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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연세가(荊燕世家)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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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3,272회 작성일 12-08-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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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21. 형연(荊燕)



형왕 유고(劉賈)는 고조와 동성인 유씨다. 그가 언제 처음으로 기의군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왕 원년 기원전 207년, 한중(漢中)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유고는 장군이 되어 새왕(塞王)의 봉지를 평정했다. 계속해서 항우를 토벌하기 위해 동진하는 고조의 군대에 종군했다.   

한왕 4년 기원전 204년, 한왕이 성고(成皐)의 싸움에서 패하자 북쪽으로 달아나 하수를 건너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의 군사를 얻어 수무(脩武)에 주둔했다.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세운 후에 굳게 지키던 고조가 유고에게 2만의 군사와 수백의 기병을 주어 백마진(白馬津)에서 하수를 도하하여 초나라 땅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유고는 초나라 땅의 군량과 마초를 불태우고 보급로를 파괴하여 항우에게 군량을 공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초군이 출동하여 유고를 공격하자 유고는 재빨리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며 싸움을 피해 팽월(彭越)과 연계하여 서로 의지하며 도왔다.

한왕 5년 기원전 203년, 한왕이 팽성(彭城)으로 돌아가는 항왕의 뒤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자 유고에게 군사를 주어 회수를 도하하여 수춘(壽春)을 포위하도록 했다. 수춘에 신속하게 당도한 유고는 사람을 시켜 초나라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여 불러오게 했다. 주은이 초나라에 반기를 들고 유고를 도와 구강(九江)을 공격한 후에 경포의 군사와 함께 해하(垓下)로 올라와 항우를 포위했다. 해하에서 항우를 무찌른 한왕은 유고에게 구강의 군대를 이끌게 하여 태위(太尉) 노관(盧綰)과 함께 서남쪽에 할거하고 있던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토벌하도록 하도록 했다. 임강국을 평정한 후에 공위를 죽인 유고는 그 땅에 남군을 설치했다.

한왕 6년 기원전 202년, 제후들을 진(陳) 땅으로 소집한 한왕은 한신을 사로잡아 초왕의 자리에서 폐하고 초나라를 두 나라로 나누었으나 당시 고조의 자녀나 형제들은 모두 어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능하지 못했음으로 동성의 사람을 제후왕으로 봉하여 천하를 진무하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발표했다.

「장군 유고는 많은 공을 세웠고 또한 유씨 자제들 중 마땅히 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러자 군신들이 모두 말했다.

「유고를 형왕(荊王)으로 세워 회동(淮東) 52성을 관할하게 하고, 폐하의 동생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세워 회서(淮西) 36개 성을 관할토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고조는 서장자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세웠음으로 이때에 이르러서야 유씨의 형제와 자제들이 왕으로 봉해지기 시작했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가을, 반란을 일으킨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기 동쪽으로 진군하여 형(荊)을 공격했다. 형왕 유고가 경포와 싸웠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부릉(富陵)으로 도망쳤으나 경포의 군사들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한고조가 친정하여 경포의 반란군을 무찔렀다.

고조 12년 기원전 195년,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吳王)에 봉하여 형나라의 옛 땅을 속하게 했다.



연왕(燕王) 유택(劉澤)은 유씨의 먼 종족이다. 고제 3년 기원전 204년 유택은 낭중(郎中)이 되었다. 고제 11년 기원전 196년, 유택이 군사를 이끌고 진희(陳豨)가 이끄는 반군을 공격하여 그의 부하 장수 왕황(王黃)을 사로잡았다. 유택은 그 공으로 영릉후(營陵侯)에 봉해졌다.

 이윽고 고조가 죽고 고후가 집정했을 때 제나라 사람 전생(田生)이 유세를 떠났다가 여비가 떨어지자 계책을 바친다며 영릉후 유택을 방문했다. 유택이 크게 기뻐하며 황금 2백 근으로 전생의 생일선물로 주었다. 황금을 얻은 전생은 곧바로 제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 후에 유택은 사람을 시켜 전생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어찌하여 나를 위해 계책을 행하지 않는가?」

전생이 장안으로 들어간 전생은 유택을 찾지 않고 큰 저택을 빌려 그의 아들을 시켜 당시 고후에게 총애을 받고 있던 대알자(大謁者) 장자경(張子卿)과 면담을 주선하도록 했다. 이윽고 몇 달 후에 전생의 아들이 장자경을 청하여 친히 모시고 싶다고 하자 장자경은 초대에 응하여 전생의 집에 들리기로 허락했다. 전생은 휘황찬란한 장막을 치고 기구를 호화스럽게 준비해서 마치 열후(列侯)를 맞이하는 것처럼 성대하게 했다. 감동한 장경이 술을 즐겨 마셔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때 주위 사람을 물리친 전생이 장경에게 말했다.

「신이 제후왕의 관저 백여 채를 살펴봤으나 모두 고조의 공신들 소유였습니다. 평소에 여씨들은 통일천하의 대업을 성취한 고조를 도와 이룬 공로는 누구보다도 더 크고 또한 태후가 무겁게 여기는 친척분도 계십니다. 태후의 춘추는 이미 많고 여씨들은 세력이 약해 태후께서는 여산(呂產)을 제후왕에 봉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태후께서는 다시 명을 발한다 해도 대신들이 듣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지금 경은 고후의 총애를 가장 높이 받고 또한 대신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신들을 설득하여 고후에게 이 문제를 상주하게 만들지 않으십니까? 고후께서 대신들의 상주를 받게 되면 고후께서는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여씨들은 왕으로 책봉되고 경 역시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질 것입니다. 태후께서 마음속으로 원하시는데 내신(內臣)의 신분으로 계시는 경께서 급히 서두르지 않으시면 화가 장차 미칠 것입니다.」

장경이 크게 깨닫고 대신들을 움직여 고후에게 여씨들의 문제를 상주토록 했다. 이윽고 조회에 임한 고후가 대신들에게 여씨들을 제후왕에 봉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대신들은 여산을 여왕(呂王)에 여록(呂祿)을 조왕(趙王)책봉하라고 청했다. 두 사람을 제후왕에게 책봉한 태후가 기뻐하며 장경에게 천금의 황금을 상으로 하사했다. 장경은 그 중 절반을 전생에게 주었다. 전생이 받지 않으며 말했다.

「여산이 왕으로 책봉된 일을 여러 대신들은 아직 승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영릉후 유택은 유씨 종족들 중 대장군의 신분으로써 자신만이 제후로 책봉되지 못해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경께서 태후께 말씀드려 10여 개의 현을 거느리는 왕에 봉해 열후에 세우도록 한다면 그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씨들의 왕위는 더욱 공고해질 것입니다.」

장경이 입조하여 전생의 말을 전하자 태후가 옳다고 여기고 영릉후 유택을 낭야왕(琅邪王)에 봉했다. 전생이 유택을 찾아가 하루라도 지체하지 말고 급히 봉국으로 부임하라고 권했다. 유택이 함곡관을 나서기도 전에 태후가 사람을 시켜 유택의 뒤를 추격하여 명을 거두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유택이 관문을 나가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태후가 붕어하자 낭야왕 유택이 말했다. 

「황제는 나이가 어리고 여씨 종족들이 모든 일을 멋대로 처리하고 있으며 유씨 자제들은 고아에 유약할 뿐이다.」

그리고는 즉시 제왕(齊王)과 모의하여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여씨 종족들을 주살하려고 했다. 유택이 양(梁)나라 이르렀을 때 한나라 조정이 관영(灌嬰)을 장군으로 삼아 형양(滎陽)에 주둔하도록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유택은 군사를 돌려 봉국의 서쪽 경계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혼자 말을 달려 장안으로 들어갔다. 대왕(代王) 유항(劉恒) 역시 수행원들과 함께 장안에 당도해있었다. 여러 장군들과 제후국의 상국들 및 낭야왕이 함께 뜻을 모아 대왕 유항을 천자로 옹립했다. 천자는 즉시 유택을 연왕으로 바꾸고 낭야는 원래의 제나라에 돌려주었다.

유택이 연왕이 된지 2년 만에 죽었다. 유택의 시호는 연경왕(燕敬王)이다. 아들 유가(劉嘉)가 뒤를 이었다. 이가 연강왕(燕康王)이다. 강왕이 죽고 유택의 손자 유정국(劉定國)이 섰다. 정국은 아버지 강왕의 희빈과 통간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다. 그리고 다시 동생의 처를 빼앗아 희첩으로 삼아 아들딸 3명을 낳았다. 정국이 비여(肥如)의 현령 영인(郢人) 등이 자신의 패륜적인 행동을 조정에 보고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국은 알자(謁者)를 시켜 법으로 그를 탄핵하게 하고 사람을 보내 영인들을 추포하여 격살하고 그들의 입을 막았다.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영인의 동생들이 다시 상서를 올려 정국의 음란한 짓을 조정에 고해 마침내 그의 행동이 세상에 드러났다. 천자가 조서를 내려 그 일을 의논케 하자 공경들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정국의 금수와 같은 행위는 인륜을 문란케 하고 하늘을 거역한 일임으로 마땅히 주살죄에 해당합니다.」

황제가 허락했다. 유정국은 자살하고 봉국은 없어지고 조정에 편입되어 군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유고가 형왕으로 책봉한 것은 한왕조가 창건된 지가 오래되지 않아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고는 비록 유씨 의 먼 종족들이었지만 계책으로써 제후왕이 될 수 있었고 강수와 회수 사이의 땅을 평정했다. 유택이 제후왕이 된 것은 권모술수를 써서 먼저 여씨들을 고무시켰기 때문이었다. 유택은 창졸간에 남면하여 고를 칭하는 제후왕이 되어 3세를 전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는 연유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어찌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형연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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