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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26.진평(陳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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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5,127회 작성일 12-08-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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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丞相平世家26

승상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1) 호유(戶牖)2) 사람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했다. 집안에 전답이 30무(畝)3)에 불과해 그의 형 진백(陳伯)이 혼자 집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다. 진백은 항상 밭일을 하면서 자기 동생을 여기저기로 보내 공부를 시켰다. 진평이 장성하게 되자 기골이 장대한 미장부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런 진평을 보고 말했다.

「가난한 집에서 무엇을 먹고 그렇게 장대하게 되었는가?」

집에 머물며 가사를 돌보지 않는 진평을 싫어한 그의 형수가 말했다.

「일을 하지 않으니 쌀겨나 먹게 해야지. 시동생이 저와 같으니 차라리 없는 편이 낳겠다.」

진백이 듣고 그의 부인을 집에서 내쫓아 버렸다.

진평이 이윽고 장가갈 나이가 되었으나 부자들은 그에게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평도 가난한 사람에게 장가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때 호유(戶牖)에는 장부(張負)라는 부자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의 손녀딸이 다섯 번이나 시집을 갔으나 그때마다 남편이 곧바로 죽어버려 사람들이 감히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진평이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때 생활이 곤공한 진평은 읍내에 상이 생긴 집이 있으면 가서 일을 도와주고 품삯을 받곤 했다. 진평은 상가에 남보다 먼저 가서 맨 나중까지 열심히 일했다. 장부가 상가의 일을 돌보고 있던 진평의 풍채가 유독 뛰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진평 역시 그 일로 인해 상가에서 일을 늦게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부가 진평을 따라 그의 집을 들렸다. 진평의 집은 성곽을 등진 후미진 골목에 있었고 헤진 돗자리로 그 문을 삼고 있었다. 그러나 문 밖에는 귀인들이 타고 방문했던 수레들의 바퀴자국이 많이 나 있었다. 장부가 집에 돌아가 그의 둘째 아들 장중(張仲)에게 말했다.

「내가 네 딸을 진평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다.」

「진평은 가세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라 현 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님만은 유독 제 딸을 진평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진평과 같이 당당한 풍모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빈천하게 지내는 것을 보았느냐?」

장부는 결국 그의 손녀딸을 진평에게 시집보냈다. 그러나 진평은 가난했기 때문에 장씨네 집에서 그에게 돈을 빌려주어 혼인 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고, 다시 잔치를 마련할 돈을 주어 신부를 데려갈 수 있도록 했다. 장부가 그의 시집가는 손녀딸에게 당부했다.

「시집이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시집사람들을 모시는데 소흘히 대하면 안 된다. 시숙 받들기를 네 아버지 섬기듯 하고, 큰동서 모시기를 어머님 봉양하듯이 하라!」

진평이 장씨 댁 딸을 부인으로 얻고 나서부터, 그녀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인해 진평의 씀씀이는 날로 여유롭게 되었고, 더불어 그의 교유 범위도 날이 갈수록 넓어졌다.

진평이 사는 고상리(庫上里)4)라는 마을에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 있었다. 진평이 그 제사를 주관하는 재(宰)가 되어 제사를 지낸 고기를 나누어주었는데 그 분배가 매우 공정했다. 마을의 부로들이 말했다.

「진씨네 젊은이가 재(宰)의 노릇을 참으로 잘하는구나!」

그 소리를 듣고 진평이 한탄했다.

「아! 슬프다. 이 진평에게 천하의 일을 주재하라고 하면 이렇게 고기를 분배하듯이 잘 할텐데!」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여 진현(陳縣)으로 들어가 왕이 된 진섭(陳涉)은 그 부하 장수 주불(周巿)을 시켜 옛날 위(魏)나라 땅을 공략하도록 하고 위나라의 왕손 위구(魏咎)를 위왕(魏王)으로 세웠다. 이어서 진왕은 위왕으로 하여금 임제(臨濟)5)에서 진(秦)나라의 관군과 싸우게 했다. 이에 진평은 그의 형에게 작별의 인사를 올리고 마을의 젊은이들과 함께 위왕 위구(魏咎)를 찾아가 섬겼다. 위왕은 진평을 태복(太僕)6)에 임명했다. 진평이 왕의 곁에서 계책을 여러 번 올렸으나, 위왕은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함을 받아 위태롭게 된 진평은 위왕으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항우가 북쪽으로 진격하여 하상(河上)7)에 이르자 진평이 달려가 귀의했다.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 군사들을 격파한 항우를 따라 종군한 진평은 그 공으로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항우는 동쪽으로 돌아와 왕이 되어 팽성(彭城)을 그 도읍으로 삼았고 한중에서 나온 한왕 유방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계속 진군했다. 은왕(殷王)8) 사마앙(司馬卬)은 자기의 영지를 들어 초나라에 등을 돌리고 한왕에게 항복했다. 항우는 진평을 신무군(信武君)에 봉하고 초나라 땅에 있던 위왕 위구(魏咎)의 부하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은왕을 공격하게 했다. 진평은 은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개선했다. 항우는 항한(項悍)을 파견하여 진평을 도위(都尉)9)에 임명하고 그에게 황금 20일(鎰)10)을 상금으로 하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왕 유방이 은나라 땅을 공격하자 은왕은 또다시 한나라에 항복해 버렸다. 항우가 대노하여 전에 은나라 땅을 정벌했던 장수들과 군리들을 모두 살해하려고 했다. 자기도 피살될 것이라고 생각한 진평은 옛날 항우가 자기에게 상금으로 내린 황금과 도위의 관인을 주머니에 넣어 봉하고 사람에게 주어 항우에게 돌려주게 하고 자기는 보검 한 자루만을 몸에 지닌 채 맨 몸으로 소로를 이용하여 도망쳤다. 진평이 황하의 강안에 당도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자, 한 사람의 헌헌대장부가 단신으로 여행하고 있는 진평의 모습을 보고 뱃사공들은 그가 도망치고 있는 장수라 고 의심했다. 그들은 진평의 허리춤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진평을 노려보며 기회를 봐 죽이려고 했다. 진평이 두려워하여 입던 옷을 다 벗어 재껴 알몸이 되어 뱃사공의 배를 젓는 일을 도왔다. 진평이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알게 된 뱃사공들은 그를 죽이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진평은 수무(修武)11)에 있던 한군을 찾아가 항복했다. 한왕(漢王)의 근신 위무지(魏無知)가 진평을 천거하자 한왕이 진평을 불러 접견을 허락했다. 그때 한왕의 곁에서 중연(中涓)12) 직에 있었던 만석군 석분(石奮)13)이 왕의 접견자 목록14)에 진평의 이름을 올리고 한왕을 접견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진평은 다른 일행에 섞여 7사람과 함께 한왕을 접견하고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들의 식사가 끝나자 한왕이 말했다.

「이만 돌아가 여사에 머물러 있으면 내가 별도의 명령을 내리겠노라!」

진평이 일행 중에서 나와 말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은 매우 급해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왕이 진평과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대단히 만족하며 기뻐했다. 한왕이 진평에게 물었다.

「초나라에 있었을 때 그대는 무슨 관직에 있었는가?」

「도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왕은 진평을 도위에 임명하고 자기의 참승(驂乘)15)으로 으로 삼아 항상 곁에 두고, 호군(護軍)16)의 일을 맡겼다. 이에 한나라 진영의 모든 장군들이 달려와 소란을 피우며 말했다.

「대왕께서 어느 날 아침 초나라의 도망병 한 사람을 얻더니 그의 옛날 초국에서의 지위가 높고 낮음도 따져보지도 않고, 곧바로 등용하여 대왕의 수레 옆에 태우더니, 적장 출신으로 하여금 우리 한나라 장군들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시켰으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란 말인가?」

한왕은 그 소문을 들었으나 오히려 진평을 더욱 총애했다. 이어서 진평은 항우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한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팽성(彭城)에 같이 들어갔으나, 초왕 항우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패했다. 한왕이 패잔병을 수습하며 서쪽으로 퇴각하여 형양(滎陽)에 이르자 진평을 아장(亞將)에 임명하고 한왕(韓王) 신(信)에게 속하게 하여 광무(廣武)에 주둔하도록 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 관영(灌嬰)17) 등이 함께 한왕을 찾아와 진평을 비난했다.

「진평이 비록 미장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관에 매다는 아름다운 옥구슬에 불과하여 그 심성은 아마도 비어있을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진평이 집에 있을 때 그의 형수와 사통했다고 했고, 위왕을 섬길 때는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그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하여 초나라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평은 다시 초왕과 뜻을 함께 하지 못하고 결국은 도망하여 대왕에게 달려와 항복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그를 매우 중용하여 높은 관직에 임명하고 호군(護軍)의 막중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진평이 장수들로부터 돈을 거두면서 그에게 많은 돈을 바친 자는 좋은 보직을 주고, 적게 바치는 자는 나쁜 자리를 주고 있습니다. 진평은 이와 같이 반복무상한 간신배에 불과한 작자입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한왕이 진평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이 들어 원래 진평을 천거했던 위무지(魏無知)를 불러 책망했다. 위무지가 진평을 위해 변호했다.

「제가 진평을 천거한 것은 그의 재능이었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저에게 그의 품행을 묻고 계십니다. 지금 고지식하며 융통성 없이 사는 사람이나, 효행을 행하며 품행이 방정한 사람은 군사를 이끌고 싸워 승부를 결하는 일에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들을 한가롭게 쓰실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형세는 한과 초 두 나라가 대치하고 있어, 신은 계책을 내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천거했을 뿐이니 오로지 진평이 내는 계책이 나라에 정말로 이득이 되는지를 살피십시오. 절대 진평에 대하여 그의 형수와 사통을 했는지, 혹은 진평이 장수들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는지와 같은 지엽적인 문제로 그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한왕이 진평을 불러 직접 꾸짖었다.

「선생은 위왕을 섬기다가 그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 하여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들어가 초왕을 섬겼소. 다시 오늘 초나라를 떠나 달려와 나를 섬기고 있소. 원래 신의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여러 마음을 품고 있소?」

「신이 위왕을 섬겼으나 위왕은 신이 낸 계책을 쓸 수 없었습니다. 고로 신은 위왕을 떠나 항왕에게 갔습니다. 다른 사람을 절대 믿지 못한 항왕이 오로지 총애하는 사람들은 모두 항씨 종족들이거나 아니면 그의 처가 식구들이라, 설사 그가 재능이 특출한 인재를 얻었다 해도 결국은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신은 항왕의 곁을 떠나서 대왕께서 능히 사람을 잘 쓰신다고 해서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이 올 때 맨몸이었던 관계로 금품을 제장들로부터 받지 않으면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습니다. 이에 신의 계책 중에 쓸 만한 것이 있다면 대왕께서 채용해 주시고, 쓸 만한 것이 없다면 여러 장수들로부터 받은 금품이 모두 여기 있으니 청컨대 잘 봉하여 나라의 부고를 관리하는 관리에게 보내주시고 저로 하여금 사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한왕은 진평에게 사죄하고 후한 상을 내렸다. 한왕은 진평을 호군중위에 정식으로 임명하고 한나라의 모든 장수들을 감시하게 했다. 한왕의 모든 장수들은 이에 대해 감히 재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초나라가 한나라 진영에 대해 맹공을 가하며 한군의 용도(甬道)18)를 끊고 한왕이 머물고 있던 형양성을 포위했다. 그런 상태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한왕은 자기에게 불리한 형세에 대해 우려를 한 나머지 형양성 이서 지역을 항우에게 할양하고 강화를 맺을려고 했다. 그러나 한왕의 제안을 항우가 거부했기 때문에 강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왕이 진평을 향해 말했다.

「천하가 이와 같이 나뉘어 분란이 끊임없는데, 언제나 안정될 것 같소?」

「항왕이란 인물은 겸손한 성품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청렴한 절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의를 갖춘 많은 인사들이 찾아와 몸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할 때가 되면 항왕은 작위를 내리거나 식읍을 봉하는데 매우 인색하여 선비들은 이로 인해서 달려와 몸을 맡기기를 꺼려합니다. 반면에 대왕께서는 오만무례하고 예의가 없으시어, 청렴하고 절조가 있는 선비들이 찾아와 몸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능히 작위에 식읍을 아까워하지 않고 버릴 줄 알아 기개도 없이 둥글둥글한 성격에 이익을 탐하여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많이 달려와 대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에 만일 대왕께서 쌍방의 단점을 버리고, 그 장점만을 취한다면 폐하께서 한 번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제 멋대로 선비들을 모욕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청렴하고 절개있는 선비들이 모여들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초군 진영에는 어지러워질 요인이 있으니, 범아부(范亞父), 종리매(鍾離昧), 용저(龍且), 주은(周殷) 등과 같은 강직한 신하들은 불과 몇 명에 불과합니다. 대왕께서 만일 수 만 금의 황금을 기꺼이 내어서 반간계를 사용하여 초나라의 군신간을 이간시켜 항우와 그 신하들 사이에 의심하는 마음을 들게 한다면, 항왕이라는 위인은 남을 시기하는 성격에 의심하는 마음이 많으니 아마도 그 신하들을 비방하는 말을 듣게 될 것이며, 그리된다면 그들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 필시 서로가 싸워 죽일 것입니다. 한군은 그 기회를 틈타 군대를 진격시켜 그들을 공격한다면 초군을 틀림없이 붕궤(崩潰)시킬 수 있습니다.」

진평의 계책을 들은 한왕은 황금 4만 근19)을 진평에게 내주어, 그가 원하는 일에는 무엇이든지 임의대로 사용하도록 하고 그 사용처와 지출 내역에 대해서는 하나도 묻지 않았다.

진평이 한왕으로부터 받은 많은 황금을 사용하여 첩자를 초군 진영으로 보내 이간활동을 시켰다. 첩자들은 초나라의 여러 장수들에게 종리매(鍾離昧) 등의 장군들이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결국은 땅을 떼어 내 제후왕으로 분봉하지 않아 한나라에 투항하여 항씨들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제후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항우가 과연 종리매 등의 장군들을 의심하여 그 일을 정탐하기 위해 사자를 한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한왕이 태뢰(太牢)의 음식으로 풍성한 잔치상을 준비하도록 시켰다가, 이윽고 항우의 사자가 들어오자 거짓으로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나는 아부가 보낸 사자인 줄 알았더니, 항왕의 사자였구만!」

한왕은 말을 마치고 항우의 사자로부터 인사도 받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화려하게 준비된 잔치상을 내 가더니 푸성귀만으로 만든 형편없는 음식을 내와 초나라 사자를 접대했다. 초나라의 사자가 돌아가 항우에게 그대로 보고하자 과연 항우는 범아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때 범아부는 한왕이 농성하고 있던 형양성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일거에 한군을 격파하고 한왕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범아부를 의심한 항우는 그 계책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한 범아부는 화를 내며 말했다.

「천하의 정세는 이제 이미 정해져, 대왕 스스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컨대 사직을 허락해 주시면 해골이나마 고향에 묻겠습니다.」

항우의 허락을 받은 범아부는 초군 진영을 나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팽성에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진평은 야음을 틈타 2천 명의 부녀자들에게 갑옷을 입혀 동문으로 나가게 해서 초군의 시선을 돌리고 자기와 한왕은 서문을 통해 형양성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한왕과 진평은 관중으로 들어가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동쪽으로 나왔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202년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파하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고 사자를 한왕에게 보내 그 일을 고했다. 한왕이 대노하여 한신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징량과 함께 진평이 한왕의 발꿈치를 슬며시 밟아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이에 한왕도 즉시 깨닫고, 제나라 사자를 후히 대접하고 장량(張良)을 사자로 보내 정식으로 한신을 제왕으로 세웠다. 한왕은 진평의 고향 호유향(戶牖鄕)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이윽고 한왕은 진평의 계책을 써서 결국은 초나라를 멸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호군중위(護軍中尉)의 직을 수행했던 진평은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연왕(燕王) 장도(臧荼)의 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어떤 사람이 초왕 한신이 모반을 하려한다고 고변했다. 고조가 여러 장수들을 모아 그 대책을 물었다. 제장들이 대답했다.

「재빨리 군사를 일으켜 그 놈을 잡아 흙구덩이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고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더니 진평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진평이 사양하며 고조에게 되물었다.

「제장들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고조가 제장들의 의견을 전하자 진평이 말했다.

「한신이 모반한다고 올린 상서의 내용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까?」

「아직 없소.」

「그렇다면 한신은 자기 자신이 모반죄로 고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직 모르고 있소.」

「폐하의 정예군사들은 한신이 거느린 초나라 군사들에 비해 어떠합니까?」

「한신의 군사들을 따를 수 없소.」

「그렇다면 용병술은 폐하가 한신에 비해 어떻다고 보십니까?」

「내가 그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오.」

「지금 페하의 군사들은 한신의 초병들보다 정예하지 못하고, 용병술도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 상황 하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를 공격한다면 그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싸움에 임하도록 재촉하는 일이 되니, 이는 실로 폐하로서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해야 하겠소?」

「옛날부터 천자가 순수(巡狩)를 행할 때는 제후들이 나와 영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방에 운몽(雲夢)이라는 호수가 있는데, 폐하께서는 일단 도성을 나가 거짓으로 운몽에 사냥하러 간다하고 제후들을 진(陳) 땅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진(陳) 땅은 초나라의 서쪽 변경이라 천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놀이를 나가 사냥을 한다고 하면, 그 정황으로 보아 한신은 필시 의심하지 않고 그곳으로 나와 폐하를 알현할 것입니다. 일단 한신이 폐하를 알현하러 오기만 하면, 그는 사로잡을 수 있으니, 이것은 한 사람의 장사 힘만으로도 일을 이룰 수 있는 일입니다.」

고조가 진평의 계략을 받아들여 ‘내가 장차 남쪽의 운몽으로 놀이를 나가려하노라!’라는 조서를 써서 사자에게 주어 제후들에게 보냈다. 황제가 즉시 차비를 끝내고 길을 떠나 그 행렬이 미처 진 땅에 이르기도 전에 초왕 한신이 과연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도중에 기다리고 있었다. 무사들을 미리 준비해서 대동하고 있던 황제가 한신을 보자 즉시 그를 붙잡아 포박하도록 한 다음 자기의 뒤의 부거(副車)에 싣도록 했다. 한신이 말했다.

「천하가 이미 안정이 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로다!」

고조가 한신을 향해 말했다.

「너는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말라! 너는 분명히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음이다.」

무사들이 한신을 붙잡아 두 손을 뒤로 교차하여 묶었다. 고조가 행진을 계속해서 진(陳) 땅으로 들어가 제후들의 조현을 받고 이어서 초나라 땅을 평정했다. 다시 낙양으로 돌아온 고조는 한신을 사면하고 그 작위를 회음후로 깎고, 다시 공신들에게는 부절들을 쪼개어 그 봉지를 정해주었다.

이어서 진평에게도 부절을 나누어주며 호유후(戶牖侯)에 봉해 세세손손 그 작위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진평이 사양하며 고조에게 말했다.

「이것은 신의 공이 아닙니다.」

「내가 공의 계책을 써서 싸움에서 승리하여 적을 무찔렀소. 이것이 공의 공적이 아니라면 누구의 공적이란 말이오.」

「신을 알고 천거해 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제가 어찌 이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이야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은 사람이라 할 수 있소.」

고조가 다시 위무지를 불러 상을 내렸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200년, 진평은 호군중위의 직책으로 대(代) 땅에서 반기를 든 한왕(韓王) 신(信)의 란을 평정하기 위해 고조를 따라 종군했다. 한나라의 토벌군이 예정에도 없이 갑자기 그 행군로를 바꿔 평성(平城)20)으로 들어갔다. 팽성에서 흉노에게 포위된 한군은 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고조가 진평의 계책을 따라 사람을 흉노왕 선우(單于)의 비(妃) 연씨(閼氏)에게 보내 그녀의 도움을 얻어 흉노의 포위를 풀고 평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진평은 기묘한 계책을 여러 번 내었으나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내용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고조가 남쪽으로 출행나가 곡역(曲逆)21)을 지나가다가 성루에 올라 그 현성의 건물이 장대한 모습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 현은 참으로 크고 넓구나! 내가 천하를 편력했지만 이와 같이 큰 고을은 낙양(洛陽)과 여기뿐이라!」

고조가 고개를 돌려 곁에 있던 어사(御史)에게 물었다.

「이 고을의 호구는 얼마나 되는가?」

「원래 진나라 초기에는 삼만 호가 넘었으나 매 년 전란을 당해 대부분이 도망가 숨어버리고 지금은 5천 호 남짓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조는 어사에게 명하여 진평을 곡역후(曲逆侯)로 바꾸어 봉하여 현에서 걷어 들이는 부세를 받아쓰게 하고 그 전의 봉지였던 호유향(戶牖鄕)은 취소시켰다.

그후에도 진평은 호군중위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진희(秦豨)와 경포(黥布)의 란을 토벌하는 전투에 종군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모두 6번의 기계를 내어 매 번마다 그 공으로 봉읍이 증가되어 모두 6개의 봉지를 더 받았다. 진평이 제안한 기계는 모두 비밀스러운 일이라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조가 경포의 란은 평정하고 돌아오던 중에 그때 입은 상처가 덧나 행군 속도를 천천히 해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연왕 노관(盧綰)이 반하자 고조는 번쾌를 상국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번쾌가 출전하고 나자 어떤 사람이 고조에게 그를 비난하고 헐뜯었다. 고조가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번쾌란 놈이 내가 병이 중하는 것을 알고, 나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더니 진평의 계책을 따라 강후 주발을 불러 침상 밑에서 조서를 받들도록 하며 말했다.

「진평은 즉시 역참에 있는 거마를 이용하여 달려가 조서를 전하여 번쾌가 이끄는 군사들을 거두어 주발에게 주고 번쾌는 참수형에 처해 그 목을 가지고 돌아오시오.」

두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역참의 거마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 가다가 번쾌가 주둔하고 있던 병영에 미처 당도하기 전에 가던 길을 멈추고 노변에서 서로 상의했다. 진평이 주발에게 말했다.

「번쾌는 황제의 오랜 친구일 뿐 아니라,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큰공을 세운 공신이오. 또한 그는 여후(呂后)의 여동생 여수(呂嬃)의 남편이기도 해서 황제와는 친척이라 매우 귀한 신분에 있소. 황제가 지금 일시적으로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지만, 후에 아마도 후회하게 되면 그 죄가 우리들에게 떨어질 것이오. 차라리 우리가 그를 붙잡아 함거에 태워서 도성으로 데려가 황제가 직접 처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두 사람은 토벌군 군영으로 들어가지 않고 흙을 쌓아 단을 만든 다음 부절을 이용하여 번쾌를 소환했다. 번쾌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즉시 스스로 결박을 받고 일어나 함거에 올랐다. 진평은 역참을 통해 번쾌를 장안으로 호송하게 하고 강후 주발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번쾌의 직무를 대신하도록 했다. 강후 주발은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 땅에서 반기를 든 각 현을 평정했다.

진평이 임무를 완수하고 장안으로 돌아오던 중에 고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진평은 여후가 번쾌의 부인 여수의 참언을 믿고 노할까 두려워하여 역참의 거마를 징발하여 전속력으로 번쾌의 일행보다 앞서 장안으로 돌아오다가, 로상에서 진평(陳平)과 관영(灌嬰)을 형양(滎陽)의 수장으로 임명한다는 새 황제의 명을 지니고 달려오던 사자를 만났다. 진평이 조명을 받든 다음, 곧바로 수레를 몰아 궁정으로 들어가 고조의 시신을 앞에 두고 매우 애절하게 통곡하고 있던 여후를 배알하고 자기가 그 동안 고조의 명을 받들어 행했던 번쾌에 관한 일의 전말을 모두 고했다. 여후가 진평의 처지를 가엽게 여기며 말했다.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만 물러가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

진평은 자기가 물러난 후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참소할 것을 두려워하여 궁중에 머물며 지낼 수 있는 숙위(宿衛)의 직을 간곡히 청했다. 여후는 진평을 낭중령(郎中令)22)에 임명하면서 말했다.

「새 황제에게 가르침을 주어 잘 보좌하도록 하시오.」

그래서 진평에 대한 여수의 참소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윽고 번쾌가 함거를 타고 장안에 이르자 여후는 번쾌의 죄를 사면하고 옛날의 작위와 봉읍을 모두 돌려주었다.

효혜제(孝惠帝) 6년 기원전 189년, 상국 조참(曺參)이 세상을 뜨자 안국후(安國侯) 왕릉(王陵)을 우승상에 진평을 좌승상으로 삼았다.

왕릉은 원래 패현 사람으로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그는 패현의 협객 출신이었다. 그래서 고조는 왕릉을 마치 자기 형님 모시듯이 받들었었다. 호신(豪紳) 왕릉은 문화적인 소양이 부족해 행동이 거칠었고, 감정에 치우쳐 일을 처리했고, 자기의 생각을 직선적으로 표현했다. 고조가 패현에서 몸을 일으켜 거병을 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함양에 이르렀을 때 왕릉은 개인적으로 자기를 따르던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남양(南陽)에 주둔하면서 선뜻 패공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후에 한왕이 한중에서 나와 항우를 공격할 때, 왕릉은 그때서야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진영에 합류했다. 항우가 왈릉의 모친을 붙잡아 군영에 두고 있다가, 왕릉이 보낸 사자가 오자 항우는 왕릉의 모친으로 하여금 조당의 동쪽에 상석에 좌정시켜 사자에게 보여 왕릉의 항복을 유도하려고 했다. 왕릉의 모친이 아무도 몰래 왕릉의 사자에게 사람을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이 늙은이를 위해 왕릉에게 한왕을 정성껏 모시라는 나의 말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한왕은 장자(長者)라 이 늙은 어미로 인해 절대 두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전해주시고 첩은 죽음으로써 당신을 전송하리라!」

항우가 노하여 왕릉의 모친을 가마솥에 삶도록 했다. 왕릉은 결국 한왕에게 몸을 귀의하여 천하를 평정했다. 원래 고조와 원수진 일이 있었던 옹치(雍齒)와 사이가 좋았던 왕릉은 그 역시 원래는 고조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게 봉지를 받아 안국후(安國侯)가 될 수 있었다.

안국후가 우승상이 되어 2년이 되던 해에 효혜제가 죽었다. 여태후가 여씨들을 제후왕에게 봉해도 한나라 법도에 어긋나는 점이 없는지 왕릉에게 물었다. 왕릉이 그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후가 진평에 다시 묻자 진평은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여태후가 노하여 왕릉을 황제의 태부로 자리를 옮겨 겉으로는 승진시키는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는 국정에서 배제시키고 말았다. 왕릉이 노하여 병이 들었다고 고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집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며 조회에 나오지 않다가 결국은 7년만에 죽었다.

왕릉을 우승상에서 면직시킨 여태후는 진평을 우승상으로 옮기고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좌승상은 그 정무를 처리할 장소가 없어 항상 궁중에 머물며 정사를 돌봤다.

심이기 역시 패현 사람으로 한왕이 팽성의 서쪽에서 항우의 급습을 받고 대패하여 달아날 때 항우가 사람을 보내 패현에 있던 고조의 부친과 여태후를 인질로 잡아가 자기의 군영에 두었었다. 심이기는 그때 고조 집안의 가신 신분으로 여후를 곁에서 받들었다. 후에 한왕이 항우를 공격할 때 종군하여 그 공으로 제후에 봉해지고 여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이윽고 좌승상에 오른 심이기가 궁중에 머물며 정사를 처리하자 모든 관리들은 그를 경유해서 정사를 처리했다.

여수는 항상 옛날 진평이 고조에게 계책을 내어 번쾌를 체포하라고 했던 일로 인해 원함을 품고 있다가 여후에게 여러 번 참소하곤 했다.

「진평이 승상이 되더니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좋은 술이나 마시며 부녀자들과 희롱하며 날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진평이 그 소문을 돋고 부녀들을 곁에 끼고 술을 더욱 많이 마셨다. 여태후가 듣고 속으로 웃었다. 여수를 불러 앉혀 놓은 여태후가 진평을 향해 말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하던데 나는 다만 경이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것만을 볼 것이니, 앞으로는 여수의 말을 개의치마시오.」

여태후가 여씨 종족들을 제후왕으로 봉하려고 하자, 진평은 겉으로 그 일에 찬동하는 척했었다. 이윽고 여태후가 죽기를 기다려, 진평은 태위 주발과 모의하여 여씨 종족들을 모두 멸하고 효문제(孝文帝)를 옹립하여 제위에 올렸다. 이 일은 진평이 주동하여 행했다. 심이기는 좌승상에서 면직되었다.

새로 즉위한 효문제는,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출동하여 여씨 종족들을 멸족시킨 주발의 공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이에 진평은 우승상의 높은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병을 핑계삼아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자기가 즉위하자마자 물러나겠다고 한 진평을 이상하게 생각한 효문제는 진평의 집에 들려 그에게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진평이 대답했다.

「고조께서 살아 계실 때에 주발은 세운 공로는 이 진평이보다 높지 않았었습니다. 이윽고 여씨 종족들을 멸족시킬 때는 주발이 세운 공이 이 진평보다 높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승상의 자리를 주발에게 양보하기 위해서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효문제는 강후 주발을 우승상에 임명하여 그의 직위를 신하들 중 첫 번째에 두고 진평은 좌승상에 임명하여 두 번째에 두었다. 이어서 효문제는 진평에게 천금의 황금을 상으로 하사하고 3천 호의 식읍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효문제는 이윽고 국가 대사를 처결하는데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효문제가 조회에서 군신들과 조회를 행하다가 우승상 주발에게 물었다.

「온 나라를 통틀어 일 년 동안 옥사를 판결하는 소송은 몇 건이나 됩니까?」

주발이 죄를 청하며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다시 효문제가 물었다.

「전국을 통틀어 일 년 동안 국가 재정으로 걷어들이고 지출하는 양식과 돈은 얼마나 됩니까?」

주발이 다시 모르겠다고 대답하며 흐르는 땀으로 등을 적시며 대답을 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스러워했다. 그래서 황제가 다시 진평을 향해 묻자 그가 대답했다.

「일을 맡아 하는 관리에게 물어보시면 될 것입니다.」

「어떤 관리를 말하는가?」

「폐하께서 옥사에 관한 일을 알고 싶으시면 정위(廷尉)23)를 불러 물으시고, 식량과 세금의 수입과 지출을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治粟內史)24)에게 물으십시오.」

「모든 일에는 각기 그 주관하는 자가 있다면, 그렇다면 경이 주관하는 일은 무엇이오?」

진평이 사죄의 말을 올리며 말했다.

「참으로 황공합니다. 페하께서는 신의 재능과 지혜가 저열하다는 것을 모르시어 저 같은 사람을 재상의 자리에 억지로 임명하셨습니다. 재상이란 직위는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고 음양을 다스려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천지 만물의 생육을 제 때에 자라게 하고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와 제후들을 진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백성들로 하여금 황실에 의지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고, 관리들을 감독하여 각기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게 하는 것입니다.」25)

효문제가 진평을 말을 매우 훌륭하다고 칭송했다. 우승상 주발이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며 황제의 앞에서 물러난 후에 진평에게 원망의 말을 하며 책했다.

「대감만 혼자 알고 어찌하여 평소에 나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소?

진평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대감은 나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몰랐단 말이오? 그러나 황제께서 만일 장안의 도적 수를 물으셨다면 억지로라도 그 숫자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겠소?」

그래서 주발은 자기의 능력은 진평에 훨씬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주발은 병을 칭하고 우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평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승상은 한 명이 되었다.

효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진평이 죽었다. 시호를 헌후(獻侯)라 하고 그의 아들 공후(共侯) 진매(陳買)가 진평의 작위를 이었다. 공후가 2년 만에 죽고 그을 아들 간후(簡侯) 진회(陳恢)가 그 후작을 이었다. 간후가 23년 만에 죽고 그 아들 진하(陳何)가 이었다가 23년만에 남의 아내를 강탈한 죄에 연좌되어 기시(棄市)의 형을 받고 그 봉읍은 폐지되었다.

진평이 일찍이 말했다.

「나는 원래 음모를 많이 꾸몄으나, 이것은 도가에서 금하고 있는 일이라! 나의 후손들은 아마도 이 일로 인해 나의 후작은 폐지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나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는 내가 꾸민 음모로 입게 될 재앙일 것이다.」

훗날 그의 증손 진장(陳掌)이 위씨(衛氏)와 인척 관계를 맺어 그 힘으로 진씨의 가문을 일으켜 원래의 봉작을 이어 받으려고 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승상 진평은 젊었을 때 원래는 황제와 노장의 학설을 즐겨 배웠고, 그가 마을의 제사를 주제하여 도마 위의 고기를 썰어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이미 그의 포부는 원대했다. 이윽고 초와 위 두 지방을 오가며 안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고조에게 귀의하여 항상 기묘한 계책을 내어 분규로 인해 생긴 어려운 처지를 벗어나게 했으며, 나라의 걱정거리를 해결했다. 이윽고 여후 시대가 되어 나라에 여러 가지 변고가 많은 중에서 진평은 그 화를 피하고 마침내는 한나라의 사직을 안정시킴으로 해서 영예로운 이름을 지니고 최후를 맞이하고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되었으니 어찌 시작과 끝이 모두 훌륭하다고 할 수 없겠는가? 참으로 어느 누가 진평과 같은 지혜와 계략을 가지고 그와 같은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진승상평세가 끝>

주석

1)양무현(陽武縣)/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북서 쪽의 원양현(原陽縣) 경내의 고을이다.

2)호유(戶牖)/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동쪽의 란고현(蘭考縣) 경내에 있던 고을이다.

3) 무(畝)/ 춘추 때 1 무는 한국 평수로 약 60평이다. 진평의 집이 경작하고 있던 전답은 모두 1800평이라는 말이다.

4)고상리(庫上里)/

5)임제(臨濟)/ 지금의 하남성 개봉(開封) 구현(丘縣) 동.

6)태복(太僕)/ 춘추 때 시작되어 진한(秦漢)으로 이어진 고대 중국의 관직이름으로, 황제나 왕의 거마를 관장했다. 그 직위는 구경(九卿)에 속했다.

7)하상(河上)/ 지금의 황하 남안(南岸)의 제나라 땅을 가리킨다.

8)은왕(殷王)/ 원래 상나라의 도읍지였던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부근을 말한다. 항우의 장수였던 사마앙은 논공행상을 행할 때 그 봉지를 진나라 행정구역상 하내군(河內郡)으로 받았다. 하내군은 은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앙을 은왕이라고 칭한 것이다.

9)도위(都尉)/전국 때 처음으로 시작되어 진과 한나라가 따라서 설치한 관직으로 고위 무장 밑의 중급 무관이다. 그 직위는 교위(校尉) 보다 낮았으며 관명은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예를 들면 호군도위, 부마도위, 강노두위 등과 호칭되었다. 한나라 때의 봉록은 2천 석이었다.

10)수무(修武)/ 그때 한왕 유방은 삼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와 은왕 사마앙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남하하다가 그 군사들과 함께 수무(修武)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가 기원전 205년 3월의 일이었다. 고조본기「 3월 한왕이 하내(河內)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을 사로잡은 후에 그 땅에 하내군을 설치했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 수무에 머물다가 다시 하수의 북쪽으로 나아가 평음진(平陰津)에서 하수(河水)를 건너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

11)중연(中涓)/ 고대 중국의 왕을 곁에서 모시던 시종관의 하나로 궁중의 청결과 위생을 담당했다.

12)석분(石奮)/ 석분의 5부자는 모두 한왕을 섬겼다. 5부자의 녹봉이 각각 2천 석이었음으로 합해서 만석 군이라 불리웠다.

13)원문은 알(謁)이다. 알은 이름첩으로 그 위에 성명, 본적 및 본관, 관작 및 중요한 사항을 적은 다음 왕이나 고위관리 등이 해당되는 사람들을 접견할 때 참고했다.

14)참승(參乘)/ 참승(驂乘)이라고도 한다. 고대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그 중앙에는 말을 모는 어자(御者)가, 어자의 오른 쪽에는 심부름하는 시종이나 호위를 하는 사람이 타고 왼쪽에는 주인이나 장군이 탔다. 병거의 경우는 차우(車右)라 했고 수레의 경우는 참승이라 했다.

15)호군(護軍)/ 군대 내 여러 장군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직위로써 지금으로 말하면 보안사령관에 해당한다.

16)관영(灌嬰)/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6년에 죽었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 였던 수양(睢陽) 출신으로 처음에는 비단장수였다가 한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항우를 격파하는데 공을 세워 영음후(穎陰侯)에 봉해졌다. 고조가 죽고 여씨들이 발호하자 진평, 주발 등과 함께 평정하고 한왕조를 안정시킴으로써 태위(太尉)가 되었고, 후에 승상(丞相)의 자리에 올랐다.

17)용도(甬道)/ 양쪽에 담으로 쌓은 길을 말한다.

18)황금 4만근/ 전한 때의 한 근은 250g에 해당했음으로 황금 4만 근은 10키로에 해당한다. 그리고 황금 1근은 만전에 해당했고 진한교체기 때 미곡 한 가마니의 가격은 약 50전 좌우였으니 황금 1근은 미곡 200가마니, 만근은 200만 가마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를 말한다.

20)곡역(曲逆)/ 지금의 하북성 완현(完縣) 동남에 있었던 한나라가 설치한 현이름이다.

21)랑중령(郞中令)/ 진한 때 9경 중의 하나로 황제를 위한 시종, 경호원, 고문을 직은 맡은 관리들의 수장이다.

22)정위(廷尉)/ 진한 때 옥사를 관장하던 9경 중의 하나다. 진나라가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한나라가 따랐다.

23)치속내사(治粟內史)/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던 관리의 장으로 9경 중의 하나다.

24)宰相者,上佐天子理陰陽,順四時,下育萬物之宜,外鎮撫四夷諸侯,內親附百姓,使卿大夫各得任其職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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