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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4.조참(曹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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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4,334회 작성일 12-08-04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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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24. 조참(曹參)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沛) 출신이다. 진나라 때 패현의 옥리였다. 그때 소하(蕭何)는 패현 관아의 아전들 중 선임자인 주리(主吏)였다. 두 사람 모두 현내의 아전들 중 호걸들이었다.

고조가 패공이 되어 처음 기의할 때 조참은 중연(中涓)1)으로 종군했다.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격할 때 진나라 감공(監公)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동쪽으로 나아가 설(薛)을 함락시켰고 사수군(泗水郡)의 태수가 지휘하는 군대을 설읍의 서쪽 외곽에서 격파했다. 진로를 바꾸어 서쪽으로 나아가 호릉을 다시 점령하고 방여를 지키기 위해서 이동했다. 그때 방여는 위(魏)나라에 이미 항복한 후였다. 방여를 공격하여 점령한 조참은 위나라에 항복한 풍(豊)을 공격했다. 그 공으로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탕읍(碭邑)의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의 사마 이(夷)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탕읍과 호보(狐父) 및 기현(祁縣)의 선치(善置)를 점령했다. 계속해서 하읍(下邑)의 서쪽으로 나아가 우(虞)에 이르러 장한(章邯) 소속의 거기(車騎)를 공격했다. 원척(爰戚)과 항보(亢父)를 공격할 때 사졸들에 앞서서 맨 먼저 성벽에 올랐다. 오대부(五大夫)로 작위가 올랐다. 북쪽으로 나아가 아읍(阿邑)을 구하고 장한의 군대를 공격하여 진현(陳縣)을 함락시키고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복양(濮陽)에 이르렀다.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며 임제(臨濟)를 취했다.

남쪽으로 진군하여 옹구(雍丘)를 구했다.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군대를 대파하고 이유는 살해했으며 진나라의 후의 작위를 갖고 있는 자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 장수 장한이 초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항량(項梁)을 살해하자 패공과 항우는 잔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후퇴했다. 초회왕(楚懷王)이 패공을 탕군(碭君)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탕군의 장병들을 인솔하게 했다. 그래서 조참은 집백(執帛)2)이 되었고 건성군(建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후에 척공(戚公)이 되어 탕군(碭君)에 속했다.

그 후에 다시 종군하여 동군(東郡)의 위(尉)가 이끄는 군사를 성무(成武)의 남쪽에서 파하고 계속 강리(杠里)로 진공하여 대파했다. 그 뒤를 추격하여 서쪽의 개봉(開封)에 이르러 조분(趙賁)의 군대를 격하고 조분이 패주하여 개봉성으로 들어가자 추격하여 포위했다. 서쪽으로 진격하여 양웅(楊熊)의 군대를 곡우(曲遇)에서 격파하고 진나라 사마(司馬)와 어사(御使) 각 1명 씩을 포로로 잡았다. 작위가 집규(執珪)3)로 올랐다. 기의군에 종군하여 양무(陽武)를 공격하고 환원(轘轅), 구지(緱氏)를 점령했으며 황하의 나루터를 끊고 다시 돌아와 조분(趙賁)의 군대를 시읍(屍邑)의 북쪽에서 공격하여 무찔렀다. 남쪽으로 종군하여 주(犨)를 공격하고 남양(南陽)의 수장 기(齮)와 양성(陽城)의 동쪽 외곽에서 싸워 적진을 함락시켰다. 완성(宛城)을 점령하고 기(齮)를 포로로 잡아 남양군 전체를 평정했다. 서쪽으로 진공하여 무관(武關)과 요관(嶢關)을 공략하여 점령했다. 계속 북진하여 남전(藍田)의 남쪽에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고 다시 밤을 이용하여 그 북쪽 진지를 기습하여 대파했다. 승세를 타고 함양(咸陽)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했다.

후에 함양으로 입성한 항우에 의해 한왕에 봉해진 패공은 조참을 건성후(建成侯)에 봉했다. 한왕을 따라 한중에 들어간 조참은 장군이 되었다. 다시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처음으로 하변(下辯), 고도(故都), 옹(雍), 태(斄) 등의 땅을 공략했다. 호치(好畤) 남쪽에서 장평(章平)4)의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호치로 진군하여 포위했다. 양향(壤鄕)을 점령했다. 삼진의 군사를 양향의 동쪽과 고력(高櫟)에서 격파하고 장평의 군대를 다시 포위하자 장평은 호치에서 탈출하여 달아났다. 승세를 타고 조분과 내사 보(保)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함양의 동쪽 땅을 점령하여 신성(新城)으로 이름을 바꿨다. 항우가 봉한 삼진(三秦)의 제후왕들이 장평 등의 장수들을 시켜 경릉(景陵)을 20여 일 동안 지키던 조참을 공격하게 하자 조참이 맞이하여 싸워 대파했다. 그 공으로 영주(甯奏)를 식읍으로 받았다. 장군이 된 조참은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장한을 폐구(廢丘)에서 포위했다. 중위(中尉)의 신분으로 한왕을 종군하여 임진관(臨晉關)으로 진군했다. 하내(河內)에 이르러 수무(脩武)를 함락시키고 위진(圍津)에서 하수를 도하하여 동쪽으로 나아가 정도(定陶)의 용저(龍且)와 항타(項他)를 격파했다.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탕(碭), 소(蕭), 팽성(彭城)을 함락시켰다. 항우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싸움에서 대패하고 서쪽으로 패주했다. 서쪽으로 돌아온 조참은 중위의 신분으로 옹구(雍丘)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왕무(王武)는 황(黃)에서, 정처(程處)는 연(燕)5)에서 반기를 들자 출격하여 모두 평정했다. 다시 주천후(柱天侯)가 연지(衍氏)에서 반하자 진군하여 격파하고 연지를 점령했다. 우영(羽嬰)을 곤양(昆陽)에서 공격하여 격파하고 그 뒤를 추격하여 엽(葉)에 이르렀다. 다시 돌아와 무강(武彊)을 공격하고 승세를 타고 진군하여 형양(滎陽)에 이르렀다. 조참은 한중에서부터 장군과 중위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제후들과의 전투를 수행하다가 마침내 항우에게 패전하여 형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였다.

  고조 2년 기원전 205년, 좌승상 대리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관중에 주둔했다. 한 달여 후에 위왕 표(豹)가 반하자 좌승상의 신분으로 한신의 군대에 속하여 별도의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위나라 장군 손속(孫遫)의 군사를 동장(東張)6)에서 대파했다. 승세를 타고 안읍을 공격한 조참은 위나라 장수 왕양(王襄)을 사로잡았다. 곡양(曲陽)에서 위왕(魏王)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그 뒤를 추격하여 무원(武垣)에서 위왕 표(豹)를 생포했다. 위나라의 도성 평양(平陽)을 점령하고 위왕의 모친과 처자를 포로로 잡았으며 52개 성좌에 이르는 위나라 땅을 모두 평정했다. 그 공으로 평양을 식읍으로 받았다. 한신의 원정군에 종군하여 조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의 군대와 오(鄔)의 동쪽에서 싸워 대파하고 하열을 참했다. 한신이 옛날 상산왕(常山王)이었던 장이(張耳)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정형(井陘)에서 성안군(成安軍) 진여(陳餘)의 군대를 무찌를 때 조참은 한신의 명을 받들어 회군하여 오성(鄔城)에 주둔하고 있던 조나라의 별장 척(戚)장군을 공격했다. 척장군이 오성(鄔城)을 버리고 달아나자 그 뒤를 추격하여 목을 벴다. 이윽고 조참은 군대를 이끌고 행군하여 오창(敖倉)의 진영에 당도하여 한왕의 본대에 합류했다. 조나라를 평정한 한신은 상국의 신분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로 진격했다. 조참은 우승상의 신분으로 한신에 예속되어 제군(齊軍)을 역하(曆下)에서 공격하여 무찌르고 임치(臨菑)를 점령했다. 다시 뒤로 돌아가 제북군(濟北郡)을 평정하고 저(著), 탑음(漯陰), 평원(平原), 격(鬲), 노(盧) 등을 공략했다. 한신의 부대에 종군하여 용저(龍且)의 초군을 가밀(假密)에서 대파하고 용저는 목을 베고 그의 부장 주란(周蘭)은 포로로 잡았다. 마침내 제나라를 평정하고 72개 현을 한나라 영토로 만들었다. 옛날 제왕이었던 전광(田廣), 상국 전광(田光), 수상(守相) 허장(許章), 옛날 제나라의 교동(膠東)장군 전기(田旣) 등을 포로로 잡았다. 한신이 제왕이 되자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진(陳) 땅에서 한왕의 본대와 합류하여 항우를 격파했으나 조참은 계속 머무르며 제나라의 항복하지 않는 지방을 공략했다.

항우가 이미 죽고 천하가 안정되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왕은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자리를 옮기고 제나라 땅을 군(郡)으로 편입시켰다. 조참은 돌아와 한나라 상국의 인을 반납했다. 고조는 서장자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에 봉하고 조참을 제나라 상국으로 임명했다. 고조 6년 기원전 199년 고제는 조참을 열후(列侯)에 봉하고 제후의 부절을  내려 그 작위를 대대손손 끊기지 않고 잇도록 했다.

조참은 평양의 1만 6백 3십 호를 식읍으로 받고 그 전의 식읍을 모두 반환했다.

제나라의 상국의 신분으로 진희(秦稀)의 반란군을 토벌할 때 종군하여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의 군대를 격파했다. 후에 경포가 반하자 제나라의 상국의 신분으로 제도혜왕(齊悼惠王)7)이 일으킨 12만 명에 달하는 거기(車騎)의 원정군을 이끌고 고조와 함께 경포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계속 남쪽으로 되돌아가 죽읍(竹邑), 상(相), 소(蕭), 유(留) 등의 땅을 평정했다.

조참의 공적은 제후국 2 나라에 122개 현을 평정하거나 점령했으며, 제후왕 2명, 제후국의 상국 3명, 장군 6명, 대막오(大莫敖)8), 군수(郡守), 사마(司馬), 후(侯), 어사(御使) 각 1명씩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혜재 원년 기원전 192년, 제후국에 상국(相國)을 두는 법을 폐지한 조정은 조참을 제나라의 승상(丞相)에 임명했다. 조참은 제나라의 승상이 되어 관할의 70개 성읍을 다스렸다. 천하가 막 안정되었고 또한 도혜왕은 나이가 아직 어렸음으로 조참은 제나라에 살고 있는 장로와 여러 선생들을 모두 불러 백성들을 모아 나라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제나라에는 원래 수백 명의 유생이 있어 사람마다 서로 그 설이 달라 조참은 어떤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교서(膠西)의 개공(蓋公)이 황노학에 조예가 깊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예물을 후하게 보내 초빙했다. 이윽고 부름에 응하여 조참을 만난 개공이 말하기를 치도(治道)의 가장 좋은 방법은 청정무위(淸淨無爲)로써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스스로를 안정시킬 것이라고 했다. 개공은 이 설을 주제로 많은 사례를 유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조참은 승상의 집무하는 자리를 개공에게 양보하여 조언을 구했다. 제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정책에 황노학설을 채용한 조참은 그렇게 9년을 제나라의 상국으로 보냈다. 마침내 제나라는 안정되어 조참은 현상(賢相)이라는 이름을 크게 얻었다.

  혜제(惠帝) 2년 기원전 193년 소하가 죽었다. 제후국인 제나라의 승상으로 있던 조참은 이 소식을 듣고는 그의 문객들에게 행장을 꾸리라고 재촉하며 말했다.

" 나는 곧 입궐하여 상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과연 황제의 사자가 조참을 부르러 왔다. 조참이 떠날 때 자기의 후임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 나라의 감옥과 시장은 간사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이니, 그러한 곳에 대해서는 마땅히 신중해야 하며 혼란이 있어서는 알 된 것이오."

후임 승상이 물었다.

"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말씀하신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조참이 대답했다.

" 그렇지는 않소! 그러나 감옥과 시장이라는 곳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곳이오. 만약 그대가 그곳을 엄중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간악한 사람들이 몰려와 그곳에 가득 찰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이 일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오."

조참이 아직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에는 소하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후에 조참이 장군이 되고 소하가 상국이 되어 관중을 지킬 때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소하가 임종할 때 현명하다고 자기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바로 조참을 추천했다.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한나라의 상국이 되어 모은 일을 변경함이 없이 한결같이 소하가 제정한 법을 따랐다. 조참은 각 군이나 제후국의 관리 중에 문장의 문체가 질박하고 꾸밈이 없는 중후한 장자(長者)가 있으면 곧 불러들여 승상부(丞相府)의 관리로 임명했다. 관리 중에 언어와 문체가 각박하고, 칭송이나 명성을 얻기에만 힘쓰는 자는 곧 물리쳐 내 보냈다. 조참은 밤낮으로 술을 마셨다. 경(卿)과 대부(大夫)이하의 관리들이나 그의 문객들은 조참이 정사를 돌보지 않은 것을 보고, 내방할 때마다 모두 진언하거나 권고하려고 하였다. 그런 사람이 찾아오면 조참은 곧 맛있는 술을 마시게 하였고, 조금 지나서 할 말을 하려고 하면 다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에 돌려보내어 방문한 사람이 끝내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항상 있는 일이었다. 상국의 집 후원과 가까이 있었던 관사에서, 관리들은 하루 종일 술 마시고 노래하며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조참의 승상부 관리들은 그들을 매우 미워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윽고 승상부 관리들은 조참에게 후원으로 나와 놀게 하고, 이웃해 있는 관사에서 관리들이 취해서 떠들고 노래하는 것을 듣게 하여, 상국이 그들을 불러 조치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조참은 도리어 술을 가져오라 이르고 오히려 그들을 불러 자리를 마련하여 같이 고상방가하며 그 관리들과 즐겼다. 조참은 관리들의 사소한 잘못을 보면 오로지 숨겨주고 덮어주니 승상부에서는 문제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조참의 아들 조줄(曹窋)은 중대부였다. 혜제는 상국이 정사를 처리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며 " 상국이 나를 경시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혜제가 조줄을 불러 말했다.

" 그대가 집에 돌아가거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부친께 다음과 같이 한 번 물어 보기 바라오 ‘ 고제(高帝)가 돌아가시어 신하들과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황제의 나이도 아직 젊은데, 부친께서는 상국이 되어 날마다 술만 마시고 황제께 소청하거나 보고하는 일도 없으니 무엇으로써 천하대사를 걱정하십니까?’라고 묻고, 결코 내가 시켰다고는 말하지 마시오."

줄이 황제에게서 휴가를 얻어 집에 와서 조참을 보고 혜제가 시키는 대로 물었다. 그러자 조참이 크게 화를 내며 줄의 종아리를 200대나 때리고서 말했다.

" 빨리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모시기나 잘하라! 천하의 일은 네가 말할 바가 아니다."

이윽고 조참이 조회에 참석하자 혜제(惠帝)가 조참을 나무라며 말했다.

" 왜 줄을 그렇게 혼낸 것이오? 지난 번 일은 짐이 시켜 그대에게 간하게 한 것이오."

조참은 황제의 말을 듣고 사죄의 말을 올렸다.

" 폐하께서 보실 때, 폐하와 돌아가신 선제이신 고제(高帝)와 비교하여 누가 더 영용(英勇)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혜제가 말했다.

" 내가 어찌 감히 선제(先帝)와 비교를 할 수 있겠오?"

조참 " 그렇다면 폐하께서 보실 때 저와 소하 중 누가 더 능력이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혜제 " 조상국이 소하에 미치지 못할 것 같소!"

조참 "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또 고제와 소하가 천하를 평정하였고, 법령도 이미 밝게 정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팔짱만 끼고 계시고 저희들은 직분을 지키면서 옛 법도를 따르기만 하고 잃지 않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

혜제 " 알겠소. 이제 상국은 쉬도록 하시오."

조참이 한나라의 상국이 된지 햇수로 3년이 되는 해인 기원전 190년에 죽었다. 조참이 죽자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조참의 덕을 칭송했다.

蕭何爲法(소하위법)

소하가 제정한 법  

若畵一(강약화일)

한자도 밝고 곧지 않은 것이 없었네

曹參代之(조참대지)

조참이 그 뒤를 이어

守而勿失(수이물실)

지켜가며 잃지 않았네

載其淸淨(재기청정)

맑고 공정하게 정사를 돌보니

民以寧一(민이영일)

온 백성들 한결같이 편안하네.

조참의 뒤를 이은 평양후(平陽侯) 조줄(曹窋)은 여후 치세시 어사대부를 지냈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조줄은 면직되어 일반 열후들과 같은 신분이 되었다. 그는 평양후의 신분으로 29년 동안 있다가 죽었다. 시호는 평양정후(平陽靜侯)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조기(曹奇)는 7년 만에 죽고 시호는 간후(簡侯)다. 평양후의 작위를 계승한 조기의 아들 조시(曹時)는 평양공주(平陽公主)9)와 결혼하여 아들 조양(曹襄)을 낳았다. 후에 나병에 걸려 장안에 거주하지 못하고 봉국에 돌아간 조시는 재위 23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이후(夷侯)다. 아들 조양이 작위를 계승하고 위장공주(衛長公主)10)와 결혼하여 아들 조종(曹宗)을 낳았다. 조양은 후의 자리를 계승한지 16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공후(共侯)다. 아들 조종이 작위를 계승했다.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조종은 위태자(衛太子)11)의 일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봉국은 없어졌다.

태사공이 말한다.

상국 조참이 야전(野戰)의 공로가 많음은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과 같다. 그런데 한신이 멸망한 후에 열후에 봉해진 공신 중에서 유독 조참만이 그 이름을 빛냈다. 조참이 한나라의 상국이 되자 시행했던 그의 정치사상 청정무위(淸淨無爲)는 도가의 원칙과 가장 부합된다고 하겠다. 더욱이 백성들이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받은 후, 조참이 그들에게 무위이치(無爲而治)로 휴식하게 하자, 천하 사람들이 모두 조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조상국세가 끝>

주석

1) 중연(中涓)/ 알자(謁者)나 사인(舍人) 등으로 군주의 측근에서 수발을 드는 비서에 해당한다.

2) 집백(執帛)/ 전국 때 초나라가 제정한 군공에 의해 수여한 작위 중의 하나다. 진한교체기에 초나라 세력이 주축이 된 기의군이 사용했다. 오대부(五大夫) 다음 작위이며 일설에는 초나라의 관명으로 대부에 해당한다고 했다.

3) 집규(執珪)/ 전국시대 초나라의 군공작의 하나로 진한교체기 때 기의군이 사용했다. 집규의 작위를 취득한 공신들은 집규를 들고 군주를 접견했다. 열후 바로 밑의 고위직이다.

4) 장평(章平)/ 진장 장한의 동생으로 장한이 항우에 의해 옹왕(雍王)에 봉해지자 그의 밑에서 장군이 되어 북지군(北地郡)의 수비를 담당하여 한왕 유방의 공격을 막았다. 유방이 한중에서 나와 전격작전으로 삼진을 평정할 때 북지군을 지키다가 포로가 되어 살해되었다.

5) 연(燕)/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燕津縣)이다. 북경 주위에 있었던 제후국 연나라와는 다른 지방으로 통상적으로 남연(南燕)이라고 한다.

6) 동장(東張)/ 지금의 섬서성 임진현(臨晉縣) 서

7) 제도혜왕(齊悼惠王)/ 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다.

8) 대막오(大莫敖)/ 전국 때 초나라의 관직명으로 초한쟁패시 항우의 서초가 따랐다. 직위는 경(卿)에 해당했다.

9) 평양공주(平陽公主)/ 경제의 큰 딸이며 무제의 누이이다. 평양후 조시와 결혼했음으로 평양공주라 칭했으며 후에 조시가 나병에 걸려 봉국에 돌아가 칩거하자 위청에게 개가했다.

10) 위장공주(衛長公主)/ 무제와 위자부 사이에 낳은 딸이다.

11) 기원전 91년에 일어난 무고(巫蠱)의 란을 말한다. 승상 공손하(公孫賀)가 황제를 무고했다고 고변이 들어오자 무제는 총신 강충(江充)을 시켜 조사하게 했다. 공손하는 옥중에서 죽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평소에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와 사이가 나빴던 강총은 무고의 사건을 이용하여 유거가 무고사건과 연류되었다고 사건을 조작하여 태자를 모함했다. 유거가 강충을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나 승상 유굴 리가 이끄는 관군과의 싸움에 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수만 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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