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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屈原)과 초사(楚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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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217회 작성일 12-10-3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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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屈原)과 초사(楚辭)


송정화(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목차

1.『초사』는 어떤 책인가?

2.중국인들의 영원한 애국시인, 굴원

3.초사와 신화적 상상력

4.식지 않는 굴원에 대한 사랑, 단오절(端午節)

5.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초사』는 어떤 책인가?

'초사'라는 명칭은 한나라의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처음 보인다. 이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가 완성된 기원전 91년에는 이미 초사가 유행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의 '초사'는 글자 그대로 초나라의 노래라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초사』라는 책은 이보다 조금 뒤인 서한(西漢) 시기의 인물인 유향(劉向)의 손을 거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즉, 당시에는 초나라 민요풍의 노래가 유행했었는데 후에 이것이 『초사』라는 책으로 엮어진 것이다.


유향이 『초사』에 넣은 작품은 모두 16개였다. 굴원(屈原)의 작품을 비롯하여 송옥(宋玉), 경차(景差), 회남소산(淮南小山), 동방삭(東方朔), 엄기(嚴忌), 왕포(王褒), 유향 자신의 작품들이 한데 묶였고 이때부터 초사는 책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초사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이자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다.


2. 중국인들의 영원한 애국시인, 굴원

일반적으로 초사라고 하면 굴원과 송옥 그리고 한나라 때의 모방작들까지 포함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초사』의 대표 작가라고 하면 단연 굴원을 꼽는다. 왕일(王逸)1)이 편집한 『초사장구(楚辭章句)』에는 굴원의 작품이 7편이나 되며, 내용면에서도 그의 작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굴원의 삶과 사상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


초나라 왕족의 후손인 굴원은 어렸을 때부터 영리했으며 커서는 박학다식하고 언변이 뛰어나 26세의 젊은 나이에 좌도(左徒)의 벼슬에 임명된다. 좌도는 내정(內政)뿐 아니라 외교를 담당한 중책으로, 굴원이 얼마나 왕의 총애를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명문가의 혈통이자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으며 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 출세가도를 달렸으니 자연히 굴원을 시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초나라는 전국 시대라는 격동기에 있었다. 주(周)나라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졌고 제후국들은 저마다 왕을 칭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백 개의 제후국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는데 결국 7개의 나라로 정리된 것이 제(齊), 초(楚),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진(秦)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이었다.


그중 초나라는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높은 문화적 수준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부패한 귀족들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굴원 당시의 회왕(懷王)도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진나라와의 긴장 관계를 원활하게 풀지 못하여 초나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굴원은 제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회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상관대부(上官大夫)와 근상(靳尙) 같은 간사한 측근들의 말만 신뢰하여 굴원을 쫓아냈다. 당시 굴원의 비탄은 그의 작품인 「이소(離騷)」에 잘 나타나 있다.


아! 저 신하의 무리들 안락만 추구하니

가는 길은 험하고 좁고 어둡네.

어찌 내 자신의 재앙을 겁내리오.

임금의 수레 무너져 엎어질까 두렵구나.


이후로 회왕은 제나라와 연합했다가 다시 배반하고 진나라와 연합하는 등 외교적인 실책을 거듭하였다. 굴원은 이때에도 열심히 간언하였지만 어리석은 회왕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고 아들인 자란(子蘭)의 말만 듣다가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고 만다. 당시 초나라 사람들은 회왕을 진나라로 보낸 자란에 대해 몹시 반감을 품었으나, 굴원에 대해서는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었다. 여론이 자기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감지한 자란은 상관대부를 시켜 새로 즉위한 경양왕에게 가서 굴원을 비방하도록 했다. 또다시 모함에 빠진 굴원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강남으로 쫓겨나 멱라강(覓羅江)에 빠져 죽고 만다.


그런데 후세의 유학자들은 오히려 굴원을 비판하기도 했다. 굴원이 지나치게 자신의 재주를 드러냈고 울분을 삭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군주의 과실을 과장해 폭로했다는 것이다. 즉 유가에서 말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중용(中庸)의 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3) 물론 이러한 지적대로 굴원이 울분을 거리낌 없이 토해내고 신화 속의 기이한 이야기들까지 자유롭게 노래한 것은 유가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용의 덕만을 지키려 했다면 가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억울함과 슬픔을 그토록 절실하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은 최고의 애국자이자 시인으로서 굴원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3. 초사와 신화적 상상력

신화와 시는 모두 논리적이기 보다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표현되기 때문에 보거나 듣는 사람에게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초사』는 굴원의 정치적인 비애와 애국심이라는 현실적인 내용을 노래했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신화와 주술적인 상상의 경지까지 마음껏 내달리게 한다. 특히 「원유(遠遊)」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탕곡(湯谷)의 연못에서 머리를 감고 열 개의 태양빛으로 유유히 몸을 말린다. 그리고 훌쩍 천상으로 날아올라 벼락의 신인 풍륭(豐隆), 동방의 신인 태호(太昊), 바람의 신인 비렴(飛廉)과 풍백(風伯), 남방의 신인 염제(炎帝)와 축융(祝融), 북방의 신인 현명(玄冥) 등의 온갖 신들과 만난 뒤 마지막으로 천상의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래로는 가파른 절벽이니 땅이 없고

위로는 텅 비고 가없어 하늘이 없네.

순식간에 지나가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희미하고 아득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네.

무위자연을 초탈하여 지극히 맑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태초와 더불어 이웃하였네.


유구한 중국시의 전통에서 『초사』만큼이나 자유로운 상상의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있을까? 물론 신선을 주제로 한 유선시(遊仙詩), 자연을 노래한 전원시(田園詩) 등도 환상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신화적 상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진 못한다. 유선시만 해도 그 속의 신선은 나와는 별개의 존재로서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지, 나와 완전히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천문(天問)」도 신화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천문이란 '하늘에 묻는다'는 뜻으로, 우주의 혼돈(混沌)으로부터 시작해서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에 이르는 온갖 의문들을 172개의 물음으로 열거하고 있다. 질문들을 보면 딱히 해답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람의 호기심을 물음의 형식으로 죽 풀어낸 것이다. 형식상 사언(四言)을 위주로 했고 의문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내용뿐 아니라 형식면에서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그 옛날 태초의 일을

누가 전해주었단 말인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도 전인데

어떻게 그걸 구상했을까?


밤낮이 불분명하던 그때에

누가 그것을 분명히 했을까?

우주가 희미하고 어두운데

어떻게 그것을 분별했을까?


그리고 신화는 祭儀學派에 의하면 제의의 구술적(口述的) 상관물이다. 즉, 제사지낼 때 부르던 노래가 바로 신화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당시 초나라에서는 신에 대한 제사와 점을 치는 행위 등의 모든 제의적인 행위가 중요시되었고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초사』에도 점을 쳐 하늘의 뜻을 묻거나 초혼(招魂)하여 강신(降神)하는 무속 의례의 과정이 생생히 재현되어 있다.


난초 물에 몸을 씻고 향초 물에 머리감으니

아름다운 옷차림 꽃송이 같네.

무녀가 운신을 부르니 제단에 머무시며

환한 빛 한없이 비추시네.

-「구가(九歌) 운중군(雲中君)」


… 그러자 첨윤이 대통을 던지고 거절하며 말하길,

한 자로도 짧을 수 있고

한 치라도 길 수 있으며

늘 부족한 것도 있고

분명치 않은 지혜도 있소.

헤아릴 수 없는 운명도 있고

통할 수 없는 신도 있다오.

그대의 마음 가는대로

그대의 뜻대로 행하시오.

거북점, 대통으로는 진실로 알 수 없는 노릇이구려.

-「복거(卜居)」


특히 「구가(九歌)」는 모두 11편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과 형식에서 중국 남방 지역의 무속적 분위기를 흠씬 느끼게 하는 전형적인 무가(巫歌)이다. 우선 「구가」는 영매(靈媒)인 무가 등장하여 동황태일(東皇太一), 운중군(雲中君), 상군(湘君), 상부인(湘夫人), 대사명(大司命), 소사명(小司命), 동군(東君), 하백(河伯), 산귀(山鬼)의 아홉 신을 불러내서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무가 신을 불러내는 초혼(招魂)의 과정이 마치 남녀가 연애하는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 매우 낭만적이다. 즉, 남신을 부를 때에는 여자 무당이, 여신을 부를 때에는 남자 무당이 상대를 즐겁게 하여 강림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좋은 날 좋은 때에

님을 모셔 기쁘게 해드리고자

옥고리 손잡이 달린 긴 칼을 어루만지니

아름다운 패옥소리 댕그랑.


옥 방석에 아름다운 자리 깔아 놓았으니

어찌 향초가지 바치지 않으리오.

제사 고기는 혜초로 싸고 난초를 깔고서

계피술과 초장 차려 올리네.

북채 들고 북 치며

느린 가락에 나지막이 노래하며

피리와 거문고로 장단 맞추네.


신들린 무녀의 고운 옷 너울거리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며

아름다운 소리 한데 어우러지니

님께서는 마냥 좋아하시네.

-「구가(九歌) 동황태일(東皇太一)」


그렇다면 초사의 이런 독특한 정신세계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초나라는 당시 중원의 주나라와는 이질적인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상상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은(殷)나라였을 것이다. 은나라는 정사(正史)에 기록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였고 신화적인 유풍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나라는 이런 은나라 문화를 계승한 송(宋) 나라와 문화를 공유했기 때문에 중원보다 신과 귀신에게 좀 더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4. 식지 않는 굴원에 대한 사랑, 단오절(端午節)


2004년에 우리나라의 강릉시가 전통적으로 계승해온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신청하려 하자 중국 측에서 반대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단오절이 중국 고유의 명절인데 한국에서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는 것은 문화적 약탈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사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단오절은 날짜와 이름만 같을 뿐 그 실제적인 풍속은 전혀 다르다. 중국의 단오절은 우리네처럼 창포에 머리 감고 그네 뛰며 노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굴원을 애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굴원이 사망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음력 5월쯤이었을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음력 5월 5일이 되면 굴원이 빠져죽었다는 멱라강 일대에서는 찹쌀을 쪄서 종려나무 잎으로 싼 쫑즈(粽子)를 만들어 물에 던지는 풍속이 전해진다. 충직하고 고결했던 굴원의 시신이 혹시라도 물고기들에게 상할까봐 걱정할 만큼 중국인들의 굴원 사랑은 지대하다. 오늘날에도 이런 풍습이 중국 강남 지방에서 전승되어, 사람들은 쫑즈를 던지고 굴원을 애도한 다음 화려한 용모양의 배를 띄우는 용주(龍舟)대회를 거행한다.


살아서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괴로워하던 그가 이제는 단오절마다 모두들 그를 기억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아이로니컬한가? 어느 때이고 죽음의 고난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혼란한 전국 시대에 "비천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마시고 옥같이 아름다운 꽃을 먹듯이" 진정을 품고 살았던 굴원을 오늘날에도 만날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자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5.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구가(九歌)'는 모두 9편으로 되어 있는가?

구가는 9편이 아니라 모두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황태일(東皇太一)」, 「운중군(雲中君)」, 「상군(湘君)」, 「상부인(湘夫人)」, 「대사명(大司命)」, 「소사명(少司命)」, 「동군(東君)」, 「하백(河伯)」, 「산귀(山鬼)」, 「국상(國殤)」, 「예혼(禮魂)」의 11편이다. 「구가」는 옛날 악곡(樂曲)의 이름인데 굴원이 그것을 자신의 노래에 붙인 것이라 한다.


2. 굴원 외에 '초사' 작가로는 누가 있을까?

『초사장구』에는 '초사' 작가로 굴원 외에도 송옥(宋玉), 경차(景差), 가의(賈誼), 동방삭(東方朔), 엄기(嚴忌), 회남소산(淮南小山), 왕포(王褒), 유향(劉向), 왕일(王逸)을 들고 있다. 이들 중 송옥과 가의가 특히 유명하다.


송옥은 초나라 경양왕 때에 살았다고만 전해질 뿐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굴원보다 젊었고 굴원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구변(九辯)」과 「초혼(招魂)」이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


가의는 한나라 초의 유명한 학자이다. 낙양(洛陽)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박학다식하여 문제(文帝) 때에 최연소로 박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도 굴원처럼 권신들의 시기를 받아 조정에서 쫓겨나 지방정부로 쫓겨나는 처지가 되었으며 울분을 「복조부」와 「조굴원부(弔屈原賦)」에 담아냈다.


3. 『초사』와 굴원의 문학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굴원은 '중국 시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중국 문학사상 위대한 인물이다. 초사 이전에 중국 북방의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를 모은 『시경(詩經)』에서는, 민가(民歌)의 집단적인 소박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섬세한 개인의 감수성은 느끼기 어렵다. 그런데 굴원에 와서 '초사'라는 문체가 정식으로 창작되었고, 개인의 사상과 감정도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현실에서의 정치적 불우함을 초현실적인 환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초사'라는 독특한 풍격의 시를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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