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僭号称王 被脇立庶(참호칭왕 피협입서) > 1부(1~13) 제후굴기

제10회. 僭号称王 被脇立庶(참호칭왕 피협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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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승국 조회 876회 작성일 04-05-1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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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僭号称王 被脇立庶(참호칭왕 피협입서)

왕호를 참칭하는 초무왕 웅통과

송장공의 위협에 굴하여 그 군주를 서출로 바꾸는 제족






무대는 순임금의 후손이 봉해진 제후국 진(陳)나라로 바뀌어, 진환공(陳桓公)의 이모제(異母弟)인 진타(陳他)가 환공과 세자 면(免)을 죽이고 자립하여 진군(陳君)의 자리에 앉았다. 채후(蔡侯)가 그의 동생 채계(蔡季)를 시켜 사냥 중인 진타를 죽이고 그의 조카인 약(躍)을 세웠다. 약이 진려공(陳厲公)이다. 강태공의 강씨들의 제나라가 진씨들의 제나라로 바뀌는 사건 이야기인 사기 진경중전완세가(陳敬仲田完世家)의 초반부 이야기이다.


진려공은 진문공(陳文公)의 작은아들이다. 그 모친은 채후의 딸이다. 문공이 죽자 려공의 형인 포(鮑)가 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환공(陳桓公)이다. 환공과 려공 타(佗)는 배다른 형제이다. 이어서 환공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채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 환공과 태자 면(免)을 죽이고 려공 타를 세웠다. 려공이 진후(陳侯)의 자리에 오르자 다시 채나라 여인을 데려와 부인을 삼았다. 채녀(蔡女)는 려공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미 정을 통하고 있던 채나라 사람이 있었다. 채녀가 수시로 채나라에 드나들며 채인과 통정을 하였다. 려공도 역시 채녀를 따라 그때마다 채나라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환공의 작은아들 진림(陳林)이 려공이 채나라 사람의 힘을 빌려 자기의 부친과 형을 살해한 것에 원한을 품고 채나라 사람과 공모하여 려공을 채나라로 유인하여 죽였다. 진림(陳林)이 스스로 진후(陳侯)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장공(陳庄公)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려공의 아들인 진완(陳完)이 진후(陳侯)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단지 진나라의 대부가 되었다 진완(陳完)의 계보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진문공(陳文公) → ②환공(桓公) 포(鮑) 제 → ③려공 타(他)▶(자) 진완(陳完).

→ 세자(世子) 면(免) →④장공(庄公) 림(林) →⑤선공(宣公) 저구(杵臼)→태자 어구(御寇)


한편 당시 남쪽의 야만국이라는 뜻의 형만(荊蠻)이라고 불리우던 초나라에 웅통이라는 영명한 군주가 나타나 주변의 소제후국들을 병탄하고 다시 주왕실과 동성 제후국인 수나라를 제압하여 왕호를 참칭하였다. 웅통의 시호는 초무왕이고 재위기간은 기원전 740-690년이다. 무왕의 뒤를 아들 웅자가 이어 그 도읍을 지금의 호북성 자귀시인 단양에서 같은 호북성 내의 형주시인 영으로 옮겼다. 웅자의 시호는 초문왕이다. 초문왕은 그의 부왕의 유업을 이어 초나라 주변의 중소제후국들 계속 병합하여 남방의 대국이 되어 중원을 넘보게 되었다.


다시 정나라에서는 희대의 간웅 정장공이 죽고 그의 뒤를 세자인 홀이 이었다. 홀의 시호는 소공이다. 그러나 그 전에 장공은 그 아들 중 지략이 뛰어나 세자의 지위에 위협요소가 될 돌을 그 외가인 송나라에 보내어 그곳에 살게했었다. 정나라 재상 제족이 소공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송나라에 들렸다. 송장공은 자기 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돌을 정백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제족을 협박하여 그 허락을 받아냈다. 송장공은 옛날 정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송상공을 시해한 화독에 의해 추대된 공자풍이다. 공자풍은 공자돌로부터 정백의 자리에 올려주는 대가로 정나라의 성 5개 등 수많은 재물을 요구했다. 이 일로 인해 중원은 다시 전화에 쌓이게 되고 정나라는 정장공의 네 아들이 차례로 군주의 자리에 올라 그 국세는 극도로 약화되게 된다.

정나라의 군주 계보와 정장공의 네 아들들의 권력싸움의 진행 사항은 다음과 같다.

환공(桓公) 정백(鄭伯) 우(友)

기원전 806년 정백으로 시봉-기원전 771년 유왕과 함께 견융의 침입으로 전사 주선왕(周宣王)의 동모제(同母弟)로써 원래는 섬서성(陝西省)의 화현(華縣) 부근에 있던 정(鄭)에 봉해졌다. 후에 환공은 주나라에 환란이 일어 날 것을 예상하고 자기의 봉지를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 부근인 회(檜) 땅으로 옮기고 이름을 신정(新鄭)으로 바꾸어 불렀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 유왕(幽王) 밑에서 사도(司徒)의 직에 있다가 침입한 견융(犬戎)과 싸우다 유왕과 함께 전사했다.


무공(武公) 굴돌 (掘突)

재위 기원전 770- 744 환공(桓公)의 아들로써 정나라에서 봉지를 다스리다가 자기의 부친인 정백(鄭伯) 우(友)가 유왕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유왕이 죽자 신국(申國)으로 망명해 있던 폐태자(廢太子) 의구(宜臼)를 데려와 천자의 자리에 즉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주나라의 경사(卿士)의 직에 제수되었다. 의구(宜臼)가 주평왕(周平王)이다. 이어서 정무공은 회국과 동괵을 차례로 멸하여 정나라를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장공(庄公) 오생(寤生)

재위 743 - 기원전 701년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의 패권(覇權)을 장악하여 일명 소패왕(小覇王)이라고도 불린다. 자기의 생모인 무강(武姜)이 차자인 공숙단과 모의하여 자기를 몰아내고 그를 정백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자 정백이 단을 죽이고 무강을 영(穎) 땅으로 보내 유폐시켰다. 영 땅의 지방관리인 고숙(考叔)이 찾아와 무강을 유폐시킨 것을 잘못이라고 간하여 장공은 무강을 다시 정성(鄭城)으로 데려와 모셨다. 영고숙이 올빼미를 잡아 장공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 이 새의 이름은 올빼미라 하는 낮에는 태산과 같이 큰 것도 볼수 없지만 밤이 되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 사소한 것에는 밝지만 커다란 대의에는 어두운 새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지만 크면 그 어미의 몸통을 쪼아 먹습니다. 그래서 이 새를 불효새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잡아서 먹고 있습니다.

鳥名 , 晝不見泰山,夜能察秋毫, 明于細而暗于大地,小時其母哺之,旣長 乃啄食其母,此乃不孝之鳥,故捕而食之"

장공은 영고숙의 말을 듣고 유폐시킨 모친을 도성으로 데려와 다시 모셨다. 장공은 슬하에 아들을 넷을 두었는데 그가 죽고 네 아들 사이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정나라의 국세가 기우러져 그 후로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후에 당진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과 초나라로 대표되는 남방 세력간에 벌어진 패권싸움에 휘말려 기원전 375년 전국 칠웅 중 하나인 한(韓)에 멸망당할 때까지 정나라 땅에는 전운이 멈출 날이 없게 된다.

↓ 소공(昭公) 홀(忽)

재위 기원전 696년-695년 기원전 701년에 정장공의 뒤를 이었으나 그 해에 송나라의 지원을 받은 려공에 의해 축출되었다. 송나라의 장공(庄公) 풍(馮)이 소공의 즉위를 알리게 위해 사절로 간 정나라의 상경(上卿) 제족(祭足)을 협박하여 당시 송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장공의 차남 자돌(子突-후에 려公)을 복위시키자 소공은 란을 피해 처가인 진(陳)나라로 망명하였다가 려공과 제족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 제족이 려공을 쫓아내고 다시 소공을 불러들였다. 려공 돌은 채나라로 망명하였다. 소공은 다시 그의 둘째 동생 자미(子亹)와 고거미(高渠彌)의 음모로 살해당하고 그 뒤를 자미가 이었다.


려공 돌(突) 재위

기원전 701년 - 695년 다시 제족에 의해 쫓겨나 17년 동안 역성(櫟城)에 거하다 679년에 복위하여 673년까지 재위했다. 송장공(宋庄公)이 제족을 협박하여 려공을 정백의 자리에 올릴 때 정나라의 3개 성에 대한 할지 약속과 그 밖의 보물과 식량을 바치기로 하고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려공이 할지(割地)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송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제족과 틈이 벌어졌다. 려공이 제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제족의 사위인 옹규(雍糾)와 모의하였으나 옹규의 부인이 알고 친정아버지인 제족에게 밀고하여 옹규는 살해당하고 려공은 채나라로 다시 망명하였다. 채나라의 도움으로 정나라 소유인 력읍(<木+樂>邑)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17년간 살며 기회를 노리다가 제환공이 보낸 빈수무(賓須无)의 도움으로 정성(鄭城)으로 들어가 자의(子儀)를 살해하고 정백의 자리에 복귀하였다. 려공이 송장공에게 한 구체적인 약속은 다음과 같다.

1. 송장공(宋庄公)에게 한 약속 정나라의 세 성을 떼어주고, 백옥 백쌍과 황금 만 일, 매년마다 양곡 3만 종(황금 만 일의 중량은 춘추시대 때의 일(鎰)은 약 300그람 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3000키로에 해당하고 양곡 3만 종(鐘)은 일종은 10말 들이 10가마이니 30만 가마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割地三城,白璧百雙,黃金萬鎰, 每年 糧穀三萬鍾

2. 제족(祭足)에게 한 약속 정나라의 국정은 모두 제족이 관장한다.( 國政盡委祭足)


자미(子亹)

기원전 695년에 소공 홀을 시해하였으나 제양공의 유인책에 걸려 그 해에 제나라에서 살해당했다. 제족(祭足)이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국내를 비운사이 장군 고거미(高渠彌)가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던 소공을 살해하고 자미를 추대하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백의 자리를 차지한 자미와 고거미는 제양공에게 정백의 자리를 인정받을 욕심으로 제나라를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제양공의 유인책에 말려든 결과가 되어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살해당했다. 본국에 남아있던 제족(祭足)은 진(陳)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자의(子儀)를 데려가 정백으로 옹립하였다.


자의(子儀)

재위 기원전 695- 680년 자미(子미)가 제나라에서 제양공(齊襄公)에 의해 살해당하자 제족에 의해 추대되어 정백의 자리에 올랐으나, 제환공의 도움을 받은 려공의 공격과 부가(傅假="甫瑕)및" 숙첨(叔詹)의 이반(離叛)으로 려공에게 살해당했다.


려공

정나라 변경 지방인 력읍(<木+樂>邑)에 17년간 살면서 정백의 자리를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다가 제환공(齊桓公)과 제후들의 도움으로 복국에 성공하여 7년간을 재위에 있다가 죽었다. 아들 문공(文公) 첩(捷)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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