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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의 탄생(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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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2,984회 작성일 11-12-20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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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의 탄생


사기 -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史記)]는 사성(史聖) 사마천(司馬遷)이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에 따라 완성한 역사서로, 전설 상의 황제(黃帝) 시대부터 자신이 살았던 한 무제(漢武帝) 때까지 2000여 년을 다루었다. 특히 주나라가 붕괴되면서 등장한 제후국 50개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진(秦)을 비롯한 한(韓)ㆍ위(魏)ㆍ제(齊)ㆍ초(楚)ㆍ연(燕)ㆍ조(趙) 등의 흥망성쇠 과정을 주축으로 한 인물 중심의 통사다. 역사 속에 명멸해 간 제왕과 제후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과 각국의 생존사가 [사기]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정점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려온 상고(上古) 시대는 역사상 가장 치열한 생존싸움이 서려 있었고, 그 아래에서 펼쳐진 개개인들의 힘겨운 삶은 [사기]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역사상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인간의 본질을 가장 날카롭게 파헤친 인간학의 보고(寶庫)라고 보는 이유이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전서이다. 이러한 [사기]는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

[사기]는 다른 역사서들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탄생한 대작으로서, 저자 사마천의 삶과 [사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사마천의 출생 시점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한데 대체적으로 한 경제(漢景帝) 중원(中元) 5년인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다고 본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용문(龍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한 무제 때 사관인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된 역사가였다. 사마천은 아버지가 받들었던 황로(黃老)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면서 천문과 지리, [주역] 및 음양의 원리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0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도인 장안(長安)에 오면서 새로운 세계에 더욱 눈을 뜨게 된다.


사마천은 스무 살 때인 한무제 원삭 3년(기원전 126년)부터 3년 가까이 전국을 유람하여 오늘날의 호남성, 강서성, 절강성, 강소성, 산동성, 하남성 등을 두루 돌아다녔다. 이때의 유람은 훗날 [사기]의 현장성을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돌아오고 나서 20대 후반까지는 경학대사인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을 배워 유학에 대한 식견도 쌓았다. 청나라 학자 왕국유(王國維)의 고증에 의하면 바로 무제 원수(元狩) 5년(기원전 118년), 나이 스물여덟에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었다. 낭중은 한나라 관료 체계에서 낮은 등급에 속했는데도 한 무제는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기 위해 돌아다님)과 봉선(封禪- 중국의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일) 의식에 사마천을 데리고 다녔으니 사마천이 무제의 총애를 상당히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원봉(元封) 원년(기원전 110년) 사마천의 나이 서른여섯이 되던 해, 한 무제는 동쪽 태산에 봉선 의식을 거행하러 순행했는데, 그를 수행하던 태사령 사마담이 낙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때 사마천은 무제의 사신으로 파촉 이남 지역에 새로운 군(郡) 설치 문제를 처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위독해진 아버지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유언을 남겼으니 그 핵심은 역사를 집필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마천은 원봉 3년(기원전108년)에 아버지의 대를 이어 태사령이 되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사마천이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 한 무제는 태초력(太初曆)이라는 새로운 역법을 발표하고 연호를 바꾸고는 봉선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대개 이 무렵 그가 [사기] 집필을 시작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가 [사기]를 온전히 혼자 힘으로 저술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아버지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사기]의 체계를 어느 정도 세워 두었고, 서른일곱 편 정도는 이미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본래 [사기]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으니, 이는 태사공이 지은 책이란 의미로서 아버지에 대한 존칭을 드러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음을 보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한 무제의 눈 밖에 나면서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한나라의 장수 이릉(李陵)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와 싸우다가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씨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 조정의 체면도 깎아렸다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만은 그의 투항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이릉을 변호하여 결국 무제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 법에 따라 주살될 것, 둘째, 돈 오십만 전을 내고 죽음을 면할 것, 셋째, 궁형을 감수할 것. 사마천은 두 번째 방법을 취하고 싶었으나 중인(中人)에 불과했던 그가 그런 거액을 내는 일은 불가능했고 결국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목숨만이라도 부지하여, 역사서를 쓰라는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를 택했다.




궁형의 처절한 고통을 체험한 사마천은 한무제에 대한 원망을 [사기] 전편에 스며들게 했고,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을 통해 역사란 결코 왕후장상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후에 무제에 의해 중서령(中書令)을 제수 받아 다시 무제의 곁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사기] 저술 작업은 상당히 진척된 상태였다. 사마천이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를 쓴 기원전 91년경에는 [사기]가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시점이었다.



사마천의 가족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는 않다. 같은 마을 출신의 아내 양씨(楊氏)가 있다고 전해지며 사마천이 겪어온 길을 함께 동고동락한 현명한 조력자였다고 한다. 아내 이외에 첩도 한 명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사마림(司馬臨)과 사마관(司馬觀)이라는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마천이 죽은 시기도 분불명한데, [사기]를 집필하고 나서 바로 그 해 혹은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기]라는 명칭의 유래

‘사기(史記)’라는 글자는 [사기] 중 [주본기(周本紀)],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천관서(天官書)], [진섭세가(陳涉世家)], [공자세가(孔子世家)], [유림열전(儒林列傳)] 등에 등장한다. 여기서 ‘사기’는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사관의 기록’이라는 의미와 한대의 문장학(文章學)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일컫는 [사기]라는 명칭은 사마천이 붙인 것이 아니다.


[사기]의 후기 격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사마천이 “무릇 130편에 52만 6500자이니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한다.”라고 밝혔듯, 본래 [사기]는 ‘태사공서’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일컬어졌다. 이 ‘태사공기(太史公記)’의 약칭이 바로 ‘사기(史記)’다. 위(魏)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순열(荀悅)이 지은 [한기(漢紀)]라는 책의 권30에 ‘태사공사마천사기(太史公司馬遷史記)’라는 구절이 등장함으로써 정식으로 ‘사기’라는 말이 ‘태사공서’라는 명칭을 대체하게 되었으니,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대략 3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사기]의 집필 과정

[사기] 집필을 가능케 한 사마천의 자료 취재 범위는 어떠하며 그는 그러한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얻은 것인가? 사마천이 사료를 수집하여 그의 책에 반영한 방식은 그 이전과 그 이후 대부분의 역사가들의 작업과는 달랐다. 그가 사료를 채집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사마천은 황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나 문서를 열람했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의 ‘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는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 자신이 본 도서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기] 전체에서 언급된 참고 도서를 통계 내 보면 사마천이 열람한 책은 모두 103종이며, 그 중에서 육경(六經)을 비롯한 서적이 24종, 제자백가서가 52종, 역사ㆍ지리 및 한나라 왕실의 문서가 20종, 문학서가 7종이다. 따라서 사마천이 문헌과 전적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② 금석문(金石文)과 문물(文物), 회화(繪畫), 건축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진시황 본기]를 보면, ‘태산석각(泰山石刻)’, ‘낭야석각(琅邪石刻)’, ‘지부석각(之罘石刻)’ 등의 글을 모두 그대로 수록했다.


③ 돌아다니며 방문하거나 실지 조사를 했다. [태사공자서]에도 사마천이 스무 살 남짓부터 남쪽으로 유람하는 길에 올랐다고 적혀 있다. 그는 동서남북으로 전국을 유람하면서 상고 역사에 관한 전설을 수집했고, 서주왕조의 건국과 경영에 대한 상황을 탐구했으며 학자들이 그에게 전해 준 오류도 바로잡았다. 그는 전국 시대의 이야기, 한나라 초기의 이야기, 옛 전쟁터의 형세, 역사 인물의 삽화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는 일반 백성의 말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중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기]의 모든 편에 걸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제본기]와 [주본기]를 보면 본인이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가 생동감 있게 살아 있다.


2010년 개봉한 중국영화 <조씨고아(趙氏孤兒)>는 [조세가(趙世家)]의 조씨고아 이야기를 극화한 원나라 희곡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것이다.


그러나 [사기]에 사료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많은데, 서술이나 인물 설정에 있어 소설적 색채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대표적 예로 [조세가(趙世家)]를 들 수 있다. 이 편은 네 명의 군주가 꾼 꿈을 통해 조나라 발전사를 서술하는데, 사마천이 주로 의지했던 [좌전(左傳)]이나 [전국책(戰國策)]에는 없는 내용들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 ‘조씨고아(趙氏孤兒)’에 관한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지만, 이 편의 백미라고 할 만큼 상당한 비중으로 서술되어 있다. [육국연표(六國年表)] 서문에서 진나라가 분서를 단행하면서 모든 사료들이 소실되었다고 언급한 데서 보이듯, 역사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소설적 구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부분을 보면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론(史論) 체계가 사마천의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좌전], [국어], [전국책] 등에도 ‘군자왈’이라는 말이 있으며, ‘군자위(君子謂)’라든지 ‘군자이위(君子以爲)’라는 식의 논평이 84가지나 있다. 이러한 형식의 평론은 사론(史論)의 원형임에 틀림없고 사마천이 ‘태사공왈’이라고 한 것도 [좌전]의 ‘군자왈’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사공왈’에서 사마천은 고대 역사에서 증거를 찾아 제시하거나 사적을 유람하면서 얻어들은 것을 서술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물을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하기도 하고 또는 역사적 사실을 풍자하기도 했다. 이렇듯 역사가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태사공왈’은 [사기]를 읽는 진정한 묘미를 주며, 역사가의 일관된 평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책 전체를 혼연일체가 되게 만드는 매개의 구실을 한다.


주목할 점은 사마천의 생애와 집필 시기가 한 무제의 통치 시기와 겹쳐 있다는 사실이다. [사기]는 당시로는 현대사라고 말할 수 있는 무제 시대의 사건과 인물을 상당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무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황제이고 사마천 자신은 그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 기록은 무제와 그의 치세를 비판적으로 그려내는 일과 연관되었으며, 여기에는 사마천 개인이 무제에 대한 사적인 감정도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글 김원중

글쓴이 김원중은 10여 년간 [사기] 번역에 매진하여, 국내 최초로 [사기]를 완역했다. 충남대학교 중문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중문과에서 중국 고전 문학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건양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김원중 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사기], [중국문화사], [고사성어 백과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정사 삼국지], [삼국유사], [정관정요], [한비자], [당시], [송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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