으로 주로 측천무후 후기부터 현종(玄宗) 전기까지 정단(政壇)과 문단(文壇)에서 활약했는데, 성당의 많은 문인들이 흠모했던 문종(文宗)이었다. 그는 굴원ㆍ송옥 이래 역대 문학에 대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고, 왕발ㆍ양형ㆍ진자앙 등의 혁신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편협한 면을 경계했다.41) 그는 시를 지을 때 문채와 풍골을 병중하고, 전아와 자미(滋味)를 함께 고려하고, 내용과 풍격의 다양화를 고취했으며, 성당의 시가가 ‘천연장려(天然壯麗)’ 위주의 심미 이상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42) 이렇듯 그는 진자앙보다 명쾌하게 풍골ㆍ풍아의 함의와 예술 혁신의 표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으며, 충실한 창작 실천을 통해 건안 정신을 발휘했다.




장구령은 정치와 문학에서 장열과 뜻을 같이해, 가의ㆍ사마상여ㆍ조식ㆍ왕찬 등이 풍아를 어그러뜨렸다고 생각하는 왕발ㆍ양형 등의 편파적인 정통 관념에 반대했다.43) 장구령의 <감우시(感遇詩)> 12수를 보면 관직에서 물러나 절조를 지키는 한편 적막한 자신의 처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현사(賢士)의 회한을 서술하는 것을 중심 의도로 삼고 있어서, 그가 말하는 ‘수사(愁思)’와 ‘원자(怨刺)’가 주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에 대한 지식인의 감각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열과 장구령에 뒤이어 등장한 성당의 시인들은 실제 창작에서 큰 성과를 거둠으로써, 시가의 내용과 형식에서 이중의 혁신을 이루어냈다. 그들은 인생의 의기를 노래하는 것과 태평성대에 대한 가영을 통합시킴으로써 대아(大雅)와 송(頌)의 노래를 건안의 풍골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고, 사상과 예술 방면에서의 복고와 혁신을 깊이 있게 탐구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으며, 한ㆍ위의 풍골을 남조의 문풍에 융합시켜 성당의 소리로 바꿈으로써 장려하고 웅대하면서도 평이하고 자연스러운 이상적인 시가 풍모를 만들어냈다.




그들이 이러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진자앙ㆍ장열ㆍ장구령 등의 문학 사상과 성취를 계승하는 한편, 개원(開元)의 태평성세가 불러일으킨 새로운 시대정신이 그들에게 도량이 넓고 포부가 원대하며 꿈과 자신감이 가득한 공통의 심성과 풍모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성당 시가의 풍골은 공업(功業)을 세우는 영웅의 기백을 핵심으로 했고, 그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가지 감정을 서술하는 데에서도 드러났다. 그들이 시로 표현한 것이 산림에 은거하는 세속을 초월한 심정이건 외지로 가 객지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이별의 슬픔이건 간에 그 속에는 언제나 궁달(窮達)에 개의치 않는 절조와 같은 고매한 정신적 경지를 찬미하는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성당 문인들의 예술 관념이 매우 유연했기 때문에, 그들은 진자앙이 제ㆍ양의 시문에 지나치게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했던 편향을 이론적으로 바로잡고, 남조의 풍부한 형상 묘사 속에서 한ㆍ위의 풍골과 성령(性靈)을 표현해 냈다. 그들은 제ㆍ양 이래로 객관적인 미감 속에서 곧바로 흥취를 찾던 표현 방식을 계승했고,44)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요구해 “형상을 구함에 마음이 그 경계로 들어가고, 정기가 사물에 모이니 마음을 따라 사물을 얻는다”45)고 강조했다. 따라서 성당 시인들이 감회와 뜻을 표현할 때는 대부분 형상에서 자연스럽게 흥기의 내용을 이끌어냈으며, 진자앙의 <감우시>와 같이 형상을 가지고 비유적 의미를 설명하는 비유 방식을 채용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한ㆍ위 문풍과 제ㆍ양 문풍의 융합, 영웅의 기백과 목가적 정조의 통합은 성당의 문인들로 하여금 장려하고 웅혼하고 자연스럽고 청신한 것을 높이 사는 심미적 취향을 보편적으로 형성하게 했다. 그들은 한ㆍ위 문학으로부터 흥기가 깊고 오묘한 점, 기상이 웅혼한 점,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점 등의 장점을 취하는 한편, 지나치게 관찰이 일반적이고 표현이 솔직담백하다는 단점을 피했다.




또한 제ㆍ양의 시로부터 정서가 완곡하고 언어가 맑고 아름다우며, 시구를 다듬고 경계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는 장점을 흡수하는 한편, 시야가 협소하고 묘사가 지나치게 세밀하며 정조에 활기가 없다는 병폐를 버려 미묘한 정서를 치밀한 구도 속에 배치해 넣고, 시인의 개성을 전형적인 의경 속에 융합시켰으며, 밝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전체적인 인상을 총괄했으니, 이와 같은 계승과 창신(創新)이 성당 시로 하여금 기상이 웅대하고 의경이 깊고 넓으며 아름다움이 빼어나고 정이 깊고 운(韻)이 빼어난 공통의 풍모를 갖게 했다.46)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형성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졌다. 한대 이후 위진 남북조를 거치면서 당대의 시인들은 전대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했고, 새로운 시대정신의 바탕 위에 어떤 측면에서는 후인들이 능가할 수 없는 시적 세계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4.

진자앙의 작품은 없어진 것이 많아 현재 전해지는 것은 시 127수와 문(文) 110여 편에 불과하다. 현존하는 진자앙의 시 중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감우시> 38수와 <등유주대가(登幽州臺歌)>일 것이다. 그런데 이 38수의 <감우시>는 진자앙이 한 시기 한 장소에서 지은 것이 아니다.47) 지금 전해지는 <감우시>의 편차를 보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별로 배열되어 있지도 않아서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만약 진자앙 자신이 순서를 정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노장용(盧藏用)이 ≪진백옥문집(陳伯玉文集)≫ <서(序)>에서 “좋은 벗이 죽었으니, 하늘이 나를 죽인 것이로다. 이제 그가 남긴 글 중에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을 수집해 편차를 정해 엮으니 모두 10권이다”48)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감우시> 38수는 진자앙이 죽은 뒤에 노장용이 편정했을 것이다.




<감우시>의 사상과 내용은 크게 두 방면으로 귀납할 수 있다. 먼저 그의 <감우시>는 측천무후 시기의 각종 실정을 비판했다. 예를 들어 제19수 <성인은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에서는 백성의 재산을 멋대로 낭비하는 무씨(武氏) 집단을 비판했고, 제9수 <성인은 천명을 비밀로 했다>에서는 참위설(讖緯說)의 사기를 폭로하면서 봉건 통치자의 어리석음을 비판했다. 또한 제3수 <멀고 아득한 정령족의 요새>, 제29수 <정해년이 저물어갈 때>, 제34수 <북풍이 발해의 나무에 불어오니>, 제37수 <아침에 운중군에 들어가서>는 일종의 변새시(邊塞詩)로서, 병사들의 애국정신을 찬양하는 한편 통치자의 상벌이 공정하지 않음을 견책했고, 또한 변방의 방위에 힘쓰지 않는 것과 무력 남용을 비판했다.




다음으로 <감우시>는 시인 자신의 모습을 그려냈다. 제11수 <나는 귀곡자 선생을 사랑하나니>에서 그는 귀곡자(鬼谷子)49)를 자신에 비유해 “어찌 산속의 나무처럼 장수하고, 부질없이 사슴과 어울리기를 꾀하랴?”라고 선언했다. 또한 제35수 <본래 귀공자로 태어나서>에서 그는 “시국의 위험을 느껴 보국의 일념으로, 검을 뽑아 들고 초야에서 일어났다. 서쪽 정령 새로 말을 달리고, 북쪽으로는 선우대에 올랐다”라고 하여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우고자 하는 의욕을 표명했다. 그러나 측천무후와 무씨 집단에 실망하고 의기가 꺾이고 나서는 “굽은 길을 가는 기풍은 오래되었고, 곧은길을 가는 정신은 소멸되었다”(제18수), “중상모략하며 서로 잡아먹으려 들고,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마구 속인다”(제10수)라고 혼탁한 세상을 통박하고는 “밧줄 하나로 무엇을 매달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취한 듯 지탱할 수 없다”(제20수)라고 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구할 힘이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을 종합해 보면 진자앙의 <감우시>는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폭로하고 백성의 고통을 동정하는 등 현실을 반영하는 깊이와 폭에 있어서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보다 앞서 갔을 뿐만 아니라 완적의 <영회시>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다.




<감우시> 외에도 진자앙은 두 차례에 걸쳐 원정군에 참여해 몇 편의 우수한 시를 썼다. 그는 <사산봉의 나무에 써서 교지지 시어께 드림>에서 “한 왕조는 권세에 아부하는 신하를 높이고, 조정에서는 변방의 전공을 중시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통치 집단의 부패와 무능을 직접적으로 비판했고, <계구루에 올라 도성으로 들어가는 가 병조를 전송하며>에서는 고적(古迹)에 대한 추모를 통해 현인들을 회고함으로써 때를 만나지 못해 자신의 웅지를 펴지 못하는 감개를 서술했고, <유주의 누대에 올라>에서는 끝없이 전개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시인의 정치 이상과 암담한 현실의 심각한 모순을 담아내며 당시의 유능한 지사들이 겪었던 공통의 비극을 개괄했다.




이 밖에도 시인은 <형문산을 지나 초 땅을 바라보며>에서 촉(蜀) 땅에서 초(楚)로 들어가는 산천의 경물을 핍진하게 묘사했고, <휘 상인이 가을밤 산속 정자에서 보내준 시에 답함>에서는 가을밤의 그윽한 경치를 한 폭의 그림같이 그려냈고, <동래의 왕무경 학사를 전송하며>에서는 진지한 우정을 정감 있게 서술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진자앙의 우수한 작품들은 풍부한 사회적 내용과 강렬한 저항 의식을 갖추고 있다.




예술 기교 방면에서 진자앙은 ≪시경≫과 굴원 부(賦)의 비흥 수법을 이어받아 묘사 대상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했고, ‘한위 풍골(漢魏風骨)’과 ‘정시지음(正始之音)’을 창도해 웅혼침울(雄渾沈鬱)하며 강건질박(剛健質朴)한 풍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는 오언고시에 가장 뛰어나 초당의 시단에서뿐만 아니라 당대(唐代) 시단 전체에서도 걸출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명대(明代)의 고병(高棅)은 ≪당시품휘(唐詩品彙)≫에서 대략 초당을 ‘정시(正始)’로 간주하고 성당을 ‘정종(正宗)’으로 간주했는데, 진자앙의 시는 파격적으로 정종에 편입시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진자앙의 시는 내용에 비해 예술 기교의 성과가 적어서 형상이 풍부하지 못하고 수사 기교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며 형식도 다양하지 못해서 그의 현존 작품에는 악부시도 없고 칠언시도 없다. 진자앙 당시에 칠언시는 이미 날로 성숙해 강한 생명력을 보이고 있었는데도 진자앙은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자앙의 시가 예술 방면에서 보이는 결점이다. 이런 결점이 조성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론과 창작 실천에서 ‘풍아’와 ‘한위 풍골’의 전통을 계승할 것을 강조했을 뿐, 상대적으로 창신을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섭섭(葉燮)은 “진자앙의 고시는 한ㆍ위의 길을 답습할 것을 숭상해 결국 전부가 완적의 <영회시> 같아져서 자신의 고유한 형상을 잃었다”50)라고 평가했다. 동시에 진자앙이 육조의 형식주의 시풍에 대해 비판한 것은 필요하고도 마땅한 것이지만, 한편 그는 진ㆍ송 이래의 우수한 시인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소홀히 해 전대(前代) 여러 시인들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




진자앙의 시가 특히 예술 기교 방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의 공적과 후대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는 기치가 선명한 이론과 현실주의적인 내용의 시를 써서 당시가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개척했으니, 그의 위상은 중국 시사(中國詩史)에서 길이 빛날 것이다.




각주


1) 한(漢) 헌제(獻帝) 유협(劉協)의 연호로서 서기 196년부터 220년까지다. 그러나 중국 문학사상의 건안 시기는 이보다 길어서 대체로 조조(曹操)ㆍ조비(曹丕)ㆍ조예(曹叡)가 정권을 잡고 있던 40∼50년간을 가리킨다.

2) 한ㆍ위의 풍골이란, 한말(漢末) 건안 시대 문학 창작상의 특징을 가리킨다. ‘풍(風)’은 글에 녹아 있는 감정과 기세가 빼어나고 활달할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골(骨)’은 언어 사용이 단정하며 적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3) 葛曉音, ≪漢唐文學的嬗變≫(北京大學出版社, 1990), 85쪽.

4) 원래는 한대에 음악을 주관하던 관서인 악부(樂府)에서 수집하거나 제정한 시가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나중에는 이를 포함하여 위(魏)ㆍ진(晉)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배합할 수 있는 시가와 악부고제(樂府古題)를 모방한 작품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송(宋) 이후의 사(詞)ㆍ산곡(散曲)ㆍ극곡(劇曲)도 음악에 배합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악부’라고 불렸다.

5) 한(漢)ㆍ위(魏) 교체기의 조조(曹操) 부자와 건안칠자 등이 쓴 시문(詩文)의 강건하고 굳센 풍격.

6) 한(漢)나라 말기에 문학가로 유명했던 공융(孔融)ㆍ진림(陳琳)ㆍ왕찬(王粲)ㆍ서간(徐幹)ㆍ완우(阮瑀)ㆍ응창(應瑒)ㆍ유정(劉楨)의 7인을 가리킨다.

7) 작품 속에 깃든 사상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8) ≪모시(毛詩)≫ <서(序)>의 “치세의 음악은 편안하면서도 즐겁고 정치는 조화를 이루며, 난세의 음악은 원망스럽고 노여우며 정치는 도리에 어긋나고, 망국의 음악은 슬프고도 애틋하며 백성은 곤경에 빠진다. 그러므로 정치의 잘잘못을 바로잡고,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데에는 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선왕들은 이것으로써 부부 사이를 다스리고, 효도와 공경을 이룩했으며, 인륜을 두텁게 하고, 교화를 아름답게 하고, 풍속을 훌륭하게 이끌었다(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故正得失, 動天地, 感鬼神, 莫近於詩. 先王以是經夫婦, 成孝敬, 厚人倫, 美敎化, 移風俗)”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문예가 정교(政敎)의 흥폐(興廢)와 풍속의 후박(厚薄)에 관련되므로 시가가 정교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교설의 핵심 사상이다.

9) 한유(漢儒)가 말한 풍유 작용이 원망과 풍자의 소리가 황제의 귀에까지 전달되는 것을 포함해 통치자가 정치의 득실을 살피도록 촉구했다면, 서진의 유가(儒家)가 말한 풍유는 공허한 설교와 겉치레의 교훈에 불과해 진정으로 시폐(時弊)를 언급하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

10)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한 문벌.

11) 위(魏)ㆍ진(晉) 이래 제왕의 명에 응해 지은 시.

12) 송(宋) 왕직방(王直方)의 ≪왕직방시화(王直方詩話)≫에서 “사조가 일찍이 심약에게 ‘좋은 시는 탄환처럼 원숙하고 아름다우며 유창하다(好詩圓美流轉如彈丸)’라고 말했다”라고 했고,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문장(文章)>에서 “심약은 ‘문장은 응당 세 가지 쉬움을 따라야 하니, 전고를 쉽게 볼 수 있고, 글자를 쉽게 알 수 있고, 송독이 쉬워야 한다(文章當從三易: 易見事, 一也; 易識字, 二也; 易誦讀, 三也)’라고 말했다”라고 했다.

13) 근체시 격률의 한 가지로, 한 연(聯) 속의 출구(出句)와 대구(對句)에서 구식(句式)과 마주 보는 글자의 품사적 성질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14) 남조(南朝) 제(齊) 무제(武帝) 영명(永明) 시기에 형성된 시체로서 성률의 강조에 특징이 있으며 근체시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5) 바른 소리. 백성의 교화에 유익한 시가와 음악.

16) 상관의(上官儀)는 고종(高宗) 때 뛰어난 문재(文才)를 인정받아 궁정시인으로 중용되면서 궁정시의 정형을 확립했다. 당시의 문인들은 상관의의 시체(詩體)를 모방해 시를 지었는데, 이러한 시체를 일러 상관체라 하며 주로 당초(唐初)의 궁정시체(宮庭詩體)를 지칭한다. 상관의는 5언의 응제시(應製詩)에 뛰어났으며, 그의 시는 극도의 기교를 추구해 대우의 활용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그러나 상투적인 표현과 감정 남발이라는 결점을 지니고 있다. 상관 시의 이러한 성격은 상관체에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17) 전고(典故)의 출전과 미사여구의 활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던 ≪문사박요(文思博要)≫, ≪북당서초(北堂書鈔)≫, ≪예문유취(藝文類聚)≫, ≪요산옥채(瑤山玉彩)≫ 등의 서적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8) “骨氣都盡, 剛健不聞.” 양형(楊炯), ≪왕발집(王勃集)≫ <서>

19) 초당의 시인 왕발(王勃)ㆍ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의 네 사람을 병칭한 것이다.

20) “憔悴于聖明之代.” 왕발, <하일제공견심방시서(夏日諸公見尋訪詩序)>

21) “撫窮賤而惜光陰, 懷功名而悲歲月.” 왕발, <춘사부(春思賦)>

22) 왕발은 <상리부배시랑계(上吏部裴侍郞啓)>에서 “굴원과 송옥이 앞에 서서 천박함의 기원을 이끌어냈고, 매승과 사마상여가 뒤에서 음란함을 널리 퍼뜨렸다(屈宋導澆源于前, 枚馬張淫風于後)”라고 했고, 양형은 <왕발집서(王勃集序)>에서 “가의(賈誼)와 사마상여가 나타나자 이에 아송(雅頌)이 어그러졌고, 조식과 왕찬(王粲)이 등장하자 풍소(風騷)마저 사라졌다(賈馬蔚興, 而虧于雅頌, 曹王杰起, 更失于風騷)”라고 했다.

23) 동한의 왕부(王符)가 지은 것으로, 당시 정치의 득실을 평론하고 미신을 반대했다.

24) 동한의 중장통(仲長統)이 지은 것으로, 고금 및 시속(時俗)의 행사에 대해 논했다.

25) “自微言旣絶, 斯文不振. 屈, 宋導澆源於前, 枚, 馬張淫風於後. 談人主者, 以宮室苑囿爲雄; 叙名流者, 以沉酗驕奢爲達. 故魏文用之而中國衰, 宋武貴之而江東亂. 雖沈, 謝爭鶩, 適先兆齊, 梁之危; 徐, 庾並馳, 不能免周, 陳之禍. 於是識其道者卷舌而不言, 明其弊者拂衣而徑逝. <潛夫>, <昌言>之論, 作之而有逆於時; 周公, 孔氏之敎, 存之而不行於代. 天下之文, 靡不壞矣”(≪왕자안집(王子安集)≫ 권4).

26) 노조린(盧照隣)의 ≪남양공집(南陽公集)≫ <서>와 낙빈왕(駱賓王)의 ≪화학사규정시(和學士閨情詩)≫ 등에서 드러난 그들의 선진(先秦)에서 육조(六朝)까지의 문예를 보는 관점은 왕발이나 양형의 그것보다는 공정해서, 노조린은 선진의 굴원과 송옥, 한(漢)의 가의와 사마상여, 위(魏)의 유정(劉楨), 진(晉)의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송(宋)의 안연지(顔延之)와 포조, 제(齊)의 강엄(江淹)과 사조, 북주(北周)의 노사도(盧思道), 양(梁)의 유견오(庾肩吾) 등에 대해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낙빈왕은 양한(兩漢)에서 위ㆍ진에 이르는 각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특히 조식과 육기를 높이 평가했지만, 동진(東晋) 이하는 안연지와 사령운(謝靈運)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27) 초당의 두심언(杜審言)ㆍ이교(李嶠)ㆍ최융(崔融)ㆍ소미도(蘇味道)의 네 사람을 가리킨다.

28) 진(晉)나라로부터 진자앙이 이 시를 지은 초당 무렵까지 약 430년 정도가 지났다. 여기서 500년이라고 한 것은 개략적인 수를 말한 것이다.

29) 원문의 ‘흥기(興寄)’로, 비유와 상징의 수법을 사용해 시인의 정치적 회포를 기탁하는 것을 말한다.

30) 원문의 ‘풍아(風雅)’로, 원래는 ≪시경≫ 중의 <국풍(國風)>, <대아(大雅)>, <소아(小雅)>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시가 창작의 우수한 전통을 가리킨다.

31) 해삼은 진자앙의 벗인데, 이름은 알 수 없다. ‘삼(三)’은 형제의 항렬이 세 번째라는 말이다.

32) 명성과 지위가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

33) 동방규는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ㆍ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역임했고, 진자앙이 낙양의 관직에 있을 때 그와 왕래가 있었다.

34) 동방규가 지은 시의 제목이다.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35) 문학작품의 강건하면서도 질박한 언어와 기세를 가리킨다.

36) 원문의 ‘정시지음(正始之音)’으로, 여기서는 삼국시대 위나라 정시 시대의 대표 작가인 완적과 혜강의 시가를 가리킨다. 진자앙은 그들이 건안 문학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정시는 위 제왕(齊王) 조방(曹芳)의 연호(240∼248)다.

37) 이 구절은 동방규의 <영고동편>이 정시 시대의 작품과 풍격이 비슷해 건안의 작가들을 벗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다는 말이다.

38) “文章道弊五百年矣! 漢魏風骨, 晉宋莫傳, 然而文獻有可徵者. 僕嘗暇時觀齊梁間詩, 彩麗競繁, 而興寄都絶, 每以永嘆. 思古人常恐逶迤頹靡, 風雅不作, 以耿耿也. 一昨于解三處見明公<詠孤桐篇>, 骨氣端翔, 音情頓挫, 光英朗練, 有金石聲. 遂用洗心飾視, 發揮幽鬱. 不圖正始之音, 復覩于玆, 可使建安作者相視而笑.”

39) 거샤오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시 가운데는 ‘난약(蘭若)이 피어나니 봄여름이라(蘭若生春夏)’, ‘비췻빛이 남해에 둥지를 틀다(翡翠巢南海)’ 등의 예술적 성취가 비교적 높은 것들도 있지만, 형상을 가지고 자신의 현리(玄理)적 사변을 설명하는 데 치우쳐 ‘전체적으로 완적의 <영회시>를 본떠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잃어버렸다’[섭섭(葉燮), ≪원시(原詩)≫]라는 평을 듣거나, 비유를 사용한 후에 다시 시의 주지에 대한 설명을 덧붙임으로써 한위 시(漢魏詩)와 비교할 때 감성적 형상에 추상적 의미를 덧붙인 흔적이 너무나 뚜렷해 평이하며 직설적이고 노골적이라는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논초성당시가혁신적기본특징(論初盛唐詩歌革新的基本特徵)> ≪한당문학적선변(漢唐文學的嬗變)≫, 96쪽).

40) “陳子昻復多而變小, 沈宋復小而變多.”

41) 장열은 <증별양영천형(贈別楊盈川炯)>에서 양형에게 “비록 소하(韶夏)의 풍격을 갖추었다고 해서 수레의 끌채를 두드리며 부르는 야인의 노래를 저버리지 마시오(雖有韶夏, 勿棄擊轅)”라고 권고했다.

42) 그는 시란 본디 “그 이치로는 벌을 주거나 다스리는 일에 쓰일 수 있고”, “그 의로움으로는 사람들의 잘못을 깨닫게 할 수 있으며”, 또 “고향을 떠난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종군하는 즐거움을 북돋을 수도 있으니”, “바람과 달, 대각과 연못, 나무에 앉아 우짖는 꾀꼬리, 구름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 따위도 시에 못 들어가란 법은 없다”라고 생각했다(≪낙주장사마집(洛州張司馬集)≫ <서>).

43) 그는 사마상여의 “타향살이의 심정”, 가의의 “빈한함에서 오는 고뇌”, 우경(虞卿)의 “풍월을 가슴에 품고, 강산을 돌아보는 것을 일로 여기는 것” 등이 “시에 쓰여 들어가서 그 아름다움을 떨칠” 수 있음을 인정했다(<배왕사마연왕소부동각서(陪王司馬宴王少府東閣序)>).

44) 이백(李白), <춘야연종제도리원서(春夜宴從弟桃李園序)>의 “따뜻한 봄이 아른아른한 경치로 나를 부르고, 대지도 나에게 봄 경치를 빌려주었다(陽春召我以煙景, 大塊假我以文章)”, 잠삼(岑參), <동야숙선유사남량당(冬夜宿仙游寺南凉堂)>의 “사물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하니 쉽게 흥겨워진다(物幽興易愜)”, 맹호연(孟浩然), <구일용사작기유대신허(九日龍沙作寄劉大愼虛)>의 “호북에선 흥이 많이 일어난다(湖北發興多)”, 두보(杜甫), <배이북해연력하정(陪李北海宴歷下亭)>의 “구름 가득한 산에 이미 흥이 일어났다(雲山已興發)” 등과 같은 것으로서, 모두 흥취가 자연의 경물로부터 촉발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45) “搜求於象, 心入於境. 神會於物, 因心而得.” 호진형(胡震亨)의 ≪당음계첨(唐音癸籤)≫에 인용된 왕창령(王昌齡)의 말.

46) 오교(吳喬)는 ≪위로시화(圍爐詩話)≫에서 성당 시인의 성취를 개괄해 “한위(漢魏)의 고체를 당체(唐體)로 바꾸되 그 고아함을 회복할 수 있었고, 육조(六朝)의 화려함을 자연스러움으로 변화시키되 그 빼어남을 회복할 수 있었다(變漢魏之古體爲唐體而能復其高雅, 變六朝之綺麗爲渾成而能復其挺秀)”라고 했다.

47) 그러나 <감우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상당수의 작품이 그의 귀향 전후에 지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48) “良友歿矣, 天其喪予! 今採其遺文可存者, 編而次之, 凡十卷.”

49) 귀곡자는 전국시대의 은사(隱士)다. 당시의 종횡가(縱橫家)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모두 그의 학생이었다.

50) “子昻古詩, 尙踏襲漢魏蹊徑, 竟有全似阮籍<詠懷>之作者, 失自家體段”(≪원시(原詩)≫).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