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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섭세가(陳涉世家)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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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7,054회 작성일 12-08-0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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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이 칭왕(稱王)하고 6달만에 죽으면서 후사가 없어 그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나 사마천이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지은 이유는 다음의 네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존한(尊漢),

둘째는 진나라의 폭정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

셋째는 반진의 깃발을 가장 먼저 들었고,

넷째는 당시의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거사를 한 유방(劉邦)은 진섭의 기치 아래에서 기의(起義)한 항량(項梁)의 군대를 접수하여 재편성한 세력에 의지해서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유방은 진섭의 무덤에 30가의 민호를 두어 그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진섭이 맨 처음 난을 일으켜 스스로 진왕이 되어, 휘하의 후왕(侯王)과 장상(將相)들을 보내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진섭세가》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필법으로 크고 작은 20여 개의 기의군(起義軍)에 대해 저술했으나 유독 패공의 기의군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진섭이 죽은 후에 그의 부하 여신(呂臣)이 군사를 일으켜 진(陳)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반란을 일으킨 장가(莊賈)를 살해했다. 진나라의 좌우 교위(校尉)의 공격을 받은 여신은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나다가 경포(黥布)를 얻어 진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위기에 벗어난 여신은 초(楚)나라의 깃발을 다시 올리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항량(項梁)이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모셔와 초왕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섭세가를 하나의 전기물로 저술한 사마천은 그의 필력을 발휘하여 진섭이 거사를 맨 처음 일으키고 그 뒤를 이은 항씨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킨 과정을 기술했다. 비록 유방이 먼저 진나라로 진격하여 그 도성 함양성을 점령했으나, 사마천은 진나라를 멸망시킨 공을 유방에게 돌리지 않고, 진섭을 위해 세가를 짓고, 다시 항우를 위해 본기를 지어 이 두 사람을 높여 진나라를 멸망시킨 공을 돌렸다. 《진섭세가(陳涉世家)》와 《항우본기(項羽本紀)》, 《고조본기(高祖本紀)》 등 세 편을 읽어보면 사마천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이해알 수 있다.】

1. 燕雀安知大鵬之志(연작안지대붕지지)

- 연작이 어찌 대붕의 뜻을 알겠는가! -

진승(陳勝)은 양성(陽城)① 사람으로 자는 섭(涉)이다. 오광(吳廣)은 양하(陽夏)②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진섭이 어렸을 때 남의 집 머슴이 되어 다른 사람들과 농사의 일을 하다가 손을 멈추고 밭두렁에 앉아쉬면서 장탄식과 함께 말했다.

「우리 중 앞으로 누가 어떻게 해서 부귀하게 되거든 빈한했던 지금의 처지를 서로 잊지 말기로 합시다.」

같이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웃으면서 말했다.

「남의 집 머슴 주제와 어찌 부귀하게 된단 말인가?」

동료들의 대답하는 말을 들은 진섭이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오호라! 연작이 어찌 홍곡(鴻鵠)의 큰 뜻을 알리요!」③

2. 大澤鄕起義(대택양기의)

- 대택향에서 인류최초로 신분타파의 기치를 든 진섭 -

이세 원년 7월④ 여문(閭門)⑤의 왼쪽에 살던 빈민들 900명을 어양(漁陽)⑥의 수비병으로 징발했다. 그들이 대택향(大澤鄕)⑦에 소집되어 호적에 따라 재편성될 때 두 사람은 둔장(屯長)⑧이 되었다. 이윽고 그들 일행이 임지를 향해 출발을 하려고 할 때 마침 큰비가 내려 도로가 불통이 되어 이미 정해진 기일에 맞춰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 법으로는 기한을 어겨 임지에 당도하게 되면 모두 참수형에 처하게 되어있었다. 진승과 오광이 모의를 하며 말했다.

「지금 도망가도 후에 잡혀서 죽고, 대의를 밝혀 거사를 일으켜도 역시 죽는다. 죽음을 기다리느니 나라를 위하다 죽는 편이 어떠한가?」

진승이 다시 말했다.

「천하가 이미 진나라의 가혹한 법으로 신음을 한지 오래 되었다. 내가 들으니 이세황제는 작은아들이라 제위를 이어 받을 수 없었고, 마땅히 황제가 될 사람은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扶蘇)였었다. 옛날 부소가 여러 차례 간하자, 시황은 그를 국경 밖으로 내보내 군사들 사이에 두었다. 내가 듣기에 부소에게는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세황제가 살해했다고 했다. 부소가 어진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백성들은 아직 그가 죽었는지 모르고 있다. 또한 초나라 장군 항연(項燕)⑨은 여러 차례 공을 세우고 사졸들을 사랑하다가 싸움 중에 죽어 초나라 사람들은 그를 매우 애처롭게 생각하고 있다. 초나라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그가 죽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싸움에 지고 도망쳐 숨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바로 부소와 항연이라고 자칭하여 우리 일행들을 속인다면 천하가 모두 호응하여 많은 사람이 우리 뒤를 따르지 않겠는가!」

오광이 진승의 말에 찬동하여 즉시 복자(卜者)를 찾아 점을 치려고 했다. 복자가 두 사람의 뜻을 짐작하고는 말했다.

「일이 성사되면 큰공을 세울 수 있소. 그러나 그대들은 그 일을 귀신에게 물어봐야만 하오.」

진승과 오광이 매우 기뻐하며 귀신에게 물어볼 일을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귀신의 위신을 빌려 사람들을 복종시키라는 가르침이다.」

두 사람은 즉시 흰 비단에 붉은 글씨로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쓰고는 어망을 이용해서 물고기를 잡아 그 배속에 넣어 두었다가 사람을 보내 사오게 하여 삶아 먹도록 시켰다. 수졸들이 물고기 배속의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쓴 백서(帛書)를 발견하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다시 아무도 몰래 오광을 시켜 수졸들이 숙영하고 있는 부근의 황폐한 사당에 가서 한 밤중에 장작불을 피워 놓고 여우 목소리를 흉내내어 외치도록 했다.

「초나라가 크게 일어나고 진승은 왕이 되리라!大興楚, 陳勝王]」

수졸들은 한 밤중에 일어난 괴이한 일에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수졸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난밤의 일을 이야기하며 모두 진승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3. 王侯將相元無種子(왕후장상원무종자)

- 왕후장상은 원래 종자가 따로 없는 법이다. -

오광은 평소에 주위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많은 수졸들이 기꺼이 그의 말을 따랐다. 장위(將尉)⑩가 취했을 때 오광은 여러 번에 걸쳐 수졸들을 향해 도망치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장위가 분노하여 자기를 욕보이게 함으로 해서 수졸들을 격노케 했다. 장위가 과연 오광을 붙잡아 태형을 가하고 다시 검을 빼어들자, 광이 갑자기 일어나 장위의 칼을 빼앗아 그를 살해했다. 진승이 오광을 거들어 남은 한 명의 위(尉)도 같이 살해했다. 이어서 진승은 수졸들을 불러 모아 호소했다.

「여러분들은 큰비를 만나 모두가 임지에 당도해야 하는 시기를 놓쳤다. 기한을 어기면 참수형에 처해짐은 진나라의 법이다. 비록 운이 좋아 참수형을 면한다 할지라도, 변방을 지키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10명 중 6-7명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대장부가 설사 죽지 않는다 해도 구차한 목숨에 연연하기만 하면 되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이름은 후세에 남겨야 되지 않겠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 부하 도졸(徒卒)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에 진승과 오광은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을 사칭하고 거사를 일으켜 백성들이 바라는 바를 따랐다. 수졸들이 모두 오른쪽 어깨를 들어내 놓고 맹세를⑪하며 국호를 대초(大楚)라 정했다. 이어서 높은 단을 세우고, 살해한 진나라의 도위(都尉)들의 목을 잘라 제물로 바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진승은 스스로 장군이 되고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진승과 오광은 수졸들을 이끌고 대택향의 관아를 습격하고 계속해서 병력과 장비를 모아 기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嬰)에게 군사를 내주어 기현(蘄縣) 이동으로 나아가 그곳의 땅을 점령하도록 했다. 자기는 계속 서쪽으로 진격하여 질(銍), 찬(酇), 고(苦), 자(柘), 초(譙)⑫ 등의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다. 진승의 본대가 행군하면서 계속 군사를 모아, 이윽고 진성(陳城)⑬에 당도했을 때는 전차 6-7백 승(乘), 기병 천여 기(騎)에 보졸은 수만에 달했다. 진승의 군사들이 진성을 공격할 때는 진군(陳郡) 태수는 달아나 버리고 군승(郡丞)이 혼자 남아 초문(譙門)⑭에서 항거했다. 그러나 진성의 군승은 진승의 군사들을 막아내지 못하고 싸움에서 패하고 란군 중에 죽었다.

4. 陳勝爲王(진승위왕)

- 농노출신의 진승이 진왕(陳王)이 되다. -

진성에 입성한 진승은 며칠이 지나자 호령을 발하여 관할구역 내의 삼로(三老)와 호걸(豪傑)들을 불러 장래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삼로와 호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장군께서는 견고한 갑옷을 몸에 두르고, 예리한 무기를 손에 들고서 무도한 자들을 정벌하고, 포악한 진나라 관리들을 주살하셨습니다. 이로써 초나라의 사직을 다시 세우셨으니 그 공은 마땅히 왕이 되시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진승은 왕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그 당시 천하 군현의 백성들은 진나라 관리들로 인해 시달림을 받아왔기 때문에 모두 들고일어나 그 수장들을 처벌하거나 죽이고 진섭의 기의(起義)에 호응했다. 진승은 곧이어 오광을 가왕(假王)에 임명하여 서쪽의 형양성(滎陽城)을 공격하는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도록 했다. 다른 한편 진현(陳縣) 출신인 무신(武臣), 장이(張耳), 진여(陳餘)에게 군사를 내주며 옛날 조나라 땅을 점령하도록 하고 여음인(汝陰人)⑮ 등종(鄧宗)에게는 구강군(九江郡)⑯으로 진격하여 평정하도록 했다. 이때에 이르러 초나라 군대에 합류하는 사람들은 한꺼번에 수천 명씩 몰려들어 그 숫자를 미처 헤아릴 수 없었다.

갈영(葛嬰)이 동성(東城)⑰에 이르렀을 때 양강(襄强)이라는 사람을 찾아 초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에 진승(陳勝)이 이미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갈영은 양강을 죽이고 진현으로 돌아와 그 일을 고했으나 진승은 그를 죽였다.

진왕이 위(魏)나라 사람 주불(周巿)에게 군사를 주어 옛날 위나라의 땅을 점령하도록 했다. 오광이 제장들을 거느리고 형양을 포위해 공격했으나 당시의 삼천군(三川郡)⑱태수 이유(李由)⑲가 굳게 지켰음으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 진승이 나라 안의 여러 호걸들을 불러 계책을 같이 논의한 결과, 상채인(上蔡人)⑳ 방군(房君)㉒ 채사(蔡賜)를 상주국(上柱國)㉓으로 삼았다.

5. 진장장한(秦將章邯)

주문(周文)은 진현(陳縣) 출신의 현인(賢人)이다. 옛날 초나라 장수 항연(項燕) 밑에서 시일(視日)㉔의 직에 있었고, 그 보다 일찍이는 춘신군(春信君) 황헐(黃歇)을 받든 적이 있었다. 병사의 일에 밝다고 스스로 말했기 때문에 진승은 그에게 장군의 인을 주어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주문의 군사가 행군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계속 자원했음으로 그들이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을 때는 전차는 천 승, 병사는 십 수만 명에 달했다. 주장이 함곡관을 돌파해서 희수(戱水) 강안에 당도해 주둔하자, 진나라 조정은 소부(少府)㉕의 직에 있었던 장한(章邯)에게 여산(驪山)의 진시황릉 공사에 동원된 죄수들과 노예들의 자식들을 사면한 후에 군사로 모두 징발하여 주문의 초나라 군사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주문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함곡관으로 나와 조양(曹陽)㉖)에서 2-3개월 주둔했다. 장한이 그 뒤를 추격해 오자 주문과 그 군사들은 다시 달아나 민지(澠池)에서 머물며 10여 일 숙영했다. 계속 도망치는 초군의 뒤를 추격한 장한이 이끄는 진군의 공격을 받은 초군은 크게 패하고 주문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로써 주문을 따라나섰던 초나라 군사들은 싸움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무신(武臣)이 한단(邯鄲)에 입성하여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고,진여(陳餘)는 대장군, 장이(張耳)와 소소(召騷)는 각각 좌우 승상이 되었다. 진왕(陳王)이 듣고 노하여 무신 등의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하여 죽이려고 했다. 상주국 채사(蔡賜)가 간하며 말했다.

「진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는데, 조왕과 장상(將相)의 가족들을 죽인다면 이것은 또 다른 진나라를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일이 이리 되었으니 무신을 조왕으로 임명하십시오.」

진왕(陳王)이 즉시 사자를 보내 조왕의 자리에 오른 무신을 축하하고, 조왕과 그 장상들의 가족들을 불러 궁중에 살게 했다. 이어서 장이의 아들 장오(張敖)를 성도군(成都君)으로 봉하고 조나라 땅의 군사를 모아 신속히 관중으로 진격하도록 명했다. 조나라의 장상들이 계책을 의논하며 조왕에게 말했다.

「왕을 조왕으로 세운 일은 진왕의 진정한 뜻이 아닙니다. 초나라가 진(秦)나라를 멸하게 되면 그 즉시 군사를 돌려 조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진나라를 향해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는 대신 차라리 북쪽의 연나라 지방으로 진군시켜 점령하도록 하십시오. 연나라를 점령하여 우리의 영지를 넓히는 일이야말로 최상의 계책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나라는 남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라는 후방기지를 갖게 되어, 후에 초나라가 비록 진나라를 멸하더라도 감히 조나라를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초나라가 진나라를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그 힘이 약화되어 그들은 우리 조나라를 가볍게 볼 수 없게 되고 그러다가 기회를 보아 진나라가 피로해진 틈을 탄다면 조나라는 천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조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고 옛날 상곡(上谷)㉗의 졸사(卒史)㉘였던 한광(韓廣)에게 군사를 떼어 주어 연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했다.

연나라의 옛날 귀족과 호걸들이 한광에게 와서 말했다.

「초나라가 이미 서서 왕을 칭하자, 조나라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연나라 땅은 비록 작다고는 하나 역시 만승(萬乘)의 나라이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연왕(燕王)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한광이 대답했다.

「이 사람의 모친이 조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연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조나라는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걱정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어 그 힘으로는 우리 연나라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세력이 강한 초나라도 감히 조왕과 그 장상들의 가족들을 해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조나라가 감히 장군과 장상들의 가족들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한광이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자 조나라는 연왕의 모친과 그 가족들을 거두어 연나라에 보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들을 이끌고 여러 지방들을 공략하던 장군들의 수효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때 주불(周巿)은 위나라 땅을 거쳐 북쪽으로 진격하여 적(狄)㉙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적현(狄縣) 사람 전담(田儋)이 그곳의 현령을 죽이고 스스로 제왕(齊王)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전담이 제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주불을 공격하자, 주불의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위나라로 돌아간 주불은 위나라 왕족들의 후예인 옛날의 영릉군(寧陵君) 위구(魏咎)를 위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때 위구는 진왕의 처소에 있었음으로 위나라에 가서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이윽고 위나라 땅이 평정되자 사람들은 서로 상의하여 주불을 위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주불이 사양하며 사자를 다섯 번이나 진왕에게 보내 위구를 위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마침내 진왕이 허락하여 위구를 위나라로 보내 위왕에 봉했다. 주불은 위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오광을 따라 출전하여 형양성(滎陽城)을 공격하던 장군 전장(田臧) 등이 서로 모의하며 말했다.

「주장(周章)㉚이 이끌던 부대는 이미 패해, 진나라 군사들은 아마도 조석지간에 이곳에 당도하게 되오. 그런데 우리가 형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진군이 당도하면 우리는 앞뒤에서 협공 당해 크게 패하게 되오. 차라리 형양성을 공격하기에 족한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놓고 정예병을 모두 이끌고 나아가 진군을 맞이해 싸우는 편이 어떻겠소? 더욱이 지금 가왕(假王)은 교만하고 병사의 일에 무지하니 그와는 계책을 논할 수 없는 실정이오.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일이 그르치게 되어 낭패를 당하게 되오.」

그들은 왕의 명이라고 사칭하여 오광을 죽이고 그 머리를 진승에게 보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전장에게 초나라 영윤의 인장을 보내고 상장군에 임명했다. 전장은 즉시 이귀(李歸) 등의 여러 장군들과 형양성을 포위하라 시키고, 자기는 정예병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오창(敖倉)㉛에서 진군과 싸웠으나 전장은 전사하고 초군은 싸움에 져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장한은 군사들을 계속 진격시켜 형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이귀(李歸)와 그 군사들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이귀 등은 그 싸움에서 죽었다.

양성(陽城) 사람 등열(鄧說)의 군대가 담(郯)㉜에 주둔했는데 장한이 휘하의 장수를 보내 공격하자 등열의 군사들은 흩어지고 그 자신은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장한은 계속해서 허(許)에 주둔하고 있던 질(銍) 사람 오서(伍徐)와 군사들을 공격했다. 오서와 그 군사들도 흩어져 진으로 달아났다. 진왕은 등열을 죽였다.

진왕이 처음 반진의 기치를 내걸고 왕위에 올랐을 때 능인(陵人) 진가(秦嘉), 질인(銍人) 동설(董緤), 부리인(符離人) 주계석(朱鷄石), 취려인(取慮人) 정포(鄭布), 서인(徐人) 정질(丁疾) 등은 모두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달려가 동해군 태수 경(慶)을 담(郯)에서 포위했다. 진왕이 그 소식을 듣고 무평군 반(畔)을 장군으로 보내 담을 공격하고 있던 그들의 군사들을 독려하도록 했다. 진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가 된 진가는 무평군의 밑에 들어가 그의 부하장수가 되는 일을 싫어해서 군리들에게 말했다.

「무평군은 나이도 어릴 뿐만 아니라 병사의 일을 알지 못함으로 그의 명을 받들지 말라!」

진가는 진왕의 명을 사칭하여 무평군을 살해했다.

장한이 다시 허현(許縣)의 오서(伍徐)를 격파하고 그 뒤를 추격하여 진현을 공격하자 상주국 채사(蔡賜)는 전사했다. 장한이 다시 군사를 진격시켜 진현의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장하(張賀)의 군사들을 공격했다. 진왕(陳王)이 성안에서 나와 그 싸움을 독전했다. 결국 초군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지고 장하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해 납월(臘月)㉝에 진성을 빼앗긴 진왕은 장한에 쫓겨 하성보(下城父)㉞에에 이르자, 그의 수레를 몰던 어자(御者) 장가(莊賈)가 진왕을 살해하고 진군에게 항복했다. 진승은 탕(碭)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은왕(隱王)이라 했다.

진왕의 옛날 시종이었다가 장군이 된 여신(呂臣)이 창두군(蒼頭軍)㉟을 조직하여 신양(新陽)에서 다시 일어나 진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장가(莊賈)를 잡아서 죽였다. 초나라 도성이었던 진현은 다시 수복되었다.

처음에 진왕이 진현에 들어왔을 때 질인(銍人) 송류(宋留)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남양(南陽)을 점령하고 무관(武關)을 통해 진나라로 들어가도록 명했다. 송류가 명을 따라 남양 땅을 공략하고 무관으로 행군할 때 진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양은 다시 진나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에 무관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송류는 다시 신채(新蔡)로 후퇴하다가 도중에 진군과 조우하게 되었다. 송류는 할 수 없이 휘하의 군사들과 함께 진군에게 항복했다. 진군은 송류를 함양으로 압송하여 거열형에 처해 대중들이 보게 했다.

진가 등의 장수들은 진왕과 그 군사들이 싸움에서 지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옹립한 후에 방여(方輿)㊱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도(定陶)에 주둔하고 있던 진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진가는 공손경(公孫慶)을 제왕에게 사자로 보내 힘을 합쳐 같이 진군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제왕이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 진왕은 싸움 중에 지고 그의 생사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던데, 초나라가 어찌하여 나에게 청하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이에 공손경이 대답했다.

「제나라는 초나라에 청하지도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초나라만 어찌하여 제나라에 청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세울 수가 없단 말입니까? 하물며 반진의 깃발을 맨 먼저 든 나라는 초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천하에 호령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전담은 공손경을 죽였다.

진나라의 좌우(左右) 교위(校尉)가 다시 진성(陳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여신의 군사들이 달아났다. 여신은 달아나는 군사들을 다시 수습하여 후퇴를 하다가 파(鄱)㊲에서 일어나 도적이 된 당양군(當陽君) 경포(黥布)의 군대와 만나 합친 후에, 되돌아서서 좌우 교위가 이끌던 진군을 공격하여 청파(靑波)에서 무찌르고 진성(陳城)을 탈환하여 초나라 도성으로 삼았다. 그때 항량(項梁)은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민가에서 찾아내 초왕으로 세웠다.

6, 화섭위왕(夥涉爲王)

- 진섭이 옛친구를 만나 왕이 되었음을 자랑하다. -

진승은 모두 6달을 왕으로 지냈다. 진승이 왕의 자리에 오르자 그 도성을 진성(陳城)에 두었다. 옛날 진승과 함께 남의 집 머슴살이를 같이 하던 친구가 듣고 진성으로 찾아와 궁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진섭을 만나러 왔소!」

궁문을 지키던 군사들의 대장이 그를 붙잡아 밧줄로 묶으려고 했다. 그가 반복해서 변명을 늘어놓았음으로 놓아주고는 진승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윽고 진왕이 궁문 밖으로 나오자 그는 길을 막아서며 「섭아!」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진왕이 듣고 불러 그가 옛 친구임을 알고 자기 수레에 태워 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 친구가 궁안에 들어와 전당과 거실과 휘장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정말로 화려하구나(夥頤)! 진섭이 왕이 되더니 높고 큰 궁전에 사는구나!」

당시의 초나라 사람들은 ‘다(多)’를 ‘화(夥)’로 말했음으로 천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화섭위왕(夥涉爲王)」㊳이란 말은 진섭에게서 나온 말이다.

7. 맹구주산(猛狗酒酸)

- 술도가를 지키는 개가 사나우면 술은 쉬어빠진다. -

진승의 옛친구는 날이 갈수록 방자해져 진왕의 옛날 일을 떠벌리고 다녔다. 어떤 사람이 진왕에게 말했다.

「그 친구 분이 어리석고 무지하여 망언을 퍼뜨려 대왕의 위신을 깎고 있습니다.」

진승(陳勝)이 사람을 시켜 그 친구를 참수했다. 그러자 진승의 옛날 친구들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에 진왕 곁에는 그의 옛날 친구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진승은 주방(朱房)을 중정(中正)㊴에 호무(胡武)를 사과(司過)㊵로 임명하여 군신들을 규찰하게 했다. 진왕의 여러 장수들이 지방에 파견 나갔다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복명할 때 주방과 호무는 그의 명을 듣지 않은 자들은 모두 잡아다 죄를 주고 사소한 잘못이라도 꼬치꼬치 찾아내어 요란스럽게 처리함으로써 충성심을 표시했다. 그들은 자기들과 친하지 않은 자들은 사법관에 넘겨 공법에 의해 처리하지 않고, 지기들이 직접 행차하여 임의대로 논죄했다. 이에 진왕이 그들을 신임하게 되었다. 진왕의 여러 장수들은 두 사람의 이런 행동 때문에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진왕이 실패한 까닭은 바로 이 일로 인했다.

진왕의 몸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파견한 제후나 장상들이 살아남아 결국은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이것은 진섭이 제일 먼저 반진의 깃발을 들고 거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천하를 통일한 한고조 유방이 탕(碭)에 30호의 민가를 지정하여 그의 무덤을 지키라고 했다. 이에 사람들은 가축을 잡아 제사를 지내오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저선생㊶이 말한다.

「지형이 험하고 막혀 있는 곳은 견고하여 지키기가 용이하고, 병제와 형법이 필요한 이유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이런 지형이나 제도는 믿고 의지할 수 없다. 무릇 옛 선왕들은 인의(仁義)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으며, 견고하고 험준한 요새와 법률제도는 부차적인 수단으로 삼았는데,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가생(賈生)㊷이 한 말을 들었다.」

8. 過秦論(과진론)

- 가의가 진나라가 흥하고 망한 이유를 논하다. -

「진효공(秦孝公)은 효함(殽函)의 견고함에 의지하고 옹주(雍州)의 지세를 싸안으면서 군신(君臣)이 한 마음으로 변경을 굳게 지키며 주실(周室)을 엿보며 천하를 석권하고 온 세상을 보자기로 싸서 차지하고 다시 사해를 자루 속에 쓸어 담아 천하를 집어 삼키려하고 있었다. 당시 상군(商君)은 효공을 보좌하여 안으로는 법도를 세워 농사와 산업에 힘쓰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방어전을 준비하고, 밖으로는 연형(連衡)의 계책을 써서 제후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여 진나라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든 채로 하서(河西) 이동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효공이 죽자 혜왕(惠王)과 무왕(武王)이 효공의 공업을 계승하고 다시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남쪽으로는 한중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빼앗았으며 동쪽으로는 비옥한 토지를 나누어 차지하였으며 요해지(要害地)에 설치한 군현을 점거했다. 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회맹하여 진나라를 쇠약하게 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래서 제후들은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이나 비옥한 땅을 아까워하지 않고 천하의 현사(賢士)들을 초빙하여 합종책을 실행하고 수호를 맺으며 상호 간에 연합하여 한 몸이 되었다. 당시에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으며 조나라에는 평원군, 초나라에는 춘신군,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어 이를 사군자(四君子)라 불렀다. 그들은 모두가 밝은 지혜를 갖추고 충성스럽고 천하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후하게 대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현인을 존중하고 선비를 중하게 여겼다. 사군자들은 합종책을 따르고 연횡책을 버리기로 서로 간에 약조하였으며 한(韓), 위(魏), 연(燕), 초(楚), 제(齊), 조(趙), 송(宋), 위(衛), 중산국(中山國) 등의 군사들을 모두 한 곳에 모이게 하였다. 당시 육국의 모사(謀士)로는 영월(寧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등이 있었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昭滑), 루완(樓緩), 적경(翟景), 소려(蘇厲), 악의(樂毅) 등의 무리는 각 제후국 사이의 의견을 소통하게 만들었으며, 오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佗),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은 모두 교유관계가 있는 친구들로써 각국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진나라 영토의 10배나 큰 땅에서 백만의 군사들이 동원되어 관문을 두드리며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군사들이 관문을 열고 제후들의 군사들을 관문 안으로 맞아 들여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 나라의 군사들이 감히 앞으로 나아가 관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후퇴하더니 도주하기 시작했다. 진나라는 화살 한 개도 허비하지 않고 천하의 제후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었다. 제후들은 이어서 해산하고 서로 간에 맺은 약속을 파기하고 자기들끼리 영토를 다투어 빼앗아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가 힘을 남겨 두었다가 9국 제후들의 군사들이 피로에 지쳤을 때 북쪽으로 그들을 뒤쫓아 백만의 군사들을 죽여 시체가 온 천하에 널리게 되었고 시체에서 흐른 피가 강을 이루어 가히 핏물 위에 군사들의 큰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진나라가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제압하고 다시 제후들의 땅을 분할하여 영토로 삼았으며 강국은 귀순했으며 약국은 입조하여 조현을 드렸다. 진국의 왕위는 효문왕(孝文王), 장양왕(庄襄王)에게 전해졌으나 그들의 재위기간은 짧았기 때문에 특기할만한 큰 사건은 없었다.

이윽고 진시황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앞서간 육왕(六王)㊸들이 남긴 공업을 계승하여 긴 채찍을 높이 들어 천하를 제어하며 동과 서로 나뉘어 있었던 주나라를 병탄하고 제후들을 멸망시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통일하여 정비하였고 몽둥이와 채찍으로 백성들을 다스려 온 천하를 벌벌 떨게 하였다. 남쪽으로는 백월(百越)㊹의 땅을 취하여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설치하였고 백월의 임금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기의 목에 오랏줄을 감고 투항하여 자기의 목숨을 진나라의 옥리에게 맡기게 되었다. 다시 몽염(蒙恬)을 시켜 축조한 장성을 울타리 삼아 북쪽의 변경을 지키게 하고 흉노를 700리 밖으로 몰아내자 호인(胡人)들은 감히 남쪽으로 와서 말도 기르지 못하게 되었고 군사를 동원하여 활에 화살을 당겨 원수 갚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어서 선왕들의 치국의 도를 버리고 백가(百家)들이 쓴 책들을 불살라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통치하려고 하였다. 이름 있는 대성의 성곽을 허물고 영웅호걸들을 살해했으며 천하의 병기(兵器)들을 함양(咸陽)에 모아놓고 쇳물로 녹여 종을 주조하고 다시 쇠로 만든 동상 12 개를 만들어 백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런 후에 화산(華山)을 파서 성을 쌓고 하수(河水)를 해자로 삼고 높고 높은 성벽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해자에 의지한 성에 살면서 외적의 침입에 방비하였다. 양장(良將)들을 험관(險關)과 요새(要塞)에 보내어 강력한 쇠뇌로 지키게 하였다. 충성스러운 대신들이 있고 예리한 병기로 무장한 정예병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범할 수 있었겠는가?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시황은 마음속으로 관중의 방비는 마치 천리의 철벽으로 둘러친 성벽처럼 견고하여 자자손손에게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업을 이룩했다고 생각했다.

시황이 죽었으나 그가 남긴 위엄은 풍속이 다른 먼 변방까지 진동하였다. 찢어지게 가난한㊺ 집 출신에 한낱 농사를 짓는 노예로 살던 진섭(陳涉)은 이곳저곳으로 유배생활을 하다가 어양(魚陽)을 지키는 군사로 징발되었다. 진섭의 재능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했고 공자(孔子)자 묵자(墨子)처럼 어진 덕을 지니지도 못했으며, 도주공(陶朱公)㊻이나 의돈(猗頓)㊼처럼 거만금을 갖고 있던 부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변경을 지키러 가는 군사들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아 십장(什長)의 신분이 되더니 한 번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진승은 흩어져 도망치려고 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인솔하여 수백 명에 불과한 군사들의 대장이 되어 몸을 돌려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나무가지를 베어 병장기로 삼고 장대를 뽑아 깃발로 삼으니 천하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어 호응하였다. 모여든 백성들은 양식을 짊어지고 진승의 뒤를 따르니 산동의 영웅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진나라와 그 왕족들을 멸망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더욱이 천하는 약해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았고 진나라 옹주(雍州) 땅과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은 옛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견고하기가 그지없었을 뿐만 아니라, 진섭의 지위는 제(齊), 초(楚),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송(宋), 위(衛), 중산국(中山國)등의 군주들에 비해 보잘 것 없을 정도로 비천했으며, 그가 거사를 할 때 사용했던 호미와 곰방메 그리고 가시나무로 만든 창은 제후들의 군사들이 사용했던 극(戟)과 갈고리 창에 비해 날카롭지 않았다. 더욱이 유배되어 변경을 지키러 가던 군사들의 수는 구국(九國)의 군주들이 거느린 군사들의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또한 심모원려(深謀遠慮)에 의해 행군과 용병의 도리를 깨우친 사람도 예전의 모사들에 비해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의 성패의 결과는 서로 달랐고 이룬 공적은 서로 상반되었다. 만약 산동의 각 나라들과 진승이 당시에 지니고 있었던 유무형의 자산들에 대한 장단점과 크고 작음을 각각 헤아려 보고 또한 그들의 권세와 실제로 소유하고 있었던 실력들을 비교해 본다면 둘 사이가 같은 수준이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구구한 옹주(雍州)의 좁은 땅과 천승(千乘)의 작은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진나라가 천하 아홉 개 주(州) 중 옹주를 제외한 나머지 8주의 제후들을 불러 조배의 대열에 세워 오기를 100여 년에 걸쳐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육국을 합하여 천하를 통합하고 효산과 함곡관 사이에 궁실을 지어 천하를 다스리는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일개 필부였던 진승이 한번 일어나자 진나라의 칠묘가 무너지고 진왕의 목숨은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져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은 어떤 연유에서인가? 그것은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고 공수(攻守)의 도리를 잘못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 진섭세가 끝-

주석

①양성(陽城) :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동남의 고성진(告城鎭)에 있었던 옛날 고을 이름이다.

②하양(夏陽) : 한나라 때 현 이름으로 하남성 태강현(太康縣)에 있었다.

③원문은 「嗟乎, 燕雀安知鴻鵠之志哉」이다

④이세원년 : 진시황이 죽은 기원전 209년을 말한다. 진나라는 그 2년 후인 기원전 207년에 망했다.

⑤려문(閭門) : 여(閭)는 고대 진나라의 행정조직의 하나로 매 25호를 묶어 1려(閭) 혹은 1리(里)로 했다. 그 려(閭)의 마을 입구에 문을 세워 표시했음으로 려문(閭門) 혹은 리문(里門)이라 하고 그 문의 오른쪽에는 부자가 살고 왼쪽에는 가난한 사람을 살게 했음으로 여좌(閭左)라 했다..

진나라 조정은 여음(汝陰)과 기현(蘄縣) 일대의 여좌(閭左)에 살던 빈민들 900명을 북쪽 변경 도시 어양(魚陽)의 수비병으로 동원하기 위해 대택향(大澤鄕)으로 소집하여 편제를 짤 때 진승과 오광은 지금으로 말하면 소대장 격에 해당하는 둔장(屯長)이 되었다. 둔장은 50명을 거느리는 하급 부대의 지휘자였다. 그 수졸 900명의 인솔자는 관할 현의 군사 일을 주관하던 두 명의 장위(將尉)였다. 여음은 지금의 안휘성 부양시(阜陽市)고 기현(蘄縣)은 숙현(宿縣) 동남이다.

⑥어양(漁陽) : 지금의 북경시 밀운현(密雲縣) 서남

⑦대택향(大澤鄕) :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동남의 유촌집(劉村集) 부근으로 진섭이 기의(起義)했던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⑧둔장(屯長) : 50명을 지휘했던 하급 지휘자를 말한다.

⑨항연(項燕) : 전국 말 때 초나라의 명장으로 항량(項梁)의 부친이다. 지금의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의 하상(下相) 사람이다. 진시황 23년, 기원전 224년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이신(李信)을 패배시키고 초나라의 남군(南郡)을 회복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진시황 24년,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왕전(王翦)에 의해 그가 이끌던 초군은 대패하고 초왕 부추(負芻)는 진군(秦軍)의 포로가 되었다. 항연은 창평군(昌平君)을 형왕(荊王)으로 세우고 회남(淮南)으로 들어가 진나라에 저항을 계속했으나, 다시 다음 해에 계속된 왕전의 공격으로 창평군은 난전 중에 죽고 항연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⑩장위(將尉) : 진나라 때 현장(縣長) 밑에는 군사를 관장하는 위(尉)라는 직책을 두었다. 통상적으로 행정구역이 큰 현에는 두 명의 위를 두었는데 경내의 군사를 인솔하여 외지로 나가는 임무를 맡은 위(尉)를 장위(將尉)라 했다.

⑪원문은 단우(袒右)다. 악의전단열전(樂毅田單列傳)에 등장하는 왕손고(王孫賈)가 제민왕(齊湣王)을 죽인 초나라의 장군 요치(淖齒)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동지들을 규합할 때는 단기좌비(袒其左臂)로 나온다. 옛날 중국 고대인들이 뜻을 같이 한다는 표시로 행하는 의식으로 국인이나 중인들의 경우는 왼쪽 어깨를, 죄인이나 하층민들이 할 때는 오른쪽 어깨를 들어냈다.

⑫질(銍): 안휘성 숙현 서남, 찬(酇): 하남성 영성현(永城縣) 서남, 고(苦): 하남성 록읍현(鹿邑縣) 서, 자(柘): 하남성 자성현(柘城縣) 북, 초(譙): 안휘성 박현(亳縣).

⑬진성(陳城) : 진(陳)이란 지명은 원래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제후들을 봉할 때 순임금의 자손이라고 생각되는 호공(胡公) 만(滿)을 찾아 세워준 나라 이름에서 기원한 것이다. 진나라는 기원전 481년에 멸망당해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전국 때 진나라의 명장 백기(白起)의 공격으로 그 본거지인 호북성 형주시(荊州市) 부근인 영(郢)을 빼앗기긴 초나라가 나라를 옮긴 곳이 진성(陳城)이다. 진나라는 이곳 진성으로 그 나라를 옮겼다가 곧 이어 거양(巨陽)을 거쳐 지금의 안휘성 수현(壽縣)으로 가 그곳에서 망했다.

⑭초문(譙門) : 중국 고대의 성(城)에는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게 높이 세운 루(樓)를 초루(譙樓) 혹은 그냥 초(譙)라 했다. 초문은 초루 밑에 나 있는 성문을 말한다.

⑮여음(汝陰) : 지금의 안휘성 부양시(阜陽市)

⑯구강군(九江郡) : 지금의 안휘성과 강소성의 장강 이북을 관할했던 진나라가 설치한 군 이름으로 치소는 수춘(壽春)으로 지금의 수현(壽縣)이다.

⑰동성(東城)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동남에 그 치소가 있었다.

⑱삼천군(三川郡) : 황하(黃河), 락수(洛水), 이수(伊水) 등 세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 해서 삼천(三川)이라 이름지었다. 지금의 황하 이남, 하남성 영보(靈寶) 이동, 중모(中牟) 이서를 관할했다. 한선왕(韓宣王 : 재위 기원전 332-312년) 때 설치했다가 기원전 249년 진나라의 공격을 받은 한나라가 삼천군을 바치자 진나라는 이 곳에 삼천군을 다시 설치했다.

⑲이유(李由) : 진나라의 승상 이사의 아들이다.

⑳상채(上蔡) : 춘추 때 채나라 땅에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하남성 상채현 서남쪽에 그 치소가 있었다. 원래 채(蔡)라는 지명은 주무왕이 그의 동생 채숙(蔡叔) 탁(度)이 봉해진 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에 채나라는 기원전 447년 초혜왕에게 멸망당할 때가지 여러 번 강대국에 쫓겨 나라를 옮겨야만 했기 때문에 원래의 건국지를 상채라 이름한 것이다.

㉑방군(房君) : 방은 진나라가 설치한 오방현(吳房縣)으로 지금의 하남성 수평현(遂平縣)을 말한다. 방군이라 함은 방의 후(侯)라는 뜻이다.

㉒상주국(上柱國) :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관직명. 줄여서 주국(柱國)이라고 하며 국가를 버티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원래 초나라의 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벼슬이었으나 후에 초나라 무관의 최고관직이 되어 그 지위는 영윤(令尹) 다음이었다.

㉓시일(視日) : 일식, 월식, 별모양, 구름의 상태를 살펴보거나, 시초(蓍草)를 이용하여 점을 사람이다. 즉 전문적으로 천상(天象)을 관찰함으로 해서 점을 쳐 전투나 행사에 대한 길흉을 점치던 사람을 말한다. 일자(日者)라고도 한다.

㉔소부(少府) :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산천(山川), 원지(園池), 시정(市井)의 조세 수입과 황실에서 생산되는 수공업제품과 황실의 사적인 재정(財政)을 담당한 부서의 장관.

㉕조양(曹陽) :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동쪽의 정자(亭子)를 말한다.

㉖상곡(上谷) : 진나라가 설치한 군(郡)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회래현(懷來縣) 동남에 그 치소가 있었다.

㉗졸사(卒史) : 진과 한초에 군의 주요한 관리 중의 하나로 그 지위는 군승(郡丞)의 밑에 있으면서 문서의 수발을 도왔다. 그 녹이 1년에 100석이었던 관계로 백석졸사(百石卒史)라고도 했다.

㉘적(狄)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고청현(高靑縣) 동남에 그 치소가 있었다.

㉙주장(周章) : 주문(周文)을 말함.

㉚오창(敖倉) : 진나라가 지금의 하남성 형양성 오산(敖山) 위에 지었던 양식창고의 이름이다.

㉛담(郯) :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郯城縣) 북쪽의 고을이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지금의 하남성 겹현(郟縣)인 겹(郟)의 오기다.

㉜납월(臘月) : 음력 12월을 말한다. 납이란 고대 음력 12월에 지내는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제사의 일종이다. 원래는 연말에 짐승을 잡아 조상이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을, 음력의 마지막 달 12월을 납월이라고 했다.

㉝하성보(下城父) : 지금의 안휘성 와양현(渦陽縣) 동남

㉞창두(蒼頭) : 전국 때 위(魏)나라가 용맹한 무사들로만 뽑아 구성한 부대이름으로 그 표시로 머리에 푸른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무적의 군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㉟방여(方輿) :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서남에 그 치소가 있었다.

㊱파(鄱) : 파양(鄱陽) 혹은 파(番)를 말하며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강서성 파양현(波陽縣) 동북에 그 치소가 있었다.

㊲화섭위왕(夥涉爲王) : 초나라의 방언으로 빈천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벼락출세를 하여 그 생활태도가 매우 호사스럽게 변했음을 비난하는 말이다.

㊳중정(中正) : 진승이 설치한 인사를 관장하는 관리로 후에 삼국시대 때 위(魏)나라는 각 지방의 주군(州郡)에 중정관(中正官)을 설치하여 관할 지역의 인재(人材)들을 관리 및 발굴케 했다.

㊴사과(司過) : 역시 진승이 설치한 관서로 관리들의 과실과 부정을 규찰했다.

㊵저선생(褚先生) : 한무제 때 양나라 재상을 지낸 저대제(褚大弟)의 손자 저소손(褚少孫)을 말한다. 선제(宣帝 : 재위 BC 73-49 ) 때 박사(博士)를 지냈고 전에 패현(沛縣)에 살았을 때 이름이 높았던 왕식(王式)에게서 사사하고 선생으로 모셨다. 사기가 세상에 나온 후에 기록은 있었으나 책에 빠진 부분이 10편이 있었다. 그 빠진 부분을 후에 여러 사람이 보충해서 기술한 편목 중에 저소손이 기술한 부분은 그 앞에 저선생왈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㊶가생(賈生) : 가의(賈誼-전200년-168년를 말한다. 락양(洛陽) 인으로 서한 초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이다. 굴원의 뒤를 이은 초사의 작가이며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굴원가생(屈原賈生) 열전 참조.

㊷육왕(六王) :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庄襄王)을 말하며 기원전 361년 효문왕 원년부터 장양왕이 죽은 기원전 247년 즉 116년 동안의 기간을 말함.

㊸백월(百越) : 고대에 월족(越族)들이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城), 광서성(廣西省), 월남(越南) 등지에 분포되어 여러 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종족 이름을 백월이라 한 것이다.

㊹원전(元典)의 옹유승추(瓮牖繩樞)를 말하며 그 뜻은 ‘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를 끼워 넣어 창문으로 삼고 새끼줄을 엮어 문지도리를 만든다’는 뜻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를 일컫는 말.

㊺도주공(陶朱公) : 구천(句踐)을 도와 그를 패자로 만든 월나라의 재상.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오나라의 부차를 멸망시키자 구천으로부터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갔다. 범려는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꾸어 제나라에 출사하여 벼슬이 상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얼마 있지 않아 제나라의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목축을 하여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스스로를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했다. 후세에 전하는 《치부기서(致富奇書)》라는 책은 도주공이 쓴 것이다.

㊻의돈(猗頓) : 노나라의 거부(巨富)로 원래 가난하게 살다가 도주공이 많은 부를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치부의 도를 물었다. 도주공이 그에게 목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는 하서의 의씨(猗氏) 땅으로 가서 소와 양을 길러 10년 만에 거만금의 대부호가 되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일설에는 염업을 일으켜 부호가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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