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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의 나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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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 조회 1,621회 작성일 18-01-14 11:00

본문

철수생각

철수의 인생

1. 안철수의 인생 전환(민주주의의 미래? 안철수와 박원순)

2. X세대 슈퍼스타 안철수가 모르고 지나간 10년(서태지와 안철수)

철수생각

(첫 번째 철수생각) 루즈벨트와 오바마, 클린턴(안철수가 보는 미국정치)

(두 번째 철수생각) 전방위 일자리 창출(고용과 가계부채, 공공부문)

(세 번째 철수생각) 산업공동화 VS 신성장 산업의 딜레마 풀기(금융시장, 양극화와 재벌)

(네 번째 철수생각)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안철수의 상식경영)

(다섯 번째 철수생각) 많이 거둬서 제대로 쓰자(세금과 재정지출, 에너지)

(여섯 번째 철수생각). 산업화 따로 민주화 따로(구체제와 신체제)

(일곱 번째 철수생각) 정당과 의회, 견제와 균형(적대적 프레임을 넘어)

(여덟 번째 철수생각) 보육부터 창의교육까지(백년지대계 교육)

(아홉 번째 철수생각) 농업과 FTA

(열 번째 철수생각) 소통과 합의의 미래정치(대한민국 과거지도 밑에 미래지도가 있다)

철수의 꿈(복지, 정의, 평화)

1. 복지 실사구시

2. 정의로운 기업생태계

- 사법개혁

3. 평화는 당연

- 통일문제

철수가 놓친 생각

1. 정치를 해서는 안될 사람들(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한 세상을 치료·구원하자는 사람들의 속임수)

2. 국가의 흥망이 달린 정치(부정부패, 폭정, 한중일 삼국 정치 비교)/정치개혁

- 정치는 방정식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보면서 부등식을 만든다. 부등호를 만들기는 어렵다.

3 세 국가의 흥망이 달린 외교(떠오르는 중국과 패권국가 미국 사이에서 한국의 생존 전략)

청춘에게 역사(천하주유...)를 권한다

출판의도

[철수생각]은 [안철수의 생각]에 대답하고 묻는 책이다. “안철수 현상”, 즉 우리 사회에서 안철수를 밀어 올리는 힘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안철수가 제시한 생각, 꿈, 미래가치를 분석하고 그것이 정치·경제·역사적으로 어떤 타당성과 문제점이 있는지 밝혀보고자 한다.

안철수를 포함해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철수생각]에서 밝히는 문제점을 공유해서 고민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정치현상에서 무엇이 왜곡됐는지,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지, 가장 크게는 민주주의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다.

민주주의는 권력분립과 정당정치를 근간으로 한다. 집권자의 왜곡으로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정당인을 비하하는 민주주의를 해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안철수에게 희망을 찾는 사람에게 역사에서 보여주는 사례를 통해 안철수가 놓친 또 다른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출판대상

안철수에 관심을 가지는 20대~40대, 특히 90년대 초중반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 주(主) 타킷이다. 가정을 가지고 회사에 치여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안철수의 생각]은 상당히 큰 위로가 되고 있다. 철수생각의 매개로 해서, 우리 사회의 경제문제에 좀 더 직면하고, 집권자의 왜곡을 벗어나 민주주의를 직시하는 용기를 복돋아 주고자 한다.

머리말

안철수 원장 개인을 비판하는 글이 아니다. 안철수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우리 연구소를 위해서 쓴다. 21세기 경제학 연구소의 소통과 합의를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의 소통과 합의를 위해서...

안철수의 인생 전환(민주주의의 미래? 안철수와 박원순)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안철수 원장이 한순간에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가 된 순간을 표현한 말이다. [안철수의 생각]을 여는 첫 구절이다. 안원장에게 정치적 세계가 열렸고, 그 세계에 두 발을 걸쳤다. 그 세계는 자기 스스로 개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그 정치의 문을 열게 만든 다른 사람이 있다. 능동적인 흐름을 만든 사람이 있다.

안원장이 서울시장의 유력한 후보가 된 것보다 더 큰 정치적 변화가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그가 유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른 것이다. 깜짝 스타의 대표 사례인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하루 밤사이 유명 스타가 된 것보다 더 큰 인생전환을 안원장은 보름 사이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래서 “주어졌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어졌다”에 반론이 제기되곤 한다. 물론 안원장 역시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는 도전의 인생이라고 강조하면서, 안철수 현상이 발생한 배경을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의 표현”과 (안원장) 자신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소극적 지지”가 합쳐진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빈틈없는 강력한 논리이지만 설명이 부족하고 보완이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장에서 안원장에 대한 지지의 원천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안원장의 도전은 후자의 관한 사항이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사람 중에 안원장 자신도 포함된다. 국민뿐 아니라 안원장 스스로에게도 자가당착이며 위험하다. 안원장을 정치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 사람이 그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평가한 기성 정치권에 있는, 민주당 서울시 의원들이다. 바로 오세훈 서울시장을 견제하고 압박해 무상급식 주민투표라는 무리한 승부수를 띄우게 만들었다. 2010년 지차체 선거에서 민주당이 서울에서 압승하고 서울시 의회의 권능을 충실히 한 결과다. 그 열매를 다른 사람이 먹게 됐지만 말이다. 물론 풀뿌리 정치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중앙 정치 무대는 그렇지 않았다. 안원장이 이를 구분했다면 정치권에 대한 평가가 틀리지 않다.

백년 가는 정당이라고 자만한 열린우리당이 참여정부 임기 내에 자체적으로 분열·붕괴되었던 대형 사건이 있다. 수리도 안하고 난파된 상태로 대선을 치르게 되고 사상 최대 표차이로 대선에서 패배했다. 정치권의 붕괴로 인한 일방적인 승리와 패배는 정치의 왜곡, 실패 또는 정치의 부재(不在)를 부른다. 가끔 그런 왜곡이 정치적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정치의 왜곡과 비극으로 기성 정치권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교훈이 될 만한 사건이 우리 역사에 있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의 뿌리는 깊다. 시작은 4.19 혁명과 그 이후 민주당 정부, 5.16 쿠데타이다. 극적인 사태의 전개를 큰 줄기만 복기해 봐도 상상을 초월한다. 4.19 혁명은 불과 시위 몇 분 만에 혁명이 되었다. 중산층까지 시위에 참가하였고 몇 시간 안의 교감이 만들어낸 전원일치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긴 호흡으로 보면 부정 선거에 대한 거국적 항거에 야당인 민주당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민주당은 1956년부터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헌법개정까지 강력한 야당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보였다. 특히 민주당이 3.15 선거와 규탄시위를 주도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마산 의거때 부정 선거에 항의하며 시민들이 최초로 집결한 곳이 민주당 사무소 앞이었다. 집결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발포해 8명이 살해됐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내각제가 합의되면서 정치적으로 민주당을 묶고 있었던 공통점이 사라졌다. 민주당 분열이 시작됐다. 이를 틈타 쿠데타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제도약이 시작된 시기는 민주당이 자유당 독재를 견제하던 1950년대 말과 일치한다. 민주당 정권은 경제청사진을 만들었으며, 성장잠재력을 확충했다. 그러나 쿠데타가 일어나자마자 경제는 곤두박질쳤고 민정이양까지 성공적인 경제운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은 이 모든 것을 왜곡시켰다. 집권야욕을 위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다. 게다가 쿠데타 세력은 원천적으로 정치 공간을 봉쇄했다. 특히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권을 가질 수 없었다. 국회의원 선거권도 일부 제한되었다. 지방자치단체 선거권은 원천봉쇄당했다.

쿠데타 이후 학생들은 스스로 4.19의 의미를 공부하면서 민주주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기존 정치권의 활동제한과 맞물려 학생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갔다. 학생들이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이 낮추어 봤던 부분도 있고, 다른 하나는 그 당시 세계적인 “교육혁명(대학의 대중화)”과 국제왕래·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국제적 관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순결한 도덕적 규범과 성균관 시절부터 내려온 오랜 전통으로 많은 사람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자신만만하게 4.19 혁명은 학생이 주도했고 민중이 뒷받침한 것으로 정리했다. 물론 그 반대도 성립가능하다. 4.19 혁명을 학생혁명으로 좁혀서 생각해선 안 된다고 고(故) 함석헌(1901-1989) 선생은 그 당시에 주장했다. 학생과 군인은 혁명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이 등장하는 계기다. 어쨌든 구심점인 민주당은 빠졌다. 정치가 바로서야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이치는 역사의 철칙이지만, 한국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게 됐다.

물론 학생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부인할 수 없다. 학생운동을 무차별하게 탄압한 것은 쿠데타 세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광주항쟁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은 더욱 그렇다. 학생운동이 주도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꼽으면서 최장집은 이를 운동민주주의라고 정의했다. 운동민주주의에 4.19에 의해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 민중이 합쳐진 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과거라고 정리했다.

학생운동이 쇠퇴하면서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으로 시민운동이 나타났다. 학생운동 시절보다 더 적극적인 사회연대와 더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추구했다. 시민운동은 학생운동 시절에 지녔던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을 바꾸지 못했다. 오히려 불만을 더 세련되게 표현했다. 시민운동이 시민사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보다는 언론에 의존했고, 언론은 환경문제, 성 차별문제, 경제정의, 소비자 권익 등 범(凡) 사회적인 문제를 제기한 시민운동의 아젠다를 지면에 소개했다.

우리나라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 박원순 변호사다. 박원순 변호사는 1990년 전후 학생운동이 위기일 때 시민운동을 개척했다. 외국의 시민운동을 열심히 벤치마킹하면서 자신의 전공(변호사, 책쓰기)을 살렸다. 참여연대는 민주주의의 미래는 외국처럼 시민의 참여와 연대라고 뜻이다. 시민운동 차원에는 여야와 상관없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은 여야와 상관없이 지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명박 서울시장 재직시에는 같이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아이디어가 많고, 부지런하며 꼼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사한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 계기가 있다. 표면상으로 2008년 촛불집회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2008년 촛불집회는 5월 “미친소”에 대한 여학생들의 작은 집회로 시작됐다. 6월 초 대형집회로 급팽창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민단체가 주관하고 마지막에는 깃발이 남무하고 경찰과 격렬한 대치 끝에 3개월간의 촛불은 꺼졌다. 촛불집회는 2011년 시민단체들이 정치참여를 선언하는 계기다. 대형집회 당시 촛불집회의 자금출처를 찾으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 고(故) 노무현 전대통령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내사를 받기 시작했다. 특히 노전대통령과 주변에 대한 조사가 집중되었다. 노전대통령의 친형이 구속되었고 결국 2009년 4월 대검찰청 중수부에 출두했다. 한 달 후 칩거중이던 노전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렸다. 노전대통령 추모 열풍 당시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단체가 국정원 조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폐족이던 친노가 2010년 선거에서 두각을 보였고, 2011년에 친노와 시민단체가 합쳐 민주통합당을 만들었다. 촛불과 추모가 합친 결과다. 촛불과 추모에는 노전대통령이 없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만”의 오랜 결과기도 하다. 현재는 민주주의의 과거인 학생운동과 민주주의의 미래인 시민운동이 어정쩡하게 옆에 있는 상태다. 안원장의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안원장의 진정한 멘토는 박원순 변호사

서울시장 후보를 17분 만의 대화로 양보했다는 사실은 이미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기업인이자 학자인 안철수 원장과 시민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가 다른 길을 걷어 왔으면서 동일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주제다. 물음에 답하기 전에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05년 3월부터 2009년 2월까지 4년 동안 포스코 사외이사로 같이 활동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1년 먼저 사외이사를 시작했으며 임기를 못 채우고 2009년 2월에 사외이사를 그만뒀다. 촛불의 영향인 것으로 추측된다. 안철수 원장은 2년 더 사외이사로 활동했고 2010년에는 포스코 이사회의장까지 역임했다. 두 사람이 사외이사로 있었던 2009년 1월 이구택 포스코 회장이 이사회에 도중사의를 표명했다. 그 다음 포스코 회장이 창업주인 박태준 명예회장 및 원로그룹의 의사와 반대되고 이명박 정권쪽에서 선택한 회장이 선출되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물론 이사회에서 주장하는 내부 임용은 이루어졌다. 그 이후 포스코는 다른 여러 가지 외압설에 휩싸였으며 성장이 지체됐고 신용등급이 하락했다. 이명박 정권 도중 대기업 집단 중에서 계열사가 가장 많이 증가했고 경쟁력이 악화됐다.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한 철강왕의 발언권이 점차 축소되었으며, 지난해 돌아가셨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다. 포스코는 주인 없는 기업이라 외압에 약하고, 그래서 다른 기업보다 더 사외이사의 역할이 크다. 두 사람이 역할이 제대로 수행했는지, 감시를 철저히 했는지 의문이다. 사외이사가 시민운동의 한 영역이라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시민운동은 누가 감시하는 것일까?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일까? 활동분야도 전공분야도 다른 두 사람의 동선이 2005년부터 겹쳐진다. 박원순 변호사는 2005년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 방문교수로 갔다. 안원장은 2005년에 안철수 연구소의 CEO를 그만두고 스탠퍼드 대학교 벤처 비즈니스 과정을 이수했다. 2005년은 ‘안철수의 인생’이 전환된 순간이다. 10년간의 기업인 생활을 마쳤다. 안철수연구소는 2004년까지 임직원은 300명도 되지 않고, 매출액이 300억이 갓 넘었다. 중소기업을 벗어나는 문턱에서 그만둔 것이다. 물러나면서 기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묻었다. 기업인의 차원을 벗어난 발언이다.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 와튼 스쿨 MBA를 졸업하고 국내로 와서 2008년 9월부터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아름다운 재단 이사직을 맡았다. 이사직을 현재까지 계속해 역임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사회개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시민운동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안원장이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이 공유하는 시민운동이 한국정치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안철수 열풍이 일어났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권에 올 것이 왔다. 정치권이 발전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국민들은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특히 정치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변화욕구가 아마 안 교수를 통해 나온 것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이것을 여러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있지만 저는 오히려 이것을 정치권이 발전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안철수 현상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표현한 사람이 없다. 기성 정치권에 올 것이 왔던 것일까? 한국정치의 미래, 민주주의의 미래가 온 것일까?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 대해 가장 강렬하게 말해왔던 강준만 교수는 “안철수야말로 한국의 선진국화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시민운동이, 재단이 한국사회의 구심점이 될 수 있을까? (추후보강)

X세대 슈퍼스타 안철수가 모르고 지나간 10년(서태지와 안철수)

안철수 원장은 연령으로는 486에 속하지만 오히려 486 다음 세대인 X세대의 특징이 더 크다. 그의 가장 적극적 지지자는 X세대이고, 소극적 지지자는 동년배인 486이다. 안원장의 매력 포인트를 찾기 위해서는 90년대 이후 인물과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에 앞서 개인이력부터 조금 살펴보자.

안원장이 1988년에 백신을 개발했지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부터였다. 컴퓨터교육이 학교 교육과정에 편성되기 시작했던 때가 1990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그는 컴퓨터 전문잡지를 통해 알려졌을 뿐이다. 안철수 원장이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때는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하게 되는 1995년이었다. 그 즈음부터 PC통신 사용자가 급증하기 시작했고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안철수 원장이 미국의 백신업체 맥아피에게 1,000만 달러에 인수 제의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사건이다. 김영삼 정권 당시 쥬라기 공원 영화 한 편이 현대자동차 차 백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똑같다는 엉터리 계산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영화의 가치가 과대 포장된 것처럼, 백신개발도 과대 포장되었다. 경기과열의 시대였다. 장밋빛 전망의 시대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원장은 회사를 창립한지 몇 개월 만에 유학을 갔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한국에 남은 직원들이 2년 동안 회사를 열심히 키운 덕분에 인수 제의가 들어올 수 있었다.

안철수연구소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였다. 체르노빌 바이러스(CIH 바이러스)가 결정적이었다. 처음으로 흑자로 전환됐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고 일반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컴퓨터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알려지게 된 사건이 있다. 바로 인기 예능프로인 무릅팍도사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엄친아는 토크쇼를 기반으로 하는 예능에서 가장 큰 테마중 하나이다. 예능에서는 안철수 원장을 엄친아중 엄친아로 분류할 수 있다. 아버지가 병원원장에 자신은 의학박사, MBA출신에다가 공학석사로 세 개의 학위가 있으며, 이사회의장, 포스코 사외이사, 석좌교수이니 뭐 빠질만한 게 없다. 안원장의 부인과 딸, 형제들은 제외해도 이야기꺼리는 무궁무진하다. 예능의 수혜를 받기에 충분하다. 물론 예능이란 직장인과 주부가 스트레스로 지친 밤에 그냥 한번 웃을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일 뿐이다. 안원장과 같은 명사에게도 평범한 고민이 있고 어려운 에피소드가 있는 것에 자기위안을 얻을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물론 안원장은 반짝 스타가 아니다. 1990년부터 거의 매년 책을 펴내왔고 일관된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전문가적인 이미지로 인해서 안원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과 비견되는 기업가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이후 가장 성공적인 기업가 이미지로 이건희 회장과 안원장을 꼽는다. 물론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매출액이 2,500배 차이가 나며, 회사 연혁도 한 갑자(60년)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감히 범접할 수 없고, 특검도 피해가는 이건희 회장과 친숙한 안원장 이미지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둘이 나란히 설 수 있는 부분은 두 사람이 대척점에 있다는 애기다. 그렇게 포지셔닝(positioning) 되어 있다는 뜻이다. 안원장 스스로 삼성동물원, LG동물원을 이야기했으며 미국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불세출의 천재이미지를 차용해왔기 때문에 그런 자리매김이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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