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녀행(秦女行) -진씨녀를 노래하다. - > 북송

진녀행(秦女行) -진씨녀를 노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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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조회 149회 작성일 17-05-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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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녀행(秦女行)

 

증계리(曾季貍)

북송 말년 정강(靖康) 연간에 어떤 여인이 금나라 군인에게 붙잡혀 가다가 스스로 진학사(秦學士)의 딸이라고 말하고 도중에 시를 지어 눈 앞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건만, 말 위에서 나를 풀어줄 정이 있는 사람이 없구나![眼前有路可還鄉馬上無人容我情]”라고 했다. 시를 읽은 사람들이 함께 슬퍼했다. 젊은 시절 일찍이 그 일을 전해 듣고 기록하려고 했는데 수십 년이 흐르도록 행하지 못했다. 임진년(壬辰年) 9월에 채염(蔡炎)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읽다가 개연(慨然)히 마음 속에 감개가 있어서 그 일을 돌이켜 읊고 진녀행(秦女行)이라고 이름 지었다.

 

妾家家世居淮海(첩가가세거회해)

첩의 집은 대대로 회해에 살았고

 

郎罷聲名傳海內(랑파성명전해내)

부친의 명성은 해내에 높았답니다.

 

自從貶死古藤州(자종폄사고등주)

옛날 등주로 귀양가서 돌아가신 이래로

 

門戶凋零三十載(문호조영삼십재)

가문이 몰락한지 30년 되었습니다.


可憐生長深閨里(가린생장심규리)

슬프게도 깊은 규방에서 성장했으나

 

耳濡目染知文字(이유목염지문자)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아 문자를 깨우쳐


亦嘗強學謝娘詩(역상강학사랑시)

일찍이 사녀(謝女)의 시를 열심히 배웠지만

 

未敢女子稱博士(미감여자칭박사)

감히 여인으로써 박사라고 칭하지 않았답니다.


年長以來逢世亂(연장이래봉세란)

나이가 들자 난리를 만나

 

黃頭鮮卑來入漢(황두선비래입한)

노란 머리의 선비족들 한나라를 침입하니


妾身亦複墮兵間(첩신역복타병간)

첩의 몸도 역시 전화 사이에 떨어져

 

往事不堪回首看(왕사불감회수간)

지난 일을 돌아볼 수 없게 되었답니다.


飄然一身逐胡兒(표연일축호아)

그러다가 갑자기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被驅不異犬與雞(피추불이견여계)

개나 닭처럼 내몰림 당했답니다.


奔馳萬里向沙漠(분치만리향사막)

만리를 내달려 사막에 이르니

 

天長地久無還期(천장지구무환기)

망망한 하늘과 땅 사이에 돌아갈 기약이 없군요.


北風蕭蕭易水寒(북풍소소역수한)

부풍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雪花席地經燕山(설화석지경연산)

눈꽃으로 덮힌 연산을 지났습니다.


千杯虜酒安能醉(천배로주안능취)

천잔의 술잔인들 어찌 취할 수 있겠으며

 

一曲琵琶不忍彈(일곡비파불인탄)

한 곡의 비파도 어찌 탈 수 있었겠습니까?


吞聲飲恨從誰訴(탄성음한종수소)

또한 가슴 속의 곡성과 원한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偶然信口題詩句(우연신구제시구)

생각나는대로 시구를 지었는데


眼前有路可還鄉(안전유가환향)

눈앞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나 있건만

 

馬上無人容我去(마상무인용아거)

나를 풀어줄 말탄 사람은 없네요!”라고 했지요.


詩成吟罷只茫然(시성음파지망연)

시가 완성되어 읊조리는 소리는 다만 망연했을 뿐인데

 

豈意漢地能流傳(기의한지능유전)

어찌 제 노래가 한나라 땅에 전해질 줄 알았겠습니까?


當進情緒亦可有想(당진정서역가유상)

당시의 한나라 정서를 알 수 없었지만

 

至今聞者猶悲酸(지금문자유비산)

지금 사람 들어도 그저 슬픈 뿐입니다.


憶昔中郎有婦子(억석중랑유부자)

옛날 채중랑에게 딸이 있었는데

 

亦陷虜中垂一紀(역함로중수일기)

그녀 역시 오랑캐에 붙잡혀 가 12년을 보냈지요.


暮年不料逢阿瞞(모년불료봉아만)

말년에 뜻박에 아만을 만나

 

厚幣贖之歸故里(후패속지귀고리)

많은 재물로 대속되어 고향에 돌아왔지오.


惜哉此女不得如(석재차녀부득여)

애석하게도 이 첩은 그러지 못하고

 

終竟老死留穹廬(종경노사유궁려)

끝내 늙어 죽도록 궁려에 머물렀습니다.


空餘詩話傳淒惻(공여시화전처측)

공연이 시어로 슬픔을 전하지만

 

不減胡笳十八拍(불감호가시팔박)

호가십팔박의 슬픔보다 못하지 않답니다.

 

증계리(曾季貍)

생졸연대는 불상이며 자는 구보(裘父)이고 자호(自号)는 정재(艇斋). 지금의 강서성 남풍현(南丰县) 출신으로 증공(曾巩)의 동생 증재(曾宰)의 증손자다. 부친은 대리사(大理寺) 사직(司直)을 지낸 증회(曾晦). 일찍이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관리가 생각을 버리고 강서시파인 여본중(吕本中), 한구(韩驹)에게 사사했고 또 주희(朱熹)와 장식(张栻)과 교유를 맺어 서신을 자주 주고 받았다. 군주 장효상(张孝祥), 추밀사 유공(刘珙)이 조정에 천거했으나 증계리는 고사하여 응하지 않았다. 여본중은 그의 학문은 매우 깊이가 있다고 평했다. 소흥(绍兴) 연간 육유(陆游)와 서로 시를 지어 창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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