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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3.소하(蕭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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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6,064회 작성일 12-08-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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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23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이다. 현내에 그보다 법률에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 현령은 그를 관아의 관리로 수하에 두었다.

한고조 유방(劉邦)이 평민으로 있을 때 소하는 관리의 신분으로 그를 감싸주었다. 유방이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이 되자 소하는 늘상 그의 일을 돌봐주었다. 유방이 관리의 신분으로 함양(咸陽)의 요역에 복무하러 갈 때 관리들은 모두 그에게 300전의 전별금을 내어 보냈으나 소하만은 유독 500전을 냈다.

진나라 정부에서 파견된 어사(御史)가 사수군(泗水郡)의 행정을 감찰하러 왔을 때 소하는 그들의 속관이 되어 모든 일의 전후사정을 파악하여 조리있고 명백하게 처리했다. 소하는 또한 사수군 졸사(卒史)①의 일을 맡았는데 그의 일 처리하는 성적은 지방관리들 중 제일이었다. 진나라 조정에서 나온 어사들이 소하를 입조시켜 등용하려고 했으나 소하는 한사코 사양하며 가지 않았다.

이윽고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하여 패공으로 추대되자, 소하는 항상 그의 곁에서 보좌하여 공무를 처리하는데 도왔다. 패공이 함양에 진입했을 때 여러 장수들은 모두 다투어 부고로 달려가 황금이나, 비단 등의 재물들을 취하여 나누어 가졌지만, 오직 소하만은 곧바로 궁실로 달려가 진나라 승상부와 어사부에 보관되어 있던 법률 조문과, 지적도 및 호적부 등의 문헌들을 수집하여 깊숙한 곳에 감추어 보관했다. 한왕으로 책봉된 패공은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함양에 들어와 성민들을 도륙하고 궁실들을 모두 불태운 항우와 제후의 군사들은 동쪽으로 돌아갔다. 한왕이 후에 천하의 험한 관새(關塞), 호구(戶口)의 많고 적음,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질고의 내용 등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원인은 모두 소하가 챙긴 전적(典籍)과 문헌 때문이었다.

소하는 한신을 한왕에게 천거하여 대장군에 임명하도록 했다. 그 상세한 경과는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쓰여 있다.


이윽고 한왕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소하는 승상의 신분으로 남정(南鄭)에 남아 파(巴)와 촉(蜀) 지방을 진무하고 법령을 발포하여 한나라 군현으로 만들었다. 한나라는 한중과 파촉 지방에서 걷은 부세로 관중지방을 평정하기 위해 출동한 한군(漢軍)의 군량과 마초를 공급했다.

한 2년 기원전 205년, 한왕과 여러 제후들이 힘을 합하여 항우의 초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했을 때, 소하는 태자를 모시고 역양(櫟陽)에 머물며 관중을 지켰다. 소하는 그 사이에 법령과 규약을 제정하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궁실을 건축하고 관중의 각 지역에 군과 현을 세워 행정조직을 완비했다. 소하는 이러한 일을 할 때마다 한왕에게 품하고 동의와 허가를 얻은 후에라야 일을 행했다. 만일 한왕에 출전하여 부득이 고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시의 적절하게 일을 처리했다가, 한왕이 돌아오면 다시 그 일의 결말을 고하곤 했다. 관중의 호적을 관리하던 소하는 양식과 마초를 백성들로부터 징수하여 전방의 한군에게 보내주었다. 한왕은 여러 번 항우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그 군사들을 버리고 도망쳐 돌아왔으나, 소하는 그때마다 관중의 사졸들을 징발하여 잃어버린 군사들을 보충해주었다. 한왕은 이로써 관중의 모든 정사를 소하에게 일임했다.

한 3년 기원전 204년, 한왕과 항우가 경성(京城)과 색성(索城) 사이에서 대치했다. 그때 한왕은 여러 번 사자를 소하에게 보내 그 노고를 위로하며 치하했다. 이에 포생(鮑生)이라는 사람이 소하에게 말했다.

「한왕은 전장에 나가 풍찬노숙하며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자를 여러 번 승상께 보내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왕이 승상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승상을 위해 한 말씀드리자면, 승상께서는 자식과 손자 및 형제들 중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아 모두 전장터에 보내 한왕의 싸움을 도와 온 힘을 다하라고 하십시오. 한왕은 필시 승상에 대해 안심하고 다시 신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하가 포생의 말대로 행하자 한왕은 매우 기뻐했다.

한 5년 기원전 202년, 마침내 우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한 한왕은 신하들의 논공행상을 행하려고 했다. 신하들이 서로 공을 다투어 일어난 논란 때문에 일 년이 지나도록 공로의 대소를 정할 수 없었다. 소하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생각한 고조는 그를 찬후(酇侯)②에 봉하고 공신들 중 가장 많은 식읍을 하사하려고 했다. 공신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몸에 갑옷을 두르고, 병장기를 손에 들고 전투에 친히 참가하여 많게는 100여 회, 적게는 10여 회에 걸쳐 했습니다.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적군의 땅을 평정해서 모두가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하는 우리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여 힘들여 싸워 세운 공로가 있다고 어떻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단지 필묵을 잡고 입으로만 전쟁을 하고 전투에는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오히려 소하의 공을 우리들 맨 위에 놓으시려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고조가 그 신하들에게 물었다.

「여러 장군들과 대신들은 사냥의 도리를 알고 있는가?」

군신들이 모두 대답했다.

「사냥의 도리를 어찌 모르고 있겠습니까?」

고조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사냥터에서 사냥개의 역할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습니다.」

「사냥을 할 때 짐승을 추격하여 물어뜯어 잡는 일이 사냥개의 역할이고 짐승의 종적을 추격하여 숨어 있는 곳을 사냥개에 알리는 일은 사냥꾼의 임무이다. 지금 그대들이 한 일이라고는 간신히 짐승 몇 마리를 잡아왔을 뿐으로 공로로 말하면 단지 사냥개가 세운 공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짐승들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냥개들에게 그 목표를 분명히 알려주어 잡아 올 수 있도록 한 소하의 공로는 마치 사냥꾼이 세운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동안 여러분들은 혼자 따랐고, 많아봐야 2-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하는 자기들 종족들 수십 명으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여 천하를 횡행하며 전쟁을 치르게 했다. 어찌 그의 이러한 공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군신들은 아무도 감히 그 일에 대해 다시 논하지 못했다.

군신들이 모두 봉작을 받아 열후에 책봉되자, 다시 고조를 향해 그들의 서열을 정해달라고 하며 말했다.

「평양후(平陽侯) 조참(曺參)은 그 몸에 70여 군데의 상처를 입으며 적군의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으니 그 공로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를 공신록의 맨 위에 놓아야 합니다」

이미 소하의 공을 제일로 인정하고 가장 많은 식읍을 부여하여 공신들을 굴복시킨 고조는 다시 공훈의 서열을 메기는 일까지 공신들의 뜻에 반하여 정할 수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소하를 맨 위에 올리고 싶어 했다. 이에 고조의 심정을 헤아린 관내후(關內侯) 악천추(鄂千秋)가 앞으로 나와 진언했다.

「여러 대신들의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조참이 비록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며 적군의 성과 땅을 점령한 공이 비록 크다고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공로에 불과합니다. 항왕(項王)과 5년 동안에 걸쳐 서로 대치하고 전투를 치른 폐하께서는 여러 번에 걸쳐 싸움에 지고 그때마다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음으로 홀홀단신으로 도망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하는 그럴 때마다 관중의 자제들을 모아 페하가 계시는 전선으로 보내 잃어버린 병력을 보충시켰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모두 폐하의 지시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했습니다. 또한 관중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전선으로 보낼 때는 언제나 폐하께서는 싸움에서 패한 직후의 가장 위급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군과 초군이 형양(滎陽)에서 몇 년간에 걸쳐 대치할 때, 군중에는 양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하가 관중에서 수레나 선박을 이용하여 양식을 보내주어 한군은 굶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여러 번에 걸쳐 효산(崤山) 이동 지역의 싸움에서 패하는 동안 소하는 오로지 관중 지방을 굳건히 보전하여 만세에 길이 빛날 공훈을 세웠습니다.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100명이 없다한들 한왕실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한왕실은 조참과 같은 사람들의 힘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일시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을 만세에 길이 빛날 공적을 세운 사람 위에 놓으려고 하십니까? 마땅히 소하의 공을 맨 위에 올리고 조참을 그 다음으로 하십시오!」

「그대의 말대로 소하의 공로를 맨 위로 올리겠소!」

이어서 고조는 소하에게는 칼을 찬 상태로, 신발을 신고 전당에 오르는 특전을 허락했으며, 황제를 배알할 때는 작은 걸음으로 걷는 의례를 따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되는 특전을 내렸다.

고조가 말했다.

「나는 어진 사람이나 인재를 추천한 사람에는 상을 주어야 한다고 들었소. 소하의 공로가 비록 매우 높다고 하나 악후(鄂侯)의 말이 없었다면 소하의 공이 그렇게 찬란히 빛나지 않았을 것이오」

고조가 악후에게 원래 관내후로 책봉될 때 받은 식읍에 다시 안평후에 봉하여 그 식읍을 더해 주었다. 그날로 소하 부자 및 그 형제 10여 인 모두에게 식읍을 주어 열후에 봉했다. 후에 다시 고조는 소하에게 2천 호의 식읍을 더해 주었는데, 그것은 옛날 고조가 함양의 요역에 복무하러 갈 때 전별금으로 소하만이 유일하게 다른 사람과는 달리 2백 전이 더 많은 전별금을 준 것에 대한 보답에서 였다.

한 11년 기원전 196년, 진희(秦豨)가 반하자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여 한단에 당도했다. 반란군을 미처 진압하기 전에, 회음후 한신이 다시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켜 진희에게 내응하려고 했다. 여후(呂后)가 소하의 계책을 이용하여 회음후를 잡아 죽였다. 이 일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당시 한단에 머물고 있었던 고조가 회음후 한신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승상 소하를 다시 상국에 임명하고, 그 공로를 치하하여 5천 호의 식읍을 더하여 주고, 이와 함께 명을 전하여 500명의 사졸과 1명의 도위를 정해 소하의 경호를 맡게 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소하에게 축하의 말을 올렸다. 그러나 유독 소평(召平)만은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소평이라는 사람은 원래 진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었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망하자 윤락하여 평민으로 떨어져 가난하게 살면서 장안성 동쪽의 교외에 참외를 길러 생활하고 있었다. 그가 키운 참외는 맛이 좋아 사람들은 그 참외를 ‘동릉과(東陵瓜)’라고 칭했다. 소평이 소하에게 말했다.

「화가 이윽고 승상의 몸에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햇볕에 그을리며 황야에서 노숙하며 밖에서 힘든 전쟁을 하고 있는데, 조정에 남아 전쟁으로 인한 험난한 고생도 하지 않음에도, 오히려 승상의 봉지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경호부대까지 붙여주니, 이것은 회음후의 반란으로 인하여 승상을 의심하게 된 결과입니다. 경호대를 설치하여 승상을 지키라고 내린 명은 정말로 승상을 믿고 은총을 베푸려는 본심이 아닙니다. 원컨대 식읍과 호위대의 설치를 사양하시고 가산을 모두 들어 황제에게 보내 군비로 사용하게 한다면 황제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소하가 동릉후의 말을 따르자 고조가 과연 크게 기뻐했다.

한12년 기원전 195년 가을, 구강왕 경포(黥布)가 반기를 들자 고조가 그를 토벌하기 위해 친히 출정했다. 행군 중의 고조가 여러 번에 걸쳐 사자를 보내 소상국이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 중에 있음으로, 그는 후방에 남아서 백성들을 위무 격려하면서, 옛날 진희를 토벌할 때 행했던 것처럼 자기의 전재산을 들어 황제의 군사들 비용에 충당하게 했다. 소하의 문객 중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이제 멸족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승상의 지위는 상국에 이르고, 공로는 천하제일입니다. 거기에 무엇인들 더 얹힐 수 있겠습니까? 승상께서는 관중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그때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얻은 이래 이제 10여 년이 지나 백성들은 모두 승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 승상께서는 아직도 정사를 하는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하여 더욱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황제께서 여러 번에 걸쳐 승상의 근황에 대해 물으신 이유는 승상의 명성이 관중 지방을 진동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승상께서는 백성들의 전답을 싼값에 외상으로 사들이시어 승상의 명성을 깎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황제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습니다.」

소하가 그 말을 따르자 고조는 그때서야 비로소 크게 기뻐했다. 고조가 마침내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다가 그 행렬을 가로막는 백성들의 진정서를 받았다. 백성들은 소상국이 헐값으로 백성들의 전답과 가옥들을 강제로 수천 만 전 어치를 사들였다고 고발했다. 도성에 돌아온 소하는 소하의 알현을 받고 웃으면서 말했다.

「상국의 이민(利民)하는 방식이 결국은 이와 같았단 말이오?」

고조는 도중에 백성들로부터 받은 상소문을 소하에게 보여주고 말했다.

「상국은 그 백성들에게 사죄를 하시오.」

소하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고조에게 청했다.

「장안 일대는 그 토지가 너무 협소하여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충분치 않습니다. 마침 상림원(上林園)③에는 농사를 지을 만한 공터가 많이 있고,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어져 황폐해져 있습니다. 원컨대 상림원을 개방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공터에 농사를 지어 타작하여 곡식을 거두시게 하시고, 그 볏짚과 보릿짚은 그대로 두어 짐승들의 먹이로 삼게 하십시오.」

고조가 크게 노하여 말했다.

「나는 상국이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겼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겠소. 그들을 위해 어찌 감히 내 전용의 상림원을 개방하라고 청할 수 있단 말이오?」

그래서 고조는 소하를 정위(廷尉)에게 주어 차꼬를 채워 감옥에 가두록 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왕씨 성을 갖은 한 위위(衛尉)④가 곁에서 호위하다가 고조 앞으로 나아가 진언했다.

「소상국이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폐하께서는 감옥에 가두고 그렇게 엄혹하게 다루십니까?」

「나는 옛날 진나라의 이사(李斯)가 진시황을 보좌할 때 좋은 공적은 모두 황제에게로 돌리고, 나쁜 일은 모두 자기의 과실로 돌렸다고 들었다. 오늘 상국이 간사스러운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백성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황실 소유의 상림원을 요구했다. 자기는 뇌물을 받아 챙기면서 나에게는 상림원을 내 놓으라고 청해 자기의 명성만을 올리려고 했기 때문에 그를 구금하여 죄를 물으려고 했을 뿐이다」

「자기가 맡은 직책의 범위 내에서,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청구를 하는 일은, 분명 재상의 본분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상국이 상인들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의심하십니까? 더욱이 옛날 폐하께서 항왕과 수 년 동안 싸웠을 때나, 진희나 경포가 반기를 들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을 때나, 상국이 그때 만약 한 발을 빼고 미동만 했더라도 함곡관 이서 지역은 폐하께서 차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상국은 그때도 이를 쫓지 않았는데, 지금 오히려 상인들의 뇌물을 탐했겠습니까? 더욱이 진시황은 자기 과실에 대해 남의 의견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사가 어떻게 진시황의 과실을 대신했다고 본 받아야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 상국을 그렇게 의심하여 천박한 행동을 하십니까?」

고조가 위위의 말을 듣고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이윽고 그 날로 사자에게 부절을 들려 보내 상국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국은 그때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으나 평소에 항상 공손하고 매사에 신중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소하는 입궐하여 맨 발로 고조를 배알하며 사죄했다. 고조가 말했다.

「상국의 뜻대로 하시오. 상국은 백성들을 위해 상림원을 짐에게 요청했고, 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나는 결국은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에 불과하게 되었고, 상국은 어진 재상이 되었소. 짐이 상국에게 차꼬를 채워서 감옥에 가둔 까닭은, 백성들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소.」

소하는 원래 조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윽고 소하가 늙어 병들었을 때 효혜제(孝惠帝)가 친히 상국의 병세를 살펴보기 위해 왔다가 기회를 틈타 물었다.

「상국이 죽게 되면 누구를 대신 세워야 되겠습니까?」

「아마도 군주보다도 그 신하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조참은 어떠합니까?」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참으로 적합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제가 아무런 걱정 없이 죽을 수 있겠습니다.」

소하는 전답과 가옥을 살 때는 항상 외딴 벽지에 마련했고, 집을 지을 때는 담장을 세우지 않았다. 소하가 죽으면서 말했다.

「나의 후대가 현명하다면 나의 검소한 면을 배우겠고,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빼앗기지는 않으리라!」

효혜제 2년 기원전 193년, 상국 소하가 죽었다. 시호는 문종후(文終侯)다.

소하의 후대에 가서 범죄를 저질러 후작과 봉호를 잃어버린 때는 4대에 이르러서였고, 매번 후계를 이을 사람이 끊어졌다. 그때마다 황실은 소하의 후손을 찾아내어 찬후(酇侯)의 작위를 잇게 했다. 왜냐하면 소하가 이룩한 공훈은 다른 공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높고 컸기 때문이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소상국 하(何)는 진나라 때 일개 현성(縣城)의 도필리(刀筆吏)⑤에 불과한 사람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만한 특별한 일도 이루지 못했다. 이윽고 한왕조가 일어서자 소하는 황제의 후광을 얻어 성실하게 자기의 직책을 수행했다. 백성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법에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여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제공했다. 한신(韓信), 팽월, 경포(黥布) 등 한나라 창업공신의 대부분은 주살되었으나, 소하가 이룩한 공적만은 찬란히 빛나 그의 지위는 공신 중에서 제일 높았다. 소하의 명성은 후세에 까지 전해져 주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킨 굉요(宏夭)와 산의생(散宜生) 등이 이룩한 공적과 비견할만하다고 하겠다.」


주석

①졸사(卒史) : 진한(秦漢) 교체기 때 군(郡)의 하급관리 중의 하나로 군승(郡丞)의 밑에 있으면서 군수부의 문서수발을 도왔다. 그 녹이 1년에 100석이었던 관계로 백석졸사(百石卒史)라고도 했다.

②찬(酇) : 지금의 호북성 광화현(光化縣) 경내로 소하의 봉국이다. 한문제 원년, 기원전 179년 蕭同 때 폐국 되었다.

③상림원(上林園) : 진나라 때 조성된 함양성 남쪽의 황제 전용 사냥터를 말한다. 한나라 초 관리가 안 되어 황폐해 졌다가 고조 12년 백성들에게 개방되어 개간을 허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무제 때에 이름을 궁원(宮苑)으로 바꿔 불렀다. 그 크기가 사방 200여 리에 달했고, 원내에는 짐승을 방목하여 황제가 사냥을 즐기게 했으며 원내 곳곳에 이궁, 관람을 위한 누각, 그리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관사들과 같은 시설물을 축조했다.

④위위(衛尉) : 황제의 경호대원 중 중급 지휘관

⑤도필리(刀筆吏) : 종이가 출현하기 전의 고대 중국에서는 글씨를 목간이나 죽간에 썼다. 한 번 사용한 것을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하거나 틀린 글자를 고치기 위해서 칼로 긁어내고 다시 썼다. 죽간의 틀린 글씨를 칼로 긁어내고 붓으로 다시 쓰는 지방관아의 하급관리를 도필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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