衛나라 망국의 노래(시경) > 선진

衛나라 망국의 노래(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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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620회 작성일 13-11-11 15:09

본문


1. 河廣(하광)

- 넓고 넓은 하수 -

송환부인(宋桓夫人) -衛風


이 시는 위(衛)나라에 머물고 있던 송나라 군주의 모부인이 자기나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를 슬퍼하며 부른 노래다. 위나라의 도성은 대공(戴公) 신(申)이 조읍(漕邑)으로 옮기기 전에는 황하 북안의 조가(朝歌)로 송나라와는 황하를 사이에 둔 이웃나라였다. 그래서 과장하여 ‘하수는 넓지 않고 송나라는 멀지 않다.’ 라고 한 말의 뜻은 ‘강 하나를 건너지 못해 자기나라로 돌아갈 수 없음은 도대체 무었때문이란 말인가?' 라고 한탄했다. 『모서(毛序)』에 「송환공(宋桓公) 어설(御說)의 부인이며 송양공(宋襄公) 자보(慈父)의 모부인(母夫人)이 송나라에서 쫓겨나 친정인 위나라로 머물면서 항상 송나라를 그리워하면서 이 노래를 지었다.」라고 했다. 송양공의 모부인은 위나라의 대공(戴公), 문공(文公), 허목부인(許穆夫人)과는 동모 남매간으로 송나라로 시집가서 송양공을 낳은 후에 버림을 받고 쫓겨나ㄴ 후에 친정인 위나라로 돌아가 살았다.

진환(陈奂)①이 말했다.

「송양공(宋襄公)의 모부인이 머물고 있던 위(衛)나라가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아 위의공(衛懿公)은 전사하고 나라망한 일을 근심했다. 그래서 이 시를 지어 송나라가 하수를 건너와 위나라를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표현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송환공은 하수 강변에서 위나라 난민을 맞이하여 조(漕) 땅에 거하게 하고 대공(戴公)을 맞이하여 위후로 세웠다. 즉 이 시는 송환공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하수 강변에 당도하기 전에 지어진 작품이다. 『하광(河廣)』은 위대공을, 다음의 『재치(載馳)』는 위문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일을 노래한 시가다. 즉 『재치』는 허시(許詩)라 할 수 있고 『하광』은 송시(宋詩)라고 할 수 있으나 위풍(衛風)과 용풍(鄘風)에 넣었다. 시의 작자 두 부인은 모두 그녀들의 친정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슬퍼했음으로 이 시를 지어 기록했다.」



誰謂河廣(후위하광)

누가 말했나? 하수가 넓다고


一葦杭之(일위항지)

일엽편주로도 건널 수 있는데



誰謂宋遠(수위송원)

누가 송나라가 멀다고 했는가?



跂餘望之(기여망지)

발돋움하면 보이는 곳인데



부(賦)다. 위(葦)는 겸가(蒹葭)의 등속(等屬)으로 갈대다. 엮어서 뗏목을 만들 수 있다. 항(杭)은 노시(魯詩)에서는 방주를 뜻하는 항(斻)으로 되어있다. 도(渡)의 뜻으로 건너는 행위다. 위나라는 황하 북쪽에 있고 송나라는 황하 남쪽에 있다.

○ 선강(宣姜)의 딸이 송환공(宋桓公)에게 시집가서 아들 양공(襄公)을 낳았으나 후에 소박맞고 쫓겨나 위나라에 들어와 살았다. 환공이 죽고 송공의 자리에 즉위한 아들 송양공을 그리워하여 송나라에 돌아가고 싶었으나 도리 상 갈 수 없었다. 나라의 사직을 이어받은 군주는 조상과 뜻을 같이해야 했음으로 모친이 부친에 의해 쫓겨났다면 아들의 도리 상 부친의 뜻을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송환부인이 이 시를 지어 노래하기를 “누가 하수(河水)가 넓다고 했나? 단지 갈대로 엮은 방주(方舟)로도 능히 건널 수 있는데! 누가 송나라가 멀다고 했나? 단지 한 번 발돋움을 하면 능히 볼 수 있는데!”라고 했다. 송나라를 갈 수 없는 이유는 멀어서가 아니라 소박맞은 여인네의 도리 상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한탄했다.




誰謂河廣(수위하광)

누가 말했는가? 하수가 넓다고


曾不容刀(증불용도)

조각배 한 척도 띄울 수 없거늘


誰謂宋遠(수위송원)

누가 말했는가? 송나라가 멀다고


曾不崇朝(증불숭조)

아침나절도 안 걸리는 지척인 곳인데


부(賦)다. 증(曾)은 내(乃) 혹은 경(竟)이고 도(刀)는 작은 배를 뜻한다. 증불용도(曾不容刀)의 뜻은 ‘결국은 작은 배 한 척도 띄울 수 없을 수 정도로 좁은 모습’의 황하를 말한다. 숭(崇)은 아침이니, 숭조는 종조(終朝)로 아침에 기상해서 식사 때까지의 시간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한다.


河廣 二章이니, 章 四句이다.


송인 범처의(范處義)가 말했다.

「송환부인이 송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부인의 도리 때문이다.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신분은 천승(千乘)의 나라 군주이나 어미를 봉양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사람이다. 송양공의 입장이 된 자는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살았을 때는 효를 다하고 돌아가셨을 때에는 예(禮)를 다해야 할뿐이다. 위풍(衛風)에는 여인이 지은 시가 여섯이 있는데, 공강(共姜)으로부터 송환부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의(禮義)를 지키며 감히 지나치지 않았다. 대저 위나라의 정교(政敎)가 음탕하고 풍속이 퇴폐적이었으나 부덕을 지닌 여인이 예의에 벗어남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선왕의 교화가 그때까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2. 재치(載馳)

- 수레를 달려라! -


허목부인(許穆夫人) - 용풍


위의공(衛懿公)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학을 키우는 일에만 몰입하다가 적인(狄人)의 침략을 받았다. 위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잃어 군사를 동원할 수 없었던 위의공은 적인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허목부인의 제부(弟夫) 송환공(宋桓公)이 황급히 조읍(漕邑)으로 나아가 위의공의 아들 대공(戴公)을 맞이해서 위후로 세웠다. 다음해 대공이 죽자 문공(文公) 훼(毁)가 뒤를 이었다. 대공과 문공 및 허목부인은 동모 형제자매들이다. 외적의 침입으로 의공은 살해되고 다시 대공마저 즉위하자마자 죽고 새로운 군주가 다시 선 위나라의 정세는 바야흐로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유독 고국을 사랑했던 허목부인은 타는 듯한 아픈 마음으로 수레를 몰아 위나라를 향해 달려갔다.



載馳載驅 (재치재구)

수레를 달리고 또 달려



歸唁衛侯(귀언위후)

위후를 위로하려 가노라!



驅馬悠悠(구마유유)

나를 태운 말은 유유자적



言至於漕(언지어조)

언제나 조읍(漕邑)에 당도할거나?


大夫跋涉(대부발섭)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온 대부들



我心則憂(아심즉우)

내 마음 때문에 근심하네


부(賦)다. 재(載)는 칙(則)이다. 망국의 군주에게 하는 조문을 언(唁)이라 한다. 유유(悠悠)는 멀어서 이르지 못하는 모습이다. 풀섶을 헤치고 길을 가는 행위를 발(跋)이라 하고 강과 개천을 건너 길을 가는 행위를 섭(涉)이라 한다.

○ 선강(宣姜)과 공자석(公子碩) 사이에 태어난 딸이 허목공(許穆公)의 부인(夫人)이 되었다. 위나라의 멸망을 슬퍼한 허목부인은 수레를 빨리 달려【치구(馳驅)】조읍(漕邑)으로 들어가 위후를 위로하려고 했으나 미처 당도하지 못했다. 이에 발섭(跋涉)하여 따라온 허나라 대부들은 부인에게는 장차 허나라로 돌아갈 뜻이 없음을 알고 이를 매우 근심했다. 허목부인은 마침내 허나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이 시(詩)를 지어서 그 뜻을 전했다.



旣不我嘉(기불아희)

이미 나를 좋게 여기지 않아



不能旋反불능선반)

돌아갈 수 없도다!



視爾不臧(시이부장)

그대가 좋지 않게 여기나



我思不遠(아사불원)

내 생각은 변함이 없고



旣不我嘉(기불아가)

이미 나를 좋지 않게 여기지만



不能旋濟(불능선제)

물을 건너 돌아갈 수 없도다.



視爾不臧(시이부장)

그대가 날 좋지 않게 여기나



我思不閟(아사불필)

내 생각은 그치지 않으리



부(賦)다. 가(嘉)·장(臧)은 모두 선(善)함이다. 원(遠)은 잊음과 같다. 제(濟)는 건넘이니, 허(許)땅으로부터 위(衛)에 돌아간다면 반드시 건너야 할 물이 있다. 피(閟)는 가림이나 그침이니, 생각이 그치지 않음을 말한다.

○ “대부가 이미 당도했으나 내가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또한 길을 돌려 다시 하수를 건너 위나라를 떠날 수 없음이라! 비록 그대에게 내가 좋게 여겨지지 않겠지만 나는 내 마음을 바꾸지 못하겠다.”


陟彼阿丘(척피아구)

저 아구(阿丘)에 올라



言采其蝱언채기맹)

패모초를 캐리라!



女子善懷(여자선회

여인은 생각이 많아



亦各有行역각유행)

갈 길이 각각이거늘


許人尤之(허인우지)

허나라 사람 나를 걱정하지만



衆穉且狂(중치차광)

많은 사람들 어리석고 미쳤구나!



부(賦)다. 한 쪽으로 치우친 언덕을 아구(阿丘)라 한다. 맹(蝱)은 패모(貝母)라는 약초이니 우울증을 치료한다. 선회(善懷)는 근심과 생각이 많음이고, 행(行)은 길이요 우(尤)는 허물이다.

○ “이미 위나라에 갈 수는 없게 되었으나 그리움만은 끝내 그칠 수 없다. 그래서 길에 있을 적에 혹은 높은 곳에 올라 우상(憂想)의 정(情)을 펴고 혹은 맹(蝱)을 주우면서 우울증을 고친다. 여자가 선회(善懷)하는 방법에는 각기 도(道)가 있는 법인데 허나라의 중인(衆人)들이 과하다고 한 말은 나이가 어려 어려운 일을 겪어보지 않아서 광망(狂妄)한 사람이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허나라 사람들이 예가 바르니 유치하거나 광망한 바가 아니요, 다만 자기의 정이 간절하고 지극하지 않아 이런 말을 했음이다. 결국 내 뜻을 감히 꺾지 못하니, 어찌 어리석고 광망하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했다.




我行其野 (아행기야)

나 들판에 나가보니



芃芃其麥봉봉기맥)

보리는 무성하여 더북하다.


控于大邦(공우대방)

큰 나라에 고하고자 하나



誰因誰極수인수극)

누구를 통해 누구에게 갈까?



大夫君子(대부군자)

대부들아, 군자들아!



無我有尤(무아유우)

내게 허물있다 하지 마오!



百爾所思(백이소사)

내 생각은 백가지나



不如我所之불여아소지)

내가 직접 가느니만 못하리!



부(賦)다. 봉봉(芃芃)은 보리가 성장(盛長)하여 무성한 모습이다. 공(控)은 가지고 가서 하소연함이다. 인(因)은 위장자(魏莊子)와 인연이 있음을 말한다. 극(極)은 이름이다. 대부는 바로 발섭(跋涉)한 대부요 군자는 허나라 중인들을 말한다.

○ “돌아갈 길이 밖에 있어 봉봉(芃芃)한 보리밭을 건너면서 허나라가 작고 힘이 없어 친정 위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상심했다. 그래서 대국을 붙잡고 하소연하려고 하지만 장차 어느 곳을 인연하여 어디에 이를지 알지 못한다. 대부와 군자들은 나를 허물있다 말하지 마시오!”라 했다.



3. 定之方中(정지방중)

- 정성(定星)이 정남에 있을 때 -


衛文公 - 용풍

󰡔춘추좌전(春秋左傳)󰡕 노민공(魯閔公) 2년 기원전 660년 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위의공(衛懿公) 9년 겨울 적인(狄人)이 위나라를 침입해오자 의공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인과 형택(熒澤)에서 싸우다 패사했다. 송환공(宋桓公)은 위나라의 유민들을 수습하여 하수를 건너 조읍(漕邑)에 이르러 선강의 아들 신(申)을 세워 위나라 사직을 세웠다. 신이 위대공(衛戴公)이다. 대공이 이 해에 병이 들어 죽었음으로 제나라에 살고 있던 훼(燬)를 모셔와 위후로 세웠다. 이가 위문공(衛文公)이다. 이때 패자를 칭하고 있던 제환공(齊桓公)이 제후들을 이끌고 와서 초구(楚丘)에 성을 쌓아주고 위나라를 옮기게 했다. 위문공이 포의와 흰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인재교육에 힘쓰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독려했다. 또 상인들과 공인들을 은혜롭게 대했으며 정치와 교화를 겸손한 마음으로 행하여 현자를 임용한 결과 예교를 가르쳤다. 그 결과 즉위 원년에 30승에 불과했던 혁거(革車)가 다음 해에 바로 3백 승으로 늘어났다.」




定之方中(정지방중)

정성(定星)이 정남(正南)에 있을 때



作于楚宮(작우초궁)

초구(楚丘)에 궁전을 지었네


揆之以日(규지이일)

해를 보고 방향을 잡아



作于楚室(작우초실)

초구에 궁실을 지었네



樹之榛栗(수지진율)

개암나무, 밤나무, 의나무, 오동나무,



椅桐梓漆(의동저칠)

가래나무, 옻나무 심었으니



爰伐琴瑟(원벌금슬)

장차 거문고와 비파를 만들리



부(賦)다. 정(定)은 북방의 별자리로 영실성(營室星)이다. 하나라 달력으로 정월 10월이면 밤중에 남쪽에 보이기 시작하면 궁실을 짓기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영실성이라 부른다. 초궁(楚宮)은 초구(楚丘)에 지은 궁궐이다. 규(揆)는 헤아림이니 여덟 자 되는 나무를 심고서 그 해가 출입하는 그림자를 헤아려 동서(東西)를 정하고 해가 정남일 때 그림자를 참고하여 남북(南北)을 바로잡는다. 초실(楚室)은 초궁(楚宮)과 같다. 진(榛)은 개암나무로 열매가 작고 율(栗)은 밤나무로 열매가 크니 모두 제사상에 올릴 수 있다. 의(椅)는 산유자나무 동(桐)은 오동나무다. 재(榟)는 가래나무 중에 결이 희고 열매가 열린다. 칠(漆)은 차지고 검은 수액으로 기물(器物)을 꾸밀 수 있다. 네 종류의 나무는 모두 금슬(琴瑟)을 만드는 재료이다.

○ 위나라가 이적(夷狄)에게 멸망당해 초구로 달아난 위문공이 궁실을 지었음으로 국인들이 기뻐하여 이 시를 지어 찬미했다. 소씨가 말하기를 “나무를 심는 자는 10년 후에 쓰려고 준비함이니 눈앞에 있는 곳을 구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다.”라고 했다.



升彼虛矣(승피허의)

저 옛 성터에 올라



以望楚矣(이망초의)

초구를 바라보네



望楚與堂(망초여당)

초구 옆 고을을 바라보고



景山與京(경산여경)

산과 높은 언덕 헤아리고



降觀于桑(항관우상)

언덕에서 내려와 뽕나무 밭을 보고



卜云其吉복운기길)

점을 치니 점괘가 길하네



終焉允臧(종언윤장)

마침내 좋은 터 마련했도다!


부(賦)다. 허(虛)는 옛 성터고 초(楚)는 초구(楚丘)다. 당(堂)은 초구 주위에 있는 고을이다. 경(景)은 그림자를 헤아려 방향을 바르게 잡는 행위다. 혹자는 “경(景)은 산이름이니 상송(商頌)에 보인다.”고 했다. 경(京)은 높은 언덕이다. 윤(允)은 진실로요 장(臧)은 선함이다.

○처음에 산을 바라보고 그림자를 헤아려 관망하고 점을 쳐 마침내 길한 괘를 얻었음을 말했다.



靈雨旣零(영우기령)

단비 내리니



命彼倌人(명피관인)

관리에게 일러



星言夙駕(성언숙가)

별이 보이면 일찍 일어나 수레를 몰고



說于桑田(세우상전)

뽕 밭에 머문다.


匪直也人(비직야인)

정직한 군주님이여!



秉心塞淵(병심색연)

그 마음 넓고도 인자하니



騋牝三千(래빈삼천)

큰 암말이 3천 마리나 되었네


부(賦)다. 영(靈)은 마음이 선함이고 영(零)은 떨어짐이다. 관인(倌人)은 멍에를 주관하는 관리다. 성(星)은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행위다. 세(說는) 멈추어 휴식을 취함이고 병(秉)은 잡음이며, 색(塞)은 실함이고 연(淵)은 깊음이다. 말 중에서 크기가 7척 이상을 래(騋)라고 한다.

○“바야흐로 봄에 단비가 내려 뽕나무 농사에 힘써야할 때가 되었다. 위문공이 멍에를 주관하는 관리에게 명하여 새벽에 일어나 수레에 멍에를 매게 하여 달려가 농부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그러나 위문공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음은 인품이 성실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크기가 7척이 넘는 말 3천 두를 방목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대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유는 인품이 성실하고 마음 씀씀이가 깊어 하는 일마다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는 법이니 재화가 늘어나 성세를 이루어야 마땅한 일이다. 󰡔예기(禮記)󰡕에 “군주로부터 부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되면 말의 숫자를 세어 대답한다.”고 했으니 지금 래빈(騋牝)의 많음이 3천 두를 넘겼다면 생식(生息)의 번성함으로 위나라가 부유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定之方中 三章이니, 章 七句이다.


4. 木瓜(모과)

- 나에게 던져준 모과 -


衛文公 - 衛風


위의공(衛懿公)이 학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적족(狄族)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싸움 중에 죽었다. 위나라 사람들이 송환공의 도움으로 란을 피해 하수를 건너 조읍(漕邑)으로 들어갔다. 이에 제환공(齊桓公)이 3국의 제후를 소집하여 각기 삼태기와 가래를 휴대한 군사들을 이끌고 위나라로 행군했다. 위문공 훼(燬)가 멀리까지 나와 제환공의 일행을 마중했다. 위문공은 그때까지 아직 삼베로 만든 군주의 의복과 비단으로 만든 관을 바꾸지 않고 상복으로 계속 입고 있었다. 제환공이 보고 측은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위나라 도성을 어디에 지어야하냐고 물었다. 문공이 초구(楚丘)를 정했으나 나라가 망해서 성을 세우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길이 없어 바라만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제환공은 그 날로 3국의 병사들에게 초구로 이동하여 위나라를 위하여 성을 쌓으라고 명했다. 계속해서 재목을 제나라에서 가져오게 하여 종묘를 모시는 사당을 짓게 하고 그 사당의 문에 위나라를 초구에 봉한다는 뜻의 ‘위봉(衛封)’ 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위문공이 제환공에게 위나라의 도성과 종묘를 모시는 사당을 세워준 은혜에 감격하여 <모과(木瓜)>라는 시를 읊어 노래했다.



投我以木瓜(투아이모과)

나에게 모과를 던져 주시니



報之以瓊琚(보지이경거)

아름다운 패옥으로 보답하리다.



匪報也(비보야)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영이위호야)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오리다.



비(比)다. 모과(木瓜)는 모과나무로 열매는 소과(小瓜)와 같고 먹을 수 있으나 시다. 경(瓊)은 아름다운 옥이고, 거(琚)는 패옥(佩玉)의 이름이다.

○ “사람들이 나에게 미물(微物)을 줌에 나는 마땅히 중보(重寶)로 보답하고도 오히려 보답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하는 다짐은 다만 오래도록 우호하여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는 방법은 아마도 남녀가 서로 증답(贈答)한 말로 「정녀(靜女)」와 같은 류(類)이기 때문이다.



投我以木桃(투아이모도)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주시니



報之以瓊瑤(보지이경요)

아름다운 구슬로 보답하리라



匪報也(비보야)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영이위호야)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오리라



비(比)다. 요(瑤) 아름다운 옥구슬이다.



投我以木李(투아이모리)

나에게 오얏을 던져주시니



報之以瓊玖(보지이경구)

찬란한 옥으로 보답하리라



匪報也(비보야)

보답이 아니라



永以爲好也(영이위호야)

영원히 사이좋게 지내오리라



비(比)다. 구(玖) 역시 아름다운 옥구슬이다.



木瓜 三章이니, 章 四句이다.


송인 장뢰(張耒)가 말했다.

“ 위나라 땅이 대하(大河)에 접하여 토질이 척박했음으로 사람들의 기상이 경박하고 유약하여 밭 갈고 김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정이 나태하여 성음(聲音) 또한 음탕했다. 그래서 위나라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해이해져 사악한 마음을 들게 했다. 이는 정나라의 시풍을 본 땄기 때문이다.”


①진환(陳奐:1786-1863)

자는 석보(碩甫),호는 사죽(師竹),만년에는 스스로 남원노인(南園老人)이라고 자칭했다. 강소(江蘇) 장주(長州 :今蘇州)인이다. 함풍(鹹豐) 원년 효렴방정(孝廉方正)으로 천거되어 강원(江沅)과 단옥재(段玉裁)로부터 차례로 사사했다. 또 일찍이 고우(高郵)의 왕념손(王念孫)으로부터 왕인지(王引之)의 학문을 배우고 그의 경학(經學)과 가법(家法)을 전수받았다. 필생 동안 온 힘을 다하여 경학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모시(毛詩) 연구에 가장 힘썼다. 저서에는 《모시전통(毛詩傳疏)》,《모시설(毛詩說)》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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