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흥망성쇠론) > 열국지평설

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흥망성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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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7,271회 작성일 04-05-1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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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 말미에 전재된 전한의 가의가 쓴 진나라의 흥망성쇠론이다. 진나라가 어떻게 해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할 수 있었고 그 긴 세월을 걸쳐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이룩한 진나라라는 통일제국이 14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망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2100여전 전에 쓰여졌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대단히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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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진 론(過秦論)

가의(賈誼)


“ 진나라가 산동의 육국을 병합하고 그 땅을 30여 군(郡)으로 만든 후에 나루터와 관문을 정비하고 험지에 의지하여 훈련된 갑병으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산란한 수자리에 나가는 병졸 수백 명을 규합한 진섭(陳涉)이 두 팔로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외치니 활이나 극을 든 병사 대신에 단지 호미와 곰방메 및 굵은 몽둥이만을 든 백성들이 호응하여 달려왔다. 그들은 오로지 사람이 사는 집만을 바라보고 달려가 식사를 얻어먹으면서 천하를 종힁으로 누볐다. 진나라 사람들은 험지에 의지하여 대항하지도 못하고, 관문도 닫지 않았으며. 장극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았으며 강노(强弩)가 있었으나 쏘지도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나라 깊숙이 쳐들어와 홍문(鴻門)에서 싸울 때는 울타리와 같은 장애물도 없었다. 이러한 때에 산동에서 란이 일어나 제후들이 일제히 봉기하고 영웅호걸들이 차례로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진나라가 장한(章邯)을 장수로 삼아 동쪽으로 나아가 반란군들을 진압하도록 했다. 장한은 자기가 거느린 삼군의 숫자가 많음을 기화로 외부의 제후들과 협상을 벌리면서 오히려 그의 임금을 도모하려고 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지 못하니 일이 그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자영(子嬰)이 이세의 뒤를 이어 진왕으로 섰으나 그도 결국은 깨닫지 못했다. 만약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을 갖고 있었고 또한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장상(將相)의 보좌만이라도 얻었다면 비록 산동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는 하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의 제사 또한 결코 끊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나라 땅은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어 사방이 요새로 둘러싸인 나라이다. 목공(穆公)으로부터 진왕(秦王) 정(政)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의 군주가 모두 패자가 되었는데 어찌 그들이 모두 현명해서였기 때문이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지형과 지세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의 제후들이 옛날에 일찍이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쳐서 진나라를 공격했었다. 그 당시에 천하의 현인(賢人)과 지사(智士)들이 모두 모였고 양장(良將)들은 각국의 군사들을 지휘하였으며 현상(賢相)들은 각기 자기들의 계책과 지략을 서로 상의하여 진나라를 도모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험난한 지형에 가로막혀 더 이상 진나라 영토 안으로 진격할 수 가 없었다. 제후들을 자기들의 경내 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친 진나라는 제후들의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관새(關塞)의 문을 열고 반격을 가했다. 결국 산동의 제후들이 이끌던 백만 대군은 패주하고 붕궤 되었다. 이것은 산동의 군사들이 용기가 없거나 역량이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지형이 불리하고 지세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는 조그만 고을들을 병합하여 대성으로 만들었고 지세가 험악한 관새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또한 영루를 높이 세우기만 할뿐 나가 싸우지 않도록 했으며, 관문을 닫아걸고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극을 메고 단지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제후들이 진나라를 공격한 것은 일개 필부에서 일어난 제후들이라 이(利)로써 합한 것이지 소왕(素王)1)의 행한 바를 따르려고 해서가 아닌 것이다. 서로간의 교분도 친밀하지 않았으며 그 아랫사람들은 의견을 통일시키지 못했으며 명분은 진나라를 멸한다 했으면서 기실은 이를 탐한 것이다. 그들이 일단 진국의 험난한 지형을 돌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필시 군사를 물리쳤을 것이다. 그 사이에 진국은 군사들을 위로하고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산동의 제후들이 피폐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약자를 도와주고 강자를 억누르며 대국의 군주로써의 영을 세운다면 어찌 천하를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할 수 있었겠는가? 몸은 천자의 귀함을 얻고 부는 천하를 가질 수 있었는데 오히려 그 몸은 남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 스스로 망국의 상황을 만회해 보려는 책략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진왕은 자기가 이룩한 공업에 스스로 만족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한 가지의 잘못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이세(二世)가 그의 부왕(父王)의 잘못을 답습하여 계속해서 고치지 않고 잔학무도하여 죄형을 더욱 무겁게 하여 화환(禍患)을 불러들였다. 자영(子嬰)은 고립무원(孤立無援)하여 스스로 위험한 곳으로 뛰어 들었으니 그것은 그가 유약(柔弱)하고 주위에 보좌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의 진나라 군주가 모두 일생동안 미혹 속에서 살았으면서도 결국은 깨닫지 못하여 진국(秦國)은 멸망한 것이라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세상에는 세상의 형세변화에 밝은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선비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진왕들에게 충성된 마음을 다하여 주상의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바로 진국(秦國)의 풍습이 너무나 많은 금기(禁忌)가 있어 충성된 말을 했다가는 말도 끝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고 몸은 육시(戮屍)가 되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선비들은 귀를 기우려 듣기만을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두 다리를 한데 모아 서있으면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진국(秦國)의 세 왕은 실도(失道)를 하고 충신들은 감히 간언(諫言)을 드리지 못하고 지혜로운 선비들은 감히 그 계책을 내지 못한 것이다. 천하가 이미 란을 일으켰으나 간사한 무리들이 이 일을 임금에게 알리지도 않았으니 어찌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진국(秦國)의 선왕(先王)들은 상하의 의사소통이 막히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士)를 두었고 법을 세우고 형벌을 세웠다. 천하가 이 일로 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진국(秦國)이 강할 때는 제후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고 반란을 평정하니 제후들이 복종하였고 진국(秦國)이 쇠약(衰弱)할 때는 오패(五覇)가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토벌했음으로 제후들이 따르게 된 것이었다. 진국(秦國)의 땅이 다른 나라에 의해 점령당하여 축소되었을 때에는 관새(關塞) 안으로 후퇴하여 지키고 밖으로는 제후의 나라들과 친근하게 지내어 능히 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 진국(秦國)이 번성(繁盛)하게 되자 그들이 엄한 법과 혹형(酷刑)은 천하를 떨게 만들었고 결국은 진국이 쇠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백성들은 진국의 엄한 법과 혹형을 원망하게 되어 천하가 모두 진국에게 반기를 들게 된 것이다. 주나라는 오작(五爵)2)의 체제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천년이 넘게 유지할 수 있었으나 진나라는 그것의 본말을 뒤집어 없애 버리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망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살펴보건대 안전하고 위험한 것의 원리는 서로 대치되어 차이가 크다고 하겠다. 속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은 다면 후일의 거울로 삼을 수 있다.”3)

이런 이유로 해서 군주들은 나라를 다스릴 때에 상고의 일을 살펴서 당세의 정황을 검증했고, 다시 인사의 일을 살펴보고 성쇠의 이치를 고찰했다. 또한 모략과 형세가 적합한 지를 자세하게 살펴 취사의 순서로 삼아 변화의 때를 알게 됨으로 해서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록 사직을 안정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진효공(秦孝公)은 효함(殽函)의 견고함에 의지하고 옹주(雍州)의 지세를 싸안으면서 군신이 한 마음으로 변경을 굳게 지키며 주왕실을 엿보며 천하를 석권하고 사해(四海)를 자루 속에 쓸어 담아 천하를 집어 삼키려 했다. 또한 당시 효공을 보좌했던 상군(商君)은 안으로는 법도를 세워 농사와 산업에 힘쓰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방어전을 준비하고, 밖으로는 연형(連衡)의 계책을 써서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든 채로 하서(河西) 이동의 땅을 비로소 차지하게 되었다.

효공의 공업을 계승한 혜왕(惠王)과 무왕(武王)이 그의 정책을 계속해서 이어받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빼앗고, 동쪽으로 진출하여 점거한 비옥한 토지는 군현으로 삼아 요해지로 만들었다. 이를 두려워한 제후들이 회맹을 행하여 진나라를 쇠약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래서 제후들은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이나 비옥한 땅을 아까워하지 않고 천하의 현사들을 초빙하여 합종책(合縱策)을 실행하고 수호를 맺으며 호상 간에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 당시에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으며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초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어 이를 사군자(四君子)라 불렀다. 그들은 모두가 밝은 지혜를 갖추고 충성스럽고 천하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중하게 여겼다. 사군자들은 합종책을 따르고 연횡책을 버리기로 서로 간에 약조하였으며 한(韓), 위(魏), 연(燕), 초(楚), 제(齊), 조(趙), 송(宋), 위(衛), 중산국(中山國) 등의 군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했다. 당시 육국의 모사(謀士)로는 영월(寧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등이 있었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昭滑), 루완(樓緩), 적경(翟景), 소려(蘇厲), 악의(樂毅) 등의 무리는 각 제후국 사이의 의견을 소통하게 만들었으며, 오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佗),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은 모두 친구들로써 각국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진나라 영토의 10배나 큰 땅에서 백만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관문을 두드리며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관문을 열고 제후들의 군사들을 관문 안으로 맞아 들여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앞으로 나아가 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후퇴하더니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화살 한 개도 허비하지 않고 천하의 제후들을 곤경에 빠지게 한 것이다. 제후들은 이어서 해산하고 서로 간에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그들끼리 영토를 다투어 빼앗아 진나라에 바쳤다. 힘을 축적한 진나라는 9국 제후들의 군사들이 피로에 지쳤을 때 북쪽으로 그들을 뒤쫓아 백만의 군사들을 죽여 시체가 온 천하에 널리게 되었고 시체에서 흐른 피가 강을 이루어 가히 핏물 위에 군사들의 큰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진나라는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제압하고 다시 제후들의 땅을 분할하여 영토로 삼았다. 이에 강한 나라는 진나라에 귀순했으며 약한 나라는 진왕의 신하가 되어 입조하여 조현을 올렸다. 진나라의 왕위는 효문왕(孝文王), 장양왕(庄襄王)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의 재위기간은 짧았기 때문에 특기할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이윽고 진왕의 자리에 진시황(秦始皇)이 오르자 앞서간 육왕(六王)4)들이 남긴 공업을 계승하여 긴 채찍을 높이 들어 천하를 제어하며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던 주나라를 병탄하고 제후들을 멸망시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제도를 정비한 다음에 몽둥이와 채찍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온 천하를 벌벌 떨게 했다. 또한 남쪽으로는 백월(百越)5)의 땅을 취하여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설치하자 백월의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의 목에 줄을 감고 투항해 와서 자기의 목숨을 진나라의 형리에게 맡기게 되었다. 다시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을 축조하게 하고 그것을 울타리 삼아 북쪽의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이어서 몽염이 장성을 넘어 흉노를 700리 밖으로 몰아내자 호인(胡人)들은 감히 남쪽으로 와서 말도 기르지 못하게 되었고 군사를 동원하여 활에 화살을 당겨 원수를 갚을 생각도 감히 못했다. 이어서 선왕들이 행한 치국의 도를 버리고 백가(百家)들이 쓴 책들을 불살라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통치하려고 했다. 이름 있는 대성의 성곽을 허물고 영웅호걸들을 살해했으며 천하의 병기들을 함양에 모두 모아 쇳물로 녹여 종을 주조하고 다시 쇠로 만든 동상 20여 개를 만들어 백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런 다음 화산(華山)을 파서 성을 쌓고 하수를 해자로 삼아 높고 높은 성벽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자에 의지한 성에 살면서 외적의 침입에 방비했다. 양장들을 험관과 요새에 보내어 강력한 쇠뇌로 지키게 했다. 충성스러운 대신들이 있고 예리한 병기로 무장한 정예병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었겠는가?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시황은 마음속으로 관중의 방비는 마치 천리의 철벽으로 둘러친 성벽처럼 견고하여 자자손손에게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업을 이룩했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시황이 죽었으나 그가 남긴 위엄과 풍속은 다른 먼 변방까지 진동했다. 그때 찢어지게 가난한6) 집안 출신에 한낱 농사를 짓는 노예로 살던 진섭(陳涉="陳勝을" 말함)은 이곳저곳으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어양(魚陽)을 지키는 군사로 징발되었다. 진섭의 재능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했고 공자(孔子)자 묵자(墨子)처럼 어진 덕을 지니지도 못했으며, 도주공(陶朱公)7)이나 의돈(猗頓)8)처럼 거만금을 갖고 있던 부자도 아니었다. 그런 진섭이 어떻게 해서 변경을 지키러 가는 군사들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아 십장(什長)의 신분이 되더니 한 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진승은 흩어져 도망치려고 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인솔하여 수백 명에 불과한 군사들의 대장이 되어 몸을 돌려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나무가지를 베어 병장기로 삼고 장대를 뽑아 깃발로 삼으니 천하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어 호응했다. 모여든 백성들은 양식을 짊어지고 진승의 뒤를 따르니 산동의 영웅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진나라와 그 왕족들을 망하게 한 것이다.

더욱이 천하는 약해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고 진나라 옹주(雍州) 땅과 효산과 함곡관은 옛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견고하기가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섭(陳涉)의 지위는 제(齊), 초(楚),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송(宋), 위(衛), 중산국(中山國)등의 군주들의 것에 비해 보잘것없을 정도로 비천했다. 또한 그가 거사를 할 때 사용했던 호미와 곰방메 그리고 가시나무로 만든 창은 제후들이 이끌던 군사들이 사용했던 극(戟)과 갈고리나 창에 비해 날카롭지 않았다. 더욱이 유배되어 변경을 지키러 가던 군사들의 수는 아홉 나라 군주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또한 심모원려에 의해 행군과 용병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도 예전의 모사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의 성패 결과는 서로 달랐고 이룬 공적은 서로 상반되었다. 만약 산동의 각 나라들과 진승이 당시에 갖고 있었던 것들의 장단점과 크고 작음을 각각 헤아려 보고 또한 그들의 권세와 실제로 소유하고 있었던 실력들을 비교해 본다면 둘 사이가 같은 수준이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구구한 옹주(雍州)의 좁은 땅과 천승(千乘)의 작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진나라는 천하 9개 주 중에서 옹주(雍州)를 제외한 나머지 8주의 제후들을 불러 조배(朝拜)의 대열에 세워 오기를 100여 년에 걸쳐 해온 만큼 국력이 강한 나라였다. 그 진나라가 마침내 육국을 합하여 천하를 통합하고 효산과 함곡관 사이에 궁실을 지어 천하를 다스리는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일개 필부였던 진승이 한 번 일어나자 진나라의 칠묘가 무너지고 진왕의 목숨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것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고 공수의 도리를 잘못 적용한 때문이었다.


제후들을 겸병하여 천하를 하나로 만든 진나라가 남면하여 황제라 칭함으로써 사해를 다스리니 천하의 선비들이 귀의하여 순순히 복종했다. 그것은 또한 어찌 된 일인가? 그때 세상에 왕자(王者)가 없어진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나라 왕실은 쇠미해져 오패가 대신 차례로 일어났으나 죽은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천하에 령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은 저나마 무력을 사용하여 강자는 약자를 침략하고 큰나라는 작은나라를 범하여 병혁(兵革)의 일이 쉴 새 없이 일어나 백성들과 군사들이 피폐해 졌다. 결국 진나라는 남면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지존인 천자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가련한 백성들은 모두 자기들의 몸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을 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이다. 어떤 백성이 성심으로 황제를 경모하지 않았겠는가? 이때야말로 바로 마땅히 위엄과 권세로써 이미 이루어진 공업(功業)을 확고하게 하여 나라가 안정되느냐 아니면 위태롭게 되어 무너지느냐의 관건이 달렸던 것이다.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의 진왕은 스스로 자기의 지혜를 과신하고 멋대로 행했다. 그는 공신들도 믿지 않으며 군사들과 백성들을 멀리하고 또한 왕도를 저버리면서 사사로운 권세만을 고집했다. 또한 시서(詩書)와 고적(古籍)을 금하고 가혹한 형법만을 실행했다. 교활한 사술과 권세를 앞에 세우고 인의를 뒷전으로 하여 포학한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려고 했다. 무릇 천하를 겸병하려는 자는 사술과 무력을 중시하는 법이고 천하를 안정시키려는 자는 권변(權變)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중시하는 법이다. 이것은 빼앗는 것과 지키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나라는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천하의 왕자가 되었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다스림의 방법이나 정령을 바꾸지 않았다. 즉 천하를 취할 때와 지킬 때의 방법이 서로 같지 않았던 것이다. 보필하는 사람도 없이 진왕 혼자만의 생각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이 진나라가 그렇게 빨리 멸망한 원인인 것이다. 진왕은 마땅히 상고 때의 정황을 고려하고 상(商)과 주(周)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진나라의 정책을 제정하고 실행했어야 했다. 그랬을 경우 어찌 그가 죽은 바로 다음에 교만하고 사치하며 음락만을 즐기는 나태한 군주가 그렇게 빨리 나타나 나라가 기우러져 결국 멸망의 화를 당했겠는가?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라의 우임금, 은나라의 탕임금,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 나라를 세워 그 이름이 만세에 빛나고 이룬 공업은 오래 간 것이다.

시황이 죽고 이세가 왕위에 오르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 그가 어떤 방법으로 다스리겠는 지를 살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자들은 소매가 짧은 옷이나마 얻어 입을 기대에, 굶주리며 허기에 찬 자들은 술 찌꺼기나 밀기울이나마 얻어먹을 수 있을까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지르는 신음 소리는 새로이 등극한 새로운 임금에게는 자기가 행하여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지침이었다. 고생에 찌든 백성들을 어진 마음으로 달래야 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세가 평범한 사람의 재주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천하의 백성들 마음을 모두 진나라에 모을 수 있었던 방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충신과 현자들을 임용하고 군신이 한 마음이 되어 천하의 우환거리를 걱정했어야 했다. 또한 일찍이 상복을 입었을 때 선제(先帝)의 잘못을 바로 잡고 땅을 나누고 백성들을 분산시켜 공신들의 후손들을 분봉해야 했다. 황실의 자제는 봉국의 제후로 세우고, 천하의 어진 선비들은 예로써 대하고, 감옥을 비우고 육시와 같은 잔인한 형벌을 없애야 했다. 그리고 수노(收帑)9)의 법과 같은 더러운 형벌들을 폐지하여 그들을 모두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나라의 부고를 열어 그 재물과 폐백(幣帛)들을 혼자 어렵게 사는 사람이나 곤궁하여 빈한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했었다. 그 밖에도 노역을 경감해 주고 백성들의 급한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고 법률을 간략하게 하여 형벌을 줄임으로써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어야 했으며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자기의 몸가짐을 개변하고 품행을 수양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 각기 저마다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만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 주고 위엄과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려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사해의 백성들은 모두 스스로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어 기뻐했을 것이다. 비록 교활한 백성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로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는 것만을 두려워하고 황제로부터 마음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며, 모반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신하라 할지라도 자기의 간교한 생각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잔학한 란동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세가 이러한 방법을 행하기는 커녕 오히려 법을 엄하게 하여 무도하게 백성들을 폭정으로 괴롭히고 중단된 아방궁의 축조를 다시 시작했다. 형벌을 번잡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겨 살육을 자행했다. 관리들의 다스림은 더욱 가혹해졌으며 상벌은 그 공정성을 잃고 부세의 부과는 한도가 없게 되어 천하에 공사를 수 없이 벌려놓아 관리들이 능히 그것을 관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어 헐벗고 굶주리게 되었음에도 황제는 구휼(救恤)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간사하고 거짓된 것들이 일제히 창궐하여 상하가 서로 속이게 되어 죄를 얻게 된 자가 수도 없이 많게 되었다. 그 결과 형을 집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길거리에서 다반사로 보게 되었고 그로 인한 고통소리는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다. 군주와 대신들로부터 일반 서민대중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로운 생각을 품게 되었고 몸은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처하게 되어 어디를 가든지 안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이로써 동란에 쉽게 휩쓸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섭(陳涉)이 비록 상탕(商湯)이나 주무왕(周武王)의 어진 덕을 갖추지도 못하고 또한 존귀한 공후(公侯)의 적(籍)도 갖지 못했음에도 대택(大澤)에서 두 팔로 가슴을 두드리며 한번 궐기하자 천하가 그에게 호응하여 진나라 백성들을 위태롭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성군들은 능히 일의 시작과 끝의 결과와 변화를 통찰하여 존망의 관건을 파악하고 이로써 백성들을 통치하는 방법으로 삼아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백성들을 안정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했다면 반역을 일으킨 신하가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필시 그들을 돕는 백성들이 없었을 것이다. 고로 말하기를

‘ 안정된 백성들과 함께라면 의를 행할만 하나 위태로운 백성들하고는 함께 어울리게 되면 그릇된 일을 하기 쉽다.’

라고 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귀하기로는 천자에 이르고 부유하기는 천하가 다 자기 것이었는데 결국은 몸은 살륙(殺戮)을 면치 못한 것은 바로 기우려 가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이세가 저지른 잘못이다.”



1) 소왕(素王)/ 덕이 높아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는 있으나 왕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한다.


2) 오작(五爵)/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등의 오 등급의 작위(爵位)


3) 前事之不忘,後事之師也


4) 육왕(六王)/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庄襄王)을 말하며 기원전 361년 효문왕 원년부터 장양왕이 죽은 기원전 247년 즉 116년 동안의 기간을 말함.


5) 백월(百越)/ 고대에 월족(越族)들이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城), 광서성(廣西省), 월남(越南) 등지에 분포되어 여러 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종족 이름을 백월이라 한 것이다.


6) 원전(元典)의 옹유승추(瓮牖繩樞)를 말하며 그 뜻은 ‘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를 끼워 넣어 창문으로 삼고 새끼줄을 엮어 문지도리를 만든다’는 뜻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일컫는 말.


7) 도주공(陶朱公)/ 구천(句踐)을 도와 그를 패자로 만든 월나라의 재상.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오나라의 부차를 멸망시키자 구천으로부터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갔다. 범려는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꾸어 제나라에 출사하여 벼슬이 상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목축을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스스로를 도주공이라 칭했다. 후세에 전하는 <치부기서(致富奇書)>라는 책은 도주공이 쓴 것이다.


8)의돈(猗頓)/ 노나라의 거부로 원래 가난하게 살다가 도주공이 많은 부를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치부의 도를 물었다. 도주공이 그에게 목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하서의 의씨(猗氏) 땅으로 가서 소와 양을 길러 10년 만에 거만금의 대부호가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일설에는 염업을 일으켜 부호가 되었다고 했다.


9) 수노(收帑)/ 고대의 연좌법(連坐法)으로써 집안의 가장이 죄를 짓게 되면 그 처와 자녀는 모두 관가의 노비가 되는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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