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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2. 유비(劉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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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286회 작성일 12-08-0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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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는 고조가 경혼하기 전에 정을 통한 여인으로 조(曹)씨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유비는 제왕(齊王)에 봉해지고 70여 성을 봉지(封地)로 받았다. 제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백성들은 모두 제왕에게 복속시켰다. 제도혜왕은 혜제(惠帝)의 서형이다. 혜제 2년 기원전 193년, 제왕이 입조했다. 도혜왕을 위해 연회를 베푼 혜제는 격식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예절로 집안사람 대하듯 했다. 여태후가 노하여 제왕을 죽이려고 했다. 이를 알고 두려워하며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제도혜왕은 그의 내사(內史)가 낸 계책에 따라 제나라 영지에서 성양군(城陽郡)을 떼어내 노원공주(魯元公主)의 탕목읍(湯沐邑)으로 바쳤다. 여태후가 기뻐했음으로 제왕은 경사를 떠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도혜왕은 즉위한지 13년 만인 혜제 6년, 기원전 189년에 죽었다. 아들 유양(劉襄)이 왕위를 이었다. 이가 제애왕(齊哀王)이다.

애왕 원년 기원전 188년 효혜제가 죽자 여태후가 천자의 권력을 행사하여 천하의 일은 모두 그녀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애왕 2년 기원전 187년, 고후가 그의 장조카 역후(酈侯) 여대(呂臺)를 여왕(呂王)으로 세우고 제나라의 제남군(濟南郡)을 떼어내 봉국으로 삼았다.

애왕 3년 기원전 186년, 애왕의 동생 유장(劉章)이 입조하여 한나라 조정에서 숙위를 섰다. 여태후가 유장을 주허후(硃虛侯)에 봉하고 여록(呂祿)의 딸을 처로 주었다. 그리고 4년 후인 기원전 182년 유장의 동생 유흥거(劉興居)을 동모후(東牟侯)에 봉하고 유장과 함께 장안에 거주하면서 숙위를 서게 했다.

애왕 8년 기원전 181년, 여후가 제나라의 낭야군을 떼어내 영릉후(營陵侯) 유택(劉澤)을 낭야양으로 봉했다.

이듬해 조왕(趙王) 유우(劉友)가 입조했다가 여후의 분노를 사서 관저에 감금되어 죽었다. 유우의 뒤를 이어 조왕으로 자리를 옮긴 유회(劉恢)가 자살했음으로 조여의(趙如意)를 포함해서 세 명의 조왕이 죽어 모두 폐위되었다.1) 이어서 고후는 여씨 자제 세 명을 연왕, 조왕, 양왕 등에 봉하여 한나라 정권을 장악하게 했다. 2)

 혈기가 왕성하고 힘이 장사였던 주허후 유장은 유씨들이 마땅한 직책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분개했다. 일찍이 고후가 마련한 잔치에 참석하여 대기하고 있는데 고후가 유장에게 술자리의 예법을 감독하는 일을 맡도록 명했다. 그러자 유장이 고후에게 청했다.

「신은 장군 가문의 출신임으로 청컨대 술자리의 예법을 군법으로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고후가 허락했다. 이윽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유장이 술잔을 바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노래와 춤을 끝낸 유장이 다시 청했다.

「태후의 만수무강을 위해 경전가(耕田歌)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고후는 유장을 어린아이로 취급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밭을 가는 일은 너의 부친이나 알지 왕자로 태어난 네가 어찌 안다고 하느냐?」

유장이 대답했다.

「신은 밭가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경전가를 한 번 불러보라!」

유장이 경전가를 불렀다.

深耕穊種(심경기종)

밭고랑을 깊게 파고 조밀하게 씨를 뿌리고

立苗欲疏(입묘욕소)

싹은 듬성듬성 세우세

非其種者(비기종자)

같은 종자가 아닌 것은

鉏而去之(서이거지)

호미로 뽑아 버리세

여후가 듣더니 묵묵히 아마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여씨 일가 중 한 명이 술에 취해 술자리를 벗어나자 유장이 쫓아가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고는 돌아와 고후에게 고했다.

「술자리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어 신이 군법을 적용하여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고후와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다. 그러나 고후가 이미 군법을 시행하라고 허락했던 일이었음으로 그에게 죄를 줄 수 없었다. 잔치는 흥이 깨져 끝이나고 말았다. 이후로 여씨 종족들은 주허후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대신들은 모두 주허후를 따르게 되어 유씨들의 권위가 예전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180년에 여후가 죽었다. 조왕 여록은 상장군으로, 여왕(呂王) 여산(呂産)은 상국(相國)으로 모두 장안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병력을 모아 대신들을 위협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여록의 딸을 처로 두고 있어 제려(諸呂)의 음모를 알고 있었던 주허후 유장은 몰래 사람을 형인 제애왕 유양에게 보내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군토록 만들고, 자신과 동생 동모후 유흥거는 안에서 호응하여 제려를 주살하고 기회를 틈타 제왕을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주허후로부터 연통을 받은 제애왕은 곧 외숙인 사균(駟鈞), 낭중령(郎中令) 축오(祝午), 중위(中尉) 위발(魏勃)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자 제나라의 상국 소평(召平)이 먼저 알고 관군을 동원하여 제왕의 궁궐을 포위했다. 위발이 소평을 찾아가 거짓으로 말했다.

「제왕이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지만, 한나라 조정에서 발급한 호부(虎符)가 없소. 왕궁을 포위한 상국의 행동은 참으로 잘한 일이오. 내가 당신을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제왕의 궁을 지키겠소.」

위발의 말을 믿은 소평은 그에게 군사를 주어 제왕의 궁궐을 포위하도록 했다. 그러나 군사의 지휘권을 얻은 위발은 오히려 상국인 소평을 포위했다. 소평이 한탄했다.

「아! 도가(道家)의 말에『잘라야 할 것을 자르지 않으면 반대로 화란을 입는다.』3)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꼴이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제왕은 사균을 상국으로 위발을 장군으로 축오는 내사로 삼아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했다. 이어서 축오를 동쪽의 낭야왕에게 보내 거짓으로 고하게 했다.

「여씨들이 란을 일으켜 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서진하여 장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주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왕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은 어린 아이에 불과하고 나이는 젊어 군사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겨 원컨대 나라를 들어 대왕께서 맡기고자 합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고제를 모셨던 장군으로 싸움에 익숙하십니다. 그러나 제왕께서는 감히 병영을 떠날 수 없어 신으로 하여금 대왕을 청하여 임치로 모셔 제왕과 함께 계책을 상의한 후에 제나라와 군사들을 함께 이끌고 서진하여 관중에서 일어난 란을 평정하시라고 했습니다.」

축오의 말을 믿은 낭양왕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즉시 제왕을 만나기 위해 말을 타고 임치로 달려갔다. 제왕과 위발은 낭야왕을 억류하고 축오를 시켜 낭양국의 군사를 모조리 징발하여 거느리게 했다.

낭야왕 유택은 속은 것을 알았으나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왕을 설득했다.

「제도혜왕은 고황제의 장자라 그 근본을 따져보면 대왕은 고황제의 적장손이기 때문에 마땅히 황제의 뒤를 이어야 하오. 오늘 여러 대신들은 주저하면서 서로 의심하며 누구를 후계로 세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택은 지금 유씨들 중 가장 연장자라 대신들은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오늘 대왕께서 본왕을 억류시키는 행위는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 차라리 나를 관중으로 들여보내 궐석 중인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계책을 세우면 어떻겠소?」

제왕이 옳다고 여겨 그 즉시 석방한 유택에게 많은 수레를 준비하여 유택에게 주어 관중으로 들여보냈다. .

낭야왕을 출발시킨 후 제왕은 군사를 일으켜 여국(呂國)의 제남(濟南)을 공격했다. 제애왕(齊哀王) 유양은 제후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천하를 평정한 고제께서 유씨 종실의 여러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실 때 도혜왕을 제나라의 왕으로 봉하셨습니다. 도혜왕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혜제께서는 유후(留侯) 장량(張良)을 보내 과인을 제왕에 봉하셨습니다. 혜제께서 붕어하시고 고후가 집정하였으나 고후는 춘추가 연로하여 여씨들이 자기들 멋대로 고제께서 봉한 왕들을 폐하는 행위를 방임하였습니다. 또한 조나라의 은왕(隱王) 여의(如意)․유왕(幽王) 우(友)․양왕(梁王) 회(恢) 등의 세 왕을 죽였으며, 유씨의 양(梁)․연(燕)․조(趙) 세 나라의 왕들을 폐하고 여씨들을 대신 왕으로 세웠습니다. 아울러 과인의 제나라는 넷으로 쪼갰습니다. 충신들이 진언했으나, 주상은 미혹되고 어리석어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후는 죽었으나, 황제는 연소하여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이나 제후에게 의지하고만 있습니다. 지금 여씨들은 또 자신들 멋대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였고, 병력을 집결시켜 위엄을 떨치고 있으며, 여러 제후들과 충신들을 협박하고, 황제의 영을 사칭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종묘사직이 위태롭습니다. 지금 과인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 그러한 부당한 여씨 종족의 왕들을 주살하고자 합니다.」

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나라 조정의 상국 여산은 대장군 관영(灌嬰)을 동쪽으로 진격시켜 제나라의 군대를 막도록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형양(滎陽)에 이른 관영은 계책을 세우고 말했다.

「여씨 일족이 군대를 이끌고 관중에 주둔하여, 유씨에게 위해를 가하여 자신들이 황제가 되려고 한다. 내가 지금 제나라를 격파하여 승전하게 되면 그것은 곧 여씨들을 돕는 일이 되어 여씨들의 입지만 강화시키게 될 것이다.」

관영은 즉시 진군을 멈추고 형양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에 사자를 제왕과 제후들에게 보내 그들과 화평를 유지하다가,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를 기다려 그들과 공동으로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약속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왕은 군사의 진군 방향을 돌려 제나라의 옛 땅인 제남군을 취한 후에, 제나라 서쪽 경계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관영과의 약속이 이행되기를 기다렸다.

여록과 여산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허후와 태위(太尉) 주발(周勃), 승상 진평(陳平) 등은 모의하여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하였다. 주허후가 먼저 여산을 죽였고, 태위 주발 등은 나머지 여씨들을 모조리 주살하였다. 그때 제나라에서 석방된 낭야왕이 급히 장안으로 달려왔다.

이윽고 대신들이 의논하여 제왕을 천자로 옹립하고자 했으나, 낭야왕과 몇몇 대신들이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왕의 외숙인 사균은 매우 흉포한데, 그 흉포하기가 호랑이 가운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여씨들로 인하여 천하가 어지러웠는데, 지금 다시 제왕을 옹립함은 또 다른 여씨 집단을 세우는 일과 같습니다. 대왕(代王)의 외가는 박씨(薄氏)로 군자의 도가 있는 집안입니다. 또한 대왕은 고조의 친아들로 지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연장자이십니다. 고조의 아들임으로 그에게 양위함은 순리에 따르는 일이고 인품이 후덕하여 조정의 일을 관장하면 대신들도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신들은 대왕을 천자로 옹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아울러 주허후를 보내어 여씨들을 주살한 일을 제왕에게 통지하였고, 군사를 물리쳐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영을 내렸다.

형양에 주둔하면서 위발이 원래 제왕에게 모반하도록 교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관영은 여씨들은 이미 주살되어 제나라 병사들은 본국으로 회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위발을 불러 문책했다. 관영 앞에 대령한 위발이 대답했다.

「불이 난 집을, 어떻게 주인에게 먼저 알리고 난 후에 불을 끌 수 있겠습니까?」

그는 대답할 때 두 다리를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두려워하였는데, 끝내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관영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면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위발이 용감하다고 하는데, 망령되고 용렬한 자일뿐이구나!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관영은 그의 관직만을 빼앗고 다른 벌은 주지 않았다.

원래 위발의 부친은 거문고를 잘 타서 진시황(秦始皇)을 모셨던 사람이었다. 청년이 된 위발은 당시 제나라 재상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던 조참(曹參)을 접견하여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다리를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늘 혼자서 이른 새벽에 조참의 사인(舍人) 집 앞을 청소했다. 사인은 괴이하게 생각하고 어떤 수상한 사람인가 싶어 몰래 살피다가 위발을 발견하였다. 위발이 그 사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상국을 뵙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어, 당신의 집 앞을 청소함으로 해서 상국을 접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사인은 위발을 조참에게 대려가 만나게 해주었다. 조참은 위발을 사인으로 삼았다. 한번은 위발이 조참을 모시고 수레를 몰고 가다가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건의했다. 위발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조참은 그가 능력이 있다고 여겨 그를 제도혜왕에게 추천했다. 위발을 접견한 제도혜왕은 그를 내사로 임명했다. 이를 계기로 제도혜왕은 2천석의 고급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제도혜왕이 죽고 애왕이 제왕의 자리를 잇자 위발은 권력을 잡아 제나라의 재상으로 중용되었다.

제애왕은 이미 군대를 해산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고, 대왕(代王) 유항은 장안으로 들아가 천자로 즉위했다. 이가 효문제(孝文帝)다.

효문제 원년 기원전 179년, 고후가 분할한 제나라의 성양(城陽), 낭야(琅邪), 제남(濟南) 등의 여러 군들은 모두 제나라에 반환되고, 낭야왕은 연왕(燕王)으로 개봉했다. 주허후 유장과 동모후 유흥거의 봉지는 각각 2천 호로 늘어났다.

이해에 제애왕이 죽고 태자 유칙(劉則)이 즉위했다. 이가 제문왕(齊文王)이다.

제문왕 원년 기원전 178년, 한나라 조정은 제나라의 성양군을 다시 떼어내 주허후의 봉지로 삼아 성양왕에 봉했고, 제북군(濟北郡)을 동모후의 봉지로 삼아 제북왕에 봉했다.

제문왕 2년 기원전 177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조정이 군대를 보내 제북왕을 주살하고 그의 봉지는 한나라 조정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기원전 175년, 한문제는 제도혜왕의 아들 파군(罷軍) 등 일곱 명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했다.

제문왕이 재위 14만인 기원전 165년에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봉국은 폐해져 한나라 조정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1년 후인 기원전 164년, 한문제는 제나라 땅을 나누어 도혜왕의 아들들을 제후왕으로 봉했으며 제왕에는 양허후(楊虛侯) 유장려(劉將閭)가 책봉되었다. 이가 제효왕(齊孝王)이다. 원래의 제나라가 관할했던 여러 군현들 전부를 모두 제도혜왕의 아들들에게 나누어 왕으로 봉했는데 유지(劉志)는 제북왕에, 유벽광(劉辟光)은 제남왕에, 유현(劉賢)은 치천왕(菑川王)에, 유앙(劉卬)은 교서왕(膠西王)에, 유웅거(劉雄渠)는 교동왕(膠東王)에 각각 봉했다. 이로써 성양왕과 제왕을 합하면 모두 일곱 아들이 제후왕의 자리에 올랐다.

제효왕 11년 기원전 154년, 한나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킨 오왕(吳王) 유비(劉鼻)와 초왕(楚王) 유무(劉戊)가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들은 제후들에게 격문을 띄워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한나라의 역신 조조(晁錯)를 주살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자한다.」

교서․교동․치천․제남 등의 네 왕은 모두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오초의 반군에 호응하고 제나라와 연합하기를 시도했으나 제효왕은 주저하며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호응하지 않았다. 교서․치천․제남 등의 세 나라의 군대가 달려와 제나라를 포위했다. 제왕은 중대부(中大夫) 노앙(路卬)을 파견하여 나라의 위급함을 천자에게 고했다. 하였다. 천자가 노앙을 보고 말했다.

「짐의 군대가 곧 오초의 반군을 무찌를 때까지 잘 지키라고 제왕에게 전하라!」

천자는 노앙을 돌려보내며 제왕에게 황명을 전하라고 했다. 노앙이 제나라에 당도했을 때는 3국의 병사들이 이미 임치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임치성에 미처 들어가지 못하고 삼국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힌 노앙에게 삼국의 장수들이 협박하며 말했다.

「너는 성문 앞으로 나아가 한나라 조정은 이미 항복했으니 제나라도 빨리 3국에 투항하지 않으면 총공격을 가해 성을 함락시켜 성안의 사람들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라!」

삼국의 장수들이 시키겠다고 허락한 노앙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 제왕을 쳐다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미 군사를 출정시켰고, 태위 주아부(周亞夫)를 대장으로 삼아 백만의 군대를 일으켜 오초의 반군을 격파한 후에 지금 곧 이곳으로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 진격 중에 있으니 제왕께서는 견고하게 지키시고 결코 항복하지 마십시오!」

이에 삼국의 장수들은 노앙을 죽였다.

원래 삼국의 군대에 의해 포위된 제나라는 사태가 위급해지면 몰래 삼국과 내통하여 반군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맹약이 확정되지 않아 미루고 있던 차에, 중대부 노앙이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돌아와서 한 말을 듣고, 제나라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대신들 또한 제왕에게 투항하지 말라고 거듭 권유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나라가 보낸 장군 난포(欒布)와 평양후(平陽侯) 조기(曹寄) 등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에 당도하여 삼국의 군대를 무찌르고 임치성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를 이끌던 장군들은 제나라가 처음에 삼국과 공모하여 반란에 참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으로 그들의 군대를 이동시켜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제효왕은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한경제는 제왕이 처음에는 잘 대처하다가 협박으로 인해 다른 뜻을 품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제는 효왕의 태자 유수(劉壽)에게 제왕의 자리를 잇게 했다. 이가 제의왕(齊懿王)이다. 이로써 제왕의 후사는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서, 교동, 제남, 치천 등의 왕들은 모두 주살되었고, 봉국은 모두 폐해져 한나라 조정에 속하게 되었다. 제북왕을 개봉시켜 치천왕으로 했다. 제의왕은 재위 22년 만인 기원전 132년에 죽었고, 아들인 차경(次景)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그가 제려왕(齊厲王)이다.

제려왕(齊厲王)의 모친은 기태후(紀太后)다. 태후는 자신의 동생인 기씨(紀氏)의 딸을 려왕의 왕후로 삼으려고 했으나 려왕 자신은 기씨 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후는 기씨 집안이 대대로 임금의 총애를 받게 하고자, 려왕의 친누이인 기옹주(紀翁主)를 왕궁으로 불러, 후궁의 궁녀들을 단속하여 그녀들이 려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려왕으로 하여금 기씨의 딸만을 사랑하도록 했다. 그러나 려왕은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자신의 친누이인 기옹주와 통간하고 말았다.

그때 제나라 출신의 서갑(徐甲)이라는 환관이 장안으로 들어가 황태후를 모시고 있었다. 태후에게는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민간과 결혼하여 낳은 수성군(脩成君)4)이라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황태후는 황가 출생이 아닌 수성군을 불쌍히 여겼다. 그래서 황태후는 아(娥)라는 수성군의 딸을 제후왕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환관 서갑이 황태후에게 청해 제나라고 가서 틀림없이 제왕으로 하여금 아(娥)에게 청혼의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고 했다. 황태후가 기뻐하며 서갑을 제나라로 보냈다. 그때 제나라 출신의 주보언(主父偃)은 서갑이 수성군의 딸을 제왕의 왕비로 들여보내기 위해 제나라에 사자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와 말했다.

「일이 성사되면 청컨대 제 딸을 제나라 왕궁의 후궁으로 충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제나라에 당도한 서갑이 황태후와 주보언의 뜻을 넌지시 전했다. 기태후가 듣고 대노하여 말했다.

「왕에게는 이미 왕비가 있고 후궁 또한 모두 차있다. 또한 서갑이라는 자는 제나라의 가난뱅이 출신으로 가세가 곤궁하자 환관이 되어 한나라 황궁으로 들어갔다고 하나 우리 제나라에게는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면서 감히 우리 제나라 왕가를 어지럽히려고 한다. 하물며 주보언이라는 자는 어떤 자이기에 감히 그의 딸을 후궁으로 채워달라고 하는가?」

크게 낭패한 서갑이 어쩌는 수 없이 경사로 돌아와 황태후게 고했다.

「제왕은 아(娥)를 맞이하기를 원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연왕의 문제와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연왕 유정국(劉定國)이 저지른 패륜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일찍이 그의 세 딸 및 그의 동생 처를 빼앗아 간통한 죄를 추궁 받아 처형되고 나라는 망친 자다. 서갑은 연나라의 일로써 황태후를 깨닫게 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제나라와의 혼사 이야기는 다시 말하지 말라!」

이 일은 점점 퍼져나가 천자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주보언은 이 일로 해서 제나라 왕실과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시 천자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잡고 있었던 주보언이 기회를 틈타 천자에게 상주했다.

「제나라의 임치에는 10만 호의 민가가 있어, 세금만 하루에 천금(千金)을 걷어 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부유하여 장안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곳은 천자의 친동생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면 왕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제왕은 친척들과 날이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습니다. 옛날 여태후 시절 제나라는 모반을 꾀하였고, 오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제효왕 유장려(劉將閭)는 반란군에 거의 가담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지금의 제왕은 효왕의 아들 유차경(劉次景)으로써 친누이와 통간하여 인륜을 어지렵히고 있습니다.」

이에 천자는 주보언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하여 제왕의 패륜을 바로잡도록 하였다. 제나라의 재상의 자리에 부임한 주보언은 그 즉시 제왕의 후궁과 환관 가운데에서 제왕을 도와 그의 친누이인 기옹주와 통간하게 한 자들을 심문하여 그들의 말을 증거로 삼아 제려왕을 왕이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나이가 아직 어렸던 제왕은 자기가 지은 죄가 커서 관리들에게 잡혀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제려왕은 재위 5년 만인 기원전 127년에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제나라 땅은 한나라 조정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제나라의 후사는 끊기게 되었다.

주보언이 불운하게 지낼 때 연(燕)과 조(趙) 나라 사이를 다니며 유세한 적이 있었다. 후에 주보언이 귀한 신분이 되어 연나라 일을 들추어내자 그가 조나라에게도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 조왕이 황제에게 그의 비밀스러운 글로 써서 고하려했으나 주보언이 항상 황제의 곁에 있었음으로 감히 보내지 못했다. 이윽고 주보언이 제나라 상국이 되어 관문을 나가 동쪽으로 떠났음으로 즉시 사람을 시켜 서장을 올려 주보언이 제후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하여 수많은 제후의 자제들이 후에 봉해졌다고 고했다. 이윽고 제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한 황제가 주보언이 제왕을 겁박하여 자살에 이르게 했다고 생각하여 칙명으로 그를 관리에게 넘겨 치죄토록 했다. 주보언이 제후들에게 금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제왕이 자살한 것은 겁박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자백했다. 황제가 주보언을 처형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때에는 공손홍이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었다. 공손송이 말했다.

「자살한 제왕에게는 후손이 없어 나라가 없어져 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주보언은 원래 악의 수괴입니다.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는다면 천하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보언은 멸족되었다.

제도혜왕의 후세로는 아직 두 나라가 있었는데, 성양(城陽)과 치천(菑川)의 두 제후국이다. 치천의 봉토는 원래 제나라와 크기가 비슷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후사가 끊긴 일을 불쌍히 여긴 천자는 제나라 땅이 한나라 조정에 속하게 되어 도혜왕의 분묘도 자연히 군(郡)의 소속이 되었음으로 도혜왕의 분묘를 둘러싸고 있는 임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전부 치천국(菑川國)에게 할양하여 도혜왕의 제사를 지내게 만들었다.

성양경왕(城陽景王) 유장(劉章)은 도혜왕의 아들인데, 일찍이 주허후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함께 여씨들을 주살하기로 하고, 자신이 먼저 상국인 여왕(呂王) 여산을 미앙궁(未央宮)에서 죽였다. 문제가 즉위한 후, 유장은 2천 호의 봉지를 더 받았으며, 황금 천 근을 하사받았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제나라 땅 성양군을 분할하여 유장을 성양왕에 봉하였다. 유장은 재위한지 2년 만에 죽고 아들 유희(劉喜)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가 성양공왕(城陽共王)이다.

성양공왕 8년 회남왕으로 개봉되었다. 4년 후 성양왕으로 다시 돌아왔다. 공왕이 재위 33년인 기원전 144년에 죽자 그의 아들인 유연(劉延)이 뒤를 이었다. 이가 성양경왕(城陽頃王)이다.

경왕이 재위 26년 만인 기원전 118년에 죽고 아들 유의(劉義)가 뒤를 이었다. 이가 성양경왕(城陽敬王)이다. 경왕은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109년에 죽고 아들 유무(劉武)가 뒤를 이었다. 이가 성양혜왕(城陽惠王)이다. 혜왕은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98년에 죽고, 아들 유순(劉順)이 뒤를 이었다. 이가 성양황왕(城陽荒王)이다. 황왕은 재위 46년 만인 기원전 53년에 죽고, 아들인 유회(劉恢)가 뒤를 이었다. 이가 성양대왕(城陽戴王)이다. 대왕은 재위 8년 만인 기원전 45년에 죽고, 아들인 유경(劉景)이 뒤를 이었다. 유경은 한성제(漢成帝) 건시(建始) 3년인 기원전 30년 15세의 나이로 죽어 나라는 폐해져 한나라 조정에 귀속되었다.

제북왕(齊北王) 유흥거(劉興居)는 도혜왕의 아들로 동모후(東牟侯)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협조하여 여씨들을 주살하는데 참여했으나 공로가 적었다. 대국에서 장안으로 들어와 천자의 자리에 오를 때 유흥거가 말했다.

「청컨대 신과 태복(太僕) 하후영(夏侯嬰)으로 하여금 궁궐을 소제토록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소제(少帝) 유홍(劉弘)을 폐출시키고, 대신들과 함께 문제를 옹립하였다.

문제 2년 제나라의 제북군(齊北郡)을 떼어내 유흥거를 제북왕에 봉했다. 이로써 유흥거는 성양왕 유장과 동시에 왕이 되었다. 유흥거는 재위한 지 2년 만에 모반을 일으켰다. 당초 대신들이 여씨들을 주살할 때, 주허후 유장의 공로가 아주 커서, 조나라 땅 전부를 봉지로 주어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황제로 즉위한 문제는 원래 주허후와 동모후가 제왕 유양(劉襄)을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공을 깎아 조왕의 자리에서 폐했다. 그러다가 문제 2년 유씨 자제들은 왕으로 봉할 때야 비로소 제나라의 두 군을 분할하여 유장과 유흥거를 각각 왕으로 삼았다. 유장과 유흥거가 왕이 되기 전에는 자연히 제후의 작위를 잃고 공로도 깍였었다. 유장이 죽은 후에 유흥거는 대대적으로 한의 국경을 침입한 흉노를 막기 위해 한나라 조정이 대군을 일으켜 승상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반격하게 하고 문제 또한 친히 태원(太原)으로 행차하여 군사들을 독려하여 오랑케와 싸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기회를 틈타 유흥거는 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천자는 유흥거의 반란 소식을 듣고 승상의 파견을 취소하였고, 이미 일으킨 병사를 돌이켜서 모두 장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또한 극포후(棘蒲侯) 시장군(柴將軍)을 보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제북왕 유흥거를 사로잡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유흥거는 자살했고 봉지는 조정으로 반환되어 한나라 조정의 군이 되었다.

그후 14년 후인 문제 16년 기원전 164년에 다시 제도혜왕의 아들 안도후(安都侯) 유지(劉志)를 제북왕에 봉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기원전 154년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지는 이곳을 굳건히 지켰으며, 제후들과 같이 모반하지 않았다. 오초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한나라 조정은 유지를 치천왕으로 개봉했다.

제남왕(濟南王) 유벽광(劉辟光)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다. 늑후(勒侯)의 신분으로 한문제 16년 기원전 164년에 치천왕이 되었다 10년 후인 기원전 154년에 그가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나라 조정은 반란군을 토벌하고 유벽광을 죽였으나 제남국은 군으로 만들어 한나라에 속하게 했다.

 치천왕 유현(劉賢)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다. 문제 16년 기원전 164년 무성후(武城侯)의 신분으로 치천왕에 봉해졌다. 그 후 10년 후인 기원전 154년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한나라 조정은 반란을 평정하고 유현을 죽였다.

천자는 그 일로 인해 제북왕 유지(劉志)를 치천왕으로 옮겼다. 유지 역시 제도혜왕의 아들로 일찍이 안도후(安都侯)의 신분으로 제북왕에 봉해졌었다. 치천왕 유현이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되고 후사가 없었음으로 제북왕 유지를 치천왕으로 옮긴 것이다. 모두 35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치천의왕(菑川懿王)이다. 아들 유건(劉建)이 뒤를 이었다. 이가 치천정왕(菑川靖王)이다. 정왕은 재위 20년 만에 죽고 아들 유유(劉遺)가 뒤를 이었다. 이가 치천경왕(菑川頃王)이다. 경왕이 재위 36년 만에 죽고 아들 유종고(劉終古)가 섰다. 이가 치천사왕(菑川思王)이다. 사왕이 재위 28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유상(劉尚)이 섰다. 이가 치천효왕(菑川孝王)이다. 효왕이 재위 5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유횡(劉橫)이 뒤를 이었다. 유횡은 한성제(漢成帝) 건시(建始) 3년인 기원전 30년에 11살의 나이로 죽어 나라가 없어졌다.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다. 창평후(昌平侯)의 신분으로 한문제 16년에 교서왕에 책봉되었다. 10년 후인 기원전 154년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유앙을 한나라 조정이 군사를 보내 반란군을 무찌린 후에 유앙을 죽이고 봉국은 없어지고 교서군이 되어 한나라 조정에 속하게 되었다.

교동왕(膠東王) 유웅거(劉雄渠)는 제도혜왕의 아들이다. 백석후(百石侯)의 신분으로 한문제 16년에 교동왕에 책봉되었다. 10년 후인 기원전 154년 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유웅거를 한나라 조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고 죽였다. 교동국은 없어지고 교동군이 되어 한나라 조정에 속하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제후들의 나라 중에서 제도혜왕의 제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었다. 천하가 바야흐로 평정되고 유씨 자제들은 나이가 어렸고 또한 진나라는 한 척의 땅도 제후들에게 봉하지 않았던 일에 격앙되어 동성의 황족들에게 대규모로 봉국을 주어 만백성의 마음을 위무했다. 이윽고 그 후손들의 대에 이르자 유씨의 황족들은 분열되고 쪼개진 것은 원래가 세상의 이치가 그랬기 때문이었다.」 

주석

1) 조삼왕(趙三王)/ 조나라 왕에서 쫓겨난 한고조 유방의 세 아들을 말한다. 제후왕에서 쫓겨난 조나라의 세 왕은 1. 척희(戚姬)의 소생으로 여후에게 독살당한 조여의(趙如意), 2. 여씨의 딸 출신의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여태후에게 구류당해 굶어죽은 조유왕(趙幽王) 유우(劉友) 3. 유우의 뒤를 이어 양왕(梁王)에서 조왕으로 옮겼으나 왕비로 맞이한 여산(呂産)의 딸이 사랑하는 후비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자 이를 슬퍼하여 같이 자살한 유회(劉恢)를 말한다.

2) 여산(呂産)은 조왕, 여록(呂祿)은 양왕, 여통(呂通)은 연왕에 책봉한 일을 말한다.

3) 當斷不斷 反受其亂(당단부단 반수기란)

4) 수성군(脩成君)/ 왕태후가 입궁하여 한경제의 황비가 되기 전에 민간의 김왕손(金王孫)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다. 즉 수성군은 한무제의 이부 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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