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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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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40회 작성일 17-08-0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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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태수행(雁門太守行)

相和歌辭·瑟調曲》

- 樂府舊題 -


《후한서(後漢書)·순리열전(循吏列傳)》 에 실려있는 신존인물인 왕환(王渙 : ? - 105)이 낙양령(洛陽令)으로 이룩한 정치적 공적을 찬양한 작품으로, 이상적인 유가의 왕도정치를 선양하기 위해 제삼자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선치(善治)의 행적을 열거했다. 《안문태수행》은 전체적으로 각운까지 갖추어진 사언 위주의 운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실존인물을 내세워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한정하고, 그가 관리로써 발을 내디딘 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치적과 후세의 평가 등을 마치 사전문(史傳文)을 기록하듯 객관적으로 서술한 《안문태수행》은 그 흔한 흥도 쓰이지 않았고 비유 언어나 상징법도 찾아볼 수 없다. 즉 이는 특별한 수사기교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일정한 이야기를 운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좌다.

孝和帝在時(효화제재시)

후한의 화제(和帝) 치세 때

洛陽令王君(낙양령왕군)

낙양령 왕군은


本自益州廣漢蜀民(본자익주광한촉민)

원래 익주 광한 출신의 촉나라 사람으로


少行宦(소행환)

젊어서부터 벼슬길에 나서서


學通五經論(학통오경론)

오경과 논어를 배워 통달했다.


明知法令(명지법령)

법령에 밝았으며


曆世衣冠(역세의관)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살았다.


以溫補洛陽令(이온보낙양령)

온령(溫令)에서 낙양령으로 보직되었는데


治行致賢(치행치현)

낙양을 어질게 다스렸다.


擁護百姓(옹호백성)

백성들을 보살피고


子養萬民(자양만민)

부모가 자식 돌보듯 만민을 사랑했다.


外行猛政(외행맹정)

밖으로는 엄한 정치를 행하고


內懷慈仁(내회자인)

안으로는 자애롭고 인자했다.


文武備具(문무비구)

문무를 고추 갖추고


料民富貧(요민부빈)

백성들의 빈부까지 헤아렸으며


移惡子姓(이오자성)

불량한 자제들을 옮겨다


篇著裏端(편저이단)

마을 어귀에 이름을 붙여 놓았고


傷殺人(상살인)

사람을 상하거나 죽인 자는


比伍同罪對門(비오동죄대문)

다섯 집의 이웃에 죄를 물었고


禁鍪矛八尺(금무모팔척)

창의 길이는 팔 척을 넘지 못하게 금했다.


捕輕薄少年(포경박소년)

경박한 젊은이들을 붙잡아


加笞決罪(가태결죄)

곤장으로 죄를 다스리고


詣馬市論(지마시론)

말시장에서 죄를 논하게 했다.


無妄發賦(무망발부)

함부로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며


念在理冤(염재이원)

억울한 일을 처리하는데 유념했고


敕吏正獄(칙리정옥)

아전들에게 칙령을 내려 옥사를 바르게 했으며


不得苛煩(부득가번)

가혹하거나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財用錢三十(재용전삼십)

빈민에게는 세금으로 30전 만 내게 하고


買繩禮竿(매승예간)

농사에 필요한 새끼줄이나 대나무를 준비하게 했다.


賢哉賢哉(현재현재)

어질도다, 어질도다!


我縣王君(아현왕군)

우리 고을 원님이신 왕군이시어!


臣吏衣冠(신리의관)

아전들의 모범이 되시고


奉事皇帝(봉사황제)

황제를 받들면서


功曹主簿(공조주부)

공조와 주부에게


皆得其人(개득기인)

모두 적절한 인물들을 기용했다.


臨部居職(임부거직)

관직에 있을 때는


不敢行恩(불감행은)

감히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지 않았고


清身苦體(청신고체)

청렴한 몸으로 고생하면서


夙夜勞勤(숙야노동)

밤낮으로 애쓰시니


治有能名(치유능명)

치세에 이름을 날려


遠近所聞(원근소문)

원근을 불구하고 명성이 자자하다.


天年不遂(천년불수)

하지만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早就奄昏(조취엄혼)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네


爲君作祠(위군작사)

그분을 위해 사당을 지으니


安陽亭西(안양정서)

안양정 서쪽인데


欲令後世(욕령후세)

그 이름 후세에 알려


莫不稱傳(막불칭전)

칭송하며 길이 전하게 하리라!

《후한서(後漢書)·왕환전(王渙傳)》

왕환의 자는 치자(稚子)이고 익주(益州) 광한(廣漢) 겹현(郪縣) 출신이다. 젊었을 때는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몸을 드러내어 부당하게 핍박받고 있는 약자를 도왔다. 평소에 힘과 무예를 숭상하여 굳세고 사나우며 민첩한 젊은이들과 어울렸다. 후에 성격을 개변한 왕환은 유학에 심취하여《상서(尚書)》를 배우고 율령을 연구하여 전적의 주요한 뜻과 대체를 요해했다. 후에 군의 태수 직에 있던 진총(陳寵) 수하에서 공조(功曹)의 직을 수행하면서 자기의 직책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단을 행했다. 그리고는 관할 구역의 호족이나 대지주들과는 왕래를 하지 않았다. 왕환의 활약으로 인해 명성이 천하를 크게 진동시킨 진충이 승진하여 중앙조정으로 불려가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화제가 진충에게 물었다.

“경이 군의 태수로 있을 때 어쩐 방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기에 치세를 오게 했소?”

진충이 대답했다.

“신이 공조로 임명한 왕환의 공적 때문입니다. 그로 하여금 재능이 있는 인재들을 선발하여 각종 일을 맡기게 했습니다. 또한 주부로 임명한 심현미(鐔顯彌)로 하여금 관할 내의 취약지를 살피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신은 단지 황제께서 내린 조서의 내용을 받들어 그들에게 전했을 뿐입니다.”

화제가 대단히 기뻐했다. 왕환은 이로써 이름이 나게 되었다. 이에 익주의 관아는 왕환을 무재(茂才)로 천거하자 조정은 그를 온현의 현령으로 임명했다. 당시 온현의 관할지역에는 수많은 범법자들이 제멋대로 활개치고 다니고 있어 오랫동안 거주민들에게는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다. 왕환은 대책을 세워 그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여 모조리 살해했다. 이로써 온현의 경내는 안정되어 상인들이 집 밖에서 노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소를 방목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가 자기들은 왕환의 수하라고 말하면서 감히 법을 범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왕환은 온현의 현령으로 지낸지 3년 만에 연주자사로 승진했다. 그는 관하의 군현을 엄격하게 규찰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온 천하를 크게 진동시켰다. 후에 요언과 성실하지 못하다고 탄핵을 받아 죄를 얻어 관직에서 파편되었다. 그리고 1년여 후에 조정에 불려가 시어사(侍禦史)로 임명되었다. 영원(永元) 15년은 서기 104년이다. 이 해에 왕환은 강남으로 순행하는 화제를 수행하고 낙양으로 돌아와서는 낙양의 현령에 임명되었다. 자기관리에 엄격했던 왕환은 정무를 청렴하고 공정하게 수행했다. 안건의 대한 처리는 사안에 따라 관대하거나 엄격하게 했다. 안건 들 중 억울한 사정이 발견되면 소장을 오래 지체시켜 그 동안에 관부가 판결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법률과 정리(情理) 중 어떤 것을 따라야할지 명백하게 밝히기를 어렵게 만든 후에 사람들이 그 안건에 대해 믿고 따를 수 있는 안건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면 비로소 명백하게 진위를 모두 밝혀 판결함으로써 사람들이 품을 수 있는 의혹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처결했다. 동시에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그때까지 은폐되고 있었던 범법자가 범법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낙양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수완을 칭송하면서 탄복했다. 사람들은 왕환을 마치 지혜와 묘책을 지닌 신선처럼 여겼다. 원흥(元興) 원년인 서기 105년 한참 나이의 왕환이 갑자기 병으로 죽자 백성들은 모두 길거리에 나와 탄식했다. 남녀노소가 공동으로 돈을 각출하여 제사에 소용되는 술을 가져왔는데 그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다. 왕환의 영구가 서쪽의 고향으로 가다가 홍농현(弘農縣)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수많은 백성들이 노변에서 큰 쟁반에다 술잔과 접시를 담아 제사를 올렸다. 관리들이 그 연고를 묻자 백성들은 모두가 한 입이 되어 말하기를 예전에는 쌀을 가지고 낙양에 들어가면 성문을 지키던 사졸들에게 자기들이 가져온 쟁반으로쌀을 빼앗겨 늘상 쌀을 절반이나 손실이 났는데 왕환이 낙양령으로 부임한 후부터는 다시는 관리들에게 빼앗기지 않게 되어 술잔과 안주를 준비해서 제례를 올려 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왕환의 정치적 치적에 백성들은 그와 같은 정도로 감동했다. 왕환의 은덕을 그리워한 백성들은 안양정(安陽亭) 서쪽에 사당 한 채를 세우고 때가 되면 제품을 준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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