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吾(금오) -왕우칭 > 북송

金吾(금오) -왕우칭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조회 194회 작성일 17-08-03 14:03

본문

금오(金吾)

왕우칭(王禹偁)

순화(淳化) 3년은 서기 992년으로 송태종(宋太宗) 조광의(趙光儀) 재위 16년 째되는 해다. 이 해 5월 좌천우위상장군(左千牛圍上將軍) 조한(曹翰 : 924 – 992)이 69세의 나이로 죽었다. 상주(商州)에 폄적행활을 하고 있던 왕우칭이 듣고 평생 동안 악행만을 저질렀던 조한을 고발하는 시를 지었다. 조한은 백성들에 대해 저지른 만생에도 불구하고 복록으 ㄹ누릴 만큼 다 누리고 간 위인이었다. 왕우칭은 이 시에서 조한의 경우를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우고도 오히려 비참한 죽은 당한 서한의 무장 이광(李廣)이나, 전국시대 조나라의 명장 이목(李牧)과 대비시킴으로써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또한 세상에 대하여 큰 뜻을 지니고 있음에도 실의 속에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강개를 나타냈다. 똑 같이 송나라 황실을 받듲는 신하의 신분으로 대장군까지 지낸 상대방의 악행을 거리낌 없이 들추어내고 있는 그이 태도오부터 역사와 현실을 바로 보아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ㅇ리함과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겸지되어 있믕을 읽을 수 있ㄷ. 그가 스스로 “消息還依道, 生涯只在詩”라는 간단한 구절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밝혔으나 그는 결코 일개 나약한 시인은 아니였다. 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태도로 일관되는 듯 하다가도 적당한 기회를 만나게 되면, 그의 술에 절어있는 듯한 붓끝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강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모습을 바꾼다. 이때 세상의 어떠한 악행과 불합리도 그가 치켜든 칼날을 피해가리란 불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시인으로써의 왕우칭의 삶이었다.

金吾河朔人(금오하삭인)

집금오 조한은 하삭사람으로


事郡在賤列(사군재천열)

군에서 일할 때는 미관이었다.

攀附周世宗(반부주세종)

후주의 세종 시영(柴榮)에게 붙어서

龍飛起魚鱉(용비기어별)

비늘붙은 잡어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용이 되어 날았다.

委質向聖朝(위질향성조)

우리 송조에 인질을 바치고 귀의하여

積功取旄鉞(적공위모월)

공을 쌓아 군권을 장악해서 모월을 휘둘르며


所在肆貪殘(소재사탐잔)

제멋대로 탐욕스런 악행을 일삼았고


乘時恃勳伐(승시시훈벌)

시대의 흐름을 타고 세운 공훈을 뽐냈다.


皇家平金陵(황가평금릉)

황실에서 금릉 땅을 평정하자


九江聚遺孽(구강취유얼)

남은 잔적들은 구강으로 모여들었다.


彌年城乃陷(미년성내함)

한 해가 꼬박 걸러셔야 성을 겨우 함락시킬 수 있었는데


不使雞犬活(불사계견활)

닭과 개 따위는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고


老小數千人(노소수천인)

노인과 어린이 수 천 명이


一怒盡流血(일노진유혈)

그가 분노의 고함을 한 번 지르자 모두 피를 흘려야 했다.


三惑無不具(삼혹무불구)

주색과 재물을 탐하는 삼혹을 모두 갖추고


五福何嘗缺(오복하상결)

오복 중에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누렸고


晚年得執金(만년득집금)

만년에는 집금오까지 승진하여


富貴居朝闕(부귀거조궐)

부귀한 신분으로 조정에 오뚝섰다.


娛樂有清商(오락유청상)

즐기는 데에는 청상의 가락을 함께 했고


康強無白發(강강무백발)

건강한 몸으로 희어진 머리칼도 없었다.


享年六十九(향년육십구)

예순 아홉의 수를 누렸으니


固不爲夭折(고불위요절)

분면히 요절이라고 말할 없다.


考終北牖下(고종북유하)

북쪽 창 아래에서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떠나면서


手足全啟發(수족전계발)

손과 발으 온전해서 드러나게 했다.


子孫十數人(자손십수인)

십여 명의 자손이


解珮就衰絰(새패취최질)

관직을 물러나와 복상했다.


贈典頗優崇(증전파우숭)

조정에서 내린 관작은 제법 높아서


視朝爲之輟(시조위지철)

이로써 조정에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는 일이 멈추게 되었다.


哀榮既如是(애영기여시)

슬픔과 영예가 이와 같았으니


報應何足說(보응하족설)

인과응보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責簿李廣死(책부이광사)

이광장군은 죄를 묻는 장부 때문에 죽었고


賜劍武安滅(사검무안멸)

이목 장군은 하사한 검으로 목숨을 잃었다.


僥幸過古人(오행과고인)

조한의 행운은 두 장군을 넘어선 것이니


況無大功烈(항무대공열)

하물며 커다란 공적이 없었음에랴?


福善與禍淫(복선여화음)

선인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인에게는 화를 내린다는


斯言僅虛設(사언근허설)

그 말은 그저 헛될 뿐이고


籲嗟爲儒者(유차위유자)

아아! 글 읽는 유자가 되어


寒餓守名節(한아수명절)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명예와 절조를 지켜


五十朝大夫(오십조대부)

나이 오십에 조정의 대부가 되어


龍鍾頭似雪(용종두사설)

실의 속에 머리는 마치 눈이 내린 듯하다.


無故不殺羊(무고불상양)

까닭없이 양을 죽이지 말라는


禮文安可越(예문안가월)

예경의 가르침을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마는


何況賓祀間(하황빈사간)

빈객을 맞이하고 제사를 모시면서


貧苦無羊殺(빈고무양살)

가난하여 잡을 만한 양도 없음을 어찌하겠는가?




북송 순화(淳化) 3년 서기 992년 5월, 좌천후위상장군(左千牛圍上將軍) 조한(曹翰)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는 조한이 평생 동안 저지른 악행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조한은 백성들에 대하여 저지른 만행에도 불구하고 복록을 누릴 만큼 다 누리고 간 위인이었다. 왕우칭은 이 시에서 조한의 경우를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우고도 오히려 비참한 죽음을 당한 서한의 이광(李廣) 및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 이목(李牧)과 대비시킴으로써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울러 세상에 대하여 큰 뜻을 감추지 않고 똑 같이 송나라의 황실을 받으는 신하의 신분으로 대장군까지 지낸 상대방의 악행을 거리낌 없이 들추어내고 있는 그이 태도로부터 역사와 현실을 바로 보아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예리함과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가 겸비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 스스로 ‘消息還依道, 生涯只在詩’라는 간단한 말로 구정한 바 있는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나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태도로 일관되는 듯하다가도 적당한 기회를 마난게 되면, 그의 술에 절어있는 듯한 붓끝은 세상 어느 것보다도 강하고 날카로운 칼날로 모습을 바꾼다. 이때 세상의 어떠한 악행과 불합리도 그가 치켜든 칼날을 피해가기란 불가능했다. 이것이 바로 시인으로써의 왕우칭의 삶이었다.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