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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공동논시서(與李空同論詩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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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0회 작성일 19-05-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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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이공동논시서(與李空同論詩書)

 

하경명은 하남(河南) 신(新陽) 사하구(溮河區) 사람이다. 자는 중묵(仲默)이고, 호는 백파(白坡) 또는 대복산인(大復山人)이다.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 15, 1502년에 진사(進士) 급제를 하였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제수를 받았다.

여이공동논시서이공동에게 보낸 시를 논한 글이라는 뜻이다. 이 글은 하대복선생집(何大復先生集)에 실려 있다. 여기에는 부() 3, () 26, () 9, 전지(傳志), 행장(行狀) 등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왕정상(王廷相), 강해(康海), 당룡(唐龍), 왕세정(王世貞)이 각각 서문을 썼다. 정가지간(正嘉之间, 1257~1259) 즈음에 하경명과 이몽양(李夢陽)이 복고주의 문학을 제창하면서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참고로, 이몽양은 자()가 우린(于鱗)이고 역성(歷城, 지금의 산둥[山東] 지난[齊南]) 사람이다. 명사(明史문원전(文苑傳)이몽양의 창작 구상력은 확실하게 복고주의자임을 자처하였다. 재상 이몽양이 문단을 주도하게 되자,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이몽양은 유독 당시 문풍이 허약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문장은 반드시 진()과 한() 대의 것으로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盛唐) 대의 것으로 해야 한다고 주창하였으니, 이와 같지 않다면 올바른 도리가 아니다[夢陽才思, 卓然以復古自命. 宰相李夢陽主文炳, 天下翕然宗之, 夢陽獨譏其萎弱, 倡言文必秦漢, 詩必盛唐, 非是者弗道.].’라고 할 만큼, 이몽양의 복고주의적인 문학 취지를 알 수 있다.

하경명은 정치적으로 이몽양과 더불어 당시 탐관오리나 사악한 환관들의 비리에 맞서 싸우는 대범함을 보였다. 정덕연간(正德年間, 1506~1521) 초에 환관 유근(劉瑾)이 권력을 농단하는 것을 문제 삼자 파직당하여 귀향했다. 유근이 처형되고 나서야 원래 관직으로 복직하였다. 관직은 섬서(陝西)의 제학부사(提學副使)까지 지냈다.

당시 현실적 감각을 중시하고 개성적인 시를 짓는 분위기 속에서 문장은 진·한의 것을 따르고, 시는 성당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으며, 당시 대각체(臺閣體, 명나라 영락(永樂)에서 성화(成化) 연간에 출현한 시체로서 주로 당시 내각(內閣)과 한림원(翰林院)의 문신들이 태평성대를 칭송하던 창작 풍토를 말한다)를 반대하여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 이몽양과 더불어서 하리(何李)로 불리며, 당시 문단을 이끌었던 전칠자(前七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하대복선생집(何大復先生集)38권과 하자잡언(何子雜言)1, 대복론(大復論)1, 옹대기(雍大記), 사잠잡언(四箴雜言)등이 있다.

당시 복고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하던 전칠자의 대표적 두 인물 하경명과 이몽양, 이들 칠자(七子)의 문학 이념은 앞서 언급했듯이 문장은 반드시 진과 한 대의 것으로 하고, 시는 반드시 성당(현종(玄宗) 개원 7(713)으로부터 숙종(肅宗) 보응(寶應) 말년(末年, 762)에 이르는 기간으로 당시(唐詩)의 전성기) 대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같이한 하경명과 이몽양은 당시 문학 풍토를 일시에 바꾸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이 옛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공통된 주장이었지만, 옛것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의견을 약간 달리하였다. 하경명은 정신을 깨달아 얻다[領會精神], 자취는 모방하지 않는다[不倣形迹]’라고 하여서 옛글이나 시에 나오는 어휘나 문자를 그대로 모방하지 말고 그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몽양은 모범적인 옛것을 잘 헤아리고, 오래된 모형을 잘 짜서 세밀한 부분까지도 지킨다[刻意故範, 鑄形宿模, 而獨守尺寸.].’라고 하여서 옛것의 법도와 형식 방면에 모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주장하였다.

하경명의 경우는 법도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不可易之法].’라고 하여서 옛 법도를 폐기하지 않고, 다만 법도는 같더라도 어휘는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 내 보건대, , , 주공, 공자, 자사(子思), 맹자의 글이 모두 서로 본뜬 것이 아니면서 서로 세워주고 밝혀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덕이 날로 새로워지고 도가 넓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실로 성인과 성인이 법도를 주고받는 마음이다[法同則語不必同. 僕觀堯舜周孔子思, 孟氏之書, 皆不相沿襲, 而相發明, 是故德日新而道廣, 此實聖聖傳授之心也.].’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몽양이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요점이 옛 사람의 언어까지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하경명은 그렇게 되면 마치 소리와 색채의 말단만을 추구하는 것[求之聲色之末]’이며, ‘마치 어린아이가 사물에 의지해서는 걸을 수 있다가도 혼자서는 빠르게 걸으려 하면 곧 엎어지는 것[如小兒倚物能行, 獨趨顚仆.]’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이몽양이 옛것을 본받으려는 태도를 반대하였다. 하경명은 정신 방면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옛것을 배우되, 다만 그것이 입문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지 극단적으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경명은 불가(佛家)에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비유를 들어 뗏목을 타고 건너편에 도달하면 뗏목을 버리는 것이다[達岸則捨筏矣.].’라고 하였다. , 옛것을 배워서 자기 나름의 깨달음이 생기면 옛 사람의 법이 이미 진부해진 것이니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하경명 시론의 진수는 복고주의적 시론 주장을 견지하면서도 그 옛 정신만을 배울 것이며, 그 형식 방면의 어휘까지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전칠자의 대표 격이었던 이몽양이 옛것의 내용과 형식 두 방면을 철저히 배워야 한다고 했던 것에 비하여 하경명의 주장은 유연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경명 시론 주장의 예를 하나 들자면, 그의 의상론(意象論) 운용에 관한 논의이다. 의상(意象)에 대한 논의의 시작은 남조(南朝) () 대 유협(刘勰)문심조룡(文心雕龍)』 「신사(神思)편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유협은 의상이 예술적으로 창작하는 데 중요하다는 취지로 독창적인 장인은 의상을 잘 살펴서 창작을 운용한다[獨照之匠, 窥意象而運斤.].’라고 하였다. 이것은 창작 구상에서 반드시 외부 사물의 형상과 의취(意趣), 정감을 아우를 수 있어야 심미적 형상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하경명 역시 여이공동논시서에서 작가의 뜻과 사물이 잘 어우러지면 잘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작가의 뜻과 사물이 잘 어우러지지 않으면 잘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意象應曰合, 意象乖日離.].’라고 하였으니, 유협 이래로 의상이란 의()와 상()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의는 마음속에 내재한 추상적인 마음이고, 상이란 외부의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을 말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시가 이론에서는 경치에 마음을 기탁하거나[寓情于景]’, ‘경치로서 감정을 의탁하는[以景托情]’ 것이 일종의 정경교융(情景交融), 즉 작가 감정과 경치가 서로 어우러지는 예술적 기교라고 여겼다. 작가 감정은 외부 사물에 의거하여 드러나고, 경치는 시의 주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라는 논점이다.

문학사적 의의 측면에서, 이몽양과 함께 명대 대각체를 반대하고, 복고주의 문학을 주도하였던 하경명의 문학론은 당시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경명은 진한 대의 문장과 성당 대 시가가 전통적이며, 우수한 고대문학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古文) 읽기를 강조하였으며, 고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여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대각체 문풍을 반대하였고, 팔고문(八股文, 명청(明淸) 대에 과거시험의 답안용의 문체로서 형식적이고 내용이 없는 무미건조한 문장이나 작법이라는 의미)의 나쁜 영향을 일소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하경명의 복고주의 문학을 중시하는 태도는 당송(唐宋) 대 이래 발전한 새로운 문학 전통에 대한 거부이며, 옛것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받드는 폐단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창작에서도 오로지 모방 또는 표절이 능사라고 여기게 되어 이른바 골동품을 거듭 찍어내는 양상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런데 하경명은 그와 같은 복고주의에 빠져 있던 경향을 일정 정도 수정하였다. 여이공동논시서에서 이몽양에게 그대가 시를 쓰는 것은 유사한 사물을 미루어 극도로 변화하지 못하고, 그 끝단을 채 열지 못하여 옛것의 자취를 뭉개서 신비하고 성스러운 공을 세우고자 하지만, 다만 옛 자취를 풀어 헤쳐서 꾸민 것으로 옛것을 살짝 벗어나는 정도이니, 스스로 옛 틀 그 자체일 뿐입니다. 마치 아이가 물건에 의지해서 걸을 수 있게 된 듯하지만, 혼자서 걸으려면 자빠지는 것과 같습니다[公爲詩不推類極變, 開其未發, 泯其擬議之迹, 以成神聖之功, 徒叙其已陳, 修飾成文, 稍離舊本, 便自杌臼, 如小儿倚物能行, 獨趨顚仆.].’라고 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이몽양도 이몽양시집(李夢陽詩集)자서(自序)에서 자신의 시가 진실되지 못하다[余之詩非眞也.].’라고 하여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기도 하였다.


작품 속의 명문장

 

意象應曰合, 意象乖日離.

작가의 뜻과 사물이 잘 어우러지면 잘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작가의 뜻과 사물이 잘 어우러지지 않으면 잘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글귀는 마치 진() 대 육기(陸機)문부(文賦)에서 문학 창작에서 자연계의 사물[], 작가의 주관적인 의식이나 구상[], 언어문자와 같은 수사상 형식[]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야 좋은 창작이 된다고 했던 문학 창작론을 계승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法同則語不必同.

법도는 같더라도 어휘는 반드시 같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몽양이 옛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한 요점이 옛 사람의 언어까지도 본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라면, 하경명은 그렇게 되면 마치 소리와 색채의 말단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반대했다. 하경명은 정신 방면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옛것을 배우되, 다만 그것이 입문의 과정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지 글귀까지 본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네이버지식백과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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